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독립협회, 토론공화국을 꿈꾸다 : 민주주의 실험 천 일의 기록
이황직 / 프로네시스(웅진) / 2007.9.5
우리의 토론 문화는 아직 미성숙단계에 있다는 말을 많이 하곤 한다. 오랫동안 왕정 시대를 살았고 왕정이 붕괴된 후에는 식민지로 전락해 스스로 민주사회를 일굴 기회를 잃었었고 또 해방 후에는 전쟁과 냉전, 독재가 지배했던 역사 현실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토론문화의 역사가 결코 짧다고만 말할수는 없다. 이미 19세기 후반 대한제국에는 자주적 독립과 근대화를 향한 민중의 열의가 짧지만 강하게 민주주의의 꽃을 피웠던 적이 있다. 협성회 토론회와 독립협회 토론회가 바로 그것이다. 비록 좌절된 시도이긴 하였으나 민중의 목소리를 규합하고 나아가 근대적 정치 원리의 실험장 역할을 했던 독립협회의 토론회 활동의 역사적 가치는 작지 않을 것이다. 한 망명객의 귀환으로부터 시작되는 이 책은 조선인이 품었던 자주적 근대화와 민주주의 열망을 담아내고자 노력했다. 남아있는 사료를 기초로 하되 지은이의 상상력이 세밀하게 개입되었으며, 그러한 상상력이 빚어낸 대화 장면은 읽는 이들에게 당시의 상황을 보다 적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첫 장에 나오는 서재필과 후쿠자와 유키치와의 대화 장면이나 귀국 후 서재필이 여러 사람들과 대면하는 장면은 연표와 사건들의 건조한 연결로 이루어진 역사를 좀더 생생하게 들어보도록 해줄 것이다.
○ 목차
책머리에
1. 어느 망명객의 귀환 11년 만의 귀국|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나다
2. 신문으로 세상을 바꾸다
고종과의 재회|코무라 공사의 회유|유길준과 의기투합하다 |신문 간행을 위한 조건을 갖추다|주시경과 함께 한글 신문을 기획하다|조선인의 생활을 바꾼 독립신문
3. 토론공화국을 열다
배재학당과의 인연|독립협회를 결성하다|토론의 필요성을 강조하다|배재 학생들, 협성회를 결성하다|협성회의 첫 토론회|고종, 전제군주를 꿈꾸다|고종과 서재필, 갈등이 싹트다|협성회, 공개 토론회를 열다|독립협회도 토론회를 열다|서재필과 윤치호|고종,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다
4. 토론으로 제국에 맞서다
러시아에 맞선 독립협회, 1차 만민공동회를 열다|독립협회 토론의 재구성|서재필의 추방 공작|서재필이 떠난 독립협회|관민공동회와 만민공동회의 의회설립운동|42일간의 민중 투쟁|한성 코뮌의 종언|제국과 공화국
5. 끝나지 않은 이야기
간주곡|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책을 맺으며 자료 참고문헌
○ 저자소개 : 이황직
충북 보은 출생. 연세대 사회과학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고전강독 모임 작은대학 (1기)을 수료했다. 대학 재학 중 『세계의 문학』에 ‘푸른 별’ 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고, 『언어세계』에 평론 ‘5·18 시의 문학사적 위상’을 발표했다. 연세대 대학원 사회학과에 진학하여 “‘5월시’의 사회적 형성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근대 한국의 윤리적 개인주의 사상과 문학에 관한 연구: 정인보, 함석헌, 백석, 윤동주를 중심으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석사학위논문을 축약한 “5월시의 사회적 형성”이 『5월문학총서 4 – 평론』에 실렸다. 작은대학 총무교수, 독서대학 르네21 기획위원을 맡아 독서.교육운동에 힘썼고, 현재는 한국사회이론학회 총무이사.편집위원, 한국인문사회과학회 학술이사를 맡고 있다. 한국인문사회과학회 학술상 (2017)을 수상했다. 『독립협회, 토론공화국을 꿈꾸다』(2007), 『군자들의 행진 – 유교인의 건국운동과 민주화운동』(2017), 『민주주의의 탄생 – 왜 지금 다시 토크빌을 읽는가』(2018) 등의 단독 저서를 냈고, 『한국의 사회개혁과 참여민주주의』(2006), 『유종호 깊이 읽기』(2006), 『뒤르케임을 다시 생각한다』(2008), 『납북민족지성의 삶과 정신』(2011) 등의 공동 저서를 냈다.
○ 책 속으로
첫 논설에 서재필은 이 신문이 오직 조선만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혀 두었다. 큰 목표는 정부의 개화정책과 외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전말을 국민에게 알리는 것에 있었다. 그 과정에 자연스럽게 국민들을 계몽할 수 있다는 기대도 걸었다. 왜 국문만으로 쓰는지, 그리고 왜 구절을 띄어 쓰는지에 대해서도 소상히 그 이유를 밝혔다. — p.49
서재필이 출국 후에도 ‘점진적인 개혁’만이 길이라는 편지를 보내왔지만, 신진 세력들은 정부와 민중을 매개하는 본연의 역할 대신 직접 민중을 대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 외부 세력이 개입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일본 망명 중인 박영효 일파의 음모적 개입과 그것을 빌미 삼은 고종의 과잉 반응도 문제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통합의 구심점으로서의 고종’이라는 국민적 합의를 먼저 깨뜨린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 p.156
○ 출판사 서평
1898년 10월 보수파 정권 퇴진을 외치는 시위가 중추원과 경운궁 앞에서 벌어졌다. 이 시위로 고종은 보수파 대신들을 해임하고 박정양, 민영환 등으로 구성된 중도개혁파 인사들로 내각을 구성했다. 42일간 계속된 민중 봉기의 서막이었다. 1898년 대한제국은 기로에 서 있었다. 열강의 위협 속에서 자주적 근대 개혁을 완성하기 위한 고종과 개혁파와의 갈등은 개혁의 중심이 황제인가 민중인가를 두고 심화된다. 3년 전 서재필의 귀환으로부터 시작된 근대적 여론의 형성이 제국의 위협적인 존재로 떠오른 것이다. 여론 형성에 큰 몫을 담당했던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토론회, 만민공동회는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한가운데서 민중의 목소리를 규합하고 나아가 근대적 정치 원리의 실험장 역할을 했다. 러일전쟁 후 일본에 강제 병합되기 전까지 조선 땅에는 제국과 공화국이라는 두 원리의 경합 속에서 근대 민주주의의 맹아가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100여 년 전 근대화의 문턱에서 희망과 좌절을 동시에 맛봐야 했던 지식인과 민중의 투쟁을 이야기체로 재구성해냈다. 행위자들이 남긴 ‘글’을 ‘말’ 로 바꾸는 상상적 재구성으로 사료와 사료 사이의 단절을 메우는 작업은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역사를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할 것이다. 독립협회 토론 110주년을 맞이한 올해, 이 책을 통해 종로 네거리를 가득 메운 그날, 민중의 목소리를 만나보기 바란다.
– 독립협회 토론 110주년, 토론의 역사를 다시 쓰다
여러 논쟁들은 높은 시청률과 네티즌의 폭발적인 반응으로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그러나 이 논쟁은 전혀 생산적이지 못한 소모적인 비난으로 얼룩지기 일수다. 우리 토론문화의 수준을 드러내는 예라 하겠다. 요즘 대선을 앞두고 벌어지는 후보들 간의 토론은 말이 ‘토론’이지 개인적 비방이 난무하는 끝장 토론의 전형을 보여준다. 왜 우리 토론문화가 민주시민사회라는 이름에 걸맞게 성장하지 못했을까? 오랫동안 왕정 시대를 살았고 왕정이 붕괴된 후에는 식민지로 전락해 스스로 민주사회를 일굴 기회를 잃었던 것을 이유로 들 수 있겠다. 또 해방 후에는 전쟁과 냉전, 독재가 지배했던 역사 현실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토론문화의 역사가 결코 짧다고는 할 수 없다. 이미 19세기 후반 대한제국에는 자주적 독립과 근대화를 향한 민중의 열의가 짧지만 강하게 민주주의의 꽃을 피웠던 적이 있다. 협성회 토론회와 독립협회 토론회가 그것이다. 2007년은 독립협회 토론 110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역사의 굴곡이 자생적인 토론문화를 계승하지 못하게 만들었지만 그 가치를 발굴하고 오늘의 모범으로 삼는다면 그 씨앗이 다시 새로운 싹을 틔울 것이다. 『독립협회, 토론공화국을 꿈꾸다』는 잊혀진 과거의 현장을 복원하고 재구성함으로서 우리 토론의 역사를 새롭게 기술한다.
– 민주주의 실험, 천 일의 꿈을 기록하다
이야기는 한 망명객의 귀환으로 시작된다. 1895년 겨울, 제물포 항에 도착한 한 남자. 갑신정변의 주모자로 11년간 타국을 떠돌던 서재필은 역모자의 신분에서 중추원 고문으로 다시 고국 땅을 밟았다. 그는 조국의 근대화를 이끌 민중의 계몽을 자신의 첫 번째 소임으로 삼을 것을 다짐한다. 외세를 등에 업고 벌인 무모한 정변에 대한 반성과 미국에서의 경험이 바탕이 된 결정이었다. 이후 3년간 그가 벌인 다양한 활동에 조선의 민중은 근대적 의식을 갖춘 시민으로 성장했다. 이것은 물론 서재필 한 사람만의 힘이 아니다. 민중의 요구가 있었고 뜻을 함께하는 동료가 있었다. 19세기 말 조선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풍전등화의 처지에 있었다. 개혁파와 보수파, 친일파와 친러파 등으로 사분오열된 상태에서 국모가 시해되는 사건마저 벌어져 시국은 더욱 어수선했다. 한성에 도착한 서재필은 가장 먼저 민중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언로를 확보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해 1896년 4월 7일 순 우리말 신문인 「독립신문」을 간행한다. 신문 간행에는 자금을 확보해준 유길준과 한글의 체계를 정리한 주시경 등 많은 사람의 노력이 들어갔다. 우승열패의 당시 상황에 시끄러운 논쟁이 국론을 분열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서재필은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할 공론장 형성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독립신문이 가져온 변화는 컸다. 두 명의 기자가 관청과 시장을 누비며 국민에게 필요한 정보를 찾아 나섰고, 국민들은 신문이 주는 활력과 비판 기능에 주목했다. 길에는 신문을 파는 가판원이 등장했고, 길모퉁이마다 한 장의 신문을 펼치고 삼삼오오 둘러앉아 담소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워졌다. 수동적으로 정보를 얻기만 하던 사람들은 신문사로 투고문을 보내거나 사람들과의 논쟁을 통해 능동적인 독자가 되어갔다. 「독립신문」간행으로 ‘글’의 공론장을 확보한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결성하여 근대적 ‘회 (會)’의 기반을 닦았다. 개혁 인사들로 구성된 독립협회는 독립문을 건립하고 토론회를 주최하는 등 서재필의 근대화 기획에 중심적 역할을 한다. 서재필은 곧이어 배재학당 학생들과 토론 모임인 협성회를 결성하여 ‘말’의 경연장을 열었다. 학생들의 토론회는 1897년 8월 독립협회 토론회로 이어졌으며 이듬해 3월에는 만민공동회라는 이름으로 민중에게까지 확대된다. 근대적 정치토론의 첫 시발점으로 기록되는 사건이다. 이 책은 이 3년 동안 조선인이 품었던 자주적 근대화와 민주주의 열망을 담아내고자 노력했다. 남아있는 사료를 기초로 하되 역사의 비워진 페이지는 저자의 상상력으로 촘촘히 채워 넣었다. 시대상황과 인물들의 내면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화 장면이 빛을 발하는 이유다. 첫 장에 나오는 서재필과 후쿠자와 유키치와의 대화 장면이나 귀국 후 서재필이 여러 사람들과 대면하는 장면은 연표와 사건들의 건조한 연결로 이루어진 역사를 좀더 생생하게 들어보도록 해줄 것이다. – 제국 대 공화국, 좌절된 시도 34회에 걸친 토론회와 민중의 호응 그리고 토론이 밑바탕이 된 사회 변화의 희망은 그러나 한순간에 무너졌다. 서재필은 쫓기다시피 미국으로 돌아갔고 독립협회는 해산되었다. 그 때 대한제국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898년 10월 보수파 정권 퇴진을 외치는 시위가 중추원과 경운궁 앞에서 벌어졌다. 민중과 학생이 참여한 이 시위로 고종은 보수파 대신들을 해임하고 박정양, 민영환 등으로 구성된 중도개혁파 인사들로 내각을 구성했다. 그러나 곧이는 보수파 정권의 음모로 개혁파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고 고종은 독립협회를 비롯한 개혁 단체들을 혁파하려고 한다. 이에 민중들은 또다시 항의 시위를 시작했다. 42일간 계속된 민중 봉기의 서막이었다. 1898년 대한제국은 기로에 서 있었다. 열강의 위협 속에서 자주적 근대 개혁을 완성하기 위한 고종과 개혁파 사이의 갈등은 개혁의 중심이 황제인가 민중인가를 두고 심화된다. 아관파천을 계기로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고종은 러시아 황제를 자신의 모범으로 삼아 강력한 전제 군주제를 꿈꾼다. 그 반대편에는 서재필을 중심으로 한 독립협회와 민중들의 공화국에 대한 열망이 존재했다. 3년 전 서재필의 귀환으로부터 시작된 근대적 여론의 형성이 제국의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떠올랐다. 고종에게는 멀리 있는 열강의 야심보다 가까이 있는 개화파가 더 두려운 존재였다. 결국 고종은 친위 세력인 보부상과 군대를 동원 만민공동회를 해산하고 민회 불법화를 알리는 조칙을 선포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러일 전쟁 후 일본에 강제 병합되기 전까지 조선 땅에는 제국과 공화국이라는 두 워리의 경합 속에서 근대 민주주의의 맹아가 싹트고 있었다. 비록 좌절된 시도였지만 민중의 목소리를 규합하고 나아가 근대적 정치 원리의 실험장 역할을 했던 독립협회의 토론회 활동의 역사적 가치는 작지 않을 것이다.
–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저자는 숙명여자대학교 의사소통센터에서 ‘발표와 토론’이라는 교과목을 담당하면서부터 토론회 활동에 주목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회학자로서 늘 머리로는 공론장이니 시민사회니 하면서 서구 이론을 외우고 다녔지만, 막상 그것을 어떻게 현실화할지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그는 센터에서 토론과 논증의 원리를 배우지 않았다면 토론을 통한 공론장 형성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 이것을 계기로 근대 토론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구한말의 토론 수준은 현재의 토론 수준에 비추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지켜보는 방청객의 열의, 참여도, 규칙 수준 역시 현재의 정치 집회 수준을 월등히 뛰어넘는다. 이 책은 구한말의 척박한 토양에서 일궈낸 공론장의 전통을 확인하고 자긍심과 함께 발전적 계승의 방향을 가늠해 보게 할 것이다.
○ 독립협회, 인민의 눈·귀 열어 ‘조선의 촛불시위’ 지펴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 갑오개혁. 그렇게 격변의 1894년을 거치면서 조선 사회는 확연히 변하기 시작했다. 칼 대신 펜을 들어 공론을 형성하고, 자발적 결사체를 조직하고 비폭력의 평화시위를 열어 정부에 개혁을 압박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독립신문>이 포문을 열었다. 1896년 4월 7일 창간한 순 한글 <독립신문>의 목표는 분명했다. 누구나 볼 수 있고 모두를 대변할 수 있는 신문을 만들겠다! 상하 귀천을 달리 대접하지 않고 모두 조선 사람으로만 알고 조선만을 위하며 공평히 인민에게 말할 것이고, 서울 백성만이 아니라 조선 전국 인민을 위해 무슨 일이든 대신 말해주려 한다. <독립신문>이 창간되자 인민들은 열광했다. 신문을 돌려 읽었고 장터에서 많은 사람을 모아놓고 낭독했다. ‘오가는 손님이며 장사하는 사람과 시골 백성들이 어깨를 비비고 둘러서서 재미를 붙여 함께 듣고 찬탄하더니만, 그다음부터는 물건 사러 오는 사람만이 아니라 <독립신문> 낭독을 들으러 오는 사람들이 장시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 “누구나 볼 수 있고 모두를 대변”
새로운 지식과 정보에 대한 욕구가 폭발하던 격동의 시기에 <독립신문>은 서울과 지방의 정보 격차를 순식간에 해소했다. 이제 서울 소식이 며칠 만에 산골짜기 인민의 귀에 흘러 들어갔다. 신문을 읽게 되면서 사람들은 나랏일에 진지하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독립신문>에 열광한 이유를 영국의 여성 지리학자인 비숍은 이렇게 평가했다. ‘<독립신문>은 권력의 남용을 고발해서 이를 만천하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합리적인 교육과 이성적인 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래서 이 신문은 탐관오리에게 하나의 공포가 되고 있다.’ 사람들은 <독립신문>을 통해 여론과 공론을 형성하고, 나아가 이를 정치운동과 사회운동으로 실천하는 방식을 익혀갔다. <독립신문>은 자신들이 인민의 제일가는 친구이자 대변자라고 자부했다. 1896년 4월 <독립신문> 창간에 이어 7월에 독립협회가 창립했다. 독립협회는 토론회와 집회를 열어 공론을 모으고 정부에 개혁을 요구하는 자발적 결사체였다. 서울에 본부를 두고 지방에 지회를 설치해 전국적 조직으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독립협회는 안건이 생길 때마다 회원의 직접선거로 총대위원을 뽑아 토론하고 결정하는 직접민주주의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 “탄핵하고 성토하는 것이 인민의 권리”
왕권의 입장에서 보면 독립협회는 ‘불온’한 존재였다. 고종은 독립협회에 정부의 잘잘못을 따지고 관리의 진퇴를 논하는 권력 감시 운동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독립협회는 즉각 비판했다. ‘법을 문란하게 만드는 신하가 있으면 탄핵하고 성토하는 것이 인민의 권리다. 우리 집회는 사사로운 것이 아니라 서울과 시골에서 뭇 인민의 마음이 모두 하나가 되어 모인 것이다.’ 독립협회는 시민 불복종 운동에도 나섰다. 독립협회 회원들이 고종의 권력 감시 운동 금지 명령에 불복해 정치 집회를 열었다며 경무청에 몰려가 처벌을 요구했다. 4일간 철야 시위 끝에 고종으로부터 ‘자기의 의견 표현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신하의 의무’라는 항복 선언을 받아냈다. 이를 지켜본 외국 공사들은 본국 정부에 독립협회가 언론의 자유를 쟁취했다고 보고했다. 독립협회는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얻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입헌군주제로의 체제 전환을 꿈꿨다. 독립협회 지도자들은 일본에서 일어난 자유민권운동과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1898년 청에서 입헌군주제 운동이 일어날 무렵 독립협회도 의회 개설 운동의 포문을 열었다. 정부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을 상원으로 개편한다는 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고종이 좀처럼 의회 개설에 나서지 않자,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열었다. 10월 1일부터 12일까지 고종이 거처하는 경운궁 앞에서 밤낮으로 집회를 열고 시위를 벌였다. 결국 고종이 만민공동회의 요구에 굴복해 의회 설립을 약속했다. 11월 5일은 독립협회가 중추원 의원 선거를 실시하기로 한 역사적인 날이었다. 하지만 혁명에는 반동의 공세가 따르기 마련이듯, 선거 전날 밤 서울 시내 곳곳에 익명의 대자보가 나붙었다. 독립협회가 군주제를 폐하고 공화제를 세우려는 계획이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고종은 가짜뉴스 여부도 가리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이 행동했다. 11월 5일 새벽,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을 체포하고 독립협회에 해산을 명령했다.
– 121년 전 서울 가을~겨울, ‘탄핵’ 때처럼
인민들은 곧바로 만민공동회를 열어 항의했다. 독립협회 활동의 절정기였던 1898년은 만민공동회라는 도시적 집회와 시위가 처음 열린 해이기도 했다. 첫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 주도로 3월에 열렸다. 여기서 인민들이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비판하자 놀랍게도 러시아가 한발 물러섰다. 첫 만민공동회의 승리 이후 인민들이 다투어 만민공동회를 열기 시작했다. 만민공동회의 운영 방식은 독립협회와 같았다. 집회가 열릴 때마다 임시 회장과 총대위원을 선출해 결의사항을 집행하도록 했다. 1898년 가을과 겨울, 서울 거리는 연일 이어지는 만민공동회로 북적댔다. 고종이 마시는 커피에 아편을 타도록 한 김홍륙 등 관련자들에 대해 정부가 반인권적인 고문을 자행하고 재판도 없이 처형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인민들은 열흘이 넘게 만민공동회를 열어 규탄했고 결국 7명의 대신이 퇴진했다. 대대적인 집회와 시위가 이렇게 장기간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독립신문>은 ‘임금을 속이고 백성을 압제해 인민 간에 싸움을 만들어내어 나라를 위태하게 하는 간신배’에 분노한 인민들이 거리에 나왔다고 진단했다. 만민공동회가 11월 5일에 당장 시작한 독립협회 지도자 석방운동은 6일 만에 성공했다. 하지만 만민공동회는 익명서를 뿌린 인사들을 처벌하고 독립협회가 재허가될 때까지 시위와 집회를 계속하기로 결의했다. 보수세력은 무력으로 만민공동회를 해산하고자 황국협회에서 활동하는 보부상을 동원해 집회 현장을 습격했다. 하지만 분노한 인민들이 보부상들을 몰아냈고 만민공동회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 고종이 천막 찾아 만민공동회 대표 만나
그러자 고종이 인민을 달래고자 직접 나섰다. 11월 26일 고종은 경운궁 밖 천막에서 만민공동회 대표를 직접 만나 그들의 요구 조건을 모두 승낙했다. 이 역사적 장면을 보기 위해 많은 인민이 몰려들었다. 고종은 칙어를 내려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면서 나라와 인민이 서로 소통하는 길을 열 것을 약속했다. 이 칙어는 한글로 번역되어 신문을 통해 전국에 퍼져갔다. 인민 누구나가 황제가 한 약속 내용을 직접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고종은 보수파 인사를 내각에 앉히는 등 결국 인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인민들은 다시 만민공동회를 열었다. 당시 서울 인구가 17만 명 정도였는데 만민공동회에는 매일 1만~2만 명이 모였다. 학생, 상인, 여성을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연일 철야 농성을 펼쳤다. 이 소식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만민공동회에 지지를 표하며 성금을 보내왔다. 집 판 돈 일부를 보낸 이, 배를 보낸 과일 장수, 술을 보낸 술장수부터 감옥의 죄수는 물론 걸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성금이나 물품을 쾌척했다. 나무꾼들이 기부한 장작은 철야 농성장의 밤하늘을 훤히 비췄다. 만민공동회를 엄호하던 200여 명의 군인이 지지를 표명하며 자진 해산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인민의 성원과 지지에 찬비와 추위를 무릅쓰고 철야 농성을 불사하던 만민공동회는 겨울의 문턱에서 정부의 폭력적인 진압에 해산되고 말았다. 만민공동회는 농촌에서 농민이 주체가 된 종전의 봉기와 달리 도시라는 공간에서 인민이 주도한 비폭력의 시위이자 집회였다. 또렷한 지도부 없이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머리를 맞대며 꾸려간 공동체였다. 또한 기나긴 철야 시위를 통해 전국적 관심을 이끌면서 연대 문화를 만들어냈다.
* 김정인 _ 춘천교육대 사회과교육과에서 한국사를 가르친다. 근현대 민주주의 역사와 현대 대학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주요 저서로는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독립을 꿈꾸는 민주주의> <역사전쟁, 과거를 해석하는 싸움> <대학과 권력> 등이 있다. 현재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기획소통분과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