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나이 듦과 죽음에 대하여 : 몽테뉴 ‘수상록’ 선집
미셸 에켐 드 몽테뉴 / 책세상 / 2016.6.30
– 16세기 종교 전쟁의 광풍 속에서도 중용과 관용을 견지하고 내면에 귀 기울여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자 한 사상가 몽테뉴, 현명하게 나이 들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법에 관해 논하다
‘나이 듦과 죽음에 대하여’는 총 3권 107장으로 구성된 ‘수상록’에서 나이 듦과 죽음에 대한 성찰이 돋보이는 글들을 발췌하여 묶은, 몽테뉴 철학의 정수를 담은 책이다. 16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모럴리스트로, ‘어떻게 혼란스러운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살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한 몽테뉴.
그는 원제 ‘에세 : Essais’가 프랑스어로 ‘시험’이나 ‘시도’를 의미하듯 ‘수상록’에서 ‘자기 자신’을 관찰의 대상으로 삼아 사유를 자유롭게 실험했다. 자신이 살아온 시대와 자신을 둘러싼 세계, 종교와 학문, 교육과 형벌, 자연과 문명, 권력과 평등을 논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성생활, 애완 고양이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관찰했다.
특히 종교 전쟁과 페스트로 참화가 계속된 시대에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살았던 만큼 죽음이란 주제에 깊이 파고들었다.
이 책의 1, 2부에는 ‘수상록’ 1~3권에서 여러 대목을 발췌하여 실었고, 3부에는 몽테뉴의 글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도록 글 두 꼭지를 온전히 실었다. 1부에서 몽테뉴는 노화라는 현상을 고찰하고 현명하게 나이 드는 법을 이야기하며 자식과의 관계, 무위와 고독의 기쁨, 독서와 글쓰기의 즐거움 등을 논한다.
2부에서는 죽음의 문제에 진지하게 다가가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으로서 죽음을 어떻게 인식하고 맞이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후회가 없는지 고민하고 성찰한다.
3부에는 몽테뉴 사유의 진수를 보여준다고 평가받는 2권 6장 “훈련에 대하여”와 3권 2장 “후회에 대하여”를 실었다. 몽테뉴는 “훈련에 대하여”에서 자신이 낙마 사고로 죽을 뻔했다가 가까스로 살아난 일화를 술회하는데, 이 극적인 경험은 몽테뉴의 인생관을 완전히 뒤바꿔놓는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예상 외로 고통스럽지 않고 감미롭기까지 한데다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니 죽음을 괜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후회에 대하여”에서 몽테뉴는 세상의 불확실성과 유동성, 이에 대한 우리의 무력함을 이야기하면서 ‘모든 것은 움직이며 만고불변의 진리는 없다’는, ‘수상록’을 집필하며 깨달은 지혜를 집약해서 전해준다.

○ 목차
1부 나이 드는 것은 죄도 벼슬도 아니다
1장 나이 듦에 대하여
2장 모든 일에는 저마다 때가 있다
3장 부성애에 관하여
4장 고독과 글쓰기
5장 목표 없는 영혼은 방황한다.
6장 세 가지 교제에 관하여
7장 내가 보기에 가장 아름다운 삶은
2부 죽음의 철학에서 삶의 철학으로
1장 철학이란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를 배우는 것
2장 죽음은 인생의 끝일 뿐 목표는 아니다
3부 나는 춤출 때는 춤추고 잠잘 때는 잠잔다
1장 죽음은 대비할 수 있는 몽상이 아니다
2장 세계는 영원히 흔들리는 그네에 불과하다
해설 | 몽테뉴, 죽음에서 삶으로 – 고봉만
옮긴이의 말 / 주

○ 저자소개 : 미셸 드 몽테뉴 (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 ~ 1592)
몽테뉴는 프랑스 페리고르 지방의 몽테뉴 성 (城)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라틴어로 교육을 받고 소년 시절에는 당시 프랑스에서 유명한 보르도 시의 기엔느 중학교에 다니면서 고전 공부에 열중했다. 16세부터 툴루즈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여 24세에 보르도 고등법원의 재판관이 되었다. 16세기 후반 프랑스의 광신적인 종교 시민전쟁의 와중에 종교에 대한 관용을 지지했고, 인간 중심의 도덕을 제창했다. 그러한 견해를 피력하고 그것이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밝히려고 에세 (essai)라는 문학 형식을 만들어냈다. 그의 수상록은 인간 정신에 대한 회의주의적 성찰과 라틴 고전에 대한 해박한 교양을 반영한다. 그는 프랑스 르네상스 시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평가받으며 심오하고 무거운 주제를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소재와 자전적인 이야기로 쉽게 풀어 쓴 글로 유명하다. 방대한 분량의 에세이를 묶은 수상록은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수필 가운데 가장 많이 읽히는 글이다. 몽테뉴는 셰익스피어, 에머슨, 니체, 루소 등 수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미셸 에켐 드 몽테뉴 (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1592)는 16세기 프랑스의 대표적 사상가이자 모럴리스트. ‘에세이’라는 글쓰기 장르의 원조라 할 ‘수상록’을 남겼다.
1533년 프랑스 서남부 도르도뉴에서 태어났다. 교육열이 높은 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부터 가정교사에게 맡겨져 라틴어를 모국어처럼 익혔고 6세 때 보르도 인근의 귀엔 학교에 입학해 중학 과정을 마쳤다. 16세 때부터 툴루즈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1554년경 페리괴 조세법원의 법관에 이어 1557년 보르도 고등법원의 법관으로 일했다. 1559년 ‘자발적 복종’을 쓴 철학자이자 법률가 에티엔 드 라보에티를 만나 둘도 없는 우정을 나누었으나 1563년 페스트로 인해 그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 1568년 사망한 아버지 피에르의 뒤를 이어 몽테뉴 영주로서 영지를 상속받았고, 이듬해 스페인 신학자이자 철학자 레몽 드 스봉의 ‘자연신학 또는 피조물의 책’을 프랑스어로 번역해 발간했다. 아버지를 잃은 지 얼마 안 되어 남동생 아르노가 운동 경기 중에 입은 부상으로 요절한데다 몽테뉴 자신이 낙마 사고로 죽을 뻔했다. 1570년에는 첫아이가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렇듯 죽음을 연이어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1562년 이래 종교 전쟁의 참화에 휩싸인 프랑스에서 살던 몽테뉴는 언제 어떤 위험에 처할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성찰하게 되었다.
공직 생활에 부담과 환멸을 느껴 1570년 37세의 나이로 보르도 고등법원 법관직을 사임하고 몽테뉴 성의 서재에 은둔하며 독서와 글쓰기에 몰두했다. 1571년 집필을 시작한 ‘수상록’의 초판은 1580년 보르도에서 출간되었다. 그해 신장결석을 치료할 겸 여행길에 올라 스위스, 독일을 거쳐 이탈리아에서 오래 머물다 1581년 말에 몽테뉴 성으로 돌아오는데, 이 경험을 기록한 일기는 몽테뉴 사후에 발견되어 1774년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후 보르도 시장으로 선출되어 일했으며 두 번째 임기에는 종교 전쟁과 페스트로 인해 피난을 떠나는 등 고초를 겪었다. 그동안 가필과 수정을 거듭해온 ‘수상록’의 3권 107장에 이르는 신판을 1588년 간행했고, 1590년에는 관직을 맡아달라는 앙리 4세의 요청을 건강을 이유로 정중히 거절했다. 1592년 자택에서 중증 후두염으로 숨을 거두었다.
– 편역 : 고봉만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마르크 블로크 대학(스트라스부르2대학)에서 〈혁명과 반혁명, 바르베 도르비이〉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충북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몽테뉴, 루소, 레비스트로스의 사상을 새롭게 조명하고 성찰하는 한편, 프랑스 소설을 번역·소개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빅토르 위고의 워털루 전투》, 《프랑스 혁명》, 《역사를 위한 변명》, 《인간 불평등 기원론》, 《법의 정신》, 《방드르디, 야생의 삶》 등이 있다.
○ 출판사 서평
16세기 종교 전쟁의 광풍 속에서도 중용과 관용을 견지하고 내면에 귀 기울여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자 한 사상가 몽테뉴
– 현명하게 나이 들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법에 관해 논하다
‘나이 듦과 죽음에 대하여’는 총 3권 107장으로 구성된 ‘수상록’에서 나이 듦과 죽음에 대한 성찰이 돋보이는 글들을 발췌하여 묶은, 몽테뉴 철학의 정수를 담은 책이다. 16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모럴리스트로, ‘어떻게 혼란스러운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살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한 몽테뉴. 그는 원제 ‘에세 : Essais’가 프랑스어로 ‘시험’이나 ‘시도’를 의미하듯 ‘수상록’에서 ‘자기 자신’을 관찰의 대상으로 삼아 사유를 자유롭게 실험했다. 자신이 살아온 시대와 자신을 둘러싼 세계, 종교와 학문, 교육과 형벌, 자연과 문명, 권력과 평등을 논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성생활, 애완 고양이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관찰했다. 특히 종교 전쟁과 페스트로 참화가 계속된 시대에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살았던 만큼 죽음이란 주제에 깊이 파고들었다.
늙는다는 것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노화와 질병의 고통 앞에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에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이 영원한 질문에 답하는 몽테뉴의 담담한 사색과 통찰, 진솔한 자기 고백은 40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육체와 정신에 쇠락을 가져오는 노화를, 죽음에 자연스레 친숙하게 해주는 것으로, 일종의 미덕으로 받아들이는 몽테뉴. 그는 나이를 먹는다고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니라며 회의적인 자세를 보이면서도 그동안 남을 위해 살아왔으니 노년에는 자기 욕망에 충실히 자신만을 위해 살아보자고, 그때그때의 즐거움을 만끽하자고 권한다. 그리고 “철학자의 일생은 죽음에 대해 명상하는 것”이라며 자못 진지하고 심각하게 죽음을 생각하다가 “죽는 법을 모른다고 걱정하지 마라. 자연이 충분히 알아서 잘 가르쳐줄 것이다. 그것 때문에 공연히 속 썩을 필요는 없다”고 단언하기까지, 20년이 넘게 《수상록》을 쓰면서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보여준다.
이 책의 1, 2부에는 《수상록》 1~3권에서 여러 대목을 발췌하여 실었고, 3부에는 몽테뉴의 글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도록 글 두 꼭지를 온전히 실었다. 1부에서 몽테뉴는 노화라는 현상을 고찰하고 현명하게 나이 드는 법을 이야기하며 자식과의 관계, 무위와 고독의 기쁨, 독서와 글쓰기의 즐거움 등을 논한다. 2부에서는 죽음의 문제에 진지하게 다가가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으로서 죽음을 어떻게 인식하고 맞이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후회가 없는지 고민하고 성찰한다. 3부에는 몽테뉴 사유의 진수를 보여준다고 평가받는 2권 6장 〈훈련에 대하여〉와 3권 2장 〈후회에 대하여〉를 실었다. 몽테뉴는 〈훈련에 대하여〉에서 자신이 낙마 사고로 죽을 뻔했다가 가까스로 살아난 일화를 술회하는데, 이 극적인 경험은 몽테뉴의 인생관을 완전히 뒤바꿔놓는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예상 외로 고통스럽지 않고 감미롭기까지 한데다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니 죽음을 괜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후회에 대하여〉에서 몽테뉴는 세상의 불확실성과 유동성, 이에 대한 우리의 무력함을 이야기하면서 ‘모든 것은 움직이며 만고불변의 진리는 없다’는, 《수상록》을 집필하며 깨달은 지혜를 집약해서 전해준다.
– “죽음은 얼마나 기습적으로 다가오는가”, 몽테뉴의 삶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
‘나는 무엇을 아는가? : Que sais-je?’ 20여 년 동안 천 페이지가 훌쩍 넘는 《수상록》을 집필하면서 몽테뉴가 끊임없이 되뇐 질문이다. 프랑스의 유명 문고 시리즈 ‘크세주 문고’의 이름이 되기도 한 이 문장은, 진리의 절대성을 의심하는 회의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유럽을 휩쓴 문예 부흥 운동 르네상스 덕분에 중세 암흑기에서 벗어나 일견 인류 문화의 절정기로 접어든 듯했던 14∼16세기에는 신·구교의 반목과 살육도 절정에 달해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란 속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느 편에 서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몽테뉴가 회의주의의 태도를 보인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그 상황에서 확실한 것은 ‘언젠가는 모두 죽는다’는 사실뿐이었다.
프랑스에서 ‘위그노 전쟁’이라 불리는 종교 전쟁은 몽테뉴가 서른 살이 되기 직전인 1562년에 일어난 신교도 학살 사건을 발단으로 1598년 앙리 4세가 신교도에게 종교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는 낭트 칙령을 발표함으로써 막을 내리기까지 30여 년간 계속되었다. 몽테뉴는 1592년에 사망했으니 인생의 절반가량을 전쟁 속에서 보낸 셈이다. 그가 살던 프랑스 남서부의 영지는 신교도의 영지에 둘러싸여 있었기에 “내전의 한복판”이나 다름없어 “줄곧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온전한 평화의 모습이라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여주지 못했다”고 할 정도였다.
그가 죽음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사색하게 된 데는 이런 불안한 사회상뿐만 아니라 개인사도 작용했다. 1563년,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 에티엔 드 라보에티를 페스트로 잃은데다 1568년에는 아버지와 남동생의 죽음을 연이어 겪었다. 1570년에는 결혼 5년 만에 얻은 첫딸이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몽테뉴는 딸 여섯을 얻었지만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어린 나이에 명을 달리했다). 그즈음 몽테뉴 자신이 낙마 사고로 의식을 잃고 일종의 ‘임사 체험’을 하기도 했다. 1578년 마흔다섯 살 무렵부터는 신장결석으로 극도의 고통에 시달리기 시작했는데, 몽테뉴는 “통증이 나를 괴롭히고 귀찮게 굴수록 나는 죽음을 덜 두려워하게 될” 것이라며 질병을 의연히 받아들였고 마침내 질병과 더불어 사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질병과 전쟁으로 인해 서른다섯 살을 넘겨 산 사람보다 그 전에 죽은 사람이 더 많은 시대였기 때문일까. 몽테뉴는 지금 시각에서 보면 너무 이르다 싶은 서른일곱의 나이에 법관직에서 물러나 ‘은퇴 후의 삶’을 살고자 했다. 그는 오랫동안 공직 생활에 부담과 혐오를 느껴왔다며 서른여덟 생일을 기해 아직 원기가 왕성할 때 평온과 여가를 향유하고자 몽테뉴 성의 탑에 은거하게 되었다고 은퇴사에 밝혔다. 이렇게 은둔 생활을 시작한 몽테뉴는 독서와 명상에 몰두하려 했으나 자신의 정신이 “질서도 상호 연관성도 없이, 수많은 망상이나 기괴한 괴물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하여 고삐 풀린 말처럼 날뛰는 정신을 다스리고자 《수상록》을 집필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상념을 정리하는 한편 그간의 경험을 돌아보고 관찰한 몽테뉴에게 죽음은 평생 몰두한 주제 가운데 하나이며, 어찌 보면 《수상록》은 죽음 준비의 일환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 “노년이 되면 얼굴보다 정신에 더 많은 주름살이 생긴다”, 몽테뉴가 바라본 노년 그리고 노년을 살아가는 지혜
신은 생명을 조금씩 빼앗아감으로써 인간에게 은총을 베푼다. 이것이 노화의 유일한 미덕이다. 노화를 겪으며 조금씩 죽어온 덕분에 마지막 순간에 죽음이 완전하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은 것이다. 그 상태에서 죽음은 그저 존재의 절반, 혹은 사 분의 일만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_《수상록》 3권 13장
몽테뉴는 자연이 우리에게 죽음을 학습할 기회를 주는데, 그것이 바로 노화이며 우리는 노화를 통해 죽음을 조금씩 대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노화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듯한 그도 “노화란 우리 안에 천천히 자연스럽게 퍼지는 가공할 질병”이라면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몸은 허약해지고 “정신은 변비에 걸리고 둔해진다”며 한탄하기도 한다. 그리고 “노인이 쾌락을 찾는 일을 금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자신이 젊은 시절에 “불타는 정열을 절도節度로 은폐했다”면 “늙은 지금은 서글픈 심정을 방종으로 풀어준다”고 고백한다. 나이가 들었다고 그저 점잔 빼며 살기보다 욕망을 충족시키며 즐기면서 살기를 권하는 것이다.
한편, 몽테뉴는 나이를 먹고 경험을 많이 쌓는다고 저절로 현명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육체와 정신이 쇠퇴하면서 스스로 부족하고 유한한 인간임을 깨닫는 것 자체가 일종의 지혜라고 말하는 그는 은퇴 이후의 삶을 살아가며 얻은 다양한 깨달음을 전해준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자식들에게 재산을 나눠 주고 집안일에 일원으로 참여시켜 세상을 알아갈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경제적 도움을 주는 대가로밖에 자식들의 애정을 받을 수 없다면, 그는 참 가련한 아버지”라며 자식들이 존경할 만한 가치와 능력, 심성을 지닌 아버지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완전히 자유로운 자기만의 뒷방을 마련해두고, 그 안에서 참된 자유와 은둔과 고독을 확보해야 한다. 그곳에서 자기 자신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그곳은 외부와의 관계나 접촉이 단절된 은밀한 장소라야 한다. 그곳에서는 아내가 없는 것처럼, 자녀가 없는 것처럼, 재산이 없는 것처럼, 시중드는 사람이나 하인이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웃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가족이나 재산을 잃게 되더라도 그들 없이 생활하는 것이 생소하지 않을 것이다. _《수상록》1권 38장
책과의 교제는 꾸준히 그리고 매우 쉽게 누릴 수 있다는 고유한 장점을 지닌다. 그것은 인생행로에서 줄곧 나와 동행하고, 어디를 가든 나를 도와준다. 노년과 고독 속에 있는 나를 위로해주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한가할 때 그 무게를 덜어주고, 성가시게 하는 사람들에게서 언제든지 벗어나게 해준다. _《수상록》3권 3장
몽테뉴가 무엇보다 중시한 것은 자기 자신에 깊이 침잠하여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일부러라도 고독을 자처하여 다른 사람과의 접촉이 차단된 곳에서 명상하고 사색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몽테뉴 자신이 이를 실천해 서재에 은둔하며 독서에 몰두하고, 자신의 내면과 경험을 관찰한 결과를 자유롭게 글로 써내려가 그 결실로 《수상록》을 펴내기에 이르렀다. 고독과 독서가 주는 기쁨에 대한 몽테뉴의 예찬은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기에 더욱 진정성 있고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 “고통도 두려움도 없이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왔던 그 길을 따라, 삶에서 죽음으로 다시 건너가라”
죽음이 어디서 우리를 기다리는지 알 수 없으니, 어디서든 죽음을 기다리자. 죽음에 대해 미리 생각하는 것은 자유에 대해 미리 생각하는 것이다. 죽는 법을 배운 사람은 노예 상태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생명의 상실이 나쁜 것만은 아님을 깨달은 사람에게 인생에서 나쁜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죽는 법을 알면 모든 예속과 속박에서 벗어난다. _《수상록》1권 19장
죽음에 대한 몽테뉴의 사유는,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인 키케로의 명제 “철학이란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를 배우는 것이다”라는 주장에 동의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는 1권 전반부에서 “우리 생애의 최종 목표는 죽음”이라고 역설하면서 죽음을 자나 깨나 생각하고 죽음에 대비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페스트와 전쟁의 참화 속에서 농민들이 죽음을 대하는 무심하고도 달관한 태도를 목도하고, 그 자신이 낙마 사고를 겪은 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서 죽음을 바라보는 몽테뉴의 생각은 다소 달라진다. 죽음에 맞서 대비하는 것도 좋지만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고, 죽음은 단 한 번만 일어나는 일이므로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자기 존재를 있는 그대로 누리는 것이야말로 절대적인 완성이며, 신적인 완성이다. 우리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남의 처지를 탐하며, 자신의 내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 밖으로 나가려 한다. 하지만 죽마를 타봤자 부질없는 노릇이다. 죽마를 타면서도 결국 우리는 자신의 발로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세상에서 가장 높은 옥좌에 오른다 해도 자기 엉덩이로 앉기는 매한가지이다. 내가 보기에 가장 아름다운 삶은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본보기를 따르는 삶, 질서가 있으면서 특별함도 괴상함도 없는 보통의 삶이다. _《수상록》3권 13장
몽테뉴는 《수상록》의 마지막 장인 3권 13장 ‘경험에 대하여’에서 자연에 순응하며 삶의 기쁨을 만끽하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고 독자들에게 권유한다. 죽음에 구애받지 않고 순간을 충만하게 누리는 것. 이것이 그가 삶에서 최종적으로 얻은 지혜이자 독자에게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어 했던 교훈이다.
이 책은 어떻게든 노화를 늦추려 애쓰고 혹은 영원히 살 것처럼 아등바등 욕심을 부리면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노화는 자연의 섭리이며 누구나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일깨워준다. 죽음이라는 문제를 두고 심각하게 번민하다 말년에 이르러 초연해진 몽테뉴는 노년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며 위로의 말을 건넨다. ‘어떻게 해야 편안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몽테뉴가 평생을 두고 답해온 이 어려운 질문은 오늘날 우리에게 언제 죽어도 후회 없는 삶,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이란 과연 무엇인지 성찰하게 한다.
– 몽테뉴와 ‘수상록’에 대한 후대의 평가
‘수상록’은 재미를 찾는 어린아이처럼 읽지 마라. 야심 찬 사람처럼 교훈을 얻으려고 읽지도 마라. 그 책은 ‘살기 위해서’ 읽어라. _귀스타브 플로베르
경험을 해보고 시련을 겪어보아야만 몽테뉴의 지혜와 위대함을 존중할 수 있다. _슈테판 츠바이크
죽음에 관한 우리의 현대적 사유가 시작되는 지점에 몽테뉴가 있다. _줄리언 반스
○ 독자의 평 1
몽테뉴의 수상록에서 나이 듦과 죽음 등에 대해 발췌한 책으로 관찰자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작가 자신이었다.
여유로운 삶을 살고 싶어서 일찍 은퇴한 그는 좁은 탑에서 은거생활을 했다고 한다.
사실 오랫동안 이어진 끔찍한 전쟁과 친구, 가족들의 연이은 죽음을 뜻하지 않게 겪어야 했던 그에게 인생과 삶에 대한 회한과 고민 그에 따른 깊은 상처,
절망과 고통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을거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백세 시대에 건강이나 성공, 재테크가 아니라 왜 굳이 나이와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건지 물어본다면, 우리모두 절대로 피해갈 수 없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최근 지인들이 하나둘씩 부모님을 떠나보내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담담하게까지는 아니겠지만 죽음에 대해서 조금은 생각해보고 준비해야 할 필요가 있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일순간 들었던 것이다.
사실 요즘은 외모만 언뜻 봐서는 나이 가늠도 쉽지 않다. 모두 날씬하고 아름다워 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면서 자신들을 가꾸며 살아가고 있기때문이리라.
‘너 자신을 알라’던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처럼 몽테뉴는 다른 사람이 아닌 오로지 자기자신을 바라보고 연구한 글을 남긴 것이다.
좁지만 온통 책으로 둘러싸인 자신만의 서재에서 자신이 일상에서 보고 배우고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다른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꾸밈없이 담아놓았다.
사계절의 변화를 보듯 우리의 몸과 마음도 서서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간다.
몽테뉴의 일생은 전쟁과 죽음이라는 커다란 상처를 견디며 살아야했다.
말에서 떨어져서 거의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던 경험을 이야기 하던 것처럼,
나이가 들고 병이 들었다고 아쉬워하거나 한탄만 하지않고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이또한 감사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며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들을 우리에게 남겼다.
노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행된다 하지만 죽음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우리와 맞딱뜨리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는 현재,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며 살아가라는 말을 들어왔다. 그 속에 담긴 깊은 의미를 그냥 모른 척하고 넘기지 말 일이다.
앞으로 세월이 흘러 어떻게 변할지 모를 그 모습 또한 바로 우리 자신일테니까.
나는 여기에 변변찮고 광채 없는 한 인생을 드러낼 테지만, 상관없다. 모든 도덕철학은 평범하고 소박한 개인의 삶에도, 좀 더 풍부하고 다채로운 천을 입힌 삶에도 똑같이 적용되게 마련이니까. 사람은 너너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조건을
자기 속에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193-194
○ 독자의 평 2
언젠가 몽테뉴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어떤사람인지 몰라 깊이있게 보지는 않았지만, 에세이 라는 글의 형식을 처음으로 만든사람. 자신의 성에서 글을 쓰는 사람. 자신의 성이라니!! 너무 신비스럽고 동화책에서나 나올것 같다는 막연한 상상속에서 언젠가 나도 이 사람의 글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철학이니 모랄리스트니 너무 어렵게만 느껴져 그런날이 올까도 싶었다.
그리고 접하게된 이 책은 몽테뉴의 <수상록> 에서 노년의 삶과 죽음에 관한 내용을 발췌한 선집이다.
책을 펼치기 전에는 나에게 너무 어렵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고, 에세이형식의 짧은 글들이라 읽어내려가기도 수월했다. 그도 그럴것이 수상록에는 인간의 삶에 관한 거의 모든것에 대한 몽테뉴의 사유를 담아 우리도 한번쯤은 생각 해 봤을 법한 내용도 있고, 공감가는 내용도 많이 있었다.
몽테뉴는 연륜이 쌓인다고 모두가 지혜로운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지금 나는 한참 어른일 나이지만, 아직 어른이 아니라고 내가 먹은 나이에 책임을 회피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내가 쌓아온 연륜만큼 아직 나는 한참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의 글을 읽고 반성도 하게 되고 앞으로 어떻게 살고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할것인지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어릴때는 마냥 웃기기만 했던 “너 자신을 알라” 는 명언이 심하게 와닿았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얘기한다. 일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아예 잊고 사는 것으로 그 두려움에 대처 한다고 한다. 나도 좀 더 어릴땐 세상 무서울게 없고 죽는것도 당당히 받아 들이겠다는 주의 였는데, 엄마가 되고 내가 책임져야할 사람이 생기니 가장 두려운것이 되었다. 나만 바라보고 있는 아이가 있는데 어찌 내가 없어지는게 두렵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가 말하고자 하는건 어차피 찾아올 죽음이라면 두려워말고 살아있는 지금에 충실하게 살라는 얘기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이 시작된다고 하지 않는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누구에게나 같을 수는 없는 그것. 하지만 언젠가 내게 오게 된다면, 노년의 삶을 보내면서 천천히 준비할 수 있는 죽음이길 바래본다.
몽테뉴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들을 여럿 잃는 경험을 겪은 후 죽음에 대해 누구보다 깊이 통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에겐 불행한 일이지만, 이렇게 그의 사유를 접할 수 있게된 지금의 우리에겐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보통 책을 읽으면서 맘에 드는 구절은 표시하고다 읽은후에 표시한부분을 타이핑을 하는데 이 책에서는 표시한 부분이 너무 많아서 이걸 다 언제 쓰나 난감해지게 만드는 책 이었다. 언젠가 <수상록> 전문을 읽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 독자의 평 3
나이 듦과 죽음에 대하여.
– 세상 사람들은 늘 앞에 있는 것만 본다. 나는 내 안으로 눈길을 돌려 고정하고, 그 안을 부지런히 들여다본다. 사람들은 저마다 앞만을 본다. 나는 내 안을 들여다본다. 나는 나만을 들여다본다. 끊임없이 나를 검토하고, 나를 분석하고, 나를 맛본다. 다른 사람들은 생각한다고 하면서도 늘 딴 데로 가며, 앞으로만 간다. 하지만 나는 나 자신 안에서 이리저리 뒹군다. p.104
아직 20대에, 조금은 멀게 느껴지는 제목을 가진 이 책의 서평단을 신청한 이유는 ‘몽테뉴’의 ‘수상록’이라는 명성 때문이다. ‘에세이’의 원조라고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아직 접하지 못했기에 이렇게 책을 받았다. 여기서는 ‘나이 듦’과 ‘죽음’에 대하여 골라 엮은 이야기라고 하는데, 다른 주제에 대해서 엮었어도 신청했을 것이다. 그냥 자신이 살면서 드는 생각들을 온전히 담은 목소리가 궁금했다.
– 만일 사람들이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이 말한다고 뭐라 한다면, 나는 그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고 탓하겠다. p.19
점점 사람들은 자신과 멀어져간다.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면 악플과 같은 무차별 폭격을 당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습관이 안 되어 있을 수도 있고, 그냥 부끄러워일 수도 있다. 아니면 개인의 생각과 감상은, 근거 없는 잡소리처럼 매도되어 공중으로 흩어지기도 하는 상황 때문인지? 언제부터 우리가 논문만 쓰기 시작했는가. 수많은 데이터의 홍수 속에서 더욱 가치를 발하는 것이 개인의 생각과 감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상 털리는 것은 여전히 무섭…)
– 책을 통한 공부는 차분하고 평온한 것이어서 단번에 우리의 정신을 일깨우고 단련해준다. 강한 정신을 지닌 만만찮은 상대와 논쟁할 경우, 상대는 내 옆구리를 누르고 좌우로 찌르며 자기 사상으로 내 사상을 자극한다. 그리하여 질투심, 명예심, 경쟁심이 나를 밀어대고, 나로 하여금 능력 이상의 힘을 발휘하게 한다. 그러니 견해가 일치하는 것만큼 대화를 매우 따분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p.106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생각을 오롯이 드러내길 꺼리는 세상. 날아올 화살이 무서워 외부에서 끌어들인 권위에 목매다는 세상. 하지만 진정 나의 생각과 느낌을 꺼냈을 때, 그 속에서의 마찰과 충돌을 통해 서로의 다름을 인지했을 때, 인식 지평의 확대와 함께 조금씩 지혜를 얻게 되지 않을까. 이러한 사실을 잊고 회피만 한다면, 정말 따분한 삶일 것이다. 비슷비슷한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속닥속닥, 점점 더 견고해지는 자아의 벽. 그렇게 나도 모르게 꼰대가 되어가겠지. 나이 먹으면 저절로 지혜로워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몽테뉴는 또한 일침을 가한다.
– 노년이 되면 얼굴보다 정신에 더 많은 주름살이 생긴다. 늙으면서 시큼해지고 곰팡내 나지 않는 영혼이란 없으며, 있다 해도 매우 드물다.
– 이 세상에 들어왔을 때처럼 이 세상에서 나가라고, 고통도 두려움도 없이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왔던 그 길을 따라, 삶에서 죽음으로 다시 건너가라. 그대의 죽음은 우주라는 거대한 건조물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것은 세상의 생명 가운데 한 요소이다. p.134
매우 드물다고는 하지만, 곰팡내는 나지 않았으면 한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니까 그것이 자연스러운 발효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래도 몸에서는 곰팡내가 나도 머리에서는 곰팡내가 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뇌에 보톡스를 맞아야 하나.
– 책은 내가 살아온 한평생에서 찾아낼 수 있었던 최상의 양식이다. 그러므로 나는 뛰어난 식견을 가졌지만 책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몹시 딱하게 여긴다. p.91
내가 생각한 보톡스가 이것이었다. 지금까지는 딱히 다른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책이라는 보톡스를 맞아야겠다. 그리고 많은 보톡스를 만들고 전파하는데 힘써야지. 힘은 쓰지만 또 발버둥은 치면 안 된다. 늙기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잘’ 늙기 위한 것일 뿐이니까.
– 우리는 죽음에 대한 걱정으로 제대로 살지 못하고, 삶에 대한 걱정으로 제대로 죽지 못한다. 죽음에 대한 걱정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삶에 대한 걱정은 우리에게 공포를 준다. 우리가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죽음 자체에 대비하기 위함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 순간적이기 때문이다. 별다른 영향이나 손해 없이 끝나는 십오 분 동안의 고통을 위해 그렇게 특별한 가르침을 받을 필요는 없다.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는 죽음을 맞이할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생각한 이 책의 결론은, 너무 걱정하지 말자는 것이다. 늙는 것도. 죽는 것도. 더불어 사는 것도. 스무스하게.
부분 부분 엮은 책이라 몽테뉴 할배와 많이 친해지지는 못했지만 이렇게나마 뵐 수 있어서 좋았다. 보기 좋게 편집해 주었고, 두툼한 해설도 도움이 되었다. 다른 주제에 대한 이분의 생각도 궁금하다. 그리고 이 책은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읽어봐야지.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