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모리스 블랑쇼에 대하여
에마뉘엘 레비나스, 엠마누엘 레비나스 / 동문선 / 2003.4.1
“인간이 신으로부터 벗어나 신에게로 피신한다고 적힌 이븐 가비롤의 유명한 문구처럼 진리는 삶으로 향하기 위해 삶을 벗어난다. 어떻게 세계로부터 탈출할 것인가? 어떻게 – 장켈레비치는 절대적으로 이른 것 (absolument autre)이라 부르고, 블랑쇼는 ‘바깥의 영원한 넘쳐흐름’이라 부른-타자가 시선에 포착되는 방식을 통해 자신의 타자성과 외재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그 모습을 드러낼 수-다시 말해 누군가를 위해 조재할 수-있을 것인가? 어떻게 힘을 담보하지 않은 타자의 현현이 있을 수 있는가?” – 본문 중에서
프랑스 지성사에 커다른 획을 그었던 블랑쇼와 레비나스. 블랑쇼는 레비나스가 프루스트나 발레리, 초현실주의 등을 발견하게끔 해주었고, 레비나스는 블랑쇼가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러시아 작가와 독일 현상학, 유대주의 등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책은 레비나스가 1956년부터 1975년까지 여러 잡지에 발표하였던 글을 모아놓은 것이다. 이 책은 블랑쇼의 사유뿐 아니라 둘의 관계에서 비롯되고 공유되고 발전된 사유들을 감지할 수 있게 해준다.
○ 목차
1. 블랑쇼, 시인의 시선
무신론과 비인간주의
낮과 밤
비인칭적 발화와 부재의 현전
존재의 오류
오류로의 호출
추방(유배)의 명백성
2. 종과 그의 주인
3. 앙드레 달마와의 대담
4. 『낮의 광기』에 관한 훈련들
시에서 산문으로
지옥에 대하여
상처를 주는 투명성에 관하여
어느 유모차
셋으로서의 둘에 대하여
모리스 블랑쇼의 작품 연보
역자 후기
색인
○ 저자소개 : 에마뉘엘 레비나스, 엠마누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 1906 ~ 1995)
에마뉘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는 리투아니아에서 유태인 부모 아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3년 프랑스로 유학해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수학했고, 1928~1929년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후설과 하이데거로부터 현상학을 배운 뒤, 1930년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후설 현상학에서의 직관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9년 프랑스 군인으로 2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어 종전과 함께 풀려났다. 1945년부터 파리의 유대인 학교(ENIO) 교장으로 오랫동안 일했다. 이 무렵의 저작으로는 『시간과 타자』(1947), 『존재에서 존재자로』(1947), 『후설과 하이데거와 함께 존재를 찾아서』(1949) 등이 있다.
1961년 첫번째 주저라 할 수 있는 『전체성과 무한』을 펴낸 이후 레비나스는 독자성을 지닌 철학자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1974년에는 그의 두 번째 주저 격인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가 출판되었다. 그 밖의 중요한 저작들로는 『어려운 자유』(1963), 『관념에게 오는 신에 대해』(1982), 『주체 바깥』(1987), 『우리 사이』(1991) 등이 있다.
레비나스는 기존의 서양 철학을 자기중심적 지배를 확장하려 한 존재론이라고 비판하고 타자에 대한 책임을 우선시하는 윤리학을 제1철학으로 내세운다. 그는 1964년 푸아티에 대학에서 강의하기 시작하여 1967년 낭테르 대학 교수를 거쳐 1973년에서 1976년까지 소르본 대학 교수를 지냈다. 교수직을 은퇴한 후에도 강연과 집필 활동을 계속하다가 1995년 성탄절에 눈을 감는다.
– 역자 : 박규현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으며, 파리 8대학에서 ‘모리스 블랑쇼에게 있어서의 광기의 글쓰기’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모리스 블랑쇼에게 있어서 광기의 글쓰기」「재난의 경험으로서의 글쓰기」「비-현전으로서의 책의 문제」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모리스 블랑쇼에 대하여> <연애, 그 유혹과 욕망의 사회사> 등이 있다.
○ 독자의 평 1
결혼을 하고 나이가 들고 직장에서의 내 위치가 올라갈수록 개인 시간을 만들기란 참 어려운 일임을 새삼 깨닫고 있다. 특히 돈벌이와 무관한, 개인적 시간은 가족의 양해를 구해야 하는 일임을. 그 중 하나가 책을 읽고 난 다음 짧은 서평을 쓰는 시간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읽은 몇 권의 책에 대한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이 책도 그 중 한 권이다. 쓰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쓰게 된다면, 적어도 그 책에 대한 찬사가 되어야 하고, 그 찬사가 그 책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에마누엘 레비나스의 ‘모리스 블랑쇼에 대하여’는 찬사를 받기에 충분한 책이다. 레비나스는 오래 동안 블랑쇼와의 깊은 우정을 통해 그의 세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며, 레비나스의 애정 어린 철학적 시선은 이 짧은 책을 통해 모리스 블랑쇼 – 20세기 후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에게 직,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주류 문학이 아닌 비 주류 문학에 서서, 전통적 문학에 반기를 든 작가이자 이론가였던 – 가 지향하였던 문학과 예술을 탁월하게 재구성해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현대적 문학, 또는 다가올 예술에 대한 낯설고 기묘하고,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어떤 이론과 마주하게 될 것이며, 그 앞에서 서서 그동안 배워왔던 문학과 예술의 존재를 거부하게 될 것이다.
아래 인용은 내가 그저 한 번 읽고 싶은 문구들의 일부이다. 이 책은 문학 이론서들 중에서 최고의 책들 중 한 권이 되겠지만, 아마 이 책을 언급하는 이는 드물다는 건 슬픈 일이다.
예술의 본질은 언어로부터 말할 수 없는 것으로 향하고, 작품에 의해 요소의 어두운 모습을 가시화하는 데 있다. 작품을 이렇게 모순과 더불어 묘사한다는 것은 변증법과 상관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대립항들의 교차로부터 타자를 삼키는 동일자가, 이 교차가 극복되고 그에 따라 모순이 완화되는 사유의 계획을 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사유가 이러한 변증법적 계획을 풀어놓아야 한다면, 즉 하나의 종합에 도달해야 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세계에, 가능성과 인간의 결단력의 영역에, 행동과 적합성 가운데 머무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문학은 그 어떤 사유도 다다를 수 없는 해안 – 문학은 사유할 수 없는 영역으로 향한다 – 으로 우리를 내던진다. 그 곳에서 존재-지각에 매달리는 관념론적 형이상학이 종결된다. 문학은 모든 가장 과감한 시도들에 의존해서는 벗어날 수 없는 세계의 모든 지평들을 성큼 건너가는 어떤 초월을 향한 유일한 모험이다. (23쪽)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사물들을 말들로부터 벗어나게 하며 존재에게 메아리를 울리는 근원적인 언어로 되돌아가는 것일 게다. 사물들의 존재는 작품 속에서 명명된 것이 아니라 말하여지는 것이며, 말들은 사물들의 부재를 가리킨다. 존재한다는 것은 말하는 것을 가리키지만, 그것은 모든 이야기 상대자가 부재한 상황에서 말하는 것이다. (18쪽)
블랑쇼에 의하면, 세계를 밝게 비추는 것과는 거리가 먼 예술은 세계의 기초가 되는 모든 빛이 차단된 황량한 지하의 세계를 일깨운다. 예술은 우리의 거주에, 그리고 사막에서의 오두막의 기능을 하는 건축물의 찬란함에 추방의 본질을 되돌려준다. (중략) 예술은 빛이다. 하이데거에게 이 빛은 위로부터 내려와 세계를 만들고 거주처를 구축하는 빛이다. 반면 블랑쇼에게 이 빛은 지하로부터 올라온 밤의 어두운 빛으로 세계를 해체하고, 그 세계를 기원으로, 되풀이됨으로, 중얼거림으로, 끊임없이 딸각거리는 소리로, 어떤 ‘깊은 옛날, 아주 먼 옛날’로 인도한다. 비현실에 대한 시적 탐구란 실재의 맨 밑바닥을 탐구하는 것이다. (31쪽)
○ 독자의 평 2
레비나스의 책 2권이 연이어 나왔다. 한권은 그의 3대 주저 가운데 하나인 <존재에서 존재자로> (민음사)이고 다른 한권은 절친한 친우에 대한 책 <모리스 블랑쇼에 대하여> (동문선)이다. 이전까지는 나는 그냥 ‘임마누엘 레비나스’라고 알고 있었는데(임마누엘 칸트처럼) 새로 나온 번역서들을 보니 ‘에마뉘엘’ 혹은 ‘에마누엘’이라고 불러야 하는 듯하다..
<존재에서 존재자로>는 믿을 만한 역자의 자세한 해제를 싣고 있기 때문에 굳이 부연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블랑쇼에 대한 책 역시 블랑쇼 연구로 학위를 받은 이의 번역이므로 믿어봄 직하다. 그런데, 100쪽이 안되는 책이 9,000원이나 하는 것은 좀 심하다는 생각도 든다. 일부 마니아나 도서관을 염두에 둔 책값이지 싶다 (그 마니아에 내가 속한다니!). <블랑쇼>는 불어로는 단행본으로 출간됐지만, 내가 갖고 있는 영역본에서는 <고유명사들 : Proper Names> (스탠포드대학, 1996)에 합본돼 있는데, 분량은 44쪽에 불과하다. 프랑스 철학이나 비평서들에 자주 손길이 가는 탓에 동문선의 책들을 자주 소개하게 되는데 (요즘은 ‘서문선(西文選)’이나 ‘불문선 (佛文選)’이라고 개명해야 할 듯싶다), 그들이 제값의 번역서들을 내고 있는지는 좀 의심스럽다.
레비나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 10년이 넘었다. 애초에 하이데거의 책에 눈을 뜨기 시작하다가 ‘타자’에 대한 윤리학이란 구호에 매료된 거 같은데, 덕분에 관련서만 서가 한칸을 채우고 있다 (에스토니아 출신인 그는 러시아문학의 영향을 많은 받은 철학자이다. 특히 그가 자주 언급하는 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다). 이런 까닭에 그간 드문드문 그의 책들이 소개될 때마다 반가운 마음을 갖게 된다. <전체성과 무한>, <존재와 다른 것, 혹은 존재 사건 저편>과 같은 나머지 주저들도 마저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레비나스 얘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이기상 교수의 <하이데거의 존재사건학> (서광사)이 출간됐다. 정신문화원 김형효 교수의 묵직한 책들과 함께 국내 하이데거학의 수준을 말해주는 지표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