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김수로왕 : 금관가야의 역사와 문화
김종성 / 서연비람 / 2022.2.5
가락 9촌을 통합하여 왕위에 오른 김수로왕이 세운 가락국을 기원으로 하여 490년간 존속된 금관가야의 김수로왕과 금관가야의 역사와 문화에 관해 쓴 책이다. 이 책을 읽는 중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 그리고 일반인들이 한국사와 한국문화를 공부하면서 사고의 깊이를 넓히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금관가야는 비단 가야문명의 출발일 뿐만 아니라, 신라 문명 형성의 일익을 담당한 나라였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이 반드시 알아야 고대국가이다.

○ 목차
머리말
- 가야의 여명
- 금관가야의 건국
- 김수로왕과 탈해의 쟁패
- 김수로왕과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의 결혼
- 삼한과 변진
- 변한 12국과 가야
- 황산진 전투
- 구간 명칭 변경과 직제 개편
- 허왕후와 김수로왕의 죽음
- 포상팔국의 난
- 백제·금관가야·왜 연합군과 신라·고구려 연합군의 전쟁
- 금관가야의 재도약 시도
- 금관가야의 멸망
- 금관가야의 사회
- 금관가야의 문화
- 금관가야의 문학
- 금관가야의 유민
- 임나일본부 문제와 가야사 연구의 현재
김수로왕-금관가야의 역사와 문화 해설
김수로왕 연보 및 금관가야사 연표
한국사 연표
참고문헌
○ 저자소개 : 김종성
강원도 평창 출생.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희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 및 고려대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2004년 「한국현대소설의 생태의식연구」로 고려대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1986년 제1회 월간 『동서문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검은 땅 비탈 위」 당선.
2006년 제9회 경희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
연작소설집 『마을』(실천문학사, 2009),
『탄(炭)』(미래사, 1988) 출간. 중단편집 『연리지가 있는 풍경』(문이당, 2005), 『말 없는 놀이꾼들』(풀빛, 1996), 『금지된 문』(풀빛, 1993) 등 출간. 『한국환경생태소설연구』(서정시학, 2012), 『글쓰기와 서사의 방법』(서정시학, 2016), 『한국어 어휘와 표현Ⅰ:파생어ㆍ합성어ㆍ신체어ㆍ친족어ㆍ속담』(서정시학, 2014), 『한국어 어휘와 표현Ⅱ:관용어ㆍ한자성어ㆍ산업어』(서정시학, 2015), 『한국어 어휘와 표현Ⅲ:고유어』(서정시학, 2015), 『한국어 어휘와 표현Ⅳ:한자어』(서정시학, 2016), 『글쓰기의 원리와 방법』(서연비람, 2018) 등 출간. 『인물 한국사 이야기(전 8권)』(문예마당, 2004년) 출간.
도서출판 한벗 편집주간,
도서출판 집문당 기획실장,
고려대출판부 소설어사전편찬실장,
고려대 국문과·경기대 문예창작과 강사
장안대 문예창작과·경희대 국문과 겸임교수
고려대 문화창의학부 교수 역임.

○ 책 속으로
P.14~15
청동기 시대의 민무늬 토기는 대체로 붉은빛을 많이 띤 갈색을 띠고 있었으며,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사용했던 이른 민무늬 토기처럼 무늬는 없다. 그러나 모양은 주로 바닥이 좁은 것과 판판한 것의 두 가지가 있었고, 훨씬 세련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서기전 1,000년경 농경문화와 함께 정착된 민무늬 토기는 서기전 300년경 중국으로부터 밀려드는 회색경질토기와 와질 토기에 밀려 점차 사용 빈도가 줄어들었다. 이렇게 민무늬 토기와 간석기ㆍ청동기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청동기 시대를 포괄하는 문화를 민무늬 토기 문화라고 한다. 이것은 신석기 시대의 주류를 이루는 빗살무늬 토기 문화와 구분된다. 철기 시대는 청동기 시대 다음에 오는 시기이다. 인류가 철을 원료로 하여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게 된 시기부터 역사 시대 이전까지의 시기인 서기전 300년에서 서력기원 전후까지 약 300년간의 시기를 철기 시대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서기전 4세기경부터이다.
P.29~31
후한의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년 봄 3월 계욕일에 사는 곳의 북쪽 구지봉에서 이상한 소리가 부르는 것이 있었다. 백성 2, 3백 명이 그곳에 모였다.
“여기에 누가 있느냐?”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 모습을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했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구간들이 대답했다.
“내가 있는 곳은 어디냐?”
또 말하였다.
“구지입니다.”
구간들이 대답했다.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가서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였기 때문에 내려왔다. 너희들은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기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서 먹겠다.
구하구하(龜何龜何)
수기현야(首其現也)
약불현야(若不現也)
번작이끽야(燔灼而喫也)
라고 하며 발을 굴러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게 되어 기뻐 뛰게 될 것이다.
구간들은 그 말에 따라 모두 기뻐하며 노래 부르고 춤추었다. 얼마 안 되어 우러러 쳐다보니 북쪽 구지봉의 하늘에서 자주색의 줄이 내려와 땅에 닿아 있었다. 줄의 아래를 살펴보니 붉은색의 보자기에 싸여 있는 금합이 하나 있었다. 구간들이 그것을 열어젖히자 해같이 둥글고 빛나는 황금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서 함께 몸을 펴서 백번 절하였다. 얼마 있다가 그 알을 싸서 안고 아도간의 집으로 돌아와 평상 위에 놓아두고 사람들은 각기 흩어졌다.
P.51
어느 날이었다. 금관가야 앞바다에 이상한 배 한 척이 와 닿았다. 김수로왕(재위: 42년~199년)이 금관가야를 다스린 지 3년째가 되는 해의 일이었다. 배에서 내린 탈해는 바닷가를 따라 걸어갔다. 키가 석 자(尺)이고 머리둘레가 1자(尺)나 되었다. 대뜸 탈해가 궁궐로 들어갔다.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
탈해가 김수로왕에게 말했다.
“하늘이 나에게 명해서 왕위에 오르게 하여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도록 하였으니 감히 하늘의 명을 어기고 왕위를 그대에게 넘겨줄 수 있겠는가? 또한, 나의 나라와 백성을 그대에게 맡길 수도 없다.”
P.68
고조선 남쪽 지역인 한강 이남에는 일찍부터 ‘진(辰)’이라는 나라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한반도 남부 지역은 기후가 따뜻하고, 큰 강을 끼고 있고, 평야가 많은 지역이어서 사람들이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살았다. 한나라와 활발한 교역을 하며 세력을 넓히고 있던 진(辰)은 서기전 2세기경 고조선의 방해로 중국과의 교류가 저지되기도 했다. 고조선 사회의 변동에 따라 대거 이주해온 고조선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문화와 철기가 보급되어 토착 문화와 융합되면서 서기전 3세기 이후 철기 문화 단계로 들어간 진(辰)은 더욱 성장하여 마한ㆍ진한ㆍ변한의 연맹체들이 형성되었다.
P.95~96
『삼국유사』에 가락국의 왕력까지 기록하고 있는 것은 주목된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금관국, 가야국, 남가야, 대가야, 아라국, 고령가야, 비자화국, 감문국 등이 보이고, 『양직공도』에는 반파, 탁, 다라, 전라, 상기문 등의 이름이 보인다. 그리고 『일본서기』에는 남가라국, 반파국, 안라국, 비자발국, 고차국, 탁순국, 사이기국, 다라국, 졸마국, 자타국, 산반해국, 걸손국, 임례국, 대사국, 기문국, 탁기탄국, 상다리국, 하다리국, 사타국, 모루국 등의 이름이 보인다. 이들 가운데 건국 신화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나라 이름으로 ‘가야’ 혹은 ‘가라’라는 이름을 쓴 나라는 김해의 금관가야(가락국, 대가락, 임나가라, 남가야, 하가라)와 고령의 대가야(반파국, 상가라)뿐이다. 신라와 백제의 영역이 아니었던 지역을 가야라 하고, 후대 사람들이 가야 지역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지역에 가야 계통의 유물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가야 여러 나라가 정치적ㆍ경제적ㆍ문화적으로 서로 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P.109
후한 영제 중평 6년 기사(189년) 3월 1일에 허왕후가 죽었다. 나이는 157세였다. 온 나라 사람들은 땅이 꺼진 듯이 슬퍼하여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사하였다. 금관가야 사람들은 허왕후가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으려 하여 처음 배에서 내리던 도두촌을 주포촌이라 하고, 비단 바지를 벗은 높은 언덕을 능현이라 하고, 붉은 기가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이라고 했다.
잉신 천부경 신보와 종정감 조광 등은 금관가야에 온 지 30년 만에 각각 두 딸을 낳았다. 그들 부부는 1, 2년을 지나 모두 죽었다. 그 밖의 노비 무리도 금관가야에 온 지 7, 8년 사이에 자식을 낳지 못하고, 오직 고향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품고 고향을 생각하다가 모두 죽었다. 그들이 거처하던 빈관은 텅 비고 아무도 없었다.
P.122
이때부터 사회계급이 명백히 구분되는 계층사회라는 것을 보여 주는 초기국가의 특징을 금관가야가 보여 주고 있다. 금관가야의 지배자 계급에서는 전통적인 덧널무덤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었고 그 반면에 그 아래 계급에서는 주검을 위에서 수직으로 넣도록, 옆으로 트인 창이나 입구 없이 돌로 네 벽을 짠 무덤인 구덩식 돌덧널무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가야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먼저 초기국가의 단계에 진입한 금관가야가 2, 3세기경 전기 가야 연맹을 형성하고 그 중심 세력으로 떠오르게 된 것은 이곳으로 낙동강이 흘러가고 있고, 바다를 끼고 있어 바다와 강물을 이용한 해상 교통이 편리해 낙랑군 등 한나라 군현이나 왜 등과 중계무역을 함으로써 금관가야가 경제적으로 크게 번영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금관가야가 있던 김해와 그 부근 창원 지방과 양산 지방에는 철이 많이 생산되었다. 금관가야는 철제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산업 생산력을 높이고 철제무기를 개발함으로써 군사력을 키울 수 있었다.
P.150
탁순국과 금관가야는 백제와 신라의 위협으로부터 시달리고 있었다. 탁순국왕 아리사등은 왜(倭)의 사신 아후미노 게나노오미를 중개인 자격으로 두고, 신라왕과 백제왕에게 탁순과 금관가야를 안정화하기 위해 평화 회담을 요청했다. 하지만 신라왕과 백제왕은 지위가 낮은 관리를 대표로 보내는 등 무성의한 태도를 보였다. 대가야는 신라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P.168
가야의 공예에서 빠트릴 수 없는 것이 토기이다. 가야 토기는 민무늬 토기의 제작 기술을 계승한 적갈색 연질토기와 회청색 경질토기로 나뉜다. 또한 1∼3세기에 많이 만들어졌던 적갈색 연질토기는 음식물 조리 등 일상생활에 사용한 생활 용기였다. 그리고 4∼6세기에 생활 용기와 껴묻거리로 제작된 회청색 경질토기는 섭씨 900도∼1,200도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단단한 질(質)의 토기를 말한다.
P.204
김유신의 조상은 532년에 멸망한 금관가야의 왕족이었다. 『삼국사기』ㆍ『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의하면, 김유신의 아버지는 각간 김서현, 할아버지는 각간 김무력, 증조할아버지는 구형왕, 고조할아버지는 겸지왕이었다. 김유신의 어머니는 만명부인이었다. 만명부인의 증조할아버지는 지증왕이었고, 할아버지는 진흥왕의 아버지인 입종 갈문왕, 아버지는 숙흘종이었다.
P.240~241
1990년부터 2014년까지 모두 9차례에 걸친 대성동 고분군의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금동관ㆍ청동항아리ㆍ금동제허리띠ㆍ금동제 말갖춤새ㆍ로만 글라스ㆍ소용돌이 모양의 청동기 장식인 파형동기 같은 금관가야 유물은 4세기 전후 시기 대가야와 신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대성동 고분군에서 나온 유물은 같은 시기 왜의 고분에서 나온 유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우위를 보이는 등 4세기 당시 금관가야의 문화 수준이 왜보다 앞서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어 왜가 3∼4세기에 한반도 남부 지역에 임나일본부를 두어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견해는 설 자리를 잃었다.

○ 출판사 서평
지은이가 금관가야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한 권의 학술서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도 각급 학교에서는 전기가야연맹의 맹주국은 금관가야였고, 후기가야연맹의 맹주국은 대가야였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2003년 봄볕이 다사롭게 쏟아지던 날 학교 정문 가근방의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그 학술서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기술되어 있었다. 변진구야국은 김해의 금관가야가 아니라, 고령의 대가야이며, 미오야마국은 거제도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임나가라는 김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령에 있었으며, 금관가야는 실제로 가야의 맹주 노릇을 하지 못했고, 『삼국유사』에 나오는 6가야 중 가장 약체로 보잘것없는 작은 나라라고 기술되어 있었다.
금관가야가 보잘것없는 작은 나라가 아니었다는 증거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꼼꼼하게 읽어보면 알 수 있는 내용이고, 김해·부산 지역에서 출토된 고고자료를 살펴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김해의 대성동고분군·양동리 고분군·봉황대유적·원지리고분군, 부산의 복천동고분군 등에서 쏟아져 나온 고고자료들은 김해를 중심으로 한 낙동강 하구 일대에서 가야 문명의 꽃을 피운 금관가야가 3∼4세기대에는 가야 여러 나라 중 최강자였으며, 5세기 이후에도 다른 가야 여러 나라들과 병립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1960년∼70년대 『삼국유사』 ‘가락국기’조와 ‘5가야’조에 나오는 가야 소국들의 위치 비정을 시작으로 한 가야사 연구는 1990년대 이후 가야사에 관한 많은 학설이 발표되었다. 그러한 학설과 견해 가운데 정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을 각급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정답’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사학자가『삼국유사』에 나오는 고령가야를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인 듯하다.”라고 추정한 것을 아직도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나름대로 타당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나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삼국유사』에 고령가야국이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에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다는 것과 현재 학계에서는 고령가야국이 과연 가야 소국의 하나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부정적 견해와 긍정적 견해가 있다는 것을 함께 가르쳐 학생들이 비판적 사고력을 키워 창의적인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가야에 관한 자료를 읽으면서 가야사를 둘러싸고 고대의 가야 여러 나라가 영남의 각 지역에 자리 잡고 멸망할 때까지 공존과 경쟁 양상을 보이면서 병립했듯이 현대의 영남 지역의 지방자치단체와 대학들이 가야사를 둘러싸고 공존과 경쟁 양상을 보이면서 병립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은이가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한국현대소설을 연구하던 2003년 무렵에도 각급 학교에서는 전기 가야연맹의 맹주국은 금관가야였고, 후기가야연맹의 맹주국은 대가야였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그해 봄 학교 정문 가근방의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단행본에서는 전혀 다른 학설이 기술되어 있었다. 변진구야국은 경상남도 김해의 금관가야가 아니라, 경상북도 고령의 대가야이며, 금관가야는 실제로 가야의 맹주 노릇을 하지 못했고, 『삼국유사』에 나오는 6가야 중 가장 약체로 ‘보잘것없는 작은 나라’라고 기술되어 있었다. 그 학술서의 지은이는 문헌사학자였다.
금관가야가 ‘보잘것없는 작은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고고자료를 통해 실증적으로 밝혀준 사람은 고고사학자였다. 금관가야가 보잘것없는 나라가 아니었다는 증거는 김해·부산 지역에서 출토된 고고자료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김해의 대성동고분군뿐만 아니라, 양동리 고분군· 봉황대유적· 원지리고분군, 부산의 복천동고분군 등에서 출토된 고고자료들은 김해를 중심으로 낙동강 하구 일대에서 가야 문명의 꽃을 피운 금관가야가 3∼4세기에는 가야 여러 나라 중 최강자였으며, 5세기 이후에도 다른 가야 나라들과 병립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문헌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가야사 연구에서 고고학적 기반이 없이 연구하면 모험적이라는 것을 어느 문헌사학자의 학술서가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가야사를 고고자료 위주로만 연구하는 것도 모험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도 있다. 어느 고고사학자가 주장한 ‘금관가야 4세기 멸망설’이 그것이다. 『삼국사기』·『삼국유사』,『신증동국여지승람』, 그리고 『일본서기』 등의 문헌 자료에 금관가야(가락국)가 532년에 멸망했다고 기술되어 있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은 그의 학설이 모험적이라는 것이 대성동고분의 추가 발굴과 원지리고분의 발굴을 통해 발굴된 고고자료로 인해 드러났다.
금관가야를 비롯해 가야 여러 나라를 연구한 결과물인 논문이나 학술서를 발표하는데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통해 연구한 결과물인 논문이나 학술서가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한 사람이 읽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고고학 용어가 그대로 문장에 쓰여 있다는 것이다. 어려운 고고학 용어를 구사하여 난해한 문장으로 쓴 논문이나 학술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글을 쓸 때 ‘금관가야’를 ‘가락국’ 혹은 ‘남가라’라고 쓴다. 일부 학자들의 주장에 따라 어느 지방자치단체는 누리집에 ‘금관가야’를 ‘가락국’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그 지방자치단체가 금관가야를 가락국이라고 표기한 것은 당대의 가락국 사람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가락국이라 불렀으므로 가락국이라 써야 하며 금관가야는 고려시대 사람들의 생각이 투영된 나라 이름이라는 주장을 펴는 학자의 학설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임나가라라는 표기는 ㅇㅇ가야식 표기라고 볼 수 있으며, 금관가야는 가야 여러 나라 중 금관국이라는 표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고조선 시대의 ‘조선’사람들이 자신들의 나라 이름을 ‘고조선’이라고 부르지 않았던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중·고등학교 교과서는 물론 일반 서적에도 모두 고조선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금관가야는 역사서에 구야한국, 대가락국, 가락국, 가야, 임나가라, 남가라, 수나라, 임나, 금관국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학술서가 아닌 교양서, 교과서, 참고서 등에서는 ‘가락국’ 혹은 ‘남가라’ 대신 금관가야라고 표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의 초·중·고등학교에서 ‘가락국’ 혹은 ‘남가라’를 ‘금관가야’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지은이가 ㈜ 서연비람의 ‘역사와 문학 비람북스 인물 시리즈의 하나로 펴내는 『김수로왕-금관가야의 역사와 문화-』는 가락 9촌을 통합하여 왕위에 오른 김수로왕이 세운 가락국을 기원으로 하여 490년간 존속된 금관가야의 김수로왕과 금관가야의 역사와 문화에 관해 쓴 책이다. 이 책을 읽는 중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 그리고 일반인들이 한국사와 한국문화를 공부하면서 사고의 깊이를 넓히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김수로왕-금관가야의 역사와 문화-』는 지난번 출간한 『김유신-전쟁터를 누비며 삼국통일의 불꽃이 되다-』에 이어 지은이의 가야사에 관한 관심의 표출이다. 금관가야는 비단 가야문명의 출발일 뿐만 아니라, 신라 문명 형성의 일익을 담당한 나라였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이 반드시 알아야 고대국가이다.
끝으로 지은이는 오래전부터 역사 인물에 관심을 가져 『인물한국사 이야기』 전 8권을 2004년에 출간한 바 있다. 『인물한국사 이야기』의 개정 증보판을 새롭게 펴내기 전에 한국사의 주요 인물에 대한 평전과 그 인물이 살았던 시대의 역사와 문화에 관해 쓰기로 마음먹고 그 두 번째 책으로 『김수로왕-금관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펴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