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도덕의 계보학 :하나의 논박서
프리드리히 니체 / 연암서가 / 2011.8.30
– 도덕이란 무엇인가!
니체는 인간의 소외, 곧 허무주의를 소크라테스의 합리주의와 아울러 기독교 도덕에서 찾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도덕의 기원과 전개과정을 상세히 고찰하면서, 기독교 도덕에서 발생한 선과 악을 결국 극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제시한다.

본서는 3개의 논문으로 구성했으며, ‘선과 악’, ‘좋음과 나쁨’, ‘죄, 양심의 가책, 그리고 이와 유사한 것’, 금욕적 이상이란 무엇인지 등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 목차
옮긴이의 글
머리말
제1논문 ‘선과 악’, ‘좋음과 나쁨’
니체의 주
제2논문 ‘죄’, ‘양심의 가책’ 그리고 이와 유사한 것
제3논문 금욕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해설 | 위험한 도덕 혁명가 니체의 삶과 작품
연보
○ ‘도덕의 계보’ 개론
‘도덕의 계보'(독: Zur Genealogie der Moral)는 니체의 말기 저작이다.
니체는 이 책에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부터 ‘즐거운 학문’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전개한 도덕 개념의 종류와 기원을 종합적으로 비판하면서 ‘힘에의 의지’ 철학에 대한 체계를 완성한다. 아포리즘(잠언) 형식으로 쓴 ‘선악의 저편’에서의 요지를 통일하여 하나의 이론 체계로 정리한 이론 전개서이다.
이 책에서 니체는 기독교도덕을 비판한다. 기독교는 증오심에서 발원한 위선도덕(僞善道德)이며, 강자를 약자에게 종속시키려는 도덕, ‘노예도덕’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래의 고귀한 도덕은 자연스런 ‘지주도덕(Junker Philosophie)’의 입장에서 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평등 이념에 의해 가치의 위계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인간을 평균화 시키는 ‘이웃사랑’의 도덕에 대해서, 강자의 전형인 ‘초인’의 육성을 목표로 노력하는 ‘원인애(遠人愛)’의 도덕이야말로 참된 인도성(人道性)을 관철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도덕의 계보학’의 주제는, 선악 개념에 대한 역사적 비평이다. 다른 주제는 고통 개념의 역사적 해석이다. 퇴폐사상(데카당)에서 바라본 고통은 부정적인 것이며, 회피해야 하는 것, 혹은 소멸시켜야 하는 것이다(니체는 불교를 이렇게 이해했다). 그러나 강자는 고통을 달리 해석할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 강자는 자기극복을 시도하는 인간이며 이 과정에서 자신에게 닥쳐오는 고통을 일종의 성장통으로 바라본다(한국식으로 하면 극기이지만 이것은 엉터리 개념으로서 니체가 의도한 ‘자유정신’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 다시말해 극기복례와 자기극복은 완전히 대립되는 개념이다.)
니체는 도덕적 개념의 기원과 전개 과정을 살펴본다. 동시에 역사를 통해, 왜 허무주의가 지배적으로 되어버렸는지 의문을 던지고 또한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그 해법을 다각도로 모색한다. 그에 따르면 선악의 도덕 및 허무주의는 기독교의 득세와 더불어 덩달아 힘을 얻었다. 선악에 따른 도덕적 세계질서란 공상적인 것이다. 기독교적 도덕관이란 기독교 사제(司祭)들이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과 맞물려 발달했다. 사제들이 권력을 획득하고자 하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기독교 도덕은 극복되어야 한다.
니체의 도덕비평에서, 대부분의 전통사상은 힘의지를 감소시키는 퇴폐사상(데카당)이다. 니체는 전래되어온 퇴폐적 가치들을 뒤짚어 엎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모든 가치의 전도’라는 기획으로 4권의 책을 출판하려 기획했으나 그 1부에 해당하는’안티크리스트’만을 완성할 수 있었다.
‘도덕의 계보’에서는 주인도덕과 패거리도덕이 대비된다. 계보학적 관점에서 보면, 패거리도덕은 증오심(르상티망)에서 발원한 것이다. 증오심은 더러운 것이다. 패거리 도덕을 만든 노예 패거리들은‘고통’에 대해 수동적인 입장을 취한다. 주인은 이와 달리 창조하는 사람이며 스스로를 극복해가는 인간이다. 그는 창조 과정에서 맞닥뜨리는‘고통’에 과감히 맞선다. -그러나 니체가 의도하는 ‘창조’의 개념은 그 뜻에 있어서 일상적 용법과 같지 않다. –
‘도덕의 계보’는 ‘선악의 저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과 함께 니체의 후기 사상을 반영하는 대표작이다. ‘선악의 저편’은 토막글과 운문이 주를 이루는 반면, ‘도덕의 계보학’은 그와 달리 논문 형식으로 씌여졌다.
○ 원한감정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사람들이 이제까지 신봉해온 도덕적 가치 판단이란, 고대 그리스의 전사나 귀족의 고귀한 도덕에 대한 기독교적 노예들의 원한 감정, 즉 후자(기독교적 노예)의 전자(그리스의 전사나 귀족)에 대한 커다란 반란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말하자면 서구 2000년 도덕의 역사를 뒤엎는 혁명적인 주장을 한 것이다. 마치 기독교 문명에 대한 자폭 테러와 같은 선언이었던 셈이다.
‘도덕의 계보학’은 세 개의 논문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논문의 내용은 ‘그리스도교는 원한 정신의 산물이다’로, 두 번째 논문의 내용은 ‘양심은 인간 내부의 신의 음성이 아니라, 더 이상 외부를 향해 폭발할 수 없게 된 다음에 자기 자신을 향하는 잔인함의 본능이다’로, 그리고 세 번째 논문의 내용은 ‘사제의 금욕적 이상이 힘을 갖는 것은 지금까지의 유일한 이상이어서 그것의 경쟁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불완전한 존재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하면서 결국에는 전능한 존재인 신을 만들어 냈다. 이때 불완전한 인간 존재에 대한 자기혐오가 만들어 낸 허상이 다름 아닌 신이라면서 급기야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더불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고 강조한다. 인식하는 자이며 세계의 여러 대상들에 대한 인식을 추구해온 우리가, 나아가 ‘신’을 만들어 낸 인간이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또한 니체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낯선 타자라고 주장한다. 니체는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 존재’라는 명제가 우리에게 영원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한다.
니체는 이어 자신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이 만들어 낸 도덕적 가치들의 기원과 형성에 관해 묻는다. 사람들은 선과 악, 양심과 동정심 같은 도덕적 가치들이 그 자체로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해왔다. 그러나 그런 가치들은 사실상 역사적으로 형성돼온 것이라는 주장이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도덕의 기원과 전개 과정을 고찰하면서 기독교 도덕에서 발생한 선과 악을 결국 극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제시한다.
먼저 니체는 선과 악의 기준이 왜 만들어졌는지 질문한다. 선과 악의 기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선과 악의 기준이 만들어진 기원을 찾고자 했다. 이게 니체의 도덕에 대한 계보학적 접근이다. 니체는 선과 악의 기준이 피지배 계층의 지배 계층에 대한 ‘원한’과 ‘증오’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했다. 원한 감정을 일으키는 그들은 ‘악’이며, 그들에게 핍박받는 자신들이 ‘선’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노예 위에 군림하는 강한 자들에 대한 원한 감정을 ‘노예도덕’, 즉 기독교적 가치관의 근원이라고 본다. 이런 노예도덕은 핍박받던 유대 민족에 의해, 그들 종교인 기독교를 통해 도덕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다.
니체는 이 과정에서 당시 전사·귀족과 갈등 관계에 있던 사제나 유대인들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강조한다. 사제들이 대중의 원한을 활용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했다는 것. 니체는 “사제란 원한의 방향을 바꾸는 자이다”라고 말한다. 고통받는 자는 본능적으로 모두 자신의 고통의 원인을 찾으려 하기 때문인데 이때 사제가 그 고통의 대상에게 책임을 지우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노예도덕은 자신의 고통에 책임이 있는 자를 만들어 냄으로써 자신의 고통을 완화시킨다. 고통의 책임자는 노예에 의해서 탄생되며, 이 자에게 노예는 자신의 상상적 복수를 함으로써 만성적 고통에 시달리는 자신의 원한을 완화시키고자 한다.
선과 악이라는 기준을 만든 피지배 계층은 자신의 원한을 분출해 지배자들에게 복수했는데 이 복수가 현실적으로 이뤄졌다기보다는 여러 가지 우회적인 형태로 지난 2000년 동안 서구인들에게 서서히 정착돼왔다고 니체는 설명한다. 그로부터 현실적 쾌락을 악으로, 내세에 대한 믿음을 선으로 보는 기독교적 가치관이 만들어졌다는 것. 니체는 이런 가치 기준이 만들어 낸 결정체가 바로 ‘금욕적 이상’이라고 결론짓는다. 니체에 따르면, 이렇게 금욕적 사제에 의해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이 성공했다.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의 전사적·귀족적 도덕은 기독교적·금욕적 도덕에 패배해 그 자리를 넘겨줬다는 것이다.
“전체 인류사에 걸쳐 읽어볼 수 있게 남아 있는 이 투쟁의 상징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로마 대 유대’ ‘유대 대 로마’다. 지금까지 투쟁으로서, 문제 제기로서, 불구대천의 대적으로서 이것보다 더 큰 사건은 없었다.”
니체는 ‘로마 대 유대’의 투쟁에 있어 도덕 발생의 역사는 원한과 긴밀히 연관돼 있다고 하면서 기독교적 도덕을 강하게 비판한다. 니체는 기독교적 도덕은 모두 복수하고 싶은 깊은 욕망에 찌든 도덕이라고 비판한다. 특히 니체는 기독교의 사랑 뒤에 숨어 있는 원한을 폭로한다. 기독교의 사랑에 대해 ‘힘 있는 자를 지배하고 그의 심장으로 다가가는 은밀한 길로서의 사랑’이라고 표현하면서.
그런데 니체는 약자였던 기독교가 거대 제국 로마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약자가 강해져서 강자를 이긴 게 아니라 강자를 약자가 되게 함으로써 이기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예를 들어 병든 자는 질병을 퍼뜨림으로써 강자를 이길 수 있다.
“즉 가련한 자만이 선한 자이고, 가난한 자, 무력한 자, 비천한 자만이 선한 자이며, 또한 고통받는 자, 궁핍한 자, 병든 자, 추한 자만이 경건한 자이자 신에 귀의한 자이며, 오직 그들에게만 축복이 있다. 그 반면에 너희, 고귀하고 강력한 자는 영원히 사악하고 잔인한 자, 음란하고 한없이 탐욕스러운 자, 신을 부인하는 자이다.”
니체에 따르면 ‘노예도덕’은 고통을 회피하고 부정하지만 ‘주인도덕’은 고통에 과감히 맞선다. 이때 주인은 스스로 가치를 부여할 줄 아는 자이고 반면에 노예나 천민은 타인이 평가하는 대로 존재하는 인간 유형을 말한다. 따라서 니체는 노예도덕을 기독교 도덕, 천민의 도덕 등과 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그것은 창조적인 주인도덕을 지닌 차라투스트라에 의해 해체돼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봤다.
니체의 시각에서 볼 때 성적, 출세, 지위, 재산만을 따지며 다양한 가치를 수용하지 않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는 노예도덕으로 가득 찬 사회라고 할 수 있다. …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비교문학 박사
○ 출판사 서평
.위험한 도덕 혁명가 니체 만년의 대표작
니체는 종래의 노예 도덕을 주인 도덕으로 대체시키려는 도덕의 혁명가이다. 특히 지금까지 군주 도덕이라는 단어를 많이 써 왔는데, 그 단어는 왜곡되기 쉬우므로 주인 도덕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다. 신분과 지위가 낮다고 해서 노예 도덕의 소유자가 아니고, 권력과 재산이 있다고 해서 주인 도덕의 소유자는 아니다. 니체가 말하는 주인과 노예라는 단어는 외적인 차원이 아닌 심리적인 차원에서의 노예와 주인을 말하는 것이다. 니체의 시각에서 볼 때 성적, 출세, 지위, 재산만을 따지며, 다양한 가치를 수용하지 않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는 노예 도덕의 소유자로 가득 찬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노예 도덕으로 무장된 사회는 허무주의가 꽃피어나는 온상이 될 수 있다. -홍성광, 「옮긴이의 글」 중에서
니체는 인간의 소외, 곧 허무주의를 소크라테스의 합리주의와 아울러 기독교 도덕에서 찾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도덕의 기원과 전개과정을 상세히 고찰하면서, 기독교 도덕에서 발생한 선과 악을 결국 극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제시한다. 또한 니체의 주장에 의하면 그리스 시대에는 ‘좋음’과 ‘나쁨’의 개념만 있었지 ‘선과 악’의 개념은 없었다고 한다. 가치문제를 고찰할 때 또 다른 중요한 주제는 양심과 원한인데, 니체는 그 두 가지에서 도덕의 기원을 찾고 있다. 여기서 원한을 낳는 것은 무능이고, 원한에서 신이라는 개념이 도출된다는 것이다.
강한 생명력과 용기를 지닌 고대 전사의 자리를 대신한 사제의 삶은 생명력이 결여되어 있으며, 특히 전쟁과 같은 상황에서 사제는 무력하기 짝이 없다. 그러므로 힘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는 사제의 도덕은 무력한 자의 도덕이므로 노예 도덕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현실에서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는 사제가 무력하다는 니체의 주장은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고찰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사제의 무력함이 원한을 낳고 원한은 결국 온갖 가치를 날조한다는 니체의 입장은 인간의 심층심리를 잘 꿰뚫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니체가 보기에 청빈, 겸손, 순결과 같은 금욕적 이상 밑에서 지금까지의 철학이 명맥을 이어 왔는데, 그런 금욕적 이상을 유지하는 삶은 자기모순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장 본래적이어야 할 인간의 삶이 가장 비본래적인 금욕적 이상을 견지하면서 그것을 절대적인 목표 내지는 근거로 삼기 때문이다.
○ 책 속으로
오늘날 교회는 사람을 유혹하는 것 이상으로 소외시키고 있다…… 만약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혹시 우리들 중에 누가 자유정신이 될 것인가? 우리가 싫어하는 것은 교회이지 교회의 독이 아니다…… 교회를 문제 삼지 않는다면 우리도 그 독을 사랑하는 셈이다…….” 이것은 어느 ‘자유정신’이,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드러낸 한 정직한 동물이, 게다가 어느 민주주의자가 내 말에 덧붙인 에필로그이다. 그는 그때까지 내 말에 귀 기울였지만 내가 침묵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 지점에서 나는 침묵해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42쪽
청동 시대는 가혹하고 차갑고 잔인하며, 인정사정 보지 않고 양심이 없으며, 모든 것을 부수어 버리고 피투성이로 만든다. ‘인간’이라는 맹수를 잘 길들여서 온순하고 개화된 동물, 즉 가축으로 만드는 데에 모든 문화의 의의가 있다는 것이 오늘날 어쨌든 ‘진리’로 생각되고 있는데, 만일 그것이 맞는 말이라면, 고귀한 종족의 이상과 함께 그들에게 결국 치욕을 안기고 그들을 제압한 원동력이 된 저 모든 반동 본능과 원한 본능이야말로 실질적인 문화의 도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런 본능의 소유자가 동시에 문화 자체도 내보인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가 진실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아니! 이것은 오늘날 명백한 사실인 것이다! -50쪽
일정 양의 힘이란 바로 그와 같은 양의 충동, 의지, 작용이다. 오히려 그것은 바로 이러한 활동, 의욕, 작용 자체와 다를 바 없다. 그것이 다르게 보일 수 있는 것은 오직 모든 작용을 작용자, 즉 ‘주체’의 제약을 받는 것으로 해석하고 오해하는 언어의 유혹(그리고 언어 속에서 돌처럼 굳어버린 이성의 근본적 오류)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일반 사람들이 번개를 그 섬광과 분리하여 섬광을 번개라 불리는 어떤 주체의 행동이며 활동이라 생각하는 것처럼, 군중 도덕도 강한 것을 강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에서 분리하여 마치 강한 것을 나타내거나 나타내지 않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어떤 중립적인 기체(基體)가 강자의 배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기체란 없다. 행동, 작용, 생성의 배후에는 어떤 ‘존재’도 없다. ‘행동자’란 행동에 그냥 상상으로 덧붙인 것이다.―행동이 전부인 것이다. -54쪽
‘좋음과 나쁨’, ‘선과 악’이라는 대립되는 가치는 이 지상에서 수천 년간 끔찍한 싸움을 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후자의 가치가 오래 전부터 확실한 우위를 점했다 하더라도 아직도 승패를 결정짓지 못하고 싸움이 계속되는 곳도 없지 않다. 그 동안 싸움이 더욱 격화되고 그로써 더욱 더 심화되어 점점 더 정신적으로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 결과 오늘날 ‘보다 높은 본성’, 보다 정신적인 본성을 나타내는 표시로서 이러한 의미에서 분열되었다는 사실과 그리고 사실상 아직 이러한 대립되는 가치의 전쟁터가 되고 있다는 사실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아마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전체 역사를 통해 오늘날까지 읽을 만한 것으로 남은 어떤 저서에 의하면 이 싸움의 상징은 ‘로마 대 유대, 유대 대 로마’를 뜻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 싸움보다, 이 문제제기보다, 이 불구대천의 대립보다 더 큰 사건은 없었다. -64쪽
사실 망각이 하나의 힘, 억센 건강의 한 형식을 나타내는 어쩔 수 없이 망각하게 마련인 이 동물은 반대 능력, 즉 기억의 도움으로 어떤 경우에, 말하자면 약속해야 하는 경우에 망각을 제거하는 기억력을 길렀던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일단 새겨진 인상에서 다시 벗어날 수 없다는 단순히 수동적인 상태가 아니고, 일단 명예를 걸고 약속한 말을 지킬 수 없다는 소화불량이 아니라, 다시 벗어나지 않으려는 의욕의 능동적인 상태이고, 일단 하려던 것을 계속 하려는 것이며, 본래적인 의지의 기억인 것이다. 그리하여 본래적인 ‘나는 원한다’, ‘나는 할 것이다’, 그리고 의지의 본래적인 표출, 그 의지의 행위 사이에는 새로운 낯선 사물과 상황의 세계, 심지어 의지 행위인 하나의 세계가 의지의 이러한 긴 연쇄 고리를 단절시키지 않고 서슴없이 끼어들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전제가 되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처럼 미래를 미리 마음대로 하기 위해 인간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과 우연히 일어나는 일을 구별하는 법을, 연관관계에 따라 사고하는 법을, 먼 앞일을 현재의 일처럼 보고 예견하는 법을, 무엇이 목적이고 무엇이 그 수단인지 확실히 정하고 대충 계산하며 예측할 수 있는 법을 먼저 배웠어야 하지 않는가! 약속하는 사람이 그렇게 하듯이, 결국 그런 식으로 자신의 미래를 보증할 수 있기 위해, 인간 자신이 먼저 자기 자신의 표상에 대해서조차도 예측 가능하고 규칙적이며 필연적인 존재가 되었어야 하지 않는가! -74쪽
‘자유로운’ 인간, 즉 오랫동안 지속되어 잘 망가지지 않는 의지를 소유한 자는 이처럼 소유하는 것에 또한 자신의 가치 척도를 지니고 있다. 그는 자신을 기준으로 남을 바라보며, 존경하기도 하고 경멸하기도 한다. 그는 필연적으로 자신과 동등한 자, 강한 자, 신뢰할 수 있는 자(약속할 수 있는 자)를 존경한다. 그러므로 주권자처럼 묵직하고 드물게 천천히 약속하는 자, 쉽사리 남을 신뢰하지 않고 신뢰를 할 때는 눈에 띄게 하는 자, 불행한 일에 맞서, 심지어 ‘운명’에 맞서 의연한 자세를 취할 만큼 자신이 충분히 강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신뢰할 만한 약속을 하는 자, 이런 모든 사람을 존경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지키지도 못할 거면서 거짓 약속하는 한심하고 경솔한 인간에게는 분명 발길질을 할 것이고, 입에 침이 마르기도 전에 이미 약속을 저버리는 거짓말쟁이에게는 회초리로 응징할 것이다. 책임이라는 이례적인 특권에 대한 자부심, 이 진기한 자유에 대한 의식, 자기 자신과 운명을 지배하는 이러한 힘에 대한 의식은 그의 깊디깊은 심연까지 내려가서 본능, 지배적인 본능이 되었다. 만일 그가 이 지배적 본능에 걸맞은 이름을 붙일 필요를 느낀다면 그는 그것을 뭐라고 부를까? 그러나 그 주권적 인간은 의심의 여지없이 그것을 자신의 양심이라 부를 것이다……. -76쪽
잔인함이 고대 인류의 축제에 어느 정도로 커다란 즐거움을 주었는지, 그들의 거의 모든 즐거움의 구성 요소에 어느 정도로 섞여 있었는지, 다른 한편으로 잔인함에 대한 그들의 욕구가 얼마나 순수하게, 얼마나 순진무구하게 나타났는지 그리고 바로 ‘사심 없는 악의’(또는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자면 악의적인 동정sympathia malevolens)를 그들이 얼마나 원칙적으로 인간의 정상적인 속성으로 간주했는지―따라서 양심이 진심으로 긍정하는 어떤 것으로 여겼는지, 이러한 사실에 대해 온힘을 다해 머릿속에 그려보는 일은 잘 길들여진 가축(말하자면 현대인인 우리를 가리킨다)의 섬세한 감각에, 더욱이 그들의 위선에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보다 깊은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마 오늘날에도 인간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근본적인 축제의 즐거움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85쪽
남의 고통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남을 고통스럽게 만들면 더욱 기분이 좋아진다. 이것은 하나의 냉혹한 명제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닌 게 아니라 어쩌면 원숭이마저 동의할지도 모르는 오래되고 강력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주요 명제이다. 왜냐하면 원숭이는 괴상하기 짝이 없는 잔인한 짓거리를 생각해냄으로써 이미 인간의 모습을 미리 충분히 보여 주고 있으며, 마치 인간의 ‘서곡을 연주하는’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축제에는 반드시 잔인함이 뒤따르는 법이다. 인간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장구한 역사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형벌에도 축제적인 요소가 적지 않게 들어 있는 것이다! -86쪽
‘자유의지’를 생각해낸 일, 즉 선악의 문제에서 인간이 절대적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는 저 생각은 당시 우선 유럽을 위한 철학자의 실로 무모하고 숙명적인 발명이었지만, 이것 역시 무엇보다도 인간과 인간의 덕에 대한 신들의 관심이 결코 고갈될 수 없다는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이 지상이라는 무대에는 정말 새로운 것, 정말 들어보지 못한 긴장, 갈등과 파국이 언제나 충분히 있어야 한다는 뜻일 테다. 전적으로 결정론적으로 움직이는 세계는 신들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세계이며, 따라서 금방 싫증을 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들의 친구인 이 철학자들이 신들에게 그런 결정론적인 세계를 무리하게 요구하지 않는 데에는 나름대로 충분히 근거가 있는 것이다! 고대의 모든 인류는 구경거리와 축제가 있어야만 행복하다고 생각한 하나의 세계, 본질적으로 공개적이고 본질적으로 눈에 드러나는 세계인 ‘관중’을 아주 세심하게 배려했던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엄중한 형벌에도 축제적인 요소가 다분히 있는 것이다!……. -90쪽
올바른 인간이 자기에게 피해를 입힌 자에게까지 올바른 태도를 취한다면(그냥 냉정하고 신중하거나 서먹서먹해 하거나 무관심한 것만은 아니다. 올바른 태도를 지닌다는 것은 언제나 하나의 적극적인 태도인 것이다), 개인적인 침해, 조롱, 비방을 당하면서도 올바른 심판의 눈으로 높고 맑으며, 깊고도 부드럽게 바라보는 객관성이 흐려지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지상에서의 완성품이자 최고의 걸작이다. 더욱이 여기서는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 할 수 있으며, 어쨌든 그런 것이 있을 거라고 결코 너무 쉽게 믿어서는 안 되겠다. -97쪽
정의가 행해지며, 그것이 제대로 유지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보다 강한 힘이 자신에게 예속되어 있는 보다 약한 자들(집단이든 개인이든)과 관련하여 원한이라는 터무니없는 분노를 종식시킬 수단을 모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때로는 보다 강한 힘이 원한의 대상을 복수의 손아귀에서 빼내면서, 때로는 복수하는 대신 직접 평화와 질서의 적에 맞서 싸움을 하면서, 때로는 타협책을 생각해내어 그것을 제안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강요하기도 하면서, 때로는 손해를 보상하는 등가물이 될 만한 것을 규범으로 삼아, 이후로는 원한을 이러한 기준으로 최종적으로 결말지으면서 그런 수단을 모색하는 것이다. -99쪽
양심의 가책의 기원에 대한 이러한 가설의 전제는, 첫째 그러한 변화가 점진적인 변화나 자발적인 변화가 아니고, 새로운 조건에 유기체의 발육처럼 적응해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라, 오히려 단절과 비약, 어떠한 투쟁이나 아무런 원한조차 없었던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둘째로, 지금까지는 구속을 받지 않고 형태가 없던 주민을 고정된 틀 속에 끼워 넣는 작업이 폭력 행위로 시작되었듯이 순전히 폭력 행위로만 끝을 맺게 되었다는 점이며, 그에 따라서 가장 오래된 ‘국가’는 끔찍한 폭정으로, 인정사정없이 으깨 버리는 기계장치로 드러났고, 그런 행위를 계속한 결과 민중과 반(半) 동물이라는 그러한 원료는 마침내 충분히 반죽되어 유순해졌을 뿐만 아니라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114쪽
만일 애초에 아름다움과 모순되는 것이 자기 자신의 의식에 떠오르지 않았다면, 만일 애초에 추한 것이 자기 자신에게 ‘나는 추하다’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대체 ‘아름다움’이라는 게 있을 수 있겠는가?…… 적어도 이런 귀띔을 받은 후에는 몰아(沒我), 자기부정, 자기희생과 같은 모순되는 개념들 속에 이상이며 아름다움이 어느 정도만큼 암시되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수수께끼는 그다지 풀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다음의 한 가지 사실을 이제 알게 될 터인데, 그 점에 대해서 나는 의심치 않는다. 즉 몰아의 경지에 빠진 자, 자기부정자, 자기희생자가 맛보는 쾌감은 원래 어떤 종류의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쾌감은 잔인성의 일종인 것이다. 도덕적 가치로서의 ‘비이기적인 것’의 유래와 이 가치가 자라난 토양을 표시하는 일에 대해서는 우선 다음 사실만을 지적해두기로 하겠다. 즉 양심의 가책과 자기학대에의 의지야말로 비이기적인 것의 가치를 낳는 전제가 되는 것이다. -117쪽
오, 인간이라는 이 미쳐 버린 가련한 짐승이여! 짐승처럼 행동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방해받기만 하면, 그대들은 어떤 생각이 들며, 어떤 부자연스러움이, 어떤 어처구니없는 발작이, 어떤 관념의 금수성(禽獸性)이 곧바로 폭발해 버리는 건가!…… 이 모든 일은 지극히 흥미로운 일이지만, 또한 암담하고 음울하며 쇠약해지게 하는 슬픔을 띠고 있기도 해서, 어떻게 해서든 이 심연을 너무 오랫동안 바라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의심할 것 없이 여기에 병이, 지금까지 인간 속에서 맹위를 떨쳤던 가장 무서운 병이 있는 것이다. 이 고통과 불합리의 어둠 속에서 사랑의 외침이, 그리움에 불타는 환희의 외침이, 사랑을 통한 구원의 외침이 어떻게 울려 퍼졌는지 아직 들을 수 있는 사람(그러나 오늘날에 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은 더 이상 없는 것이다!)은 이겨낼 수 없는 전율에 휩싸여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리라……인간 속에는 이처럼 끔찍한 것이 너무 많다!…… 지상은 너무 오랫동안 이미 정신병원이었던 것이다!… -124쪽
금욕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술가에게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을 수 있거나 많은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철학자나 학자에게는 높은 사유 능력을 갖는 데 가장 유리한 전제 조건을 위한 직감이나 본능과 같은 것이다. 여성에게는 기껏해야, 더욱 유혹적인 사랑스러움이나 아름다운 육체의 부드러운 모습이거나 포동포동한 귀여운 동물의 천사 같은 모습을 의미한다. 신체 불구자나 기분이 언짢은 자(죽음을 면치 못하는 대다수의 인간의 경우)에게는 이 세계에 자신을 ‘너무 선하게’ 보이려는 시도이고, 방종의 성스러운 형식이며, 만성적인 고통이나 권태와 싸움 때 그들의 주요한 수단을 의미한다. 사제에게는 사제로서의 본래적인 신앙이나 권력을 부리는 최상의 도구, 또한 권력을 얻는 ‘최상의’ 면허를 의미한다. -133쪽
우리는 정적과 냉정함, 고귀함과 먼 곳, 지나간 것을 존중한다. 또한 바라보고 있어도 영혼이 굳이 자신을 방어할 필요가 없거나 붙들어낼 필요가 없는 모든 것, 그러니까 큰 소리로 말하지 않더라도 말할 수 있는 것을 존중한다. 하나의 정신이 말을 할 때 그것에 담겨 있는 음색에도 귀 기울여보라. 즉 모든 정신은 자신의 음색을 지니고 있으며, 자신의 음색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거기서 그 정신은 선동자, 말하자면 속이 빈 얼간이거나 속이 빈 용기(容器)임에 틀림없다. 또한 그 속으로 들어간 것은 무엇이든 커다란 공허함의 메아리로 바뀌어, 둔탁하고 먹먹한 소리가 되어 되돌아 나온다. 저곳의 저 정신은 거의 매번 쉰 목소리로 말한다. 혹시 쉰 목소리로 생각한 것이 아닐까? -153쪽
금욕적 사제는 그러한 이상에 자신의 신념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힘이며 자신의 관심까지도 포함시켰다. 그의 생존에의 권리는 저 이상과 더불어 서 있을 수도 쓰러질 수도 있다. 말하자면 만약 우리가 저 이상에 적대적인 자라면, 우리가 여기서 무서운 적대자, 즉 저 이상을 부정하는 자와 맞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싸우는 그러한 자와 맞닥뜨린다고 해서 뭐가 놀랄 일이겠는가?…… 다른 한편 애당초부터 우리의 문제에 대해 그 정도로 편향적인 입장을 취하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별로 유익할 것 같지 않다. -163쪽
금욕주의자에게서 나타나는 것 같은 ‘삶에 맞서는 삶’이라는 자기모순은―이것은 우선 명백한 사실이다―더 이상 심리학적으로가 아니라 생리학적으로 따져보면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말이다. 겉보기에만 자기모순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자기모순이란 일종의 잠정적인 표현, 하나의 해석, 형식, 정리임이 분명하고, 그 본래적인 성질이 오랫동안 이해될 수 없었고, 오랫동안 그 자체로 지칭될 수 없었던 무언가에 대한 심리학적인 오해임이 틀림없다. 이것은 인간의 인식 속에 벌어져 있는 오래된 틈새에 끼어 있는 단순한 말에 불과하다. 이에 대한 사실을 간략하게 서술해 보겠다. 즉 모든 수단을 강구해 자신을 보존하려고 하며, 자신의 생존을 위해 싸우는 퇴화해가는 삶의 방어 본능과 구원 본능에서 금욕적 이상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한 삶은 부분적으로 생리학적인 장애가 있고 피로에 지쳐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반면, 더없이 깊으며 온전하게 남아 있는 삶의 본능은 새로운 수단이나 착상으로 끊임없이 투쟁하는 것이다. 금욕적 이상이란 그러한 하나의 수단이다. -168쪽
지금까지 우리가 알게 된 금욕적 사제의 수단―생활 감정의 전체적 약화, 기계적인 활동, 조그만 즐거움, 무엇보다도 ‘이웃에 대한 사랑’이 주는 즐거움, 무리의 조직, 공동체가 번영하고 있다는 쾌감으로 개개인의 자신에 대한 불쾌감은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공동체의 힘의 감정에 대한 자각―현대의 척도로 잰다면 이것은 불쾌와 싸울 때 사용하는 그의 순진무구한 수단이다. 이제 좀 더 흥미로운 ‘죄 있는’ 수단으로 눈을 돌려 보자. 그것들 모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감정의 무절제함이라는 한 가지 사실이다. 이것은 무지근하고 꼼짝 못하게 하는 오래된 통증을 잊게 해주는 가장 효과적인 마취 수단으로 이용된다. 그 때문에 “무슨 수단으로 감정의 무절제함을 초래하는가?”라는 한 가지 질문을 생각해내는 사제의 창의성은 실로 무진장했던 것이다…… 가혹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내가 가령 “금욕적 사제가 언제나 모든 강력한 정동 속에 깃들어 있는 열광을 이용했다”고 말한다면, 보다 사랑스럽게 들리고 귀에 보다 잘 들어갈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 때문에 유약한 우리 현대인의 연약해진 귀를 어루만져 주어야 하는가? 무엇 때문에 우리 쪽에서 그들의 위선적인 말에 한 발짝이라도 물러서야 하는가? 그런 일이 우리를 구역질나게 하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우리 심리학자가 볼 때 그 속에는 이미 행위의 위선이 있다고 할 수 있다. -192쪽
오늘날 정신이 엄격하고 강력하며 거짓됨이 없이 활동하고 있는 그 밖의 모든 곳에서는 진리에의 의지를 제외하고는 이제 대체적으로 이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금욕을 나타내는 대중적인 표현은 ‘무신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지, 이상의 이러한 잔재는, 사람들이 내 말을 믿어 준다면, 가장 엄격하고 가장 정신적으로 정식화된 저 이상 자체이고, 모든 외벽이 제거된 상태의 대단히 비의(秘義)적인 것이므로, 저 이상의 잔재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의 알맹이인 셈이다. 절대적인 솔직한 무신론(이 시대의 보다 정신적인 인간인 우리는 이 무신론의 공기만을 호흡하고 있다)은 따라서 겉모습과는 달리 저 이상과 대립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무신론이란 오히려 저 금욕적 이상의 마지막 발전 과정의 하나에 불과하며, 저 이상의 추론 형식이나 그것의 내적인 수미일관성의 하나일 뿐이다. 무신론은 2천 년에 걸친 진리에 대한 훈련의 경외할 만한 파국인데, 그것은 결국 신에 대한 거짓 신앙을 포기하게 한다. -226쪽
나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소리의 울림마다 사탕처럼 달콤한 부드러움이 있습니다. 약한 것을 좋음으로 위조하려고 합니다.
보복하지 않는 무력감은 ‘선’으로 바뀝니다. 불안한 천박함은 ‘겸허’로 바뀝니다. 증오하는 사람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순종’으로 바뀝니다. 약자의 비공격성, 약자가 풍부하게 지니고 있는 비겁함 자체, 그가 문 앞에 서서 어쩔 수 없이 서성이기만 하는 것은 여기에서 ‘인내’라고 부릅니다. 심지어 미덕이라고 까지 불립니다. 복수할 수 없는 것이 복수하고자 하지 않는 것으로 불리고, 심지어는 용서라고 불리기까지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또한 ‘적에 대한 사랑’을 말합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말입니다.
이러한 밀담자와 구석에 있는 화폐 위조자들이 모두 이미 서로 따뜻하게 의존하며 웅크려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그들은 가련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가련함이 신에 의해 선택받은 영예이며, 마치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개를 때리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내게 말합니다. ― <도덕의 계보학>
역사와 민속학적 연구가 알고 있는 모든 가치 목록, 모든 ‘너는 해야만 한다’는 말에는 어떤 경우에도 심리학적 탐구나 해석보다도, 먼저 생리학적 탐구나 해석이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은 의학이 비판하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이러한 혹은 저러한 가치 목록과 ‘도덕’의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 <도덕의 계보학>

○ 저자소개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년 10월 15일 ~ 1900년 8월 25일)
독일의 문헌학자이자 철학자이다. 서구의 오랜 전통을 깨고 새로운 가치를 세우고자 했기 때문에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별명이 있다. 그는 그리스도교 도덕과 합리주의의 기원을 밝히는 작업에 깊이 매진하였고, 이성적인 것들은 실제로는 비이성과 광기로부터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저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독일의 사상가이자 철학자이자 시인이다. 그는 1844년 독일 뢰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5세 때 목사인 아버지를 사별하고 어머니와 누이동생과 함께 할머니의 집에서 자랐다. 14세에 슐포르타 기숙학교에서 엄격한 고전 교육을 받고 1864년 본 대학에 진학하였다. 1865년 스승인 리츨 교수를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겨갔으며, 그곳에서 바그너를 알게 되어 그의 음악에 심취하였다. 이 두 대학에서 신학과 고전어문학을 공부했다. 25세의 젊은 나이로 스위스 바젤 대학의 고전어문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심취함으로써 철학적 사유에 입문했다. 28세 때 최초의 저작『비극의 탄생』을 펴냈으며 이 저작에서 니체는 아폴론적인 가치와 디오니소스적인 가치의 구분을 통해 유럽 문명 전반을 꿰뚫는 통찰을 제시한다. 1873년부터 1876년까지는 독일과 독일 민족, 유럽 문화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가하며, 위대한 창조자인 ‘위버멘쉬’를 새로운 인간형으로 제시한 『반시대적 고찰』을 집필했다. 1879년 건강이 악화되면서 재직중이던 바젤 대학을 퇴직하고, 이후 주로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요양지에 머물며 저술 활동에만 전념했다. 1888년 말부터 정신이상 증세를 보인 니체는 이후 병마에 시달리다 1900년 8월 25일 바이마르에서 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음악의 정신에서 생겨난 비극의 탄생』, 『반시대적 고찰』, 『인간적인 것, 너무나도 인간적인 것』,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과 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학』, 『힘에의 의지』, 『바그너의 경우』, 『디오니소스 찬가』, 『우상의 황혼』, 『이 사람을 보라』 등이 있다.
– 역자 : 홍성광
서울대학교 독문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토마스 만의 장편 소설 『마의 산』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역서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문장론』, 니체의 『니체의 지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의 계보학』, 토마스 만의 『마의 산』(상·하),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젊은 베르터의 고뇌』, 헤세의 『헤세의 여행』 『헤세의 문장론』 『데미안』 『수레바퀴 밑에』 『싯다르타』 등이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