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롱펠로 시선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 / 지만지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4.6.15
19세기 미국에서 대중적인 인기와 명성을 누렸던 롱펠로는 일반 대중의 삶을 노래하며, 인간이 현실에서 겪는 문제들을 잘 헤쳐 나가도록 격려한다.
이 시들은 미국에 국민문학을 구현하고자 했던 롱펠로의 열망을 반영한 것으로, 당대에 떠오르던 민주주의의 개념과 함께 미국인들의 삶과 이상을 노래하고 있다.

○ 목차
해설
지은이에 대해
인생 찬가
잃은 것과 얻은 것
화살과 노래
마을 대장장이
안락의자에서
가을
겨울 숲
눈송이
추수하는 사람과 꽃
하나님의 땅
증인들
연인의 바위
변했구나
하지 않은 채 남겨 둔 일
부러진 노(櫓)
벨리사리우스
초서
송고 강
달빛과 대낮
밤에게 보내는 찬가
시인들
노래하는 사람들
시인과 시인의 노래
눈[雪]의 십자가
별빛
바다의 소리
그림자
케임브리지에 있는 교회 묘지에서
뉴포트의 유대인 공동묘지
열려 있는 창문
밀턴
어린아이들
파도가 일어나고, 파도가 가라앉는다
해 뜨는 언덕에서
만남
비 오는 날
하루가 가고
갑옷 입은 해골
여행의 한가운데서
인생의 잔
밤
다리
새벽
키츠
제야의 미사
체념
황혼
잠
추석 보름달
2월의 오후
소등령
시냇물과 파도
첫 수확 후 두 번째 자라난 풀
신기루
꼼짝 못하고
마음속의 가을
비가
여름비
잃어버린 내 청춘
신생(新生)
천사들의 발걸음
5월이 늘 있는 것은 아니니
신곡
이름 없는 묘
스프링필드의 군수품 창고
두 개의 강
바닷가에서의 여름날
찰스 강에게
셰익스피어
4월의 날
옮긴이에 대해

○ 저자소개 :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존 앨든(John Alden)의 후손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Henry Wadsworth Longfellow)는 1807년 2월 27일, 당시에는 미국의 매사추세츠 주의 일부였던 메인의 포틀랜드에서 변호사의 여덟 명의 자식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여섯 살 무렵부터 매우 학구적이고 라틴어를 능숙하게 구사함으로써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열세 살 때 처음으로 그는 시를 써서 지역신문에 발표를 했으며, 그 후로도 계속 시를 써서 신문이나 문학잡지에 기고했다.
열다섯 살 때, 그는 아버지가 이사로 있던 새로 생긴 보든대학(Bowdoin College)에 입학해 그곳에서 너새니얼 호손을 만나 그와 평생을 친구로 지내게 되었다. 또한 그는 1825년에 이 대학을 졸업하고 이 대학의 현대어 담당 교수직을 맡게 되는 행운을 얻게 되었는데 이를 위해 그는 1826년 유럽으로 건너가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등을 공부했다. 그의 유럽 여행은 언어 공부가 주된 목적이었지만, 이 여행은 그에게 유럽의 문학, 특히 유럽의 낭만주의 문학을 많이 읽고 접할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그는 ≪해외로(Outre-Mer: A Pilgrimage Beyond the Sea)≫를 집필하기도 했다.
롱펠로는 1829년 유럽 여행에서 돌아와 1835년까지 보든대학에서 유럽의 현대어를 가르쳤다. 1835년 그는 언어를 연마하기 위해 다시 유럽으로 갔다. 이 두 번째 유럽 여행에서 그는 독일에서 낭만주의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바친 얼마간을 제외하고는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를 여행하며 자유로이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이 여행에서 첫 번째 아내 메리 포터(Mary Storer Potter)가 유산으로 고통을 받다가 사망하는 불운을 당했다. 이로써 롱펠로의 첫 번째 아내는 4년간의 불행한 결혼 생활 끝에 스물두 살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롱펠로는 유럽 여행에서 보스턴의 재력가의 딸인 젊은 여인 프랜시스 애플턴(Frances Elizabeth Appleton)과 결혼을 하고,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결혼 선물로 받은, 케임브리지의 브래틀 가(Brattle Street)에 있는 크레이기 하우스(Craigie House)에 정착했다.
두 번째 유럽 여행을 마치고, 1836년에 미국으로 돌아온 롱펠로는 하버드대학의 프랑스어 및 스페인어 교수가 되었으며, 이때부터 시인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해 케임브리지 지역 문학계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는 1839년에 괴테의 낭만주의적인 작품 ≪빌헬름 마이스터(Wilhelm Meister)≫를 모방한 소설 ≪히페리온(Hyperion)≫과 첫 시집 ≪밤의 목소리(Voices of the Night)≫를 출간했는데, 이 두 작품은 한계를 넘어서는 인간의 불굴의 투지를 감상적으로 그린 낭만주의적인 작품이었다. 그는 1841년에 두 번째 시집 ≪발라드와 기타 시(Ballads and Other Poems)≫를, 1842년에는 ≪노예에 관한 시(Poems on Slavery)≫를 출간해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18년간 하버드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설화 시 <에반젤린(Evangelin: A Tale of Acadia)>과 소설 ≪캐버너(Kavanagh)≫를 썼지만, 가르치는 일이 시를 창작하는 데 부담이 된다고 생각해서 1855년 교수직을 사임했다. 그 후에 그는 ≪하이어워사의 노래(The Song of Hiawatha)≫, ≪마일스 스탠디시의 구애(The Courtship of Miles Standish)≫, ≪노변 여인숙 이야기(Tales of a Wayside Inn)≫를 써서 뉴잉글랜드의 과거에 대한 향수를 그림으로써 발라드 시인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이 작품들은 19세기 미국인들의 이상과 꿈을 차분히 그려 내는 점잖은 전통문학의 대표작이 되었다.
1861년에 롱펠로는 또 한 번의 불운을 겪게 되는데, 집에 화재가 나서 부인이 불에 타 죽고, 그는 부인을 구하려다 심한 화상을 입게 되었다. 이로써 롱펠로의 두 번째 아내는 14년간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 끝에 마흔네 살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 롱펠로는 아내를 잃음으로 인해 얻은 견딜 수 없는 비탄과 슬픔을 달래기 위해, 단테의 ≪신곡≫을 번역하는 데 전념하여 그는 단테의 ≪신곡≫을 번역해 미국인들에게 최초로 알린 사람이 되었다. 이 번역을 마친 후, 그는 세 번째로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에서 학위도 받고 빅토리아 여왕을 알현하는 영광도 누렸다. 그리고 1882년 3월 24일 그가 죽은 후에는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그의 흉상이 세워졌다.
- 역자: 윤명옥
충남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에서 존 키츠의 시에 대한 연구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캐나다와 뉴질랜드에서 시 창작을 공부했다. 국제계관시인연합 한국위원회 사무국장과 한국 시 영역 연간지 ≪POETRY KOREA≫의 편집을 맡았으며, 충남대학교, 홍익대학교, 인천대학교 등에서 강의했다. 영미 시와 캐나다 문학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전공 저서로 ≪존 키츠의 시세계≫, ≪역설·공존·병치의 미학 : 존 키츠 시 읽기≫가 있고, 우리말 번역서로 ≪키츠 시선≫, ≪디킨슨 시선≫, ≪내 눈 건너편의 초원≫, ≪나의 안토니아≫, 영어 번역서로 ≪The Hunchback Dancer≫, ≪Dancing Alone≫, ≪A Poet’s Liver≫ 등이 있다. 또한 허난설헌 번역문학상, 세계우수시인상, 세계계관시인상을 수상했으며, 한국과 미국에서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우리말 시집(필명 : 윤꽃님)으로 ≪거미 배우≫, ≪무지개 꽃≫, ≪빛의 실타래로 풀리는 향기≫, ≪한 장의 흑백사진≫, ≪괴테의 시를 싣고 가는 첫사랑의 자전거≫가 있고, 미국에서 출간된 영어 시집(필명 : Myung-Ok Yoon)으로 ≪The Core of Love≫, ≪Under the Dark Green Shadows≫가 있다.
○ 책 속으로
In the world’s broad field of battle,
In the bivouac of Life,
Be not like dumb, driven cattle!
Be a hero in the strife!
세상의 드넓은 싸움터에서,
‘인생’의 야영지에서,
말없이 쫓기는 짐승이 되지 마라!
싸움에 이기는 영웅이 돼라!

○ 출판사 서평
19세기 미국에서 대중적인 인기와 명성을 누렸던 롱펠로는 일반 대중의 삶을 노래하며, 인간이 현실에서 겪는 문제들을 잘 헤쳐 나가도록 격려한다. 이 시들은 미국에 국민문학을 구현하고자 했던 롱펠로의 열망을 반영한 것으로, 당대에 떠오르던 민주주의의 개념과 함께 미국인들의 삶과 이상을 노래하고 있다. 롱펠로의 작품은 삶 속에서 다양한 경험들을 겪으며 살아가는 인간들인 우리가, 같은 범주 안에 있는 서로를 느끼고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다.
- 대중의 사랑을 받는 시
롱펠로는 대중적이고 국민적인 시를 써서 이를 통해 자신이 인지하고 깨달은 모든 것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통해 일반 독자들에게 교훈을 주어 많은 사람들을 깨우치고 계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당대에 그는 대단한 인기를 얻고 많은 영광을 누렸다. 20세기에 오면서, 그의 대중성, 혹은 통속성과 교훈성에 대한 비판이 있기도 했지만 여전히 한편에서는 롱펠로의 시가 취향인 독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 용기와 위안을 주는 진리
인간과 인간 삶이라는 커다란 범주 안에서 공통적으로 느끼고 겪고 이해하는 부분들이 있다. 롱펠로는 바로 이런 삶의 공통분모를 찾아 시를 통해 잘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부분들은 얼핏 보기에 통속적이고 대중적인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인간인 우리, 즉 희로애락을 경험하며 나아가야 하는 인간의 삶 속에서 언젠가는 죽어야만 하는 운명에 처한 인간의 실존을 감내해야만 하는 단순하고 소박한 존재인 우리에게 중요한 기본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그는 많은 사람들이 현실에서 겪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 즉 슬픔, 근심이나 걱정, 비탄, 혹은 좌절과 절망 등을 시로 표출해 낸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시는 결코 부정적이거나 염세적으로 흐르지 않으며, 낙천주의적이고 이상적인 경향을 보여 준다. 인간의 건강한 의지와 힘찬 의욕, 죽음에 대한 슬픔과 그 슬픔을 뛰어넘는 영원을 향한 열망들이 그의 시를 한껏 고양시키며 독자를 긍정적인 세계 속으로 끌고 가는 힘을 시 속에 담아 건전한 인생관으로 이끈다. 이렇듯 그의 작품은 일반 대중을 격려하는 데서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은 그가 시대를 초월해 대중에게 여전히 사랑을 받는 이유가 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