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문동환 자서전 : 떠돌이 목자의 노래
문동환 / 삼인 / 2009.9.28
진보적인 신학자로서 군부 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온 문동환 박사의 굴곡진 삶을 고스란히 담아낸 자서전이다. 1961년 한신대에 교수로 부임한 이래로 해직과 복직을 반복하며 줄곧 반독재 운동에 앞장섰던 그의 삶은 그대로 한국의 민주화 운동 역사이기에, 그의 생애 이야기는 지난 세기의 한국사를 반추함으로써 오늘을 성찰하고 내일의 좌표를 그리는 데에 소중한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구십 평생 민주화와 민중을 위해 살아온 그의 걸음걸음을 뒤따라가 본다.
그는 신학자이자 목회자로서 고통받고 신음하는 민중들과 함께 있었고,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특히 낮은 곳에서 고통받는 민중의 편에 서서 그들에게서 역사 변혁의 가능성을 찾는 그의 민중신학은 지구촌 곳곳에서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를 착취하는 신자유주의와 금권 (金權)의 시대를 극복하고, 기독교 정신과 멀어진 채 타락한 한국 교회의 현실을 꼬집는다. 목사와 신학자, 민주화운동가, 정치인으로 한 평생을 남을 위해, 사회를 위해 헌신한 그의 삶이야기는 잔잔한 감동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전해질 것이다.

○ 목차
책을 내며
제1부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수감되다
서울구치소에서의 첫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의 고통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이 없다”
문익환 형과 3·1민주구국선언문
새벽의 집 사람들
기쁨의 신학
꺼지지 않는 불꽃 속에 나타나신 하느님
지식인의 구원은 민중에 있다
공소장: 너무나 희극적인 기소 이유
빌라도의 법정
“난 목사가 되겠슴둥!”
두만강을 건너 명동으로!
어린 시절
청소년 시절
내 아버지 문재린과 어머니 김신묵
뿌리 뽑힌 떠돌이가 되어
미국 유학 시절
태평양을 뛰어넘은 사랑
한국신학대학에 사표를 내다
겨울 감방
반독재 운동의 메카가 된 한국신학대학
제2부
목포교도소로
나의 허물을 돌아보다
청주교도소로
최제우를 읽다
대륙에서 돌아온 사나이, 장준하
‘참 좋은 사람’ 최승국
출옥
제3부
다시 방학동 집에서
세배
아내의 눈물
뜨거운 상봉들
1978년 민주회복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동일방직에서 YH사건으로
유신 정권에 내린 역사의 심판
YWCA 위장결혼사건과 김병걸 교수
도상의 친교
도쿄에서 발길을 돌려
제4부
뉴욕에서 일어난 회오리바람
뉴욕의 목요기도회
토론토 방문
스토니 포인트에서 만난 식구들
고국에서 온 눈물겨운 소식들
감명 깊은 워싱턴 방문
미국에서 만난 동지들
유럽 교포 교회와 대성당들
제5부
워싱턴에 둥지를 틀다
워싱턴 수도장로교회
최성일과 나
반가운 손님들
김대중 선생, 미국에 오다
제6부
다시 고국으로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다시 교단으로
교단을 떠나는 심정
피로 하나가 된 민중의 파도
제7부
평민당 창당과 대선 참패
정치, 그 미지의 세계로
입당 절차
첫 임무
여소야대의 정국
순진한 제언들
성서 고발자와 국회 조찬기도회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위
형의 평양 방문
회오리바람
민의를 거스른 ‘3당 합당’
환희의 장례식
아내가 받은 감사패
제8부
미국 정착
통일의 꿈을 안고 떠난 형의 장례식
제도 교회를 한탄하다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식
금강산에서의 팔순 잔치
평화통일운동에 말려들다
떠돌이에서 떠돌이로
사진으로 남은 이야기
문동환 연보

○ 저자소개 : 문동환 (文東煥)
1921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민족주의 운동과 기독교 선교의 중심지였던 명동촌에서 성장하면서, 어려서부터 민족과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삶과 기독교 목사로서의 삶에 뜻을 두었다. 서울의 조선신학교 (한신대 전신)를 졸업한 뒤, 웨스턴신학교, 프린스턴신학교를 거쳐 하트퍼드신학대학에서 종교교육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에 돌아와 모교인 한국신학대학 기독교교육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한편, 서울의 수도교회에서 목회했다. 그러던 중에, 뜻이 맞는 청년들과 함께 ‘새벽의 집’을 열어 생명문화를 일구기 위한 공동체 생활을 했다.
1975년 유신정권의 탄압으로 한국신학대학에서 해직된 뒤에, 해직 교수 및 민주 인사들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실험교회인 갈릴리교회를 공동 목회로 꾸렸고, 1976년 3·1민주구국선언문 사건으로 투옥되어 2년 가까이 복역했다.
감옥에 있는 동안 민중의 실체에 대해 통찰하면서 민중신학에 입각한 민중운동에 깊이 천착하게 되었고, 그 뒤 동일방직 및 와이에이치 노조원의 투쟁을 지원하다 다시 투옥되어 복역했다.
1979년 10·26으로 유신정권이 막을 내리자 한국신학대학에 복직했으나 신군부의 등장으로 해직과 더불어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고, 미국에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다양한 활동과 더불어 목회 생활을 하다가 1985년에 한국에 돌아와 한신대에 다시 복직했다.
정년 퇴임 후에 재야에서 민주화 활동을 하던 중,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1988년에 정치에 발을 들여놓아 평민당 수석부총재를 역임했고,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도 활동했다.
정치 활동을 접은 1991년 이래로 미국에서 살고 있으며, 지금은 주로 젊은 목회자들과 함께 성서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특히, 고향에서 밀려나 저임금 노예로 팔려가는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그런 비참한 삶의 구조적 원인인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토대로, 민중신학을 더욱 심화한 ‘떠돌이신학’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미국 유학 시절에 만난 헤리엇 페이 핀치벡 (문혜림)과 1961년에 결혼하여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 출판사 서평
진보적인 신학자로서 군부 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온 문동환 박사가 아흔 나이를 앞두고 자서전 『문동환 자서전 ― 떠돌이 목자의 노래』를 펴냈다.
2008년 한겨레신문에 두 달에 걸쳐 같은 제목으로 매일 연재한 것을 다시 정리하여 책으로 묶었다.
일제강점기인 1921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민족정신과 성서적 가치에 따라 치열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문동환의 구십 년 생애는 굴곡 많은 한국 근현대사와 부침 (浮沈)을 함께해 왔다.
특히 1961년에 한신대에 교수로 부임한 이래로 해직과 복직을 반복하며 줄곧 반독재 운동에 앞장섰던 그의 삶은 그대로 한국의 민주화 운동 역사라 함직하니, 그의 생애 이야기는 지난 세기의 한국사를 반추함으로써 오늘을 성찰하고 내일의 좌표를 그리는 데에 소중한 참고자료가 된다.
또한 신학자이자 목회자로서 낮은 곳에서 고통받는 민중의 편에 서서 그들에게서 역사 변혁의 가능성을 찾는 그의 민중신학은 지구촌 곳곳에서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를 착취하는 신자유주의와 금권(金權)의 시대를 극복하고, 기독교 정신과 멀어진 채 타락한 한국 교회의 현실을 타파할 길을 비추는 시금석이라 하겠다.
1976년 명동성당에서의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서울구치소에 붙잡혀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하는 문동환의 이야기는 전반부 (1, 2부)에서는 당시의 감옥생활 풍경에 대한 사실적인 스케치와 더불어 과거 회상 형식으로 그때까지의 그의 삶의 주요 장면이 시대를 오르내리며 펼쳐진다.
그리고 1977년 12월 31일 출옥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이야기를 엮은 후반부 (3~8부)는 1980년대, 1990년대 한국과 미국에서 벌인 민주화 운동 역정, 그리고 평민당에서의 정치 활동과 통일 운동이 시간을 따라 이어진다.

- 3·1민주구국선언 사건과 투옥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 3·1운동 기념 미사 뒤에, 긴급조치 철폐와 의회정치의 회복을 요구하는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김대중, 문익환, 서남동, 이문영, 안병무, 윤반웅, 신현봉, 문정현, 함세웅, 이해동 등과 함께 구속 기소되어 서울구치소에 들어간다.
난생 처음 감옥생활을 하게 된 문동환의 마음은 “한편으로는 불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은근히 뿌듯했다.” 그것은 악한 시대에 불의에 맞서 싸우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겪을 일을 비로소 겪게 되었다는 심정에서였다.
그러나, 민주화 운동을 하다 수감된 동지들과의 교감으로 더러 힘을 얻기도 하지만, 늘 분주히 움직이며 일하던 사람이 좁은 감방에 갇혀 모든 것으로부터 차단된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지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정신적 고문인지를 실감한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감옥생활에서 그는 새로운 눈을 뜬다. 곧, 명상기도와 성서 읽기를 통해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이 없다”는 깨달음을 얻고, 한 맺힌 이 땅의 민중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하느님의 뜻이 불처럼 타오르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일반 죄수들의 비참한 현실에 비로소 눈뜨면서, 자기 자신의 허위의식과 세상의 질곡에 대해 새롭게 성찰하고, 그런 성찰과 최제우의 ‘사인여천’ 사상을 통해, 낮은 곳에 비참하게 내동댕이쳐진 민중들을 가슴으로 껴안음으로써 민중신학의 단초를 세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단조로운 감옥생활은 지난날에 대한 회상으로 풍요롭다면 풍요로웠다.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받던 과정―잡혀간 이들을 차례로 조사하며 끝도 없이 시간을 질질 끄는 와중에, 안병무의 심장 발작 소식을 듣고 문익환이 주모자임을 자신이 나서서 밝히는 것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고 판단한 일―이 활동사진처럼 펼쳐지고, 한신대 학생과장으로 부임해 한신대를 반독재 운동의 메카로 이끈 일련의 과정, 정부의 탄압으로 해직당한 뒤 해직 교수들과 함께 새로운 교회 운동을 펼친 ‘갈릴리교회’ 와 ‘목요기도회’ 활동, 철거민들의 천막 교회 ‘사랑방교회’와의 자매결연, 그리고 인혁당 사건 등에 대한 기억이 뜻을 같이하던 숱한 이름과 함께 이어진다.
그리고 일본에서 신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만나 우정을 쌓은 장준하와의 인연, 그리고 그의 의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또 한 대목을 잇는다.

- 공동체 ‘새벽의 집’을 통한 생명문화 운동
한편, 산업사회의 죽음의 문화를 극복하고 생명문화를 일구자 하여, 뜻이 맞는 젊은이들과 함께 시작한 공동체 생활체인 ‘새벽의 집’에 대한 회상이 또 큰 부분을 차지한다. 다섯 가정 열두 명으로 시작한 새벽의 집은 한 집에서 한 솥밥을 먹고 살면서 돈도 공동으로 관리했다. ‘나’가 아니라 ‘우리’를 소중히 여기고, 물질주의와 권위주의를 배격하고, 서로 나누고 용서하고 섬기며 살겠다는 새벽의 집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앞서나간 대단한 시도였으니, 문동환은 “돈키호테처럼 무모한 일을 시작”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이 ‘무모하고 대단한’ 시도는 마을 주변으로 점점 확대되 가며, 적어도 문동환이 감옥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제법 큰 성과를 거두었다. 새벽의 집은 궁극적으로는 농촌으로 가서 농민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에 뜻을 두었다. 그것은 젊은 날 풀리지 않는 신학적 고민을 안고서 형과 함께 김천 금오산으로 기도하러 가다가 기차 고장으로 잠시 멈춘 농촌에서 문득 “누군가는 (농촌으로) 내려가야 한다. 예수님이 갈릴리의 가난한 농민한테 내려간 것처럼!” 하고 결연히 다진 뜻의 일환이었다. 새벽의 집은 농촌으로 옮겨 가서 살다 결국 정착하지 못하고 서울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문동환은 오늘날 대안의 삶으로서 생명과 자연, 영성과 평화를 역설하는 생태주의자, 귀농 운동가, 생명평화 사상가들의 선구자인 셈이다.
- “난 목사가 되겠슴둥”, 여섯 살 철부지의 선언이 실현되다
감옥에서의 회상은 어느덧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문동환이 나고 자라던 북간도 명동촌 시절로 넘어간다. 그 시절 만주 일대에서의 민족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김약연 목사를 삶의 사표로 삼고서 여섯 살 철부지 나이에 목사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것은 문동환의 일생을 관통하는 나침반으로서 작용한다. 민족을 위해 목사가 되겠다는 결연한 선언과는 별개로, 소년 문동환은 마음껏 뛰어놀다 콩 서리도 즐겨 하고, 운동을 무엇보다 좋아하던 개구쟁이 시절을 거쳐, 중학생이 되어서도 오직 운동과 음악에만 빠져 지내 아버지의 걱정을 듣기까지 한다. 그래도 목사가 되리라는 꿈을 저버린 적은 없다. 중학교 졸업 뒤 일본에 가서 신학교에 다니다, 해방 뒤 월남해서는 조선신학교 (한신대 전신)에 편입해 졸업한다. 이 시절 이야기를 통해, 기독교장로회를 태동시킨 한국의 진보적 기독교 교회사의 단면도 자연스럽게 함께 등장한다. 한국전쟁을 겪다가 미국 유학을 떠나, 처음에는 신학을 연구하다가 종교교육학으로 바꾸어 10여 년 만에 박사학위를 끝마치고 돌아오기까지의 저간의 이야기가, 시골 학교 교사로서 학생들을 남다른 열정으로 가르치던 이야기, 열등감 때문에 서른이 넘도록 여자를 외면한 이야기, 폐병이 걸려 요양원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일,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행한 국제결혼, 남다른 자녀 교육 방식,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신의 과거 허물에 대한 회한 등과 같은 소소하면서도 감동적인 에피소드와 함께 흥미롭게 이어진다.
- YH노조 사건으로 다시 수감되고, 1980년 ‘서울의 봄’에 미국 망명길에 오르다
1977년 12월 31일에 출옥하고 보니, 그 사이에 새벽의 집은 사람들도 줄고 기운을 잃고 있었다. 이에 문동환은 농촌에 내려가서 공동체 삶을 꾸리는 일보다, 나라의 민주화를 먼저 해결해야 일로 받아들이고, 서울의 방학동에 머물기로 한다. 1978년 윤보선과 문익환의 주도로 ‘민주회복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이 발족하고, 그와 더불어 다시 심해진 정부의 탄압으로 새벽의 집은 김대중, 문익환을 위시한 구속자 석방을 위한 단식투쟁 공간이 되고, 문동환은 농성과 시위, 가택 연금, 동일방직 노조 활동 지원 등의 일련의 사태 끝에 YH노조 사건으로 다시 감옥에 들어간다. 1979년 10·26 뒤에 석방되어 한신대에 복직했으나, 1980년 4월에 세계교회협의회가가 주관한 예배와 교육위원회에 참석하러 유럽에 갔다가 로마에서 광주민주화운동 얘기와 김대중, 문익환 등 민주화 운동 동지들이 감옥에 들어갔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그길로 미국으로 망명한다.
미국에서 문동환은 고국의 민주화를 위해 힘쓰는 여러 단체와 동지들과 교류하며, 1985년에 귀국하기까지 미국 전역과 캐나다를 돌며 강연과 설교 활동으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측면 지원하는 일에 매진한다. 특히 5·18광주민주화운동 등 신군부의 폭압에 신음하는 한국의 실정을 알리고 그런 군부독재를 용인하는 미국 정부에 대한 비판도 빼놓지 않았다. 그와 더불어 민중신학 강의도 부지런히 했다. 워싱턴에 정착한 뒤 워싱턴 수도교회에서 목회 일을 하는 동안에도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활동을 활발히 했다. 미국 망명 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손님은 신병 치료차 미국에 온 김대중이었다.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또 미국의 정치가들과 언론인이 그를 찾아올 때마다 동석해서 대화를 돕기도 한다. 김대중은 1984년 위험하다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귀국하고, 이듬해 문동환도 한신대의 부름을 받고 귀국한다.

- 평민당에 들어가, 정치라는 미지에 세계에 발을 담그다
한신대에 복직한 뒤 일년 반을 복무한 뒤에 1986년에 은퇴한다. 1987년 박종철이 고문으로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그를 규탄하는 대규모 집회가 일어나고 일반 시민들도 동참했다. 그리고 그 열기는 6월항쟁으로 이어지고, 박종철에 이은 이한열의 죽음을 딛고 마침내 직선제를 부활시켰다. 그해 대선 정국에서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던 문동환은 1988년에 김대중의 권유로 평민당에 들어가 낯선 정치의 세계에 뛰어들어 평민당 수석부총재를 역임하고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 워원장으로서도 활동한다. 정계 활동은 큰 부대낌은 없었으되 교육자로서, 목회자로서 살아온 한 지식인의 상식과는 많이 달랐다. 결국 4년여에 걸친 정치 활동을 접고 문동환은 1992년에 미국으로 가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의 미국행은 지난 30년 동안 이국땅에서 남편의 민주화 운동과 투옥 등으로 고르지 않은 삶을 살아온 아내에 대한 배려임은 말할 것도 없다.
- 내일을 꿈꾸는 문동환의 화두 ‘떠돌이신학’
말년을 미국에서 보내고 있으면서도 문동환은 안식하지 못한다. 온 세계에서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온갖 참사를 모른 체할 수 없고, 특히 세계화, 신자유주의라는 이름 아래 세계 도처에서 행해지는 다국적기업의 횡포로 나날이 극심해지는 빈부 격차, 고향에서 밀려나 저임금 노예로 팔려가 이국의 변방을 떠도는 이주노동자들 같은 민중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어서이다. 문동환은 말한다. “마음은 아직 청춘이다. 내게 던져진 화두를 놓지 않고 다가올 내일을 꿈꿀 것이다.” 그는 지금도 젊은 목회자들과 함께 성서 연구를 하면서, 고향을 떠나 떠도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그런 희생자들을 양산해 내는 신자유주의 경제구조의 문제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민중신학을 더욱 심화한 ‘떠돌이신학’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은퇴한 뒤 나는 아내를 따라 미국에 왔다. … 수채화나 도자기를 다시 시작하면서 좀 여유 있게 살고 싶었다. … 그러나 이 계획은 휴지 조각처럼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 온 세계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참사가 완전히 나를 뒤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세계 도처에서 빈부 격차를 조장하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신자유주의의 악랄한 횡포가 나를 가만히 있을 수 없게 했다. 신자유주의로 말미암아 고향에서 쫓겨나 세계 곳곳에서 유리방황하는 떠돌이들이 계속 늘고 있다. 그들의 아우성 소리가 만주에서 떠돌아다니는 동족을 보면서 아파하던 기억을 지닌 내 심장에 화살처럼 꽂혔다. 박정희 독재 밑에서 신음하던 민중을 보면서 분노하던 기억을 지닌 내 마음에 다시 불을 질렀다. … 삶을 즐긴다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 20세기의 끄트머리에서 나는 암담함을 느꼈다. 앞으로 닥칠 21세기는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암담한 심정으로 고민하는 나에게 성서는 또다시 새로운 불꽃을 던져주었다. 하느님은 이런 암흑의 역사를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 고향에서 밀려난 떠돌이들을 부르셨다. … 한국에서는 그들을 민중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 민중 대부분은 아직도 현재의 제도 안에서 어떻게든 살길을 찾으려고 애쓸 뿐이다. 새 역사의 주인공은 현재의 제도에서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떠돌이들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다시 떠돌이 신학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 책의 머리말에서 옮긴 이 글은 문동환의 끝나지 않은 화두 ‘떠돌이신학’에 대한 설명이자, 또한 그가 아흔 고개를 앞두고,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 추천평
“이 자서전은 행동하는 지성인이 진리 실험자로서 경험한 진솔한 삶의 이야기이며 동시에 잘 알려지지 않은 현대 정치사의 속살 이야기이다. 곧, 3·1민주구국선언서 사건으로 겪은 옥중 경험과 재판 과정,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위원회 활동의 진상, 그리고 6·15공동선언실천 민족위원회 공동의장으로서의 역사적 증언들이다. (문동환은) 가장 비정치적 사람이면서도 DJ가 가장 필요로 하고 신뢰했던 청렴한 정치인, 가장 합리적인 진보 신학자이면서 무당같이 신비한 영통 경험을 하는 사람, 북간도 민족주의 기독교 인맥의 물줄기이면서 전체 지구의 민중을 가슴에 품은 떠돌이 민중신학자이다.” –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