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로욜라의 성이냐시오
칼 라너, 파울 임호프 / 성바오로딸 / 1992.6.1
이 책은 ‘교회의 사람’이요 ‘교회의 병사’라 불리는 예수회의 창립자인 로욜라 성 이냐시오 전기로, 그의 생애와 현대의 예수회 회원들에게 주는 훈화형식의 이냐시오 영성 및 해설이 곁들인 화보로 엮어진 책이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라는 유일한 삶의 목표 아래,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는 가난과 겸손을 몸소 사신 예수를 따르며 전하는데 온전히 투신한 회심한 성 이냐시오의 생애는 참 삶의 길을 찾는 모든 이들이 세상 만물을 통하여 신비로운 하느님을 직접 만나도록 새로운 길을 제시해 준다.
–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1491-1556)
15세기 후반 스페인의 로욜라 지방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세속적 출세를 꿈꾸면서 청년기를 보냈다. 국경 지대에서 벌어진 프랑스 군대와의 전투 중에 부상당한 후, 본가에서 요양하던 중에 하느님께 회심하기 시작했다. 그 후에 하느님을 섬길 방법을 찾으며 순례와 기도로 생활하던 끝에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을 만나 모임을 이루었고, 예수회라는 수도회로 인가받았다. 이 자서전은 이냐시오가 말년에 동료들의 간청으로 하느님께서 그의 생애를 어떻게 이끌어 오셨는지를 카마라 신부에게 구술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 목차
001. 이냐시오 로욜라
002. -이냐시오의 역사적 소개
003. -이냐시오의 가계와 시대배경
004. -세상에서의 항로
005. -로욜라에서의 새 출발
006. -몬세라트와 만데사
007. -예루살렘
008. -바르셀로나
009. -알칼라와 살라망카로의 출정
010. -파리에서의 유학
011. -스페인 여행
012. -베네치아
013. -로마로 가는 길목에서
014. -로마에서
015. 로욜라의 이냐시오가 현대의 예수회 회원에게 주는 훈화
016. -직접적인 하느님 체험
017. -개인적인 체험으로의 길잡이
018. -이냐시오의 영성
019. -종교적 제도와 내면적 실재의 체험
020.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동정
021. -하느님의 하강에 참여함
022. -예수
023. -예수를 따르고 모방하기
024. -권력에 얽매이지 않는 봉사
025. -성공한 모방과 실패한 모방
026. -교회의 정신
027. -예수회의 순명
028. -예수회에서의 학문
029. -예수회의 변천 가능성
030. -장래의 전망
031. 로욜라의 이냐시오와 그의 세계
032. -세상에서의 항로와 하느님께로의 회심
033. -만데사에서의 하느님 체험
034. -순례자와 대학생
035. -로마 시절
○ 저자소개 : 칼 라너 (Karl Rahner, 1904 ~ 1984)
20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칼 라너는 1904년 3월 5일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1922년 4월, 열여덟 살의 나이로 예수회에 입회해 평생토록 예수회 수도자, 사목자의 정체성을 지니고 살았다.
독일과 네덜란드의 예수회 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1932년 신부가 되었다.
일찌감치 그의 학문적 잠재력을 알아본 예수회는 그에게 철학 공부로 수도회에 기여하는 사명을 맡겼다.
1934년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철학부에서 본격적으로 학문의 세계로 진입했으며, 특히 당대 최고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사상에 심취했다.
하지만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 제출한 라너의 박사 학위 논문은 하이데거의 영향이 너무 크다는 이유로 탈락했다.
1936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대학교에서 통과된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은 『세계 안의 정신 : Geist in Welt』(1939)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각계의 찬사를 받았다.
1938년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합병되고 인스부르크에서 신학을 가르칠 수 없게 되자, 빈에 머물면서 교회의 일치를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48년 인스부르크 대학교로 돌아와 교의신학 교수로 1964년까지 가르쳤다. 이 기간 동안의 학문적 업적으로 크게 명성을 떨쳤다.
1962-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 자문 위원으로서, 가톨릭교회가 새 시대의 요청 앞에서 개혁적 방향을 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인스부르크 대학교에서 임기를 마친 뒤 뮌헨 대학교 교수로 초빙되어 로마노 과르디니의 강좌를 이어받았다.
1971년부터는 대학 강단 바깥에서 왕성한 학문 활동과 대중 강연을 이어 나갔다.
1976년에 나온 『그리스도교 신앙 입문 : Grundkurs des Glaubens』은 라너 신학의 결정판으로 간주된다.
1984년 3월 5일, 인스부르크에서 친구들, 제자들과 함께 여든 번째 생일 축하연을 가진 다음날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로 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바로 그달 3월 30일,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했다.
시신은 인스부르크 예수회 교회 지하묘지에 안장되었다.
– 저자: 파울 임호프
– 역자: 김태관
○ 십자가 영성과 신학 ―이냐시오 영성과 칼 라너의 신학을 중심으로 (The Spirituality and Theology of the Cross: According to the Spirituality of Ignatius of Loyola and the Theology of K. Rahner) _ 이규성 / Kyou-Sung Lee (서강대학교)
최근 가톨릭교회의 화두는 ‘새 복음화’(New Evangelization)이다. ‘새 십자가에 대한 이냐시오의 영성은 라너의 십자가 신학에서 단지 부분적인 계기가 아니라 라너 신학의 출발점이자 전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하느님의 육화적 비허에 대한 이냐시오적 기본 계기를 근본적으로 숙고하였으며 육화된 하느님의 완전한 인성을 강조하였다. 십자가에서 구원의 절정을 이룬 강생한 창조주 하느님은 죽음의 실존에 놓여 있는 인간의 자기인식의 근거이자 그 초월 지향의 궁극적 목적이 된다. 나아가서 십자가에 이르는 강생을 통해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를 구원론적․초월적 역사이게끔 한다. 따라서 십자가에 달리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을 초월하는 근거가 되며, 역사를 이끌어가고 변화시키는 가능성과 그 역사적 삶의 궁극적 목적을 선사받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십자가 사건은 인간에게 역동적 생명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에게 스스로를 반성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고, 인간 자신이 처한 죽음의 정황을 뛰어넘도록 힘을 부여한다. 하느님은 인간의 지성으로는 다 파악할 수 없는 신비이기에 언제나 커져가는 존재이다(Deus semper maior). 인간은 경우에 따라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때로는 침묵하는 하느님을 신비롭게 경험하기도 한다. 십자가 사건을 통한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은 초월적 존재와 범주적 실존의 역동적 만남이다. 즉 인간이 된 하느님의 범주화된 초월성과 초월을 지향하는 인간의 범주성과의 비가역적인 만남의 사건인 것이다. 이러한 만남을 라너는 초월존재론적(transzendentalontologisch)이자 그와 동시에 범주역사적(kategorialgeschichtlich)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면에서 그의 십자가 신학은 초월실존적 십자가 신학(Existentiale Kreuzestheologie)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항상 식별하고 궁극적인 목적을 위하여 구체적인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실행하라는 로욜라의 이냐시오의 영성에 상응한다.
The spirituality of the cross of Ignatius of Loyola is simply not a part of the theology of cross of Karl Rahner, but the starting point and the whole itself in his theology. He reflected on the Kenosis of the divine incarnation, which lies at the core of Ignatian spirituality and emphasizes the full humanity of the incarnated God. The Creator God, who has culminated his redemption through the cross, is the basis of self-awareness and ultimate goal of the human being who stands before death as his existential limit and is at the same time oriented transcendentally. Furthermore, through the incarnation God makes the history of human being a salvific and transcendental one which reaches to the cross. To meet Jesus Christ, Son of God, who is crucIfied, is the ground for human to transcend oneself. It also provides the ultimate life-view and potential for human to change history and lead it. In this sense, we can say that the cross provides the dynamics of life. It gives human beings the criterium to reflect on themselves and potential to go beyond existential death. For Rahner, God is always so much greater(Deus semper maior) than human intelligence can grasp. God is always mystery. Therefore, a human being sometimes experiences God as one who keeps silence even when he meets the crucified Jesus Christ, Son of God. The encounter between God and human beings through the cross is the dynamic encounter between transcendental Being and categorial existence. It is the irreversible encounter event between the categorized transcendence of incarnated God and the category of human beings who are oriented to transcendence. Rahner calls this kind of encounter ‘transcendentalontological’ and at the same time ‘categorialhistorical’. In this respect his theology of the cross can be called ‘existential crucifixtheology’. This theological position corresponds to the spirituality of the cross of Ignatius of Loyola, who teaches us to deliberate and discern in specific circumstances and to choose the concrete way of life for the ultimate goal.
○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Sanctus Ignatius de Loyola (또는 이냐시오 데 로욜라)
• 1491년 10월 23일 ~ 1556년 7월 31일
• 축일 7월 31일
스페인 바스크 귀족 가문의 기사이자 (1537년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의 은수자이자 사제, 신학자이다. 또한 그는 예수회의 창립자이자 초대 총장이기도 하다.
이냐시오는 가톨릭 개혁 시기에 특출난 영적 지도자로 급부상하였다. 가톨릭교회에 대한 그의 충성은 가톨릭교회의 권위와 교계제도에 대한 절대적인 순명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냐시오 또는 이니고 로페즈 데 로욜라는 오늘날의 바스크에 해당하는 스페인 아즈페이티아의 로욜라 성에서 영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냐시오라는 이름 뒤에 붙는 ‘데 로욜라’(de Loyola)는 그가 태어난 로욜라의 바스크 지역을 가리킨 것이다.
청년 시절의 이냐시오는 군사 훈련과 자신의 명성을 쌓아올리는 일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 17세에 군대에 입대한 그는 몸에 딱 붙은 바지와 부츠를 입고, 허리춤에는 장검과 단검을 차고, 어깨에 달린 긴 망토를 휘날리며 거들먹거리면서 활보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그는 1521년에 회심할 때까지 다른 사람들과 빈번히 다툼을 벌이곤 하였다.
1509년, 이냐시오는 나헤라 공작 안토니오 데 라라와 나바라 총독의 군대에 자원 입대하였다. 그는 천부적인 외교적 수완과 뛰어난 지도력으로 나헤라 공작에게 큰 도움을 준 공로로 기사 작위를 받았다. 나헤라 공작의 지휘 아래 이냐시오는 부상 없이 많은 전투에 치렀다.
1521년 팜플로나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그는 회복을 위해 병상에 누워서 치료하는 동안 여러 가지 교회서적을 탐독하면서 깊은 회심을 하게 되었다. 특히 작센의 루돌프가 쓴 《그리스도의 생애》를 읽고 그는 지금까지의 군인 생활을 청산하고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같은 위대한 영적 지도자의 본보기를 따라 여생을 하느님을 위한 일에 헌신하기로 다짐하였다.
1522년 3월 이냐시오가 몸을 추스르고나서 몬세라트의 성모 성당을 방문하였을 때,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환시를 체험하였다. 이후 그는 고행의 복장을 하고 만레사에 있는 깊은 동굴 안에 들어가 머물면서 기도와 극기로 1년간의 세월을 보냈다. 또한 그는 고행과 문전걸식을 하며 가시 돋친 허리띠를 두르고 연일 단식을 하였다. 이와 같은 명상 생활을 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영신수련”이다.
1523년 9월, 이냐시오는 성지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그곳에 머무르고자 하였으나, 당시 예루살렘 성소들을 관리하였던 프란치스코회원들이 받아들여주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유럽으로 돌아왔다.
1524년부터 1537년까지 이냐시오는 스페인과 파리에서 신학과 라틴어, 인문학 등의 공부에 전념하였다. 이냐시오와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은 청빈과 순결, 순명을 맹세하며 결집하였다.
1539년 이들은 예수회를 조직하였다. 예수회의 주요 창립 멤버였던 이냐시오는 1541년 4월 8일 예수회의 초대 총장으로 선출되었으며, 포교 활동을 통해 교황에게 봉사하였다. 이냐시오는 영적 지도자로서 명성이 높았다. 그는 여생을 로마에서 보내며 개신교 종교 개혁에 대한 대응책으로 가톨릭개혁을 정력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는 자신의 동료들을 유럽 전역에 선교사로 파견하여 학교와 대학원, 신학교를 세우도록 하였다. 예수회는 가톨릭 개혁의 주요 요소가 되었다.
이냐시오는 당시 로마에서 유행하였던 말라리아의 일종인 로마 열병에 걸려 1556년 7월 31일 로마에서 선종하였다.
1609년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622년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1922년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영신수련과 피정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지정하였다. 이냐시오는 또한 군인들과 예수회원, 바스크 지방, 기푸스코아 주, 비스카야 주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 이냐시오 데 로욜라 ‘그리스도의 영혼’ (Alma de Christo)
Alma de Cristo, santifícame.
Cuerpo de Cristo, sálvame.
Sangre de Cristo, embriágame
Agua del constado de Cristo, lávame.
Pasión de Cristo, confórtame.
iOh mi buen Jesús, óyeme!
Dentro de tus llagas, escóndeme.
No permitas que me aparte de Ti.
Del maligno enemigo, defiéndeme.
En la hora de mi muerte, llámame.
Y mándame ir a Ti
Para que con tus santos te alabe
Por los siglos de los siglos. Amén
그리스도의 영혼은 저를 거룩하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몸은 저를 구원하소서.
그리스도의 피는 저를 취하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늑방의 물은 저를 씻어주소서.
그리스도의 수난은 저에게 힘을 주소서.
오, 선하신 저의 예수님,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예수님!
당신의 상처 속에 저를 숨겨주시고
당신을 떠나지 않게 하시며
사악한 원수에게서 지켜주소서.
제가 죽을 때에 불러주시어
당신께 오라 명하시고
당신의 성인들과 더불어
영원토록 당신을 찬미하게 하소서 아멘.
○ 이냐시오 (Ignatius)
성 이냐시오는 1491년에 에스파냐 기푸스코아 (Guipuzcoa) 지방의 아스페이티아 (Azpeitia) 읍 위쪽의 로욜라 성에서 아버지 벨트랑 아녜스 데 오네스 이 로욜라와 어머니 마리아 사엔스 데 리코나 이 발다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세례명은 이니고이다. 그는 1506년에 당시 귀족 집안의 관습대로 에스파냐의 왕실 재무상인 후안 벨라스케스 데 쿠에야르의 집에서 위탁 교육을 받았다. 그는 후에 이때부터 자신이 방탕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했다고 고백하였다. 그는 명예를 얻으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머리와 옷 등 외모에 관심을 기울이며 허영과 사치를 일삼았다. 벨라스케스가 사망한 후인 1517년에 성 이냐시오는 군에 입대하였다.
1521년 나바라 (Navarra)의 팜플로나 (Pamplona)에서 프랑스군과의 교전 중에 다리 부상을 입고 그의 생애에 있어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성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그를 치료해 주었고, 로욜라의 가족들에게 후송해 주었다. 부상으로 인한 치료를 마치고 회복기에 접어들자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그는 평소 즐기던 낭만적인 기사 이야기를 실은 책을 읽고 싶어 하였다. 하지만 성 안에 그러한 책은 없었고, 대신 가족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삶에 관한 책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책을 읽어 가면서 기사로서의 공상들이 자신을 황폐하게 만들고 아무런 만족도 주지 못하는 반면, 성인들의 모범을 따르는 삶 속에 참된 기쁨과 평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내면적인 체험을 할 즈음에 그는 아기 예수를 안고 계신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체험하였다. 이 환시에서 그는 크나큰 위안을 받았고 지난날의 생활 전체, 특히 육을 따르던 행실에 대해 심한 혐오감을 느꼈다. 이후 그는 회심의 길로 들어섰다. 회심 후 로욜라를 떠난 성 이냐시오는 1522년 3월 25일 몬세라트 (Monserrat) 산에서 약 15km 떨어진 만레사 (Manresa) 마을 근처의 동굴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기도와 극기와 명상에 몰입하였으며, 구걸로 생계를 꾸려갔다. 평화를 얻으려던 그는 오히려 자신의 지난 죄들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면서 고행을 하였다. 그의 저서로 유명한 “영성수련” (Exercitia Spiritualis)은 바로 이 시기에 기본 골격이 형성되었다. 이 당시 성 이냐시오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기도와 보속을 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1523년 2월에 시작된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은 그가 각오했던 것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예루살렘 순례 후 1524년 3월에 바르셀로나 (Barcelona)로 되돌아왔다. 회심 이후 약 11년 간 그는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라틴어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1526년에는 알칼라 대학, 1527년 살라망카 (Salamanca) 대학에서 공부를 하다가 1528년 여름에 파리(Paris)로 학교를 옮겼다. 그곳에서 1535년 3월 14일 석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건강의 악화로 1535년 봄 에스파냐로 돌아가 요양하였다.
성 이냐시오의 연학 시기는 수많은 시련도 있었지만 동시에 동료들을 규합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뜻을 따르는 동료들을 파리에서 만났다. 즉 사부아 출신인 성 베드로 파브르 (Petrus Faber, 8월 2일), 나바라 (Navarra) 출신인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우스 (Franciscus Xaverius, 12월 3일), 에스파냐 사람인 라이네스 (J. Laynez)와 살메론 (A. Salmeron)과 보바디야(N. Bobadilla), 포르투갈인 로드리게스 (S. Rodriguez) 등이다. 이들은 성 이냐시오처럼 외적 고행, 구걸, 단식, 맨달로 다니기 등으로 단련하였다. 1534년 8월 15일 그들은 몽마르트르 (Montmartre) 수도원의 순교자 성당에서 가난과 정결 그리고 공부가 끝나는 대로 예루살렘으로 가겠다는 세 가지 서약을 하였다. 하지만 건강의 악화로 고향으로 돌아온 성 이냐시오는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1537년 1월 베네치아(Venezia)에서 9명의 동료들과 모였으나, 당시 터키와의 전쟁으로 가지 못하고 1537년 6월 24일 동료들과 함께 그곳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1537년 겨울 성 이냐시오는 동료 성 베드로 파브르와 라이네스와 함께 교황을 만나기 위해 로마 (Roma)로 갔다. 로마 근교의 라스토르타 (La Storta)라는 마을의 경당에서 성 이냐시오는 환시를 체험하였다고 한다. 그는 성부께서 그를 예수 그리스도와 한 자리에 있게 해주시는 환시를 보았는데, “내가 로마에서 너희에게 호의를 보여주리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한다. 성 이냐시오와 동료들은 자신들을 ‘예수회’ (예수의 동반자라는 뜻)라 불렀으며, 교황 바오로 3세 (Paulus III)는 이들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주었다. 사실 그때까지 장상, 규칙, 전통 없이 열심히 생활하던 성 이냐시오와 그의 동료들은 1540년 9월 27일 예수회 창립을 확인하는 교황의 교서를 통해 정식 인가를 받았다. 이듬해 4월 성 이냐시오는 초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4월 22일에 그와 동료들은 로마의 바오로 대성전에서 장엄서원을 하였다.
예수회는 즉시 선교 지역으로 나갔고, 수도원과 학교, 대학교, 신학교 등을 전 유럽에 세웠으며, 교육과 지적인 분야에서 그들의 탁월한 능력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에 성 이냐시오와 동료들이 세운 세 가지 목표는 교육과 자주 성사를 받음으로써 교회를 개혁하고, 선교지에서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며 이단과 싸운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예수회 활동의 뿌리가 되었다. 성 이냐시오는 1555년 여름 로마에서 열병에 걸려 7월 31일 세상을 떠났다는 1609년 12월 3일 교황 바오로 5세 (Paulus V)에 의하여 시복되었고, 1622년 3월 12일에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함께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 (Gregorius XV)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그의 시신은 로마에 있는 예수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는 피정과 영성수련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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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306-3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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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만 키흘레 저, 이규성 역, 로욜라의 이냐시오, 왜관(분도출판사), 2010년.
아스트라인 저, 박갑성 역, 성 이냐시오, 서울(가톨릭출판사), 2000년.
요셉 봐이스마이어 외 저, 전헌호 역, 교회 영성을 빛낸 수도회 창설자: 근세교회 – ‘이냐시오 데 로욜라와 예수회’, 서울(가톨릭출판사), 2002년, 17-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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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마틴 저, 성찬성 역, 나의 멘토 나의 성인 –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로욜라의 이냐시오’, 서울(가톨릭출판사), 2012년, 113-157쪽.
조지프 틸렌다 저, 박병훈 편, 예수회 성인들 – 예수회 고유미사에서 기념하는 성인과 복자의 약전, 서울(도서출판 이냐시오영성연구소), 2014년, 149-163쪽.
최익철 저, 우표로 보는 교회를 빛낸 분들 –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서울(으뜸사랑), 2014년, 168-173쪽.
칼 라너/파울 임호프 저, 김태관 역, 로욜라의 성이냐시오, 서울(바오로딸), 1993년.
페르디난트 홀뵉 저, 이숙희 역, 성체의 삶을 위한 성체와 성인들 –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 서울(성요셉출판사), 2000년, 213-220쪽.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9권 – ‘이냐시오, 로욜라의’,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2년, 6940-6942쪽.
헤수스 알바레스 고메스 저, 강운자 편역, 수도생활 역사 III – ‘성 이냐시오 로욜라와 예수회’, 서울(성바오로), 2005년, 67-94쪽.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성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서울(성바오로), 2002년, 186-188쪽.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