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노천명 : 일제강점기 한국문학전집 030
노천명 / 씨익북스 / 2016.8.30
노천명은 예민한 감성과 지성으로 고독과 애수가 깃든 작품을 발표하였고, 그 예민함은 결벽주의자와 같았다. 그 결벽주의가 자신의 감성에서 벗어난 현실을 견디지 못하도록 만들고 결국 현실을 벗어난 삶을 꿈꾸는 낭만주의자로 만들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뜻과 다른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현실을 떠나 사는 삶을 바란 노천명을 알면, 그녀 시의 특징인 비정치성과 초연함이 이해된다. 그 비정치성으로 인해 일제 말기에 친일 시를 쓰고, 한국전쟁 때는 북한군에 부역한 죄로 옥고를 치렀으니 안타까울 지경이다.
그렇지만 시인으로서의 재능은 뛰어나 작품의 감각과 감성은 지금 읽어도 뒤처지지 않으며 그녀의 고고한 감성이 잘 절제되어 드러나 있다. 말년에는 그녀를 계속 따라다닌 고독과 비애감을 구원 의지로 승화시킨 작품들을 썼다.
저자 노천명은 한국의 시인. 황해도 장연 출생이다. 진명학교 (進明學校)를 거쳐, 이화여전 (梨花女專)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녀는 이화여전 재학때인 1932년에 시 『밤의 찬미』,『포구의 밤』등을 발표하였다. 그후 『눈 오는 밤』,『망향』등 주로 애틋한 향수를 노래한 시들을 발표했다. 널리 애송된 그의 대표작 『사슴』으로 인해 ‘사슴의 시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독신으로 살았던 그의 시에는 주로 개인적인 고독과 슬픔의 정서가 부드럽게 표현되고 있으며, 전통 문화와 농촌의 정서가 어우러진 소박한 서정성, 현실에 초연한 비정치성이 특징이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중에 쓴 작품 중에는 「군신송」등 전쟁을 찬양하고 전사자들을 칭송하는 선동적이고 정치적인 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1957년 12월 10일 유명을 달리 하였다.

○ 목차
시
사월의 노래
구름같이
사슴
장날
기원
젊은이들에게
싱가폴 함락
부인근로대
군신송(軍神頌)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별을 쳐다보며
아름다운 얘기를 하자
이름 없는 여인 되어
캐피탈 웨이
봄의 서곡
유월의 언덕
비련송
사슴의 노래
봄비
시집 <창변>
길
망향(望鄕)
남(男)사당
작별(作別)
푸른

오월(五月)
첫눈
장미(薔薇)
소녀(少女)
새 날
묘지(墓地)
저녁
한증
수수깜부기
촌경(村景)
잔치
추성(秋聲)
여인부(女人賦)
향수(鄕愁)
돌잡이
춘향(春香)
창변(窓邊)
춘분(春分)
동기(同氣)
감사(感謝)
아―무도 모르게
녹원(鹿苑)
새해맞이
저녁 별
하일산중(夏日山中)
흰 비둘기를 날려라
승전의 날

○ 저자소개 : 노천명 (盧天命, 1912 ~ 1957)
저자 노천명은 1912년 황해도 장연군 순택면 비석포리에서 태어나 1957년 재생불능성빈혈 (백혈병)로 세상을 떠난 시인이자 수필가이다.
진명여고보와 이화여전 영문과 (8회)를 졸업한 후 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사 ‘여성’ 편집부, 매일신보 학예부 기자를 거쳐, 해방이 되자 서울신문, 부녀신문 등에서 총 13년간 근무했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중앙방송국에서 근무했다.
생전에 시집 『산호림』 『창변』 『별을 쳐다보며』를 출간했고, 사후에 나온 유고 시집 『사슴의 노래』가 있다.
수필집 『산딸기』 『나의 생활백서』 『여성서간문독본』 등 생전에 3권을 출간했다.
노천명은 생애 두 번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상처 입고,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어 내면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둘려, 씻을 수 없는 행적으로 고고한 ‘사슴’ 시인의 이미지를 지키지 못했다.
- 생애 및 활동
1911년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했다. 부친 사망 이후 1919년 경성 (京城)으로 이사, 진명 (進明)보통학교를 거쳐 1930년 진명여학교를 졸업했다. 그해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입학했고 재학 당시 「밤의 찬미」(『신동아 (新東亞)』 1932년 6월호)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33년 조선아동예술연구협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34년 졸업 이후 『조선중앙일보 (朝鮮中央日報)』에 입사, 학예부 기자로 근무했다. 같은해 부터 1938년까지 극예술연구회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1935년 『시원 (詩苑)』 동인으로 활동했다.
1937년 조선중앙일보사를 사직하고 잡지 『여성 (女性)』(조선일보사 발생)의 편집을 담당했다.
1938년 대표작인 「사슴」을 비롯한 「자화상」 등이 실린 시집 『산호림 (珊瑚林)』을 출간했고, 잡지 『신세기 (新世紀)』 창간에 참여했다.
1941년 8월 조선문인협회 간사가 되었고, 그해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결전문화대강연회 (決戰文化大講演會)에 참가하여 시를 낭독했다. 그해 12월 조선임전보국단 (朝鮮臨戰報國團) 산하 부인대 (婦人隊) 간사를 맡았고, 후방인 ‘총후 (銃後’에서 여성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전쟁은 이제부터 본격시작 – 동양의 평화를 지키자」(『매일신보』 1941.12.12)를 기고했다.
1942년 일본군의 무운을 비는 「기원 (祈願)」(『조관 (朝光)』 1942.2),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당위성을 강조한 「싱가폴 함락」(『매일신보』 1942.2.19)·「노래하자 이 날을」(『춘추 (春秋)』 1942.3) 등의 시를 썼고, 5월 조선임전보국단 주최로 ‘건국의 새 어머니가 될 우리의 감격과 포부’라는 주제로 열린 ‘군국의 어머니 좌담회’에 참여했다.
1943년 매일신보사에 입사하여 학예부 기자로 활동하면서 조선인 청년들의 적극적인 전쟁 참여를 권유하는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매일신보』 1943.8.5)와 「출정하는 동생에게」(『매일신보』 1943.11.10) 등의 시를 발표했다.
이는 이듬해에 발표한 「병정」(『조광 (朝光)』 1944.5) 및 「천인침 (千人針)」(『춘추 (春秋)』(1944.10)과 같은 시에서도 나타났다.
또한 1944년 12월에는 ‘가미카제 [神風] 특공대’로 나가 사망한 조선인들을 추모·미화하는 「신익 (神翼) – 마쓰이오장 [松井伍長] 영전 (靈前)에」 (『매일신보』 1944.12.6)와 「군신송 (軍神頌)」(『매일신보』(사진판) 1942.12 ) 등의 시들을 썼다.

이외에도 총후 여성의 생산 증대를 강조한 「싸움하는 여성」(『조광 (朝光)』 1944.10)을 발표하기도 했다. 1945년 2월, 1944년 10월 이전에 발표된 시들을 모은 두번째 시집 『창변 (窓邊)』을 출간했다.
해방 이후 『매일신보』의 후신인 『서울신문』에서 1946년까지, 이후 부녀신문사의 편집차장으로 근무했고, 1948년 수필집 『산딸기』를 출간했다.
6·25 전쟁 당시 서울에 남았다가 문학가동맹 및 문화인 총궐기대회 등의 참가와 같은 부역활동에 참여했다. 이로 인해 9·28 수복 이후 ‘부역자 처벌 특별법’에 의거, 20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으나 여러 문인들의 구명운동으로 1951년 4월 출감했고 가톨릭에 입교, 영세를 받았다.
이듬해 부역 혐의에 대한 해명의 내용을 담은 「오산이었다」를 발표했고, 1953년 「영어 (囹圄)에서」와 같이 옥중 경험을 바탕으로 한 옥중시들을 담은 세번째 시집 『별을 쳐다보며』를 발간했다.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에 출강하면서 중앙방송국 촉탁으로 근무했고, 수필집 『여성서간문독분 (女性書簡文讀本)』을 출간했다. 1957년 6월 16일 사망했다.
사망 1주기를 맞아, 이듬해 6월에는 미발표 유작시를 포함한 네번째 시집 『사슴의 노래』가, 1960년에는 170여 편의 시를 모은 『노천명 전집 : 시편』이 간행되었고, 2001년 이후 노천명문학상이 제정되었다.
노천명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 (pp.229∼268)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 출판사 서평
- 친일이라는 오점으로 살아서도 죽어서도 제대로 사랑받지 못한 시인
노천명은 자존심이 강한 데다가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가까운 벗들이 적었고, 또 사랑에 실패하고 평생을 독신으로 고독하게 살면서 겪은 개인적인 고독과 슬픔을 시에 풀어내었다.
또 현실을 벗어나기를 꿈꾼 노천명은 자연과 향토에서 소재를 얻어 소박하고 초연한 서정성을 시에 표현하였다.
그녀는 현학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소박하고 토속적인 어휘들을 말하듯 자연스럽게 사용해 읽기를 편하게 했다. 그러면서도 감성과 감각이 뛰어나 진부한 느낌이 들지 않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고독과 슬픔의 절제미는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에 섬세함을 더해 준다.
말기에는 그녀의 삶을 관통한 애수와 절대 고독을 구원 의지로 승화시켜 그 깊이를 더하였다.
노천명은 여성 특유의 애수와 고독을 심화하고 감상을 절제하면서, 195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내면 의식의 탐구와 새로운 언어의 발견에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무엇보다 여성 시인으로서 노천명은 전통적인 여류시의 맥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며 향토색 짙은 서정을 섬세하게 그려 내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