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몽타이유 : 중세말 남프랑스 어느 마을 사람들의 삶
엠마뉘엘 르루아 라뒤리 / 길 / 2006.11.25
이 책은 14세기 (중세) 당시 프랑스 피레네 산 1,300미터 고원지대에 자리한 몽타이유 (Montaillou) 마을을 배경으로 있었던 이단재판의 기록들을 토대로 저자인 르루아 라뒤리가 사실주의적 민중소설 같은 서술을 통해 당시 농민문화를 복원해낸 것이다. 카타르파 (당시 기독교의 극단적인 이단으로 물질계를 악한 신의 피조물로 보았다. 즉 육체를 악으로 규정한 이들의 교리는 강생에서 수난에 이르는 ‘살’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적인 삶의 일화를 부정함으로써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에 의해 이단 종교에 감염된 것으로 파악한 주교 자크 푸르니에의 이단재판은 단순히 재판기록의 영역을 뛰어넘어 당시 몽타이유 마을 사람들의 농밀한 삶 전체를 유감없이 드러내주는 귀중한 사료로 남아 르루아 라뒤리의 손을 거쳐 우리 앞에 생생하게 그 모습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로서의 옛날 농민들이 꾸려나갔던 삶의 생생한 모습들을 그려볼 수 있게 되었음은 물론,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심성ㆍ감성ㆍ섹스ㆍ일상생활 등 역사인류학적 시각을 통해 복원된 서양중세사의 구체적인 벽화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 목차
옮긴이의 말
머리말_ 이단 심문에서 민속보고서로
제1부 몽타이유의 생태학: 집과 양치기
제1장 환경과 권력
제2장 가옥-가족으로서의 집
제3장 지배 가문: 클레르그가
제4장 떠돌이 양치기들
제5장 대이동목축
제6장 피레네 산 양치기의 민속
제7장 양치기의 심성
제2부 몽타이유의 고고학: 몸짓에서 신화까지
제8장 몸짓과 성행위
제9장 클레르그가 사람들의 리비도
제10장 뜨내기 사랑
제11장 결혼과 사랑의 게임
제12장 결혼과 여성의 조건
제13장 어린이 인식과 인생의 시기
제14장 이 마을에서의 죽음
제15장 문화관계와 사교구조: 책과 야회(夜會)
제16장 사교구조: 여성.남성.젊은이
제17장 사회관계: 선술집.미사.파벌
제18장 자연과 운명에 대한 인식
제20장 마술과 구원
제21장 모두가 성모 마리아와 성인 숭배자들
제22장 이 마을에서 실천된 종교
제23장 종교적 일탈자와 카타르파 사제
제24장 장 염치와 범죄
제25장 가난.보시.노동
제26장 민속과 유령
제27장 사후세계
제28장 집과 저승
사료에 대한 언급과 감사의 말씀
주
고유명사의 원어 표기
참고문헌
○ 저자소개 : 엠마뉘엘 르루아 라뒤리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태어나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1967년부터 <아날>지 편집위원을 맡았으며, 1973년 브로델을 이어 콜레주 드 프랑스의 근대사 교수로 취임했다. 앙시앵 레짐기 랑그독 지방을 주로 연구하는 그는 프랑스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역사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아날의 제3세대 대표주자로서 실제 작업을 통해 역사인류학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는 라뒤리의 저작들은 명성에 비해 국내에 번역되어 있지 않은 형편이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박사학위 논문인 『랑그독의 농민들』을 비롯해 『랑그독의 역사』, 『역사가의 영역』, 『천년 이후 기후의 역사』, 『몽타이유』, 『로망의 사육제』, 『랑그독 지방에서 사랑, 죽음과 돈』, 『자스맹의 마녀』 등이 있다.
– 역자 : 유희수
고려대학교 사학과에서 서양사를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남대학교 사학과 교수와 서양중세사학회·프랑스사학회·서양사학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사제와 광대』, 『서양 중세사 강의』 (공저), 『서양의 가족과 성』 (공저), 『몸으로 역사를 읽다』 (공저)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 『서양 중세 문명』, 『매너의 역사』, 『몽타이유』, 『거룩한 도둑질』, 『죄수 마차를 탄 기사』, 『중세의 소외집단』 (공역), 『기억의 장소』 (공역)가 있다.
○ 출판사 서평
– 프랑스에서만 20만 부가 판매된 20세기 역사서의 최대 걸작 중 하나
이 책은 20세기 서양 역사학이 거둔 최대 역작의 하나로 평가받는 명저이다. 20세기 서양 역사학의 큰 흐름을 주도한 아날학파의 제3세대 대표 역사가로 이 책의 저자 엠마뉘엘 르루아 라뒤리(1929~ )는 지금까지의 역사서술과는 차원이 다른 아주 독특한 방법을 제시, 역사연구의 신기원을 이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미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펴낸 『랑그독의 농민들』로 세계적인 역사학자로 명성을 얻은 르루아 라뒤리는 이 책 『몽타이유』를 통해 또다시 세계 역사학계의 주목을 받음을 물론, 책 출간(1075년) 이후 1989년까지 프랑스에서만 20만 부 가까이 판매되어 대중적인 인기까지 한몸에 받았다. 책을 썼다하면 보통 600쪽을 넘는 방대한 분량의 저서를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역사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그는 2006년 최근에도 프랑스대혁명과 기후의 관계를 다룬 역사서를 펴내는 등 왕성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 이단재판 기록을 토대로 복원해낸 농밀한 중세 농민문화의 세계
이 책은 14세기(중세) 당시 프랑스 피레네 산 1,300미터 고원지대에 자리한 몽타이유 (Montaillou) 마을을 배경으로 있었던 이단재판의 기록들을 토대로 저자인 르루아 라뒤리가 사실주의적 민중소설 같은 서술을 통해 당시 농민문화를 복원해낸 것이다. 카타르파(당시 기독교의 극단적인 이단으로 물질계를 악한 신의 피조물로 보았다. 즉 육체를 악으로 규정한 이들의 교리는 강생에서 수난에 이르는 ‘살’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적인 삶의 일화를 부정함으로써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에 의해 이단 종교에 감염된 것으로 파악한 주교 자크 푸르니에의 이단재판은 단순히 재판기록의 영역을 뛰어넘어 당시 몽타이유 마을 사람들의 농밀한 삶 전체를 유감없이 드러내주는 귀중한 사료로 남아 르루아 라뒤리의 손을 거쳐 우리 앞에 생생하게 그 모습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로서의 옛날 농민들이 꾸려나갔던 삶의 생생한 모습들을 그려볼 수 있게 되었음은 물론,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심성ㆍ감성ㆍ섹스ㆍ일상생활 등 역사인류학적 시각을 통해 복원된 서양중세사의 구체적인 벽화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이 마을의 성풍속과 기독교의 침투에 의한 기독교 문화를 보면, 우리가 갖고 있는 중세에 대한 관념이 많이 어긋나 있음을 보게 된다. 즉 몽타이유 마을은 당시 성(性)에 대해 엄격한 입장을 견지했던 로마 교회와의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는데, 우리는 이를 마을 신도들을 교화하는 데 모범을 보여주어야 할 본당신부 피에르 클레르그가 보여주는 돈후안적인 행동을 통해서 결코 중세 교회가 엄격한 성윤리로 말미암아 숨막힐 지경은커녕, 여성들의 자유로운 성관념과 마을 사람들의 느슨한 성풍속도를 감지하게 된다. 아울러 중세 교회가 ‘지옥’의 상징화를 통해 신자들을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하는 데 열중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이들에게는 사후세계에 대해 천국은 알고 있었으나 지옥과 연옥에 대해서는 몰랐다. 또한 카타르파 신자들은 생전에 지은 죄를 죽기 직전에 모두 씻고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교회 입장에서 보면 죄를 저지르고서도 그것을 ‘죄’로조차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단재판으로 마을 전체가 풍비박산이 나는데도 이들은 그 교회가 왜 그들 자신을 그렇게 옥죄었는지를 몰랐던 순진무구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 미시사ㆍ심성사ㆍ신문화사ㆍ역사인류학 등 복합적 역사서술로 새로운 역사학의 전범 구축
차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거의 역사소설을 읽는 듯한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떠돌이 양치기” “양치기의 심성” “몸짓과 성행위” “뜨내기 사랑” “결혼과 사랑의 조건” 등 마치 우리로 하여금 한 편의 장대한 중세 역사소설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무척 다양하다. 몽타이유 마을의 권력관계, 가옥과 가족을 동시에 의미하는 ‘집’의 신비스러운 종교적 기능, 양치기의 자유로운 삶과 색다른 심성, 몸짓(이 잡기와 예절)과 섹스(동성애), 근친상간과 내연관계의 농밀한 성 관념, 결혼(족내혼)과 여성의 지위, 어린이ㆍ노인ㆍ죽음에 대한 인식, 도덕의 기초로서의 수치의 작용, 집 구조와 연관된 동심원적 공간의식, 사후세계의 독특한 구조 (연옥과 지옥의 부재 등), 집을 천국으로 여기는 농민적 세계관 등등 방대한 분량만큼 이 책은 중세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모든 것을 보여주려는 듯 농민문화를 총망라하고 있다. 흔히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를 미시사를 열어제친 초기작으로 본다면, 이 책을 미시사의 최고정점에 오른 걸작으로 평가하는 것도 이러한 측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단순히 미시사 종류의 역사서로 규정하기에는 범위가 너무나도 넓다. 저자 스스로 역사인류학적 저서라는 의미의 부제에서 드러나듯이 이 책은 이미 단 하나의 역사서술방법론이 아닌, 미시사ㆍ신문화사ㆍ심성사ㆍ역사인류학적 관점 등이 복합적으로 구사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기존의 역사연구 방법론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역사학의 종합적 전범이라고 볼 수 있다.
국내에 아날학파 역사학자들의 주저들이 비교적 많이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유독 그 명성에 비해 엠마뉘엘 르루아 라뒤리의 저작은 이 책이 처음 소개되는 실정이다. 무엇보다 저술의 방대함이 그 원인일 것이다. 이번 번역서를 통해 우리는 아날학파의 또다른 면모를 볼 수 있게됨은 물론, 역사서술의 경계가 어디까지 뻗쳐나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아울러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부록 : 주교로 재직하며 몽타이유 (Montaillou) 마을 카타리파 이단자들을 연구한 자크 푸르니에 / 교황 베네딕토 12세 (Pope Benedict XII)
교황 베네딕토 12세 (Benedictus PP. XII, 이: Papa Benedetto XII)는 제197대 교황 (재위: 1334년 12월 30일 ~ 1342년 4월 25일)이다. 본명은 자크 푸르니에 (프: Jacques Fournier)이다. 그는 아비뇽 유수의 세 번째 교황이다. 그는 족벌주의를 배격하고 수도회 개혁에 노력하였다. 로마나 볼로냐로 거처를 옮기지 못하자 그는 아비뇽에 거대한 궁전을 짓도록 하였다.
그는 한때 교황 요한 22세가 가졌던 생각과는 달리 공심판 전에도 영혼들이 지복직관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지복직관에 대한 논쟁을 해결하였다.
그는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를 다시 일치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였으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와도 의견을 좁히지 못했다.
– 자크 루르니에 / 교황 베네딕토 12세 (Pope Benedict XII)
.임기: 1334년 12월 30일
.전임: 요한 22세 / 후임: 클레멘스 6세
.본명: 자크 푸르니에
.출생: 1280년, 프랑스 왕국 사베르됭
.선종: 1342년 4월 25일, 프랑스 왕국 아비뇽
○ 생애 및 활동
– 초기와 서품
자크 푸르니에의 유년 생활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1280년대 무렵 프랑스 사베르됭에서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시토회 수사가 되어 고향을 떠나 파리 대학교에 수학하였다. 1311년 퐁프루아드 수도원의 수도원장이 된 그는 조직에 대한 뛰어난 통솔력을 보여주었다. 1317년 그는 파미에의 주교로 서품받았다. 주교로 재직하면서 그는 카타리파 이단자들을 철저하게 수색함으로써 교황 요한 22세가 이단 심문에 대해 자문을 구할 정도로 종교 지도자로서 명성은 얻었지만, 지역 주민들과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그렇지만 그는 유죄를 고백하는 이단자들에게는 관대히 처분을 내렸다.
그는 아리에주 주 몽타유에 은거한 카타리파 일당을 심문할 때, 이를 기록으로 남겨 나중에 로마로 가져가서 바티칸 도서관에 비치하였다. 장 뒤베르누와에 의해 정리된 그의 이단 심문 기록을 토대로 나중에 미시사의 개척자인 프랑스 학자 엠마뉘엘 르 루아 라뒤리에 의해 ‘몽타유 – 중세 말 남프랑스 어느 마을 사람들의 삶’ (Montaillou, village occitan)이라는 민속보고서로 작성되었다.
1326년, 프랑스 남부에 남은 마지막 이단을 근절하는데 성공한 그는 미르푸아의 주교가 되었으며, 1년 후인 1327년에는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 교황
1334년 콘클라베에서 푸르니에는 교황 요한 22세의 뒤를 이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12월 13일 소집된 콘클라베는 신속하게 끝날 것처럼 보였다. 당시 유력한 후보자였던 포르토의 교구장 장레몽 드 코망쥬 추기경이 단지 로마로 교황청을 다시 옮기지 않는다는 약속만 한다면 3분의 2 이상의 추기경들이 그에게 표를 던질 참이었다. 그렇지만 코망쥬는 자신의 당선을 위해 어떠한 사전 약속을 하는 것도 거부하였다. 그러자 콘클라베는 당초 예상보다 길어졌다. 푸르니에가 말했다시피 추기경들은 분명 평판이 다른 인물들에 비해 높은 인물에게 표를 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이는 달리 말하면 유력한 후보들이 많이 있었다는 셈이 된다. 콘클라베가 시작한 지 8일째 되는 날인 1334년 12월 20일 저녁 성무일도를 바친 후 시토회 출신 교황 자크 푸르니에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 정치와 활동
베네딕토 12세는 전임자의 정책을 따르지 않고 변화를 도모한 개혁 교황이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루트비히 4세 황제와 화해하고 당시 로마 교황청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프란치스코회와 가급적 타협을 보았다. 그는 수도회들의 사치를 단속하려고 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또한 그는 아비뇽 교황청 건설을 지시했다.
베네딕토 12세는 재임기간 대부분을 신학 문제에 할애하였다. 지복직관 (至福直觀)과 관련해서 요한 22세가 최후의 심판 때에 가서야 지복직관을 향유한다고 한 데 반하여 그는 1336년 교황 헌장 ‘찬양하올 하느님’ (Benedictus Deus)을 반포하여 죄 없이 죽은 영혼은 직접 천국에 들어가 지복직관 (至福直觀)을 누린다는 교리를 공식적으로 반포하였다. 일부에서는 그가 원죄 없는 잉태에 반대했다고 주장이 있지만, 분명치 않다.
베네딕토 12세는 오컴의 윌리엄과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등 당대의 유명한 인물들과 오랫동안 신학적 논쟁을 벌였다.
베네딕토 12세는 프랑스인으로 태어났으나 프랑스나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에 대하여 특별한 애착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교황 재위 첫날부터 그와 필리프 6세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다. 필리프 6세의 스코틀랜드 침공 계획을 들은 베네딕토 12세는 이 싸움에선 장차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가 승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