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
미르치아 엘리아데 / 문학동네 / 2006.1.27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종교학자인 미르치아 엘리아데가 몇몇 비유럽적인 종교적 행동양식과 정신적 가치관을 이해하기 쉽게 전하기 위해 쓴 책이다. 성스러움과 비속함, 숨겨진 것의 드러남, 중심의 상징, 반대의 일치와 같은 기본 개념들을 이용해 샤머니즘, 요가, 신화, 의례 등의 종교적 주제를 살핀다.
<성과 속>, <종교형태론>, <세계종교사상사> 등의 저작들에 비해 비교적 짧은 글들이지만 한 편 한 편이 인간 존재의 무한성과 사유의 신비를 밀도 높게 보여준다. 총 다섯 편의 에세이로 구성되었으며, 각 시론마다 잘 정리된 결론이 첨부되어 있다. 수록된 다섯 편의 에세이 중 앞의 네 편은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아스코나에서 에라노스 연감을 위해 발표한 것이다.
표제작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 또는 총체성의 신비’는 샤머니즘의 일부 의례에서 나타나는 무성이나 양성의 최종 목적, 또는 신화적 당위성이 바로 인간의 변화에 있다는 점을 말한다. 즉 양성적이라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대립적인 요소들을 현실의 상호보완적인 다양한 측면으로 이해하도록 만드는 통일성을 다시 회복하려는 욕구와 다름없다는 것이다.
‘신비한 빛의 경험’에서는 서양의 기독교적인 빛의 체험을 시작으로, 유대교와 에스키모 샤먼, 동양의 여러 종교적인 현상에서 나타나는 풍부한 빛의 체험을 바탕으로 초자연적인 빛의 의미를 설명한다. ‘우주의 갱신과 종말론’은 멜라네시아의 ‘화물 숭배’에서 나타나는 기독교적 천년주의 사고를 토대로, 우주의 종말론과 우주의 주기적인 탄생의 의미를 조명한다.
‘밧줄과 마술’에서는 석가모니의 일화라든가 고대 인도, 이븐 바투타가 목격한 중국의 밧줄 묘기, 비동양(유럽)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밧줄 묘기에 관한 풍부한 사례를 근거로 그 의미를 밝힌다. ‘종교적 상징주의에 대한 언급들’은 앞의 네 편과는 성격이 약간 다르다. 이 글에서 엘리아데는 종교적 상징을 대하는 기본 관점과 함께 종교사학자들의 의무까지 언급한다.

○ 목차
서문
- 신비한 빛의 경험
어떤 꿈 l 카우마네크 l ‘응고된 빛’ l 인도: 빛과 아트만 l 요가와 ‘신비스러운 빛들’ l 빛나는 신현 l 불교 l 빛과 중음 l 빛과 마이투나 l 인간ㅡ빛에 관한 티베트의 신화들 l 신비한 빛의 인도적 체험 l 중국의 기법 l 황금꽃의 비밀 l 이란 l 구약 성서와 유대교 l 세례와 예수의 거룩한 변모 l ‘불타는’ 수도사들 l 팔라마스와 타보르 산의 빛 l 빛의 신비주의 l 자발적인 빛의 경험들 l 빛과 시간 l 마지막 고찰 -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 또는 총체성의 신비
메시프토펠레스의 ‘공감’ l 대립의 합일의 선사 l 신ㅡ악마의 협력과 우주생성론적 잠수 l 데바와 아수라 l 브리트라와 바루나 l 두 좌표면 l 통합의 신화와 제의 l 19세기의 양성인 l 독일 낭만주의 l 양성인의 신화 l 신의 양성성 l 제의적인 양성화 l 원초적 총체성 l 탄트라의 교리와 기법 l 대립의 합일의 의미 - 우주의 갱신과 종말론
종말론적 나체주의 l 미국인의 도래와 사자의 귀환 l 이교와 기독교인의 혼합주의 l 세계의 소멸과 황금 시대의 도래 l 사자들에 대한 기다림과 제의적인 무위 l 캘리포니아인들의 새해와 세계의 재건 l 카로크 제의 l 새해와 우주생성론 l 세계의 주기적 재생 l 고대 로마의 루디와 아슈바메다 l 인도 왕의 축성식 l 재생과 종말론 - 밧줄과 마술
‘밧줄 묘기’ l 가설들 l 우주적 밧줄에 관한 티베트 신화들 l 니그리토족 샤먼의 줄 l 인도: 우주적 밧줄과 공기의 직조 l 직조와 건조 l 이미지, 신화, 사고 l 밧줄과 인형극 l 호메로스의 황금 밧줄 l ‘천체의 밧줄’ l 마법의 밧줄 l 상황 - 종교적 상징주의에 대한 언급들
상징주의의 유행 l 전문가의 금지 사항 l 방법론에 대하여 l 상징이 ‘드러내는’ 것 l 상징들의 역사
본문 내용이 수록되었던 문헌들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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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소개 : 미르체아 엘리아데 (Mircea Eliade, 1907 ~ 1986)
미르치아 엘리아데 (Mircea Eliade)는 1907년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에서 태어나 부쿠레슈티대학에서 이탈리아 철학 연구로 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후 인도 캘커타대학에서 3년간 산스크리트와 인도 철학을 공부하였으며, 1933년 부쿠레슈티대학으로 돌아와 요가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부쿠레슈티대학의 교수를 지냈다.
그후 1945년에 파리 소르본대학의 종교학 객원 교수가 되었고, 1956년에 시카고대학의 교수로 부임하여 그곳에서 30년 이상 가르쳤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종교학자인 이 거인은 그의 필생의 대작이자 위대한 학문적 업적으로 꼽히는 『세계종교사상사』를 3권까지 집필한 후인 1986년 4월 22일에 시카고에서 영면하였다.
주요 저서로 『세계종교사상사』(전3권), 『영원회귀의 신화』, 『종교형태론』, 『성과 속』, 『이미지와 상징』, 『요가』, 『샤머니즘』, 『대장장이와 연금술사』, 『종교의 의미』, 『벵갈의 밤』 등이 있다.
- 역자 : 임왕준
연세대학교 불문과 졸업. 프랑스 파리 4대학에서 앙드레 말로에 대한 논문으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파리 8대학 철학박사 과정에서 엠마누엘 레비나스를 전공했다. 문화부 홍보조정실에서 근무했고 전주방송국(JTV) 제작편성부장으로 방송프로그램을 제작했으며, 샘터사 주간으로 일했다. 창작집 『북회귀선』을 출간했으며, 번역서로는 『사는 법을 배우다』 『메피스트로펠레스와 양성인』(공역) 『지식인은 왜 자유주의를 싫어하는가』 『이별의 기술』 등이 있다. - 역자 : 최건원
한국외대 불어과를 졸업했다. 서울대 불문과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파리 8대학 불문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6년 현재 SBS, MBC, EBS, Q채널 번역작가로 일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말라르메와 노장’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그런데 에스키모들에게 이 유형의 투시력은 ‘번갯불’ 또는 ‘일루미네이션’이라고 불리는 신비적 체험의 결과이며, 이것 없이는 그 누구도 샤먼이 될 수 없다. 라스무센이 수집한 이글룰리크 에스키모 샤먼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카우마네크는 “샤먼이 불현듯 몸 속에서, 머릿속에서, 뇌수의 바로 한복판에서 느끼는 신비스러운 빛으로, 설명할 수 없는 등불이며,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게 해주는 밝은 불빛이다. 문자 그대로, 그리고 비유적인 의미에서. 왜냐하면 이제 그는 심지어 눈을 감고서도 칠흑 같은 어둠을 꿰뚫어볼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숨겨진 것들과 미래의 사건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샤먼은 앞날과 다른 이들의 비밀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p.22
괴테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진정한 위치를 찾아주기 위해 평생을 보낸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의 관점에서 삶을 부정한 악마는 역설적으로 신의 가장 소중하고 믿음직한 동료였다. 또한 발자크가 그의 가장 아름답고 환상적인 작품에서 수천 년 동안 인류를 떠나지 않았던 신화를 소재로 삼은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두 거장은 유럽 문학의 통일성을 믿고 있었으며, 자신의 작품이 유럽 문학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이 유럽 문학이라는 것이 그리스와 지중해와 고대 중동과 아시아를 넘어 더 먼 곳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감지했다면, 그들은 자신의 작품을 더욱 자랑스럽게 여겼을 것이다. <파우스트>와 <세라피타>에서 다시 살아난 신화들은 아주 먼 공간과 시간 속에서 온 것이다. 그것들은 역사 이전의 세계에서 출발하여 우리를 찾아온 것이다. – 본문 중에서

○ 출판사 서평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종교사가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학문적 탐구의 체계성이나 현기증 나는 정합성을 보여주기보다 끊임없이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상상력의 종교사학자로 정평이 나 있다.
이미 국내에도 엘리아데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저작이 많이 출간되어 있으며, 이번에 출간된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은 완전한 인간, 그 총체성의 신비를 꿈꾸었던 엘리아데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저작이다.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인도, 이탈리아, 말년에는 현대사상의 용광로 미국에서 생을 마친 종교학의 오디세우스 엘리아데. 그는 성스러움과 비속함, 숨겨진 것의 드러남, 중심의 상징, 반대의 일치와 같은 기본 개념들을 이용해 샤머니즘, 요가, 신화, 의례 등의 종교적 주제를 살핀다.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 “이 작은 책에 모은 연구들은 몇몇 비유럽적인 종교적 행동양식과 정신적 가치관을 이해하기 쉽게 전하려고 근심하는 한 종교사학자의 행보를 보여준다.”

○ 독자의 평
성서 특히 신약을 읽고 구약을 처음 접해본 사람들은 한번쯤은 적잖게 당황할 것이다. 그 때의 신은 복수심으로 불타는 파괴와 증오의 신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한번쯤 진지하게 고민해봤을 것이다. ‘선한 것을 알고 그것을 장려하신 분이 신인데, 왜 악도 창조하여 세상에 악이 만연하게 하였을까. 자유의지를 거론하는 이들도 있지만 구태여 번거롭게 선과 악을 선택하여 인간을 시험에 들게 하였을까. 그건 너무 쪼잔 하지 않은가’ 등등의 고민 말이다.
어쩌면 모순적여 보이는 그것들은 모두 인류가 탄생하고부터 본능적으로 갖고 있는 종교적인 심성 때문이다. 태곳적 신과 인간에게는 선과 악이 하나로 인식되어 왔다. 당시에는 이것이 놀랍지도 않았을 뿐더러, 한술 더 떠 선과 악은 함께 있을 경우에만 가능하고, 그럴 경우에만 이해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신의 특정한 성향 특히 선한 면만이 지나치게 부각되었기에, 오히려 신은 완전한 절대자에서 반쪽짜리 신으로 전락하고 만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종교인 기독교의 하느님 역시 세상(우주)의 시작, 그리고 세계의 시작(인간)을 총체성로 풀어나간다.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창세기 1:2-3)” 이때의 빛과 어둠은 우주의 혼돈(어둠)에 질서(빛)을 부여했다는 측면에서, 닷새 이후에 생기는 낮과 밤과는 다른 개념이다. 인간 역사의 시작도 마찬가지이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창세기 2:23)” 하느님은 빛과 어둠, 하늘과 땅, 남성과 여성, 창조와 파괴가 태초에 하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 나타나는 대립은 모든 것은 본디 하나로부터 발생하였으며, 언젠가는 다시 하나로 돌아가리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빛도 어둠으로부터 발생하였고, 여자 역시 남자로부터 발생한 것과 같이 둘로 나눠진 것도 본디 하나로 존재했었다는 것. 하지만 착한 신에 만족하려 했던 인간의 오만함은, 대립의 배후에 자리 잡고 있는 하나 됨 이라는 신의 숭고한 정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인간의 신앙은 대립만을 볼 수 있을 뿐, 그것을 잉태하고 있던 하나로 존재했던 시절은 보지 못하기에 반쪽짜리 믿음에 그치고 만다. 요컨대 악의 존재로부터 신을 분리하려는 결벽증적인 사고가, 신의 전능과 무지를 반증하는 자가당착에 빠진 것과 같이, 우리들의 믿음 역시 완벽에 다가가려할수록 멀어지는 모순을 겪게 된 것이다.
신화와 신앙이 이러한 구조를 띄게 된 까닭은, 성스러움 그리고 신성(神性)이란 인간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신에게 인간적인 품성과 미덕만이 존재한다면 인간은 자신들의 상상력만으로도 신을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을 텐데, 감히 위대한 신을 우리가 가늠하는 것이 가당키나 할 것인가. 그러하기에 신은 보상과 징벌로부터, 선과 악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자유로울 경우에만 위대한 신으로서 ‘남아있을 수’ 있다.
결국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임을 믿는 무아(無我)의 신앙을 가질 때에만 신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식대로 신을 재단하여 판단하고 있지 않던가. 우리의 상상력으로도 가능해진 신에게 남은 것은 결국 인간의 협소한 탐욕과 이기심뿐이다. 우리들은 선교라는 성스런 기치를 업고 지난 수세기 동안 신대륙에 믿음을 강요하고, 성전(聖戰)이라는 미명 아래 폭력을 일삼고 있으며, 전도라는 맹목적 기치 아래 타종교를 무시하고 비신자들을 모욕하고 있다. 수많은 대립적인 요소들을 상호 보완적이고 다양한 측면으로 감싸주려는 신의 자비는 보지 못하고, 저급한 수준의 차별과 배제, 갈등과 반목만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 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인간들에게 신은, 사랑과 자비 대신 분노와 강제만을 남겨놓았다.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고립되고 분리되었다는 느낌을 갖는다. 자라나면서 점점 더 커지는 그와 같은 상실감 때문인지,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은 영성체(領聖體)를 통해 신과 하나가 되기 위해 힘쓰거나, 기도를 통해 태초의 자유를 회복하려는 영혼의 여행을 위해 노력한다. 방법이야 어떠하건 우리들 마음속 깊은 곳에는 하나 되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예수로 돌아가 기도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제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십니다. 이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기 위해 서요, 또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으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들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요한17:22-23)”
천국 역시도 모두가 하나 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지 않던가.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 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뗀 아이가 살모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이사야11:6-8)”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