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나폴레옹 전쟁 : 근대 유럽의 탄생
그레고리 프리몬-반즈, 토드 피셔 / 플래닛미디어 / 2009.8.7
무수한 수식어를 남기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나폴레옹. 이 책은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나폴레옹 전쟁과 전쟁의 참상을 자세하게 조명한 객관적인 역사서이다.
나폴레옹이 전 유럽 제패를 위해 유럽의 여러 나라를 상대로 벌인 나폴레옹 전쟁을 중심으로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비롯해 프랑스 대육군과 그에 맞선 각국의 군대, 각 전투가 벌어진 과정, 대프랑스 동맹을 맺은 각국의 지도자와 군사 지휘자들 간의 복잡 미묘한 관계 등을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하나하나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밖에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군인과 종군 악사, 배우, 외교관, 예술가 등에게 시선을 돌려 그들의 눈에 비친 나폴레옹 전쟁의 참상을 그들의 일지나 회고록, 또는 미술 작품을 통해 다각도로 보여준다. 또한 나폴레옹이 10년 동안 권좌를 장악하면서 군사, 행정, 법률, 교육, 과학 분야에서 단행한 많은 개혁들과 예술과 문화에 미친 영향을 조목조목 살펴본다.
○ 목차
소개의 글 _ 정말 놓쳐서는 안 될 역사서
서문 _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대서사시
1부 프랑스 제국의 탄생과 부흥 1805~1807
전쟁의 배경 – 시한부 평화
교전국 – 전쟁 전야
전투 – 울름 전투에서 틸지트 조약까지
어느 군인의 초상 – 프랑스 원스 장 란
어느 종군 악사의 초상 – 필립_르네 지롤
2부 구제국의 역습 1808~1812
전쟁의 배경 – 반란과 항쟁
교전국 –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전투 – 대오스트리아 전쟁에서 모스크바 진공까지
어느 군인의 초상 – 바실리 데 톨리와 야콥 발터
어느 민간인의 초상 – 루이즈 퓌질
사태의 종결 과정 – 곤경에 빠진 나폴레옹
3부 이베리아 반도 전쟁 1807~1814
전쟁의 배경 – 오래된 앙숙들: 영국, 프랑스, 스페인
교전국 – 각국 군대
전쟁의 발단 – 분쟁의 기원
전투 – 극과 극의 전쟁
어느 군인의 초상 – 영국군 제95소총연대 에드워드 코스텔로 일병
어느 민간인의 초상 – 영국 외무상 조지 캐닝
사태의 종결 과정 – 조금은 허무한 결말: 1814년의 전황
4부 프랑스 제국의 몰락 1813~1815
전쟁의 배경 –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프랑스에 대한 적대의식의 기원
교전국 – 각국 군대
발단 – 복수의 시간
전투 – 독일 해방 전쟁과 프랑스 본토 침공
어느 군인의 초상 – 영국 기마포병대 캐벌리 머서 대위
어느 민간인의 초상 – 영국 외무상 캐슬레이 자작
사태의 종결 과정 – 워털루에 지는 해
나폴레옹 전쟁과 세계 _ 예술로 본 나폴레옹 시대
결론 및 이후의 파장 _ 영광의 끝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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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소개 : 그레고리 프리몬-반즈, 토드 피셔
- 저자 : 그레고리 프리몬 반즈
UC 버클리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와 시카고 대학, 옥스퍼드 대학 등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프랑스 혁명 전쟁( The French Revolutionary Wars)』(2001)의 저자이기도 한 그는 최근 『미국 독립 전쟁 백과사전( Encyclopedia of the American Revolutionary War)』(2006)을 공동 집필했다. - 저자 : 토드 피셔
Napoleonic Alliance.com의 대표이사이자 국제나폴레옹협회(International Napoleonic Society)의 창립 회원이며, Emperor’s Press 및 Napoleonic Journal의 최고경영자다. - 역자 : 박근형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보안 장비를 중심으로 한 기술 번역과 출판 번역 분야에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 『세상보세3: 세계사』, <세계의 전쟁 시리즈> 『욤키푸르 1973』 (1), (2) 등이 있다. - 감수 : 한국국방안보포럼 (KODEF)
21세기 국방정론을 발전시키며 국가안보에 대한 미래 전략적 대안들을 제시하기 위해, 군·정치·학계·언론·법조·경제·문화·마니아 집단이 모여 만든 사단법인이다. 온-오프 라인을 통해 국방정책을 논의하고, 국방정책에 관한 조사ㆍ연구ㆍ자문ㆍ지원 활동을 하고 있으며, 국방 관련 단체 및 기관과 공조하여 국방교육 자료를 개발하고 안보의식을 고양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http://www.kodef.net
○ 책 속으로
P.138
2월 8일 아침이 밝을 무렵, 나폴레옹은 베닉센의 6만 7,000명에 맞서 4만 4,5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빠르게 전진 중인 네의 병력 1만 명과 더불어 다부의 5,500명까지 계산에 넣고 있었다. 그가 가장 바란 것은 적을 고착시켜 아군의 증원대가 양 측면을 공격하는 광경을 보는 것이었다. 러시아인들이라고 멀뚱히 선 채 패배를 맞이할 생각은 없었다. 그들은 100문이 넘는 포로 편성된 거대한 포대로 무시무시한 탄막을 펼치며 선수를 쳤다. 이 포격에 프랑스군 전선의 중앙이 초토화되었다. 프랑스군은 채 절반도 안 되는 수의 포병으로 이에 맞섰지만, 정면에서 휘몰아치는 폭설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P.235
아스페른-에슬링 전투는 전술적인 관점에서 볼 때 양측이 엇비슷한 사상자 (2만2,000명)를 냈다는 점에서 무승부였지만, 전략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의심할 여지없이 프랑스군의 패배였다. 나폴레옹은 이를 감추고자 안간힘을 썼지만, 이 소식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반프랑스 연합국들은 ‘괴물’의 몰락이 임박했는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 출판사 서평
“문제는 더 이상 제군들의 국토 방어가 아니라 적국의 침공이다.”
아미앵 조약에서 반도 전쟁까지 19세기의 여명기로 돌아가 전쟁의 열정을 탐닉하는 전능한 황제를 만난다.
-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나폴레옹 전쟁과 전쟁의 참상을 자세하게 조명한 객관적인 역사서
‘군사 천재’, ‘전장의 신 神’, ‘불가능에 도전한 영웅’, ‘예술을 사랑한 독재자’ 등 무수한 수식어를 남기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나폴레옹. 나폴레옹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책들이 나와 있다. 그러나 국내에 소개된 책들을 살펴보면, 나폴레옹의 내면을 담는 데 치중한 소설 형식의 책이나 그의 영웅적인 면모를 부각시킨 위인전 등이 대부분인 게 현실이다.
이번에 도서출판 플래닛미디어가 출간한 『나폴레옹 전쟁 ― 근대 유럽의 탄생』은 세계적인 밀리터리 전문 출판사인 영국 오스프리 Osprey 출판사의 『The Napoleonic Wars』를 번역한 책으로, 나폴레옹이 전 유럽 제패를 위해 유럽의 여러 나라를 상대로 벌인 나폴레옹 전쟁을 중심으로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비롯해 프랑스 대육군과 그에 맞선 각국의 군대, 각 전투가 벌어진 과정, 대프랑스 동맹을 맺은 각국의 지도자와 군사 지휘자들 간의 복잡 미묘한 관계, 프랑스 제국 점령하의 근대 민족주의의 태동, 젊은 나이에 고속 승진하여 프랑스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른 뒤 직접 수많은 전투를 지휘하며 전쟁의 영웅이 된 나폴레옹의 뛰어난 면모, 대프랑스 동맹의 연합군이 결정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 그리고 전쟁의 종결과 여파 등을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하나하나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에 많이 나와 있는 나폴레옹의 영웅적인 면모에만 치중한 나폴레옹 관련 서적들과는 다른 보기 드문 객관적인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밖에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군인과 종군 악사, 배우, 외교관, 예술가 등에게 시선을 돌려 그들의 눈에 비친 나폴레옹 전쟁의 참상을 그들의 일지나 회고록, 또는 미술 작품을 통해 다각도로 보여준다. 나폴레옹이 10년 동안 권좌를 장악하면서 군사, 행정, 법률, 교육, 과학 분야에서 단행한 많은 개혁들과 정치, 경제, 사회뿐만 아니라, 미술, 건축, 조각, 음악, 요리, 패션 등 예술과 문화에 미친 영향을 조목조목 살펴봄으로써 나폴레옹이 남긴 유산까지도 놓치지 않고 조명하고 있다는 점은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제1부 [프랑스 제국의 탄생과 부흥 1805~1807]에서는 1802년 아미앵 조약이 파기되면서 재개된 전쟁: 울름 전투에서 틸지트 조약까지를 살펴보고, 제2부 [구제국의 역습 1808~1812]에서는 대오스트리아 전쟁과 프랑스군이 큰 타격을 입은 러시아 원정, 제3부 [이베리아 반도 전쟁 1807~1814]에서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영국 연합군 및 스페인, 포르투갈 게릴라들과 프랑스군 사이에 벌어진 피가 피를 부르는 잔인한 싸움, 제4부 [프랑스 제국의 몰락 1813~1815]에서는 독일 해방 전쟁과 프랑스 본토 침공, 나폴레옹의 퇴위, 엘바 섬 유배, 엘바 섬 탈출 후 권력 재장악과 워털루 전투에서의 패배, 세인트헬레나 섬 유배 등 나폴레옹의 어두운 몰락 과정과 그 후 유럽 판도 재편을 위한 승전국들의 빈 합의,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 그리고 나폴레옹이 남긴 유산 등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 두 얼굴의 전쟁 : 전쟁의 영웅과 승리 뒤에 가려진
민초의 삶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고발
나폴레옹 전쟁은 처음에는 프랑스 혁명을 방위하는 성격을 띠었으나, 차차 영토 확장을 위한 침략적인 전쟁으로 변해갔다. 나폴레옹은 이 전쟁 기간 동안 유럽 여러 나라와 60회나 되는 싸움을 벌이면서, 자신이 직접 지휘한 전투에서는 지는 법 없이 승승장구했다. 이 책은 나폴레옹이라는 전쟁 영웅과 그의 원수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여러 나라의 정치 지도자나 군사 지휘자들이 이끈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던 군인, 배우, 종군 악사, 외교관, 예술가 등의 생생한 일지나 회고록, 또는 미술 작품을 통해 당시 그들이 겪은 전쟁의 참상과 부조리함을 고스란히 고발하고 있다.
스페인이 프랑스에 점령될 무렵 62세였던 프란시스코 고야 Francisco Goya는 이후 6년 동안 프랑스군이 스페인에서 자행한 사건들에 영감을 받아 최고의 걸작을 내놓게 된다. 고야는 <전쟁의 참화 Desastres de la Guerra>라는 제목의 판화 82장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적나라한 전쟁의 참상을 기록하고 그것에 관한 그의 솔직한 시선을 담았다. 너무 강렬해서 마음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는 이 판화들은 전쟁이란 극단적 상황이 인간의 야만적 본능을 일깨웠을 때, 인간 본성이 과연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가를 파헤치고 있다. 고야는 분명 전쟁의 영웅이나 승리, 영광스런 전장의 모습이 아니라, 그 뒤에 가려진 전쟁의 참혹함과 부조리함을 고발하고 싶었던 것이다. 고야는 무엇 때문에 사람이 사람에게 그토록 비인간적으로 구는 장면들만 그리느냐는 하인의 질문에 “야만인은 되지 말자는 얘기를 사람들에게 영원히 남기고 싶어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반도 전쟁에서 게릴라들이 보여준 잔인한 행위의 대부분은 프랑스군의 파괴 행위가 낳은 자연스런 결과로, 점령군의 약탈과 무분별한 파괴로 인해 도시와 촌락이 황폐화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프랑스 점령군은 게릴라를 제압하기 위해 갈수록 잔혹한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고, 학살과 이에 맞선 학살이라는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분노는 분노를 낳아, 군대를 따라다니는 프랑스 민간인들이 학살당하면 프랑스군이 지역민들을 총살하고 그들의 터전을 불
태우는 보복이 이어졌다. 양측은 모두 추악한 고문과 살인 행위를 저질렀다. 양측의 동기가 무엇이었건 간에 게릴라의 전쟁은 급속히 피비린내 나는 폭력의 악순환에 빠져들었다.
반도 전쟁에 참가한 프랑스 장군들은 점령한 마을의 자원을 거덜 내며 가는 곳마다 예술품을 훔치고, 보화 찾기에 열중하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환멸에 빠진 프랑스 일반 병사들은 “스페인 전쟁은 졸병들에게는 죽음을, 장교들에게는 폐허를, 장군들에게는 한몫을 의미했다”며 지휘관들의 탐욕에 개탄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처럼 전쟁의 영웅과 승리 뒤에 가려진 끝없는 파괴와 학살, 민중을 침략자들에 대한 보복
행위로 내몬 전쟁의 잔혹함, 전쟁의 희생자가 된 평범한 민중의 고통스런 삶과 일반 병사들
의 개탄의 목소리가 이 책 곳곳에 담겨 있다.
- 나폴레옹의 유산 : 법 앞에 평등이라는 혁명의 원칙과 더불어 재능에 따른 승진을 보장하는 능력주의 원칙을 계승하고 행정, 법률, 교육, 과학 분야에서 많은 개혁 실시
두 번씩이나 폐위를 경험한 나폴레옹은 남대서양의 고도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었고, 두
번 다시는 유럽의 평화를 위협하지 못한 채 1821년에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고작 10년 동안 권좌를 장악했을 뿐인데도 그 사이 프랑스와 유럽 전역에 구석구석 스며든 그의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깊고 끈질긴 지속력을 발휘하고 있다.
나폴레옹은 천재였고, 해박한 지식과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한 비상한 기억력을 갖고 있었다. 그의 타고난 지능은 포병 대위에 불과했던 그가 고작 1년 뒤 23세에 준장까지 벼락출세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26세에 소장이 된 그는 그로부터 5년 뒤 정권을 장악했고, 35세에는 황제가 되었다. 40세가 될 무렵, 그는 거의 모든 유럽을 손에 쥐고 있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군사적 혜안을 가진 것 외에도 민간 분야의 행정, 법률, 교육, 과학 등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는 오늘날까지도 나폴레옹 시대에 이뤄진 많은 개혁들이 그대로 이어질 만큼 상당한 수준의 지식을 자랑했다.
그는 유명한 정교협약을 통해 일대 종교 개혁을 단행하는 한편, 프랑스 국내와 제국의 대부
분에서 민간 및 행정 분야의 개혁을 실시함으로써 폭주하던 혁명에 고삐를 채우고, 비효율을 질서로 대체했다. 프랑스와 독일의 봉건제적 원칙에 기반한 낡은 법률체계는 혁명기에 쏟아져 나온 1만 개의 포고령과 함께 폐지되었고, 그 대신 나폴레옹 법전 Code Napoleon, 또는 프랑스 민법전Civil Code이라 불리는 새로운 체계로 바뀌었다. 그는 정치면에서는 제한된 남성 참정권과 헌법을 고수했고, 경제면에서는 국내 관세를 철폐한 제도를 그대로 유지했다. 교육면에서는 국가가 운영하는 교육체계를 세웠다. 그는 법 앞에 평등이라는 혁명의 원칙과 더불어 행정부의 구성 및 재능에 따른 승진을 보장하는 능력주의 원칙도 그대로 계승했다. 하지만 혁명기의 여러 정부들처럼 입법부에게 많은 자유를 주지 않음으로써, 결국 제국이란 독재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탁월한 군사적 재능에 힘입어 혁명의 원칙을 전파할 수 있었고, 스스로도 ‘혁명의 군인’으로 행세했다. 그에게 정복당한 나라들은 즉시 혁명기와 통령제 정부 시절, 그리고 황제 즉위 이후에 실시된 개혁들을 도입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강제로 개혁이 이뤄지기도 했다. 나폴레옹 법전은 멀리 동쪽의 바르샤바 공국까지 전파되기에 이르렀는데, 자유주의 성향이 강한 알렉산드르 1세는 전쟁 후에도 법 앞의 평등을 비롯한 주요 내용들을 그대로 놔두었다. 그 밖의 이탈리아 등지에서는 나폴레옹의 개혁이 광범위하고 지속적이며 간혹 심대하기까지 한 영향을 끼쳤다.
나폴레옹이 추진한 개혁은 대다수가 그의 정권 아래서 실리를 챙기던 중산층을 위한 것이었다. 법적 권리는 경제적 기회 못지않게 크게 신장되었으며, 산업의 부양으로 수백만 프랑스 시민들의 생활수준이 확실히 높아졌다. 이러한 현상은 자연스럽게 정치의식을 성장시켰고, 보다 넓은 정치 참여의 욕구는 이후 1830년대의 혁명을 거치며 수면으로 떠올랐다. 수많은 점령지와 정복지의 부르주아들은 나폴레옹이 정치, 경제 양 측면에서 변화의 긍정적인 원동력이 되어주리라고 기대했다. 민법전으로 각 계층 간의 평등이 보장되고, 봉건제도 및 구체제의 소유권이 행정 개혁을 통해 폐지되는 가운데 귀족들의 특권은 군주제의 승리와 상관없이 날이 갈수록 약화되었다. 물론 프랑스 밖에서는 법적 권리의 신장이 반드시 농민들의 이익으로 직결된 것도 아니었고 그들의 생활수준이 크게 나아진 것도 아니었지만, 새로운 평등의 원칙 덕분에 어느 정도 근대 사회 진보의 기회가 싹트고 미래의 경제 발전을 위한 초석이 놓이게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 ‘나폴레옹 시대’는 군사적 신기원 못지않게 문화 양식과 상상력에까지 정복자의 힘이 미친 시기였다!
나폴레옹 제국은 프랑스 혁명을 전후로 등장한 갖가지 예술 사조를 흡수하고 활용했다. 당연히 이 시대의 예술에는 신고전주의와 초기 낭만주의의 매혹적이고도 흥미로운 결합에 매료된 제국의 취향이 반영되었다.
회화 분야에서는 자크-루이 다비드와 앙투안-장 그로 같은 화가들이 제국의 장대한 영광을
작품 속에 투영했을 뿐만 아니라, 정점에 이른 제국의 정서까지도 표현해냈다. 음악 분야에서는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의 엄격한 고전 양식에서 감상적인 선율의 낭만주의로 옮아가는 변화가 있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이 같은 변화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다른 어떤 작곡가보다 음악계의 변화를 충실히 보여준 삶을 살았다. 평생 열렬한 공화주의자였던 그는 나폴레옹을 흠모해 교향곡 3번 <영웅 Eroica>을 작곡하기도 했지만,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 소식이 들려오자 ‘위대한 이를 기리며’로 헌사를 바꿔버렸다. 나폴레옹 시대의 작곡가들은 몇몇 뛰어난 군악을 선보이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군악대는 피리와 북이 고작인 옛 방식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오케스트라나 다름없었다. 전투가 펼쳐질 때마다 관악기와 어우러져 전장에 울려 퍼진 북 100개의 소리는 병사들의 사기 진작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나폴레옹은 루브르 궁을 개방해 부르봉 왕가의 소장품부터 자신의 제1차 이탈리아 원
정 당시 노획한 전리품에 이르는 예술품들을 대중이 볼 수 있게 했다. 또 통령과 황제 시절, 나폴레옹은 프랑스에서 전례가 없던 건축 사업들을 벌였다. 파리에서는 개선문을 필두로 지금의 증권거래소 건물과 리볼리 가의 아케이드, 루브르 궁의 북쪽 익벽 翼壁, 방돔 광장의 전승 기념탑 등이 새로 들어섰고, 마들렌 성당이 개축되었다. 우리가 보는 오늘날의 파리는 상당부분이 나폴레옹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 사회는 나폴레옹 황제 즉위 이후 변화기를 맞았다. 혁명 이전만 해도 대부분 개인 살롱을 중심으로 형성되던 상류사회는 황제의 즉위 초부터 황후 조제핀이나 나폴레옹의 여동생들이 머무는 궁전으로 그 무대를 옮겼다. 나폴레옹은 이를 통해 파리의 정치와 유행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패션은 나폴레옹의 취향에 맞지 않았던 통령 정부 시기의 자유분방함을 거쳐 더 보수적으로 변했다. 여자들은 고대 그리스를 동경해 길고 허리선이 높은 ‘제국 양식’의 옷을 입었다. 남자들은 외투와 조끼, 바지 따위를 다양하게 조합해서 입었다. 현대 남성복 양식은 실질적으로 이 시기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상 최초로 외식이 유행한 것 역시 이 무렵이었다. 레스토랑들은 문전성시를 이루기 시
작했다. 프랑스가 낳은 최초의 요리 명장 브리야 사바랭 Brillat-Savarin과 카렘 Careme도 이때 이름을 날렸다. 특히 카렘은 요리를 외교술의 경지까지 끌어올림으로써 프랑스의 위상을 드높이려 한 황제의 추천을 받아 탈레랑의 전속 요리사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나폴레옹은 극장, 가구, 법률, 가톨릭 교회를 비롯한 모든 것에 자신의 자취를 남겼다. ‘나폴레옹 시대’는 군사적 신기원 못지않게 문화 양식과 상상력에까지 정복자의 힘이 미친 시기로 기억될 것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