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김기림 전집 전6권
김기림 / 심설당 / 1988.1.30
김기림 시인의 전집 (전6권)으로 1.詩 2.詩論 3.文學論 4.文章論 5.소설, 희곡, 수필 6.문명비판, 시론, 설문답, 과학개론 순으로 심설당에서 출판됐다.

문학가이기 전에 지식인이자 언론인으로서 그가 가졌던 당대 현실에 대한 불만,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모색과 고민이 그의 시와 비평에 녹아들어 있다.
특히 그의 모더니즘 시론 (詩論)은 1920년대 초 우리나라 시문학의 감상적 ㆍ 퇴폐적 낭만주의와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까지 목적성에 치우치는 프로 문학을 부정하는데서 출발하였다.
○ 목차
1.詩
2.詩論
3.文學論
4.文章論
5.소설, 희곡, 수필
6.문명비판, 시론, 설문답, 과학개론

○ 저자소개 : 김기림 (1908 ~ ?, 1950년 납북)
저자 김기림은 1908년 5월 11일 (음력 4월 12일) 함경북도 학성군 (후에 성진으로 편입됨) 학중면 임명동 275번지에서 부친 김병연과 모친 밀양 박씨 사이의 6녀 1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선산 (善山)이며, 아명은 인손 (寅孫), 호는 편석촌(片石村)이다. 등단 초기 간간이 G. W.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바도 있다.
어린 시절 고향의 임명보통학교에 입학, 졸업하고 한동안 서당에서 한학을 배운 적이 있다. 13세에 성진의 농학교 (중등과정)에 진학하였으나 1년 수학 직후 서울로 올라와 보성고보에 다니게 된다. 보성 3학년 재학 도중 갑작스럽게 병을 얻어 고향에 내려와 요양을 하게 되는데, 건강을 회복하고 난 후 학교로 복학하지 않고 곧바로 일본 유학을 떠나 당시 도쿄 소재의 메이쿄 (名敎)중학 [현재는 도쿄 근처 지바 (千葉) 현 우라야스 (浦安) 시 소재의 도카이 (東海) 대학 부속 우라야스고교]에 편입, 졸업한다. 졸업 이후 1926년 봄, 니혼 (日本)대학 전문부 문학예술과로 진학하고 1930년 봄에 동 대학을 수료한다.
대학 재학 기간 중 서구 모더니즘의 여러 사조에 깊은 영향을 받은 그는 귀국과 더불어 ≪조선일보≫ 사회부,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시 창작과 비평 발표 등의 문필 활동에도 힘쓴다.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최초의 글은 니혼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직후인 1930년 4월 27일에서 5월 3일까지 발표한 <오후와 무명작가들•일기첩에서>로 기록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를 평론으로 분류하기도 하나, 엄밀히 말한다면 문학적 감상을 섞은 단상 형태의 수필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본격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평론은 같은 해인 1930년 7월 24일에서 30일까지 ≪조선일보≫ 지상에 편석촌이라는 필명 (호)으로 총 6회에 걸쳐서 연재한 <시와 시인의 개념•근본적 의혹에 대하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후 그는 활발하게 서구 모더니즘에 영향을 입은 시작 활동과 비평 활동을 꾸준히 병행하면서 당대 문단의 중심을 향해 자신의 입지를 넓혀 나간다. 그런 와중에 1933년 이태준, 정지용 등과 함께 모더니즘 문인들의 친목 단체인 ‘구인회’를 결성하여 모더니즘문학의 보급과 활성화를 위해 노력한다.

1935년은 그의 문단 활동이 정점에 이른 시기다. 대표작이기도 한 장시 <기상도>를 잡지 ≪중앙≫과 ≪삼천리≫에 연재하는 한편, 그의 초기 모더니즘시론의 핵심을 담았다고 평가받는 <오전의 시론> 시리즈를 ≪조선일보≫ 지면에 장기간에 걸쳐 의욕적으로 연달아 발표한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한 단계 도약을 위해 스스로 모험을 감행한다. 보다 체계적이고 심도 있는 학문 연구를 위해 재도일하여 도호쿠 (東北)제대 영문과에 입학한 것이다. 도호쿠제대 재학 기간 동안 조선 내 그의 문단 활동은 잠시 주춤하는 듯한 인상을 보이기도 하나, 이 기간 그는 영문학의 새로운 학문적 원리와 이론들을 받아들여 자신의 문학관을 심화하는 한편, 보다 폭넓은 사회 역사적·철학적 토대 위에 종래 자신이 추구했던 모더니즘문학 운동의 진로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다.
1939년 동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조선일보사 기자로 복직함과 함께 조선 문단 전면에 재등장한다. 복귀 후 한동안 문단 활동에 주력하지만, 1940년대로 넘어서자 점차 조여드는 일제의 압박에 회의와 위기감을 느끼고 고향으로 내려가 한동안 절필 상태로 지내게 된다. 친일 문학인들과 단체의 끈질긴 동참 권유를 뿌리치고 긴 침묵의 기간을 보낸 것이다.
1945년 해방 이후 다시 가족과 더불어 서울로 올라온 그는 그간의 침묵을 만회라도 하듯 문단과 학계 양쪽에서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 준다. 그러나 1950년 6·25동란이 발발된 직후 서울 거리에서 북한 기관원들에게 연행당한다. 그 뒤 북으로 이송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북한 내에서 그의 행적이나 활동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뚜렷하게 드러난 바가 없다. 시론집으로 ≪시론≫(1947)과 ≪시의 이해≫(1950) 등이 있으며 시집으로는 ≪기상도≫(1936), ≪태양의 풍속≫(1939), ≪바다와 나비≫(1946), ≪새 노래≫(1948) 등이 있다.

○ 출판사 서평
김기림이 우리 문단에 등장한 것은 1930년 무렵, 소위 계급주의 문학으로 일컬어지는 카프(KAPF) 계열 문인들의 활동이 정점을 지나 한풀 꺾이기 시작할 시점이었다.
그는 카프 문인이 추구하는 이념 편향적인 태도와 편내용주의적인 활동 방식의 한계를 일찌감치 깨닫고, 서구적인 의미에서 근대의 추구만이 당대 우리 문학이 추구하여야 할 올바른 길임을 직시하고 이를 몸소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모더니즘 문예이론, 주로 영미 계통의 신고전주의·이미지즘 유의 모더니즘 시론을 본격 수입 소개하며 한국 모더니즘 시 운동을 이끌게 된다.
그는 당대 문단적 상황에서 우리 문학의 도약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서구 모더니즘 문예이론과 그것의 밑바탕이 되는 근대적 시정신의 도입이 필수적임을 깨닫고 이를 앞장서서 추진한 근대주의자였으며, 나아가서 마침내는 서구적 근대의 한계를 예감하고 그것의 초극까지를 꿈꾼 탈근대주의자였다.
그의 시론과 비평이 지닌 비평사적 의의는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영미 계열의 신고전주의적·이미지즘적 모더니즘을 위시한 서구 근대 모더니즘 문예이론의 수입과 소개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둘째, 서구의 모더니즘 문예이론을 바탕으로 당대 한국 시단에 새롭게 등장하는 시인들의 활동에 일정한 형식과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 한국의 모더니즘 시를 하나의 체계적인 문학 운동으로 끌어올리는 데 일조했다. 셋째, 모더니즘 문예이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고, 어두운 면과 부정적인 면에도 주의를 기울이며 그것을 초극하기 위해 노력했다. 넷째, 근대 이후 새로운 세계의 기획과 건설에 시문학이 그 나름의 방식으로 일조하는 문제에 대해 고심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