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 1•2•3
로버트 그레이브스 / 민음사 / 2007.5.5
– 말더듬이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실체를 파헤친다!
말더듬이 황제 클라우디우스를 재평가한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 제1권
클라우디우스는 로마의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손자였으나, 침을 흘리는 말더듬이에다 실수투성이의 절름발이였던 탓에 황실의 천덕꾸러기였다.
소설은 50년간 어릿광대 노릇을 하며 권력투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은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 우스꽝스러운 인물이었던 그가 권위 있는 황제로 변모하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낸다.
이 책은 로마의 황금기를 이끈 아우구스투스, 야망을 위해 남편을 버리고 아우구스투스를 유혹한 리비아, 그런 리비아의 꼭두각시 노릇에 지쳐 인생을 망친 티베리우스 황제, 그리고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한 미치광이 황제 칼리굴라. 권력 투쟁의 한복판에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으면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본 클라우디우스가, 자신이 목격하고 들은 바를 기록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품 속의 인간 클라우디우스는 유약하면서도 논리적이고 단호한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 소설을 통해 작가는 인간 클라우디우스의 유약함과 단호함이 공존하는 이유, 그리고 공화주의를 꿈꾸는 이상주의자로서의 클라우디우스와 독재자이자 유능한 황제 클라우디우스
두 가지 모습 사이에 존재하는 내적인 갈등을 치밀하게 파헤쳐 나간다.
로마 초기 황제 시대를 흥미롭게 복원한 역사소설로, 1934년 발표되어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영미권 최고의 베스트셀러 역사소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타임」 선정 ‘100대 영어 소설’ 가운데 한 작품으로 선정되었으며, 영화와 BBC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 목차
– 1권
나, 클라우디우스 1-23
– 2권
나, 클라우디우스 24-34
클라우디우스, 신이 되다 1-11
– 3권
클라우디우스, 신이 되다 12-32
클라우디우스의 죽음에 대한 세 가지 설명
- 수에토니우스
- 타키투스
- 디오 카시우스
옮긴이의 말
○ 저자소개 : 로버트 그레이브스
저자 로버트 그레이브스 (Robert Graves) 는 1895년 잉글랜드 윔블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일랜드 작가 앨프레드 그레이브스이고 어머니는 저명한 독일의 역사가 레오폴트 랑케의 조카인 아말리아 랑케다.
차터하우스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1차 세계대전 때는 장교로 복무했다.
전쟁 기간에 세 권의 시집을 썼는데, 그의 서정시는 예이츠와 더불어 20세기 영국 시단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 ‘나, 클라우디우스’와 ‘클라우디우스, 신이 되다’, ‘벨리사리우스 백작’, ‘로렌스와 아랍’, ‘오랜 주말’, ‘황금 양털’, ‘하얀 여신’, ‘그리스 신화’ 등이 있다.
– 역자: 오준호
역자 오준호는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옮긴 책으로 ‘클로텔, 제퍼슨 대통령의 딸’, ‘노란 방의 미스터리’ 등이 있다.
○ 출판사 서평
말더듬이, 절름발이, 로마 황실의 수치, 어릿광대 클라우디우스.
그러나 끝까지 살아남아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의 진짜 모습은 역사가이자 유능한 행정가, 군사 전략가, 사법 개혁가였다.
클라우디우스는 로마의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손자였으나, 침을 흘리는 말더듬이에다 실수투성이의 절름발이였던 탓에 황실의 천덕꾸러기였다.
하지만 꼭두각시 황제 티베리우스와 미치광이 황제 칼리굴라의 횡포 속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황실의 핏줄은 바로 클라우디우스였다.
50년간 어릿광대 노릇을 하며 천대의 세월을 견딘 클라우디우스는 권력의 틈바구니에서 혼자 살아남아 황제가 된 것이다.
일단 권력을 움켜쥔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이 바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한편, 야망을 위해 남편을 버리고 아우구스투스를 유혹한 리비아, 아름다운 희대의 악녀 메살리나, 네로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남편을 독살하는 아그리피나, 메시아를 자청한 유대왕 헤로데 등 이 작품은 권력에 눈이 먼 다채로운 인물들을 생동감 있게 복원해냈다.
로마제국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Claudius,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BC 10 ~ AD 54) 개관
클라우디우스 (Claudius, BC 10년 8월 1일 ~ AD 54년 10월 13일)는 로마 제국의 제4대 황제 (AD 41년 1월 24일 ~ 54년 10월 13일)이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손자이며,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손자이기도 하며, 티베리우스의 조카이기도 하다. 전임 칼리굴라 황제의 친삼촌이기도 하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속한다.
– 클라우디우스 (Claudius)
.출생: BC 10년 8월 1일, Lugdunum
.사망: AD 54년 10월 13일, 이탈리아 로마
.재위: 41년 1월 24일 ~ 54년 10월 13일
.본명: Tiberius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황제명: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전임: 칼리굴라 / 후임: 네로
.기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손자, 티베리우스의 조카
○ 생애 및 활동
– 즉위 이전
로마의 장군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와 소(小)안토니아 사이에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드루수스나 형 게르마니쿠스와는 달리 그는 원래부터 병약하고, 말을 더듬고 한쪽 발을 질질 끄는 버릇 때문에 황실 안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지만, 형인 게르마니쿠스가 그를 배려해 주었고, 클라우디우스의 역사에 대한 재능과 흥미를 찾아낸 역사가 리비우스의 영향으로 에트루리아나 카르타고의 역사를 저술하여 역사가로서의 측면을 갖게 되었다.
– 즉위
칼리굴라가 황제로 즉위한 후, 원로원에 의해 칼리굴라와 함께 집정관으로 취임하는 명예를 안게 되었다.
41년 1월 24일 칼리굴라가 암살되자 1월 25일 황제가 되었다. 즉위에 임하기 전에 로마 원로원의 승인을 받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근위군단의 군사력에 의해 즉위한 것인지라, 이후 군사력이 로마 황제를 결정하는 군인황제 시대의 최초의 예가 되었다.
교양을 갖춘 역사가였던 그는 지혜로운 정책으로 로마에 대한 저항이 극렬했던 유대의 통치 문제 등을 해결하였지만, 시민들로부터의 인기는 낮았다.
클라우디우스는 갈리아인이나 아니우니족 출신의 해방 노예 등을 등용하여 다양한 행정 분야를 감독할 권한을 부여했다. 이것은 비(非)원로원 의원의 정치 참여를 증대하여, 황제에게의 권력 집중이나 관료제의 발달로 이어졌다.
45년에 이탈리아의 유대인들을 강제추방하는 반유대주의정책을 실시하여 약 2만5천명의 유대인들이 그리스의 코린토스로 이주하였다.
– 사망
54년 독버섯에 중독되어 사망했다고 하지만, 4번째 아내이자 다음 황제인 네로의 어머니인 소(小) 아그리피나에게 암살되었다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
○ 업적
클라우디우스는 13년의 통치 기간 동안 친위대나 원로원이 전혀 예상치 못한 훌륭한 정치를 폈다. 새 황제에게 합당한 칭호와 존경을 바치기로 결정한 원로원은 곧바로 클라우디우스의 전임자 칼리굴라를 불명예스럽게 할 조치를 취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클라우디우스가 이를 만류하고 그 대신 칼리굴라의 이름과 업적을 모든 공식 기록에서 삭제하게 하였다. 칼리굴라의 축출이 과대한 칭호와 영예의 요구 때문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클라우디우스는 의례적이면서도 적절한 몇몇 칭호,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는 예식, 자기 가문과 제국의 평화를 위한 제사 이외에는 원로원과 시민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만한 어떤 칭호나 영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성전과 사제직은 신들에게만 유보된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에게 성전을 지어 바치거나 사제직을 맡기는 전통을 완강하게 거부하였다.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의 인간적 한계를 똑바로 인식한 동시에 과도한 영예를 요구한 뒤에 닥칠 결과를 올바로 내다보았다.
클라우디우스의 가장 큰 업적은 제국의 질서와 안정을 되찾은 것이었다. 이집트 북부 알렉산드리아의 시민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를 보면, 그가 로마 제국의 평화를 위하여 얼마나 큰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그 당시 알렉산드리아에는 유다교의 전통과 관습을 고수하는 유다인들과 그 밖의 다른 민족들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고 있었다. 양쪽에서 황제에게 대표들을 파견하여 자신들의 입장과 이익을 알렸다. 클라우디우스는 한편으로 오래 전부터 이 도시에 자리잡아온 유다인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그들이 고유한 종교 전통을 지키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유다인들에게 그들이 이 지역에서 이방인들임을 상기시키면서 그들을 환영하지 않는 다른 민족들의 모임이나 행사에 공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자제하라고 경고하였다.
수에토니우스는 크레스투스(Chrestus) 때문에 계속 소요가 일어나자 클라우디우스가 유다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였다고 기술한다. 여기서 말하는 크레스투스는 크리스투스일 가능성이 높고, 결국 로마에서 일어난 이 소요는 나자렛 예수를 ‘기름 부음 받은 자’ (Chrisrus), 곧 메시아로 인정하는 그리스도인들과 이를 부인하는 유다인들 사이의 갈등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짧은 통치 기간에 비하여 로마의 질서와 안정을 위하여 놀랄만한 업적을 많이 남긴 클라우디우스는 불행하게도 자신의 아내이자 네로 황제의 어머니인 아그리피나에게 독살되었다. 로마 역사가들은 아그리피나가 독버섯을 먹여 남편을 살해하였다고 증언한다. 생전에 자신의 신격화를 단호하게 거절한 클라우디우스의 소신과는 달리 원로원은 그가 죽은 다음 곧바로 그를 신으로 인정하였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