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나폴레옹 : 야망과 운명
프랭크 매클린 / 교양인 / 2016.5.9
지위도 돈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의지와 능력만으로 권력의 중심에 선 야심가, 스물다섯 살에 장군이 된 불세출의 군사 전략가, 근대 유럽의 기획자, 유럽 문화의 중심지 파리의 설계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따르고자 했던 몽상가, 히틀러와 스탈린의 선구로 꼽히는 ‘독재자’, 병사들에게 사랑받았던 용맹하고 친근한 ‘꼬마 하사관’, 21세기 정치인보다 여론의 중요성을 더 잘 알았던 정치 선전의 귀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생애와 그의 세계는 수많은 신화와 반(反)신화 속에서 실체를 잃었다. 마침내 이 책에서 모두가 알지만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인간 나폴레옹의 참모습을 만난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성격과 업적에 관해서 평자들은 늘 의견이 갈렸다. 영국의 역사가 프랭크 매클린은 이 총체적이고 압도적인 전기에서 코르시카의 어린 시절에서 프랑스 혁명과 군사적 승리의 시기를 거쳐 1804년 황제 등극과 최종적인 패배, 죽음에 이르기까지 나폴레옹의 비범한 삶과 그 삶을 움직인 심층 심리를 추적한다.
‘알면 알수록 더 수수께끼 같은 인간’ 나폴레옹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인물로 드러난다. 실존적인 영웅이자 운명의 노리개였으며 이성의 사도이자 몽상가였고 지적인 거인인 동시에 도덕적으로는 난쟁이였던 사람, 위대한 천재이자 흠결 많은 인간이었던 나폴레옹의 삶을 입체적으로 되살려낸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전기이다.
○ 목차
머리말
1장 어린 시절
코르시카의 유산
2장 파리왕립군사학교
외로운 늑대, 루소의 후예
3장 혁명의 소용돌이
책에 미친 포병 장교
4장 코르시카의 혁명가
움트는 야망
5장 첫 승리, 툴롱 탈환
스물네 살 자코뱅 장군
6장 파리의 수호자
조제핀과 어머니 콤플렉스
7장 제1차 이탈리아 전쟁
무적의 야전 사령관
8장 전쟁 천재
개선장군, 학술원 회원이 되다
9장 이집트 원정
알렉산드로스를 따라
10장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권력의 정점을 향하여
11장 제2차 이탈리아 전쟁
종신 통령에 오르다
12장 절대 권력자
나폴레옹 법전을 만들다
13장 나폴레옹의 내면 세계
합리성과 비합리성 사이
14장 황제 즉위
스스로 제관을 쓰다
15장 아우스터리츠 전투
가장 완벽한 승리
16장 유럽 제패
‘말을 탄 세계 정신’
17장 에스파냐 개입
자만의 수렁에 빠지다
18장 오스트리아 바그람 전투
흔들리는 무적 신화
19장 나폴레옹 제국의 해부
‘공화주의자 황제’의 시대
20장 이베리아 반도 전쟁
게릴라와 웰링턴의 협공
21장 대륙 봉쇄 체제
무너지는 권력의 토대
22장 러시아 원정
유령 도시와의 전쟁
23장 동토의 탈출
자기 파괴적 싸움의 끝
24장 포위된 제국
전 유럽과 맞서다
25장 파리 함락
배반당한 ‘프랑스의 영광’
26장 엘바 섬의 군주
죽지 않는 영웅의 꿈
27장 백일 천하
워털루, 신화의 종말
28장 세인트헬레나
운명의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
맺음말 – 불가능한 것을 향한 야망
참고문헌
나폴레옹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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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소개 : 프랭크 매클린
영국의 역사가, 저널리스트. 역사적 인물들의 전기와 전쟁사에 뛰어난 작가이자 역사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옥스퍼드 워덤칼리지와 런던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옥스퍼드 세인트안토니 칼리지에서 앨리스테어 혼 연구원을 지냈으며, 스트래스클라이드 대학교와 런던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영국 왕립역사학회와 왕립지리학회 회원이다. 30권에 이르는 책을 썼으며, 나폴레옹과 사자왕 리처드, 카를 융의 전기로 대중의 찬사와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주요 저서로 《나폴레옹》《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칭기즈 칸》《전사들》《카를 구스타프 융》이 있다.
– 역자: 조행복
서울대학교 대학원 서양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옮긴 책으로 『독재자들』(2008)과 『백두산으로 가는 길』(2008), 『20세기를 생각한다』(2015), 『나폴레옹』(2016), 『폭정』(2017), 『블랙 어스』(2018), 『전쟁의 재발견』(2018), 『전후 유럽 1945~2005』(2019), 『토인비의 전쟁과 문명』(2020), 『대격변』(2020), 『전쟁의 미래』(2020), 『베르됭 전투』(2020) 등이 있다.
○ 출판사 서평
“이 뛰어난 전기는 분명 나폴레옹 일대기의 고전이 될 것이다.” – The Times
- ‘신을 닮은 인간’과 ‘피에 굶주린 코르시카 괴물’ 사이, 신화와 전설에 가려진 인간 나폴레옹의 진짜 얼굴을 본다!
헤겔의 ‘말을 탄 세계 정신’이자 니체의 ‘초인’이었고 톨스토이에겐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666의 인간’이었던 사람, 인간에게 불을 전해주고 영원한 고통의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였으며 ‘죽음과 파멸을 부르는 괴물’이었던 남자. 근대 서구 역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정치인이자 군사 지도자로 평가받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769년 프랑스령 코르시카에서 태어나 1821년 영국령 세인트헬레나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는 루이 15세 때 태어나 루이 16세가 통치하던 시절에 프랑스군 장교로 경력을 시작했으며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뒤 혁명 수호를 위한 전쟁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군주제와 신분제에 일격을 가한 혁명 덕분에 출세할 수 있었으나 혁명 종식을 선언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나폴레옹의 삶과 그의 성취는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역사가들 사이에서조차 찬사와 비난의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다. 나폴레옹을 두고 누구나 동의하는 단 한 가지는 그의 성격과 그가 이룬 일들을 한마디로 평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지위도 돈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의지와 능력만으로 권력의 중심에 선 야심가, 스물다섯 살에 장군이 된 불세출의 군사 전략가, 근대 유럽의 기획자, 유럽 문화의 중심지 파리의 설계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따르고자 했던 몽상가, 히틀러와 스탈린의 선구로 꼽히는 ‘독재자’, 병사들에게 사랑받았던 용맹하고 친근한 ‘꼬마 하사관’, 21세기 정치인보다 여론의 중요성을 더 잘 알았던 정치 선전의 귀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생애와 그의 세계는 수많은 신화와 반(反)신화 속에서 실체를 잃었다. 마침내 이 책에서 모두가 알지만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인간 나폴레옹의 참모습을 만난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성격과 업적에 관해서 평자들은 늘 의견이 갈렸다. 영국의 역사가 프랭크 매클린은 이 총체적이고 압도적인 전기에서 코르시카의 어린 시절에서 프랑스 혁명과 군사적 승리의 시기를 거쳐 1804년 황제 등극과 최종적인 패배, 죽음에 이르기까지 나폴레옹의 비범한 삶과 그 삶을 움직인 심층 심리를 추적한다. “알면 알수록 더 수수께끼 같은 인간” 나폴레옹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인물로 드러난다. 실존적인 영웅이자 운명의 노리개였으며 이성의 사도이자 몽상가였고 지적인 거인인 동시에 도덕적으로는 난쟁이였던 사람, 위대한 천재이자 흠결 많은 인간이었던 나폴레옹의 삶을 입체적으로 되살려낸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전기이다.
“마치 다른 길을 가리키는 최후의 암시처럼, 일찍이 존재했던 인간 중에서 가장 독특한, 그리고 가장 늦게 태어난, 저 인간 나폴레옹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에게서 고귀한 이상 그 자체가 문제로 되살아났다. 그것이 어떤 문제인지 잘 생각해보라. 나폴레옹, 이 비인간 Unmensch이자 초인간 Übermensch의 종합인 존재를…….” _ 니체
“나폴레옹, 그는 왕관을 쓴 혁명이다. 그는 알면 알수록 더 거대해진다.” – 괴테
“나는 정찰을 위해 도시에서 말을 타고 나오는 황제를 – 이 세계 정신을 – 보았다. 그런 사람이 이곳에서 단 하나에 정신을 집중한 채 말에 올라타 전 세계로 뻗어나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을 보는 것은 실로 굉장한 감동이다. …… 상황을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늘, 다시 말해 프랑스 황제의 의지뿐이다.” _ 헤겔
“카이사르 이후 지구상에 나타난, 아마도 카이사르를 능가하는 가장 경이로운 존재.” – 스탕달
“나폴레옹의 생애는 지난 1천 년 역사에 가장 비범한 생애였다. …… 나폴레옹은 확실히 내가 본 인간 중에서 가장 대단했고, 우리 세대에 살았던, 아니 여러 세대 동안 살았던 인간 중 가장 놀라운 인물이라고 나는 믿는다.” – 탈레랑
“진흙의 인간을 소생시킨 가장 강력한 생명의 숨결.” – 샤토브리앙
“나폴레옹의 천재성을 그토록 가볍게 처리하는 공론가들은 나폴레옹이 세상에 많은 것을 전해주었는데도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더 놀라운 천재성을 드러내기를 요구한다. 나폴레옹은 자신을 변화시켜야 했을 뿐만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수정하고 다른 유럽에서 다른 인간이 되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 조르주 소렐
“누가 뭐라든, 나폴레옹과 비견될 사람은 거의 없으며 그보다 뛰어난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는 매력적인 인물이어서 그를 만난 사람들은 누구나 지휘관으로서 그의 뜨거운 열정과 지성에 즉시 압도당했다.” – 버나드 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위대한 군 지도자 히틀러와 나폴레옹이 자주 비교되긴 하지만, 그러한 비교는 허상에 불과하다. 히틀러는 12년간 권력을 행사한 뒤 군대를 제외한 분야에서는 독일에 해골과 쓰레기만 산더미처럼 남겼다. 반면 나폴레옹은 단 한 번도 전투에 임하지 않았더라도 프랑스에 남긴 행정 체제와 시민 개혁만으로도 여전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의 하나로 평가될 것이다.” – 앨리스테어 혼, 《나폴레옹의 시대》
- 나폴레옹은 누구인가?
“나의 치세는 내가 더는 강력하지 못하여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를 멈추는 날 끝날 것이다. …… 왕좌에 앉을 운명을 타고난 그대의 군주들은 큰마음 먹고 스무 번 패해도 되고 언제나 수도로 되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다. 나는 나 자신의 힘으로 출세한 군인이기 때문이다.” _ 나폴레옹, 1813년 6월 드레스덴 회담에서
.코르시카에서 온 소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769년 8월 15일 프랑스령 코르시카의 하급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법률가 출신인 아버지 카를로와 군인 집안의 딸인 어머니 레티치아는 13남매를 낳았고 그중 8남매가 살아남았다. 나폴레옹은 살아남은 아이들 중 둘째였다.
1779년 1월 아홉 살이 되었을 때 나폴레옹은 교육을 위해 고향을 떠나 프랑스로 갔다. 오툉 학교에서 몇 달 머문 뒤 5월에 브리엔 군사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브리엔 군사학교에서 5년을 지내는 동안 나폴레옹은 학업에서 뛰어난 성취를 보였다. 수학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고 한니발 같은 고대 군사 지도자에게 관심이 많았다. 1784년에 파리 왕립군사학교로 진학해 본격적으로 장교가 되기 위한 공부를 했는데, 이듬해 아버지가 갑자기 위암으로 사망하면서 일정을 앞당겨 장교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보통 2년에서 3년 정도 걸리는 공부를 몇 달 만에 끝내고 장교 시험에 합격해 1785년 11월 열여섯 살에 라페르 연대에 포병 소위로 임관하였다.
.코르시카 민족주의자와 혁명의 아들
나폴레옹은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뒤 휴가를 얻어 코르시카로 귀향해 혁명의 이상을 품은 정치가로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프랑스 정규군 장교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몇 차례 프랑스로 돌아가야 했으나 1793년 5월까지 주로 코르시카에서 활동했다. 1792년 3월에 코르시카 의용군 대대의 중령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독립 운동의 영웅으로서 1790년 이후 코르시카 정치를 장악한 파스콸레 파올리를 흠모했고 그와 함께 일하고자 했다. 그러나 혁명 프랑스를 신뢰하지 않았던 파올리와 혁명의 과격파인 자코뱅이 된 나폴레옹은 결국 결별하게 되었고, 나폴레옹 일가는 생명의 위협을 받아 1793년 5월 코르시카를 떠나야 했다.
.군사 천재 나폴레옹의 등장
1793년 가을 툴롱에서 일어난 왕당파 반란을 진압하는 작전에 참여해 처음으로 무공을 세우고 준장으로 진급했다. 1794년 7월 말, 혁명 정부의 핵심으로서 공포정치를 펼친 로베스피에르 일파가 실각하는 ‘테르미도르 반동’이 일어나면서 나폴레옹에게도 위기가 닥쳤다. 나폴레옹은 로베스피에르파라는 혐의로 열흘간 체포되었다가 증거 부족으로 석방되었으나 군대에서 미래가 어두워졌다. 보직을 맡지 못한 채 1년 이상 파리에서 머물던 중 1795년 10월 5일 파리에서 일어난 왕당파 반란을 진압해 새로운 기회를 잡았다. 1796년 3월 조제핀(로즈 드 보아르네)과 결혼했고, 결혼식 이틀 후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으로서 오스트리아군과 맞서기 위해 이탈리아로 떠났다.
.스스로 황제의 관을 쓰다
1796~1797년 이탈리아 전선에서 거듭 승전하면서 오스트리아와 평화조약을 맺고 군사 지도자로서 프랑스 국민들에게 이름을 널리 알렸다. 1798년 5월에는 프랑스의 숙적 영국을 물리치기 위한 작전의 하나로 이집트 점령을 위한 원정을 떠났다. 원정은 결국 실패로 끝나지만 나폴레옹은 노련한 정치 선전을 통해 승리한 전투를 부각시켜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1799년 11월 9일 (브뤼메르 18일) 군대를 동원해 의회를 장악한 뒤 헌법 개정을 지휘하고 원로원 (상원)에 의해 제1통령에 임명되었다. 1802년에는 종신 통령에 올랐다. ‘종신’ 통령 여부를 묻는 국민 투표는 나폴레옹의 압도적인 인기를 보여주었다.
제1통령 시기 (1800~1804년)에 프랑스 민법전 (‘나폴레옹 법전’)을 편찬했고 대프랑스 동맹군에 맞서 전투를 계속했다. 1804년 12월 국민 투표를 거쳐 황제에 즉위하였다. 1805년 가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 해군에 패배했지만, 그해 12월 나폴레옹이 직접 이끈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 동맹군에 대승을 거두며 유럽 대륙에서 위세를 떨쳤다. 1808년 나폴레옹은 러시아 국경에서 대서양까지 뻗은 제국을 지배했다.
.몰락 – 떨어진 ‘아우스터리츠의 태양’
1809년 12월 조제핀과 이혼하고 이듬해 오스트리아 공주 마리 루이즈와 재혼하였다. 1811년 마리 루이즈가 나폴레옹의 유일한 적자인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나폴레옹 제국은 1808년에 시작한 소모적인 이베리아 반도 전쟁으로 계속 손실을 보았고 1812년 러시아 원정 실패를 기점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러시아 원정을 계기로 6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어 프랑스 제국의 영토 안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1813년 10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한 데 이어 1814년 3월 파리를 점령당하면서 나폴레옹은 황제에서 물러나야 했다. 1815년 2월 26일 엘바 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은 파리로 돌아와 다시 황제에 올랐으나 6월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여 항복하였다. 그 뒤 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었고 1821년 그곳에서 죽어 이름 없는 무덤에 묻혔다. 1840년 파리의 앵발리드로 이장되었다.
- 나폴레옹, 신화와 반 (反) 신화 사이 : 신화와 전설을 걷어낸 비판적인 전기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나폴레옹은 자신의 삶을 한 편의 소설 같았다고 회고했다. 나폴레옹의 삶은 그만큼 극적이었거니와 조상의 혈통부터 생년월일, 죽음의 원인에 이르기까지 생의 모든 순간이 ‘신화’와 ‘전설’로 뒤덮여 있다. 나폴레옹을 숭배하거나 두려워하고 증오한 이들이 끊임없이 추측하고 지어내고 부풀렸기 때문이며, 나폴레옹 스스로 자신을 신화화했기 때문이다.
역사가이자 비평가인 이폴리트 텐은 나폴레옹의 가계를 이탈리아의 콘도티에리(condottieri, 르네상스 때 이탈리아에 있었던 용병대장들)까지 추적했으며,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한때 아프리카의 셈족이 코르시카에 거주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들어 나폴레옹이 유대인이라고 주장했다. …… 나폴레옹의 조상으로 가장 합당하지 않은 후보에게 상을 준다면 철가면의 남자가 받아야 할 것이고, 부모로서 추정될 가능성이 가장 낮은 후보는 행인과 염소 치는 소녀일 것이다. – 12쪽․1장 어린 시절
나폴레옹은 혁명 프랑스를 무너뜨리기 위해 동맹을 맺은 유럽 군주국들에 맞선 전쟁을 통해 전 유럽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으며,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해 완전히 물러나기 전까지 20년간 전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나폴레옹에게 찬사를 보내는 사람이나 비판하는 사람 모두 그가 군사 지도자이자 현실 정치가로서 근대 이후 세계사에서 전무후무한 인물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수행한 이른바 ‘혁명 이념 전파를 위한 전쟁’과 제국 건설, ‘나폴레옹 법전’ 같은 공적인 과업에 대해서는 그가 살아 있던 시대부터 현재까지 평가가 극명하게 갈린다.
나폴레옹에 관한 모든 것은 자체의 역설을 낳는다. 한편으로 나폴레옹은 그 전쟁의 혼란스러운 충격으로 한 세대 동안 유럽 경제에 퇴보를 가져온 사람으로 볼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봉건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마지막 승리를 확보하고 막 탄생한 프랑스 산업을 영국의 강력한 경쟁으로부터 보호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 …… 나폴레옹의 가장 심오한 역설은 운명을 신뢰한다고 고백했던 인간이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 거듭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 1067쪽․맺음말
프랭크 매클린은 나폴레옹이 직접 쓴 글과 나폴레옹의 친구와 적들이 남긴 회고록, 나폴레옹 당시부터 현재까지 나온 수많은 나폴레옹 연구서를 비판적으로 참고하여 매우 객관적이고 충실한 전기를 완성했다. 특히 1760년대부터 1820년대까지 프랑스 국내 정치는 물론이고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독일, 오스만튀르크, 이탈리아 등 유럽의 복잡한 정치 상황을 명확하게 정리함으로써 나폴레옹과 그의 시대를 좀 더 폭넓게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 모순과 역설의 인간 나폴레옹 : 나폴레옹의 심층 심리
나폴레옹이 이룬 성취만이 아니라 나폴레옹의 성격과 사적인 삶도 모순과 역설이 가득하다. 프랭크 매클린은 나폴레옹의 모순되는 언행과 불합리한 선택, 그에 따른 결과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깊은 원인을 찾는다. 프로이트와 카를 융을 비롯한 정신분석학자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삼아 나폴레옹의 전 생애를 관통해 심대한 영향을 끼친 몇 가지 뿌리 깊은 내적 동기를 드러낸다.
저자가 나폴레옹의 성격에 나타난 가장 큰 특징으로 꼽는 것은 “수학자와 낭만적 몽상가 사이의 모순”,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충돌이다. 군사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나폴레옹은 수학과 과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명료함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나폴레옹은 “세력이 커져 가는 낭만주의 운동의 사도로서 전쟁과 비극, 매우 위험한 모험에 관한 상상을 미친 듯이 자유롭게 만끽했다.” 나폴레옹은 어려서부터 한니발과 카이사르 같은 고대의 장군들에게 항상 관심이 많았고 특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나폴레옹으로 하여금 이집트 원정과 러시아 원정 같은 군사적 모험을 감행하게 만드는 무의식적 동기가 되었다.
나폴레옹은 플루타르코스와 마리니, 레날 신부의 책을 읽어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티무르를 모방하려는 열망을 키웠다. …… “우리는 동쪽으로 가야 해. 위대한 영광은 모두 그곳에서 얻었지.” 나폴레옹은 탈레랑과 이집트 모험에 담긴 모든 의미를 긴 시간 논의하고 이틀이 지난 후인 1798년 1월 29일 부리엔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여기 머물기 싫어. 할 일이 없거든. …… 여기서는 모든 일이 끝났지만 나에게는 영광이 여전히 모자라. 이 자그마한 유럽이 충분하게 제공하지 않으니 난 동쪽으로 가야 해.” – 288쪽․9장 이집트 원정
나폴레옹을 움직인 내적 동기 중에 어머니에 대한 양가감정을 빼놓을 수 없다. 어린 나폴레옹에게 어머니는 자상함과 거리가 먼, 무섭고 엄격한 훈육자였다. 나폴레옹이 하루에 18시간을 꼬박 일하고 공부하는 일벌레가 된 것은 어머니의 영향이었다. 그는 어머니를 사랑했고 미워했다. 어머니가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코르시카에서 나폴레옹 일가의 후원자였던 마르뵈프 백작)와 불륜 관계를 맺었을 것이라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양가감정은 나폴레옹이 첫 번째 결혼에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의아해하는 대상을 택하게 만들었다. 전도유망한 젊은 장군 나폴레옹이 열정적으로 사랑한 ‘조제핀’은 그보다 6살이 많았고 한 번 결혼한 경력이 있었으며(남매를 두었다) 아름다움이 퇴색해 가는 여인이었다. 게다가 조제핀은 사교계에서 화려한 남성 관계로 유명했다. 나폴레옹은 왜 조제핀과 결혼했을까?
나폴레옹은 나이가 많고 성적으로 문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해 독특한 어머니 콤플렉스에 사로잡혔음을 증명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분열된 감정의 대상인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존경하지는 않았으며, 그 주된 이유는 어머니의 부정이었다. 나폴레옹이 데지레가 아닌 조제핀을 선택한 데에는 분명 이런 사실이 뿌리 깊이 숨어 있다. 데지레는 나폴레옹이 파리에 머물며 오랫동안 자신과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거의 신앙에 가깝게 나폴레옹에게 충실했던 어린 소녀였으므로 필요한 속성을 갖추지 못했다. 반면 부정한 ‘어머니’인 조제핀은 나폴레옹의 무의식에 깊이 감추어진 충동을 모조리 충족시켰다. – 186쪽․6장 파리의 수호자
- 툴롱에서 워털루까지, ‘전쟁 천재’ 나폴레옹의 드라마
“로디 전투 (제1차 이탈리아 전쟁에서 1796년 5월 10일에 치른 전투)가 끝난 저녁에야 비로소 나는 내가 뛰어난 인간임을 깨달았고 그때까지는 공상적인 꿈으로만 간직해 오던 위대한 일을 실행에 옮겨보겠다는 야망을 품게 되었다. …… 정치라는 무대에서 결정적인 배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_ 나폴레옹,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에서 프랭크 매클린은 군사사에 정통한 역사가로서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나폴레옹의 군 경력에서 전환점이 된 툴롱 전투부터 황제로 가는 길을 열어준 마렝고 전투, 가장 빛나는 영광을 안겨준 아우스터리츠 전투, 참담한 실패로 끝난 러시아 원정, 몰락의 신호탄이 된 라이프치히 전투와 마지막 워털루 전투까지,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의 주요 전투를 생생하게 되살려낸 것이다. 저자는 나폴레옹의 군사적 재능과 나폴레옹의 군사적 모험에 동참한 장군들, 실제 전투의 경과, 승패를 가른 결정적 지점을 꼼꼼히 정리하고 분석한다.
나폴레옹의 군사적 재능은 꼭 집어 말하기 어려우나 몇 가지 범주는 그 재능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나폴레옹은 성실한 수학적 계획자였고 속임수의 귀재였으며 지극히 뛰어난 임기응변 능력을 타고났고 공간과 지리에 관한 상상력이 놀라웠으며 사실과 세세한 내용을 놀라울 정도로 잘 기억했다. 나폴레옹은 세심한 계획과 모의 전쟁 연습을 신뢰했는데, 그 목적은 우연의 요소를 최대한 반영하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논리와 확률을 이용해 적군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을 대부분 무산시켰으며 자신이 원하는 전투 시점을 정확히 뽑아냈다. 나폴레옹은 신중하게 승산을 따져 아군과 적군의 기동이 어떤 결과를 낼지 알았다. – 248쪽․8장 전쟁 천재
가장 훌륭한 사람은 상 (上)이집트에서 드제와 함께 빛나는 전과를 올린 다부였다. 드제와 다부는 가까운 친구였으며, 나폴레옹이 드제를 진심으로 좋아했기에 다부는 이 연줄과 클레베르에 대한 혐오,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나폴레옹의 호감을 얻었다. …… 란은 친구인 오주로처럼 정력적인 인물로서 나폴레옹에게 엄청난 총애를 받았다. 나폴레옹은 란과 뮈라 사이의 혹독한 증오를 은밀히 즐겼다. 란은 대단한 허풍쟁이였지만 군사적 재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마르몽보다는 진실했다. 마르몽은 오로지 나폴레옹의 후원에 힘입어 출세했는데도 은혜를 배신으로 갚았다. 반대로 모르티에는 눈에 띄게 충성했다. – 507쪽․14장 황제 즉위
(1805년 12월 2일 아우스터리츠에서) 이제 술트의 2개 사단 (여전히 안개 속에 가려 있었다)을 프라첸으로 진격시킬 때가 온 듯했으나, 나폴레옹은 탁월한 타이밍 감각과 터무니없는 자신감으로 출발을 잠시 미루었다. 나폴레옹이 술트에게 물었다. “고지로 돌격하는 데 얼마나 걸리겠나?” 술트 원수가 대답했다. “20분입니다.” 황제가 말했다. “아주 좋아. 15분만 더 기다리지.” 나폴레옹의 군사적 재능이 이때만큼 뚜렷이 드러난 적은 없다. 나폴레옹은 프라첸 고지에서 동맹군이 술트의 임무를 쉽게 해줄 만큼 충분히 빠지되 이렇게 고지를 벗어난 병력이 심한 압박을 받고 있는 프랑스군 우익을 압도할 만큼은 아닌 정확한 평형점을 직관적으로 알았다. – 561, 563쪽․15장 아우스터리츠 전투
- 나폴레옹은 어떻게 권력을 장악했나?
“나는 권력의 맛을 보았고 권력을 포기할 생각이 없소. 주인이 될 수 없다면 프랑스를 떠나기로 결심했소. 그렇지만 지금은 열매가 무르익지 않았으니 너무 이르오. …… 평화는 지금 당장은 내게 이롭지 않소.” _ 나폴레옹, 1797년 미요 드 멜리토에게
나폴레옹은 어떻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을까? 왕이나 귀족 가문 출신도 아니고 엄청난 부를 지닌 것도 아니면서 나폴레옹은 유례없는 출세 가도를 달렸다. 혁명 이후에 일어난 변화가 나폴레옹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주었지만 나폴레옹이 지닌 능력이 없었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나폴레옹은 평생 동안 분야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책을 탐독했고, 전쟁터에서 “각 연대의 정확한 숫자와 정확한 위치, 장교들의 이름과 장비의 세세한 내역을 기억하는 환상적인 능력”을 갖춘 최고의 지휘관이었으며, 학술원 회원들과 함께 토론을 할 정도로 지적으로 뛰어났다. 나폴레옹이 실제로 한 일을 보면 그가 군사적 재능을 겸비한 르네상스형 인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비견할 만한 역사 인물은 알렉산드로스 대왕뿐이다.
적들은 나폴레옹의 자만심과 인간에 대한 경멸, 신경쇠약, 신경과민, 우유부단을 말하는데, 나폴레옹에게 이 모든 성질이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이러한 단점들을 보완하는 비상한 기억력과 명철한 지성, 무서울 정도로 방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나폴레옹은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대단한 일벌레였고 대체로 하루 열여덟 시간을 일했다. – 464쪽․13장 나폴레옹의 내면 세계
나폴레옹이 군사 지도자로서 성공을 발판으로 삼아 권력을 장악했다고 흔히 말하지만, 사실 그가 정치적 재능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군사적 재능을 발휘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다. 툴롱 전투에 참여해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쓴 선전 팸플릿 《보케르의 저녁 식사》가 권력 핵심에 있던 인물(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의 동생 오귀스탱)에게 전해져 인연을 맺은 덕분이었다.
특히 저자는 나폴레옹이 병사들에게 사랑받는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정치 선전가로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로 인간 심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든다.
나폴레옹은 전 군단이 자신의 원칙에 헌신하도록 만들기 위해 병사들의 마음과 정신을 얻어야 했다. …… 나폴레옹의 탁월함은 인간의 심리를 이해했다는 데 있다. 나폴레옹은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돈에 좌우되지만 이를 인정하기는 몹시 싫어해, 부정한 이득을 신비롭게 포장하고 모호하게 가려주는 지도자를 추종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최상의 각본은 부의 추구가 신을 섬기고자 하는 열망으로 합리화될 수 있는 콩키스타도르의 사례이다. 나폴레옹은 그런 식으로 종교를 이용할 수는 없었지만 영광과 불멸, 후세의 평가를 활용했다. 서훈 검이나 나아가 레지옹 도뇌르 제도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사람은 하루에 푼돈 몇 푼 받거나 작은 훈장을 얻기 위해 목숨을 바치지는 않는다. 정신에 말을 걸어 자극을 주어야 한다.” – 242~243쪽․8장 전쟁 천재
1799년 11월 9일에 나폴레옹이 감행한 브뤼메르 쿠데타는 그를 프랑스의 최고 권력자로 만들어주었으며 장차 황제로 나아가는 길에서 첫 번째 관문이었다. 쿠데타로 총재정부를 폐지한 뒤 제1통령에 임명된 나폴레옹은 국민 투표를 통해 자신의 신임을 확인했다. 투표 결과는 나폴레옹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혁명이 일어난 지 10년 만에 프랑스인들은 1인 통치를 받아들였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제 나폴레옹은 명목상으로는 아니지만 실제로 독재권을 장악했다. 프랑스 국민은 평화와 안정이 자리 잡고 불확실성을 끝내기를 절실히 원했기에 일인 통치에 동의했다. …… 총재정부는 자코뱅주의에 상처를 입혔지만 완전히 파괴하지는 못했으며, 1789년 이래 그토록 많은 피를 흘렸는데도 자유, 평등, 우애에 거세게 반대한 것으로 보였다. 권위, 위계, 질서에 헌신하는 현실주의자요 조정자인 한 남자가 뚜렷한 목적을 갖고 말에 올라탄 채 등장했을 때 전반적인 안도감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프랑스 국민, 달리 말하자면 국민의 상당수는 나폴레옹의 확실한 일 처리에 감명을 받았으며 나폴레옹이 헌법의 미묘한 뜻을 무시해도 개의치 않았다. 역사적 필연이 나폴레옹을 보낸 것 같았다. – 374~375쪽․10장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의 계승자였나? : ‘나폴레옹 법전’과 혁명 이념의 전파
어떤 역사가들은 나폴레옹을 프랑스 혁명의 계승자로 내세우면서 나폴레옹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군사적 승리로써 자신이 지배한 유럽 지역에 ‘자유, 평등, 우애’라는 대혁명의 신조와 이념을 전파했다고 평가했다. 그러한 평가를 가능하게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1804년에 공포한 프랑스 민법전, 이른바 ‘나폴레옹 법전 (Napoleon Code)’이다. 나폴레옹은 훗날 세인트헬레나에서 민법전을 자신이 이룬 진정한 업적으로 꼽았다. “마흔 번의 전투에서 거둔 승리는 워털루의 패배로 사라졌다. 그러나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 있다. 바로 나의 민법전이다.”
제1통령 정부 시절의 불후의 업적은 ‘나폴레옹 법전’이다. 이 법전 덕에 나폴레옹은 자신이 카이사르, 알렉산드로스, 한니발 같은 위대한 장군일 뿐만 아니라 리쿠르고스, 함무라비, 솔론 같은 고대의 유명한 인물들처럼 위대한 입법자도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폴레옹은 1800년부터 4년 동안 회의를 소집해 민법전의 철저한 개정을 감독하게 했다. …… 제1통령은 명석함과 지식과 깊은 통찰력으로 모두를 놀라게 했다. 또 사전 준비를 철저히 했으며 캉바세레스가 준 수많은 두꺼운 책들을 탐독했다. 나폴레옹은 의심을 품은 자들에게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에게는 우선 군사적 재능이 있었으며, 그 다음으로 외교적 기술이 있었으며, 행정 능력과 입법자의 용맹함이 있었다. – 421~422쪽․12장 절대 권력자
나폴레옹이 예견한 것처럼 나폴레옹 법전은 지금까지도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프랑스 혁명의 자유주의적 성과 (법 앞의 평등, 소유권 보장, 개인의 자유)를 담은 민법전이 나폴레옹 통치기에 프랑스의 모든 지배 영역에 전파되면서 결과적으로 서유럽 자유주의 혁명의 토대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개인의 소유권을 인정한 나폴레옹 법전이 뿌리를 내리면서 근대 시민 사회와 자본주의 발달이 가능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매클린은 이러한 사후 평가와 상관없이, 나폴레옹이 프랑스 외부에서 행한 일은 자유와 평등의 전파와 거리가 멀었음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자신이 정복한 지역에서) 나폴레옹은 단순히 봉건 제도를 폐지했을 뿐 진정한 평등으로 안내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다시 강조해야 한다. 그렇다면 실제 일어난 일은 무엇인가? 나폴레옹의 승리로 프랑스 국민은 우월 의식을 가졌고, 그래서 정복지에 ‘시민의 자유’ 같은 대혁명의 이상을 전파했다. 마치 ‘미개한’ 아프리카의 비기독교인에게 복음을 전파한 빅토리아 시대 말기의 선교사들처럼 말이다. …… 나폴레옹은 자코뱅보다 옛 귀족을 더 좋아했고, 프랑스를 벗어나면 대혁명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들조차 거의 도입하려 하지 않았다. 프랑스 밖의 정복지에서는 일관되게 귀족들이 행정직을 차지했으며, 그래서 근본적인 농업 개혁이 불가능했고 이는 프랑스 밖의 농민들이 언제나 나폴레옹에게 냉담했음을 의미한다. – 432~433쪽․12장 절대 권력자
- 나폴레옹은 19세기의 히틀러였나?
어떤 연구자들은 나폴레옹을 20세기 히틀러와 스탈린의 선구로 본다. 프랭크 매클린은 두 사람이 휘하 장군들과 맺은 관계나 청년들로 이루어진 정예 부대를 조직한 것에서 유사하다고 할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 전혀 다르다고 지적한다. “나폴레옹은 놀랍도록 비범한 인물로서 종종 스탈린과 히틀러에 비교되나 두 사람과는 달리 당 조직이나 대중운동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자신의 지혜에만 의존해 산 사람이 있다면 보나파르트뿐이다.” (1068쪽․맺음말)
나폴레옹은 이따금씩만 잔인했으며 원한을 품지 않았고 감상적이었다. 나폴레옹의 감수성은 히틀러나 스탈린의 감수성과는 몇 광년 떨어져 있으며, 실로 나폴레옹은 때때로 충분히 무자비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나폴레옹이 쓸모없는 가족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배반자 베르나도트와 한 입으로 두말하는 탈레랑, 반역을 꾀한 푸셰를 거듭 용서한 일은 가장 두드러진 사례일 뿐이다. 나폴레옹은 구식 전제군주의 기질은 지녔어도 현대의 전체주의적 독재자의 기질은 지니지 않았다. – 462~463쪽․13장 나폴레옹의 내면 세계
- 나폴레옹은 유럽 통합의 선구자였나?
모든 나폴레옹 신화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은 나폴레옹이 직접 조장한 것으로서 모든 국가가 평화롭게 연합하는 ‘범유럽동맹’이라는 고귀한 이상이 자신의 목적이라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에서 측근에게 자신의 삶을 구술하면서 자신이 유럽의 통합을 꿈꾸었다고 말했다. 정말 나폴레옹 제국은 유럽 통합의 시험 버전이었을까? 여기에 대해 매클린은 “나폴레옹의 유럽과 진정한 연방주의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었다. 나폴레옹의 유럽은, 언제나 프랑스의 이익에 종속된 위성국가들의 집합체였다.”라고 냉정하게 평가한다.
유럽연합에 열광하는 자들은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에서 부린 허세를 (자신의 일생의 과업이 유럽의 통합을 겨냥했다는 허세) 진지하게 받아들였으나 모르는 것이 있었다. 나폴레옹은 폴란드와 이탈리아, 특히 에스파냐에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스스로 인정한 실수들이다) 국적 문제와 문화적 차이 문제를 해결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럽이 그렇게 자유로이 형성되고 내적으로 자유로운 국가들로 나뉘었다면, 국가들 간의 평화는 훨씬 더 쉬워졌을 것이다. …… 나는 유럽 체제, 유럽 법전, 유럽 사법부의 건설을 원한다. 유럽에는 단 하나의 국민만 있을 수도 있었다.” 이는 사후에 교활하게 궁리해낸 합리화이다. 여기에 그랑다르메가 유럽을 강탈하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보나파르트의 형제자매들을 위해 불법적으로 왕위를 빼앗은 이야기와 타락한 원수들에게 건넨 막대한 기부와 특전, 오로지 프랑스만을 위해 위성국가들을 착취한 (다른 낱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이야기는 전혀 없다. – 1063~1064쪽․맺음말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