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떼레사와 함께한 마지막 오후들
후안 마르세 / 창비 / 2016.5.20
- 창비세계문학 47권, ‘에스빠냐어권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세르반떼스 문학상 수상 작가인 후안 마르세의 대표작
후안 마르세는 1960년대 프랑꼬 독재정권하 문단의 기계적인 객관주의와 사회고발 문학에 새 물꼬를 트며 주목받기 시작했고, 세르반떼스 상을 비롯해 유수의 문학상을 휩쓸며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꾸준히 지목되어온 작가이다.
그의 작품 중 가장 문학적 완성도가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떼레사와 함께한 마지막 오후들>은 당대 지식인들의 사회참여 열기에 휩쓸린 상류계급 출신 여대생 떼레사와 빈민가 출신 오토바이 도둑 마놀로의 위태로운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이 작품은 이야기의 재미와 사회적 화두, 문학적 시도 등을 두루 담아내어 에스빠냐 문학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1966년 비블리오떼까 브레베 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 목차
7판 작가의 말
1부
2부
3부
작품해설 / 기억과 상상력으로 복원한 1950년대 바르셀로나
작가연보
발간사
○ 저자소개 : 후안 마르세
현대 에스빠냐어 문학의 주요 작가. 에스빠냐어권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의 하나인 세르반떼스 문학상을 수상했다.
1933년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났으며 출생 시 이름은 후안 파네까 로까 (Juan Faneca Roca)였다.
생모가 출산 과정에서 사망하여 누나와 함께 마르세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양부가 프랑꼬 독재에 반대하는 반체제 운동에 연루되어 여러차례 옥고를 치르는 바람에 13살에 학업을 중단하고 보석 세공인의 도제로 들어가, 1958년까지 보석 세공일을 하며 연극과 영화 비평을 잡지에 기고한다.
1954년에 입대하여 18개월 동안 복무했는데 이때 첫 장편소설을 구상한다.
1957년부터 단편소설들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그해 「죽기 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로 쎄사모 단편상을 받았고, 1960년 첫 장편 『장난감 하나만 가지고 갇힌 사람들』로 비블리오떼까 브레베 상 최종 후보에 오르는 등 주목받기 시작한다.
1966년 출간한 두번째 장편 『떼레사와 함께한 마지막 오후들』은 상반된 계급 출신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사회적 주제의 고찰과 새로운 문학적 시도를 두루 달성하여 에스빠냐 문학에 새 흐름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비블리오떼까 브레베 상을 수상하며 에스빠냐어권의 주요 작가로 자리매김한다.
이 작품은 1983년 영화화되었고, 그외 다수의 작품이 영화로 제작되었다.
멕시코 해외소설상, 쁠라네따 문학상, 쎄비야 문예그룹 상, 후안 룰포 문학상, 유럽 문학상, 세르반떼스 문학상 등 유수의 문학상들을 수상했으며, 현재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후안 마르세 (지은이)의 말
이 소설은 이미 눈에 띄지 않는 내 의식의 구석에 자리를 잡았고, 그곳에서 유년기의 가슴 뭉클한 한 장면처럼 따스하게 빛나고 있다. 이따금 나는 촘촘한 작품 속을 더듬으며, 세월에 반점이 생긴 몸이 젊은 시절을 떠올리듯, 한때 이야기에 활력을 부여하면서 다정다감하고 세심한 감성을 아주 주관적으로 표현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사지와 근육, 힘줄이 지닌 매력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추억이 깃들어 있기 마련인 이런 종류의 다시 읽기는 뜻밖의 놀라움도 어김없이 선사한다.
– 역자: 한은경
전북대 스페인·중남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번역가로도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 『떼레사와 함께한 마지막 오후들』 등이 있고, 「소이 쿠바」 「이상한 마을의 알리시아」 「나의 개 봉봉」 「연애의 기술」 등 다수의 스페인어권 영화를 번역하고 감수하였다.
.한은경 (옮긴이)의 말
내전과 프랑꼬 독재를 거치는 동안 에스빠냐 소설의 주된 흐름은 사회적 리얼리즘이었으나 1960년대 들어 ‘참여문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소설 언어와 형식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려는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흐름을 가속화하며 에스빠냐 소설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것이 『떼레사와 함께한 마지막 오후들』이다.
○ 책 속으로
P.308
“야자수와 원시림-어쩌면 이번 여름에 사라진 섬이 아닐까?-을 뒤로하고 반라의 차림으로 당당하게 걸어오는 그녀는 가치 있는 존재로서 그의 것이었다. 그녀는 그녀 부모님의 것도 아니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미래의 남편 것도 아니며, 그녀를 숭배하고 내일 그녀를 가질 어떤 연인의 것도 아닌 바로 그의 것이었다.”
P.325
“까르멜로에 있는 그의 집은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하다. 비만 오면 전깃불이 나간다는 것, 이것은 그의 마루하가 물어볼 때마다 그가 언짢아하면서 설명한 유일한 내용이었다. 그래 서 나는 비만 오면 비좁은 부엌에서 갑자기 꺼져버리는 슬픈 전구와, 오두막집의 석면과 양철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떠올리며 가난에 찌든 한 가엾은 젊은이의 견디기 힘든 삶을 상상하곤 한다.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은 유일한 자산이지만, 그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이들을 사랑하는 법을 절대 배우지 않을 것이다.”
P.368
“어쨌든 행동을 낳은 그 고귀한 충동을 인정하더라도 그들의 겉모습과 실체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나라의 진정한 문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조차 마흔이 될 때까지 자신들의 청년기 신화를 질질 끌고 갔을진대, 당시의 젊은 대학생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세월이 흘러 그들 중 어떤 이들은 광대가 되었고, 또다른 이들은 희생자가 되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머저리나 아이로 남아 있었다. 몇몇은 분별력 있고 관대하며 정치적으로 유망한 행운아가 되기도 했지만 결국 모두 형편없는 샌님들이었다.”
P.397
“몇년 후에 그 열정적인 여름을 떠올려본다면, 황금빛의 수많은 그림자와 거짓 약속, 억압된 미래에 대한 숱한 신기루들로 가득했던 모든 사건들에서 전체적인 암시가 드러나긴 했지만, 정작 두사람이 서로에게 끌렸을 때 태양 아래서 나눈 뜨거운 키스에도 이미 혹한이 둥지를 틀었고, 연무가 신기루를 지워버렸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P.423~424
“그렇다. 시간을 벌려고 하는 사람, 그래서 운명과 싸우는 사람이 바로 마놀로이다. 우리 모두가 그렇다. 그렇다면 그가 가진 자유의 이념은? 스포츠카이다. 고속으로 질주하는 휘황찬란한 컨버터블 스포츠카. 모든 이들이 흰색 플로리드를 가질 수 있는 세상 대신 모든 이들을 위한 한대의 흰색 플로리드.”
P.459
““가지 마……” 마놀로가 그녀의 목덜미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갑자기 비가 내릴 것 같은 기운이 감돌았다. 마놀로는 자신들을 위해 만들어진 황금의 섬인 여름이 끝자락에 다다랐음을 예감했다. 주변에서는 여전히 축제가 계속되고 있었다.”
P.340
난 너 같은 남자애들을 많이 알아. 너희는 지나치게 바보 같아. 우정을 오해하기도 하고 말이야. 화가 나는 이유는 어제까지 내가 그걸 알아채지 못했다는 거아.
P.359
내가 속할까? 정말 내가 거기에 속할까? 그리고 그는 정말 거기에 속할까? 내가 그와 이야기하는 걸 누가 본다면, 내가 속한다고 생각할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까?
P.412
널 어디서 받더라, 기억이 나질 않아, 아름다운 추억이었지만 이젠 안녕, 하겠지. 한때 덧없는 열정으로 관계를 가졌지만, 알잖아, 인생은 그런 거라는 걸.
P.412
그들은 사회적 노력의 결과물인 호화로운 삶을 사는 아이들이고, 비슷하게 노력하는 이들은 누릴 자격이 있으나, 떨리는 손을 뻗어 만지는 것만으로는 얻을 수 없다는 걸 깨닫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P.419새파랑
나는 알고 있었어. 그리고 늘 의심해 왔어. 몬떼까르멜로는 내가 상상했던게 아니야. 마놀로의 형은 중고차 거래상이 아니라, 노동자 의식이 없는 정비공이었어. 베르나르도는 나 자신의 혁명적 환상 속에서 만들어낸 인물이며, 마놀로 역시..
P.498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소홀하게 대하는가. 또 어머니로부터 벗어나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가.
P.520
그에게 가장 굴욕적이고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언젠가 감옥에 가고 떼레사를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보다도, 아무도 심지어 그가 떼레사와 사랑스럽게 키스하는 걸 지켜본 사람들조차도 그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녀 역시 그랬을 가능성을 받아들이지도 믿지도 않는다는 사실일 것이다.
P.522
어둡고, 한없는 허무를 증오하는 애틋한 마음이여, 찬란했던 과거의 모든 흔적을 긁어모은다!ㅡ보들레르
(…..)
P.213
개와 조카들을 데리고 그녀가 비키니 차림으로 해번을 달릴 때면, 쎄라뜨 씨는 햇볕에 그을렸고 물에 젖어 반짜커리는 그녀의 피부에 감탄하곤 했다. 그때마다 그는 그녀의 육체가 지닌 신비로운 힘을 새삼 느꼈고, 동시에 인생에서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다는 생각을 문뜩 하곤 했다.
P.235
˝내일 마루하를 보러 올 거니?˝
˝모르겠어…넌 매일 오니?˝
˝물론˝
떼레사는 붕대가 감긴 마놀로의 손을 보며 또 물었다.
˝아프니?˝
˝응, 이제 아프기 시작해˝
P.240
잘 차려입은 그의 모습을 처음 본 떼레사는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경건함과 그의 몸을 덮고 있는 눈부신 정장 사이에는 새로우면서도 묘한 관계가 있었다. 지금까지 서로 몰랐던 두가지 요소가 이제 막 협정을 맺은 것처럼, 그 관계는 심상치 않은 결과가 초래될 것을 의미하면서 어떤 위험을 암시하고 있었다. 사랑의 모험이 임박해 온 것이었다.
P.247
이게 바로 밝고 유쾌한 떼레사의 진짜모습이야. 그래서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거야.
P.248
그 질문은 알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확신하고자 하는 진심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P.261
막역한 친구들과이 한없이 다정했던 우정은 세월이 지나면서 다 깨져버렸고, 그리움과 안타까움만 남아 있다고 했다. 이는 이 세상에서 지금까지 한 모든 일들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어쩌면 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절대 하지 못할 일들 때문에 더욱 그렇다고 했다.
P.280새
내가 겪은 위험들 때문에 그녀는 날 사랑했다. ㅡ오셀로
P.293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부 진실만 말한 것도 아니었다.
P.102
그는 일찍이 목숨을 걸지 않고는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아주 오만하고 유용한 진실을 깨달았다.
P.108
그들은 환영에 지나지 않았다. 그에게는 먼 나라로의 죄절된 여행, 그 여자애의 잠옷에서 빛나던 인공적인 달빛, 미래에 대한 거짓 약속, 감격, 이민이라는 미친 꿈, 비단의 감촉과 날카로운 통증만 남았다.
P.124
늘 그렇듯 그녀의 말에는 불안감과 상처받거나 외로움에 사무친 다정함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눈빛, 그녀의 미소 또는 목소리에 떠도는 좌절된 젊음, 맥빠진 분위기가 뒤섞여 빚어낸 결과였다.
P.127
그녀의 모습은 새콤달콤한 첫 경험의 맛과 함께 그의 기억에 선연히 새겨졌다. 있었던 일 그대로가 아닌, 그가 기억하고자 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그래서 세월은 종종 우리가 어느 대목, 어느 순간에 실수를 했는지 기억하고 분석하기를 요구한다.
P.138
그는 자신의 발밑에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땅을 걷는 듯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이런 결말을 경험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어둠의 세계로 어쩔 수 없이 되돌아 갈 운명이라는 걸 깨달았다.
P.199
그리고 별장 주변을 배회하는 익명의 노동자인 그 청년과 그의 한가로운 삶이 어떤 의미에서는 사회 발전을 상징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직감했다.
P.21
강건하고 용감한 영혼, 정확한 분별력과 단단한 힘을 가진 젊은이라면 세상 어디에선들, 어떤 사람 속에선들 좋은 평판을 얻고 세상을 호령하지 못하겠는가?
P.38
모든 것을 소유하려하거든 무에서 뭔가를 취하려 하지 말지어다.
모든 것이 되려거든 무에서 뭔가가 되려 하지 말지어다.
P.58
사랑이라는 것이 가끔은 살을 비비는 동물적 행위일 뿐만 아니라 인생의 어떤 꿈이나 약속 따위를 이루기 위한 고통스러운 시도일 수도 있음을 직감했다.
○ 출판사 서평
- 세르반떼스 상 수상 작가 후안 마르세 최고의 작품
현대 에스빠냐 소설의 흐름을 바꾼 문제작
‘에스빠냐어권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세르반떼스 문학상 수상 작가인 후안 마르세의 대표작 『떼레사와 함께한 마지막 오후들』이 창비세계문학 47번으로 발간되었다.
후안 마르세는 1960년대 프랑꼬 독재정권하 문단의 기계적인 객관주의와 사회고발 문학에 새 물꼬를 트며 주목받기 시작했고, 세르반떼스 상을 비롯해 유수의 문학상을 휩쓸며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꾸준히 지목되어온 작가이다.
그의 작품 중 가장 문학적 완성도가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떼레사와 함께한 마지막 오후들』은 당대 지식인들의 사회참여 열기에 휩쓸린 상류계급 출신 여대생 떼레사와 빈민가 출신 오토바이 도둑 마놀로의 위태로운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이 작품은 이야기의 재미와 사회적 화두, 문학적 시도 등을 두루 담아내어 에스빠냐 문학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1966년 비블리오떼까 브레베 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 신분 상승과 낭만에 미혹된 빈민가 청년 마놀로 : 욕망과 소유의 눈부신 태양이 빚어내는 사랑의 환영
“순결한 그녀의 머리 위 저 멀리 있는 높은 하늘에서는 욕망과 소유 (삐호아빠르떼의 세계를 움직이는 두 형제)의 눈부신 태양이 격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321면)
“몇년 후에 그 열정적인 여름을 떠올려본다면, 황금빛의 수많은 그림자와 거짓 약속, 억압된 미래에 대한 숱한 신기루들로 가득했던 모든 사건들에서 전체적인 암시가 드러나긴 했지만, 정작 두사람이 서로에게 끌렸을 때 태양 아래서 나눈 뜨거운 키스에도 이미 혹한이 둥지를 틀었고, 연무가 신기루를 지워버렸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397면)
1950년대 중반의 바르셀로나를 무대로 이 작품은 신분 상승을 갈망하는 절도범 마놀로와 학생운동에 빠져든 부잣집 여대생 떼레사 사이의 착각과 속임수에서 시작되는 사랑을 그린다.
수려한 용모를 지닌 빈민가 청년 마놀로는 잘사는 여자애를 유혹할 작정으로 초대받지 않은 댄스파티에 잠입한다.
그는 그곳에서 떼레사네 집의 하녀 마루하를 부잣집 딸로 잘못 알고 접근해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데, 이후 한동안 둘은 가난하고 절망한 자들끼리의 연민과 연대감, 육체적 갈망이 뒤섞인 관계를 유지한다.
하지만 얼마 후 마루하가 넘어지며 바위에 부딪친 후유증으로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마놀로는 오후마다 병문안을 가게 되고 마침내 “세련되고 부유하고 새로운 생각을 가진 여자애” 떼레사와 자주 만나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그리고 자신의 속임수를 차츰 알아채면서도 여전히 사랑해주는 떼레사를 보고 마놀로는 그녀와 맺어지게 되리라는 백일몽에 빠진다.
한편 흰색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는 떼레사가 마놀로에게 빠지게 된 계기는 그를 혁명적 이상에 헌신하는 노동운동 투사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불만으로 가득한 부르주아 여자애”라고 자조하는 떼레사는 성적 욕망을 진보적 열정과 혼동하고 노동자의 삶을 이상화하면서 마놀로에게 애정을 느낀다.
그녀는 마놀로에게 이상적인 노동자의 모습을 투영하며 사랑에 빠지지만 이내 “부랑자에다 뻔뻔하고, 어쩌면 순간순간 되는대로 자신을 방어하는 사기꾼”, 즉 “보통 사람”인 마놀로의 본모습을 깨닫고 결국 자신이 “혁명적 환상”이 아닌 한 남자로서의 그에게 끌렸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이처럼 1957년의 여름날 마루하가 누워 있는 병상을 사이에 두고 싹튼 두 남녀의 불안한 사랑은 “황금빛의 수많은 그림자와 거짓 약속, 억압된 미래에 대한 숱한 신기루들로 가득했던” 여름의 끝자락에서 예정된 결말을 향해 “아주 잔인하고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다다른다.
- 뜨거운 한낮의 신기루로 그려낸 1950년대 바르셀로나의 현실과 환상
“어쨌든 행동을 낳은 그 고귀한 충동을 인정하더라도 그들의 겉모습과 실체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나라의 진정한 문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조차 마흔이 될 때까지 자신들의 청년기 신화를 질질 끌고 갔을진대, 당시의 젊은 대학생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368면)
작가는 반독재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된 프랑꼬 집권기의 바르셀로나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를 진보적이라 믿었던 부르주아 대학생들의 위선을 비판하고 그들에게 덧씌워진 신화를 제거한다.
1950년대의 분위기를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동시에 ‘영웅적 세대’라 불린 학생운동 세대를 비판과 풍자를 담아 묘사함으로써, 계급문제와 진보주의라는 사회적 주제를 다루면서도 내전 이후 문단의 주류가 되어버린 사회주의 미학과 단호하게 단절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기법 면에서도 마르세는 객관주의를 표방하던 당시 소설들과 달리 전지적 화자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또 ‘내포작가’가 끊임없이 개입해서 사건을 예견하고 비평하고 판단하게 하거나, 서사의 진행에서도 플래시백, 내적 독백 등을 군데군데 활용하여 직선적인 시간 흐름에서 벗어나 사건을 둘러싼 다양한 시각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처럼 당시의 소설들과 뚜렷이 배치되는 문학적 시도들을 선보임으로써 이 작품은 사회적 리얼리즘 미학의 한계를 내용과 형식의 양면에서 극복하고 에스빠냐 소설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전환점을 이룬다.
『적과 흑』의 쥘리앵 쏘렐과 『고리오 영감』의 라스띠냐끄 같은 19세기 사실주의 소설의 유산을 이어받은 인물인 마놀로는 20세기 후반 에스빠냐 문학이 낳은 가장 인상적인 작중인물 중 한명으로 꼽힌다.
잘생긴 외모와 타고난 카멜레온 같은 기질, 그리고 강한 신분 상승 욕구를 가진 그는 떼레사가 속한 세계로 날아오르기를 열망하지만 끝내 혹독한 현실 앞에 좌절하고 만다.
작품은 비단 마놀로뿐 아니라 떼레사를 포함한 많은 인물들이 각기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과 실체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혼란과 갈등 속에서 살아가는 현실을 묘사한다.
이처럼 이 작품은 문학 본연의 미덕을 고심하는 자세로 다시 새롭게 돌아와, 불가능한 꿈에서 비롯하는 낭만적이고 서글픈 이야기를 선사하며 1950년대 바르셀로나에 대한 애틋한 회고이자 인간의 열망과 좌절에 대한 보편적 서사로서 여전한 공감과 주목을 끌어내고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