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루이스 칸 : 존재의지의 표상과 구축
마쓰쿠마 히로시 / 르네상스 / 2005.8.5
루이스 칸은 20세기를 대표하는 건축가의 한 사람으로, 모더니즘을 둘러싼 동시대의 건축적 조류와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면서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늘 초연한 자세를 유지한 그는 주옥같은 작품을 많이 남겼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건축세계는 더욱 높게 평가되고 있고, 그 영향력 또한 더욱 커지고 있다. 이 책은 칸 건축이 탄생되는 계기가 되었던 「예일 대학 아트갤러리」, ‘서브드 스페이스 / 서번트 스페이스’라는 그의 주제가 결실을 맺은 「솔크생물학연구소」, 고대의 폐허와 같은 건축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투명성을 실현시킨 「킴벨미술관」 등의 작품을 구체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난해하게만 여겨지던 그의 건축 이상의 핵심을 찾아나가는 답사기이다.
– 세계건축산책 시리즈의 네 번째 권. 루이스 칸 건축에 대한 해설서인 동시에 답사 길잡이 역할을 하는 지침서
칸 건축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던 예일 대학 아트갤러리, ‘서브드 스페이스/서번트 스페이스’라는 그의 주제가 결실을 맺은 솔크생물학연구소, 고대의 폐허와 같은 건축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투명성을 실현시킨 킴벨미술관 등의 작품을 면밀하게 분석했다.
총 14개의 작품을 분석하기 전에 루이스 칸의 탄생과 미국으로 이주한 후 필라델피아에 정착한 후의 삶을 조명했다. 각 작품에 관한 비평은 기존에 나와 있는 루이스 칸 연구서를 참조하여 주요 건축 개념과 중심 주제들을 포착했다. 또한 답사를 통해 각 건물들에서 이 주제들이 어떻게 구체화되었는지를 살폈다. 책의 말미에는 각 건물들의 구체적인 약도를 수록하고 찾아가는 길, 답사 가능 여부 등의 여러 정보를 정리했다.
○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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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의 탄생’ 이전
1. 구축의 시작 _ 조용한 혁명 예일 대학 아트갤러리
2.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필라델피아 교통 연구
3. 칸 철학의 ‘원형’ 등장 유태인 커뮤니티 센터, 바스하우스
4. 구체화된 ‘구축의 질서’ 펜실베이니아 대학 리처드 의학연구동
5. ‘빛과 그림자’의 영감과 룸으로서의 ‘창’ 마가렛 에슈릭 주택
6. ‘중정’의 발견 솔크 생물학연구소
7. ‘모임’을 표현하고 ‘켜 구성’을 인식하며 제1 유니테리언 교회
8. 마을을 향해 열려 있는 건물 포트웨인 무대예술극장
9. 공간과 형태로 표상된 ‘공동성’ 브린모어 대학 어드먼홀
10. 공간의 위계성을 벗어나 ‘병치’로 노만 피셔 주택
11. 벽돌과 콘크리트로 된 ‘고대 폐허의 원초성’ 필립 엑서터 아카데미 도서관
12. 구축된 ‘중성적인 존재로서의 건축’ 킴벨 미술관
13. ‘내부공간성’을 지양하고 일상적인 표정을 연출하며 베스엘 회당
14. 파사드와 내부공간에 조성된 거리 예일 대학 영국미술연구센터
칸의 교훈
후기
루이스 칸 약력 / 답사 길잡이 / 참고문헌
○ 저자소개 : 마쓰쿠마 히로시
1957년 효고현 니시노미야시 출생. 1980년 교토 대학 공학부 건축학과 졸업. 마에가와쿠니오 건축설계사무소 입사. 1992년 ‘루이스 칸 일본전’ 개최기념 현상논문 최우수 입선. 현재 마에가와 건축설계사무소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지은 책으로 『재독 / 일본의 근대건축』이 있다.
– 역자 : 김인산
서울시립대학교 건축공학과 졸업. 동 대학원 건축학석사. 일본 요코하마 국립대학 건축공학과 유학. 현재 자유기고가.
– 역자 : 류상보
서울시립대학교 건축공학과 졸업. 동 대학원 건축학 석사. 일본 요코하마 국립대학 건축공학과 유학. 현재 (주)에이텍 종합건축사사무소 근무 중.
○ 책 속으로
칸에게 중요한 또 하나는, 자신이 살고 있는 ‘근대’라는 시대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즉 시대를 초월하여 면면히 이어지는 의미를 만들어 내는 건축의 근원성을, 근대라는 시대에서 어떻게 지속시켜 나갈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며 고민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과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변하지 않는 것을 지속시켜 나가기 위해서 변하는 것을 어떠한 건축적인 방법을 통해 처리할 것인가, 또는 근대가 새롭게 끌어안게 된 것을 어떻게 근대 이전의 것과 정합整合된 조화로운 형태로 통합시킬까라는 사유를 진척시키며 실마리를 잡았던 것이다. — p.25
예를 들어 어느 연구실에서 한 연구자가 밤늦게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면 가까운 곳에서 불빛이 켜진 다른 연구실이 보여서 ‘아, 저기 있는 사람들도 아직 열심히 연구하고 있구나’라며 격려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연출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연구실 하나하나가 마치 한 채 한 채의 주거처럼 각각이 고유한 표정으로 설계되어, 자연과 ‘마을의 불빛’과도 같은 온화한 분위기가 감돈다. 따라서 연구실이 복도를 따라 일렬로 늘어서 있는 종래의 건물과는 달리 독특한 투명감이 느껴지는 것 같다. 이러한 특징은 건물 설계의 중심 테마를 이곳에서 일하는 연구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개별성을 분명히 표현하는 데에 두고, 하나의 건물을 만드는 것은 하나의 가로를 만드는 일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 행위라는 그의 건축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 p.55
중앙의 보이드 공간과 천창, 연결부분, 계단, 출입구 등의 공공적 성격을 가진 영역들이 전체 건물의 직교좌표계에 놓여 있는 데 반해 사적인 성격을 가진 개별 실들은 45도로 틀어진 좌표계에 놓여져 있다. 방의 성격을 확실하게 부여함으로써 그리드를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이 기숙사에서 실현된 공간의 설계 의도도 알기 쉽다. 즉, 세 곳의 비어 있는 중심 공간은 각각 한 집의 ‘현관’, ‘난로가 있는 거실’, 그리고 ‘식당’에 해당되며, 이곳에서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학생들이 마치 같은 지붕 아래에서 사는 한 가족과 같은 느낌을 주는 공간으로 배치되어 있다. — p.102
○ 출판사 서평
저자는 총 14개의 작품을 분석하기 전에 루이스 칸의 탄생과 미국으로 이주한 후 필라델피아에 정착한 후의 삶을 조명해본다. 그리고 유럽 여행을 다녀온 후 고대와 근대 사이에 대해,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사이에 대해 칸이 고민하고 내린 결론을 부각시킨다. 각 작품을 다루면서 단순한 건축 답사 감상문이라기보다 구체적이고 면밀한 건축 분석, 혹은 건축 비평의 방식으로 서술해 나간다. 기존에 나와 있는 많은 루이스 칸의 연구서를 참조하여 중요 건축 개념과 중심 주제들을 포착하고, 답사를 통해 각 건물들에서 이 주제들이 어떻게 구체화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이 주제들은 ‘사물-룸-주거-건축 -거리-도시’ 순으로 전개된다.
루이스 칸은 방의 성격에 따라 구조와 재료를 선택하여 그 차이와 구축과정을 드러냄으로써 사물의 질서를 존중하고, 창문 주변 공간 하나도 사소한 설비 공간 하나도 고유한 룸(방)으로 정의함으로써 공간의 질서를 통찰한다. 이러한 방들의 사회인 건축 내부 공간에 거리라는 요소가 삽입됨으로써 건축은 또 하나의 도시로 거듭난다. 고대 건축이나 전통 건축의 형태적, 공간적 단편적 잔상들과 독창적인 형태와 공간을 자아내며 활용된 현대 기술이 융합된 칸 건축의 일면도 책의 여러 곳에서 지적된다.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각 건물들의 구체적인 약도를 제공하고, 찾아가는 길, 답사 가능 여부 등 답사시에 필요한 여러 가지 정보를 정리해 주고 있어, 이 한 권의 책은 루이스 칸 건축의 자세한 해설서이면서 동시에 답사 길잡이 역할을 하는 지침서가 되기에 충분하다.
○ 침묵과 빛의 건축가, 루이스 이저도어 칸 (Louis Isadore Kahn, 1901 ~ 1974)
루이스 이저도어 칸(Louis Isadore Kahn, 1901년 2월 20일 ~ 1974년 3월 17일)은 펜실베니아주(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활동한 세계적인 건축가이다. 필라델피아의 여러 회사에서 경력을 쌓은 후 1935년에 자신의 회사를 설립하였다. 1947년에서 1957년까지는 개인의 작업을 계속하면서 건축 비평가와 예일 건축대학의 건축과 교수직을 담당하였다. 1957년부터 사망 전까지는 아이비리그 중 하나인 펜실베니아 대학(유펜)의 디자인 대학교수로 건축디자인을 가르쳤다. 유펜에는 그가 디자인한 건축물이 남아있으며, 펜디자인에는 루이스 칸 아카이브 공간이 있다. 루이스 칸 아카이브에는 그의 스케치와 건축모형, 도면 등이 남아있다.
– 루이스 이저도어 칸 (Louis Isadore K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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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이체레이브 슈무일로프스키 (Itze-Leib Schmuilowsky)
.출생: 1901년 2월 20일, 에스토니아 쿠레사레
.사망: 1974년 3월 17일, 미국 뉴욕 뉴욕 펜실베이니아 역
.학력: 펜실베니아 대학 (–1924년)
.저서: Louis Kahn: Essential Texts, Louis I. Kahn : silence and light ; [Essay und Hörbuch] 등
.수상: AIA Gold Medal, Twenty-five Year Award, 로열 골드 메달 등
루이스 이저도어 칸 (Louis Isadore Kahn)은 미국 필라델피아 등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현대 건축가이자 모더니즘 건축 최후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현대 건축을 지배하던 모더니즘 사조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전통 건축에서 모티브를 얻어 창의적인 현대 건축으로 승화시켰다. 말 그대로 전통과 혁신을 실현시킨 몇 안되는 건축가이다. 특히 빛을 잘 이용해서 극적인 장면을 잘 나타내는 건축물을 많이 남겼다.
특이한 점은 인생 후반에 창작열기가 폭발하여 남은 20년 동안 질풍같이 걸작들을 남기다가 죽었다.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이 제정되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수상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좀 더 오래 살았다면 프리츠커상을 받는 것은 확실했다고 여겨질만큼 뛰어난 건축가였다.
* 생애
– 유년기
루이스 칸의 본명은 ‘이체-레이브 슈무일로프스키 (Itze-Leib Schmuilowsky)’로, 에스토니아 서부 사레마 섬의 쿠레사레 (Kuressaare)에서 태어났다. 그의 실제 생일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을 수 있는데, 이는 유대인이었던 그의 부친이 러일 전쟁에 징집될 것을 두려워하여 1906년에 미국으로 이민하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염려 때문인지, 그의 가족은 17번 이사를 했다. 흉터가 있는 에스토니아의 유대인 이민자였던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그 가족들은 연필을 살 수 없었으나 잔가지를 태운 목탄 막대를 만들어 루이스 칸이 그림을 그려 적은 돈을 벌 수 있었고, 후에는 무성영화에 곁들이는 피아노를 연주하였다. 그는 1914년 5월 15일, 귀화하여 시민이 되었다. 그의 부친은 1915년에 그들의 이름을 바꾸었다.
부친은 스테인드글라스 기사였고 모친은 하프 연주가였다. 피는 못 속이는지 어렸을 때부터 예술적 재능이 돋보여 음악가 혹은 화가가 되려고 하다가 건축을 공부하게 되었다.
어렸을 때 벽난로의 불에 데어 손과 얼굴에 큰 화상을 입었는데, ‘불꽃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불붙은 탄을 손으로 잡았기 때문이었다. 트라우마로 남을 법 하지만, 칸은 평생 불꽃의 따스함과 빛을 사랑했고, 그것들이 충만한 건축을 남겼다.
그는 에콜 데 보자르 방식의 대학교육을 받았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르 코르뷔지에등의 유럽의 모더니즘 건축가의 작품에 보다 큰 영향을 받았다. 졸업 후 20년간 건축교수를 맡기도 했다.
학부를 졸업한 루이스 칸은 나름대로 뛰어난 건축가이긴 했지만, 이 때만 하더라도 세계적인 명성과는 좀 거리가 있는 상황이었다. 1900년부터 195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모더니즘 건축의 전설들이 활동하고 있던 시기였고, 루이스 칸은 그에 비하면 평범했다.
– 모더니즘 건축을 넘어서다
펜실베니아와 예일 대학 외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교수에 불과했던 그는 1955년 논문 하나를 발표한다. ‘오더와 디자인'(Order & Design)이라는 이름의 이 글에서 시작된 그의 건축철학은 1960년 이후의 세계 건축계의 움직임을 촉발하게 된다.
.오더(Order)란 “~가 되려고 원하는” 이상이며 디자인(Design)이란 특정한 상황의 결과로서 생긴 것을 의미한다.
.공간은 ‘봉사받는 공간’ 과 ‘봉사하는 공간’으로 나뉜다.
.기하학적 형태란 그저 딱딱한 미니멀리즘과는 다르다. ‘Form’을 최대한으로 표현해 주는 물리적 속성을 발견하고 Form의 의지에 명확한 실체를 주는 것을 뜻한다. 또한 아름다움이란 ‘놀라움’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본질에 대한 질문은 숙련된 전문가보다 미숙한 구도자의 속에서 생긴다.
이는 모더니즘 건축이 가졌던 단점과 한계를 명백하게 짚어주며 그를 뛰어넘은 것인데,
.모더니즘 건축에서는 창조에 대한 기본 철학이 정립되지 못했다. 애초에 과거의 창조 방식을 싸그리 부정하면서 새로운 것을 찾고자 했었기 때문에 가진 한계였던 것이다. 칸은 이러한 철학을 정립했다.
.기능주의와 미니멀리즘은 기존의 건축체계를 부수는 데는 성공했지만 새로운 건축 위계를 정립하지는 못했다. 칸의 위계설정은 건축 뿐만 아니라 공간까지 아우르며 위계 문제의 해결 방향을 분명하게 제시했다.
.역사의 가치를 부정하던 시기에 칸은 역사적 건축(이집트, 로마, 그리스) 에 잠재하는 물질적인 존재성을 재발견한 것이다. 그러면서 묻혀져가던 미적이며 감성적인 가치를 건축에 다시 불어넣었다.
.모더니즘 건축가들의 엘리트주의에 한방 먹였다. 이후 건축가들은 보다 다양한 의견을 듣거나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등 다각적이며 민주적인 자세를 가지게 된다.
– 인생의 후반기
그야말로 질풍같이 달린다. 주요 작품들은 전부 다 이 시기에 나온 작품들이다. 그가 어떻게 이렇게 달라진 건축에 대한 생각를 바탕으로 걸작들을 남기게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추측은 물론 인생의 경험들이 무르익으며 위의 이론을 정립한 끝에 깨달음을 었었다는 것이지만, 다른 추측으로는 그리스, 로마, 이집트 등을 여행하면서 불멸의 고전 건축을 보며 인생의 기쁨과 건축에 대해 통달했다는 추측도 존재한다.
아무튼 그렇게 인생의 후반 20년 동안 커다란 명성을 얻게 된다. 그러나 경제적 감각도 부족했지만 평생 돈 되는 설계 의뢰를 마다하고 사람이 사는 환경에 도움이 되는 건축을 추구한 나머지 재산은 파산상태였다. 그럼에도 후학을 위해 교육에도 힘썼는데, 대학 강의를 위해 무리하게 서둘러 이동하다가 73세에 뉴욕의 펜실베이니아역 화장실에서 심장마비로 쓸쓸하게 죽었다. 당시에 루이스 칸은 옷도 남루하고, 신분을 증명해 줄 소지품이 아무것도 없어서 신원을 확인하는데 꽤나 애를 먹었다고 한다.
*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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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엄격한 펜실베이니아 대학에 있는 설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엄격한 Beaux-Arts 전통 하에 수업을 받았다. 1924년에 건축학 학사 과정을 마치고 도시 건축가인 John Molitor 사무실에서 수석 설계사로 일했다. 이 기간에 1926 Sesquicentennial Exposition의 디자인에 참여했다. 1928년에 칸은 유럽 여행을 하였으며 고전주의 또는 모더니즘의 그 어떤 성채보다 프랑스의 카르카손과 스코틀랜드의 성에서 보이는 중세풍 외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1929년 귀국한 후에 칸은 Paul Philippe Cret 사무실에서 일했으며, 필라델피아에 있는 Zantzinger, Borie and Medary 사무실에서 일하며 펜셀베니아 대학에 초기 스튜디오 비평을 기고한다. 1932년 칸과 Dominique Berninger은 인민주의자들의 사회적 의제와 유럽 전위파의 새로운 건축에 관심을 갖고 있는 회원들로 구성된 건축 연구 그룹을 만든다. 이 공동 연구에 참여하는 동안 공공 작업 관리로 대표되는 이전 공공 주택의 해체 계획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참여한다. 이 시기에 칸의 초기 공동 연구 중 가장 중요한 George Howe와 진행된다.
* 주요 작품
예일대 예술 전시장(Yale University Art Gallery, 1951 ~ 1953년) – 코넥티컷 뉴헤븐에 위치한다.
펜실베이니아대 리처드 의료 연구 연구소(1957 ~ 1965년) –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에 위치한다.
요나스 소크 연구소(1959년 ~ 1965년) – 회의 구역, 주거 구역, 연구소의 세 개로 구분된 캠퍼스로 지어질 예정이었으나, 두 개의 대등한 단위로 구성된 연구소 구역만이 실제로 지어졌다.
필립스 엑세터 아카데미(1965 ~ 1972년) – 뉴 헴프셔 엑세터에 위치한다.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Jatiyo Sangshad Bhaban, 1962 ~ 1974년) – 방글라데시 다카(Dhaka)에 위치한다.
킴벨 예술 전시관(Kimbell Art Museum, 1967 ~ 1972년) – 텍사스 포트워스에 위치한다.
예일 영국 예술 센터(1969 ~ 1974년) – 코넥티컷 뉴헤븐에 위치한다.ggg
인도 경영연구소(IIM Ahmedab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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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건축에 임하는 자세에 있어서 현대의 모더니즘 건축이 “형태는 기능에 따른다.”와 같은 결정론적인 태도에 의한 건축을 행하였다면, 1960년대의 칸의 출현 이후로 “형태는 인간의 기본욕구에 따른다.”라는 인간의 목적론적인 태도로의 변화를 가져왔다. 칸의 이러한 사고는 그 당시의 시대상이 기능적 근대주의가 팽배해 있을 때 나온 것으로 한 시대의 변혁을 의미하는 것이다.
칸은 모더니즘은 물론이고, 합리주의, 신고전주의, 심지어는 포스트모더니즘 건축가로도 분류될 수 있으나, 단순히 어떤 사조의 작가로 분류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이런 분류 이전에 칸은 그의 독특한 건축적 사고와 몇몇 작품으로 인하여 근대건축에서 현대건축으로의 전이적인 삶을 살았던 건축가로서 평가받고 있으며, 칸의 명성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두 시대에 걸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사회적으로 크게 격동하여 변화하는 시기에 속해 있으면서, 시대의 변화 사이에 있는 교량으로써 존재 한 것이다.
* 어록
“방 (room)은 건축의 시작이며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단위이다. 동시에 평면이란 방들이 그 속에서 서로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며, 독특한 빛을 가진 공간의 구조이다.”
“벽돌아, 너는 뭐가 되고 싶니?”
“나는 빛이란 모든 존재를 주는 것이라고 느끼고 있다.”
“나는 위대한 건물은 잴 수 없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며, 디자인 과정에서 ‘잴 수 있는 것’을 통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마지막에는 잴 수 없는 것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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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