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모택동 vs 장개석 : 중국국공혁명사
이건일 / 삼화 / 2014.11.28
중국공산당의 모택동과 중국국민당의 장개석, 이들 두 영웅이 중국대륙을 통일하고자 대결했던 지혜와 전략의 경쟁은 지금도 늘 세인의 관심사가 되어 오고 있다.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하지만, 그래도 특정한 역사시기의 경우에는 영웅이 시대를 만들어 나간다는 반작용의 논리가 부정되지는 않는다면 그 관심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
『모택동 vs 장개석』는 우리의 미래를 조망하고 방향을 설정하는데 꼭 읽어야 할 중국의 혁명사를 모택동과 장개석을 중심으로 풀어가는 책이다. 군사작전에 승리하고 정치에 진 장개석, 남쪽 험한 오령의 산속으로 도망하여 연안으로 대장정을 거치면서 국제파를 몰아내고 공산당 당권과 군권을 장악한 모택동의 승리까지, 매순간 마다 정략이 난무하던 중국의 50년 드라마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 혁명세력을 이어받은 강자 장개석과 연안으로 쫓겨 간 모택동의 중국의 혁명사
우리에게 중국은 영원한 관심지역이다. 중국의 운명은 어쩔 수 없이 우리에게 깊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지난 50년간의 중국의 몸부림과 군벌들의 분열, 그리고 통합을 내건 국민당과 공산당의 드라마는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데 꼭 짚고 넘어가야할 역사이다.
중국의 이 역사는 바로 그들의 미래로 이어지고, 오늘 우리에게도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런데 …. 우리는 너무도 중국의 현대사를 모르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미래를 조망하고 방향을 설정하는데 꼭 읽어야 할 중국의 혁명사, 모택동vs장개석! 독서계에 던지는 신선한 충격이다.
○ 목차
들어가면서
제1장 민족과 민주의 2개 주제
아편전쟁과 민족주의의 형성
자강운동과 민주주의
제2장 정당의 출현과 군벌정치
손문의 혁명활동과 중국국민당
원세개의 사망과 군벌정치
중국공산당의 출현
제3장 제1차 국공합작과 중국공산당의 혁명전략
국공 양당의 민족과 민주 문제
중국공산당의 혁명전략과 타협정책
손문과 요패의 합작선언
국공합작과 중국공산당의 분열공작
중국국민당의 내홍과 좌우 대립
중산함사건과 장개석의 등장
장개석의 북벌전쟁
중국국민당의 청당운동과 남경정부의 수립
코민테른의 공작과 무한정부
제4장 중국공산당의 무장투쟁과 홍군의 건설
국공분열과 87회의의 결의
실패로 끝난 폭동과 소비에트 건립
이립삼 노선의 실패와 국제파의 등장
홍군의 출현과 유격근거지 건설
고전회의 결의와 건군노선
제5장 국부군의 소공작전과 홍군의 대응전략
코민테른과 중국의 소비에트 문제
9·18사변과 홍군의 소비에트 건설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수립
장개석이 당면한 소공작전의 난제
중국공산당 중앙과 모택동의 노선갈등
장개석의 제5차 공격과 홍군의 퇴각논쟁
제6장 중국공산당의 강서 소비에트 포기와 대장정
중앙홍군의 대장정
준의회의와 모택동
2개의 당 중앙과 홍군의 내홍
제7장 제2차 국공합작과 항일민족통일전선
서안사변
중국공산당의 통일전선 전략
제2차 국공합작과 홍군의 개편
중국공산당의 생존전략
국공갈등과 주요쟁점
정풍운동과 모택동사상의 확립
제8장 전면적 내전과 국공투쟁
국공합작에 개입하는 미국
국공 양당의 입장과 미국의 중재
중경회담과 쌍십협정
마샬 장군의 중재와 국공관계
국공 간에 역전되는 전세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
끝내면서_국공 양당의 승패 요인
승리자를 도운 인화와 천시
인명읽기
도표
중국 홍군의 유격근거지 분포도
국부군의 제5차 소공작전시 홍군의 지휘계통도
중국 홍군의 대장정 노선도
중국 홍군의 발전과정도
중앙홍군의 서진시 지휘계통도
서북홍군의 지휘계통도
8로군·신4군의 발전과정도
항일전쟁 이후 중공군의 후방근거지 상황도
중국인민해방군의 지휘계통도
중국인민해방군의 도강작전도
○ 저자소개 : 이건일 (李健一)
이건일은 공군사관학교 (제14기)를 졸업하고, 중화민국 문화대학교에서 법학박사를 취득, 졸업하였다. 그후 미국 USC 방문교수, 중국 북경대학 방문교수, 국방대학교 안보대학원 교수를 지냈다. 현재는 국방대학교 명예교수 겸 대륙전략연구소 부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중국 공산당의 인민군대통제론》, 《중국의 통치문화》가 있고, 역서로 《현대국방론》, 《국제전략론》, 《유장상법》이 있다.
○ 출판사 서평
혁명세력을 이어받은 강자 장개석과 연안으로 쫓겨 간 모택동의 극적 반전! 드라마 같은 중국현대사!
- 어떻게 중국공산당은 천하의 패권을 잡을 수 있었는가?
중국은 지금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과 경쟁하는 거대국이 되었다.
100년 전에 서양세력을 막기에 급급하며 양무 (洋務)를 주장하던 시절을 생각해 보면 격세지감이 있다.
작은 일본에게조차 만주를 내주고 상해를 점령당했던 중국, 이 위기의 순간에 먼저 민족을 내세우며 외세를 막자고 주장하며 세력을 키웠던 모택동의 공산당!
그와 반대로 공산당의 수법을 너무도 잘 안 나머지 내부적 단결을 전제로 할 때에 외세를 물리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장개석!
그래서 끝까지 먼저 공산당을 섬멸하여 국내 통일을 추진하려던 장개석의 국민당!
막판에 연안으로 몰려 숨죽이던 공산당의 모택동은 용케도 일본의 침략이 그를 도왔다. 이것은 중국의 운명인가?
만주를 근거지로 한 군벌 장학량은 일본의 침략으로 잃어버린 자기의 근거지 만주를 찾고 싶은 생각 때문에 공산당을 공격하라는 장개석의 명령을 거부하고 오히려 장개석을 감금하는 반전의 전개!
이로서 장개석의 승리가 점쳐지던 그때에 공산당의 숨통을 트는 국공합작의 역전드라마!
2차 대전 직후 미국과 소련의 이해 계산속에서 중국에 대한 주판 튀기는 숨 가쁜 순간들! 국민당 정부군의 만주 진출을 방해한 소련군과 소련의 지원으로 무기를 확보한 모택동의 공산군!
군사작전에 승리하고 정치에 진 장개석, 남쪽 험한 오령의 산속으로 도망하여 연안으로 대장정을 거치면서 국제파를 몰아내고 공산당 당권과 군권을 장악한 모택동의 승리!
매순간 마다 정략이 난무하던 중국의 50년 드라마! 이 한권에 담겨있다.
- 우리의 미래에 영향을 줄 중국의 혁명사!
우리에게 중국은 영원한 관심지역이다.
중국의 운명은 어쩔 수 없이 우리에게 깊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지난 50년간의 중국의 몸부림과 군벌들의 분열, 그리고 통합을 내건 국민당과 공산당의 드라마는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데 꼭 짚고 넘어가야할 역사이다.
중국의 이 역사는 바로 그들의 미래로 이어지고, 오늘 우리에게도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런데 … 우리는 너무도 중국의 현대사를 모르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미래를 조망하고 방향을 설정하는데 꼭 읽어야 할 중국의 혁명사, 모택동vs장개석! 독서계에 던지는 신선한 충격이다.
○ 독자의 평
이 책은 공산당의 모택동과 혁명세력을 이어받은 국민당의 장개석 간의 중국 국공 혁명사이다. 중국 공산당은 설립된 지 100년이 조금 안 되는 세월을 거치면서 중국의 세계적 지위를 미국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초강대국의 수준으로 올려 놓았다. 오늘의 중국이 있기까지는 아편전쟁 이후 민족과 민주라는 운명적 과제와 마주한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의 합작과 투쟁이라는 기나긴 혁명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중국 근대사의 백미인 장개석과 모택동이라는 두 영웅이 중국대륙을 놓고 대결했던 지혜와 전략의 대결은 대하소설처럼 흥미진진하고 드라마틱하다. 장개석에게 쫓겨 연안으로 근거지를 옮긴 모택동은 장학량의 개입으로 기사회생하며 전세가 극적으로 반전되어 마침내 거대한 중국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 기억하고 싶은 내용
- 대중노선의 실천방안과 유격전략
모택동은 대중노선의 실천방안으로서 유격대원들이 반드시 준수해야 할 3대 기율과 주의해야 할 8개 조항을 제시함으로써 홍군의 대중사업이 지니고 잇는 전략적 의미를 강조했다.
<3대 기율>
①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
② 인민의 바늘이나 실오라기 하나라도 취하지 않는다
③ 모든 노획품은 공적인 것으로 한다
<8개 조항>
① 말할 때는 부드럽게 해야 한다
② 물건을 사고파는 것은 공평하게 해야 한다
③ 빌린 물건은 반드시 되돌려주어야 한다
④ 물건을 파손하면 반드시 배상해야 한다
⑤ 사람을 때리거나 욕하지 않는다
⑥ 덜 익은 농작물에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⑦ 부녀자를 희롱하지 않는다
⑧ 포로를 학대하지 않는다
모택동은 유격전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전략과 전법을 개발하여 유격전을 승리로 이끄는데도 앞장섰다.
‘적의 의도를 미리 알아채고 미리 나서서 적을 억제한다(先發制人)’고 하는 선제공격의 유격전략을 반대하고 ‘적을 아군이 의도한 곳으로 깊숙이 유인한 후에 타격한다(誘敵深入)’는 유격전략을 채택한 것도 이때였다.
유격전법으로는 그 유명한 16자 전법이 채택되었다.
敵進我退 (적진아퇴): 적이 좇아오면 아군은 퇴각한다
敵避我打 (적피아타): 적이 피하면 아군은 타격한다
敵退我追 (적퇴아추): 적이 후퇴하면 아군은 추격한다
敵駐我擾 (적주아요): 적이 머무르면 아군은 교란한다
1936년 10월은 중국공산당에게 있어서 고통스럽고 지루한 장정의 길이 막을 내리는 역사적 시점이었다. 홍1방면군, 홍2방면군, 그리고 홍4방면군이 감숙성에서 회합하면서 장정이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그렇다고 하여서 장개석이 원래 가지고 있던 ‘먼저 내정을 안정시키고 외부의 침략에 대응한다’라는 방침을 거두어 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장개석은 홍군이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인근에 주둔하고 있는 장학량의 동북군과 양호성의 서북군에게 홍군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장개석의 뜻대로 따라와 주지 않았다. 장개석은 장학량과 양호성이 수차에 걸쳐 자신의 명령을 거역하거나 홍군을 공격하는 둥 마는 둥 하는 태도를 보이자 1936년 겨울 재차 장학량과 호종남에게 서로 협력하여 연안의 홍군을 공격하도록 직접적으로 지시했다. 그러나 장학량은 여전히 장개석의 지시를 외면했으며, 오직 호종남 만이 부대를 이끌고 단독으로 공격했다가 패배하고 말았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장개석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중국 홍군에 대한 소탕작전의 중요성과 일본군의 침공에 대응하는 전략 방침을 직접적으로 지시 하기 위해 1936년 12월 12일 서안에 도착했다. 서안에 도착하자 마자 장개석은 재차 장학량과 양호성에게 연안의 홍군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서안에서 뜻밖의 사건이 발생했다. 장개석이 도착한 당일 장학량과 양호성은 사전에 계획한대로 동북군의 일부 병력으로 화청지를 포위하도록 하고 장개석을 감금했다. 이와 동시에 양호성의 제17로군(서북군)은 서안 전역을 통제하고 남경에서 온 수십 명의 국민당 군정요원을 감금했다.
당시 장작림의 아들인 장학량은 자신의 지반(地盤)인 만주로 되돌아갈 날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지반인 만주를 점령하고 있는 일본을 먼저 공격하여 자기의 지반을 확보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는 장개석이 먼저 만주의 일본군을 공격하는 것이 자기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동족인 모택동의 홍군을 치는 것보다는 이치에 맞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본군은 1931년 9월 18일 만주지역의 대군벌인 장작림의 부대를 격파했으며, 5일 후에는 봉천과 길림 등 주요 도시를 점령했다. 결국 만주를 지반으로 삼고 있던 장작림을 암살했다. 그리고 1932년 3월 1일 만주 전역을 장악한 후 청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부의(溥儀)를 납치하여 그를 황제로 하는 만주국을 세웠다. 만주가 일본의 수중으로 넘어간 것이다
- 국공합작 중의 중국공산군의 활동
1937년 8월 섬서 북부의 홍군이 8로군으로 개편될 당시 홍군의 총병력은 2만2천여 명이었다. 그 후 10월에 강남의 공산 유격대를 신4군으로 개편할 당시 홍군은 기껏해야 3천여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1940년에 이르자 8로군 병력은 40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신4군 역시 10만 명으로 증가했다. 그 후 8로군은 1945년 봄 60만 명으로 증가했고 신4군은 7개 정규사단으로 약 26만 명으로 증가했다.
이와 같이 8로군과 신4군이 급성장하게 된 것은 중국공산당이 중국국민당 정부에 속했지만 실제적으로 통일적인 지휘하에 모두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산악유격전을 위주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 위에 명목상으로는 대일본 작전을 하기 위해 국공합작을 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대일 작전에는 1할의 전력만을 배치하고, 7할의 힘은 자기들의 발전에 썼으며, 힘을 합하기로 했던 국민당에 대해서는 그에 대응하는데 2할의 힘을 썼던 데 그 이유가 있다. 말하자면 국공합작을 통해 공산당의 전력은 엄청나게 터진 셈이었다. 이렇게 된 것은 비록 국민당 정부군을 속이는 것이었지만 그러한 전략을 구사한 모택동의 덕택이라고 할 수 있다.
- 모택동의 정풍운동
모택동은 1940년 1월 <신민주주의론>이라는 제하의 글 속에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중국 공산주의자는 마르크스주의를 중국에 적용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마르크스주의의 보편적 진리를 중국혁명의 구체적 실천과 완전히 통일시켜야 한다. 이는 다시 말해서 민족의 특성과 상호 결합하여 일정한 민족 형식을 통해야만 비로소 쓸모가 있게 되며, 결코 주관적이며 공식적으로 응용할 수는 없다>
모택동은 정풍운동을 일으켜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고 당의 지침이 되는 사상과 이론의 확립에 주력하고자 했다. 모택동의 정풍운동은 다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모택동주의로 레닌주의를 대체
② 중국공산당의 역사를 모택동 개인의 역사로 쓰는 것
③ 모택동 개인을 당 중앙과 전체 당의 상위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것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방침을 하달했다.
① 레닌주의는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여서 오직 러시아의 혁명을 영도할 수 있을 뿐이며, 세계혁명과 중국혁명을 영도할 수는 없다.
② 중국공산당에 대한 코민테른의 모든 영도와 도움은 잘못된 것이다
③ 소련공산당의 중국공산당과 중국혁명에 대한 지지와 도움은 실제에 부합되지 않으며 아무 쓸모도 없다. 뿐만 아니라 해로운 것이다
④ 모택동주의를 인정하지 않고 레닌주의와 코민테른에 충실하며 소련공산당과 소련을 가까이하며 신뢰해서는 안된다
-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국공관계에 개입한 미국
미국은 1937년 7월 7일 노구교사건으로 중일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태평양 지역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1940년 일본이 군사동맹에 가입하면서부터 미국의 중국에 대한 입장이 바뀌게 된다.
영국은 중국이 분열된 채로 남아 있기를 바랐고, 소련은 중국공산당을 조종하여 화북이나 만주에 하나의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관구를 건설하려 했다. 일본은 중국을 완전히 점령할 목적으로 전쟁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영국, 소련과의 공조하에 국민당과 공산당이 힘을 합쳐 일본군에 대항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미국은 항일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국공합작이 필수적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미국은 장개석의 국민당에 압력을 가하여 중국공산당과의 협상에 성실히 임할 것을 재촉했다.
장개석은 국공협상에 나서고 싶지 않았지만 미국의 강력한 요구로 하는 수 없이 협상에 나섰다. 그러나 협상을 계속하지 않기 위해 모택동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을 제시했다. 하나는 연안에 있는 공산정부를 즉각 해체할 것과 둘째로는 중공군이 국민정부군에 편입되어야만 공산당의 합법성이 인정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고 난 후에야 정상적인 민주헌정으로 이행하는 준비사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장개석의 요구를 받은 중국공산당은 이를 무리한 조건이라고 맹비난하고 나섰다. 주은래는 만약에 국공내전이 일어난다면 항일전쟁에 치명적인 장애요인이 될 것임을 강조하면서 미국을 설득하는 데 온 힘을 집중했다
주은래의 이러한 전략은 미국의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미국은 국공내전의 재발로 인해 일본에 대항하는 중국의 전력이 약화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43년 9월에 미국은 장개석에게 군사원조를 중단하겠다고 압박했다.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아야 하는 장개석은 미국에 대해 공산당과의 합작을 파기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공산당의 주장이 미국과 장개석에게 먹혀 든 것이다.
마침내 모택동이 영도하는 중국공산당은 1949년 7월에 제기한 <인민민주독재론>이 중국인민정치회의의 공동강령 중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기본정책으로 구체화되면서 1949년 1월 북경의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정식으로 선포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