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
깡디드
볼테르 / 종합출판범우 / 2019.11.25
– 프랑스 계몽사상가요, 문학가인 볼떼르의 ‘청년 깡디드’ 이야기
‘깡디드’는 우화소설로 작가의 사회, 정치, 철학 사상을 풀어쓴 작품이다. 낙천주의 철학자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소년 깡디드는 오로지 그의 교훈대로 현실을 ‘최선의 세계’라 믿었지만 남작의 딸 뀌네공드를 사랑했기 때문에 독일 왕국의 작은 성에서 추방된다. 그 뒤로 포르투갈, 터키, 아메리카 여러 나라를 박해와 환멸과 곤욕 속에서 방황한다. 그 동안에 만난 숱한 인물로부터 인간의 교활함과 우매함을 체득한 깡디드는, 낙천주의만이 이 세상을 통찰하는 철학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볼떼르는 이 작품에서 라이프니츠의 낙천주의와 신학적 목적론을 통렬하게 풍자하고 있다.
○ 목차
이 책을 읽는 분에게 ·5
성에서 쫓겨나다 ·11
불가리아 병사로서 ·14
네덜란드로의 탈출·18
빵글로스와의 재회·22
난파와 지진 ·27
지진을 막아내는 화형 ·32
뀌네공드를 만나다 ·34
뀌네공드의 체험·37
예기치 못한 두 살인·42
군함에 올라 ·45
노파의 이야기 ·48
노예 생활 ·53
또 한번의 이별 ·59
파라과이에서 만난 남작 ·63
남작을 살해하고 ·69
대이족을 만나 ·72
별천지에서 ·78
황금향을 뒤로 하고 ·83
교활한 선장을 만나 ·92
노학자와의 대화 ·100
보르도 행 배 위에서 104
간악한 빠리인들 ·107
처형당한 해군 제독 ·126
불행에 건 내기 ·128
베네치아의 석학 ·136
여섯 황제의 이야기 ·145
노예가 된 옛 얼굴들 151
죽음에서 벗어나 ·158
다시 만난 사람들 ·163
지금은 뜰을 경작할 때 ·165
해설 / 볼떼르와 깡디드 174
연 보 / 186
○ 저자소개 : 볼테르 (Voltaire, 본명 :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
18세기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시인, 극작가, 비평가, 역사가인 다재다능한 작가 볼테르 (필명)는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 (Franois Marie Arouet)’라는 이름으로 1694년 11월 21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난 볼테르는 열 살에 예수회가 운영하던 루이 르그랑 (Louis le Grand) 학교에 들어가는데, 이 학교에서 금세 두각을 드러내고 평생 이어갈 교유관계들도 형성한다. 한편,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대부 (代父)인 샤토뇌프 신부가 그를 쾌락주의적이고 무신론적인 귀족들과 시인들이 모이는 ‘탕플 (Temple)’이라는 문학 살롱에 데리고 간다. 17세에 루이 르그랑 학교를 떠나면서 아버지에게 문인이 되고 싶다고 말하지만 아버지는 이에 반대하며 법조계를 택하라고 강경하게 권한다. 그래서 법학 대학에 등록은 하지만 탕플을 계속 드나들면서 사치와 방탕을 선망한다.
이후에도 소 (Sceaux)성 (城)의 문학 살롱을 드나들면서 재기를 발휘하며 문학적 재능을 증명해 보이던 그는 청년 시대에 섭정 오를레랑 공을 풍자한 시의 작자로 간주되어 바스띠유에 갇혔다가 출옥한 뒤, 볼떼르란 필명으로 24세라는 아주 이른 나이에 『오이디푸스 (Oedipus)』(1718)라는 비극 작품으로 유명해진다. 그 시대의 많은 작가들이 그렇듯 볼테르도 존중받는 장르였던 비극과 시로써 작품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작가로서의 볼테르는 비극 작품들과 서사시, 역사물 등을 통해 빠른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은 오늘날에는 별로 읽히지도 않거니와 잘 알려져 있지도 않다.
반면, 나중에 재미삼아 쓰고 익명으로 출간한 콩트들이 오늘날까지 매우 잘 알려져 있다. 그중 가장 많이 읽히고 널리 알려진 작품은 『캉디드 (Candide, ou l’Optimisme)』(1759), 『자디그 (Zadig, ou la Destinee)』(1748), 『랭제뉘 (L’Ingenu)』 (1767)다. 디드로의 『백과전서』 집필에도 참여하는 등 철학자로서, 작가로서, 행동하는 양심으로서 평생 왕성한 활동을 벌인 볼테르는 84세까지 장수를 누렸지만, 프랑스 대혁명은 보지 못하고 1778년 5월 30일에 죽었다. 1791년에는 국가를 위해 큰 공헌을 한 인물들만 들어가는 팡테옹 (Pantheon)에 안치된다.
프랑스 계몽기의 대표적 철학자로 꼽히는 볼테르는 프랑스의 지성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종교적 광신주의에 맞서서 평생 투쟁했던 그는 관용 정신이 없이는 인류의 발전도 문명의 진보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그의 저서들 속에는 당대의 지배적 종교 권력이었던 가톨릭에 대한 비판이 꾸준히 등장한다. 그의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가 전통적 가치들의 토대인 기독교 정신을 무너뜨리려 하고, 풍기를 문란케 한다고 비난했다. 나이가 70세에 가까웠을 때는 그 유명한 ‘칼라스 사건’을 계기로 종교적 불관용의 희생자들을 변호하고 돕는 활동들을 사재를 털어가면서까지 적극적으로 벌여서 오늘날까지도 관용의 상징적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그는 생전에는 대시인으로 대접받았지만, 그의 재능의 본질은 풍자 작가, 명쾌하고 기지에 찬 프랑스적 산문 작가의 전형에 있으며, 특히 철학적 에세이와 우화 소설에 뛰어났다. 이신론(理神論), 이성론의 입장에서 초자연을 강하게 부정하고 신랄하게 성서를 비판해, 후세에 그의 이름은 회의 정신의 상징이 되었다. 계몽주의의 보급을 통해 대혁명의 정신적 기반을 형성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철학의 간』(1734), 『깡디드』(1759), 『관용론』(1763), 『철학사전』(1764) 등이 있다.
– 역자 : 염기용
마산고등학교,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였다. 경남매일신문 문화부장, 편집부장을 역임하였고, [조선일보] 출판국 출판부 부국장을 역임하였다.
○ 책 속으로
볼떼르는 몽테스키외와 함께 18세기 프랑스 계몽사상을 대표하는 작가로 유명하다. 볼떼르 하면 또한 디드로와 함께 「백과전서」를 연상할 수 있다. 그는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처녀작으로 발표하여 문인으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나, 당시에 모순된 사회와 정치를 신랄하게 파헤쳐 바스티유 감옥에서 몇 번이나 옥고를 치렀다. 그러는 중에도 서간시, 극작을 발표했으나 당시의 파리의 ‘거센 압력’을 견디지 못해 자주 로렌 지방으로 피신하거나 혹은 영국을 비롯한 프러시아, 네덜란드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그의 사상을 펴나갔다.
그는 처음으로 감옥에서 나와 눈부신 햇살을 보며 “좋은 문학가가 되려면 먼저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한다”는 자각에서 사업에 투신,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 「깡디드」는 그의 사회 · 정치 · 철학 · 사상을 풀어쓴 소설이다. 평론가 브레통은 18세기를 휩쓴 프랑스의 사상 소설 가운데 하나만 내세운다면 서슴없이 이 소설을 들겠노라고 했고, 훨씬 뒤인 20세기의 프랑스 지성을 대표하는 앙드레 지드 같은 작가도 “만 권의 세계문학 가운데서 만약 전쟁으로 책 열 권밖에 가질 수 없다면, 바이블과 셰익스피어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볼떼르의 「깡디드」를 빠트리지 않겠다”고 할 정도였다.
그토록 잘 알려진 이 작품은 볼떼르의 시작(詩作)이나 극작을 포함한 많은 저서 가운데 예술적 가치가 높고 생명이 긴 소설로, 사상적 경향이 많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볼떼르는 그의 사상을 대중에게 쉽게 전하려면 먼저 그 장르에 있어 소설이 가장 합당하리라는 생각에서 75세 이후에도 계속 소설을 썼다.
「깡디드」는 당시의 사회가 지닌 뿌리 깊은 병폐와 종교에의 맹신을 철저히 부정하고, 인간 스스로가 이성에 호소하여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을 주제로 삼았다. — 「이 책을 읽는 분에게」중에서
○ 캉디드 (Candide, ou l’Optimisme)
캉디드 (Candide, ou l’Optimisme)는 프랑스의 작가 볼테르가 1759년에 쓴 철학적 풍자 소설이다. 당시의 지배 계급이었던 로마 가톨릭교회 예수회 와 종교재판소 등 성직자들의 부패상을 묘사해 큰 파문을 일으킨 작품이다.
– 캉디드 (Candide, ou l’Optimisme)
.언어: 프랑스어
.장르: 철학 꽁트, 풍자, 피카레스크 소설, 성장소설
– 개요
당대에 논란이 되고 있던 철학사상을 염두에 두고 쓴 볼테르의 철학소설이다. 볼테르는 ‘순박한’ 캉디드를 통해 당시의 정치, 철학, 종교 등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삶에 회의를 느낄 수밖에 없는 역경을 겪으면서도 낙천주의자 캉디드가 추구했던 행복은 많은 논점을 던지고 있다.
– 해설
캉디드, ‘순진한’, ‘순박한’이란 이름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 소설은 작가 볼테르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유럽에서는 대단한 문제작이며 훌륭한 작품으로 최근에도 많은 연구 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세상을 낙천주의로 볼 것인가 아니면 비관주의로 볼 것인가를 화두로 던지고, 끝까지 이 두 이데올로기의 반복을 기저에 깔고 있다. 이는 당대에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던 철학사상을 염두에 두고 쓴 소설인 것이다.
우선 이 작품은 주인공 캉디드를 내세워서 낙천주의로 출발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작가는 우선은 낙천주의, 즉 당대에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던 철학적 논쟁 중에서 라이프니츠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니면 오히려 라이프니츠의 틀에 박힌 듯한 낙천주의를 공격한 것일까? 반대로 비관주의 또는 염세주의의 편에 가담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그 중간쯤에 위치하는 제 3의 철학을 택할 것인가? 아마도 그 대답은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시점에서야 알게 될 것이다.
캉디드, 그는 이름의 뜻처럼 순진하기 이를 데 없다. 소위 말하면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 그의 여정을 추적하는 것 자체가 흥미를 유발하고 때로는 어처구니없는 어리석음에 실소를 자아내게도 한다. 그러면서 그는 어렸을 적에 배운 낙천주의를 유지한다.
– 줄거리
매우 유순하고 고지식하고 순박한 소년 캉디드는 웨스트팔리아의 툰더 텐 트롱크 남작의 성에서 자라게 된다. 그는 남작의 아들 및 그의 누이동생 퀴네공드 양과 함께 팡글로스 선생으로부터 교육을 받게 되는데, 이 선생은 ‘세상은 최선으로 되어있다’(Tout est pour le mieux)는 것을 증명해 보이곤 했다. 요컨대 “세상과 인생의 의의 및 가치에 대해 악이나 반가치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현실의 세계와 인생을 최선의 것으로 보는 주의” 말이다. 비록 현실은 괴롭다 치자! 그래도 미래는 분명 즐겁고 희망적으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의 낙천관은 무리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캉디드의 삶으로 이 소설은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의 캉디드가 남작으로부터 퀴네공드 양을 사랑한다는 의심을 받고 성에서 쫓겨나, 불가리아 군대에 들어가는 일,네덜란드에서 착한 재침례교도를 만난 일, 아메리카에서 겪는 일, 등 그가 만나는 일들은 최선의 상태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악, 최악으로 되어있다는 인상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가 가는 곳은 엘도라도를 제외하고는 어디나 낙천적인 모습들보다는 추한 모습이며 악한 모습들로 가득 차있다. 군인도, 거룩해야할 종교계의 신부들의 모습도 추악한 모습들뿐이다. 어디에나 정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와 사기, 평화가 아니라 싸움이나 전쟁만이 즐비하다. 뿐만 아니라 자연에서 발생하는 지진 같은 것 그가 가는 곳 어디나 불행의 요소, 즉 비관적인 요소들만이 등장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만나는 사람들도 그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하는 일을 막거나 방해하는 사람들, 그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사기를 치고, 속이고 핍박을 가하는 사람들이며, 그가 어깨를 기대어 쉴 수 있는 사람은 없고 오히려 그에게 의지하려는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뿐이다.
그뿐인가? 착하디착하고,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의 주인공 캉디드는 본의 아니게 가톨릭 종교재판소 판사를 죽이기도 하고 예수회 신부를 칼로 찌르고 도망치기도 하고, 원숭이를 죽이기도 한다. 어디에 가나 속고 사기를 당하고, 고통을 당하며 도무지 되는 일이라곤 전혀 없다. 그야말로 그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이 세상은 저주받은 세상이며 최악으로 구성된 비관적인 세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에게는 그토록 존경하는 팡글로스 선생이 가르쳐준 낙천주의 철학을 버리는 일만이 남아있다.
이제 그 일을 부추기기 위한 존재로 마르탱이 비관주의 또는 염세주의를 들고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까? 그러면 이제 우리의 주인공 ‘캉디드’는 “세계 및 인생을 추악하고 괴로운 것으로 보며, 진보나 개선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철학”의 편에 서야하는 것일까?
그러나 우리의 순진한 주인공은 낙천주의를 증명해 보이기 위하여 여러 사람을 만나기도 하지만 모두가 비관적인 일뿐이다. 심지어 그의 주변 인물들이나, 잊혔던 인물들이 다시 나타나지만 그들 역시, 그들의 경험담 역시 온갖 추악한 일들뿐이다. 결국 선과 악으로 대별되는 마음의 싸움에서 악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 신의 섭리라면 이제는 이 세상을 비관주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거기서 그는 팡글로스를 다시 만난다. 팡글로스의 모습은 변했으나 여전히 낙천적이다. 그래서 낙천주의는 유보되지만 이후에도 당하는 일마다 비관적인 상황들뿐이다. 그러면 이 소설은 낙천주의를 비판하고 비관주의를 옹호하는 것일까? 하지만 이 소설은 어떤 철학의 편을 드러내지 않고, 독자에게 그 판단을 유보하며 끝을 맺고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