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루이 15세 시대 개요
볼테르 / 한국문화사 / 2017.12.30
‘루이 15세 시대 개요’는 루이 14세 사후부터 루이 15세 사망까지의 프랑스만이 아니라 유럽 전체의 역사를 생생하게 기록했다는 점에서 볼테르의 대표적인 역사저술로 남아 있다. 루이 14세 사후의 유럽 정세,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1740~1747),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7년 전쟁(1756~1763년)을 중점적으로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18세기 중반 프랑스의 국내 상황 (오를레앙 공작의 섭정, 플뢰리 추기경의 내각, 루이 15세에 대한 암살 기도, 예수회 추방, 가톨릭교회와 고등법원의 갈등, 루이 15세 사망, 코르시카 합병, 부조리한 형사소송법 등)도 볼테르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문체로 기술하고 있다. 볼테르 자신이 살았던 시대인 루이 15세 시대, 특히 퐁트누아 전투를 비롯한 몇몇 전투에 대한 박진감 넘치는 묘사는 동시대의 다른 역사저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소중한 대목들이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자는 1000개가 넘는 주를 달았다.

○ 목차
1. 루이 14세 사후의 유럽
2. 유럽 풍경 속편 1. 오를레앙 공작의 섭정기. 로 또는 라스의 시스템
3. 유럽 풍경 속편 2. 뒤부아 추기경과 플뢰리 추기경.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양위
4. 두 번 폴란드 왕이 되었다 두 번 폐위당한 스타니수아프 레슈친스키, 1734년 전쟁, 프랑스에 합병된 로렌
5. 황제 카를 6세의 사망. 4대 강국의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헝가리 여왕이 자기 부친의 모든 국가에서 인정됨. 프로이센 왕의 슐레지엔 합병
6. 프랑스 왕은 프로이센 왕, 폴란드 왕과 연대하여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를 황제로 선출시킨다. 카를 알브레히트는 프랑스 왕의 국왕총대관이라고 선포되었다. 그의 성공과 급속한 파멸
7. 바이에른의 카를 알브레히트 황제의 성공과 급속한 몰락
8. 영국, 에스파냐, 사르데냐 왕, 이탈리아 국가들의 행동. 툴롱 전투
9. 콩티 공이 알프스 산맥의 통로를 확보하다. 이탈리아의 정치 상황
10.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7세의 새로운 불행. 데팅겐 전투
11. 루이 15세의 첫 번째 플랑드르 원정과 승전. 루이 15세는 플랑드르를 떠나 위협에 직면한 알자스를 구하러 간다. 그 사이 콩티 공은 계속해서 알프스의 통로를 열어 간다. 새로운 동맹들. 프로이센 왕은 다시 출전한다.
12. 프랑스 왕은 사경을 헤맨다. 그는 회복되자마자 독일로 진군한다. 왕은 프라이부르크를 포위 공격하러 간다. 한편 이미 알자스를 침략한 오스트리아군은 보헤미아를 구하러 가고, 콩티 공은 이탈리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13. 쿠네오 전투. 프랑스 왕의 지휘. 로마 부근에서 습격당한 나폴리 왕
14. 벨릴 원수 체포. 황제 카를 7세의 사망. 하지만 전쟁은 그로 인해 더욱 격렬해질 뿐
15. 투르네 공성전. 퐁트누아 전투
16. 퐁트누아 전투 속편
17. 독일의 상황.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된 토스카나 대공 로트링겐의 프란츠.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2세에게 패한 오스트리아와 작센 연합군. 드레스덴 점령
18.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정복 속편. 리에주 또는 로쿠(Rocoux) 전투
19. 돈 펠리페와 마유부아 원수의 승리, 그 뒤를 이은 최악의 패전들
20. 오스트리아군과 피에몬테군이 프로방스를, 영국군은 브르타뉴를 침략하다
21. 제노바의 봉기
22. 프랑스군이 참패한 에그질 전투
23. 플랑드르의 정복자이자 승리자인 프랑스 왕은 평화조약을 제안하지만 결실을 거두지 못한다. 네덜란드령 브라반트 정복. 상황에 의해 탄생한 네덜란드 총독
24.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왕자의 공격, 승리, 패배, 안타까운 불운
25. 찰스 에드워드 왕자의 모험 속편. 그의 패배와 불운, 그리고 지지자들의 불운
26. 프랑스 왕은 평화조약을 제안했으나 그 체결에 실패하고 라우펠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베르헌옵좀을 공격하다. 마침내 러시아군이 동맹군 지원을 위해 진군한다.
27. 앤슨 제독의 세계 일주
28. 루이부르(루이스버그) 공성전과 해전: 영국군이 획득한 막대한 전리품
29. 인도, 마드라스, 퐁디셰리. 라부르도네의 원정. 뒤플렉스의 행동 등
30. 엑스라샤펠(아헨) 조약
31. 1756년의 유럽 상황. 파괴된 리스본. 스웨덴에서의 모반과 형벌. 캐나다의 불길한 식민지 전쟁. 리슐리외 원수의 마오 점령
32. 독일 내에서의 전쟁. 오스트리아 왕가,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 프랑스에 맞서 싸우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기억할 만한 사건들
33. 기억할 만한 사건들 속편. 항복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영국군. 로스바흐 전투. 격변들
34. 세계 각지에서 불운에 빠진 프랑스군. 뒤플렉스 총독의 패배. 랄리 장군 처형
35. 프랑스의 패전들
36. 프랑스 내정. 1750년에서 1762년까지의 분쟁과 뜻밖의 사건들
37. 국왕 시해 시도
38. 포르투갈 왕 시해. 포르투갈에 이어 프랑스에서 추방된 예수회
39. 교황 클레멘스 13세의 칙서와 그 결과
40. 코르시카
41. 파리 고등법원 추방과 루이 15세의 사망
42. 법
43. 루이 15세 시대에 이루어진 인간 정신의 진보
미주
해제
역자 후기
인명 색인
연표
볼테르 연보

○ 저자소개 : 볼테르 (Voltaire, 본명 :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
18세기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시인, 극작가, 비평가, 역사가인 다재다능한 작가 볼테르 (필명)는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 (Franois Marie Arouet)’라는 이름으로 1694년 11월 21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난 볼테르는 열 살에 예수회가 운영하던 루이 르그랑 (Louis le Grand) 학교에 들어가는데, 이 학교에서 금세 두각을 드러내고 평생 이어갈 교유관계들도 형성한다. 한편,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대부 (代父)인 샤토뇌프 신부가 그를 쾌락주의적이고 무신론적인 귀족들과 시인들이 모이는 ‘탕플 (Temple)’이라는 문학 살롱에 데리고 간다. 17세에 루이 르그랑 학교를 떠나면서 아버지에게 문인이 되고 싶다고 말하지만 아버지는 이에 반대하며 법조계를 택하라고 강경하게 권한다. 그래서 법학 대학에 등록은 하지만 탕플을 계속 드나들면서 사치와 방탕을 선망한다.
이후에도 소 (Sceaux)성 (城)의 문학 살롱을 드나들면서 재기를 발휘하며 문학적 재능을 증명해 보이던 그는 청년 시대에 섭정 오를레랑 공을 풍자한 시의 작자로 간주되어 바스띠유에 갇혔다가 출옥한 뒤, 볼떼르란 필명으로 24세라는 아주 이른 나이에 『오이디푸스 (Oedipus)』(1718)라는 비극 작품으로 유명해진다. 그 시대의 많은 작가들이 그렇듯 볼테르도 존중받는 장르였던 비극과 시로써 작품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작가로서의 볼테르는 비극 작품들과 서사시, 역사물 등을 통해 빠른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은 오늘날에는 별로 읽히지도 않거니와 잘 알려져 있지도 않다.
반면, 나중에 재미삼아 쓰고 익명으로 출간한 콩트들이 오늘날까지 매우 잘 알려져 있다. 그중 가장 많이 읽히고 널리 알려진 작품은 『캉디드 (Candide, ou l’Optimisme)』(1759), 『자디그 (Zadig, ou la Destinee)』(1748), 『랭제뉘 (L’Ingenu)』 (1767)다. 디드로의 『백과전서』 집필에도 참여하는 등 철학자로서, 작가로서, 행동하는 양심으로서 평생 왕성한 활동을 벌인 볼테르는 84세까지 장수를 누렸지만, 프랑스 대혁명은 보지 못하고 1778년 5월 30일에 죽었다. 1791년에는 국가를 위해 큰 공헌을 한 인물들만 들어가는 팡테옹 (Pantheon)에 안치된다.
프랑스 계몽기의 대표적 철학자로 꼽히는 볼테르는 프랑스의 지성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종교적 광신주의에 맞서서 평생 투쟁했던 그는 관용 정신이 없이는 인류의 발전도 문명의 진보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그의 저서들 속에는 당대의 지배적 종교 권력이었던 가톨릭에 대한 비판이 꾸준히 등장한다. 그의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가 전통적 가치들의 토대인 기독교 정신을 무너뜨리려 하고, 풍기를 문란케 한다고 비난했다. 나이가 70세에 가까웠을 때는 그 유명한 ‘칼라스 사건’을 계기로 종교적 불관용의 희생자들을 변호하고 돕는 활동들을 사재를 털어가면서까지 적극적으로 벌여서 오늘날까지도 관용의 상징적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그는 생전에는 대시인으로 대접받았지만, 그의 재능의 본질은 풍자 작가, 명쾌하고 기지에 찬 프랑스적 산문 작가의 전형에 있으며, 특히 철학적 에세이와 우화 소설에 뛰어났다. 이신론(理神論), 이성론의 입장에서 초자연을 강하게 부정하고 신랄하게 성서를 비판해, 후세에 그의 이름은 회의 정신의 상징이 되었다. 계몽주의의 보급을 통해 대혁명의 정신적 기반을 형성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철학의 간』(1734), 『깡디드』(1759), 『관용론』(1763), 『철학사전』(1764) 등이 있다.
– 역자 : 송기형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및 대학원 불문과 졸업 (문학박사)했다.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불문과 교수 역임하고, (현) 건국대학교 예술대학 영상영화과 교수이다. 저서로는 『현대 프랑스의 언어정책』가 있으며, 역서 (공역)로는 『관용론』, 『파리의 풍경』이 있다.

○ 출판사 서평
– 해제
프랑스 구체제 (Ancien Regime)는 통상 혁명 이전의 3세기, 즉 루이 11세 (Louis XI, 재위 1461~1483년)나 프랑수아 1세 (Francois I, 재위 1515~1547년)의 재위 기간으로부터 혁명 직전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구체제는 중세 프랑스와 현대 프랑스를 매개하는 주요한 전환기를 이룬다. 그러나 국내에서 프랑스 역사학이 자리를 잡은 이래, 구체제 연구는 활발하다는 평가를 받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특히 주요 원전의 번역 작업이 크게 부족한 실정이다. 동양학과 서양학 공히 원전 번역이 최우선 과제인데도 말이다. 한국연구재단이 볼테르의 『루이 15세 시대 개요(Precis du siecle de Louis XV)』를 번역 과제로 제시한 것은 분명 이러한 결함을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믿어진다.
프랑스 구체제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루이 14세이고, 볼테르의 역사저술 가운데 『루이 14세 시대 (Le siecle de Louis XIV)』가 제일 중요하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따라서 『루이 14세 시대』를 『루이 15세 시대 개요』보다 먼저 번역하는 것이 순리이다. 그런데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출판된 번역서들을 살펴보면, 생시몽의 『루이 14세와 베르사유 궁정(Louis XIV et sa cour)』 (2009년)과 메르시에의 『파리의 풍경 (Tableau de Paris)』 (2014년)이 있다. 루이 14세 재위 기간(1643~1715년)과 1770~1780년대는 이미 다루어지고 대략 루이 15세 재위 기간(1715~1774년)이 공백으로 남아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루이 14세 시대 』 대신 『루이 15세 시대 개요』가 번역 과제로 나온 것 같다. 집필자와 심사자만 읽어본다는 농담이 나오는 논문에 대한 지원에 비해 너무나 턱없이 미미한 원전 번역 지원의 현실을 한 번 더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 볼테르의 역사저술
1711년 루이르그랑 (Louis-le-Grand) 콜레주를 수료한 볼테르의 꿈은 문학, 다시 말해서 연극에서의 성공이었다. 당시 희곡은 모두 운문으로 썼으므로 볼테르는 코르네유나 라신처럼 위대한 시인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시인 또는 희곡작가 볼테르가 『루이 14세 시대』로 대표되는 역사저술 집필에 착수하게 되는 과정을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1723년 볼테르의 서사시 『가톨릭 동맹 또는 앙리 대왕 (La Ligue ou Henry le Grand) 』초판이 발행되었는데, 그 각주들은 산문으로 작성되었다. 볼테르는 이 각주들에서 역사에 대한 관심을 처음으로 표명하고 종교전쟁과 권력의 역할에 대한 질문을 제기했다. 볼테르가 낭트 칙령에 의해 관용을 실천한 앙리 4세를 찬양하는 문학작품을 통해 역사에 접근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볼테르의 첫 번째 역사저술은 런던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1727년 런던에서 스웨덴 왕 칼 12세의 측근과 대화를 한 후 『칼 12세의 역사(Histoire de Charles XII) 』집필에 착수했다. 『철학편지(Lettres philosophiques) 』역시 이 시기에 집필이 시작되었다. 『철학편지』는 역사저술은 아니지만, 볼테르의 역사저술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영국을 소개하면서 프랑스 사회를 비판하는 형식을 취한 『철학편지』는 계몽주의를 설파하고 관용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볼테르 역사저술의 근간을 예고한다고 볼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루이 14세의 시대(le siecle de Louis XIV)’라는 표현을 볼테르가 처음으로 사용한 저술이 바로 『철학편지』이다. 또 볼테르는 ?편지 12?에서 자크오귀스트 드 투의 역사저술에 대한 존경심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헨리 7세의 역사』는 그 (베이컨)의 대표작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그 책이 우리 프랑스의 유명한 투의 작품과 비교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일 것이다.”
투의 『세계사』는 가톨릭 성직자를 준엄하게 비판하고 개신교도들을 관대하게 다룸으로써 가톨릭교회의 금서로 지정될 정도였다. 역자는 투의 『세계사』를 읽어보지 못했지만, 볼테르의 역사저술이 투의 『세계사』에서 받은 영향은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1728년 말 귀국한 볼테르는 1731년 1월 『칼 12세의 역사』 초판을 출간했다. 하지만 이 책은 당시 폴란드 왕 아우구스트 2세의 패전을 상기시키는 구절들 때문에 경찰에 의해 압수되었다.
볼테르가 『루이 14세 시대 』집필에 착수한 시점은 1732년 5월이다. 이 역사저술의 집필 동기는 나중에 볼테르 자신이 밝힌다. 그런데 볼테르는 8월에 발표한 비극 『자이르 (Zaire) 』서문에서 루이 14세를 찬양함으로써 그 후계자인 루이 15세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루이 14세와 리슐리외는 프랑스인들을 야만에서 끌어냈는데, 이제 다시 모든 것이 그들을 야만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 같다.”
“한 여인의 존재는 그녀가 인생을 함께한 남자에 좌우되고 이 역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없었더라면 볼테르는 전혀 다른 볼테르가 되었을 것이다”라는 평가를 받는 에밀리 뒤샤틀레와 1733년 6월 교제하기 시작한 볼테르는 『루이 14세 시대』 관련 자료를 열심히 수집했다. 1734년 『철학편지』 출판으로 인한 파문 때문에 뒤샤틀레 부인의 시레 성으로 피신한 볼테르는, 검열을 걱정하는 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루이 14세 시대』 집필을 계속한다. 1736년 8월 8일부터 볼테르와 서신 교환을 시작한 프로이센 왕세자 프리드리히는 “선생, 세상을 계몽하는 일을 계속하세요. 진리의 횃불을 맡길 더 이상의 적임자는 없습니다”라는 편지로 볼테르의 집필을 성원했고, 볼테르는 왕세자에게 원고의 일부를 보내주기도 했다.
1739년 1월부터 볼테르는 『루이 14세 시대』 원고를 유통시키기 시작하여 서문과 1장이 포함된 책이 국왕 윤허 없이 출판되었다. 11월에 파리 경찰이 이 책을 압수하고 12월에 파리 고등법원이 금서 선고를 하고 불태우자 볼테르는 브뤼셀로 피신했다. 볼테르는 『루이 14세 시대』 집필을 일시적으로 중단했으나 포기하지는 않았다. 프랑스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 뛰어든 1741년 6월 볼테르는 프리드리히 2세에게 “루이 14세 시대의 경계를 넘어서는 역사를 쓰겠다”고 예고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볼테르를 베를린으로 초대했지만, 볼테르는 에밀리의 조언대로 루이 15세의 호감을 사기 위해 노력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루이 14세 시대』 집필을 중단하고 1741년 6월부터 『세계사 시론 (Essai sur l’histoire generale)』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중세와 먼 외국의 역사는 말썽을 일으켜서 베르사유의 루이 15세와 파리 고등법원의 눈 밖에 날 소지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볼테르 전문가인 르네 포모 (Rene Pomeau)에 따르면, 1739~1741년에 볼테르는 시인적 기질을 탈피하고 진정한 역사가로 태어났다고 한다. 세계사라는 큰 안목이 역사가에게 필수적이라는 진실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동시에 볼테르는 인맥을 동원하여 베르사유 궁정에 본격적으로 줄을 대기 시작했다. 볼테르는 구체제 최고의 교육기관이며 ‘왕정의 고위 간부’ 양성을 목표로 하는 콜레주 중에서도 명문인 루이르그랑 출신이다. 고위귀족 동창생이 많은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그 대표적 인물이 아르장송 후작 형제와 리슐리외 공작이다. 뿐만 아니라 볼테르는 일부 권력층의 돈줄이었다. 그는 투기에 크게 성공하여 모은 백만 리브르가 넘는 재산 덕에 30대에 이미 상당한 재력가였고 1730년에는 부친의 재산까지 상속받았다. 그는 이 재산을 바탕으로 고위층을 상대로 적극적인 대금업에 나섰다. 왕족과 귀족들에게 돈을 빌려주면 떼일 위험이 없지 않지만 이자 수입 외에도 여러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정세도 볼테르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 뛰어든 프랑스로서는 프로이센을 같은 편으로 만드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볼테르가 프리드리히 2세와 친하다는 사실은 유럽의 모든 궁정이 알고 있었다. 프랑스 정부는 볼테르를 프로이센으로 파견하여 프리드리히 2세의 참전을 설득하기도 했다.
드디어 1745년 4월 볼테르는 프랑스 역사편찬관으로 임명되었다. 또 침전시랑이라는 직책도 받았다. 볼테르는 베르사유 궁정의 신하가 되고 성직자들과 화해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교황의 축복까지 얻어내서 1746년 4월 25일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입성했다. 제도권 또는 관변 인사로 성공한 것이다. 바로 이때 프랑스군이 퐁트누아에서 영국군에 대승을 거두었다(1745년 5월 11일). 멀리는 블렌하임 전투 가까이는 데팅겐 전투의 패전을 만회하는 쾌거였다. 볼테르는 “기뻐서 미칠 지경이다”라면서 ‘퐁트누아의 시’를 썼다. 그리고 8월 17일 외무대신 아르장송 후작에게 『1741년 전쟁사 (Histoire de la guerre de 1741)』를 쓰겠다고 제안한다. 9월 볼테르는 육군성 전보들에 의거하여 『1741년 전쟁사』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는 참전 군인들을 직접 만나 질문을 했고 여러 관련 기관에 자료를 요청했다. 1746년 3월 18일 볼테르는 루이 15세에게 『1741년 전쟁사』 원고를 제출했다. 하지만 루이 15세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자 볼테르는 기분이 상한다. 그는 『루이 14세 시대』 집필을 재개하고 원고를 프리드리히 2세에게 보낸다. 프로이센 왕은 볼테르에게 『루이 14세 시대』에 전념하라고 격려한다. 1748년 2월부터 뤼네빌의 스타니수아프 궁정에서 머물던 볼테르는 12월 『1741년 전쟁사』를 거의 끝냈지만 출판은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1749년 2월 프리드리히 2세는 『루이 14세 시대』를 완성하라고 질책한다.
1749년 9월 에밀리 뒤샤틀레가 사망하자 볼테르는 크게 상심한 나머지 1750년 6월 30일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2세 궁정으로 떠난다. 8월 말 베르사유 궁정은 볼테르에게 역사편찬관 직을 박탈한다고 통보한다. 볼테르는 베를린에서 『루이 14세 시대』 집필에 전념하여 출판을 목전에 두게 된다. 1751년 4월 볼테르의 비서가 파리에서 『세계사 시론』, 『루이 14세 시대』, 『1741년 전쟁사』 원고를 훔쳐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원고는 반환되었지만 필사된 것이 분명하다. 나중에 해적판이 출판되기 때문이다. 볼테르는 『루이 14세 시대』를 국왕 윤허를 얻어 프랑스에서 출판할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결국 베를린에서 출판하기로 결심하고 리슐리외 공작에게 그 이유를 설명한다. 드디어 1751년 12월 베를린의 왕립 출판사에서 『루이 14세 시대』가 발간된다. 또 볼테르는 1752년 10월 『1741년 전쟁사』를 탈고하고 『세계사 시론』도 집필을 계속하여 1756년 3월 『샤를마뉴에서 오늘날까지의 세계사, 풍속, 국민정신에 대한 시론』을 출판한다. 이 책은 모두 215장으로 구성되었는데 1~164장이 ‘세계사 시론’, 165~215장이 ‘루이 14세 시대’였다. 206~215장이 1756년까지의 18세기를 다루었는데, 볼테르는 이 부분에서는 『1741년 전쟁사』를 활용했다.
이처럼 볼테르의 주요 역사저술은 샤를마뉴에서 루이 14세 이전까지의 기간, 루이 14세 시대, 루이 14세 이후부터 볼테르 당시까지를 다루었고 그 중심은 『루이 14세 시대』였다.
– 『루이 14세 시대』
볼테르는 뒤보 수도원장 (abbe Dubos)에게 보낸 1738년 10월 30일 자 편지에서 『루이 14세 시대』 집필 동기를 공개했다.
“저는 루이 14세 시대 역사를 쓰기 위해 오래전부터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단순히 이 군주의 삶이나 그 통치의 연대기를 쓰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쓰는 것은, 인간 정신의 역사입니다. 인간 정신의 관점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시대의 역사 말입니다.”
이미 1735년 볼테르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루이 14세가 대왕이라는 호칭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네. 그러나 루이 14세 시대는 그럴 자격이 있네. 나는 루이 14세라는 인물보다는 그 예술과 문학의 전성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네”라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루이 14세 시대』는 이렇게 시작된다.
“필자가 쓰려고 하는 것은 루이 14세의 생애만이 아니다. 필자에게는 더 큰 목표가 있다. 한 인간의 활동이 아니라, 역사상 가장 계몽된 시대의 인간 정신을 그려서 후대에 보여주려고 한다.”
이어서 볼테르는 세계사에는 위대한 시대가 4개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 4개의 행복한 시대는 예술이 완성된 기간이고, 위대함과 인간 정신의 관점에서 후세를 위한 본보기이다.”
볼테르에 따르면, 그 4개 시대는 고대 그리스(기원전 5세기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까지), 로마(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시대), 15~16세기의 이탈리아 그리고 루이 14세 시대이다. 그리고 이 4개 시대 가운데 바로 루이 14세 시대가 가장 완벽에 근접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반적인 인간의 이성이 완벽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 정신, 풍습, 정부에서 전체적인 변혁이 일어나 프랑스가 진정한 영광을 누렸으며 이 영향이 영국을 비롯한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고 볼테르는 강조한다.
그러나 볼테르가 밝힌 집필 동기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볼테르가 영국 망명 기간에 역사저술에 착수하고 『루이 14세 시대』를 구상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당시 영국은 거의 모든 바다를 제패한 최강대국이고 정치와 사회의 관점에서도 최고 선진국이었다. 영국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역사에 눈을 뜬 볼테르에게 프랑스가 최고였던 시절의 역사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또 볼테르는 동시대 프랑스인들과는 달리 루이 14세에 매료되어 있었다. 여기서 18세기 전반기의 프랑스에서는 루이 14세가 극도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루이 14세를 냉혹하게 비판한 생시몽 (Louis de Rouvroy de Saint-Simon, 1675~1755)의 『회고록 (Memoires)』이 정식 출판되기 전부터 인기를 끌고 있었다. 또 1730년대에 루이 14세 통치의 역사를 쓰려고 계획한 몽테스키외는 “왕이 허황된 전쟁에 필요한 재원을 강제로 마련하느라 백성의 인심을 잃었고 왕의 모든 권력과 정책은 과시와 허세를 위한 것에 불과하다”고 단언했고 특히 “태양왕은 본바탕이 심미안이 없었기 때문에 예술을 알지 못하면서 꽃피우게 만든 것일 뿐”이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볼테르의 『루이 14세 시대』는 프랑스의 전성기를 주도한 루이 14세를 ‘복권’시킴으로써 프랑스인들의 자긍심을 회복시키고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의도에서 집필되었다고 본다. 과연 『루이 14세 시대』는 대성공을 거두어 볼테르 생전에만도 무려 50판이 넘게 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루이 14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의 토대로 작용하게 된다.
– 『루이 14세 시대』 구성
『루이 14세 시대』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1장. 머리말
2장. 루이 14세 이전의 유럽 국가들
3장. 루이 14세의 미성년 기간. 앙갱 공작 대 콩데가 이끈 프랑스인들의 승전
4장. 내전
5장. 내전 속편. 1654년의 프롱드난 종식까지
6장. 1661년 마자랭 사망까지 프랑스의 상태
7장. 루이 14세의 직접 통치. 왕은 오스트리아 왕가의 에스파냐 분가가 어디서나 상석을 자기에게 양보하도록 만든다. 왕은 로마 교황청이 자신의 요구를 수용하게 만든다. 왕은 덩케르크를 매입한다. 왕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포르투갈, 네덜란드 전국신분회의를 지원한다. 왕은 자기 왕국을 번영하게 하고 다른 나라들이 두려워하게 만든다.
8장. 플랑드르 정복.
9장. 프랑슈콩테 정복과 엑스라샤펠 평화조약
10장. 루이 14세의 업적과 화려함. 포르투갈에서의 야릇한 모험. 프랑스에 온 폴란드 왕 얀 2세. 칸디아 지원. 홀란트 정복
11장. 홀란트 철수. 두 번째 프랑슈콩테 정복
12장. 튀렌 원수의 승전과 사망. 대 콩데의 마지막 전투인 스네프 전투
13장. 튀렌 사망 이후 1678년의 네이메헌 조약까지
14장. 스트라스부르 점령. 알제 포격. 제노바의 굴종. 시암 사절단. 로마에서 도전을 받은 교황. 쾰른 선제후 자리를 둘러싼 분쟁
15장. 사위 빌럼 3세에 의해 폐위를 당한 제임스 2세를 보호한 루이 14세
16장. 빌럼 3세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침략하는 동안 대륙에서 1687년까지 일어난 일. 팔츠 선제후국의 전운. 카티나 원수와 뤽상부르 원수의 승전 등
17장. 사보이아와의 협정. 부르고뉴 공작의 혼인. 라이스바이크 평화조약. 프랑스와 유럽의 상태. 에스파냐 왕 카를로스 2세의 사망과 유언
18장.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 1703년까지 대신과 장군들의 처신.
19장. 블렌하임 또는 회흐슈테트 전투의 패배와 그 결과
20장. 에스파냐에서의 패배. 라미예 전투와 토리노 전투의 패전과 그 결과
21장.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불운 속편. 루이 14세는 수석대신을 보내 평화를 요청하다. 말플라크 전투의 패전
22장. 루이 14세는 계속 평화를 요청하면서 방어를 한다. 방돔 공작이 에스파냐 왕의 왕권을 굳건하게 만든다
23장. 빌라르 원수의 드냉 승전. 전세 만회. 전체 평화
24장. 위트레흐트 조약 이후 루이 14세 사망까지 유럽의 풍경
25장. 루이 14세 통치의 특징과 일화들
26장. 특징과 일화들 속편
27장. 특징과 일화들 속편
28장. 일화들 속편
29장. 내정. 사법. 상업. 치안. 법. 군대 규율. 해군 등
30장. 재정과 해결책들
31장. 학문
32장. 예술
33장. 예술 속편
34장. 루이 14세 시대 유럽의 예술
35장. 성직자 문제. 기억할만한 분쟁들
36장. 루이 14세 시대의 칼뱅주의
37장. 얀센주의
38장. 정적(靜寂)주의
39장. 중국의 제사를 둘러싼 분란. 이 분란이 어떻게 중국에서 기독교를 금지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는가
– 『루이 15세 시대 개요』
『루이 15세 시대 개요』는 『루이 14세 시대』를 보완하고 『1741년 전쟁사』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태어난 복합적인 저술이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1740~1748년)을 다룬 『1741년 전쟁사』 집필은 1745년 9월 시작되어 우여곡절 끝에 1752년 10월 끝났지만 볼테르는 출판을 망설였다. 1751년 12월 베를린에서 출판된 『루이 14세 시대』에는 18세기를 다룬 장 (위트레흐트 평화조약에서 1750년까지의 유럽 풍경)이 포함되어 있었다. 1756년의 『샤를마뉴에서 오늘날까지의 세계사, 풍속, 국민정신에 대한 시론』에서는 마지막 10개 장이 18세기를 1756년까지 다루었다. 여기서 볼테르가 『1741년 전쟁사』의 일부를 활용했음은 물론이다. 1763년판 『샤를마뉴에서 오늘날까지의 세계사, 풍속, 국민정신에 대한 시론』에서는 18개 장이 18세기를 1762년까지 다루었다. 그리고 1769년 10월 제네바에서 처음으로 『루이 14세 시대』와 『루이 15세 시대 개요』가 따로 출판된다. 1769년판 『루이 15세 시대 개요』는 39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볼테르는 다른 역사저술과 마찬가지로 이 저술에 대한 수정과 보완 작업을 계속하여 1775년판 『전집』에서는 4개 장을 추가했다. 이렇게 43개 장으로 구성된 1775년판에 근거한 1792년판을 필자는 번역 대본으로 삼았다. 그리고 1769년판과 1878년 출판된 『볼테르 전집』에 수록된 『루이 15세 시대 개요』를 참조했다.
이처럼 『루이 15세 시대 개요』는 상당히 복잡한 과정을 통해 완성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책의 집필 동기 역시 매우 복합적이다. 아니 혼돈스럽다고 말해야 한다. 『루이 15세 시대 개요』의 토대는 『1741년 전쟁사』이다. 『1741년 전쟁사』는 볼테르가 루이 15세를 비롯한 권력층에 아부하려고 쓰기 시작한 역사저술이다. 필화를 여러 번 겪은 그는 뒤샤틀레 부인의 충고대로 인맥을 동원하여 역사편찬관 또 침전시랑의 자리까지 받았다. 역사편찬관이 권력층의 눈치를 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1752년 10월 볼테르는 완성된 『1741년 전쟁사 』원고를 당대의 최고 권력층인 퐁파두르 부인, 리슐리외 원수, 아르장송 백작(육군대신)에게 보내주었지만 출판은 망설였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아첨꾼이라는 비난 그리고 루이 15세의 반감이 두려웠던 것이다. 특히 루이 15세는 볼테르를 극도로 싫어한 나머지, 볼테르는 루이 15세가 사망한 다음에야 파리로 귀환할 수 있었다.
모순적이 아닌 인간은 없지만, 볼테르는 말 그대로 모순투성이였다. 그는 섭정 오를레앙 공작과 수석대신 뒤부아에게 계속 아부를 하고 비밀요원직을 자원하기도 했다. 또 자신의 저서가 나올 때마다 고위 인사들은 물론이고 외국 궁정에도 부지런히 증정을 했다. 타고난 아첨꾼이라고 말할 수 있다. 1773년에는 파리로 귀환하기 위해 루이 15세의 새로운 애첩 뒤바리 부인(Madame du Barry, 1743~1793)에게까지 줄을 댔다. 79세의 노인이 말이다. 그냥 노인이 아니라 부호, 투르네와 페르네 영주, 프리드리히 2세의 친구, 유럽의 거물이 말이다.
그러나 볼테르는 비판 정신도 타고 났다. 그는 체질적으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다. 이 기질 때문에 여러 번 필화를 당하여 바스티유에 투옥되고 영국으로 망명하고 시레 성으로 피신하고 페르네 영주가 되고 1778년까지 파리로 귀환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볼테르는 칼라스 사건 등을 통해 ‘정의를 위해 지칠 줄 모르는 수호자’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또 1759년부터는 ‘종교의 추악한 형태 (Infame)’를 박살내자고 주창한다.
볼테르는 재산과 대금업 때문에 인색하고 탐욕스럽다는 비난을 숱하게 받았다. 볼테르는 투기의 귀재였고 고리대금업자였다. 그의 재산에서 발생하는 소득, 즉 랑트 (rente)는 최고위 귀족 수준이었다. 그러나 볼테르는 재산 덕에 돈벌이가 안 되는 문학에 전념할 수 있었고, 거물들에게 대출을 해줌으로써 그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았고, 페르네에서 다양한 자선사업을 펼칠 수 있었다. 그는 투기와 대금업으로 축적한 재산 덕에 철학자들의 적을 공격하고 ‘불행한 사람들의 돈키호테’라고 자처할 수 있었다.
이렇게 모순적인 삶에서 볼테르는 죽기 바로 직전까지 글을 썼다. 80 나이에 하루에 15시간 글을 썼다고 한다. 책을 통한 정신의 혁명이 가능하다고 믿은 그는 “행동하기 위해 글을 쓴다”는 지식인의 전범을 에밀 졸라보다 100년 먼저 확립한 것이다. 볼테르는 계몽주의 철학자와 작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가장 중요한 면모는 행동하는 지식인에 있다고 본다. 프랑스어 intellectuel은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1898년)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볼테르는 이미 18세기 중반부터 행동하는 지식인의 전범을 보여주었고 이것이 졸라, 말로, 사르트르, 푸코로 이어짐으로써 프랑스 지식인의 전통이 확립된다. 볼테르는 인간 정신의 진보를 확신하는 낙관적 계몽주의자였고 구체제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추악한 종교의 형태를 분쇄하기 위해 글을 쓴 지식인이었다.
『루이 15세 시대 개요』는 『루이 14세 시대』의 아류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기야 볼테르는 정통 역사학자가 아니다. 또 지식인 볼테르의 모순적인 면모들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루이 14세 사후부터 루이 15세 사망까지의 프랑스만이 아니라 유럽 전체의 역사를 생생하게 기록했다는 점에서 볼테르의 주요한 역사저술로 남아 있다. 루이 14세 사후의 유럽 정세,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1740~1747년), 7년 전쟁 (1756~1763년)을 중점적으로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국내 상황 (오를레앙 공작의 섭정, 플뢰리 추기경의 내각, 루이 15세에 대한 암살 기도, 예수회 추방, 가톨릭교회와 고등법원의 갈등, 루이 15세 사망, 코르시카 합병, 부조리한 형사소송법 등)도 볼테르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문체로 기술하고 있다.
특히 퐁트누아 전투를 비롯한 몇몇 전투에 대한 박진감 넘치는 묘사는 『루이 14세 시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소중한 대목들이다. 프랑스 구체제에서 귀족의 최우선 사명은 출전 (出戰)이었다. 삼신분의 두 번째 신분인 귀족은 ‘싸우는 자’로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전장에서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수 있어야만 귀족인 것이다. 볼테르의 전투 묘사는,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진정한 귀족 정신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핵심이라는 점을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 인구의 1% 미만이던 귀족이 구체제 사회에서 그토록 많은 특권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재산을 기준으로 하는 신분제가 뿌리를 내린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진정한 의미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최선을 다해 번역하고 각주를 달았으므로 독자 여러분에게 일독을 권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