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모차르트, 사회적 초상 :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 포노(PHONO) / 2018.2.12
독일의 대표적인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Norbert Elias, 1897-1990)는 사회학에 대한 개념을 스스로 재정의하며 새로운 시각으로 모차르트의 삶에 접근하고자 했다. “사회학은 보통 해체하고 단순화시키는 학문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나는 이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회학은 우리의 사회적 삶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또 그것을 설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본문 중에서)
그동안 모차르트에 대한 수많은 전기가 나왔지만 대부분 이 천재의 모습을 미화하는 경향을 답습해왔다고 한다면, 엘리아스의 ‘사회적’ 전기라 볼 수 있는 이 책은 천재 모차르트뿐 아니라 ‘인간’ 모차르트가 처했던 사회적 상황을 분석함으로써 역사적 인물에 대한 보다 균형 잡힌 시각을 확보하려 했던 한 노학자의 치열한 연구물이라 할 수 있다 (저자가 이 작업에 매달릴 당시 그의 나이는 여든 무렵이었다).
애초 이 책은 저자 스스로 ‘궁정 사회의 시민 예술가’라 이름 붙인 원고를 엘리아스의 책들을 꾸준히 소개하고 출간해온 사회학 박사 미하엘 슈뢰터가 간추려 정리한 것이다. 1993년 국내에 처음 소개된 적이 있으나 2018년 전집 편집자의 글과 참고문헌, 찾아보기 등을 보충하고 번역 및 표기를 새롭게 손보아 포노의 ‘음악의 글’ 시리즈의 여섯 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 음악의 글 6권. ‘천재 시대 이전의 천재’, ‘궁정 사회의 시민 예술가’, 모차르트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을 담은 책이다 <궁정 사회>, <문명화 과정> 등의 저서로 널리 알려진 독일의 대표적인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사회학에 대한 개념을 스스로 재정의하며 새로운 시각으로 모차르트의 삶에 접근하고자 했다.
그동안 모차르트에 대한 수많은 전기가 나왔지만 대부분 이 천재의 모습을 미화하는 경향을 답습해왔다고 한다면, 엘리아스의 ‘사회적’ 전기라 볼 수 있는 이 책은 천재 모차르트뿐 아니라 ‘인간’ 모차르트가 처했던 사회적 상황을 분석함으로써 역사적 인물에 대한 보다 균형 잡힌 시각을 확보하려 했던 한 노학자의 치열한 연구물이라 할 수 있다.
애초 이 책은 저자 스스로 ‘궁정 사회의 시민 예술가’라 이름 붙인 원고를 엘리아스의 책들을 꾸준히 소개하고 출간해온 사회학 박사 미하엘 슈뢰터가 간추려 정리한 것이다. 1993년 국내에 처음 소개된 적이 있으나 2018년 전집 편집자의 글과 참고문헌, 찾아보기 등을 보충하고 번역 및 표기를 새롭게 손보아 펴냈다.

○ 목차
제1부 _ 모차르트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그는 스스로를 포기했고 추락하였다
궁정 사회의 시민 음악가
‘자유 예술가’를 향한 모차르트의 걸음
수공업자 예술과 예술가 예술
인간 내면의 예술가
어느 천재의 성장 과정
모차르트의 청년기 _ 두 사회적 세계 사이에서
제2부 _ 모차르트의 반란: 잘츠부르크에서 빈으로
모차르트의 반란
해방의 완성: 모차르트의 결혼
제3부 _ 계획: 표제어로 본 모차르트의 삶의 드라마
머리말
두 개의 메모
편집자의 글 1
편집자의 글 2
옮긴이의 글
참고문헌
찾아보기
○ 저자소개 :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Norbert Elias, 1897 ~ 1990)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Norbert Elias, 1897년 6월 22일 ~ 1990년 8월 1일)는 유대계 독일인 사회학자로, 나중에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Norbert Elias)는 1897년에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난 독일의 유대계 사회학자다.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철학과 의학을 공부했고, 1924년 신칸트학파 철학자 리하르트 회니히스발트를 지도교수로 하여 박사학위 논문으로 ‘이념과 개인 : Idee und Individuum’을 발표했다. 1925년 엘리아스는 당시 사회과학과 철학의 중심지였던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가서 사회학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문화사회학자인 알프레트 베버 밑에서 근대 과학의 발달에 관해 연구했으나, 1930년 이를 포기하고 친구였던 젊은 교수 카를 만하임을 따라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그의 조교가 되었다. 엘리아스는 이곳에서 교수자격청구 논문으로 ‘궁정사회’를 집필하기 시작했으나, 1933년 나치 집권으로 만하임의 사회학연구소가 문을 닫으면서 엘리아스도 파리로 도피했다. 1935년 다시 영국으로 망명한 엘리아스는 대작 ‘문명화 과정’을 써서 1939년에 출판했다.
그후 케임브리지에 머물며 여러 곳에서 강의하면서 집단심리치료 공부도 했다. 1954년 레스터 대학에 전임강사로 임용되었고 1962년 정년퇴임 때까지 이곳에서 8년간 강의했다.
일부 사회학자와 역사학자 사이에서만 회자되던 ‘문명화 과정’이 1969년 재출간되면서 엘리아스는 뒤늦게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현대 사회학계의 거장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1977년에 ‘아도르노 상’을, 1987년엔 ‘사회학 및 사회과학 부문 유럽 아말피 상’을 수상했다. 그밖에 ‘사회학이란 무엇인가?’ (1970), ‘죽어가는 자의 고독’ (1982), ‘인간의 조건’ (1985), ‘개인의 사회’ (1987) 등을 저술을 남겼다.
1990년 8월 1일, 암스테르담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 역자 : 박미애
1955년 경남 울산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대학에서 사회학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유교예법을 통한 가부장제도Patriarchat durch konfuzianische Anstandsnormen》 《인간복제에 관한 철학적 성찰》(공저) 등이 있으며, 《막스 베버》 《새로운 불투명성》 《문명화 과정 1, 2》《로자 룩셈부르크》 《생각 붙잡기》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공역)《기득권자와 아웃사이더》 《냉소적 이성비판 1》(공역), 《전체주의의 기원》(공역)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 책 속으로
P.10
모차르트라는 단순한 이름이 많은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음악적 재능의 상징이 되어버린 오늘날, 그토록 마법적인 창조력의 소유자인 그가 다른 사람들의 호의와 사랑을 얻지 못했다고 해서 자기 삶의 가치와 의미를 깊이 회의했으며, 그 때문에 너무 일찍 죽었을 수도 있고 그래서 아직 탄생하지 못한 많은 작품들을 무덤으로 안고 갔을 수도 있다는 주장은 어쩌면 잘 납득이 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특히 우리가 그것을 창조한 사람이 아니라 그의 작품에만 흥미를 가질 때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연관성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삶을 평가하는 데 사용할 법한 잣대로 타인의 의미 실현이나 의미 상실을 가늠하는 오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P.16
한 인간을 이해하려면 그가 간절히 성취하고자 하는 지배적 소망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한다. 그의 삶이 그 자신에게도 의미 있게 흘러가는지의 여부는 그가 그 소망을 이루는가, 어느 정도만큼 이룰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P.24~25
우리가 말하는 제후들의 궁정이란 원래 제후의 가정을 의미했다. 음악가들은 그런 큰 집안에서 과자 제조공이나 요리사 또는 시종 들처럼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었고 궁정의 위상 서열에서 보통 이들과 같은 위치를 차지했다. 조금 비하해서 표현한다면 그들은 ‘궁정 아첨꾼들’이었던 것이다. 대다수의 음악가는 궁정에서 종사하는 다른 시민 계급 출신들처럼 처우에 만족해했지만 그러지 못했던 사람들 중 하나가 모차르트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그 역시 벗어날 뾰쪽한 방도가 달리 없었기 때문에 주어진 상황에 마지못해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것이 모든 음악 천재가 자신들의 재능을 펼쳐야 하는 고정된 사회적 구조이자 틀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 조건들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시대 음악의 종류, 소위 ‘양식’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P.27
모차르트의 비극은 결국, 그의 음악적 환상과 양심이 아직 그 사회의 전통적 취향에 묶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나 창조적 작업에 있어서 순전히 혼자 힘으로 사회 권력 구조의 벽을 부수려 했다는 데 있다. 그것도 전래의 권력 관계가 온전했던 사회적 발전 단계에서 말이다.
P.56
소외 계층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모차르트도 궁정 귀족들의 멸시에 괴로워했고 분노했다. 그러나 사회의 고위 계층에 대한 적대감은 강한 긍정과 병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바로 이들의 인정을 받고 싶어 했고, 자신의 음악적 업적으로 동급의 인간으로 대우받기를 원했다. 이러한 이중성은 무엇보다도 궁정의 고용주를 격렬히 거부하면서도 동시에 독립한 ‘자유 예술가’로서 주로 궁정 귀족으로 이루어진 빈 청중의 호감을 사려 했다는 데서 표출된다.
P.84
모차르트를 이야기하면 ‘타고난 천재’니 ‘천부적인 작곡 능력’이니 하는 말들이 쉽게 나온다. 그러나 이는 생각이 좀 모자란 표현 방식이다. 우리가 한 인간의 구조적 특성을 선천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눈빛이나 머리 색깔처럼 그것이 생물학적으로 유전되는 특징이라고 가정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한 인간이 모차르트의 음악처럼 그렇게 예술적인 것에 대한 천부적 소질을 유전자 속에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P.96~97
모차르트와 같이 그토록 경이로운 인간의―비단 그뿐만 아니라―인격 구조에 대한 간략한 언급은 인간 모차르트와 예술가 모차르트를 마치 별개의 두 사람인 양 나누어 말하는 습관이 자명성을 상실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과거 사람들은 인간 모차르트를 천재의 이상형에 들어맞도록 이상화하려 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술가 모차르트를 일종의 초인으로, 인간 모차르트에 대해서는 가벼운 경멸감을 가지고 다루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그에게 합당치 못한 평가다.
P.107~108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그때까지 찾지 못했던 자기 삶의 의미를 아들을 통해 구하려 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정당했는지 묻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자기 존재의 의미 실현이 문제될 때 인간은 무자비하고 가혹해질 수 있다. 20년 동안 아버지는 마치 조각가가 작품을 빚듯이 아들에게 공을 들이고 작업한다. 그의 말처럼 은총의 주님이 그에게 선사해준 신동, 아마 자신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이 없었다면 현 위치에 설 수 없었을지도 모를 그 신동 아들에게 말이다 (…) 현대 심리 치료의 시나리오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물에는 소유욕 강한 엄마 (possessive mother)가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관찰한 바로는 소유욕 강한 아버지는 드물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아마 이 유형의 한 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P.157~158
모차르트가 당시의 지배층에 대해 공격적이었고 이런 공격성이 그의 인격 구조의 지배적인 특성이었다는 사실은 훗날 경력을 보면 분명해진다. 그의 자존심이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러나듯이 ‘아부’에 대한 혐오를 생각해보라. 교황이 내린 귀족 칭호를 사용하기를 단호히 거부한 그의 태도, 모차르트의 훈장보다 낮은 급의 훈장을 받고도 평생 ‘기사 폰 글루크’라 자칭한 글루크와는 달리 ‘기사 폰 모차르트’로 나서기를 싫어했던 태도는 그가 자신을 궁정-귀족적 기득권층과 동일시하지 않았다는 징표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태도 역시 이중적이고 모순적이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이런 거부감은 궁정 귀족 계급으로부터 인정받고 동등하게 대우받고 싶다는―작위가 아닌 음악가로서의 업적을 통해―욕구와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일자리를 구하는 과정에서 그는 이미 이런 인정을 거부당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확실히 지배 사회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두드러졌다. 동물적인 배설에 대해 언급하려는 성벽에는 억압된 공격욕이 분출되고 있다고 해도 전혀 터무니없는 주장은 아니다. 그의 일생의전체적 맥락에서 볼 때 이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P.190~191
그러나 모차르트의 ‘어린아이’ 같은 성격을 말하다 보면 우리는 다른 측면에서 그가 얼마나 어른스러웠는지 쉽게 잊어버린다. 그 증거는 한 나라의 군주인 자신의 고용주에 대한 개인적 반란을 실행하면서 그가 보였던 단호함이며, 그 못지않게 중요한 증거는 훨씬 더 어려웠을 아버지에 대한 반란이다. 모차르트가 어른이 되어간다는 표시이기도 한 이 결별의 위기는 성장기의 경험이라는 의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상적 경우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의 분리 자체는 그 선행 단계인 결합의 강도와 기간을 생각할 때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것은 그의 교육에 비추어볼 때 우리를 놀라게 하는 그의 강한 성격을 증명해준다.
P.214~215
모차르트가 살았던 시대의 음악 발전은 궁정의 취향에 의해 결정되었다. 모차르트의 개인적 태도는 자신의 환상의 흐름에 충실하려 하고 예술가적 양심의 자기 통제에 따르려 했던 ‘자유 예술가’적 태도였던 반면, 생계 수단은 전적으로 궁정 귀족의 손에 달려 있었다는 사실이 그의 비극적 삶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된다.
P.221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1990년 8월 1일 사망했다. 저자 본인은 이 책의 완성을 더 이상 경험할 수도 감독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모차르트 책에 대한 나의 제안에는 그도 동의했다(모차르트 서거 200주년인 1991년을 의식하지 않고). 제목도 그 스스로 붙인 것인데, 이는 그가 발행할 서적을 자신의 저작으로 인정했음을 말해준다.
P.228~229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모차르트, 사회적 초상 _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은 이러한 편견에 강한 물음표를 붙인다. 그는 “모차르트는 타고난 천재이다”라는 통상적 견해를 “모차르트는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천재이다”라는 명제로 상대화시킨다. 그렇다고 해서 노르베르트 엘리아스가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약화시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오히려 한 예술가가 사회적으로 태어나는 과정을 정치하게 서술함으로써 천재적 예술가에게 요청되는 반역적 저항적 성격을 명쾌하게 보여준다.

○ 출판사 서평
- ‘천재 시대 이전의 천재’, ‘궁정 사회의 시민 예술가’, 모차르트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어떤 사람이 한 서랍에는 예술가적 특성을, 다른 서랍에는 인간적 면모를 넣어 두지는 않는다.”
“나의 목표는 모차르트의 인간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모차르트의 운명과 같은 길을 걸어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의 질문을 어느 정도 해명하려는 것이다.”
- 현대 사회학계의 거목 엘리아스의 마지막 작업, ‘어느 천재의 사회학’
오늘날 모차르트(1756-1791)는 종종 ‘천재’의 모습으로 이상화된다.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천재 음악가였던 모차르트. 불과 다섯 살부터 작곡을 시작했으며 즉흥적인 피아노 연주에도 능했고 훌륭한 작품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던 인물, 하지만 운명의 칼날을 비껴가지 못해 자신의 무한한 환상을 너무 일찍 무덤 속에 함께 가져가 버린 비운의 천재.
여기서 그의 삶을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조금 다른 모습이 보인다. 과연 그는 ‘모든’ 사람이 우러르는 존재였을까, 그의 천재성은 오로지 그 자신의 내면으로부터만 자연스럽게 발현된 결과물일 뿐인 걸까?
《궁정 사회》, 《문명화 과정》 등의 저서로 널리 알려진 독일의 대표적인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1897-1990)는 사회학에 대한 개념을 스스로 재정의하며 새로운 시각으로 모차르트의 삶에 접근하고자 했다. “사회학은 보통 해체하고 단순화시키는 학문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나는 이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회학은 우리의 사회적 삶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또 그것을 설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본문 중에서)
그동안 모차르트에 대한 수많은 전기가 나왔지만 대부분 이 천재의 모습을 미화하는 경향을 답습해왔다고 한다면, 엘리아스의 ‘사회적’ 전기라 볼 수 있는 이 책은 천재 모차르트뿐 아니라 ‘인간’ 모차르트가 처했던 사회적 상황을 분석함으로써 역사적 인물에 대한 보다 균형 잡힌 시각을 확보하려 했던 한 노학자의 치열한 연구물이라 할 수 있다(저자가 이 작업에 매달릴 당시 그의 나이는 여든 무렵이었다).
애초 이 책은 저자 스스로 ‘궁정 사회의 시민 예술가’라 이름 붙인 원고를 엘리아스의 책들을 꾸준히 소개하고 출간해온 사회학 박사 미하엘 슈뢰터가 간추려 정리한 것이다. 1993년 국내에 처음 소개된 적이 있으나 2018년 전집 편집자의 글과 참고문헌, 찾아보기 등을 보충하고 번역 및 표기를 새롭게 손보아 포노의 ‘음악의 글’ 시리즈의 여섯 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 모차르트를 둘러싼 두 개의 세계 : 궁정 사회와 시민 계급의 아버지
‘궁정 사회의 시민 예술가’. 모차르트의 당시 사회적 위상에 대해 이보다 더 집약적으로 표현해주는 말은 없을 것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모차르트는 위대한 예술가로 기억되며 지금의 기준에서 보면 누구에게나 대접받았을 것 같지만 그가 태어난 18세기 중반의 유럽은 궁정 귀족 집단과 시민 집단 사이의 격차가 매우 뚜렷한 계급 사회였고, 모차르트는 그러한 사회 구조 안에서도 ‘시민’ 계층의 운명을 안고 태어났다. 궁정에 속한 음악가로서 그의 지위는 과자 제조공이나 요리사 등과 마찬가지로 ‘시종’, 더 심하게는 ‘궁정 아첨꾼’에 불과했던 것이다. 과연 현대의 기준에서 볼 때 모차르트와 같은 천재 음악가가 아첨꾼의 지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하지만 바로 이와 같은 현실적 상황을 직시함으로써 모차르트에 대한 이해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자신의 음악적 능력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던 모차르트는 궁정 음악가로만 국한된 삶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가 봉직했던 잘츠부르크 궁은 그에게 우물이나 다름없었다. 유럽 곳곳의 도시와 궁정 들이 손을 뻗쳤고 그는 우물을 벗어나 그 모든 곳으로, 특히 빈으로 가서 자유 예술가의 삶을 살고 싶었다. 빈의 황제와 귀족 청중은 그를 반기고 그의 음악을 사랑했지만, 그들은 금방 싫증내는 사람들이었고 제아무리 후한 대접을 받는다 한들 그들에게 그는 한낱 ‘아랫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잘츠부르크를 떠나더라도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엄청난 착각이었음이 곧 밝혀지고, 이러한 현실의 벽은 귀족 계급에 대한 모차르트의 적대감으로 이어진다(반 귀족적인 내용의 〈피가로의 결혼 : Le nozze di Figaro〉〈돈 조반니 : Don Giovanni〉 등에서 그의 이런 성향이 드러난다).
하지만 여기서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할 점은 모차르트의 이중성이다. 그는 귀족 계층에 반감을 갖고 그들의 감정 및 행동 규범을 체득하길 거부했다. 아부도 혐오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들의 인정은 갈구했다. 그의 작품 역시 귀족 집단의 음악 규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모차르트는 어떤 의미에서 두 개의 사회적 세계 속에서 살았고, 그의 일생과 작품 창작 역시 이러한 이중적 모순의 특징을 강하게 지닌다고 이 책은 설명한다.
모차르트를 둘러싼 좀 더 작은 사회라 할 수 있는 그의 가족, 그중에서도 아버지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모차르트, 사회적 초상》은 아버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아들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분석을 시도한다.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아들을 향한 교육열은 그 자신의 절실한 꿈과도 아주 밀접히 맞닿아 있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성공의 꿈을 아들을 통해 이루려는 욕망은 그를 학문적인 관점에서도 매우 드문 유형인 ‘소유욕 강한 아버지(possessive father)’로 만든다. 이런 아버지 밑에서 20년 동안 지내면서 모차르트가 명연주가로서의 기틀을 닦은 것도 사실이지만, 종종 별나다고 여겨지는 성격 또한 이와 같은 가정환경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또 다른 측면에서 지배질서에 대한 모차르트의 적개심은 아들과 달리 그 사회에 복종했던 아버지와 그 아버지에 대한 반항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 “모차르트는 타고난 천재가 아닌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천재다.”
엘리아스가 모차르트를 둘러싼 겹겹의 사회적 환경을 광범하게 서술함으로써 깨부수고자 한 것은 타고난 천재에 대한 신화적 환상이며, 천재 모차르트와 인간 모차르트를 분리해 생각하는 후세의 편협한 사고방식이다. 저자의 글을 읽어나가다 보면 모차르트가 지닌 음악적 탁월함은 생물학적으로 타고났다기보다는 그가 살아내야 했던 환경과 시대에 적응하거나 저항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고 보는 의견에 더욱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모차르트는 결코 궁정과 그곳의 왕과 귀족 들이 원하는 대로만 작품을 만들지 않았다. 그들에 대한 반감과 저항은 모차르트로 하여금 궁정적 전통에 기반하되, 개인적 방식을 통해 그만의 환상을 음악의 언어로 풀어내게끔 했다.
우리는 종종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말하면서 마치 같은 사람이 아닌 듯한, 조금은 부정적인 뉘앙스로 그의 인격적인 면을 거론하곤 했다. 하지만 저자의 표현대로 “어떤 사람이 한 서랍에는 예술가적 특성을, 다른 서랍에는 인간적 면모를 넣어 두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둘을 따로 떼어 생각하는 게 부자연스러운 일 아닐까. 동물적인 배설에 대한 언급이나 농담 등은 지배자층에 대한 억압된 공격욕의 분출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는 그가 작곡한 반 귀족적인 오페라 등과 비교했을 때 어찌 보면 그 수단만 다를 뿐이다. ‘어린아이’ 같은 성격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어떠한가. 그가 정말 어린아이처럼 철없기만 했다면 자신을 20년 동안이나 지배해온 아버지를 떠나고 자신의 주인을 떠나면서 순전히 혼자 힘으로 사회 권력의 구조를 부수려는 용기를 발휘할 수 있었을까. 그를 움직인 것은 단 한 가지. 자유롭게 음악을 만들고 그 음악으로 수많은 청중의 사랑을 얻고자 하는 소망이었다.
‘천재 시대 이전의 천재’. 이 책에 따르면 모차르트가 처한 당시 사회적 상황은 구조적으로 그가 한계에 몰릴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그보다 15년 늦게 태어난 베토벤 (1770-1827)의 경우 음악가의 위상이나 출판 활동에 따른 경제적 보상 등 모든 면에서 상황이 나았으니 어찌 보면 모차르트는 얄궂은 운명을 살았다 할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시대의 영웅들 앞에는 늘 가혹한 운명이, 마치 운명처럼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운명이 그들의 이름을 역사에 아로새겼다. 모차르트의 운명은 ‘천재’보다는 ‘시대’ 그 방점이 찍혀야 하지 않을까.
우리를 둘러싼 사회를 해체하고 단순화시키기보다는 여러 어려운 부분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일을 학문 연구의 목표로 삼은 노학자의 철학과 만년의 흔적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책이다.
- ‘음악의 글’ 시리즈
‘음악의 글’은 음악전문출판사 포노가 선보이는 새로운 시리즈로, 음악을 좀 더 깊이 읽고 폭넓게 이해하는 통찰이 담긴 글들을 한데 모읍니다. 제1권은 최초의 근대적 음악평론가 가운데 한 사람인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의 《음악과 음악가 _ 낭만시대의 한가운데서》, 제2권은 리트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데 평생 헌신했던 성악가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의 《리트, 독일예술가곡 _ 시와 하나 된 음악》, 제3권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음악가, ‘미국 음악의 목소리’ 에런 코플런드의 음악 사용 설명서 《음악에서 무엇을 들어 낼 것인가》, 제4권은 프랑스 음악의 위대한 정신 클로드 드뷔시가 자신의 분신 크로슈 씨를 통해 들려주는 음악 이야기 《안티 딜레탕트 크로슈 씨》, 제5권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신학자 한스 큉의 《음악과 종교 _ 모차르트 – 바그너 – 브루크너》입니다.
○ 언론소개
사회학자 엘리아스 눈으로 바라본 ‘천재 모차르트’ : 신간 ‘모차르트, 사회적 초상’
신간 ‘모차르트, 사회적 초상’ (포노 펴냄)은 ‘궁정 사회’, ‘문명화 과정’ 등으로 유명한 독일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1897~1990)가 ‘천재’라는 단어 안에 갇혔던 모차르트의 삶에 사회학이란 돋보기를 들이댄 책이다.
애초 이 책은 1993년 국내에 처음 소개된 바 있으나, 참고문헌 등을 보충하고 번역 및 표기를 손보아 이번에 새롭게 출간됐다.
불과 5세 때 작곡을 시작했고 즉흥적인 피아노 연주에 능했으며 뛰어난 작품으로 후세에 칭송받고 있는 모차르트. 그간 발간된 수많은 모차르트 전기들이 이런 천재성을 미화하는 데 집중했지만 엘리아스는 인간 모차르트가 처했던 사회적 상황을 광범위하게 분석한다.
이를 통해 엘리아스는 모차르트를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천재’가 아닌,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천재’로 인식한다.
모차르트가 태어난 18세기 중반의 유럽은 궁정 귀족 집단과 시민 집단 사이의 격차가 매우 뚜렷했고, 모차르트는 그러한 사회 구조 안에서 ‘궁정 아첨꾼’ 정도의 지위를 지닌 궁정 음악가였다.
저자는 모차르트의 천재적인 음악성이 이러한 시대에 적응하거나 저항하는 과정에서 형성됐다고 분석한다.
“소위 계층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모차르트도 궁정 귀족들의 멸시에 괴로워했고 분노했다. 그러나 사회의 고위 계층에 대한 적대감은 강한 긍정과 병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바로 이들의 인정을 받고 싶어 했고, 자신의 음악적 업적으로 동급의 인간으로 대우받기를 원했다.”(56쪽)
즉, 모차르트는 귀족 계층에 대한 반감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인정을 갈구했으며 귀족 집단의 음악 규범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저자는 모차르트의 일생과 창작 과정이 궁정 사회가 시민 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모순과 갈등, 이중성으로 가득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모차르트의 비극은 결국, 그의 음악적 환상과 양심이 아직 그 사회의 전통적 취향에 묶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나 창조적 작업에 있어서 순전히 혼자 힘으로 사회 권력 구조의 벽을 부수려 했다는 데 있다. 그것도 전래의 권력관계가 온전했던 사회적 발전 단계에서 말이다.”(27쪽)
옮긴이 박미애는 ‘옮긴이의 글’을 통해 “엘리아스의 글을 읽어가면 우리는 한편으로는 기존의 관습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려는 모차르트의 고뇌를 피부로 느낄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모차르트와 천재적 예술가에 관한 우리의 선입견을 수정하게 된다”고 적었다.
○ 독자의 평 1
우리가 모차르트에 대해 알고 있는 바는 얼마나 될까? 살아서 이름을 알렸고 죽어서는 더 유명해진 천재 작곡가, 아버지의 혹독한 훈련, 신동으로 알려졌던 어린 시절의 연주 여행,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 이른 죽음, 말년의 경제적 쪼들림, 미완성으로 남은 레퀴엠, 아내 콘스탄체, 누이 난네를, 살리에리, 마리 앙투아네트 등을 떠올린다면 그나마 좀 아는 것일까? 그런데 이 모든 것은 개인사다. 잘못하면 누군가의 삶을 가십의 연속으로만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모차르트의 삶을 그가 살았던 사회의 상과 연결해서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한 사람의 삶의 모습은 그 자신과 그가 살았던 시대/사회의 틀과 상호 작용에 의해 형성됨을 나타내고자 한다.
모차르트는 궁정 사회가 힘을 잃는 조짐을 드러내고 시민 계급의 힘이 부상하기 시작하는 시점의 유럽 사회에서 살았다. 그는 궁정 사회의 주역이 아니라 시민 계급의 영역에 속했다. 궁정 사회의 특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궁정 사회가 자신에게 지시하는 일만을 하기에는 자신의 자유 의지가 허락하지 않았고 사회 변화의 움직임에도 영향을 받았다. 적은 급여를 받는 삶에 만족하지 않고 작곡가, 연주가로서 독립하여 성공한 삶을 살고 싶었다. 사회는 서서히 그런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잘츠부르크 주교와 결별하게 되는 배경이기도 하다.
엘리아스는 모차르트의 성격이 사회가 그에게 허락한다고 이해한 범위 안에서 어떻게 표출되는지 그린다. 자신은 이해받는다고, 자신의 능력이 높이 인정받는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성공하기를 갈망했던 빈 사회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만큼만 모차르트를 받아들인다. 아직 도전하는 하층 계급을 완전히 수용하기에는 이른 시기였나보다. 그가 자신을 드러내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그 시절 그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으로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19번과 그후 자신을 마음껏 드러내면서 작곡한 피아노협주곡 20번에 대한 이야기는 슬프다. 그보다 늦게 태어난 베토벤의 성공을 보자면 모차르트가 조금 더 늦게 그 사회를 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결국 모차르트는 자신이 바라던 현세에서의 성공을 이루지 못하고 이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 책은 엘리아스의 사후 ― 1990년에 93세의 나이로 사망 ― 그의 유고를 정리해서 펴낸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3부로 나뉜 각각의 부분이 다소 거칠게 연결된다고 이해된다. 그렇다고 책을 이해하기 어렵다거나 이상한 논지가 펼쳐진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 책의 발간 이후 엘리아스의 방법처럼 예술가의 삶을 그들이 살았던 사회의 모습에 투영해서 바라보고 이해하려는 접근이 늘었다고 들은 바 있다. 그만큼 영향을 끼친 의미 있는 책인 것이다.

○ 독자의 평 2
젊은 음악가 볼프강 모차르트는 1781년 5월. 그의 고용주이자 잘츠부르크 대주교 콜로레도 백작과의 불화 끝에 궁정과의 관계를 끊는다. 형식은 해고였지만, 그가 박차고 나온 거나 다름 없었다. 인정 받는 음악가가 먹고 살 걱정은 없겠다고 여겼겠지만, 그는 그로부터 10년 후 1791년 서른 다섯의 나이로 죽었다. 그는 행려병자와 같이 처리되어 아무데나 묻혔고, 지금은 묻힌 곳을 찾을 수 없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천재 음악가의 인생은 그렇게 허무했다.
모차르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3』이다. 거기서 주경철 교수는 모차르트를 단순한 음악적 천재로만 소개하고 있지 않았다. <혁명을 예감한 천재 예술가>라는 제목은 다소 과장되어 보이지만, 모차르트는 하이든의 세계에서 베토벤의 세계로 넘어가는 도중, 근대의 모순을 한껏 머금은 시대적 불화의 표상이었다. 그를 좀더 알고 싶었고, 이후 짚이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저자는 보지 않았었다. 그런데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였다. 『문명화 과정』이라는 명저의 주인공이다. 스티븐 핑커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목가적인 과거와 타락한 현재라는 고정 관념을 뒤흔들었다.”고 평가했다. 말하자면 그는 사회학자다. 그런 사회학자가 모차르트에 대해서 모차르트에 대해서 왜 썼을까?
엘리아스가 모차르트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얘기하고 있는 것은 두 가지다. 한 가지는 시대와의 불화다. 궁정에 소속되어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게 당시 음악가의 처지였다. 시민 사회가 형성되고 있었지만, 음악은 그 흐름에 가장 뒤쳐졌던 예술 분야였다. 궁정에 소속된 음악가라는 것은 궁정 하인과 거의 비슷한 신분임을 의미했다. 궁정 주인의 취향에 따라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고, 혹은 다른 시중까지 드는… 볼프강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그런 신분을 받아들였지만, 또한 자식까지 그런 신분으로 살아가는 것은 원치 않았다. 아니 그런 신분이더라도 더 좋은 대우를 받기를 원했다. 그리고 모차르트는 그 굴레를 벗어던지기를 소망했다. 그래서 그가 어떤 정치적 이념이나 정연한 논리를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궁정과 아버지에 대해 투쟁했고, 그것은 또한 시대에 대한 투쟁이기도 했다: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반항은 아버지가 복종했던 그 시대의 지배 질서에 대한 적개심으로 전이된다.” (148쪽)
또 하나는 천재라는 표상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흔히 모차르트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그의 음악과 그의 인생을 분리하기도 한다. 그의 놀랄 만큼 훌륭한 음악에 비해서 미성숙한 성격을 이갸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아스는 단호하게 그것을 부인한다. 천재란 단순한 개인적 능력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그 사람의 인격적인 면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그를 인격적으로 미성숙했다고 보는 것은, 시대를 잘못 파악하는 것이며, 또한 천재의 사회적 성격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한 서랍에는 예술가적 특성을, 다른 서랍에는 인간적 면모를 넣어 두고 있지 않다.” (130쪽)
이 책은 엘리아스가 생전에 펴낸 책이 아니다. 미발표 원고를 추려 정리해서 엮은 책이다. 그래서 마무리가 허술하다. 그래도 모차르트라는 천재 음악가를 그냥 음악가가 아니라 ‘사회적 표상’, ‘시대적 표상’으로 인식하는 데에는 충분하다.

○ 독자의 평 3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모차르트 :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고전주의 작곡가인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살던 시절에는 작곡가들이 귀족들이 부리던 집사나 요리사, 정원사와 같은 신분으로서 살았고 하이든도 평소에는 하인의 복장을 하고 지냈다고 하네요.
유태계 독일인인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1897~1990)가 쓴 모차르트 평전 (“모차르트 :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 박미애 역)에는 그 당시의 사정이 잘 서술돼 있습니다.
귀족들은 자신들이 부리고 있는 음악가들을 하인처럼 부리면서 작곡하는 음악의 내용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까지 지시했다는 겁니다.
이런 것을 엘리아스는 “수공업 예술”이라고 일컫습니다.
귀족들의 주문에 맞춰서 그들이 요구하는 성격의 곡을 그들이 요구하는 기한 내에 만들어내는 것이 작곡가들의 당연한 의무이고 미덕이었었죠.
모차르트의 작품들이 지금까지 “고전”으로 남아 있는 것은 그가 귀족들의 이런 요구에 분노와 거부감을 갖고 잘츠부르크의 궁정에서 백작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이고 뛰쳐나와 빈과 유럽 각지의 대도시를 집시처럼 떠돌아다니면서 “자유 예술가”로서의 실험적인 행보를 시대에 반항하는 정신으로 힘들여 실천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모차르트가 그렇게 원하던 자유 예술가에의 꿈은 그의 생전에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고 프랑스 혁명이 성공한 이후에 베토벤이나 그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이 거의 연주되지 않는 작품들도 많은 반면에 후기에 갈수록 세인들에게 크나큰 찬사와 빈번한 연주 속에 불멸의 위치를 얻고 있는 작품이 많아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작곡가들을 변호하는 입장에 서서 그들이 귀족들에게 소위 “아부”를 한다는 것이 현대 사회에서 자리 보존과 승진을 위해서 샐러리맨들이 노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그 당시의 봉건적인 체제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현대의 모범적인 샐러리맨들이 취하는 행위들과 아무런 차이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귀족들에게 선택된 엘리트라는 자부심 속에서 귀족 사회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좀 더 끌어올리려 애쓰면서 살았을 겁니다.
그리고 귀족들의 세련된 취향에 맞추다 보니 고상하고 품위 있는 곡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겠죠.
현대의 가수들이 수요층의 기호를 연구해서 그들의 취향에 맞춘, 선율과 가사와 율동으로 좀 더 많은 인기를 얻고 좀 더 많은 음반을 팔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와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아부”라기보다는 “인정받기 위한 노력”이라는 말이 훨씬 더 합당할 것같습니다.
그 시대에 대해서 얘기할 때에는 그 시대의 가치관을 적용해서 얘기해야지, 현대의 가치관을 무차별적으로 대입해서 얘기한다면 과거의 예술가들에 대한 모욕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