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내가 설 땅은 어디냐
허근욱 / 타임비 / 2015.9.14
지난 19세기 말에,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세계를 분쟁의 회오리바람 속으로 몰아넣을 냉전 정치전쟁의 위기를 예언한 바 있었다.
그 후 바로 세계1차대전과 세계2차대전이 폭발했고, 그 와중에 우리 민족은 일본 침략의 제물이 되어 망국(亡國)의 비운을 겪었고 이어 민족분단이라는 지정학적인 수난의 비극을 짊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격동하는 역사의 분기점에 허망하게 흘려버린 내 인생의 전반기는, 회색의 고절(孤絶), 바로 그것이었다. 역사로부터 주어진 운명 속에 내 스스로 택한 고난의 물결 속에 나뭇잎처럼 표류해온 지금, 나는 내가 서 있는 고달프고 외로운 자리를 운명이 나에게 선물해 준 것을 고맙게 여기고 있다.
고통은 바로 내 존재를 조각해 주는 삶의 실험실이기 때문이다. 실로 해탈 (解脫)의 초연한 경지는 인간이 스스로 탄생의 의미를 깨닫고자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순수하고 욕심을 버린 착한 자리에 찾아든다.
언제나 내 심상 (心象)에는 분홍빛 낙조가 불타고 있다. 지금껏 내가 살아오는 동안, 내 감정과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낙조는 내 삶의 출발이었고 또 귀결이 될 것이다.
한점의 티도 없는 투명한 분홍빛!
이 완벽한 색깔의 무인지대는, 어린 시절부터 나의 머릿 속에, 나의 가슴 속에, 나의 영혼 속에, 확고부동한 창조의 원형 (原形)을 만들어 주었다.
나의 모든 감정, 모든 느낌, 모든 생각은 분홍빛 무인지대에서 시작이 되었다. 이처럼 인간적인 관심이 싹트기 전에, 미 (美)에 대한 관심에 사로잡힌 나의 삶은 언어나 습관을 배우기 이전에 눈으로 보는 것을 배운 것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는 말이 없는 조용한 아이로 자라났다. 낙조와 함께 고독은 다정한 나의 친구였다. 때로 어찌된 일인지 나는 그림자가 된 것 같은 기분으로 사람들 틈에 끼어 세상 구석구석을 보고 다닌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보는 것을 배우고 있고, 보는 눈을 키우고 있다는 점이다. 세상의 표정과 현실은 마치 공기와 같이 내 심장으로 흘러들어 와 내 의식의 보고 (寶庫)에 채곡채곡 쌓여간다. 어떤 추한 것도 아름다운 것도, 어떤 잔인한 것도 똑같은 비중으로 진리의 심부름꾼 노릇을 해준다. 나는 나를 통해 또 남을 통해 인간의 여러 가지 얼굴과 마음을 알게 되었고,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인간은 영원히 인간임을 알게 되었다.

언제나 운명은 가차없는 체험 속으로 인간을 몰아 넣는다. 오백도 고열의 용광로 안에 광석을 부어 넣듯이—. 그 용광로 안은 일초의 유예도 없는 철저히 고독한 자기 혼자만의 연옥 (煉獄)의 시간이다. 운명은 지켜본다. 인간이 자기 존재를 얼마만큼 정화(淨火)하는가를—. 또 얼마만큼 수은 (水銀)과 같은 진리를 잡아내는가를—. 피를 토하는 것 같은 고뇌의 용광로 속에서 한번 자기를 죽이기 전에는, 인간의 샘명 안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참된 자기를 탄생시키기는 어려운 것이다.
언젠가 나는 어느 가을, 낙조의 시각에 갑자기 깨달랐다. 여름내 무성했던 나뭇잎새가 단풍으로 변색하는 그 의미를—. 그리고 부정 (否定)을 넘어선 긍정적인 세계의 문턱으로 발을 들여 놓을 수가 있었다.
이제 나는 그 무엇도 부러운 것이 없다. 오직 참된 창조의 터전에서 창작에 투신하고 싶을 뿐이다. 또한 현시점에서 신 (神)의 존재 앞에 자부하고 싶은 외침은 모든 것과 바꾼 인간실존의 자유와 청정 (淸淨)함을 터득한 나의 신념이다.
○ 목차
序 詩
서 문
작가의 말
제1부 역사의 격랑 속에서
제2부 풍화된 꿈
제3부 남북 전쟁
제4부 빙 하

○ 저자소개 : 허근욱
1930년 3월 28일 일제강점기 조선 경성부에서 변호사 겸 독립운동가 허헌과 문화 유씨 유덕희 (柳德禱, 또는 유문식 (柳文植))의 딸로 태어났다.
위로는 이복 언니 2명이 있었고, 둘째 언니가 독립운동가 겸 여성운동가 허정자 (허정숙으로 개명)였다. 유덕희에게서는 첫 딸이었다. 그 아래로 음악가인 여동생 허선욱과 허기욱, 허영욱, 허선욱 그리고 북조선에서 외교관을 역임한 허종욱 등이 태어났다.
아버지 허헌은 일제강점기 당시 민족 변호사로 활동했고, 독립운동가의 변호를 서던 중 신간회, 근우회에서 활동하던 황해남도 신천 출신 유덕희를 만나 그를 낳았다. 그 뒤 허헌의 본부인 정긍자가 사망하자 허헌은 유덕희와 재혼하였다.
어머니 유덕희는 신천군 월정리의 개화인사 유태정 (柳泰正)의 딸이었다. 유태정은 지주가문 출신으로, 대지주인 유동승 (柳束昇)의 아들이었으며 한성에 유학하여 동양의과대학을 졸업하였다. 개화사상을 가진 부모의 후원으로 한성부로 상경하여 신문물을 배웠으며, 이화학당 재학 중에는 이화학당의 학생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자대학으로 진학했다. 해방 후에도 계속 가족과 함께 경성에서 체류하다가 1948년 4월 이화여대 영문학과 재학 중 남로당 당수이자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 허헌, 이복 언니 허정숙 등을 따라 월북하였으며 평양러시아어대학에서 수학했다. 그뒤 아버지 허헌은 북한 최고인민위원회 의장이었고, 언니 허정숙은 북한 문화선전상, 보건성부상, 사법상, 최고재판소장,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등을 지냈다.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를 거쳐 평양러시아어 대학을 수료. 1959~1989년 KBS 전문위원으로 집필 근무하다가 1989년 말에 정년퇴직했다.
대한민국문학상 (76.6.29), PEN 문학상 (93.2.26), 순수문학 대상 (97.12.5), 이대문학상 (98.11.27), 새천년한국문학상 본상 (2001.11.3) 허균 문학예술대상 (2002.2.4) 등을 수상했다.
한국문인협회, 국제 PEN 한국본부, 한국소설가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이화대학동창문인회, 한국부인회, 한국여성단체 협의회, 국제직업여성연맹, 한국여성유권자연맹, 민족통일 중앙협의회,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3.1 여성동지회, 신간회 기념사업회 등에서 활동했다.
주요저서로 <내가 설 땅은 어디냐>(61), <옥중기 : 흰 벽 검은 벽>(63), <출옥후 : 고통과 친구가 되어>(92), <제1창작집 : 멩가나무열매 이야기>(76), <운명의 숲>(88), <詩와 散文 모음>(91), <제2창작집 : 프로이트의 제자들>(91), <마지막 水彩畵>(97), <제3창작집 : 이 모든 시간의 끝에>(97), <평전: 민족변호사 許憲>(2001), <물안개 피어오르는 아침>(2003), <녹색의 철문>(2003), <제4창작집 : 싸늘한 달빛의 눈덮인 고원>(2004), 회고록 : 광화문 아웃사이더(2012.9) 등이 있다.

○ 독자의 평
허근욱 작가 남노당 당수딸 수기서 절규 ‘내가 설땅은 어디냐’ 자기정체 찾아 몸부림 : 생사고락같이 한 남편마저 외면, 작가로 인간승리
작가 허근욱 선생은 해방공간에서 외세에 의한 신탁통치 기동아 이를 둘러싼 좌우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창립한 남조선노동당 (남노당) 당수에 취임한 허헌의 둘째딸 허수진. 이하여대 영문과 1학년이었던 그녀는 문학과 그림에 관심을 가지고 문예동맹 활동에 참여했다. 거기서 사귄 청년과 연애하다가 허헌이 평양에 머무르게 되자 가족과 함께 아버지를 따라 월북, 본의 아니게 북한공산정권 아래에서 살게 된다. 그러나 문화선전상인 언니 허정숙의 주선으로 모스크바 유학을 눈앞에 둔 때 청년이 서울에서 그녀를 데리려 오는 바람에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하게 되고 잇달아 6.25전쟁이 터져 인민군이 밀리는 와중에 남편과 함께 월남한다. 허수진을 극진히 아끼는 아버지 허헌 최고인민회의 의장의 사랑을 뒤로 한 채.
사랑만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고 생각하고 가족 몰래 남편을 따라 대전까지 온 허수진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깨닫게 되고, 남편이 청주 지방신문사에 입사해 겨우 생계를 유지하게 되지만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지 못한 남편의 방황과 외도로 끝내 가정은 파탄에 이르고 만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정체가 탄로날까 봐 두려워 숨어살던 것이 탄로되어 간첩죄로 구속되기까지 됐으나 구사일생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그녀를 마중나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혈혈단신, 홀로서야 하는 신세를 절감한 허수진은 처절하게 절규한다. ‘내가 설땅은 어디냐’
그로부터 창작의 길에 들어선 그녀는 허근욱으로 다시 태어나 소설가로서 활약하여 문단의 원로가 되기에 이른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