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뒤틀려진 기독교
자끄 엘륄 / 대장간 / 2009.9.2
이 책은 성경의 진리가 어떻게 오늘날과 같은 기독교로 변하였는지를 설명한 것으로, 우리들이 얼마나 잘못된 기독교의 진리 위에 서 있는지를 교회사적인 접근을 통해 자각하게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서구 기독교교회의 역사는 각 시대마다 문화적 배경에 따라 계시가 필연적으로 굴절되어 형성된 왜곡된 역사라고 규정하면서 그 과정과 원인을 추적하고 있다.
○ 목차
- 모순들
- 모순의 이유들
- 신성화와 비신성화
- 도덕주의
- 이슬람의 영향
- 정치적 왜곡
- 허무주의와 기독교
- 참아낼 수 없는 것
- 권세와 세력
- 그래도 지구는 돈다
○ 저자소개 : 자끄 엘륄 (Jacques Ellul, 1912 ~ 1994)
“사고는 세계적으로 행동은 지역적으로”라는 지성인의 행동강령을 말한 프랑스 지성으로, 마르크스의 사회경제학적 접근과 기독교의 가치관을 조화시킨 4개의 박사학위를 가진 학자이자 실천가이다. 1912년 1월 6일 프랑스 보르도에서 태어났다. 1937년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의 연구부장으로 지명되었으나 비시 프랑스 (Vichy France) 정부에 의해 해임되었다. 1936~1939년 사이에 프랑스 정계에 투신하여 활동하였고, 1940~1944년에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열렬히 가담했다. 1953년부터는 프랑스 개혁교회의 총회 임원으로 일하였다.
법학박사인 그는 다수의 책을 저술하여 사회학자, 신학자, 철학자로서 널리 알려졌다. 보르도대학에서 오랫동안 교수로 근무하였으며 ‘신앙과 삶’의 편집주간으로 활동하였다. 사후인 2002년 이스라엘의 얏 바셈 (Yad Vashem)재단에 의해 나치 치하의 유대인 가족들을 위험을 무릎쓰고 도와준 것이 밝혀져 “열방가운데 의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기술 (technique)에 대한 개념으로 현대사회를 설명하였으며, 법과 제도, 자유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보였다. 또한 기독교인으로서의 다양한 저서를 집필하였는데, 한국에는 『세상속의 그리스도인』 (1990), 『뒤틀려진 기독교』(1991), 『하나님이냐 돈이냐』(1992) ,『의심을 거친 믿음』, 『머리 둘 곳 없던 예수』 등 주로 신학관련 서적이 소개되었다. 최근에는 기술체계, 마르크스와 예수 등 사회와 역사 분야의 서적이 소개되고 있으며, 특히 『이슬람과 기독교』(2009)는 엘륄의 유작으로 영미권보다 한국어로 먼저 번역 소개된 바 있다.
– 역자 : 쟈크 엘룰 번역위원회
○ 출판사 서평
- 눈을 뜨라! 일천만 그리스도인들이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뒤틀려진 교회사의 진실을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
프랑스의 신학자이자, 사회학자, 철학자로서 현대 문명비평가이며 기독교적 최고의 지성으로 손꼽히는 쟈크 엘룰의 대표적 작품으로 꼽히고 있는 이 책은 변증법적 방법을 교회사에 반영시켜 전통적 교회사에 하나의 대위법을 마련했다. 엘룰은 “어떻게 기독교 사회와 교회의 발달이 성경 본문의 생각, 즉 율법의 선지자들이나 예수, 바울의 생각과는 전혀 반대되는 다른 하나의 사회, 문화, 문명을 탄생시켰는가?” 라는 질문으로 뒤틀려진 기독교라는 책의 서두를 시작한다.
그리고 이 변질의 원인은 기독교의 계시와 실천의 관계 속에서 발견되는 본질적인 왜곡에서 기인한다고 답한다. 기독교는 실천을 진리의 진정한 시금석으로 삼는 즉, 우리는 실천을 따라 평가하는 것이지 교리의 경향이나 순수성 혹은 교리의 근원이나 본래의 진리에 따라서 평가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쟈크 엘룰은 서구 기독교 교회의 역사는 각 시대마다 갖는 문화적 배경에 따라 계시가 필연적으로 굴절되어 형성된 ‘기독교 왜곡’의 역사라는 사실로 결론을 짓는다. 이 책에는 계시가 역사에 왜곡되어 비틀어진 진리의 흔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모순들
기독교는 행위를 진리의 시금석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사상과 유사하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의 가르침은 기독교의 가르침과 너무 대조적이어서 반성경적으로 뒤틀려졌다.
.모순들의 이유
복음의 본질은 세상을 뒤집어 엎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는 민중의 아편에 불과하다.
.신성화와 비신성화
기독교는 오직 하나님만 신성시하고 거룩하신 분임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신성시하는 일체의 것을 파괴하는 운동이다. 그러나 교회는 스스로 자체 내에서 규범을 만들고 의식을 만들고 금기사항을 만들어 기독교란 미명하에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
.도덕주의
처음부터 기독교 도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시는 반도덕적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도덕적 질서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 질서에 속하는 것이며 존재 자체의 변화를 동반하는 것이다.
.이슬람의 영향
한국교회의 개혁은 하나님께서 계시한 기독교와 서구의 교회가 선포한 기독교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아는데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특히 하나님의 계시와는 상반되는 이슬람교가 얼마나 서구의 기독교문화(도덕, 의식, 신앙관, 삶의 태도 및 가치)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 알게 될 때 개혁의 소리는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정치적 왜곡
성경은 기독교인들이 정치에 무관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어떠한 가치도 부여하지 않으며, 정치권력에 어떠한 정당성도 제공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반정치적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는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란 말을 정치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수단으로 이용하여 왔다.
.허무주의와 기독교
하나님은 스스로 성육신하시어 낮고 천한 곳에 계시지만 교회는 하나님을 하늘 높은 곳에 모셔놓고 인간이 접근할 수 없게 신성시하였다. 교회는 주님의 뜻을 아는가 모르는가?
.참아낼 수 없는 것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계시된 기독교는 반인간적이어서 우리들로서는 쉽게 용납하고 받아들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는 상관없는 기독교를 만들어서 인간이 쉽게 호의적으로 용납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치장을 하였다. 교회는 스스로 자축하고 자랑하고 있으나 왜곡된 기독교에 대한 책임은 면할 길이 없을 것이다.
.권세와 세력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왜곡된 교회는 의식과 형식주의에 빠져서 은혜를 돈으로 매매하며 물질적 축복을 교회제일주의로 삼는 사탄의 도구로 되어가고 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교회의 타락은 언제나 신학자, 성직자 및 교회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들의 입장에서 변형시키고 왜곡시킴으로써 야기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개혁은 소위 유명하다는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교회 자체 안에서 스스로 개혁되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하나님이 말씀에 억눌린 자들에 의해 폭발물이 터지듯 터질뿐이다.
○ 독자의 평
엘륄을 뒤따라 가며….
엘륄의 가장 깊이 있게 다가왔던 책은 도시의 의미이다. 그 책에서 가장 강열하게 다가왔던 주제는 도시의 의미를 통하여 나타내고자 했던, 뿌리 잃은 이들을 위한 뿌리 내림을 돕는 공동체의 역할이다. 역사 속에서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의 방랑자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려 했던 엘륄의 도전은 저주 받은 도시에서 찾아야 하는 인간의 의미는 아닐까? 하여튼 이러한 묘한 연결고리들은 나 혼자만의 푸념이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마지막 구원의 걸림돌은 정통신앙이다” 혁명적으로 다가왔던 그 짧은 문장은 가슴 깊이 사무치도록 나를 괴롭혔다. 인간의 구원은 교리나, 논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잊어버리는 망각의 헌신을 통해서이다. 그들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마 25장에는 아주 이상한 비유가 나온다. 예수님께서 종말의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의인들을 향하여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 말을 들은 의인들은 깜짝 놀라서 이렇게 외친다.
37 ‘주님, 저희가 언제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또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 들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으며,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저희가 찾아가 뵈었습니까?’
예수님의 의도는 명확하다. 의인의 조건, 좀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구원의 조건은 자신이 구원 받을 만한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구원을 선포했을 때 놀라는 것이다. 그들은 철저히 자기의 희생적 삶을 잊어버리며 살아갔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 기억되는 것이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다음으로 나오는 저주받은 자들 역시 의인들과 동일한 질문을 한다. 우리가 언제 주님을 입히지 않았고, 먹이지 않았고, 찾아뵙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질문이다. 그들 역시 의인들처럼 놀라 경악하고 있다. 어떤 철학자는 그랬지, 사람들이 심판대 앞에서 놀라는 이유는 자신이 모르는 상급이 있기 때문이며, 자신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답변을 듣기 때문이라고.
칼빈주의가 자랑하는 ‘하나님의 주권사상’ 때문에 얼마나 고민했던가? 그것 때문에 수많은 이단들(?)이 죽어갔고, 바로 그것 때문에 세상에서 소유한 것들이 하나님의 선물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되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아니었던가? 내가 너무 칼빈을 오도하는 것일까? 그도 사회적 약자로 살았던 사람인데. 칼빈의 정치사상은 그야말로 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너무나 매혹적인 이론이었다. 모든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신자는 그것들을 관리하는 청지기적 소명을 받은 자들이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바르게 사용만 한다면 얼마든지 좋은 것들이다. 정말이지 이처럼 좋은 이론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저 위대한 칼빈주의 후계자인 아브라함 카이퍼의 “이 세계에 하나님의 땅이 아닌 곳은 단 한 평도 없다”는 유명한 말은 철저한 칼빈주의자인 나에게 얼마나 가슴 설레게 했던가!
그러나 엘륄을 접하면서, 그 말은 곧 나에게 수치가 되었다. 병들고 연약한 자들을 위하여 목마르고, 헐벗고, 고통당하셨던 주님의 모습은 도무지 찾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초대교회 교인들이 카타콤에서 칙칙한 모습으로 서 계시는 익명의 주님을 그리다가 얼마 후 시대가 변하여 천상의 주인이요, 우주적 주권자인 그리스도를 그리는 성화의 변천을 보는 듯하다. 천박하기 그지없던 주님이 만유의 그리스도로 그려지자 그들의 신앙은 아름답고 화려해지고, 세련되고 교양적이 되었다. 그러나 세상이 두려워하게 했던 그들의 시퍼런 신앙은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하는 권력으로 다시 태어났다.
나는 분명 엘륄파는 아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벌써 따라가고 있다. 어색한 동행이다. 십자가를 지고 저주받은 골짜기로 나아가셨던 주님의 Via dorosa를 따라 가야지. 아직도 도시 밖에서 떠돌아다니는 가인의 저주받은 백성을 찾아 가 봐야지. 영문 밖으로 나아가야지. 그리고 잊혀지고 또 잊혀져 망각의 삶을 살아 가련다. 그것은 나팔이 아닌 침묵, 그것은 거리가 아닌 골방.
자크엘룰의책들은 비범한 통찰력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탁월한 책은 아무래도 [세상속의 그리스도인] [자유의 투쟁]일 것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