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르네 지라르 / 문학과지성사 / 2004.5.14
신화와 성서에 나오는 폭력을 비교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의 정체를 분석한다. 저자가 분석한 메커니즘은 무고한 희생양에 대한 집단의 폭력으로, 신화를 비롯한 대부분의 기록은 희생양을 유죄로 해석하지만, 기독교의 성서만이 희생양인 예수를 무죄로 본다. 이와 같은 신화와 성서의 비교를 통해, 새롭게 독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고 있다.
또한 성서와 신화 속의 폭력구조를 살펴봄으로써 사탄적인 인간 욕망 구조의 본질을 탐색한다. <누가복음>의 한 구절인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를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로 변용해서, 과거가 아닌 현재의 위기들, 현대 사회의 군중 심리와 폭력 구조를 꿰뚫어본다.
○ 목차
1부 성서의 폭력 이해
- 스캔들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 모방 폭력의 사이클
- 사탄
2부 신화의 수수께끼
- 아폴로니우스의 기적
- 신화
- 희생
- 초석적 살해
- 권능과 권세
3부 십자가의 승리
- <구약 성서>의 특징
- 복음서의 특징
- 십자가의 승리
- 속죄양
- 희생양에 대한 오늘날의 근심
- 니체의 이중 유산
○ 저자소개 : 르네 지라르
문학평론가이자 사회인류학자인 르네 지라르는 1923년 남프랑스 아비뇽에서 태어나 1947년 파리 고문서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인디애나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인디애나대학 프랑스어 강사를 시작으로 듀크대학· 존스 홉킨스대학· 뉴욕주립대학· 스탠퍼드대학 등에서 정교수와 석좌교수 등을 지내며 프랑스의 역사·문화·문학·사상에 관한 강의를 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프랑스보다 미국에서 더 널리 알려져 있고, 그의 이론과 사상은 미국 대학에서 더 많이 논의되고 있다. 이밖에도 그는 1947년 제르보·샤르피에 등과 함께 아비뇽 교황청에서 ‘현대 회화전’을 개최해 브라크· 샤갈· 칸딘스키· 클레· 레제· 마티스· 몬드리안· 피카소 등의 작품을 전시하는 등 많은 화가와 작품에 관심을 가졌다.
1961년에는 존스 홉킨스대학에서 ‘비평언어와 인문학’에 관한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했는데, 여기에는 바르트· 데리다· 골드만· 이폴리트· 라캉· 풀레· 토도로프· 베르낭 등 많은 학자가 참가했다.
지라르의 관심은 소설 속의 인물들을 통해 인간 욕망의 구조를 밝혀내는 데서 출발한다. 그것이 그의 첫 저서인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다. 그 작업의 결실인 『폭력과 성스러움』은 1973년 프랑스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그밖에도 『지하실의 비평』 『세상이 만들어질 때부터 숨겨져온 것』 『이중규제』 『희생양』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는데, 대부분 문학 작품 분석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특히 폭력과 구원에 관한 주제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 역자: 김진식
울산대학교 프랑스학과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르네 지라르에 의지한 경제논리 비판』, 『알베르 카뮈와 통일성의 미학』, 『르네 지라르』, 『모방이론으로 본 시장경제』가 있고 역서로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 『희생양』,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문화의 기원』, 『그를 통해 스캔들이 왔다』, 대담집 『클라우제비츠 전쟁론 완성하기』를 비롯해 『카뮈: 부조리와 반항의 정신』, 장미셸 우구를리앙의 『욕망의 탄생』, 다니엘 코엔의 『유럽을 성찰하다』, 장피에르 뒤피의 『경제와 미래』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베드로가 하룻밤에 예수를 세 번 부인한 원인을 찾으면서, 단순히 베드로의 기질이나 그의 심리학‘에서 그 원인을 찾는 사람들은 내가 보기에, 길을 잘못 들어선 것 같다. 이들은 이 장면에서 인간 베드로를 능가하는 그 무엇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들은 이 사도의 ‘초상화‘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베드로가 특별히 영향을 잘 받는 기질‘을 가졌다고단정하거나 아니면 같은 식의 다른 표현을 써가면서 이 사건의정말 중요한 의미를 해치거나 대폭 축소해버린다.
예수의 죽음을 목격한 모든 사람들이 빠져 있던 모방에 베드로도 빠진다. 이런 점에서 베드로는 그의 이웃과 다르지 않다.
심리학적인 설명에 의지하는 것은 보이는 것만큼 결백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모방적 해석을 거부하고서 베드로에게서 순전히개인적인 원인을 찾을 때 우리는, 물론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긴 하지만, 우리라면 베드로와는 다르게 행동하였을 것이라고, 즉 예수를 부인하지 않았을 것임을 입증하려고 애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행동은 예수가 나무랐던 바리새인들의 행동과 같은 것이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기네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세워주고 있었다. 조상들이 죽인 희생자들에 대해 대단한 애도를표하는 의식은 이를 통해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숨기고 있을 경우가 많다.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우리가 우리 조상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피를 흘리는 예언자들의 대열에는 가담하지 않았을것이다˝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후손들은 자신들이 조상들보다 도덕적으로 더 우위에 있다고 여김으로써 조상들의 죄를 되풀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거짓 차이, 이것은 이미 오늘날 개인주의가 갖고 있는 모방적 환상이며,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모방적이고 반복적이라는 생각에 대한 최대한의 저항이다. 그런데 이 반복을 완성시키는 것이 바로 이 저항이다. – p.35
○ 출판사 서평
- 『폭력과 성스러움』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등 인간의 ‘욕망’ 문제를 평생 파헤쳐 온 문학비평가이자 문화인류학자인 저자의 대표작 중 하나
그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본에는 ‘욕망’이 깔려 있다고 보았으며, 이 욕망의 구조와 근원을 탐구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책이 우선 주목하는 것은 ‘희생 제의’다. 오래 전, 사회의 갈등과 폭력이 끊이지 않던 시기 인류가 도입한 장치가 바로 그것이다.
특정 대상을 지목해 모든 죄를 뒤집어쓰게 한다.
이 집단적 폭력행위로 말미암아 사회는 안정을 얻는다.
그리고 집단에 평안을 가져다 준 희생양은 ‘성스러운 존재’로 인식된다.
이것은 인류가 기록한 모든 문화적 텍스트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이다.
저자는 이러한 희생제의가 성서와 여타 다른 신화적 텍스트에서 달리 취급되고 있다는 데 주목했다.
저자에 따르면 대부분의 신화가 희생자를 ‘죄인’으로 그리는 데 반해 성서는 희생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 차이는 종교와 신화의 차이이기도 하다.
○ 독자의 평
‘모방적 욕망’, ‘견물생심’. 욕망은 스캔들을 일으킨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기 전까지 난 명품 가방인 ‘똥”을 욕망하지 않았다. 관심도 없었다. 내 주위에는 ‘똥”을 가진 이가 없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주변 엄마들 가방이 ‘똥’ 천지였다. 나와 가까운 이들이 ‘똥’을 들고 다니니 자꾸 눈에 아른거렸다. 저 이도하는데 나라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똥’을 욕망하게 되었다. 이런 현상을 지라르는 ‘모방적 욕망’이라고 말한다. 대부분 사람은 직접적으로 대상(똥)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중개자나 모델을 통해서 대상을 욕망한다. 유명 연예인을 모델로 쓰는 이유이다.연예인이 든 ‘똥”을 보게 하므로 ‘똥”을 욕망하게 만드는 것이다. 욕망은 질투를 자극하여 폭력을 유발하기도 한다. 욕망은 형이하학적인 단순함에서 오지 않는다. 형이상학 적이다.
지라르는 프랑스가 최고라고 지칭하는 ‘인류학자’이다. 그의 ‘기본적 인류학’을 기초로 하여 우리나라 학자들도 다양한 분야에서 기존 이론에 대한 대안으로 많이들 시도하고 있다. “나는 사탄이~”에서는 지라르 사상을 과학적 논리로
전개하고 있다. 그는 근대 소설을 연구 분석하면서 갈등과 폭력의 원인이 욕망에서 나온다는 것을 밝혀 냈다.모방은 상당히 경쟁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지라르는 욕망에서 오는 폭력을 신화와 성서를 비교 분석하여 욕망 이론을 영성 이론으로 설명한다. 기본적 인류학을 통하여 성서의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었다.
지라르는 신화를 희생양 메커니즘, 제의의 폭력으로 해석한다.또한 문화와 문명도 희생과 피로 지속되었다고 한다. 이를 ‘초석적 폭력’, ‘초석적 살해’라고 한다. 그는 문화의 기원은 합리적이고 이성적, 낭만적이지 않으며 피의 살해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인류 문화 밑에는 희생 제물이 은폐되어 있다. 수많은 기원 이야기와 건국 신화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신전이나, 궁을 지을 때 아이를 제물로 받치는 것.(성덕대왕신종) 우리나라에서 상량식 때 닭, 돼지를 잡는 이유이다.
원시사회 때부터 폭력은 인간 사회에 보편적으로 존재했다. 폭력은 모방에서 오며, 모방은 욕망에서 온다. 이는 갈등이 모방적 경쟁 관계에서 오기 때문이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일, 모방적 범죄= 스캔들이다.
첫 번째 스캔들이 일어나는 순간 이 스캔들은 다른 스캔들을 일으킨다. ‘모방 위기’는 끊임없이 번져가면서 더 악화된다.
‘모방 사이클’은 욕망과 그것의 경쟁 관계에서 시작하여 스캔들의 확산과 모방 위기를 통해 계속되다가 마지막에는 희생양 메커니즘으로 끝난다. 정치나, 기업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한 명을 대표로 내세워 희생양으로 쓰는 방법은 비일비재 하다.
욕망은 어디서 오는가?.
“[구약 성서]나 특히 복음서를 살펴보면 욕망과 갈등에 관한 생각이 들어 있다. 창세기의 원죄 이야기와 이웃에 대한 폭력을 금하고 있는 십계명의 후반부, 마지막 열 번째 계명은 앞의 것들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행위를 금하기보다는 어떤 욕망을 금하고 있다. 네 이웃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인간들은 날 때부터 이웃의 소유하고 있는 것을 욕망하는 성향이 있거나 단순히 욕망하기에 인간 집단 가운데에는 아주 강한 경쟁적 갈등의 성향이 있다. 이 성향을 제어하지 못하면 모든 공동체의 조화,공동체의 생존 자체를 항상 위협할 것이다. 서로 상대방으로 인해 경쟁적 욕망이 커질수록 이 욕망은 위험해진다. 사람들은 욕망이 객관적이거나 아니면 주관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욕망은 사실 그 대상을 가치 있게 만드는 타인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 타인은 곧 가장가까이 있는 제삼자 즉 이웃이다. 이웃사이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웃이 우리 욕망의 모델이라는 분명히 확인된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웃의 재산을 욕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살인도, 간음도, 절도도 그리고 거짓 증언도 하지 않을 것이다. -p21-
현대 사회는 내적 중개 시대이다. 거리가 가까운 사이에서 갈등이 유발되는 시대. 그 대표적인 것이 sns이다. 페이스북, 인스타는 내적 중개가 유발되는 공간이다. 내적 중개는 폭력을 발생시키며, 희생적 메커니즘이다. 악플과 여론 몰이로 사람을 죽게 만든다.
오늘날은 대부분 물리적 폭력보다 ‘심리적 폭력’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더 감추기가 쉬우며, 모두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한다.그 애는 욕먹을 짓을 했어, 당할만해, 당해도 싸~~~. 일명 현대판 ‘마녀사냥’이 시작된다.언어학자들은 사회적 위기가 절정에 달하면 고대 사회 때부터 만장일치적으로 모방 폭력이 행해졌다고 한다. 폭력은 언제나 위기를 종식시키면서 하나의 희생물에 반대하는 사회를 다시 하나로 묶어준다. 그러나 이 희생물은 폭력과 관련이 없는 유형의 희생물을 두며 이를 ‘희생양’이라 부른다. 그러나 꼭 모방 욕망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인간 사회에 모방 욕망이 없었다면, 사회도 문화도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성경에” (요한복음 8장 42~44)욕망은 악마나 하나님에 대한 모방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나님과 사탄(악마)의 두 개의 ‘원형 모델’이다.이 둘의 차이는, 하나의 모델은 탐욕이 적어서 어떤 것도 경쟁적으로 욕망하지 않기 때문에 절대로 그 추종자들이 장애물이나 경쟁자가 되지 않고, 또 다른 모델은 탐욕이 아주 많아서 그 추종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추종자들은 곧 악마와 같은 장애물로 변하고 만다. 사람들이 선택한 모델이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갈등 없는 좋은 방향으로 그들을 인도하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이 모델 때문에 폭력적인 무차별, 즉 희생양 메커니즘에 이르게 된다. 모방 욕망의 노리개가 된다. 우리의 모델은 우리의 살아 있는 장애물이 되고 우리는 또 그 모델의 장애물이 될 것이다. “일인에 대한 만인의 폭력”에 빠뜨린다. “
이 책은 신화와 성서에 나오는 폭력을 비교, 그로 인해 발생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의 정체와 양상을 분석했다. 지라르는 복음서의 모든 죽음/부활이산화와의 흡사함과, 그 유사성을 인정하나 성경 텍스트와 신화 텍스트를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며, 그 차이점을 이 책을 통하여 입증한다. (고대 신화의 중심을 이루는 폭력 이야기는 성서의 많은 이야기, 특히 그리스도의 죽음 이야기와 아주 비슷하다.) 신화와 성서에 나오는 폭력은 모두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며, 모든 문화권에서 되풀이해서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고 기독교를 신화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성서 이야기는 세계 모든 신화를 전복, 해체, 비판하고 있다. 형식은 같으나 주제와 관점에 차이가 있다. 신화는 마녀사냥과 박해의 텍스트로, 제의적 집단 폭력성을 정당화한다. 반면복음서의 핵심 주제는 예수를 통하여 폭력성을 드러내고, 제의적 집단 희생양을 무효화, 종식 시킨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대부분 선택된 조건의 희생양 들이다. 이 조건, 선택 기준은 불구자, 육체적, 사회적인 결함을 가진 자들이다. 나병환자, 유대인, 이방인, 여자, 불구자와 같은 온갖 종류의 주변인들로 구성되었다. 이런 현상은 중세 시대의 마녀사냥으로 이어진다. 그리스 신화는 그 당시 그리스 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희생 제의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신화이다. 그것이 중세를 거처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유혈의 희생 제의는 고대 사회의 내적 갈등을 없애고 표출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책 내용 중 재미있는 부분은 우리 ‘문화적 제도’가 원래 제의적 행위에서 나왔다고 설명하는 부분이다. 고대의 희생 제의가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제의적 행위는 많이 다듬어지고 약해지면서 그 안에 들어있던종교적 의미가 사라졌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는 동안 종교적인 성격이 사라진 의식은 제의에서 벗어나 제도로 변하게 된 것이다. 제의는 여러 번 되풀이될수록 관습으로 으레 변하였으며, 관습은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낸 것이 아닌종교적인 것에서 나왔다. 예로 교육 제도와 정치권력에서 제의적 기원을볼 수 있는데. 교육 제도에서 소위 통과 의식이나 입문 의식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인간은 그 사회의 문화에 엄숙한 절차를 통해서 들어간다. ‘통과’로 불리는 이 의식들에는 ‘테스트’가 있다. 모든 의식들이 그러하듯이 통과 의식이나 입문 의식은 ‘희생’에 기반을 둔다,지원자들 중의 한 사람이 테스트를 무사히 통과하지 못해 살아남지 못할 때, 이런 경우 다른 지원자들은 이를 좋은 징조로 받아들이며, 이는 입문 의식에 들어 있는 희생의 효력으로 본다. 정치에서도 마찬가지이다.총명하고 우수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아총받이로 내세우는 경우이다.
대입 시험 응시자 중 승자는 몇 안 된다. 나머지는 흔히 깔아준다, 불수능, 물수능은 상위 자들을 위한 희생양을 만든다.수능의 희생양! 제도의 희생양!비단 입시제도 에서만 그러겠는가 슬픈 것은 지금 사회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 해결해야 할 위기가 있는 곳에 희생 제의가 꼭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나고 죽는 것도 위기, 계절이 변하는 것도 위기고 기아가 발생하는 것도, 모든 종류의 재앙도 위기다, 불안에 떨게 하는 많은 것들이 모두 위기이다. 궁중은 희생 제의에 의지하여 이런 불안을 잠재우려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 탓으로 돌리는 것, 나라에 큰 현안이 있을 때 인지도 높은 연예인의 스캔들이 터지는 것 등이 현대판 희생 제의, 마녀사냥이 일어나는 이유이다. 현재 코로나로 인하여 여러 희생양들을 양산하고 있다. 이런 슬픈 모방적 폭력의 희생 제의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지라르는 선한 모델을 모방하라고 한다. 모방 모델에는 선한 모델과 악한 모델이 있다. 성경은 이를 구분하여 선택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성경과 신화의 유사성과 급진적 불연속성>
- 가인과 아벨vs 로물루스와 레무스
- 욥 vs 오이디푸스
- 아폴로니우스의 기적(거지 돌팔매 vs 음행 중에 잡힌 여자)
-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vs 디오니소스의 죽음과 부활
성서의 이야기는 언제나 폭력을 반대하고 약자의 편에서는 반면, 신화는 폭력을 정당화하며, 강자의 편에서, 승자의 편에서 승자를 신격화 시킨다.
지라르는 복음서는 신화의 해체이며, 복음서가 신화를 회복시킨다고 말한다. 학자들은 지라르가 기독교의 부활을 다시 일으킨 것이라고 말하며, 그의 지적 위상은 니체와 견줄만하다고 평가한다. 19세기의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명명하며 100년의 시대를 열었다면, 20세기의 지라르는 니체는 죽었다로 새로운 100년을 열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니체의 말에 속았다. (나도 속았다) 그리스 로마 신화뿐 아니라 모든 신화 이야기를 허구의 그저 낭만적 아름다움으로, 다정하고 쾌활하며, 동정심 많은 정의와 진리의 이야기로 포장했다, 약자에 대한 강자의 폭력, 소수에 대한 다수의 폭력, 장애인들에 대한 비장애자들의 폭력, 비정상인에 대한 정상인들의 폭력, 떠돌이에 대한 토박이의 폭력을 정당화했다. 사회가 퇴화하지 않고,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는 이런 희생이 있어야 하며, 이것이 진정한 박애라고 주장했다. (요즘은 니체에 대해 다시 조명하고 평가하고 있는 추세다.) 신화의 무시무시함은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험한 책이다. 겉으로 드러난 사실(쓰인 이야기)들로만 본다면 성경은 잔인하고 폭력적이다. 그러나 성경은 폭력을 폭로하고 드려낸 최초의 기록이다.신화와 성경 이야기의 유사성과 차이점, 성경과 신화를 인류학적 관점에서 풀어내는 점이 재미있다. 인간의 폭력성과 사회구조의 형성 과정,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사회와 문화가 어떤 초석으로 이루어졌으며. 지금 일어나는 사회회 현상들의 이유와 해결 방법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어디에서도 희생양을 보지 못하는 신화를 찬양하면서 그 반대로 구약과 복음서가 도처에서 희생양을 보고 있다고 비난하다면 우리는 드레퓌스 사건에서 재판부의 실수의 가능성을 거부한 그 사람들의 환상을 되풀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드레퓌스 파는 요셉의 진실만큼이나 분명하고 단호한 진실을 신화적인 폭력 속에서 겨우 승리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 p184
아무리 찬란한 문화와 경제의 대국을 이루었다 한들 무고한 사람의피로 초석을 삼았다면 무너지리라, 많은 희생양을 제물로 삼아 이루어진 제국주의 일본은 자신들 속에 숨겨져있는 악의 모방적 욕망의 추악함을 보기를 바란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