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르네상스인 미켈란젤로 상·하
어빙 스톤 / 까치 / 1997.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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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르네상스기의 천재적인 화가, 조각가, 건축가 시인이었던 미켈란젤로. 89세의 오랜 생애 동안 자유와 정의를 추구하며 인생의 고뇌, 사회부정과 대립한 그의 예술과 삶을 조명한 전기적 소설이다.
르네상스 정신을 대표하는 미켈란젤로의 파란 많은 삶을 그렸다.
○ 목차
르네상스인 미켈란젤로 상
르네상스인 미켈란젤로 하
○ 저자소개 : 어빙 스톤 (Irving Stone)
190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을 졸업했다. 전기작가로 활동했으며 대학에서 경제학 교수로 재직했다. 1989년 생을 마쳤다. 지은 책으로 <꿈꾸는 야망 영원한 사랑>, <르네상스인 미켈란젤로>,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 <소설 프로이트>, <유진 뎁스> 등이 있다.
– 역자: 이인철
의학박사, 한국 / 미국 병리전문의,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서울아산병원 병리학교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연구논문 및 저서 다수가 있다. 역서로 <꿈꾸는 문인들의 거리>, <솔로이스트>, <돈의 세계사>, <냄새 그 은밀한 유혹>, <르네상스인 미켈란젤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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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서평
인간정신의 해방을 예술로써 구현한 미켈란젤로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이다. 귀족으로 태어났지만, 하층민들이 종사하는 예술분야에 자신을 투신했던 미켈란젤로는 조각 · 회화 · 건축 등 쟝르를 넘나들면서 작품을 남겼다.
예술의 이름 아래 고뇌했던 예술가의 모습이 그려졌다.
– 미켈란젤로는 누구인가
이탈리아의 화가 · 조각가 · 건축가 · 시인. 주요작품으로 《다비드》 (1504), 《최후의 심판 Last Judgment》 (1541) 등이 있다.
카프레세 출생.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나, 양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13세 때에 기를란다요 (Ghirlandajo)에게 입문하였고, 이듬해 조각가 베르톨도 (Bertoldo di Giovanni, 1420? ∼ 1491)에게로 옮겨 도나텔로의 작품을 배우면서, 메디치가(家)의 고대 조각을 연구하였다. 그 때 로렌초 일 마니피코 (Lorenzo il Magnifico, 1449 ∼ 1492)에게 인정받아, 그의 집에서 체류하게 되어, 인문 학자들과도 접촉, 고전문학이나 신구약 성서를 탐독함과 동시에, 조각을 위한 인체 해부에도 전념하였다. 블랑카치성당 마사초의 벽화 앞에서 토레지아니와 논쟁하다가 코뼈가 부러진 것도 그 때의 일이며, 이때의 작품으로는 피렌체의 카사 보나로티에 남아 있는 도나텔로풍의 《스칼라의 성모》와 고전적 격조를 보인 《켄타우로스족과 라피타이족의 싸움》의 부조 (浮彫)가 있다.
1492년 메디치가의 로렌초가 죽은 후, 프랑스군이 침입하자 볼로냐로 피난, 거기서 J.D.퀘르치아의 조각도 배웠다.
1496년 로마로 나올 기회를 얻어 고전 예술에 접촉, 조상 《바쿠스》 (피렌체 바르젤로미술관 소장)를 제작, 바티칸의 산 피에트로대성당에 있는 《피에타 : Pieta》를 프랑스 추기경의 의뢰로 완성한 것은 1499년경이다.
1501년 피렌체로 돌아와, 시청으로부터 《다비드》의 대리석상을 부탁받아 1504년에 완성하였다. 이 거상은 시청 문 앞에 놓여 피렌체 자치 도시를 지키는 상징으로 간직되었다 (현재는 아카데미아미술관 소장). 이 무렵의 작품으로 성모자 (聖母子)를 다룬 2개의 원형 부조 (런던 왕립미술아카데미와 바르젤로미술관 소장)와 원형화 《성가족》 (우피치미술관)이 있다.
1504년 피렌체 시청에 《카시나의 싸움 : Battle of Cascina》의 벽화를 의뢰받아, 건너편 벽면에 《안기리의 기마전》을 그리게 되어 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경쟁하였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이듬해 율리우스 2세에게 불려 로마로 가서, 그 기념 묘비를 만들게 되었다. 그런데 브라만테가 산 피에트로대성당의 개축에 착수한 이래, 율리우스 2세가 냉담해지자, 이에 성이 난 그는 피렌체로 돌아와 다시 《카시나의 싸움》 제작에 전념하였다.
1506년 레오나르도도 화고 (畵稿)를 완성, 벽화를 착수하였으나, 쌍방 모두 진전이 없던 중에 중단되고 말았다. 지금은 화고도 없어지고, 모사화 (模寫畵)가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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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6년 말 미켈란젤로는 다시 율리우스 2세에게 불려가, 볼로냐에서 화해하고, 1508년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화 (天障畵)를 위촉받았다. 벽화에는 경험이 없다고 사퇴하였으나, 허용되지 않아 적대자 브라만테의 간계를 물리치면서 제작을 시작하였다. 일은 진척되지 않고, 보수도 지불되지 않고, 형제들로부터는 금전을 강요당하고, 교황과도 충돌하는 악조건하에서 1512년에 마침내 완성하였다. 《천지 창조》, 《인간의 타락》, 《노아 이야기》의 3장 9화면을 구약 내용의 순서와는 반대로 그리기 시작, 그 화면 사이에 예언자나 천사 (天使)나 역사 (力士)를 배치하고, 복잡한 모습을 부여하여, 묘사된 대리석상 같은 인간군상을 부각하였다. 천장화 완성의 다음해에 율리우스 2세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현안의 묘비를 실현시키게 되어, 1513 ∼ 1518년에 묘비의 중심조상 (彫像)이 될 《모세 : Moses》의 거상 (巨像)과 부속 인물인 《노예》를 만들었으나, 메디치가 출신의 교황 레오 10세가 새로이 피렌체의 산 로렌초성당의 파사드의 건축을 강요하였기 때문에, 그 후 율리우스 2세의 묘비는 중단되었다.
교황이 갈릴 때마다 계약이 수정되어 마침내 1542년의 제5회째의 계약에서는 최초의 거대한 구상과는 달리, 앞서 말한 《모세》를 중심으로 새로이 만든 《레아》와 《라헬》의 두 협시(脇侍)가 산 피에트로 인 빈코리성당의 쓸쓸한 묘비를 구성하고 있을 뿐이다. 1520년 피렌체의 메디치가 묘묘 (廟墓)의 제작을 의뢰받아, 1524년에 착수, 10년간이나 걸렸으나 끝내 미완성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 묘묘를 구성하는 로렌초와 줄리아노의 조상과 그 각각의 아래의 관(棺)에 누워 있는 《아침》, 《저녁》, 《낮》, 《밤》의 네 우의상 (寓意像), 그 중 《저녁》과 《낮》의 두 남성상 (미완성)과 《성모자상》 (미완성)은 르네상스 조각의 걸작으로 꼽힌다. 그 사이 산 로렌초성당 부속의 라우렌치아나도서관의 건축에 종사하였고, 1529년에는 독일의 칼 5세군(軍)의 피렌체 포위를 맞아, 방위위원으로서 축성에도 임하였다. 그 후 메디치가(家)의 전제군주 알렉산드로와 반목하여, 메디치가 묘묘를 미완성의 상태로 둔 채 1534년에 피렌체와 영원히 결별하여 로마로 옮겼다. 그 해 새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시스티나성당의 안쪽 벽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고 다음 해부터 혼자 착수, 고생 끝에 6년 후인 1541년에 《최후의 심판 : Last Judgment》을 완성하였다.
그리스도가 ‘성난 그리스도’로서 거인처럼 군림하여, 천국에 오르는 자와 지옥으로 떨어지는 자가 좌우로 크게 회전하는 군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 구도 (構圖)와 동적 표현은 르네상스의 고전 양식을 해체하여 격정적인 바로크 양식에의 추이 (推移)를 보였다. 그 제작 중, 독신이었던 그가 교양 높은 페스카라공 (公) 미망인 비토리아 코론나를 알게 되어 영혼의 위로를 받게 된 것은 유명한 에피소드인데, 이 부인도 타계하여, 그는 다시 고독해졌다. 1542년에는 바티칸궁의 파올리나성당의 장식도 위촉받아 《바울로의 개종》과 《베드로의 책형 (磔刑)》을 1550년에 완성하였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캄피돌리오 광장을 설계하기도 하고, 파라초 파르네제의 건축에 종사하기도 하는 등 끊임없이 활동하여, 1547년에는 산 피에트로대성당의 조영 주임이 되어 1557년 대원개 (大圓蓋)의 목제 모델을 완성하였다.
그 사이에도 《피에타 : Pieta》의 군상을 3체 (體) (피렌체 대성당, 팔레스토리나, 론다니니)나 만들었고, 어느 것이나 미완성으로 끝나기는 하였지만, 힘 없이 쓰러지는 그리스도를 성모들이 슬피 부축하는 군상의 생생한 끌 자국에는 끝없는 고뇌의 영혼이 영원의 휴식을 추구하는 것 같은 그의 만년의 심경이 엿보여 비장하기까지 하다. 그 무렵 로마에도 동란이 일어나, 고향 피렌체에의 향수에 젖으면서, 병을 얻어 르네상스로부터 초기 바로크에 이르는 89세의 오랜 예술적 생애를 마쳤다. 메디치가(家)나 교황에의 봉사를 끝없이 요구당하면서도 언제나 자유와 정의를 추구하여 싸운 그의 괴로운 심경은 남겨진 편지와 시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예술은 모두 이와 같은 인생의 고뇌와 사회의 부정과 대결한 분개와 우울과 신앙의 미적 형상화이며, 더욱이 그것은 초인적인 억센 제작력에 의해 달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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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켈란젤로 동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 미켈란젤로는 고집이 세고 자신의 작품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가졌던 인물로 유명하다.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명령으로 시스티나성당의 천장화를 그리게 되었을 때는 사람들의 성당 출입을 막고 무려 4년 동안이나 성당에 틀어박혀 그림에만 매달렸다.
어느 날, 천장 밑에 세운 작업대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천장 구석구석에 정성스레 그림을 그려가던 미켈란젤로에게 한 친구가 물었다.
“여보게, 그렇게 잘 보이지도 않는 구석에 뭘 그렇게 정성을 들여 그림을 그리고 있나? 완벽하게 그려졌는지 누가 알기나 한단 말인가?”
그러자 미켈란젤로가 무심한 듯 한마디를 던졌다.
“내가 안다네.”
이런 내적 동기를 ‘미켈란젤로 동기’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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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소개 : 르네상스 시대정신 미켈란젤로 탐구
– 르네상스인 미켈란젤로 / 어빙 스톤 지음
열세살때부터 아흔이 다 돼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온몸을 불사르듯 그림을 그렸던 르네상스시대의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그의 삶과 예술이 빈센트 반 고흐의 전기로 유명한 작가 어빙 스톤의 붓끝에 의해 되살아났다. 스톤은 수년동안 이탈리아의 피렌체·로마·카라라·볼로냐 등지에 살면서 방대한 자료를 수집,이 전기소설을 완성했다.이 작품에는 미켈란젤로의 생애와 예술혼 뿐만 아니라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브라만테, 로렌초데 메디치, 율리우스 2세와 레오 10세, 카를 5세, 샤를 8세, 사보나롤라 등 르네상스 시대 주역들에 관한 이야기가 원고지 5천장 분량으로 집대성돼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로 대표되는 전 인격적인 이성적 인간형인 르네상스인과는 의미를 좀 달리 하지만, 미켈란젤로야말로 인간정신의 해방을 구현하는 르네상스의 시대정신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르네상스인이라고 할 수 있다. 토스카나인으로 이른바 성기 르네상스 시대 (1490 ∼ 1527)를 살았던 미켈란젤로는 가문과고향의 전통을 소중하게 여기면서도 가문의 전통에 어긋나게 ‘지체 낮은’ 예술가의 길을 택했다. 그는 전통과 혁신 사이에서 고뇌하고 갈등을 겪으면서도 피렌체 성당의 조각 ‘다비드’, 로마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프레스코화 ‘최후의 만찬’ 등의 작품을 남겼다. 스톤은 미켈란젤로의 예술 생산과정을 꼼꼼한 고증과 풍부한 상상력을 통해 생생하게 재현한다. 미켈란젤로의 삶을 당대의 역사적 배경에서 읽어 내고 있는 이작품은 특히 르네상스의 물질적 후원자였던 메디치가와 메디치가가 지배하는 피렌체의 모습 등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_ 서울신문, 1997.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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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