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독립운동가 박열을 사랑한 가네코 후미코의 불꽃수기
가네코 후미코 / 문화숲속예술샘 / 2017.7.12
- 모진 운명을 비웃으며 자신을 찾아가는 가슴 찡한 스토리
독립운동가 박열의 동지이자 부인으로,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라는 수식어로 후미코를 보기 보다는 한 인간으로서 그녀의 삶을 조망해 보자.『독립운동가 박열을 사랑한 가네코후미코의 불꽃수기』를 통해 스스로를 관철하기 위해서 자신을 내던져버리고 유성처럼 살다간 후미코가 남긴 치열한 생의 기록을 다시 들추어 보면 불현듯 자신을 재발견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싹틀 것이다.
○ 목차
편집자의 글_잊지 못할 모습
사실의 기록에 대한 바람
수기를 시작하며
1 세상에 온 가네코_일본
아버지
엄마
고바야시의 고향
엄마의 친정
2 아픈 성장일기_조선에서의 7년
새로운 집
부강이라는 곳
이와시타의 집
조선에서 나의 생활
고향에 돌아오다 ?
3 변함없이 부는 운명의 모진 바람
호랑이 소굴로
성의 소용돌이에서
잘 사세요! 아버지. 이젠 안녕
4 나를 찾아서
도쿄로 가자!
작은 외할아버지 댁
신문장사
노점상인
식모살이
거리의 방랑자
5 함께 살고 함께 죽어요
일을, 나 자신의 일을
생의 기록을 남기는 까닭은
○ 저자소개 : 가네코 후미코
가네코 후미코는 1903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났으나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부모가 후미 코의 양육을 거부하여 그녀는 출생신고도 하지 않은 채 친척집에 맡겨졌다. 9살이 되던 1912년에는 충청북도 청원에 살고 있는 고모의 양녀가 되어 조선에서 7년동안 생활했으나, 이 기간도 하녀와 같은 학대 받는 생활을 했다. 하지만 이때의 조선에서의 생활은 후에 박열을 비롯한 한국독립운동가 들을 만나 함께 활동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조선에 있는 동안 그녀는 일제에 핍박 받는 한국 인에게 동정심을 느꼈고, 1919년 3·1운동으로 일제에 항거하는 한국인에게 공감할 수 있었다.
1919년 일본으로 돌아온 후미코는 이듬해 도쿄로 갔다. 그녀는 신문팔이, 행상, 식모살이, 식당 종업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이때 그녀는 사회주의자, 아나키스 트들과 교류하며 여러 사상에 눈을 떴다. 그리고 1922년 한국의 독립운동가 박열을 만나 함께하기 시작했다. 후미코는 박열과 무정부주의자 단체인 ‘흑우회’를 결성하고, 잡지를 발간하고, 항일 단체인 ‘불령사 ’를 조직했다. 그런데 1923년 가을 일본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박열과 함께 체포되었다. 일본 정부는 불령사가 일왕 암살을 계획한 것으로 날조했고, 1926년 3월 박열과 후미 코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녀는 곧바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으나 4개월 뒤 감옥에서 사망했다. 감옥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을 때 그녀는 일왕의 은사장을 찢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에 바친 조선민족으로서 선택한 길인데 몸과 마음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간 무기징역의 일본감옥 속에서 더 살아보았자 그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일본인으로서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함께한 가네코 후미코는 우리의 위대한 영웅이다.
– 역자: 이정숙
○ 책 속으로
“그래요! 하지만 그렇게 집이 없으니 쓸쓸하지 않아요?”
“쓸쓸해요.”
박은 땅바닥을 내려다보면서 가라앉은 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건강할 때는 아무렇지 않지만 막상 병이라도 나게 되면 정말 외로워요. 평소에는 친절했던 사람도
앓는 사람은 싫어하니까요.”
“그렇지요, 남들은 냉정하니까요. 거기다가 당신은 조금 약한 편 같아요. 지금까지 몹시 앓은 적이 있었나요? 도쿄에 와서…….”
“있지요. 작년 봄이었어요. 나는 심한 유행 감기를 앓고 있었는데 아무도 간호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3일 동안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혼조本所의 싸구려 하숙에서 끙끙 앓고 있었어요. 그때에는 정말로
나는 이대로 죽어버리는가 싶어 외로웠습니다.”
어떤 감정이 가슴 속에서 복받쳐 올라온다.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을 깜박이면서 나는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아이고, 내가 알고 있었더라면…….”
한참 만에 박은 똑똑한 어조로
“자, 그럼 안녕히. 또 만납시다.”
하고 나의 손을 뿌리쳐 버리고 간다 행 전차에 뛰어 올랐다.
그를 떠나보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하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기다려 주세요, 조금만 더. 내가 학교 마치고 우리 곧 함께 삽시다. 그때는 내가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 겁니다.
결코 당신을 병들게 버려두지 않겠어요. 죽게 되면 함께 죽읍시다. 우리는 함께 살고 함께 죽어요.” — 본문 중에서
○ 출판사 서평
가네코 후미코 (金子文子)
아플만큼 아팠고 외로울만큼 외로웠던 23년의 짧은 생을 모국의 한 교도소에서 스스로 마감하고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함께 했던 박열의사의 기념공원 (경북 문경)에서 영면하고 있다.
‘태어났다’ 가 의미하는 어떤 축복도 갖지 못한 채 태어나서 오히려 세상에 ‘버려졌다’ 고 해도 좋을
끔찍한 운명의 소용돌이가 그녀의 전 생애에 걸쳐 휘몰아 치게 된다.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지 못해 다니고 싶어 하던 학교를 다닐 수 없었고 9세 무렵에야 외할아버지의 딸로 입적이 되어 1912년 가을부터 7년간을 조선에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고 성장한다.
일본으로 되돌아 가서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어린 시절 자살을 결심했다가 느꼈던,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의욕을 견지하고 목전에 펼쳐지는 참담한 현실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힘든 날들을 이겨 나간다.
세상을 세상답게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녀가 자신을 기록하고 동시에 말소한다고 결연하게 밝힌 그녀의 수기는 필독서가 되어야 한다. 세상의 많은 부모들, 세상을 좀더 좋게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읽어주기를 희망하며 간토대지진으로 억울하게 투옥되어 1925년부터 쓰기 시작한 수기를 우리들 앞에 소중하게 남겨두었다.
우리들은 모두 누구의 부모이거나 세상을 세상답게 만들고 싶은 생각을 갖고 있지 않는가?
가족도 친척도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아무것도 쥐어주지 않았다.
모든 것을 스스로 구하고 힘들게 찾아야 했던 그녀가 스스로 선택했던 평생의 동지 박열은 운명이 그녀에게 던져준 유일한 행운이었을까? 사형선고를 받기 이틀 전에 혼인신고까지 마쳤다.
사형선고를 하는 순간 ‘만세’를 외쳤고 열흘 후 천황으로부터 온 감형의 은사장을 찢어버리는
그녀는 그로부터 석달 뒤, 자신의 마지막을 스스로 선택하고 만다.
우리는 이제 그녀가 던졌던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하는 화두에 나름대로 답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그녀가 내린 답변은 이랬다.
“나 스스로 말하지 못하겠다. 마음 있는 독자는 이 기록으로 충분히 알아주리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