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메이지의 문화
이로카와 다이키치 / 삼천리 / 2015.10.16
– 메이지유신이 덮어 버린 일본 근대의 참모습
메이지 시대 (1868~1912년)는 오늘날 일본의 모양새를 결정한 시기였다.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이와쿠라 도모미 같은 정치 엘리트와 후쿠자와 유키치, 가토 히로유키를 비롯한 계몽 지식인들은 메이지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그렇지만 메이지유신의 서구식 근대화와 문명개화, 부국강병 정책이 이 시대의 전부는 아니었다.
이 책의 지은이 이로카와 다이키치는 ‘메이지 문화’ 속의 근대적인 요소를 ① 민주주의, ② 자아의식과 개인주의, ③ 자본주의, ④ 내셔널리즘이라는 네 가지 키워드로 파악한다. 이 시대에 자유민권운동이 좌절되고 민중 생활의 리듬이 뿌리 뽑히면서 민주주의와 개인주의는 억압되고 자본주의와 내셔널리즘이 왜곡되고 만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국체’(國體) 관념이 근대 일본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게 지은이의 생각이다.
하지만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이런 메이지 시대 이미지에 가려진 일본 근대의 참모습을 드러내고 밑바닥 세계에서 근대를 향해 꿈틀대는 에너지를 밝혀낸 점이다. 지은이는 “일부 이데올로기론자와 같이 문화를 단순히 계급 지배의 도구로 단정하는 입장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과 마루야마 마사오로 대표되는 ‘근대주의’를 비판하며 전후 일본 민중사 연구의 흐름을 만들어 낸 신호탄이 되었다. 역사 속에 살아간 인간의 운명과 상처를 입으면서도 온 힘을 다해 살아 나간 ‘문자 없는’ 민중의 정신세계를 그려 낸 점에서 아날학파의 ‘심성사’나 탈식민주의 ‘서발턴 연구’와도 문제의식이 맞닿아 있다.
○ 목차
해설 민중의식과 천황제(야스마루 요시오)
서장
1장 풀뿌리에서의 문화 창조
2장 서구 문화의 충격
3장 방랑의 구도자
4장 한시 문학과 변혁 사상
5장 민중의식의 봉우리와 골짜기
6장 메이지 문화의 담당자
7장 비문화적 상황과 지식인
8장 정신 구조로서의 천황제
○ 저자소개 : 이로카와 다이키치 (色川大吉)
도쿄게이자이대학 명예교수. 1925년 지바 현에서 태어났다. 도쿄제국대학 문학부에 입학했지만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일어나 학도출진으로 해군항공대에 입대했다. 전쟁이 끝나고 구두닦이, 논문 하청, 농사일을 전전하다가 1948년에 이름이 바뀐 도쿄대학을 졸업했다. ‘인민 속으로’ 들어가 농촌 중학교 교사가 되었지만 1년 만에 꿈이 좌절된 뒤 도쿄로 돌아와 일본공산당에 입당했고 민주상공회 서기를 맡았다. 도쿄게자이대학 교수로 근무하다 1996년에 정년퇴임했다.
민중사상사의 기초를 세운 지은이의 역사 연구를 일본 역사학계는 ‘이로카와사학’(色川史學)이라 일컫는다. 1970년 프린스턴대학에 초빙되어 일본 근대사 객원교수를 지냈고, 1980년에는 시민운동가 오다 마코토(小田?)와 함께 ‘일본은 이대로 좋은가 시민연대’(日市連)를 결성하여 공동대표를 맡았다.
지은 책으로 《明治精神史》(1964), 《シルクロ?ド悠遊》(1988), 《雲表の? ?海?チベット踏査行》(1988), 《自由民?の地下水》(1990), 《北村透谷》(1994), 《近代日本の??》(1998), 《シルクロ?ド遺跡と現代》(1998), 《?墟に立つ―昭和自分史》(2005), 《色川大吉著作集》(전5권, 1995~1996) 등이 있다.
– 역자 : 박진우
숙명여대 일본학과 교수, 일본 근현대사 전공. 일본 히또쯔바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히또쯔바시대학 사회학연구과 특별연구원을 지냈고, 『일본비평』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근대일본형성기의 국가와 민중』 『21세기 천황제와 일본』『패전 전후 일본의 마이너리티와 냉전』 (공저), 역서로 『교착된 사상의 현대사』 (공역)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나는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 같은 자들은 그들이 후일 고백하고 있듯이 상당히 실수가 많고 시행착오를 되풀이 한 정치가이며, 오로지 국민 각층의 창조력과 운 좋은 역사적 우연의 도움으로 우여곡절 끝에 ‘대성공’을 달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 p.286
“이 조사에서 느낀 또 하나의 놀라움은 일본의 근대적 자각(근대 사상)의 발자취가 세상의 명민한 인텔리 평론가들의 예단과는 달리, 밑바닥의 흙투성이 전통 속에서 민중 스스로의 체험에 의거한 지배 사상의 독자적인 해독을 통해서 착실하게 출발했다는 것에 대한 실증적인 확신이다. … 역사의 주류에서 밀려나고 저변의 지하수가 되었다고 해서 그 사실이 존재하지 않았다거나 상실되었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 p.60
○ 출판사 서평
– ‘저변의 풀뿌리’에서 약동하는 근대의 정신과 에너지
메이지 시대 일본 사회의 밑바닥에서는 어떤 움직임이 있었던가. 지배계급과 마찬가지로 인민들도 저마다 생활을 영위하고 즐기는 형식을 개발하면서 축제, 신앙, 기술, 의식주, 생활 행사에 이르기까지 그 삶의 보람으로서 정신적?물질적 가치를 누려 왔다. 겉에서 보면 마치 잠들어 있는 듯 보이는 ‘침묵의 민속 세계’에서 다채로운 풀뿌리 문화가 꽃피고 민중의 의식 세계는 자생적인 ‘사상’으로 형성되고 있었다.
1968년 여름 현장조사 과정에서 지은이는 니시타마 군 이쓰가이치의 산간벽지 20세대 남짓한 작은 마을 창고 안에 먼지를 덮어쓰고 있던 자료를 발견했다. 놀랍게도 거기에는 204조문의 인민헌법 초안과 ‘국회개설 기한 단축 건백서’가 있었고, 심지어 미국을 비롯하여 유럽 5개국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독일, 프랑스)과 맺은 화친조약 및 통상조약의 전문을 붓으로 정성들여 옮겨 적은 문서도 나왔다. 메이지 시대 이쓰카이치의 농민들은 학술 토론회와 학예강담회에서 토론을 벌이면서 정치와 민주주의, 세계에 대한 나름의 지향을 담아 헌법까지 기초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후카자와 곤파치 같은 농민은 전통사상을 계승하고 재해석함으로써 변혁 사상을 형성해 갔고, 지역 사회의 ‘코뮌’을 형성하며 독자적인 저항 노선을 확립해 나가고 있었다. 민중종교 덴리교와 오모토교를 창시한 나카야마 미키와 데구치 나오 같은 이들도 모두 평민 출신이었다. 31세에 짧은 생애를 마감한 이와테 현의 평민 지바 다쿠사부로는 난학 → 국학 → 신도 → 불교 → 그리스정교 → 반기독교 → 가톨릭 → 프로테스탄티즘에 이르는 정신 편력을 거쳐 근대인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 풀뿌리 변혁사상과 코뮌, 지치부 봉기
메이지유신에 이은 산업혁명 와중에 농촌 마을의 삶은 어떠했던가. 경제적 궁핍, 마을과 가족 공동체의 붕괴로 나락에 떨어진 민중들은 처음에 고리대금업자나 관리들의 비리에 대해 예를 갖추어 간청하고 탄원했지만, 점차 기생지주제와 자본주의의 모순을 자각하면서 관청을 공격하고 대대적인 반정부 실력 행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1884년 9월의 군마 사건, 가바 산 사건에 이어 10월에는 메이지 시대의 민중운동으로서는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치치부 봉기가 일어났다. 불황과 부채에 허덕이는 농민들이 곤민당(困民黨) 운동을 기반으로 부르주아 민주혁명을 표방하며 혁명군 참모부를 만들고 수천 명의 무명전사가 조직된 것이다. 농민봉기는 도시민의 폭동으로 이어졌고 주변의 광범위한 지역으로 확산되어 일본 인민들 사이에 새로운 변혁의 관념을 확산시켰다.
곤민당 운동이 흔히 생각하듯 지식인과 호농 민권가들 중심으로 펼쳐진 자유민권운동의 지도를 받은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대중운동이었다고 지은이는 강조한다. 아래 문장은 이 책의 문제의식을 잘 보여 준다.
“만약 우에키 에모리나 나카에 조민 같은 자유민권 사상가들이 이러한 굴절된 민중의 정신사에 관심을 기울이고 민중 자체의 내재적인 논리와 그 독자적인 형성 방식을 차분히 이해했다면,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저변에서 일어난 치열한 사상투쟁의 의미를 흡수했다면 일본의 변혁사상은 실재의 그것과 크게 달라졌음에 틀림없다.”(206쪽)
– 천황제와 국체, 파시즘과 군국주의의 기원
이 책에 따르면, 메이지 중기까지만 해도 천황제에 대한 저항이 컸으며 사람들은 ‘시민적인 근대’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었다.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으로 천황제가 완성되고 1905년 러일전쟁에 승리하면서 국민의식의 변화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 전승에 도취되어 국민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바야흐로 유신의 대업은 이루었다. 이 승리는 일본 문명의 승리에 다름 아니다.”
이윽고 정치뿐 아니라 교육을 통해서 황실과 국체를 근대 일본의 통일에 요체로 삼아야 한다는 논리가 온 사회로 파고들었다. 천황제 이데올로기는 과연 일본 국민을 장악하는 데 위력을 발휘했고, 어느새 일본 인민에게 거부하기 어려운 숙명적인 것, 모든 존재를 감싸는 공기와 같은 것으로 관념화되었다. 마침내 천황제와 국체 관념은 쇼와 시대 군국주의 파시즘에 이르러 정점에 이르렀고, 100년이 다 되어 가는 오늘날까지 ‘무구조의 전통’으로 일본 사회에 스며들어 있다.
하지만, 이로카와 다이키치는 천황제는 일본인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지 못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근대 일본의 사상과 문화 형성 과정에서 민중과 지식인들 사이에 제각기 성질이 다른 독자적인 법칙성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민중 편에서 본다면 상당히 깊은 곳까지 ‘국체’의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천황제에 혼을 팔지는 않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국체’가 일본 ‘국민’을 지배하기는 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민중의 정신적 중심축이 되지 못한 것이다.
이 책은 메이지 관료나 지배 엘리트, 계몽 지식인의 서구 지향적 문화와 사상이 근대 일본을 얼마나 왜곡했는지 비판하고 변혁 주체인 민중의 내면세계에서 봉건 질서가 타파되어 나가는 모습을 추적하고 있다. 천황제가 일본인의 정신 구조를 옭아매고 구속해 왔지만, 한편으로 밑바닥 민중 문화에는 천황제로 귀결하지 않는 풍부한 가능성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고유성이 강한 일본 문화에, 대다수 민중이 여전히 토속적인 깊은 침묵의 세계에 있는 단계에서 전혀 이질적인 강력한 서구 문화가 급속하게 밀려왔기 때문이다. 시야를 넓히면, 결국 일본이 직면한 세계사적인 위치의 특수성이나 이웃 나라와의 관계 속에 독자적이고 고유한 문화를 유지해 온 역사와도 관련이 있다.
“일본인은 세계에서도 드물게 평화를 사랑하는 이웃들에게 적극적으로 침략을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일본인은 그 오랜 이웃의 우의를 원수로 갚은 역사가 있다. 특히 메이지 이후 100년은 그런 이웃에 대한 일본 민족의 일방적인 침략과 약탈의 역사이며 지금도 이 나라 위정자들은 그런 역사에 대한 반성이 약하다.”(18쪽)
– 일본 지성계의 천황, 마루야마 마사오의 아카데미즘
서문을 쓴 야스마루 요시오 교수에 따르면, 이 책은 안보투쟁 시기 “대학을 봉쇄한 바리케이트 속에서 학생들에게 많이 읽히고” 전후 일본 역사학계에 민중사상사의 모델을 제시한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른바 ‘이로카와 사학’은 일본의 정신사적인 전통과 대결하는 과정에 형성되었고 그 상대는 결국 그 전통을 지탱하는 정신 구조인 천황제와 국가주의로 귀결된다.
이런 문제의식은 마침내 천황제와 국체론 연구의 또 다른 강력한 전통을 만든 마루야마 마사오를 향한다. “일본에서 ‘사상’이 전통으로 축적된 적이 없다”고 하는 인식에서 출발하는 마루야마의 주장이 지식인 엘리트에게 해당될지언정, 전체 일본 사회를 보지 못하고 대중들의 일상세계를 무시하고 있다고 비판의 날을 세운다. 사회 현실과 동떨어진 아카데미즘에 매몰되어 근대를 향한 저변의 내면세계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로카와 다이키치는 ‘정신사’라는 표현을 썼고 수많은 자신의 저작에 ‘사상사’라는 제목을 쓰지 않았다. 그는 ‘정신사’란 완성되어 표현된 ‘사상’이 아니라 사회 저변에 숨은 아직 사상화되지 않은 민중의 생활·운동과 미분화된 생활의식이라고 정의한다. 이 책에서 녹아 있는 농촌과 산촌의 생활 현장에서 찾아낸 자료는 민중의 규범과 통속도덕, 고유 신앙, ‘이에’(家) 의식, 과학정신에 이르기까지 ‘살아 있는’ 메이지 문화의 역동성과 깊이를 보여 주었고, 이런 지향과 방법론에 일본 학계는 ‘이로카와 사학’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게 된다.
○ 독자의 평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36
권력자는 왜 ‘국정 교과서’를 들이미는가?
― 메이지의 문화
‘역사(歷史)’라는 낱말을 어른이 보는 한국말사전에서 살펴보면,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으로 풀이합니다. 어린이가 보는 한국말사전에서는 “인간이 사회와 국가를 이루면서 살아온 지난날의 자취. 또는 그 기록”으로 풀이합니다. 어느 한 가지로 보자면 사회와 나라가 걸어온 길을 역사라 하는 셈이고, 다른 한 가지로 보자면 지난날 발자취라 하는 셈입니다.
역사책에 남는 이야기를 보면 으레 ‘정치 권력자’ 발자취를 갈무리하는 일에 힘을 쏟습니다. 사회를 이루는 바탕인 ‘수수한 사람들’ 모습이나 삶이나 이야기를 갈무리하는 역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역사를 책으로 쓰는 분들이 가르는 ‘시대 구분’은 언제나 ‘정치 권력자 역사’입니다. 조선, 고려, 발해와 신라, 세 나라와 가야, 옛 조선처럼, 정치 권력자가 누구인가에 따라서 이 나라 발자취를 살피지요.
일본이 단 한 번도 대륙의 강대국에 정복당하지 않았던 것은 단순히 지리적인 우연이나 대담한 무사도 정신 덕분이 아니다. 그것은 다분히 몬순 아시아 풍토의 평화로운 국제 환경 덕분이다. 특히 중국과 조선 민족이 장대한 방벽 역할을 해서 천 수백 년 동안 끊이지 않은 호전적인 기마민족의 침략에서 일본을 지켜 준 덕분인 것이다. (18쪽)
앞으로 쉰 해나 백 해쯤 뒤에 역사를 갈무리할 사람이 있다면, 아무래도 2010년대 오늘날 역사를 ‘정치 권력자’인 대통령을 한복판에 놓고 발자취를 살피리라 느낍니다. 이제껏 역사를 갈무리한 흐름을 그대로 좇는다면, 쉰 해나 백 해 뒤뿐 아니라 이백 해나 오백 해 뒤에도 똑같은 틀로 나아가겠지요.
그런데 이제는 역사를 좀 새롭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하지 싶습니다. 정치 권력자가 무엇을 했느냐를 따지는 역사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하며 살았는가를 되새기는 역사를 읽고 써야지 싶습니다. 정치 권력자가 어떤 훌륭한 일을 하거나 멍청한 일을 했느냐를 적는 역사보다는, 수수한 여느 자리에서 즐겁게 삶을 지은 사람들 이야기를 아로새길 수 있는 역사로 거듭나야지 싶어요.
왜냐하면, 역사를 배우는 까닭은 ‘역사 지식을 넓히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배우는 까닭은 옛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오늘 이곳에서 삶을 아름답게 지을 슬기를 얻고 싶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배우는 우리는 앞으로 이곳에서 지을 삶을 씩씩하고 참다우며 사랑스레 가꿀 때에 하루하루 즐겁기 때문입니다.
메이지는 일본 민족의 재능을 해방시켜 아시아 최대의 군사력과 공업력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절망적인 농촌과 도시 빈민의 비문화적 상황, 그리고 구조로서의 천황제를 불러왔다. 그 병폐는 민중의 체내를 돌아 뿌리 깊은 노예 구조로 정착했다. (35쪽)
이로카와 다이키치 님이 쓴 《메이지의 문화》(삼천리,2015)라는 책을 읽으면서 일본 사회와 역사뿐 아니라 한국 사회와 역사를 곰곰이 돌아봅니다. 일본 사회에서는 일본 역사를 어떻게 가르칠까요? 일본도 한국처럼 ‘임금님 이름’을 외우도록 시키거나 ‘임금님마다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를 가르치거나 ‘정치 권력자마다 어떤 전쟁을 벌여서 땅을 얼마나 잃거나 빼앗았는가’를 알려줄까요? 아니면, 일본 사회는 사람들한테 슬기로운 삶을 북돋울 만한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줄까요?
메이지 시대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이러한 일본의 도회지에 절망하고 있다. 거기서 보이는 것은 악취 나는 권력 의지와 이권을 챙기려는 욕심, 노골적인 돈벌이 근성이 벌이는 추악한 투쟁이었다. (51쪽)
우리가 여태 이름조차도 몰랐던 헌법초안 작성자와 마을 지도자가 모두 한 집안의 가장이자 농민이요 초등학교 교원이며 민중 생활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 ‘평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59쪽)
일본 정치나 사회는 자꾸 군국주의로 치닫습니다. 일본이 지난날 역사를 뉘우치지 않는 모습은 일본 정치·사회 권력자한테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일본도 한국 못지않게 역사를 제대로 안 가르친다고 할 만하고, 삶을 슬기롭게 가르치거나 알려주는 바탕이 제대로 안 섰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면, 이런 뿌리는 어디에서 비롯할까요. 이런 뿌리를 찾아낸다면 어떻게 고치거나 가다듬을 만할까요. 일본은 앞으로 아름다운 나라로 거듭나서 아시아뿐 아니라 이 지구별에 평화로운 길을 여는 이웃이 될 만할까요. 한국은 앞으로 아름다운 나라로 다시 태어나서 남북녘 사이뿐 아니라 이웃 아시아 나라들하고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는 평화로운 나라가 될 만할까요.
다른 나라 눈치를 보면서 평화를 헤아려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평화를 생각해서 평화라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저 나라에서 전쟁무기 한 가지를 줄이니 우리도 줄이자는 생각이어서는 평화를 이루지 못해요. 저 나라에서 새 전쟁무기를 늘였으니 우리도 새 전쟁무기를 늘이자는 생각에 갇히면 앞으로도 평화가 아닌 전쟁에 사로잡힙니다.
봉건 지배 아래에서는 그 ‘국가의 안보’를 위해서야말로 인민은 무학무지의 상태로 방치되었던 것이 아닌가. 그것이 이제는 180도 전환이다. 사회의 폐풍을 교정하여 참된 문명을 낳고 국가의 영광을 거둘 수 있기 위해서는 인민이 배우느냐 배우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고 기도 다카요시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69쪽)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로 하늘을 난 것은 1903년이었지만 일본은 이러한 발명, 발견을 거의 군사적인 측면에 이용하고 민간에서 자동차 시대나 비행기 이용은 반세기나 늦어진다. (82쪽)
《메이지의 문화》는 오늘날 일본 사회가 되도록 발판 구실을 했다는 ‘메이지’ 언저리에 정치 권력자가 아닌 ‘시골 지식인과 젊은이와 여느 마을사람’이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새로운 나라를 꿈꾸었는가, 라고 하는 대목을 짚으려 합니다. 정치 권력자 발자취로 읽는 문화나 역사나 사회가 아니라, 밑바닥에서 밑바탕을 다스리면서 샘솟거나 터져나오려고 하던 문화나 역사나 사회를 읽어서 ‘일본이 앞으로 나아갈 길은 어디인가?’를 밝히려고 하는 책입니다.
《메이지의 문화》를 읽으면, 일본 정치·사회 권력은 무척 오랫동안 ‘일본 인민(또는 민중 또는 백성 또는 사람들)’이 못 배우도록 배움길을 가로막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러다가 메이지 사회 언저리에 이르러 ‘일본 인민이 학교교육을 밟아야 나라에서 시키는 일을 잘 해내는 심부름꾼(또는 톱니바퀴 또는 부속품 또는 노예)’ 구실을 할 만하다고 깨달아서, 비로소 ‘국민 교육’을 펼친다고 이야기합니다.
일본 정치·사회에서 ‘인민 무교육’으로 오랫동안 흐르다가 ‘인민 교육(또는 국민 교육)’이 되었을 적에, 정치 권력자는 ‘국정 교과서’를 사람들한테 내밀었다지요. 나라에서 교과서에 적은 대로 배워서, 나라에서 가르치는 대로 머릿속에 집어넣으라는 뜻이었을 테지요. 나라에서 가르치는 것만 옳고, 다른 것은 머릿속에 담지 말라는 뜻이었을 테지요.
온화하고 금욕적이며 참을성 강하고 무엇보다도 ‘관리’를 무서워하던 산촌의 인민이 어떻게 다년간의 소극주의를 넘어서 의기양양하게 권력에 맞서 대항할 수 있었을까. 이 비밀은 그들이 자신의 내면적인 도덕관념으로서 민중 도덕을 극한 상태까지 관철하고 그 한계까지 파고들었을 때 비로소 열릴 수 있었던 것이다. (194쪽)
일본인의 지식인도 대중도 어느새 그 네 모서리가 보이지 않는 어두운 상자에 갇혀, 왜 자신이 이렇게까지 고통 받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탄식하면서 죽어 갔다. 그러한 황상의 상황, 더구나 그러한 모든 상황의 대상화를 용납하지 않는 속박의 논리가 대중 측에 있다는 사실이 바로 가공할 만한 일인 것이다. (264쪽)
정치 권력자가 ‘국정 교과서’ 하나로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하는 까닭은 ‘국정 교과서가 가장 아름다운 책’이기 때문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국정 교과서가 안 아름다울 뿐 아니라, 아름다움하고 동떨어진 책’이기 때문에 오직 이런 교과서로 아이들을 길들이려고 한다고 느낍니다. 나라에서 엮은 교과서가 ‘아름다운 책’이라면, 나라에서 그 교과서로 배우라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스스로 나서서 배우려 하기 마련입니다. 나라에서 엮은 교과서가 ‘안 아름다운 책’이기 때문에 마치 독재권력을 휘두르려는 몸짓으로 ‘국정 교과서’ 하나로 사회와 역사와 문화와 얽힌 지식을 가두려 하는구나 싶습니다.
이리하여, 한국 정치·사회에서도 ‘국정 역사 교과서’를 펴내겠다고 하는 흐름이 불거집니다. 학교에서 참다운 가르침을 베풀려고 하는 정책을 내놓지 않고, 좀 엉뚱한 정책을 밀어붙입니다. 아이들이 입시지옥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정책에는 등을 돌리면서, 아이들을 ‘한쪽으로 치우친 지식’에 옭아매려고 하는 독재 몸짓이 나타납니다.
그런 터무니없는 이치라도 지배 이데올로기의 핵심으로 이용되고 메이지 43년(1910년)의 국정교과서에 채용되어, 이미 존재하던 메이지 민법의 ‘이에’와는 무관했던 이름도 없도 재산도 없는 대중 가족의 마음속까지 침투해 들어갔다. (307쪽)
러일전쟁은 또 하나의 중대한 변화를 대중심리 속에 남겼다. 그것은 조선과 만주의 전쟁터로 갔던 수백만의 일본인이 거기서 직접 중국 민중을 접하고 그들에 대한 확실한 멸시 의식을 남겼다는 점이다 … 민권운동을 탄압한 후 정부는 학교령을 개정하여 ‘교육칙어’를 반포하고 반체제 교육을 단속하는 동시에 교과서를 비롯한 교과과정 전반에 대한 본격적인 체계화에 착수한다. (314, 317쪽)
책 하나를 놓고 헤아려 본다면, 이른바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만 책이 아닙니다. 천 부가 팔릴 동 말 동하는 책도 ‘책’입니다. 이천 부나 삼천 부밖에 안 팔렸대서 이러한 책이 ‘안 아름다운 책’일 수 없습니다. 십만 부나 백만 부쯤 팔려야 ‘아름다운 책’이 되지 않습니다.
많이 팔린 책은 그저 ‘많이 팔린 책’이고, 적게 팔린 책은 그저 ‘적게 팔린 책’입니다. 첫판도 다 팔지 못하고 사라져야 하는 책은 ‘잘 안 팔린 책’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나라에서 교육이나 문화 행정을 맡은 일꾼이라면, 국정 교과서 같은 굴레에 스스로 갇히려 하는 몸짓이 아니라, ‘아름다운 책’이 골고루 나올 수 있는 길을 여는 몸짓이 될 수 있어야 비로소 아름답습니다. 사람들이 한두 가지 책만 읽고 책을 더 안 읽는 바보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사람들이 ‘아름다운 책’을 꾸준히 골고루 읽으면서 스스로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슬기를 보듬도록 이끄는 참다운 정책을 펼칠 수 있어야 합니다.
교과서는 여러 가지가 있어야지요. 너무 마땅합니다. 정당도 여러 곳이 있어야지요. 아주 마땅합니다. 대통령은 한 사람이어도 장관이나 국회의원은 지역이나 정당마다 골고루 있어야 할 테고, 공무원도 지역마다 부서마다 골고루 있어야지요. 참으로 마땅한 일입니다.
고토쿠 등이 몸을 던져 제시한 것은 천황제가 자애에 가득 찬 무한 포용의 체계가 아니라 이단 배제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포학한 것이며, 그 화기애애한 그늘에 사람들의 마음을 얼어붙게 하는 가혹함을 숨기고 있는 모순 덩어리라는 진실이었다. (327쪽)
‘고른 삶’하고 동떨어질 적에 독재가 되거나 군국주의가 됩니다. ‘나누는 삶’하고 멀어질 적에 반민주가 되거나 제국주의가 됩니다. 일본 사회를 들여다보는 인문책 《메이지의 문화》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독재 아닌 평화’로 나아가고, ‘반민주 아닌 민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정치·사회 권력자가 할 일이란 참 많을 텐데 역사 교과서 하나를 바보스레 엮는다고 하는 데에 이렇게 힘을 기울이는 일이란 얼마나 부질없는지 부디 알아차릴 수 있기를 빕니다. 먼 뒷날 역사를 내다볼 수 있기를 빌어요. 오늘날 정치·사회 권력자는 평화와 평등을 이루는 길을 살펴야 하고, 에너지와 식량을 슬기롭게 자립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지 싶습니다. 이런 데에 힘을 쏟아야지요.
평화와 엇나가거나 민주를 등돌리는 정치 권력이나 사회 권력은 ‘오늘 이곳’에서는 온갖 권력을 휘둘러 저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듯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고작 다섯 해 뒤에도, 열 해 뒤에도, 스무 해나 서른 해 뒤에도 역사가를 비롯한 ‘생각 있는 사람들’은 바로 오늘 이곳에서 권력자가 저지른 어설픈 몸짓을 환하게 알아채면서 ‘새 역사를 쓰리’라 느낍니다. 어제와 모레를 함께 바라보면서 오늘을 곱게 일구는 삶을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_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