서적소개
기독교 초대교회 형성사
루돌프 불트만 / 이화여대출판문화원 / 1993.3.1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이자 성서학자인 루돌프 불트만이 삶의 정황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기독교를 역사 현상 속의 한 종교로 파악하고, 그 성립과정을 서술한 저작. 기독교가 어떻게 지나간 역사 현상들을 새로운 실존 이해의 가능성으로 기능할 수 있는가를 해석하고 동시에 이 가능성들을 현재의 실존 이해의 가능성으로 의식했는지를 살피고 있다.
○ 목차
머리말
I. 구약성서적 유산
1. 하나님과 세계
(1) 창조사상
(2) 하나님 인식
(3)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
2. 하나님과 민족
(1) 하나님의 계약
(2) 거룩한 민족
3. 하나님과 인간
(1) 인간학의 개요
(2) 선과 악
(3) 죄와 은혜
II. 유대교
1. 회당과 율법
(1) 유대교적 율법성
(2) 예수의 선포
2. 희망
(1) 민족적 우주론적 미래상
(2) 예수의 종말적 선포
3. 헬레니즘 유대교
III. 그리스적 유산
1. 그리스적 폴리스
(1) 폴리스의 본성과 토대
(2) 폴리스의 위기
2.학문과 세계관
(1) 소크라테스와 자연과학
(2) 플라톤과 관념론
IV. 헬레니즘
1. 스토아적 현인의 이상
2. 성신종교, 운명신앙과 점성학
3. 밀의 종교
4. 영지주의
V. 초대 기독교
1. 절충주의적 현상
2. 인간과, 시간에 대한 그의 관계
3. 세계 內에서의 인간의 상황
4. 구원(救援)
문헌소개
역자후기
○ 저자소개 : 루돌프 볼트만 (Rudolf Bultmannm, 1884 ~ 1976)
20세기 신학의 지도적 신학자이며 특히 신약학계의 석학인 R.불트만은 1884년 독일 비펠스테데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튀밍겐, 베를린, 마르부르크 등에서 수학했다.
1912년 신약학 교수 자격을 마르부르크에서 얻고 그곳에서 1921년부터 1951년까지 은퇴할 때까지 신약을 강의했다.
H.궁켈, 율리허, 하르낙 등에 사사하고 특히 W.헤르만에게서 큰 영향을 받고 M.하이데거의 실존 철학을 거쳤으며 고전 문헌 학자인 P.프리들랜더와 교류하여 문헌학에도 상당한 조예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어떤 의미에서 그와 쌍벽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 바르트와는 바르트가 편집인으로 있었던 “변증법적 신학”에 가담하면서 관련을 맺었다.
1921년에 발표된 “공관복음서 전승사”와 1938년의 “요한복음서”로 신약학자로서 주목을 받게 된 그는 신약의 세계상을 현대인들에게 이해시키려는 시도로서 신학계와 철학계의 찬반 양론의 논쟁을 일으켰다.
저서로 ‘예수'(1926), ‘신약성서의 신학'(3권, 1948∼1953), ‘공관복음 전승사’, ‘기독교 초대교회 형성사’ 등이 있다.
– 역자 : 허혁
191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감리교 신학대학 (학사), 독일 뮌스터대학 신학부 (Dr. Theol)를 졸업하였고,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옮긴책으로 ‘공관복음서 전승사’, ‘예수’, ‘기독교 초대교회 형성사’, 에레미아스의 ‘예수의 비유’, 보만의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 폰라트의 ‘구약성서신학(I·II·III)’, 에벨링의 ‘신앙의 본질’, 로핑크의 ‘당신은 성서를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융엘의 ‘바울과 예수’ 등이 있다.
○ 본서 요약
루돌프 불트만은 1884년 태어나 1976년 사망한, 독일의 신약학자로,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가르쳤고, 비신화화와 양식비평 작업으로 유명하다.
본서의 원제는 “das Urchristentum im Rahmen der antiken Religionen”으로 “고대 종교의 틀로본 초기 기독교”로 번역될 수 있으며, 종교사적 관점에서 고대 기독교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사상들을 다룬다.
구약성서, 포로기 이후 1세기까지의 유대교, 고대 그리스 사상, 헬레니즘, 그리고 초대기독교 그 자체를 각각 다룬다.
1부 구약성서적 유산
1. 하나님과 세계
– 창조사상
구약 사상에는 기원에 대한 물음이 없다. 이스라엘 민족은 역사 속에서 유일신론을 점점 발전시켰다. 즉 다신론적 택일신교적(henotheistisch) 사상에서 절대적인 야웨가 주가 되었다. 세계는 그러한 신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자연과학적 물음은 없다. 세계는 창조주의 작품이며 경탄의 대상이고 찬송의 원천이다. 창조 신앙은 신에게 모든 것을 맡김을 뜻한다. 그럼에도 동시에 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 창조는 육체성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뜻한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서술의 중심은 그리스인들처럼 정치가 아니며, 역사 진행에 대한 과학적 인식 등도 없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서술은 정치가를 위한 교육이 아닌 민족을 위한 설교이다.
– 하나님 인식
구약 사상에는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이유를 그리스적인 인식론적 추론(불가시성)에 의한 것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신성 때문에, 즉 인간은 신을 보면 죽기 때문으로 제시한다.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들음’이다. 하나님의 본질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중요시되며, 따라서 이스라엘 종교의 중요한 주제는 이론이 아닌 지혜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 경외이다. 이는 불안이나 공포가 아닌 자유와 해방, 즉 사랑을 (가능케 하기) 위한 것이다.
–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
하나님은 세계를 돌본다. 따라서 고난 그 자체보다는 의인의 고난이 구약 사상에서는 문제가 된다. 이같은 의인의 고난과 그와 연관된 하나님의 의라는 난제가 전도서와 욥기의 주요 주제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견고하며, 하나님의 복종은 더욱 철저하게 요구된다.
2. 하나님과 민족
– 하나님의 계약
이스라엘 민족은 야웨와 계약관계를 유지한다. 모든 축제는 이 계약을 가능케 한 과거 구속사로 재해석되며, 민족은 계약을 지킬 때 하나님의 신실성에 의존할 수 있다. 그 계약은 야웨 율법에 대한 복종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겪는 고난은 이 율법을 지키지 않음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이러한 괴로운 민족 경험은 결국 계약 개념을 현재에서 종말론으로 옮겨가게 만들었다.
– 거룩한 민족
유목민의 정착, 그리고 주변국들과의 정치 관계는 이스라엘 종교에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야웨를 왕으로 삼는다는 종교적 왕권과 사울이후 등장한 세속 왕권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그러나 다윗 왕권은 성공적이었고, 권위 대신 제도가 들어섰다. 예언자들의 항의는 체제 자체를 향했으나 이는 국가의 필연성을 무시한 처사이다. 포로 사건 이후에도 다시 사제를 중심으로 한 제도가 들어섰다. 신을 왕으로 삼는 민족 이념은 현실의 제도화 속에서 포기되고 종말론적이 되었다.
3. 하나님과 인간
– 인간학의 개요
구약의 인간은 ‘육’과 ‘영’으로 되어 있지만, 이원론이나 대립이 아니라, 영은 생명을 뜻했다. 그러나 그리스 사상과 달리 영도 죽음과 함께 소멸한다. “영혼 불멸 사상은 구약에는 없다.” 몸의 부활도 이란 종교에서부터 팔레스틴 유대교로 침투한 것이다. 그렇기에 죄인은 단명하고, 의인의 복된 삶은 장수이다. 구약은 그리스처럼 삶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미, 덕, 선, , 금욕, 신비, 이런 것들이 없다. 그저 살아있음이 중요하다.
– 선과 악
법과 도덕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하나님이 법과 의를 요구한다. 합리적 설명 내지는 윤리 체계는 없다. 요구된 것은 이웃에게 적절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제사 계명은 이런 연장에 있었다. 예언자들의 제사장 비판은 제사를 율법의 정신에 맞추지 않았음에 있다.
– 죄와 은혜
율법 불이행은 하나님에 대한 반항이며, 자신이 기준이 되겠다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뺏는 것이다. 야웨는 질투하는 신이므로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보다 적극적으로, 그리스적 사고와 달리 감사치 않음, 신에 대한 의심 그 자체도 오만과 교만이다. 죄는 속죄를 필요로 한다. 속죄는 신의 직접 형벌로 이루어질 수도 있으나 제사를 통해서 해결될 수도 있다. 실제로는 마술적 의미를 지닌 제사제도가 용서 사상으로 발전했다. 그렇기에 동시에 회개도 요구된 것이다. 그러나 단지 이스라엘은 현세만 알았기에, 이 세상에서의 행복이 용서의 전부였다. 그러나 포로기 경험은 그것을 종말론적 사상으로 바꾸었다.
2부 유대교
1. 회당과 율법
– 유대교적 율법성
페르시아의 포로(약 B.C. 350), 셀류키드 왕조(약 B.C. 200)를 거쳐 안티오쿠스 4세(B.C. 175-164) 기간 동안 유대교는 헬레니즘화를 무력으로 강요당했고, 이때 마카비 가문의 반란이 있었다. 이후 잠시 독립을 누렸으나 다시 폼페이우스의 예루살렘 입성(B.C. 63), 헤롯의 통치(B.C. 37-4)를 지나 예루살렘 멸망(A.D. 70)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 소위 경건한 유대인들은 명절마다 성전에 모였을지라도 대다수의 유대인의 종교 생활 중심에는 ‘회당’이 존재했고, 회당 예배의 중심은 구약 낭독과 강론이었다. 회당 예배는 점점 더 그들에게 역사 교육을 통한 선민 사상을 고취시켰다. 이 민족의 지배자는 이제 정치가나 제사장이 아닌 법률가이자 신학자인 ‘서기관’이 되었다.
한편, 율법 자체는 존속하기에 이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 따라 학파들이 나뉘었는데, 대표적인 집단이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이다. 전자는 정통주의자인 반면 후자는 자유주의라 할 수 있다. 계급간 차이는 없었지만, 주로 사두개파에는 귀족과 부호층들, 바리새파는 대중을 그 지지자로 가졌고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 바리새파가 주도권을 잡고 유대교 정통을 결정지었다. 그 외에도 언급되는 집단이 에세네파인데, 이들은 수도적이며, 이란의 이원론 영향도 있다. 서기관들의 작업은 B.C. 2세기 경 미쉬나와 토세프타를 만들었고, 탈무드는 미쉬나의 속편으로, 예루살렘 탈무드는 A.D. 4세기,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A.D. 5세기 경 (미완성으로) 수립되었다. 그 외 랍비 전통은 탈굼이라는 구약의 아람어 번역과 미드라쉬라는 구약 주석으로도 이어졌다.
율법에 따른 삶의 특징 중 하나가 기도인데, 그것은 쉐마 기도문(신 6:4-9; 11:13-21; 민 15:37-41), 쉬모네 에스레라는 18기도문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보다 더 포괄적인 특징은 모든 것을 ‘정결과 부정’으로 나누는 것이다. 그래서 세부 규례가 많이 생겨났고 A.D. 3세기 경 이러한 규례는 613개에 달했다. 그러나 토라의 정신/종합은 결국 B.C. 1세기 힐렐의 ‘황금률’로 소급 가능하다. 율법/토라의 실천 동기는 인과응보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물론 무시되는 것이 아니지만), 오히려 하나님 경외에 근거한다. 그러나 타락과 악한 충동은 인간에게 있으므로 하나님의 용서를 얻는 방편으로 성전 멸망 이후 더욱 더 회개가 부각되었다. 그러나 점차 회개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공로가 되었다.
– 예수의 선포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었고, 유대의 질서 속에서, 그러나 기존의 예언자들처럼 법과 의에 대한 설교가 아닌 오로지 철저한 순종 및 인간 전체를 설교했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율법을 지켰다고 감히 이야기 할 수 없다. 그것은 환상이다. 하나님의 뜻은 사랑의 요구이다. 사랑의 요구는 법에 제한되지 않고 한계도 없다. 비록 예수가 세례 요한에게 영향을 받았지만, 보다 더 종말론적이다. 한편, 그러한 심판 앞에 선 인간에게 회개를 요청하는 예수/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다. 이러한 하나님은 더이상 민족의 역사에서 자신을 계시하지 않는다. 즉, 예수에게서 하나님은 비역사화된다.
2. 희망
– 민족적 우주론적 미래상
유대교에는 민족 해방의 희망이 있었고, 그것은 예언자들의 예언, 시편, 특히 묵시문학에 잘 표현되어 있었다. 유대인에게는 마카비가문, 열심당의 정치적 운동, 예수와 세례 요한의 메시아 운동 등, 다윗 왕국 재건, 즉 인간 메시아에 대한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메시아는 대리일 뿐 본래의 왕은 하나님이다.
그러나 바빌론과 이란 신화의 영향으로 우주론적 종말론이 발전되었다. 그것은 바로 초자연적 이원론 간의 대결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이다. 따라서 세계는 이 세대와 오는 세대로 구분되었다. 종말 시대의 특징이 바로 메시아와 그의 원수 간의 대결이며, 마지막 그 날은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을 것이다(이 부활 사상은 구약에 없고, 유대교가 이란 종교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의인은 부할하며,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할 것이다. 지옥은 고대 몰록 신에게 어린이를 제사로 드린 골짜기의 이름을 따서 게헨나라고 불렸다. 우주론적 희망은 ‘인자’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따라서 민족적 희망의 메시아와 우주론적 희망의 인자 간의 혼합이 유대 묵시 문학 및 공관복음에 등장하게 된다.
– 예수의 종말적 선포
예수의 선포의 핵심은 ‘임박한 하나님 나라’이며 민족적 개념은 없다. 예수의 선포는 묵시문학적 우주론적 기대를 가진다. 예수는 부활과 심판을 말했다. 즉 하나님 나라는 시작되었고 지금이 마지막 때이다. 그 증거는 바로 예수 자신이다(마 11:5, 12:28; 눅 7:22, 11:20). 예수는 자신을 신앙 대상으로 선포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 때의 표적으로 자신을 제시했고, 예수는 인자를 자신이 아니라 올 메시아로 선포했다.(물론 복음서 기자들은 인자에 대한 예수의 언급을 예수 자신으로 이해했고, 교회도 이 전통을 따랐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와 세상 양자 택일이 있다. 그렇기에 부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을 택하는 위험한 일이다.
이러한 비세계화 속에서 이웃 사랑, 원수 사랑이 가능하다. 비록 가까운 세상 종말에 대한 예수의 기대는 잘못일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자세가 그 운명을, 결단을 결정짓는다는 것을 예수의 선포는 보여준다.
3. 헬레니즘 유대교
헬레니즘 유대교란 그리스 로마 세계에 흩어진(디아스포라) 유대인 집단을 가리킨다. 이들은 회당에서 예배를 드린다. 그들은 히브리어나 아람어가 아닌 그리스어를 사용했고, 구약 역시 B.C. 2-3세기의 그리스어 번역인 70인역을 사용했다. 그와 동시에 그리스적 유대 문학이 발전했다.
알레고리 역시 스토아 학파가 신화와 옛 시인들에게서 가르침을 읽어내기 위한 해석방법이며 그것을 유대 종교 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론(B.C. 25~A.D. 40)이 차용했다. 또한 그리스의 코스모스 사상(통일적 유기체로서의 세계)이 유대교에 수용되었다. 즉, 세계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은 창조주에서 예술가로 변모되었고, 세계는 관찰되고 파악되는 신성이 되었다.
또한 스토아 학파의 영향으로 구약에는 없던, ‘섭리’ 즉, 세계 내의 법칙과 목적 사상이 나타났다. 동시에 인간관도 이에 따라 바뀌었다. 제사나 순종은 자아 계발이 되었다. 플라톤의 이원론은 세계와 인간을 이원론적으로 보게 만들었고, 신비적 하나님 예배를 추구하게 만들었으며, 그에 따라 금욕적 신비주의 사상도 발전했다.
결국 필론도 구약의 하나님 신뢰, 스토아와 플라톤적인 영원으로의 돌아섬, 즉 비세계화의 단계를 추구하며, 신앙에 있어서 역사성이 상실된다. 구약의 인물은 필론에게 있어서 덕, 마음가짐, 행동 방법의 모범이다.
3부 그리스적 유산
1. 그리스적 폴리스
– 폴리스의 본성과 토대
그리스 문화권은 세계 지배에 대한 욕구 가운데 학문과 국가(즉 폴리스)가 형성되었다. 플라톤, 소포클레스 등에 의하면, 인간의 능력은 죽음이라는 한계를 제외한 자연 지배이다. 그리스 신화에 이러한 의식은 반영되었다. 신들의 세계에는 인간 질서가 반영된다. 폴리스는 정의와 법 위에 세워졌고, 헤시오도스(B.C. 7세기), 솔론(B.C. 650-560)이 이러한 정의를 선포한다. 그러므로 폴리스의 법이 최고선이다. 그리스인들은 왕이 지배하는 동양이나, 특히 스파르타에 비해, 폴리스의 우월성을 인식했다. 이러한 폴리스는 신성한 것이며, 폴리스는 시민 종교의 성격을 띈다.
– 폴리스의 위기
그러나 폴리스는 인간 정신과 부딪쳤다. 소포클레스, 헤시오도스 등, 일부는 폴리스의 법이 신성한 것임을 천명했고 이를 위해 신화적 신들의 힘에 대한 경외를 상기시키곤 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본래 한계를 알라는 것이며, 헤로도토스의 역사관도 ‘인간의 오만은 신의 분노를 일으킨다’ 이다. 그러나 결국 신화는, 철학자들, 인간의 비판에 힘을 잃게 된다. 소위 소피스트적 계몽주의가 발생했다. 폴리스는 이제 개인의 유익, 이성적인 타산과 협약으로 이해되었고, 정의와 불의도 유익과 해로움 사이에서 가늠된다. 이에 따라 프로타고라스의 “모든 타당한 것들의 척도는 인간이다. 존립하는 것들의 척도는 그것들이 존립한다는 것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존립하지 않는 것들의 척도는 그것들이 존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위한 것이다.”(Portag. Fr. 1. 번역과 해석에 대한 비교 Nestle, Vom Mythos zum Logos, 269 ff.)라는 이론이 등장한다. 비록 아리스토파네스가 소피스트들을 풍자할지라도, 이제 소크라테스는 자연 현상에서 제우스를 찾지 않는다.
2. 학문과 세계관
– 소크라테스와 자연과학
존재자에 대한 물음이 이오니아 철학에서 제기 되고, 계몽주의에 의해 아테네로 옮겨졌다.철학자들은 변하지 않는 존재자에 대하여 물었다. 탈레스는 물, 아낙스메네스는 입김/공기, 아낙시만드로스는 아페이론(apeiron)을, 가정했다. 그러나 코스모스는 형태를 가진다. 마치 예술 작품이 재료에서 합목적적으로 조횽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존재 부여가 곧 ‘선’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선’을 찾는 데서 인간에게로 사고의 방향을 전환시켰고 인간을, 자신을 바라보면서 의미와 존재를 제공하는 ‘로고스’를 발견했다.(그리스어 로고스의 번역은 그 말의 완전한 의미를 재현하지 못한다. 그것은 ‘사상,’ ‘근거,’ ‘정신,’ ‘말’을 뜻한다. Plat. Phaed. 99e.) 소크라테스는 대화 속에서, 로고스를, 그리고 로고스의 일치를 통해, 덕, 정의, 선을 인식할 수 있었다. 이것이 그의 대화법이다.
– 플라톤과 관념론
플라톤은 폴리스의 시민이 ‘이상적인 상’을 보고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가 로고스를 추구했듯이 플라톤은 이데아를 추구했다. 최고의 이데아는 선이며, 존재는 동시에 의미이다. 천체의 완벽하게 조화로운 움직임은 그러한 이데아를 보여준다. 이처럼 이데아는 플라톤에게 있어서 일종의 ‘새 종교’이다. 한편, 그러한 이데아의 선에 대한 인식은 인간을 정치가로 만든다. 소피스트처럼 정치 행동학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참 정치가는 선에 대해 끝없이 묻고 실천하는 자이다.
– 그리스적 세계관의 본질
그리스적 세계관의 기본적인 특징은 코스모스 안에 있는 인간이 코스모스를 합리적 사유로 객관화 하면서 인간 실존을 이해하는 것이다. 코스모스는 공간적으로 한정적인 것이나 동시에 무시간적이다. 또한 코스모스는 예술 작품처럼 형상과 질료라는 이원론적으로 파악된다. 한편, 인간은 코스모스의 일부이자, 전체 속의 한 사건이다. 전체를 파악할 때 자신의 현존의 의미를 깨닫는다. 합리적 윤리와 교육의 이상이 여기에서 나온다. 플라톤이 추구하는 초고의 덕, 즉 정의가 질서이다. 인간 역시 코스모스와 같은 예술작품이므로 자기 완성은 미와 선에 갖추어 형성하는 것이다. 인간 공동체는 이상 국가에 대한 상을 추구한다. 에로스라는 사랑의 동인은 교육을 통해 발전한다. 역사를 반성하지 않는 것 역시 그리스 정신의 특징이다. 역사는 우주적 사건의 움직임일 뿐이었다. 역사 인식 속에서 그리스인들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관찰을 추구했으나 실제 역사는 타락일 뿐이었다. 죽음은 자연 현상이며 생명의 마지막 절정이다. 자신을 예술작품이자 코스모스의 통일성에 참여하는 것, 즉 영원에 참여하는 것이 그리스의 과제이며, 이를 위한 자유를 인간이 지니는데, 그 본질이 바로 정신이다.
4부 헬레니즘
1. 스토아적 현인의 이상
스토아 학파는 세계의 통일성은 로고스와 자연의 생동력의 일치 가운데서 새롭게 이해되었다. 로고스는 이상이자 만물을 관통하는 숨과 같다. 코스모스는 신성한, 생명과 같은, 그러므로 필연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로고스를 파악하고 로고스를 따라 인식해야 하고 로고스의 지배 하에 행복해질 수 있다.
로고스는 또한 실증적으로도 이용될 수 있다. 인간은 로고스에 따라 사회적으로 정해진 존재이며, 정의도 로고스에 따른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런 의미에서 세계주의자이다. 그러나 동시에 로고스에 따라 인간은 윤리적 자유라는 이상을 꿈꿀 수도 있다. 인간의 내면은 자유하지만 외적인 것은 그렇지 않다. 내적인 자유를 잃게하는 것은 버려져야 할 것이다. 외적인 것에 대한 포기와 내적인 정신적 자유 추구를 통해 내적인 평화와 기쁨을 맛본다. 좋고 나쁨은 우리의 태도에 달려있다. 즉, 스토아 현인은 모든 것을 비역사화, 비세계화 시킨다. 이는 공동체의 이상과 내적 자유의 통합으로도 나타나며(정치), 금욕적이며 승려적인 고독과 평온의 이상과도 통할 수 있다. “스토아적 이상론은 그 용어와 함께 기독교적 승려단에 의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비교 A -J. Festugière, Personal Religion among the Greeks. 1954, 53-69)
세계 로고스라는 법칙에 대한 인간 로고스의 일치가 스토아인의 자유라는 내적 모순은 바울의 기독교적 자유와도 유사하다. 기독교의 자유는 하나님에게로 돌아서는 데서 출발한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보다 무시간적 로고스에 집중하는 스토아인의 비세계화는 곧 비시간화이다.
2. 성신종교, 운명신앙과 점성학
성신(星辰) 숭배는 그리스의 것이 아니라 근동의 것으로 로마를 정복했다. 시리아의 태양신 등이 로마의 국가 신(솔라 인빅투스)이 되었다. 근동 종교의 침투는 생명을 주는 태양에 대한 사상으로부터 태양 범신론을 형성했고, 숙명 신앙을 또한 만들었다. 전쟁 등 혼란 시대 속에서 군인과 지배자에게 이는 행운으로, 억압받는 자들에겐 숙명으로 여겨졌다. 이 사상은 세계를 곧 적대적으로 여기게 만들었고, 성신 세계와 지상 세계를 가르는 이원론을 낳았다.
후기 스토아는 숙명 신앙과 성신 종교를 종합하여, 코스모스를 받아들이도록 만들었고,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별들에 대한 관조를 통해, 즉 종교적 관상으로 행복을 추구한다.
한편, 별들이 예속된 법칙이 아닌, 별들이 지배하는 법칙을 추측하여, 미래를 헤아리는 점성학이 발달했다. 점성학은 세 가지 사고를 발달시켰다. 첫째, 지상 세계가 아닌 성신 세계에 대한 관조라는 정신적, 감성적 이원론, 둘째, 칼데아 신학에 근거한 것으로 별들에 따른 시간에 대한 관념의 변화(시대를 주기함으로써 종말론적 희망의 가능성), 셋째, 죽음 이후 별들의 세계로 가게 되는 인간의 영의 운명(본래는 황제의 운명이나 대중의 운명으로 발전).
숙명의 억압, 점성학 등에 근거한 밀의종교들은 자신들만의 구원을 약속했다. 특별히 지식을 가진 자들은 운명에 묶여있지 않는다는 것을 약속한 ‘영지주의’가 있었다. 갈라디아서 4장 3-4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Excerpta ex Theodoto 71f.) 기독교의 선포들은 모두 그러한 이러한 맥락이고 기독교적 영지주의이다.
3. 밀의종교
근동의 종교 의식, 관념뿐 아니라 여러 종류의 귀신도 서구에 유입되었다. 이집트 및 칼데아, 특히 이란의 이원론의 악마와 악령들은 민중뿐 아니라 신플라톤주의에도 받아들여졌다. 당연히 그와 더불어 축사술, 즉 마술도 도입되었다.
이러한 마술과 더불어 인간을 ‘신화’시켜준다 약속하는 밀의종교도 유행했다. 아티스 숭배, 이시스, 오시리스 숭배, 아도니스 숭배, 미트라 숭배 등, 밀의종교는 본래 민족 종교, 종족 예배였다. 그러나 곧 민족 문화권을 벗어났다. 밀의 종교의 특징은 입교, 금욕 세례, 고행 등의 정결례, 성례문 전수, 신성에 대한 관조 및 합일(상징적 의식), 신과 일체를 이루는 만찬 등이다.
밀의 종교는 스스로 죽음에 떨어졌다가 다시 살아난 젊은 신을 예배의 중심에 위치시켰다. 거듭남이라고도 묘사되는 상징적 헌신례인 죽음과 죽음으로부터의 귀환의 표현은 신성에 대한 인격적 신뢰를 나타나기도 했다. 밀의 종교에 통일된 신학은 없지만, 다만 인간대 세계 관계의 의심으로부터 도출된 실존 이해의 변화의 징후를 갖고 있다. 즉, 인간은 세계에 내던져 있다.
로고스가 아니라 초월적 신, 그 신의 은혜만이 인간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 밀의 종교의 믿음이다. 그렇기에 악마적 세력의 적대성은 강해야 했다. 이 근저에 영지주의가 놓여있다.
4. 영지주의
영지주의는 종교적 현상, 이원론적 구속 종교이다. 영지주의는 기독교의 헬레니즘화라기 보다 기독교보다 앞선 근원을 가진, 근동에서 침투한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와 유사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스스로를 영지주의와 구별하려했다.
영지주의 교단들은 세례종파이며, 요단 영역에서 생겼고, 신플라톤주의에서 작용했다. 그것은 영의 운명(근원, 타락, 지상의 나그네, 해방 및 빛의 세계로의 승천)을 말한다. 인간은 하늘의 빛(원인간)의 한 조각 불꽃이다. 이 빛의 요소가 사라지면 세계는 혼돈에 빠진다. 지고의 신은 그러한 갇힌 불꽃을 위해 그의 아들을 악마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지상의 옷을 입혀 내려보내고, 그는 끊임없이 잠든 자들을 깨우고 하늘을 기억하게 한다. 그는 “나는 목자이다,” “나는 진리이다” 등을 계시하고 다시 승천한다. 깨달은 자는 그 길을 따르며, 그와 합일하되 세계는 버려지고 다시 혼돈에 빠지는데 그것이 바로 심판이다.
이것은 실존적 이해, 세계에서의 인간의 고독을 보여준다. 영지주의에 의해 코스모스의 법칙은 조화나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감옥이 된다. 신의 초월은 더욱 강화된다. 그는 비세계(Nicht-Welt)이고 세계는 모든 신성에서 배제된다. 해방은 속죄(Erlösung)으로 이루어진다. 육과 영을 남겨둔 원래의 자아(영지주의 인간론은 삼분법적이다), 선재적인 불꽃은 하늘로 올라간다. 구원은 피안으로 부터 소식을 가져온 ‘부름’에 의해 가져와진다. ‘부름’과 ‘부름받음’의 진리에 대한 신앙은 영지주의의 것으로, 종말론적 영의 해방과 승천에 대한 희망이다.
영지주의에는 모든 자가 불꽃을 원칙적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공동체 의식(폴리스의 것과는 다른)이 있지만, 불꽃에 대한 생생함이 두 계급으로 인간을 분류한다. 즉 영지주의자들과 물질주의자. 영지주의 교단의 공동생활은 원칙적으로 불필요한 것이나 서로의 상호촉진을 위해 존재한다.
5부 초대 기독교
1. 절충주의적 현상
초대 기독교는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 설립된 것으로, 그들은 예수를 부활과 승천, 특히 인자의 재림의 지위로 믿었다. 그리고 자신들을 마지막 때의 공동체로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유대교의 한 종파로 보였다. 다만 그리스-로마 세계의 이방인 기독교와 더불어 헬레니즘 세계를 위한 신앙이 새로이 등장했다. 실제로 유대 기독교는 이방 기독교에 낯선 용어로 가득했다. 인자, 크리스토스는 사라지고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등이 그러한 칭호를 대체했다. 특히 ‘주’가 지배적인 예배의 칭호가 되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신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밀의종교를, 신의/비밀한 ’지혜’ 라는 점에서 영지주의를 닮았다. 물론 팔레스틴 교회의 복음서 전통이 헬레니즘 기독교에도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거의 미약했다. 헬레니즘 기독교는 이러한 이원론적, 유대교적, 묵시적, 밀의종교적, 영지주의적 등의 절충주의적 형성체이고, 이단이라 불릴 가능성을 지녔다. 그러나 여기에 인간 실존에 대한 통일된 그러나 새로운 이해가 있었다.
2. 인간과, 시간에 대한 그의 관계
초대 기독교의 인간 이해는 그리스적이지 않다. 로고스에 따른 삶, 코스모스와의 조화, 예술 작품으로서의 인간상 등은 신약에 없다. 오히려 인간은 ‘의지’로 이해된다. 더 나아가 인간 의지의 절대적 무력이 신약, 특히 바울에게서 발견된다.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렇기에 죄는 결핍이 아니라 적극적인 무엇, 즉 신에 대한 반역이다. 아담을 통해 들어 온 죄와 사망이라는 개념이 유대교에도 있지만, 유대교에서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있으며, 그 노력(율법 준수)과 하나님의 용서를 동시에 인정한다는 점에서 초대 기독교와 다르다. 바울은 유대인의 그러한 노력, 그리고 그리스인의 지혜 자랑을 비판한다.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의지, 미래에 대한 개방성이 신약의, 바울의 특징이며, 바로 이러한 미래를 향한 개방이 기독교의 자유이다. 스토아인이 지혜를 통해서 자유를 얻듯, 기독교인은 은혜(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유를 얻는다. 스토아인은 외적인 요인이 아닌 내적인, 무시간적 로고스에 집중하여 자유를 얻듯, 기독교인도 그러하다. 초대 기독교는 종말론적인 시각을 가졌으나 유대인의 민족적 경험을 그들의 것으로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새 언약’의, ‘육적 자녀가 아닌 약속의 자녀’의 공동체로 자신들을 보았다. 이제 하나님은 역사가 아닌 그리스도를 통해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가 하나이며, 동시에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객체로 선다.
3. 세계 내에서의 인간의 상황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구원 사건의 계시를 통해 본래 존재와 삶으로 부터 소외된 상태에서 구원받는다. 무력과 불안이 기독교의 인간 현존 이해다. 인간을 노예로 삼는 세력들은, 스토이케이아, 이 세대의 관원, 신, 지배자(갈 4:3, 9; 롬 8:38; 골 1:16) 등이며 이는 모두 영지주의의 신화에서 차용한 것이다. 그러나 영지주의의 영혼의 선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원인간’ 신화를 받아들였는데, 그것이 바로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를 통한 것이다(원인간의 타락). 바울이 아담의 본성을 프쉬케로, 그리스도를 프뉴마로 표현한 것도 영지주의적 언어이다. 프뉴마에 속한 자는 영지를 소유한 자이다. 한편, 기독교적 관점에서 인간의 노예화 된, 소외된 정황은 숙명이자 죄로 여겨진다. 육의 세력, 죄와 죽음의 세력은 이런 점에서 실재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세계는 악마적 세력의 지배 아래 있다. 이러한 세계는 그리스도를 통해 해방될 것이다. 또한 초대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초월성은 영지주의와 비슷하지만, 단순한 비세계성이 아닌, 구약과의 연장선에 있는 적극적인 지배와 권위이며, 신약의 새로운 관점에 의하면, 그러한 초월의 적극성은 ‘은혜’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은혜는 역설적으로 나타난다. 부활은 죽음의 모양으로, 신의 능력은 인간의 약함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의 초월성은 미래적이다.
4. 구원
인간의 구원은 오직 신적인 것이다. 이 점에서 초대 기독교와 영지주의가 일치한다. 예수는 인자, 속죄제물, 주가 되었는데, 즉, 예수라는 인물과 업적이 영지주의 구속 신화의 개념으로 해석된 것이다. 바울의 여러 발언은 밀의종교적/영지주의적 뉘앙스를 풍긴다.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는 영지주의적이다. 물론 바울은 종말론적이고, 요한은 현재적이다. 그러나 영지주의에서도 구원자의 도래, 종말론적 사건/시대의 암시적 현상들을 말한다.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이 신화화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구원자로 현재하며, 죽음과 부활을 겪은 자이며, 그의 말은 영이자 생명이며, 심판이다. 다만 영지주의와 달리 초대 기독교는 우주생성론, 선재론 등을 포기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설교했다. 십자가 설교는 새로운 실존적 자기 이해를 위한, 그로부터 오는 순종의 결단을 호소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이다. 성례에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은 ‘신앙’을 통한 것인데,이는 영지주의적 구원자의 우주적 몸과의 합일과 유사하다. 영지주의와 초대 기독교 간 ‘영’의 이해도 주목할 만하다. 둘 다 공통적으로 어떠한 ‘영’이 수세자에게 주어지면, 황홀체험, 예언, 방언뿐 아니라 윤리적인 태도, 정욕과 향락에 대한 승리, 사랑의 봉사들이 가능하다. 바울에게 ‘영’은 마술적이면서도 실제적이다. 영은 하나님의 ‘가능성’(können)이자 규범이다. 이러한 영에 따라 사는 것이 초대 기독교에서 중요했고, 영과 사랑으로 결합된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사회학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기에 오히려 금욕주의적인 경향도 나타났다. 그러나 세상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기에, 교육학이 발전했는데, 헬레니즘 세계의 윤리를 받아들였는데, 이것이 목회서신에 반영되었다. 영지주의의 비세계성에서 오는 그저 숙명적인 자아의 문제가 초대 기독교에서 적극적으로 해소되었다. 하나님에 의해 열린 미래에 대한 초대 기독교의 인간이 지닌 그 개방성에는 한계가 없다.
평가
이 책은 초대 기독교를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친 모든 것에 대한 약술이다. 각각의 사상을 소개하고 그것과의 관계성을 다루는데 초점을 맞춘 책이다. 외적 유사성과 내적 유사성을 모두 비교하기에 실제로 방대한 양이 될 수 있지만 최대한 절제한다. 비록 요약에는 없지만, 불트만은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기 위해 때로는 관련 인물들의 글들을 길게 인용한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초대 기독교는 철저하게 여러 갈래의 혼합에서 등장한 종교이다. 불트만이 말하는 언급하는 모든 종교가 크게 작게 영향을 미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스토아 철학과 영지주의이다. 정작 예수는 구약이나 유대교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초대 기독교는 오히려 그러한 예수를 새롭게 해석했다. 불트만은 그러한 현상을 바울, 헬레니즘 세계의 이방 기독교인의 탓으로 돌린다. 그리고 그 과정 중에서 이루어지는 비신화화 작업은 필연적으로 영지주의에도 적용된다. 이렇게 드러난 초대 기독교와 관련 종교/사상과의 영향 및 유사성은 단순한 외형적 관찰의 결과가 아니라, 당대의 세계관을 파악하기 위한 불트만의 비신화화 작업의 결과이다. 만약 불트만의 이러한 작업을 비판하려면, 단순히 외관이 아닌 내적 측면까지도 고려한 세심한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불트만의 오랜 이론이 오늘날 종교학계, 다소 진보적인 성서학계에서도 다시금 빛을 얻고 있다. 그가 사용한 양식 비평이 아닌 본문 비평, 정경 비평이라는 방식은 다시금 성서를 특정 종교에 가두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작업은 편협한 것일 뿐임이 점점 드러나고 있다. 역사적 예수, 바울에 대한 새관점 등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가 자주 의존하는 에밀 쉬러의 책은 이 분야의 고전으로 소위 E. P. 샌더스도 그의 책을 통해 바울에 대한 새관점 이론을 내어놓을 수 있었다.)
본서는 독일어 원서의 번역인데, 비문이 간간히 보이고, 문장 내용을 알 수 없는 듯한 번역이 있다. 번역은 어려운 것이며, 특별히 불트만의 글은 내용상 파악하기 쉽지가 않았다. 다시금 번역되었으면 하는 바램과, 언젠가 독일어 원서와 영어 번역서를 대조해가며 다시 정리하면 좋을 듯한 아쉬움이 남는다.
○ 독자의 평
루돌프 불트만, 하면 양식비평의 대가, 성서의 비신화화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책을 처음 읽을 때에는, 이건 이 사람의 생각이다 정답이 아니다.
되뇌이면서 읽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던 세계와는 다른 세계관 같아서 받아들이기도, 읽기도 어려웠는데 불트만이 기독교 신학에 끼친 영향을 알고자 읽었습니다.
책도 얇고 그래서 부담 없을 줄 알았는데 약간 어려웠네요.
…………..
소문으로만 듣던 불트만의 책을 처음 읽었다.
두껍지 않은 책임에도 내용은 깊이 있고 방대하다. 저자의 기술 내용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초기 기독교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 회개는 하나님을 심판자로서 승인하는 일” 이라는 구절이 가슴에 남는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