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동방견문록
마르코 폴로 / 동서문화사 / 2016.11.30
‘동방견문록’은 모두 248절로 이루어졌으며,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여덟 개 장으로 나누어 구성되어 있다. 저자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여행하여 직접 보고 겪어서 쓴 ‘동방견문록’을 통해 유럽인들은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었다. 단절되어 있던 동?서가 이 ‘동방견문록’으로 하나가 된 것이다. 더 넓은 세상을 동경하던 사람들은 ‘동방견문록’을 읽고 동방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고, 그리하여 동서양은 더욱 가까워지고 문화교류를 통해 유럽 근대화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동방견문록’은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부터 비교적 단조로운 문체와 더불어 ‘상투적인 표현’을 지적받았고, ‘허풍쟁이 마르코 이야기’라고 깎아내려지며 단지 어린이용 옛날이야기 같은 취급을 받았지만, 19세기 이후 번역자들의 노력으로 재평가되었다. ‘동방견문록’은 다른 것과는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규모에서 비롯되는 내용의 풍부함이 그 가치를 더욱 높여준다. 세계 일주라고 할 수 있는 획기적인 그 여행의 의의와 더불어 내용의 풍부함을 통해, 그의 업적에는 이중적인 중요성이 있다.
○ 목차
서장
1 머리글
2 니콜로와 마페오, 콘스탄티노플을 떠나 세계탐험에 오르다
3 니콜로와 마페오, 솔다이아를 떠나다
4 폴로 형제, 사막을 가로질러 부카라에 다다르다
5 폴로 형제, 대칸의 궁정으로 향하는 사신의 종용에 응하다
6 폴로 형제, 대칸 궁정에 도착하다
7 대칸, 폴로 형제에게 그리스도 교도의 사정을 묻다
8 대칸은 폴로 형제를 사절로서 로마 교황에게 파견하다
9 폴로 형제, 대칸에게서 권위의 황금 패자(牌子)를 받다
10 폴로 형제, 아크레 도착
11 폴로 형제, 마르코와 함께 베네치아를 떠나다
12 폴로 형제와 마르코, 아크레를 떠나다
13 폴로 형제, 로마 교황에게로 가다
14 폴로 형제, 마르코를 데리고 대칸 도성인 케멘푸에 도착하다
15 세 사람, 대칸을 알현하다
16 마르코, 대칸의 사절이 되어 출발하다
17 마르코, 사절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다
18 세 사람, 대칸에게 귀국허가를 요청하다
19 세 사람, 대칸 곁을 떠나다
제1장 서아시아에서 중앙아시아를 횡단
20 소아르메니아
21 투르코마니아 지방에 대해서
22 대아르메니아
23 조르지아 인과 국왕, 그들의 사정
24 모술 왕국
25 대도시 발다크 함락
26 발다크에 일어난 산의 대기적
27 그리스도 교도들, 칼리프 말에 경악하다
28 사교는 꿈 속에서 구두장이 신도가 산을 움직이리라는 계시를 듣다
29 그리스도 교도 신도가 용케 산을 움직이다
30 유서 깊은 도시 타우리스
31 성(聖) 바르사모 수도원
32 광대한 나라 페르시아
33 신을 찬양하려고 찾아온 세 성자
34 페르시아 여덟 왕국
35 도시 야스디
36 케르만 왕국에 대해서
37 도시 카마딘
38 거대한 경사지대
39 황량한 마른 땅을 가다
40 유서깊은 대도시 코비암
41 제2의 사막을 건너다
42 ‘산속 노인’과 부하 자객들
43 ‘산속 노인’은 자객을 어떻게 훈련시켰나
44 ‘산속 노인’의 토벌
45 도시 사푸르간
46 유서깊은 대도시 발라크
47 타이칸 지방, 그 지방 산들은 소금으로 되어 있다
48 발라샨의 보석과 명마
49 파샤이 지방
50 케스무르 왕국
51 보칸 지방
52 파미르 고원
53 벨로르 지성
제2장 중국의 서북 변경
54 카슈가르 왕국
55 대도시 사마르칸
56 야르칸 지방
57 대도시 코탄
58 펨 지방
59 차르찬 지방
60 롭 사막
61 탕구트 대주(大州)
62 카물 지방
63 이코구리스탄 지방
64 친기탈라스 지방
65 수쿼르 지방
66 캄프초 시
67 에치나
68 카라코룸
69 타타르 인이 프레스터 존에게 반기를 든 경위
70 칭기즈, 타타르 인의 제1대 칸이 되다
71 칭기즈 칸, 부하를 소집하여 프레스터 존을 공격하다
72 프레스터 존, 군을 이끌고 칭기즈 칸을 요격하다
73 프레스터 존과 칭기즈 칸의 대결전
74 칭기즈 칸을 계승하는 여러 칸들
75 타타르 인의 신 및 그들의 율법
76 바르구 평원과 그 주민의 여러 습속
77 광대한 에르주울 왕국
78 에그리가야 지방
79 광대한 텐둑 지방
80 신다추 및 그 밖의 여러 지방
81 차가노르 시
82 수도 샨두와 칸의 화려한 궁전
제3장 쿠빌라이 칸의 통치
83 쿠빌라이 칸에 대해서
84 대칸의 삼촌 나얀이 꾀한 반란
85 대칸이 나얀 반격에 직접 나서다
86 대칸과 나얀과의 전투
87 대칸은 어떻게 나얀을 사형에 처했는가
88 대칸이 십자가를 변호한 연유
89 대칸이 그리스도 교도가 되지 않았던 이유
90 합전에 무훈을 세운 신하에 대한 은상
91 대칸의 용모와 품행
92 대칸의 아들들
93 대칸의 궁정에 대해서
94 대칸의 후계자 황태자의 궁전
95 신도시 타이두
96 타이두에서 일어난 카타이 인의 모반
97 대칸의 금위대
98 대칸이 주최하는 갖가지 대향연
99 대칸 탄신일의 대축연
100 대칸이 거행하는 원단절(元旦節) 성대한 축전
101 대향연에 배식이 허용되는 1만 2천 명의 중신들 및 대칸이 하사하는 연회복
102 대칸이 국민에게 사냥에서 잡은 것을 헌상하도록 명령한 것
103 대칸의 수렵용으로 훈련된 호랑이·표범·살쾡이 및 독수리에 대해서
104 사냥개 관리를 맡고 있는 두 형제
105 대칸이 짐승을 포획하는 실황
106 대도시 캄발룩, 그 많은 인구와 반입되는 다량의 사치 물자
107 대칸이 국민에게 사용하도록 한 지폐
108 대칸의 모든 정무를 총할하는 12 중신
109 수도 캄발룩에서 곳곳으로 통하는 공도(公道)
110 흉년 및 가축의 폐사 때 행하는 대칸의 구휼
111 대칸의 명령에 따라 공도 가장자리에 심은 가로수
112 카타이 인이 마시는 술
113 장작처럼 타는 돌
114 국민 구제를 위해 대칸이 비축하고 있는 막대한 저장 곡물
115 빈민을 위한 대칸의 막대한 시여
116 캄발룩의 점성사들
117 카타이 인의 계율과 관습
제4장 윈난으로의 사절행
118 이제부터 카타이 지방 이야기. 먼저 풀리상긴에 대하여
119 대도시 탁주
120 타얀푸 왕국
121 카이추 고성 이야기
122 프레스터 존이 ‘금왕’을 포로로 한 경위
123 황허 강
124 대도시 켄잔푸
125 카타이와 만지의 국경인 한중 지방
126 아크발루크 만지 지방
127 광대한 신두푸(청두) 지방
128 티베트 지방
129 계속해서 티베트 지방
130 카인두 지방
131 카라잔 지방
132 계속해서 카라잔 지방
133 카르단단 지방
134 대칸에 의한 미엔·방갈라의 정복
135 대칸 군대와 미엔 왕과의 전투
136 계속해서 미엔 왕과의 전투
137 경사 지대
138 미엔
139 방갈라 지방
140 칸지구 지방
141 아뮤 지방
142 톨로만 지방
143 친티구이 지방
제5장 대운하 연안 공도를 따라 푸젠으로 가는 여정
144 카찬푸 시
145 창글루 시
146 창글리 시
147 툰딘푸 시
148 카타이 인의 풍습
149 계속해서 카타이 인의 풍습
150 신구이 마투
151 대도시 린구이
152 핀구이 시
153 친구이 시
154 대칸의 만지 지방 정복
155 코이간주 시
156 파우긴 시
157 카인 시
158 틴구이 시
159 얀구이 시
160 남긴
161 사얀푸 시
162 신구이 시
163 카인구이 시
164 찬기안푸 시
165 틴구이구이 시
166 수주 시
167 킨사이 시
168 칸이 킨사이에서 징수하는 거액 세수입
169 대도시 타핀주
170 콘차 왕국
171 푸주 시
172 차이툰 시
제6장 남해 경유 귀국 항로
173 인도―먼저 인도 항로 선박에 관하여
174 지팡구 섬
175 외딴 섬에 남겨진 대칸 군대가 적지의 도시를 점령하다
176 우상 숭배의 여러 모습
177 참바국
178 대자바 섬
179 손두르 섬과 콘두르 섬
180 펜탄 섬 및 그 밖의 섬들
181 소자바 섬
182 펠렉 왕국
183 바스만 왕국
184 사마트라 왕국
185 다그로얀 왕국
186 람브리 왕국
187 판푸르 왕국
188 네쿠에란 섬
189 안가만 섬
190 세일란 섬
191 대마아바르 지방
192 무트필리 왕국
193 사도 성 토머스 유체를 안치한 성전
194 브라만교의 발상지 라크 지방
195 계속해서 세일란 섬
196 카엘 시
197 코울람 왕국
198 코마리
199 엘리 왕국
200 말라바르 왕국
201 고주라트 왕국
202 타나 왕국
203 캄바에트 왕국
204 세메나트 왕국
205 케스마코란 왕국
206 남도와 여도
207 소코트라 섬
208 모그다시오
209 잔지바르 섬
210 아비시니아 지방
211 아덴 지방
212 에시에르 시
213 두파르 시
214 칼라트 시
215 호르무즈 시
제7장 터키국의 사정
216 대터키국
217 카이두 왕의 왕녀와 그녀의 용감한 행위
218 아바가 칸이 아르군 왕자를 보내 싸우게 한 이야기
219 왕위를 얻고자 아르군, 귀경길에 오르다
220 아코마트의 아르군 요격
221 아코마트 공격을 의논하는 아르군
222 아르군에 대한 장령들의 회답
223 아르군, 사자를 아코마트에게 보내다
224 아르군 사자에 대한 아코마트의 회답
225 아르군군과 아코마트군의 회전
226 아르군의 추대를 꾀하는 귀족들
227 아르군, 자유의 몸이 되다
228 아르군, 그의 삼촌 아코마트를 처형하다
229 귀족들, 아르군에 충성을 서약하다
230 아르군 죽고 가이카투 왕위에 오르다
231 가이카투 죽고, 바이두 왕위에 오르다
232 북방에 거주하는 칸치 왕에 대한 이야기
233 ‘영원한 어둠의 나라’
234 넓은 러시아국과 그 주민
235 대해로의 관문
236 서북 타타르국의 역대 제왕
237 훌라구와 베르케 사이에 벌어진 전쟁
238 베르케, 훌라구를 향해 진격하다
239 부하 장병에 대한 훌라구의 연설
240 훌라구군과 베르케군의 격전
241 계속해서 훌라구군과 베르케군의 격전
242 베르케의 용감한 분전
243 서북 타타르 왕국, 투다멩구 즉위
244 토크타, 노가이 소환하여 톨로부가의 죽음에 대한 해명 요구하다
245 토크타, 다시 사신을 노가이에게 보내다
246 토크타의 노가이 친정
247 토크타의 연설
248 노가이 왕의 분전
동방의 빛을 찾아서
동방 무역을 꽃피운 중세 베네치아
13세기 실크로드와 남해 항로
마르코 폴로의 세계 일주
《동방견문록》
마르코 폴로 길을 떠나다
《동방견문록》의 성립과 전래
○ 저자소개 : 마르코 폴로 (1254년 9월 15일 ~1324년 1월 8일)
마르코 폴로 (1254년 9월 15일 ~1324년 1월 8일)는 열다섯 살 때 아버지와 숙부를 따라 동방 여행길에 올라,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중국과 인도를 거치는 25년의 여정을 마치고 고향 베네치아로 돌아온다. 그 뒤 베네치아와 제노바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베네치아군에 참가했다가 포로가 되는데, 감옥에서 소설가 루스티첼로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마르코 폴로의 경험담을 루스티첼로가 글로 옮겨, 마침내 위대한 고전「동방견문록」이 탄생한다.
마르코 폴로는 1254년경 이탈리아의 상업도시 베네치아에서 무역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니콜로 폴로는 그가 태어날 때 중앙아시아의 중국에 있었으며, 그가 15세 때 돌아왔다. 17세 때 아버지와 함께 베네치아를 떠나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1275년 원나라의 세조가 있던 카이펑에 도착하였다. 그들이 원나라에 간 이유는 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의 요청으로 예수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의 성유와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을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당시 서방과의 교류를 원하고 있었던 쿠빌라이 칸으로서는 그리스도교 (기독교)를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같이 여행을 시작한 도미니코 수도회 수사들은 모두 돌아가, 성유만 갖고 황제를 알현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세조의 신임을 얻은 그는 정치, 외교 등의 요직을 맡게 되었다. 마르코 폴로는 관리로써 원나라를 위해서 일하면서 17년 동안 중국의 여러 도시와 지방을 비롯하여 몽고 · 버마 · 베트남까지 다녀왔다. 1292년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제노바와의 해전에 가리 함대에 속하여 출전하였으나 전쟁에 패하여 포로가 되었다. 1년간 감옥 생활을 하면서 아시아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동료들에게 들려 주었는데, 이때 작가 루스티켈로가 자신의 중국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마르코의 이야기를 받아적어, 그 유명한 《동방견문록》이 쓰여졌다. 하지만 원제는 《세계의 서술》이었으며, 이는 유럽인이 전혀 알지 못하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자세한 지식을 담았기 때문이다. 이 서적은 유럽인의 동방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중세 동방 연구에 관한 중요한 문헌이다.
– 역자 : 채희순
경성제국대학 사학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교수, 성균관대학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 사범대 교수를 지냈다. 고등고시위원 역임했다. 지은책으로는 『동양사개론』, 『동양문화사』, 『대세계의 역사』, 『(고등학교)세계사』 옮긴책으로는 『맹자(역해)』, 『손자(역해)』, 『오자(역해)』, 『한비자(역해)』 『손자병법(역해)』 등이 있다.
○ 출판사 서평
“난 내가 본 것의 절반도 쓰지 않았다!”
경계를 넘어 세계로 뻗어가는 아시아의 혼 유럽인들에게 신비로운 동양정신을 불어넣은 ‘동방견문록’ 한국최초 완역 결정판! 13세기 서양인의 눈으로 본 세계문화편람!
– 운명적 만남이 낳은 위대한 불후의 고전
마르코 폴로는 열다섯 살 때 아버지와 숙부를 따라 동방 여행길에 올라,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중국과 인도를 거치는 25년의 여정을 마치고 고향 베네치아로 돌아온다. 그 뒤 베네치아와 제노바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베네치아군에 참가했다가 포로가 되는데, 감옥에서 소설가 루스티첼로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마르코 폴로의 경험담을 루스티첼로가 글로 옮겨, 마침내 위대한 고전『동방견문록』이 탄생한다.
『동방견문록』은 모두 248절로 이루어졌으며,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여덟 개 장으로 나누어 구성되어 있다. 서장은 마르코 폴로가 어떻게 여행을 떠나고 다시 돌아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책을 쓰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제1장은 대?소아르메니아와 투르크메니아를 거쳐 이라크와 페르시아에 이르는 서아시아를 다룬다. 제2장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파미르를 넘어 타림분지를 거치는 중앙아시아에 대해 서술한다. 제3장은 쿠빌라이 칸 수도인 상도(上都)와 대도(大都)의 모습, 그리고 대칸의 통치를 자세하게 묘사한다. 제4장은 중국 북부(카타이)와 사천·운남, 미얀마를 설명하며 제5장은 중국 동남부, 당시 ‘만지’라고 불리던 남송 영역을 다룬다. 제6장은 베네치아 귀국 길에 보고 들은 인도 각지의 모습을 묘사하고 마지막 제7장은 중앙아시아 대초원과 러시아, 북극지방을 설명한다. 이처럼 마르코 폴로는, 13세기 그즈음 알려진 모든 세계를 포괄적으로 다루었다.
『동방견문록』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닌, 13세기 서양인의 시각으로 쓴 세계문화편람이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다.
– 인류역사 최초 대위업
13세기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유럽과, 종교적으로 대립하는 이슬람 문화권만을 ‘세계’로서 인식하고 있었다. ‘동방’은 단지 여러 구전이나 소문으로 어렴풋이 들려올 뿐, 구체적인 세계의 일부로서 인식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무렵 아시아에서는 세계역사상 가장 강력한 정복왕조가 세워져, 유목과 농경이 조화된 화려하고 웅장한 문화가 탄생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마르코 폴로는 중국을 여행하여 그것을 직접 보고 겪었다.『동방견문록』을 통해 드디어 유럽인들은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었다. 단절되어 있던 동?서가 이『동방견문록』으로 하나가 된 것이다.
동방 왕국의 화려한 궁정생활, 신화에나 나올 듯한 신비스런 짐승들, 위대한 왕 프레스터 존, 어마어마한 금은보화와 각종 특산품, 거대한 도시와 신기한 풍습, 수십만 기마대가 펼치는 처절한 전투 등,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는 유럽 밖의 세계에 대해 알지 못하던 당시 유럽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허풍쟁이로 치부했다. 어느 것에든 ‘수백만의…’하며 수를 부풀리는 그에게 ‘백만 선생’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1324년 마르코 폴로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친구들은 그의 손을 잡으며, 지금이라도『동방견문록』에 담은 이야기들이 거짓임을 밝히고 참회하라고 설득했다. 물론 마르코의 대답은 이러했다. “거짓이라니, 난 내가 본 것의 절반도 다 쓰지 않았어.”
이때 사람들은『동방견문록』이 인류역사 큰 획을 그은 세계고전으로 남으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수많은 논란에도『동방견문록』은 필사본으로 온 유럽에 퍼졌고, 성경 다음으로 인기 있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더 넓은 세상을 동경하던 사람들은『동방견문록』을 읽고 동방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고, 그리하여 동서양은 더욱 가까워지고 문화교류를 통해 유럽 근대화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 서양인 시각으로 본 동양인
13세기는 몽골에 의한 중국 전역 통일이 완성된, 대원 정복 왕조의 통치체제가 확립된 시기이다. 물론 이 시기에 대한 중국의 자료가 특별히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이 특수한 시기를 중국 이외의 시선으로 남긴 기록이 있다는 것에 그 중요성이 있다.
본디 이역 사람에 의한 중국 사정의 보고에는, 중국인이라면 진부하기 짝이 없어서 간과할 법한 사항에 대해서도 이국인이기 때문에 관심을 갖고 관찰해서 서술한 것이 꽤 있다. 특히 마르코 폴로는 색목인 (서역인)을 몽골인과 비슷하게 우대했던 원조의 독자적인 정책에 힘입어 말석이긴 해도 직접 정치계층에 낄 수 있었기에, 마땅히 그 보고는 보통 외국인 여행자가 그렇듯이 그저 스쳐지나가는 관찰만이 아닌 그 무엇을 포함하고 있다. 쿠빌라이 칸의 여름 수도가 되는 상도, 겨울 수도가 되는 대도의 궁전 각각의 구조, 대칸 궁정에서 개최된 향연을 비롯한 연간행사, 유림에서 대칸의 행궁과 사냥놀이의 묘사는 궁정에 드나들 수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했으며, 이는 중국 문헌의 누락이나 결함을 보충할 자료이기도 하다.
마르코 폴로는 본디 상인이다. 따라서 그의 ‘동방견문록’은 타국의 색다른 성격과 풍속을 주로 기록했던 평범한 여행자들의 여행기와는 전혀 다르다.『동방견문록』은 그보다도 각지의 산물, 물가, 시장상황, 통화 등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면서 그 모습을 다루고 있다. 산물 중에서도 특히 황금, 은, 보석, 진주, 향료, 향수, 비단 같은 상품이 자주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마르코 폴로가 사치품 무역에 종사하던 상인이었음을 뚜렷이 보여준다. 그들에게는 실익을 가져다줄만한 것이 가장 중요했으므로, 그와 관련된 사정을 부정확하거나 애매하게 기록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그는 당연히 이러한 사항을 면밀하게 기록했다. 그런데 실은 이런 기록이 있었기에 이 풍부하고 정확한 ‘견문록’이 내려올 수 있었다.
– 사실과 구전을 바탕으로 한 놀랍고 신비로운 기록
『동방견문록』은 피사 출신 소설가 루스티첼로가 제노바 감옥에서 마르코 폴로의 구술을 바탕으로 작성한 것을 조본(祖本)으로 한다. 소설가의 손을 거쳤으므로, 소설과 비슷한 구절이 곳곳에서 보인다. 예를 들면 26~29절 그리스도교도 구두장이의 기적, 32~33절 사바의 성인 세 명이 받은 계시, 36절 토질과 인정의 관계에 대한 케르만 왕의 실험, 42~44절 ‘산속 노인’, 55절 사마르칸 교회에서 일어난 기적 등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마르코 폴로나 루스티첼로가 『동방견문록』에 지어낸 이야기를 넣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산속 노인’이나 69~73절 프레스터 존 멸망의 전말, 제96절 아크메트 암살 이야기 등은 모두 소설같이 서술되어 있기는 해도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예를 들면 121~122절의 ‘금왕’과 프레스터 존에 대한 기묘한 이야기도 마르코 폴로는 그 지방의 구전을 바탕 삼아 서술한 것이라 밝히고 있다. 이렇게 보면, 각지에서 전승된 이야기가 저자를 통해서 이러한 형태로 재연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동방견문록』은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부터 비교적 단조로운 문체와 더불어 ‘상투적인 표현’을 지적받았고, ‘허풍쟁이 마르코 이야기’라고 깎아내려지며 단지 어린이용 옛날이야기 같은 취급을 받았다. 이후 시대가 중세를 벗어남에 따라 이 책의 신빙성은 점점 줄어들어 갔다. 오랜 세월 이런 취급을 받아온 『동방견문록』은 19세기 이후 번역자들의 노력으로 재평가되었다. G. 포티에의 1865년 프랑스어 판이 그 시초임과 동시에 가장 뛰어난 역작이라면, 1871년 이후 수년에 걸친 H. 유울의 영어판 및 1918년 이후 P. 페리오의 주석은 그 역작을 가장 훌륭하게 계승했다고 말할 수 있다.『동방견문록』이 참으로 위대한 동양학자의 주석에 의해 수세기 만에 그 진가를 드러낸 것이다.
– 세계를 하나로 이어낸 숭고한 업적
아주 오랜 옛날부터 동과 서를 잇는 교통노선을 오간 사람의 수는 실로 막대하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이름 없는 자들이다. 이름 없는 자라는 것은 바꿔 말하면,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름 없는 자라고 해도 그 지식은 본인을 통해 반드시 주변으로 퍼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그 범위는 대단히 한정적이고, 그 전승도 전해들은 각 개인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연히 다양한 차이를 보이게 마련이다. 따라서 그것은 결국 망각 속으로 묻혀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록과 필사는, 정보를 올바르게 전승하여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그러나 다 같은 기록과 필사라도, 체험자 본인이 남긴 견문록이 뭐니 뭐니 해도 가장 가치가 높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참으로 숭고한 그 기록들이 당시, 그리고 후세에 얼마나 큰 공헌을 했는가.『동방견문록』은 그중에서도 다른 것과는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규모에서 비롯되는 내용의 풍부함이 그 가치를 더욱 높여준다. 세계 일주라고 할 수 있는 획기적인 그 여행의 의의와 더불어 그 내용의 풍부함을 통해, 그의 업적에는 이중적인 중요성이 있다.
유럽에 문화적 충격과 호기심 불러일으킨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_ 심재길
○ 마르코 폴로의 출생과 여행기의 시작
그는 베네치아의 유명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니콜로 폴로와 삼촌 마페오 폴로 역시 상인으로서 유명세를 떨쳤다. 폴로 형제는 1254년, 즉 마르코 폴로가 태어나기 직전에 동방의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베네치아를 떠났다. 그로부터 얼마 후 마르코 폴로가 태어났다. 그가 자라는 동안 동방으로 떠났던 폴로 형제는 킵차크 칸 국과 일 칸 국 사이의 전쟁으로 다시 베네치아로 돌이가지 못하고 만부득 동쪽으로 가게 되었다. 도중에 쿠빌라이에게 가는 알라우의 사신을 만나 함께 쿠빌라이 칸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쿠빌라이 칸의 명을 받고 교황을 뵙기 위해 지중해변에 있는 아크레로 돌아왔으나 마침 교황의 자리는 공석이었다. 하는 수 없이 새 교황이 선출되기를 기다리며 폴로 형제는 베네치아로 돌아 왔다. 그때가 마르코 폴로가 열다섯이 된 1269년 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를 만났다. 하지만 마르코의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그의 아버지와 삼촌은 베네치아에서 2년 정도 머무르다가 새 교황이 선출되지 않자 쿠빌라이에게 돌아가기로 했다. 이 때 마르코 폴로도 함께 동행 하게 되었다.(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폴로 일행은 쿠빌라이가 부탁한 성유(聖油)를 얻어 떠났으나, 라이아스에 도착했을 때 신임 교황으로 그레고리10세가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아크레로 돌아갔다. 그들은 신임 교황을 알현하고 다시 동방으로 떠났다. 일행은 투르크(터키) 지역과 페르시아, 파미르 고원 ,카슈미르 지역을 통과한 후 쿠빌라이의 수도로 들어갔다. 고비 사막을 지나고부터는 쿠빌라이가 보낸 호위병들의 보호를 받았는데 이는 쿠빌라이가 그들을 각별히 여겼음을 짐작한다.
베네치아에서 쿠빌라이의 여름 수도 샨 두 까지 가는데 약 3년의 시간이 걸렸던 셈이다. <동방견문록>의 기록에 의하면 마르코 폴로는 그곳에서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네 개의 언어를 익힐 만큼 총명했고 ,새로운 환경에도 금방 적응했다. 그래서 그는 쿠빌라이의 신임을 각별히 받았다. 쿠빌라이는 6개월 이상 걸리는 먼 곳으로 사신을 보낼 때면 마르코 폴로를 자주 보냈다.
이럴 때면 마르코 폴로는 그곳의 문화와 풍습을 눈여겨보았다가 돌아와서는 자기가 본 새롭고 신기한 것들을 재미있게 전해주곤 했다. 이런 마르코 폴로를 쿠빌라이는 신뢰하고 사랑했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체류했던 기간은 17년 정도였다. 이 기간 동안 중국의 북부와 남서부, 남동부 지역을 두루 다녔으며 거의 안 가본 지역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가장 오래 체류 했던 곳은 아마도 샨 두와 킨 사이가 아닐까 한다.(이 견문록 3장과 5장에 아주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폴로 일행은 중국에 체류하는 동안 여러 차례 귀국의사를 밝혔지만 쿠빌라이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쿠빌라이의 봉신국인 아르곤 왕의 왕비가 죽었다. 이 때 아르곤 왕은 죽은 왕비를 대신해 같은 혈통의 여인을 쿠빌라이에게 추천해 달라며 사신을 보내 왔다. 쿠빌라이는 사신들에게 ‘코가틴’이라는 여자를 발탁 천거해 사신들에게 보내 주었다. 사신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잦은 전쟁으로 길이 막혀 다시 돌아 왔다. 마침 이때 폴로일행이 바닷길로 해서 인도에서 돌아 왔다. 그래서 사신들은 폴로 일행과 함께 바닷길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쿠빌라이에게 요청 했다. 쿠빌라이는 하는 수 없이 허락하고 거대한 배와 호위 할 군대와 식량과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해 주었다. 코가틴 일행과 폴로 일행은 무려 14척의 배를 거느리고 1291년 남중국해를 출발해서 인도양을 향해 나아갔다. 2년여 항해를 끝내고 목적지에 도착 했을 때는 극히 일부의 사람만이 살아남았다.
아르곤 왕국에 도착한지 얼마 후 쿠빌라이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다. 마르코 폴로 일행은 더 이상 쿠빌라이 궁으로 들어갈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고 고향으로 출발해서 1295년, 마침내 베네치아에 돌아왔다. 그러나 25년 만에 돌아 온 그들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친척들에게서도 문전 박대를 당하자 마르코 폴로는 자신이 입고 있던 타타르 복장을 뜯고 귀금속을 보여 주었다. 그제서 야 사람들은 그들을 알아보았다. 마르코는 그간 보고 들은 것을 그들에게 말해주었지만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신기한 그의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유럽 밖의 세계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던 13세기의 유럽 사람들에게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는 놀랍고도 의심스러울 뿐 이였다.
40세 정도의 삶을 타국에서 보냈으나 세상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가 베네치아로 돌아온 지1년 지나 베네치아와 제노바 사이에 해상권을 두고 전쟁이 일어났다. 마르코 폴로도 이 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 때 감옥 안에서 피사의 작가 ‘루스티켈로’와 만났다. 마르코 폴로는 자신이 지난 25년간 겪었던 체험들을 말했고 루스티켈로는 그의 이야기를 받아 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299년, 위대한 고전 <동방견문록>이 완성 되었고, 같은 해 그는 석방되어 풀려났다.
그 후 의 삶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1323년1월9일에 남긴 그의 유언장에 의하면 그는 ‘도나타’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세 명의 딸을 두었다. 또한 가족과 종교단체에 남긴 유산으로 짐작건대 그의 생활은 어느 정도 풍족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그는 유언장을 쓴 후 1년쯤 지난 1324년 1월 8일 베네치아에서 눈을 감았다. 임종 직전 친구들은 동방견문록에 썼던 거짓들에 대해 참회하라고 권고 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아직 내가 본 것의 절반도 이야기하지 못했다.”
○ 동방견문록은 유럽에 전해진 최초의 여행기였는가?
마르코 폴로가 중국으로 가기 전에 동방에 대한 보고서가 이미 나와 있었다. 선교사나 상인들이 실무적인 목적으로 다녀와 보고한 것인데 카르피니(G,P.Carpini 1182~1252)의 <우리가 타타르인 이라고 부르는 몽골의 역사>와 뤼브뤼키G.Rubruquis1220~1293)의 <뤼브뤼키의 여행기>가 그것이다.
이탈리아의 가톨릭신부였던 카르피니는 교황 인노센트 4세의 명으로 몽골 인에게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것을 권유하기 위해 1245년에 리옹을 떠났으며, 육로를 거쳐 몽골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에 도착했다가, 1247년에 귀국했다. 비록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는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카르피니의 보고서는 유럽에 동방을 알린 최초의 문서가 되었다.
또한 프랑스의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였던 뤼브뤼키는 루이 9세의 친서를 받아 군사동맹을 맺기 위해 몽골로 갔다. 1253년에 출발하여 1255년에 돌아왔다. 원래의 목적은 이루지 못했으나 그의 보고서는 카르피니의 여행기보다 더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몽골제국을 아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마르코 폴로는 살아 생전에는 허풍쟁이라고 비웃음을 샀지만) 그가 죽은 후 유럽에서 “성경”다음으로 인기 있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인쇄술이 발명된 후 에도 더 다양한 판본들이 나왔다. ‘루스티겔로’의 원본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의 원본을 필사한 것과 인쇄술이 발명된 이후 찍어낸 판본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그 종류만도 120 여 종에 이른다고 한다. 필사본들은 대부분 <세계의 기술> 혹은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라고 나왔지만 이탈리아에서는 그의 별명을 따 <백만의 책>으로 나왔다. 이것이 일본에 전해지면서 <동방견문록>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 되었다. 우리나라에도서도 같은 제목으로 옮겨졌다.
○ 동방견문록의 영향으로 지리상의 대 발견
동방견문록은 유럽 사람들에게 문화적 충격과 새로운 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 중에서도 ‘지리상의 발견’은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탐험 의지를 심어주었다.
15세기를 전후하여 많은 인물들이 아시아대륙 혹은 인도를 찾아 탐험을 떠났다.
1)인도를 찾아 떠난 콜럼부스(1451~1506년)는 동방견문록을 철저히 연구한 후 탐험을 떠났다가 신대륙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으면서도 그는 그곳이 인도라고 믿었다.
2)향료를 찾아 떠난 바스코 다가마.(1469~1524)는 포르투갈 항해사로 임마누엘1세의 후원을 받고 최초로 인도 항로를 개척했다.
3)기억 속의 ‘카타이’를 찾아 떠난 벤토 드 고에스(1562~1607)- 바스코 다가마보다 한 세기 정도 후의 군인이었던 그는 16세기 당시 중국과 사람들의 기억 속에 묻힌 ‘카타이’가 같은 국가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페르시아 상인으로 가장하고 1602년 아그라에서 출발하여 1606년 쑤저우(깐쑤성 북서부에 있는 도시)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베이징에 있던 마테오리치(1552~1610년)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의 회신으로 중국과 카타이가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10년 후 병으로 생을 마감 했다. 그의 여행 기록은 마테오리치가 편집하여 낸 여행기에서 17세기 중앙아시아의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4) 몽골제국(타타르)에는 기독교, 이슬람교, 우상숭배의 미신 등 신을 믿는 사람들이 공존 하고 있다. 제국의 제 1인자인 大 칸은 기독교를 최고의 신으로 믿고 섬겼다. 사마르칸트(우즈베키스탄 중부의 도시)에 있는 ‘성 요한 교회’를 차가타이왕의 지원으로 건축 했다. 대 칸은 십자가를 자신을 돕는 수호신으로 믿는다.
*네스토리우스(Nestorius) 파는?
네스토리우스는 기독교의 종파 중 하나로 비 칼게돈 교파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 네스토리우스가 주장한 신학론이 중심이다. 기독교 초창기에 갈라져 나오고 5세기 이후 심하게 탄압받아 주로 아시아지역에 전파되었다. 현대까지 이 교파는 아시리아 동방교회를 통해 존속하지만 네스토리우스의 신학설 자체는 폐기된 상태이다.
참고: 마르코 폴로의 길을 걷다 동방견문록, 루스티겔로 지음, 배진영 번역 옮김, 서해문집. _ 심재길(‘심재길의 성경분석-역사 그분 이야기’ 저자)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