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김대건, 조선의 첫 사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정본 전기
이충렬 / 김영사 / 2022.6.20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
-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한국인 최초의 가톨릭 사제 : 김대건 신부의 삶과 길을 충실히 복원한 첫 정본 전기
.천주교 서울대교구 인가
.한국교회사연구소 감수
.탄생 200주년 기념도서
.정순택 대주교 추천사
김대건 신부 첫 정본定本 전기인 이 책은 2021년 성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교회 기념 희년禧年 선포,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 선정 등을 기리기 위해 출간되었다.
1846년 25세의 나이로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기까지, 한국 최초의 가톨릭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삶을 총체적으로 다룬 이 전기는, 혜곡최순우상을 수상한 대한민국 대표 전기 작가가 한국 천주교회 연구기관인 (재)한국교회사연구소의 자료제공과 감수를 받아서 펴내는 공식적인 김대건 정본 전기다.
방대하고 치밀한 자료 조사를 통해, 그동안 불확실했던 5년 반 동안의 마카오 신학교 생활과 어린 시절은 물론, 여러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규명했다.
특히 1845년에 한국인 최초의 가톨릭 사제가 되었음을 친필로 서약한 〈김대건 신부 서약서〉도 2021년 교황청을 통해 입수한 라틴어 원본을 170여 년 만에 정식으로 공개한다(교황청 복음화성 문서번호 Fondo S. O. C. P. vol.78, f 405).
19세기 조선을 둘러싼 세계사적 역동 속에서 온갖 박해를 이겨내고 꿋꿋하게 피어난 한국 천주교회의 다채로운 신앙 여정을 생동감 있게 그려내어, 한국 가톨릭 신앙의 뿌리와 본질을 새롭게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 책 인세의 반은 그동안 김대건 신부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한 (재)한국교회사연구소의 연구기금으로 기부된다.
○ 목차
추천사 – 영웅적 신앙의 모범적 증인 (정순택 대주교)
저자 서문 – 짧고 길었던 25년의 삶
1부 가야만 하는 길
- 폭풍 속으로
- 조선의 섬이 보입니다
2부 길을 떠나다
- 고향 솔뫼를 떠나다
- 한양 청파에서 서당에 다니다
- 정하상과의 운명적 만남
- 청파를 떠나다
3부 신앙의 요람 교우촌
- 용인 한덕동 성애골에 자리잡다
- 교우촌에서 신앙에 눈뜨는 소년
- 조선 천주교의 앞날은?
- 마침내 세워진 조선대목구
4부 부르심을 받은 소년
- 모방 신부의 입국과 신학생 선발
- 성애골을 찾아온 정하상
- 안드레아는 천주의 부르심을 받았다!
- 어렵기만 한 라틴어
- 마카오를 향하여
5부 신학생의 길
- 6개월 동안 9천 리를 걷다
- 라틴어는 인사와 기도만 할 줄 알아요
- 사전과 씨름하며 시작한 소신학교 과정
- 좌절을 딛고 일어서다
- 기해박해로 아버지가 순교한 사실을 모른 채
6부 멀고도 험한 조선으로 가는 길
- 조선을 향해 떠나다
- 영적 스승 메스트르 신부
- 황해를 앞에 두고 배에서 내리다
- 요동에서 입국의 기회를 모색하다
- 무너지는 가슴
- 신의주에서 만난 위기, 다시 요동으로 돌아오다
- 함경도에서 교우들을 만나기 위해 만주 벌판을 횡단하다
- 다시 조선을 향해서
7부 조선의 첫 번째 사제
- 한양에 도착하다
- 나의 도착을 어머니에게 알리지 마시오
- 목자를 맞이할 바닷길을 열어야 한다
- 천신만고 끝에 상해에 도착하다
- 상해에서 보여준 용덕
- 조선의 수선탁덕 김대건 안드레아
8부 사목 활동을 시작하다
- 다시 황해를 건너다
- 한양 돌우물골에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다
- 10년 만에 어머니를 만나다
- 경기도 교우촌을 다니며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풀다
- 백령도 뱃길을 열어야 한다
9부 순교자가 된 조선의 첫 사제
-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
- 50회의 신문을 견뎌내다
- 스승 신부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다
- 조선 천주교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 자, 치시오. 나는 준비가 되었소!
10부 “김대건 신부는 영웅적 신앙의 모범적 증인”
- 프란치스코 교황
- 미리내에 잠든 조선의 첫 사제
- 에필로그
감수의 글 –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정본 전기 (조한건 신부)
김대건 신부 연보
참고문헌
○ 저자소개 : 이충렬
한국 전기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전기 작가. 한국 문화·사회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의 삶을 되살리는 데 전념하고 있다. 치밀한 자료 조사와 탄탄한 스토리텔링으로 인물의 궤적과 시대정신을 담아내 독보적인 전기 작가의 길을 개척했다.
1994년 『실천문학』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간송 전형필』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 『아, 김수환 추기경』 『국제법학자, 그 사람 백충현』 『천년의 화가 김홍도』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아름다운 사람 권정생』 등이 있다. 전기를 통해 한국 문화예술계 대표 인물의 생애를 발굴·복원한 공로로 제3회 혜곡최순우상을 수상했다.
감수 : 조한건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 책 속으로
김대건 신부가 스물다섯 살의 젊은 나이에 순교했다고 하면 깜짝 놀라는 이가 많다. 우리나라 첫 번째 신부라는 사실은 알지만, 구체적인 삶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200년 전, 이 땅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김대건은 어떤 사람이며, 무엇이 그를 사제의 길로 이끌었을까? 어떻게 조선의 첫 번째 사제가 되었으며, 왜 사제 서품 1년 1개월 만에 순교의 길을 걷게 된 것일까? 그리고 한국 천주교에서는 왜 김대건 신부를 모든 성직자의 모범으로 공경하는 것일까? — p.12
“인부 因父, 급자及子, 급성신지명 及聖神之名. 아맹 亞孟.”
낮은 목소리로 정하상이 읊조리자 맞은편에서 김제준도 따라 했다.
당시 천주교의 기본적인 기도문인 ‘성호경 聖號經’과 3대 기도문인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비롯한 모든 기도문은 1838년 「텬쥬성교공과 (천주성교공과 天主聖敎功課)」가 출간될 때까지 번역이 안 되어 있었다. 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해서 사용하려면 주교의 승인 (인준)이 필요했기 때문에 중국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한문 기도문을 한글로 읽고 암송했고, 한문을 모르는 신자들은 유식한 교우들의 도움으로 그 뜻을 헤아릴 수 있었다. — p.83
당시 북경에서 마카오를 가는 최적의 경로는 물길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륙 지역인 서만자 출신의 안내인들은 물길을 두려워했다. 그런 까닭에 조선 신학생들은 육로로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북경에서 마카오까지는 대략 1만 리 (4,000km),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면서 하루 25킬로미터씩 걸어도 5개월이 걸리는 거리였다. … 1837년 6월 7일, 마침내 세 명의 조선 신학생이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 도착했다. 한양을 출발한 지 6개월 만이었다. 만주에서 북경을 거쳐 남쪽으로 중국 대륙을 종단하는 9천 리 (3, 600km) 길을 걷는 사이에 계절이 세 번 바뀌었다. — p.204~207
그림에도 소질이 있던 김대건은 연필로 지도를 그려보기도 했다. 지도에 꾸준히 관심을 보이던 그는 훗날 사제가 되어 조선에 입국한 뒤에 후임 선교사들을 위해 매우 자세한 조선 지도를 모사해서 마카오로 보냈다. 이때 김대건이 모사한 지도는 그가 순교한 뒤에 15명의 선교사가 백령도를 통해 입국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가 체포되어 옥에 갇혀 있을 때 조정에서는 그의 짐에서 나온 지도를 보고 영국에서 제작한 그 세계지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줄 것을 부탁하기까지 했다. — p.227
리브와 신부는 조선에서 사목 활동을 하고 있는 앵베르 주교에게 편지를 써서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보냈다.
“… (김대건) 안드레아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늘 위통, 두통, 요통을 앓기 때문입니다. 그의 머리털만 보더라도 그의 심한 두통을 짐작하게 합니다. 지금 그의 머리털은 회색, 흰색, 누런색, 거의 온갖 색깔입니다. 저는 지금껏 이렇게 지저분한 머리털을 본 적이 없습니다.”
공부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열여덟 살 청년의 머리를 백발로 변하게 했지만, 학업 문제는 그의 끈질긴 노력으로 조금씩 해결되었다. — p.234, 237
1839년 초, 조선에서는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시작되었다. … 결국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 등 세 사제는 순교의 길을 걸었으며, 그 외에도 김대건의 부친 김제준과 최양업의 부모 역시 순교자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멀리 떨어진 마카오 극동대표부의 조선 신학교에 조선의 박해 소식이 전해지는 데는 3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박해 소식은 물론 가족들이 위주치명 (순교) 하였다는 소식을 전혀 알지 못한 김대건과 최양업은 조선 교우들의 기대가 담긴 편지를 읽으며 더욱 학업에 정진했다. — p.235~236
[도판] 신학생 김대건이 지켜본 남경조약 조인식 장면:
“… 세실 함장은 부관 뒤프레 씨와 프랑스 왕 루이 필리프가 파견한 사절, 지리학자와 저, 그리고 약 20명의 선원을 대동하고 16일 동안 항해한 후 강화조약이 조인되던 바로 그날 남경에 도착하여 조인식을 참관하고, 4명의 중국인 고관들을 전부 만났습니다.” (김대건이 1842년 9월 상해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 p.263
“제가 조선에 돌아왔다는 말이 퍼져나가면, 저뿐 아니라 많은 교우들까지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자칫하면 또다시 군난으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중심 교우 몇 분 외에는 제가 한양에 왔다는 사실을 절대로 알리지 마십시오.”
“부제님, 그러면 요즘 은이 쪽에 계시는 자당慈堂을 은밀히 이리로 모셔 올까요?”
김대건 부제는 잠시 생각을 하다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닙니다. 지금은 혈육의 도리보다 조선 천주교회의 재건을 진두지휘하실 페레올 주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일이 먼저입니다. 허니 제 어머니께도 절대 알리지 마십시오.” — p.341
김대건 부제는 1845년 3~4월 사이에 현석문이 그동안 정리한 ‘조선 교회 설립에 관한 개요’와 ‘1839년 기해박해의 진상’ 그리고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성직자들의 행적’(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의 순교 전 사목 활동과 순교에 이르는 과정 포함), ‘1839년에 한양에서 순교한 주요 순교자들의 신앙과 순교 과정’ (조선의 형벌·감옥·재판 등에 대한 설명 포함)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이 「순교자 보고서」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2020 개정판) 143~212쪽까지 70쪽에 걸쳐 번역 수록될 정도로 많은 분량이다. — p.345
“새로운 한 명의 신부는 바로 안드레아 부제요. 나는 안드레아 부제를 다음 주일인 8월 17일에 김가항 성당에서 조선의 첫 사제품에 올릴 것이오!”
그 순간 조선인 교우들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일제히 함성을 터트리며 페레올 주교에게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또 조선의 첫 사제가 될 김대건 부제에게도 큰절을 했다. 그러고는 북을 치며 “조선의 수선탁덕首先鐸德 (첫 번째 신부) 안드레아 신부 만세!”를 외치며 어깨춤을 췄다. — p.392~393
페레올 주교가 엄숙한 목소리로 “안드레아 김!” 하고 불렀다. 이제부터 세상에서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겠느냐는 물음이었다. 사제 서품식을 처음 참관하는 조선 교우들의 시선이 ‘부름’을 받은 김대건 부제를 향했다. 김대건 부제는 고개를 들었다. 허리를 세우고 일어나면서 큰 소리로 “앗숨 Ad Sum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외쳤다. 자신을 끊고 십자가와 함께하는 신부의 삶을 살겠다는 각오가 담긴 대답이었다. — p.396
조선인 사제인 저 김 안드레아는, 중국 의례에 대하여 규정한 클레멘스 11세 교황의 칙서의 사도 규정과 명령에 대하여, 본 서약 형식이 규정되어 있는 대로, 그 헌장 전체를 최선을 다해 살피며, 온전하고 충실하게 지킬 것입니다. … 저는 이렇게 복음서에 손을 얹고 약속하고, 서약하며 맹세하는 바입니다. 천주님과 천주님의 이 거룩한 복음은 저를 도우소서.
안드레아 김해 김金, 본인 자필 自筆로 서명함 [도판]
‘김대건 신부 서약서’ 원본은 교황청 복음화성에 보관 중이다 (문서번호 Fondo S. O. C. P. vol. 78, f 405). — p.400~401
1931년에 펴낸 필사본 『정씨가사鄭氏家史』에는 김대건 신부가 사목 방문할 때의 모습이 생생하게 서술되어 있다. 김대건 신부는 이천 동산밑(동산리)을 거쳐 단내 정은의 집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성사를 주러 다닐 때는 밤 시간을 이용했다. … 그의 가족들은 이웃들이 눈치챌까 쉬쉬하며 김 신부를 방으로 모시고 성사 받을 준비를 했다. 벽에 깨끗한 종이를 붙이고 그 위에 숨겨놓았던 십자가를 정성스럽게 걸어두는 것이었다. — p.443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
등산 첨사는 이 천주학쟁이가 배교를 하겠다면 조용히 중국으로 돌려보낼 작정이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의 답은 의외로 단호했다.
“나는 천주교가 참되기에 믿는 것이오. 천주교는 천주를 공경하도록 나를 가르치고, 나를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해주오. 나는 천주교를 배교하기를 거부하오!” — p.459
무관 이응식은 주변 나라 사정에 밝고 여러 나라 말을 할 줄 아는 김대건 신부가 조선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중국을 통해 들여온 영국에서 만든 세계지도를 조선말로 번역해보라며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지도를 건네받은 김대건 신부는 번역을 마친 후,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에서 본 대로 각 대륙에 색을 칠하기 위해 이응식에게 여러 색깔의 안료를 가져다주면 채색 지도로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채색 지도를 본 이응식은 깜짝 놀랐다.
“참으로 놀라운 재주를 가졌구나. 이걸 한 장 더 만들면 주상 전하께 올리면서 너를 구명할 방도를 찾아보겠다.” — p.488
세상 온갖 일이 주님의 명령 아닌 것이 없고[莫非主命], 주님의 상벌 아닌 것이 없다[莫非主賞主罰]. 그러므로 이런 환난도 또한 천주께서 허락하신 바이니, 너희는 감수하고 인내하여 주님을 위하고 오직 주님께 슬피 빌어 빨리 평안함을 주시기를 기다려라. … 천주께서 오래지 아니하여 너희에게 나보다 더 착실한 목자를 주실 것이니, 부디 서러워 말고 큰 사랑을 이루어, 한 몸같이 주님을 섬기다가 사후에 한가지로 영원히 천주 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천만 바란다. (김대건 신부가 조선 교우들에게 쓴 마지막 편지 중에서) — p.509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였지만, 여러분들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국경을 넘어 양인들과 교섭한 것은 천주교를 위해서였고, 천주님을 위해서였으며, 나는 그분을 위해 죽는 것입니다. 이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려고 합니다. … 치시오. 나는 준비가 되었소.”
… 그의 목이 잘리면서 머리가 백사장으로 떨어졌다. 1846년 9월 16일, 조선의 첫 번째 사제 김대건 신부의 나이 불과 25세였다. — p.516~518
사랑하는 여러분,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이 기쁨의 날, 저의 이 메시지가 사랑하는 대한민국의 모든 교우들에게 닿기를 바랍니다.
이 기쁜 기념일은 영웅적 신앙의 모범적 증인이며, 한국 백성들이 박해와 고통을 겪었던 어려운 시기에도 지칠 줄 모르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였던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을 보내주신 하느님 아버지를 향해 우리의 기도를 올려드릴 기회가 됩니다.
동료들과 함께 성인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이 미움을 이기기 때문에, 선이 항상 승리한다는 것을 기쁜 희망으로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마르 1,21). (2021년 8월 21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탄생 200주년 미사에 보내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 중에서) — p.528~529
○ 출판사 서평
- 어린 시절과 교우촌에서의 생활, 8년간의 해외 신학생 생활 등 이제껏 공백으로 비워두었던 역사를 새롭게 발굴 및 검증
김대건 신부가 스물다섯 살의 젊은 나이에 순교했다고 하면 깜짝 놀라는 이가 많다. 우리나라 첫 번째 신부라는 사실은 알지만, 구체적인 삶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200년 전, 이 땅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김대건은 어떤 사람이며, 무엇이 그를 사제의 길로 이끌었을까? 어떻게 조선의 첫 번째 사제가 되었으며, 왜 사제 서품 1년 1개월 만에 순교의 길을 걷게 된 것일까? 그리고 한국 천주교에서는 왜 김대건 신부를 모든 성직자의 모범으로 공경하는 것일까? _p.12
김대건 金大建은 한국인 첫 가톨릭 사제이자 순교성인이며, 한국 가톨릭 성직자들의 수호자이다. 1984년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가톨릭의 ‘성인 聖人’으로 추대되었으며, 2019년 유네스코 총회에서 인류의 평화와 발전에 미친 기여를 인정받아 2021년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된 바 있다.
김대건 신부에 관해 그동안 많은 책과 연구 결과가 있었다. 그러나 소년 시절과 마카오에서의 신학 공부 과정은 거의 베일에 가려진 채, 편지 자료를 통해 마지막 3년 정도의 삶만 중점적으로 알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김대건 신부의 자료에는 공백이 많았다. 출생지가 충청도 솔뫼라는 사실은 알려졌지만, 어린 시절의 삶과 경기도 용인 한덕골 교우촌에서의 소년 시절, 그리고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 임시로 설립된 조선 신학교에서의 교과과정과 교재, 심지어 외국어를 모르던 조선의 소년이 어떻게 중국어와 프랑스어, 라틴어까지 배워 능숙하게 편지를 쓸 수 있었는지 등에 대한 부분은 막연한 추측으로 남아 있었다.
전기문학의 불모지와 같은 한국에서 2010년 『간송 전형필』을 출간한 이래 『아, 김수환 추기경』과 『신부 이태석』은 물론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국제법학자, 그 사람 백충현』 『아름다운 사람 권정생』 『천년의 화가 김홍도』 등을 출간한 전문 전기 작가 이충렬 (세례명 실베스테르)은, 한국교회사연구소의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주요 도서와 논문, 심포지엄 발표자료 등을 비교 검토하여 2년 6개월 동안의 대장정 끝에 그동안 공백으로 남겨져 있던 김대건 신부의 행적을 충실한 근거와 함께 생생하게 되살렸다.
- 조선 천주교회의 고난과 희망을 담은 청년 김대건 신부의 드라마 같은 일대기
1845년 (헌종 憲宗 11년) 8월 31일 상해上海의 한 선착장. 물결을 따라 흔들리는 라파엘Raphael호에 오르는 김대건 신부의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작은 배가 다시 무사히 황해를 건널 수 있을까. 마포나루에 도착하면 관헌들의 눈을 피해 무탈하게 상륙할 수 있을까. 만약 그들의 눈을 피할 수 없다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십상인 위험한 길이지만 그래도 조선 천주교를 위해 가야만 하는 길이 아닌가…. _p.20
길이 7.5 미터의 작은 돛배 라파엘호에 몸을 싣고 조선을 향해 상해를 출발하는 장면에서 시작하는 이 전기의 도입부는, 뒤이어 태풍에 의해 표류하는 모습을 통해 김대건 신부의 파란만장한 삶을 상징적으로 예고한다. 서학 (천주교)을 금지하고, 외국인 선교사들마저 공개 처형했던 19세기 조선. 박해와 고통의 시기에도 조선 천주교를 재건하기 위해 몰래 조선을 떠나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다시 삼엄한 경계를 뚫고 귀국하여 해외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하고, 마침내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를 라파엘호에 모시고 황해를 건너게 된 드라마틱한 여정을 생생하게 재구성한다.
고향 솔뫼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천주교 신자들의 엄혹한 상황, 솔뫼를 떠나 한양의 청파와 용인의 교우촌으로 박해를 피해 다녀야 했던 유소년 시절, 어려운 신앙생활 속에서도 조선인 최초의 신학생 세 사람 중 하나로 발탁되기까지의 이야기들, 6개월 동안 1만 리를 걸어서 도착한 마카오까지의 여정, 10대 소년이 머리가 하얗게 셀 정도로 매진했던 5년 반 동안의 마카오 신학생 공부, 남경조약 조인식을 바로 곁에서 참관하는 등 견문을 넓혔던 해외 유학 생활, 프랑스인 선교사를 모시고 8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오기까지의 난관들, 상해 김가항金家巷 성당에서의 역사적인 사제 서품식, 조선의 첫 사제가 되어 라파엘호를 타고 귀국한 뒤의 사목 활동들, 마침내 체포되어 치러야 했던 50여 차례의 신문과 당국의 회유, 험난한 상황 속에서도 남겼던 수많은 편지와 기록들… 한강 백사장에서 순교하기까지 김대건의 스물다섯 일대기는 말 그대로 “영웅적 신앙 (프란치스코 교황)”의 증거이자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다채로운 모험의 연속이다.
순교 후 미리내에 모셔지기까지의 과정과 시성諡聖, 그리고 탄생 200주년을 맞이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보낸 메시지까지, 이 정본 전기는 김대건에 관한 모든 장면과 기록,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담아내고 있다.
- 48개 자료 박스, 30여 장 컬러 지도, 19통의 편지 … 새로운 발굴 자료로 김대건의 신앙여정을 새롭게 밝히다
그동안 흐릿한 사본을 통해 존재만 알려졌던 「김대건 신부 서약서」(교황청 복음화성 문서번호 Fondo S. O. C. P. vol. 78, f 405)도 이 전기에서 최초로 원본을 공개한다. 이 자필 서약서는 2021년 한국교회사연구소가 교황청을 통해 입수한 원본 이미지 자료로, 김대건 신부가 첫 번째 조선인 사제로서 교황청이 정한 절차를 완벽히 밟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본문 400~401쪽 수록). 또한 한국교회사연구소의 번역을 통해, 김대건 신부가 1845년 8월 17일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후 라파엘호를 타고 조선으로 출발하기 하루 전인 1845년 8월 30일에 이 서약서를 작성하였고, 페레올 주교가 확인 서명을 했음을 밝혀내는 등 ‘정본 전기’에 걸맞는 새로운 사실의 확인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전에도 김대건 신부 전기는 여러 종류가 나와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사료가 남아 있는 시기들만 집중적으로 다룰 뿐, 김대건 신부의 어린 시절, 교우촌에서의 신앙생활, 마카오 신학생 시절의 학습 과정 등은 자세히 다루어지지 않았거나 왜곡된 부분이 많았다. 양반 출신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어린 시절을 다소 낭만적으로 다룬 드라마도 있었지만, 집안 어른들의 잇따른 순교로 인해 용인 교우촌으로 가족들이 몸을 옮겼을 때는 이미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을 때였다.
작가는 지나친 영웅주의나 미화 대신, 지금까지 놓쳤던 주변 인물들, 스승, 후배, 친구들의 기록까지 샅샅이 뒤져서 단서가 될 만한 내용을 찾아냈다. 그와 함께 당시 생활상과 언어의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 1800년대 말 박해 시대를 배경으로 쓴 소설까지 참고하여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김대건의 삶을 복원했다. 이러한 작업의 결과, 초기 한국 천주교회와 김대건 신부 삶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자료를 충실히 제시한다.
페이지 아래 109개의 주석 외에도 주요한 장면에서는 별도의 ‘자료 박스’를 48개 배치하여 더욱 상세한 설명을 제공한다. 컬러 고지도에 설명을 붙이거나 별도의 안내도를 제작하여 김대건 신부의 신앙 여정을 정확하고 생생하게 안내한다. 솔뫼에서 청파를 거쳐 용인 한덕골로 이동했던 초기 이주 루트, 선교사들이 북쪽 국경을 넘어 조선으로 잠입을 시도했던 선교 루트, 최초 조선 신학생 세 사람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의 1만 리 마카오 도보 루트, 첫 사제가 된 이후의 귀국 루트, 귀국 후 국내 선교 루트 등을 표시한 이 컬러 지도들을 통해 ‘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길’을 새로이 구축해볼 수 있을 정도이다.
역사 복원을 위해 참고한 자료와 연보까지 자세하게 제시하여, 이후 김대건 신부나 초기 한국 천주교회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에게도 귀한 지침이 될 것이다.
○ 추천평
“김대건 신부는 영웅적 신앙의 모범적 증인이며, 한국 백성들이 박해와 고통을 겪었던 어려운 시기에도 지칠 줄 모르고 복음을 전하던 사도.” – 프란치스코 교황
“김대건 신부님이 보여준 깊은 신앙심과 큰 용기는 오늘을 사는 신자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작가는 역사적 사실과 확실한 문헌적 근거를 바탕으로 신부님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복원했습니다. 당시 조선의 신자들이 위험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신앙을 지키려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는 귀한 자료입니다.” – 정순택 대주교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치밀한 고증뿐 아니라 근거가 확실한 새로운 내용이 많아서 놀랍다. 다수의 옛 지도를 통해 김대건 신부의 삶과 활동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두었다. 김대건 신부님의 삶 속에 조선 후기의 천주교 역사, 박해 시기를 살아가던 교우촌 생활과 신앙생활을 잘 담아냈고, 그동안 김대건 신부의 삶에서 공백으로 남아 있던 부분도 철저한 고증을 통해 복원함으로써 ‘정본 定本 전기’라고 인정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 조한건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