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4
1.선사시대부터 중세까지 / 2.르네쌍스, 매너리즘, 바로끄 / 3.로꼬꼬, 고전주의, 낭만주의 / 4.자연주의와 인상주의, 영화의 시대
아르놀트 하우저 / 창비 / 2012.1.1
74년 처음 국내 출간된 후 대학생의 필독서로 꼽히던 책으로 지금도 회자되는 문학/예술분야의 명저. 고대로부터 현대까지의 문학과 예술을 사회학적 상상력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번 개정판은 출간 당시의 시대상황과 이념적 시각 탓에 적절한 번역을 하지 못한 것들을 바로잡았으며 시대 구분도 ‘고대, 중세, 근대’ 등이라 했던 것을 ‘르네상스, 매너리즘, 바로크’ 등 원저의 표현으로 고쳤다. 또 책 속에 인용된 작품 사진 1백29컷을 보충했으며 각 권마다 컬러화보도 새로 실었다.
이 책은 진보적 예술사학을 대표하는 명저로 선사시대 동굴벽화에서 20세기 초 영화의 탄생까지 인류 문화사상의 거의 전시기와 분야를 통괄하고 있다. 저자는 인간의 모든 정신활동이 사회·경제적 조건의 산물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개별작품들과 사회역사적 상황을 적절히 연결시켜 해석한다. 그러나 저자는 ‘모든 예술은 사회적으로 조건지어져 있지만 예술의 모든 측면이 사회학적으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헝가리 출신의 미학자이자 예술사학자인 아놀드 하우저의 명저를 기존의 한문 혼용판에서 탈피 읽기 쉽고 다가 서기 편하게 만든 개정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권. 구석기시대의 미술과 자연주의에서부터 신석기 시대, 고대 오리엔트를 거쳐 부르조아 고딕 예술까지를 넘나든다.
2권에서는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사회적 지위는 어땠을까? 르네상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문학과 예술의 사회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정치상황과, 친꾸에첸또의 고전주의, 매너리즘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흔히 들어왔던 바로크의 개념도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3권은 서양문화의 거의 모든 분야를 철저한 사회사적 관점에서 총정리한 독보적인 업적. 예술작품을 포함한 모든 정신활동이 근본적으로 ‘사회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신념과 그러면서도 예술이라는 인간행위가 지닌 독자성과 복잡성에 대한 존중심을 겸하고 있다는 데에 이 저서의 큰 미덕이 있다.
전4권은 서양문화의 거의 모든 분야를 철저한 사회사적 관점에서 총정리한 독보적인 업적이다. 예술작품을 포함한 모든 정신활동이 근본적으로 ‘사회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신념과 그러면서도 예술이라는 인간행위가 지닌 독자성과 복잡성에 대한 존중심을 겸하고 있다는 데에 이 저서의 큰 미덕이 있다.
○ 목차
1권-선사시대부터 중세까지
제1장 선사시대
- 구석기시대: 마술과 자연주의
- 신석기시대: 애니미즘과 기하학 양식
- 마술사 또는 성직자로서의 예술가, 전문직업 또는 가내수공예로서의 예술
제2장 고대 오리엔트의 도시문화 - 고대 오리엔트 예술의 동적 요소와 정적 요소
- 이집트 예술가의 지위와 예술활동의 조직화
- 중제국시대 예술의 유형화
- 아메노피스 4세 시대의 자연주의
- 메소포타미아
- 끄리띠
제3장 고대 그리스와 로마 - 영웅시대와 호메로스 시대
- 아케이즘과 참주제하의 예술
- 고전주의 예술과 민주정치
- 그리스의 계몽사조
- 헬레니즘 시대
- 제정시대와 고대 후기
- 고대 그리스ㆍ로마의 시인과 조형예술가
제4장 중세 - 초기 그리스도교 예술의 정신주의
- 비잔띤제국의 정교합일체제하의 예술양식
- 우상파괴운동의 원인과 결과
- 민족대이동기에서 카롤링어 왕조의 문예부흥기까지
- 영웅가요의 작자와 청중
- 수도원에서의 미술품 생산의 조직화
- 봉건제도와 로마네스끄 양식
- 궁정적ㆍ기사적 낭만주의
- 고딕 예술의 이원성
- 건축장인조합과 길드
- 고딕 후기의 부르즈와적 예술
2권-르네쌍스·매너리즘·바로끄
제1장 르네쌍스
- 르네상스의 개념
- 꾸아뜨로첸또의 시민적 예술과 궁정적 예술의 감상자층
- 르네쌍스 예술가의 사회적 지위
- 친꾸에첸또의 고전주의
제2장 매너리즘 - 매너리즘의 개념
- 정치적 현실주의의 시대
- 기사도의 두번째 패배
제3장 바로끄 - 바로끄의 개념
- 궁정적ㆍ카톨릭적 바로끄
- 시민적ㆍ개신교적 바로끄
3권-로꼬꼬·고전주의·낭만주의
제1장 로꼬꼬와 새로운 예술의 태동
- 궁정예술의 해체
- 새로운 독자와 관객
제2장 계몽시대의 예술 - 시민극의 형성
- 독일과 계몽주의
제3장 낭만주의 - 혁명과 예술
- 독일 및 서유럽의 낭만주의
4권-자연주의·인상주의·영화의 시대
제1장 자연주의와 인상주의
- 1830년대의 세대
- 제2제정기의 문화
- 영국과 러시아의 사회소설
- 인상주의
제2장 영화의 시대
○ 저자소개 : 아르놀트 하우저 (Arnold Hauser)
헝가리 태생의 맑스주의 예술사학자. 1892년 테메슈바르(현 루마니아 티미쇼아라)에서 태어나 부다페스트와 빠리에서 게르만어·로망스어 및 철학을 공부했다. 부다페스트 ‘일요써클’에 참여해 카를 만하임, 죄르지 루카치 등과 교유했으며, 독일 낭만주의 미학 연구로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잠시 교수로 일했다. 1919년 쏘비에뜨 정권에 맞선 헝가리 반혁명이 일어나자 이딸리아로 건너가 예술사를 공부했다. 이후 베를린에 머물며 문학과 예술에 관한 사회경제사의 관점을 진전시켰다. 나치가 득세하면서 빈 영화계로 자리를 옮겨 저서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다가 1938년 영국 런던으로 이주했다. 리즈 대학의 전임강사로 일한 뒤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초청으로 프랑크푸르트와 독일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미국 브랜다이스 대학과 오하이오 대학에도 머물렀다. 1978년 타계하기 전 부다페스트로 귀향해 헝가리 학술원 명예회원이 되었다. 지은 책으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비롯해 『예술사의 철학』 『매너리즘: 르네상스의 위기와 근대예술의 기원』 『예술사회학』 『루카치와의 대화』 등이 있다.
– 역자 : 백낙청
문학평론가, 영문학자, 편집인. 1938년 출생하고 경기고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브라운대와 하바드대에서 수학했다. 박사과정 중에 1964년 서울대 영문학과 전임강사가 되었으며 나중에 다시 미국으로 가서 1972년 하바드대에서 D. H. 로런스 연구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6년 계간 『창작과비평』을 창간하고 2015년까지 편집인을 지냈으며, 서울대 영문과 교수,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시민방송 RTV 이사장,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상임대표, 한반도평화포럼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이래 민족문학론을 전개하고 분단체제론을 통해 한반도 문제의 체계적 인식과 실천적 극복에 매진해왔으며, 근대에 대한 탐구를 통해 새로운 문명전환의 사상을 연마하고 있다.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 계간 『창작과비평』 명예편집인, 한반도평화포럼 명예이사장으로 있다.
저서로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1/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합본개정판)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2』 『민족문학의 새 단계: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3』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4』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5』 등의 문학평론집과 연구비평서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 『D. H. 로런스의 현대문명관』을 냈고,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 『흔들리는 분단체제』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2013년체제 만들기』 등의 사회평론서와 『백낙청 회화록』(전7권), 『변화의 시대를 공부하다』 『문명의 대전환을 공부하다』 등 다수의 공저서 및 편저서가 있다. 제2회 심산상, 제1회 대산문학상(평론부문), 제14회 요산문학상, 제5회 만해상 실천상, 제11회 늦봄문익환통일상, 제11회 한겨레통일문화상, 제3회 후광김대중학술상 등을 수상했다.
– 역자 : 반성완
한양대 명예교수. 서울대와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독문학과 철학을 전공하고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루카치의 미학과 독일 고전주의』 『변증법적 미학에 이르는 길』, 옮긴 책으로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독일문학비평사』 『루카치 소설의 이론』 『새로 쓴 독일 역사』 『열린 미술관』 등이 있다.
– 역자 : 염무웅
호적명 염홍경. 1941년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경북 봉화(춘양)와 충남 공주에서 성장,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다.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으로 등단하여 창작과비평사 대표, 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영남대 명예교수이며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이사장과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을 겸하고 있다. 저서로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 『혼돈의 시대에 구상하는 문학의 논리』, 『모래 위의 시간』, 『문학과 시대현실』, 『살아 있는 과거』, 산문집 『지옥에 이르지 않기 위하여』, 『자유의 역설』, 『반걸음을 위한 생존의 요구』, 대담집 『문학과의 동행』 , 역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공역)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1830년대에 – 인용자주)자본가는 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전에는 가지지 못했던 지위를 획득했다. 지금까지는 이런 역할을 하기 위해서 재산만으로는 안되고 어던 이데올로기적 후광이 필요했었다. 부자는 교회나 왕실 혹은 예수과 학문의 후원자로서 등장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단지 부자이기 때문에 최대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21-22쪽
문학과 일간신문의 결합은 어느 동시대인의 의견에 따르면 공업적 목적을 위한 증기의 사용처럼 혁명적인 효과를 가지며, 문학적 생산의 모든 성격을 바꾸어놓는다. 설령 이런 비유가 과장되었고 문학의 산업화가 다만 일반적인 정신적 발전, 즉 그 시대의 예술창작 자체의 한 경향을 나타낸 데 불과하다 하더라도, 대단찮은 작가지만 창의적 사업가인 에밀 드 지라르댕이 그때까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뒤마끄의 아이디어를 따서 1836년 <라 프레스>를 창간한 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획기적인 혁신은 그가 신문의 연간 구독료를 다른 것들의 반인 4프랑으로 고정시키고 결손분을 선전광고의 수입으로 메우려고 생각한 점에 있다. (중략) 그들은 신문의 매력을 높이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광고수입을 올리기 위해서 독자들에게 가능한 한 구미에 당기고 다채로운 읽을거리를 제공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26-27쪽
(17세기에 – 인용자주) <르 그랑 씨뤼스>와 <아스트레>는 궁정귀족의 주요한 읽을거리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사람들은 말하자면 개인 자격으로 그것들을 읽으며 거기에 탐닉하는 것을 하나의 악덕인 양, 적어도 하등 뽐낼 이유가 없는 하나의 약점인 양 생각했다. 보쉬에는 영국의 헨리에타 왕비에 대한 추도연설에서 유행소설과 그 시시한 주인공들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점으로 고인을 찬양했는데, 그것은 이 문학장르가 당시에 공적으로 어떻게 평가되었는가를 충분히 보여준다. 그러나 사적인 오락에 관한 한 귀족은 고전주의적 예술규범에 얽매임 없이 전과 같이 구속받지 않고 모험소설과 엽기취미를 즐겼다. (중략)
소설은 18세기의 주도적 문학장르가 되는데, 그것은 소설이 그 시대의 문화적 문제, 즉 개인주의와 사회 사이의 대립을 가장 포괄적으로 깊이 표현하기 때문이다. 어떤 다른 형태에서도 부르즈와 사회의 모순이 그렇게 강력히 적용한 형식이나, 어디에서도 개인의 투쟁과 패배가 그렇게 박력있게 묘사된 곳은 없다. -38-40쪽
낭만주의는 소설에서 개인과 세계, 꿈과 생활, 시와 산문 사이에서 생기는 갈등의 가장 적합한 서술방법을 발견하고, 이 갈등의 유일한 해결처럼 보이는 체념의 가장 깊이있는 표현을 찾아냈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괴테는 낭만주의와 정반대되는 해결책을 찾는데, (중략) 사람은 내면적으로 세계와 결합해 있을 때에만 그 세계에 올바르게 대처할 수 있으며, 또한 우리는 세계 속에 뛰어듦으로써만 세계를 개혁할 수 있다는 것을 괴테는 강조한다. (중략) 스땅달과 발자끄는 괴테보다 팽배한 긴장을 훨씬 더 날카롭게 보았고 더욱 현시감을 가지고 상황을 판단했다. 그리하여 이러한 통찰이 기록된 그들의 사회소설은 낭만주의의 환멸소설뿐 아니라 괴테의 교양소설도 한 발 넘어선 것이다. 그들의 태도는 낭만파의 현실모멸과 괴테식의 낭만주의 비판을 모두 극복한 것이다. 사회문제의 해결 가능성에 관해서 일체의 환상을 허락하지 않는 냉철한 현실사회적 분석에서 그들의 비관주의가 생겨난다.-40-41쪽
(스땅달은) 고급 쌀롱과 한가한 향락적 생활을 좋아하며, 교양과 지식이 풍부하고 재치가 넘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또한 그는 공화정과 민주제로 인하여 삶이 빈약해지고 어두워지며, 거칠고 무식한 대중이 인생의 아름다움을 세련된 방법으로 즐기는 섬세하고 교양있는 사회를 압도해버리지나 않을까 겁낸다. 그는 ‘나는 민중을 사랑하고 압제자를 증오한다. 그러나 항상 그 민중과 함께 살아야 한다면 고통스러울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48쪽
자연주의는 프롤레타리아 예술가의 운동에서 시작한다. 그 첫 대가는 꾸르베인데, 그는 서민대중 출신이며 부르즈와적 범절에 대한 존중심이 전혀 없는 예술가다. 왕년의 보헤미안 그룹이 흩어지고 그 멤버들은 낭만주의 기분을 내려는 부르즈와지의 총애물이 되어버린 후 이제 꾸르베의 주위에 새로운 써클, 말하자면 제2의 보헤미안파가 형성된다. <석공들>과 <오르낭에서의 매장>(1850)을 그린 꾸르베가 지도적 위치에 서게 된 것은 예술적 특징보다도 주로 인간적 특성들 때문이다. (중략) 꾸르베의 작품을 전통적 비평으로부터 변호하려는 것이 자연주의 이론이 생겨난 직접적 계기이다. <오르낭에서의 매장>이 전시되었을 때 샹플뢰리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이제부터 비평가들은 리얼리즘에 찬성이냐 반대냐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리얼리즘, 이 유명한 낱말이 드디어 등장한 것이다.-83쪽
꾸르베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이루어놓은 ‘깔로까가티아'(kalokagathia 선과 미의 통일적 완성)을 파괴하고, 수많은 혁명과 사회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1850년까지는 거의 변함없이 유지되어던 심미적 이상을 배격함으로써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생활질서를 위해 투쟁하고 있음을 보수적 평론가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끄ㅜ르베 그림에 나오는 농부들과 노동자들의 추한 모습과 중산층 부인들의 뚱둥하고 저속한 모습이 기존 사회에 대한 항의이며, 그의 ‘이상주의에 대한 경멸’과 ‘진흙탕에서 뒹구는 짓’이 모두 자연주의의 혁명적 전투수단의 일부라고 느끼는 것이다. 밀레는 육체노동에 대한 찬양을 그리며 농부들을 새로운 서사시의 주인공으로 만든다. 도미에는 국가의 지주가 되는 부르즈와지의 우둔하고 몰인정한 면을 그리며, 부르즈와의 정치와 법률과 오락을 비웃고, 부르즈와적 관습과 예절 뒤에 감춰진 그 모든 도깨비놀음 같은 희극을 폭로한다. 여기서 주제선택이 예술적인 배려보다 정치적 배려에 의해 좌우되고 있음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86쪽
그러나 자연주의자들은 정말 당시의 세계를 대표하였는가? 아니 당시의 세계 전부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당대 미술감상자들의 가장 큰 부류를 대표했는가? 그들은 확실히 그림을 주문하고 구입하고 공적으로 비평하는 사람들, 도는 미술학교와 미술전람회를 관장한 사람들의 다수를 대표한 것은 아니었다. (중략) 현대예술은 실향민 신세가 되고 모든 실제적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자연주의 미술과 당시의 우아한 ‘벽 장식물’을 갈라놓은 것과 똑같은 간격이 당시의 본격적인 문학과 대중문학, 본격음악과 경음악 사이에 존재했다. 그리고 대중적 오락에 기여하지 않는 모든 문학과 음악은 당시의 진보적 미술과 마찬가지로 제대로의 기능을 잃어버렸다. (중략) 문학이 예술과 오락의 이중역할을 하고 한 작품으로 교양수준이 다른 여러 계층의 욕구를 만족시킨다는 일은 이제 끝장나게 된다.-91-92쪽
플로베르와 보들레르의 예술이 생산된 시기인 제2제정기는 동시에 현대를 풍미하고 있는 악취미와 비예술적 통속물이 태어난 시기이기도 하다. 물론 예전에도 엉터리 화가와 재능없는 작가들이 있었으며, 아무렇게 후다닥 만들어진 작품과 서투르고 시시한 예술적 아이디어가 있엇다. 하지만 가치 없는 것은 오인될 여지 없이 가치 없고 저속하고 몰취미한 것이어서, 알아달라고 내세우지도 않았으며 중요성도 없었다. 잘(중략) 그러나 이제 이러한 가짜가 완전히 행세를 하며, 진짜의 껍데기를 쓰고 진짜를 대신하는 일이 통례가 된다. 예술감상을 가능한 한 편하고 힘 안 들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모든 곤란과 복잡성, 문제를 일으키고 골치 아프게 하는 모든 일을 피하는것, 요컨대 예술적인 것을 기분 좋고 발라맞추는 것으로 환원시키는 일이 목적인 것이다. 대중이 알면서도 일부러 자기의 수준 밑으로 내려간 ‘휴식’으로서의 예술, ‘기분전환’으로서의 예술은 이 시기의 발명인데, 그것은 모든 창작형태를 지배하지만 특히 가장 거침없고 과감한 대중예술인 연극에서 그 경향이 가장 두드러진다.-113쪽
시민계급의 삶을 이상화하는 작업의 기초로서 결혼과 가족이란 제도만큼 적합한 것은 없었다. 그것은 가장 순수하고 사심 없는, 가장 고상한 감정이 존중되는 사회형태의 하나로서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 없이 서술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그것이 과거의 봉건적 속박이 풀어진 이래 사유재산의 안정과 영속을 여전히 보장해주는 유일한 제도였던 것도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었다. 어쟀든 가정의 이념은 외부의 위험한 침입자와 내부의 파괴적 요소에 대한 부르즈와 사회의 방파제로서 연극의 정신적 토대를 이루게 되었다.-116쪽
빅토리아조 회화의 주제는 역사, 시, 일화로 충만되어 있다. 그것은 극단적으로 ‘문학적인’ 회화인데, 이렇게 문학적 요소를 많이 포함해서라기보다 회화적 가치가 너무나도 빈약해서 유감스러운 하나의 잡종예술이다. 프랑스 회화의 순수하고 화려한 화풍이 영국에 발붙이기 어렵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관능성과 자발성에 대한 철저한 두려움이다. 그러나 쫓겨났던 자연은 다시 뒷문으로 숨어들어온다. – 빅토리아 시대의 악취미의 독특한 기념관인 챈트리 컬렉션에는 속세를 더나면서 세속의 옷을 모두 벗어버린 한 수녀의 그림이 있다. 그녀는 완전한 나체로 등불이 희미하게 비치는 교회의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뒤에 서 있는 수도사들을 향하여 유혹하는 듯한 자세로 부드러운 몸을 돌리고 있다. 이 그림보다 더 보기 거북한 것을 상상하기는 곤란한데, 그것은 가장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장 나쁜 유의 춘화에 속하는 것이다. -139-140쪽
디킨즈는 모든 시대를 통해서 가장 성공적인 문필가의 한 사람이며, 아마도 근대의 위대한 작가들 중 가장 인기있는 작가일 것이다. 어쨌든 그는 자기 시대에 대한 저항이나 환경과의 긴장된 관계에서 작품이 생겨나지 않은, 독자대주으이 요구와 완전한 일치를 이룬, 낭만주의 이래 유일한 참다운 작가이다. 그는 셰익스피어 이후 유례가 없는 인기를, 고대의 무언극이나 음유시인의 대중성에 관한 우리의 개념에 가장 가까운 인기를 누렸다. 디킨즈에게 있어서 그의 세계관의 전체성과 완전성은, 대중에게 이야기할 때 그로서는 아무런 양보도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 즉 그 자신이 독자들과 똑같이 좁은 정신적 시야와 똑같이 분별없는 취미와 그리고 비할 수 없이 더 풍부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똑같이 소박한 상상력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 덕분이다. 우리 시대의 대중작가란 디킨즈와 반대로 언제나 독자에게로 기어내려가야만 한다는 느낌을 갖는다고 체스터턴은 옳게 지적했다.-151쪽
지식인은 부르즈와 계급에서 나타났고, 그 선구자는 프랑스 대혁명에의 길을 준비한 시민계급의 저 전위였다. 그들의 문화적 이상은 계몽주의적, 자유주의적인 것이며, 인간적 이상은 인습과 전통에 속박받지 않는 자유로운 진보적 인간성의 개념에 기초를 둔 것이다. (중략) 지식인들의 진리와 미의 절대성을 믿으려고 하는 것은 그것이 그들을 ‘더욱 높은’ 현실의 대표자처럼 보이게 만들면서 사회적 무력을 보상해주기 때문이며, 부르즈와지가 어느 계급에도 속하지 않는 위치에 서려하는 지식인의 이 요구를 눈감아주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보편적 인간의 가치가 존재하고 계급대립의 해소가 가능하다는 증명을 본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을 위한 예술’과 마찬가지로 학문을 위한 학문 혹은 진리를 위한 진리는 다만 실무로부터의 지식인의 소외의 산물일 뿐이다. 여기에 포함된 이상론은 부르즈와지로 하여금 정신적인 것에 대한 그들의 증오를 억누르지 않을 수 없게 만들며, 다른 한편 지식인은 이렇게 하여 권력 있는 시민계급에의 질투에 표현을 부여하는 것이다. -164-165쪽
서구의 소설은 사회에서 소외되어 고독의 무거운 짐에 짓눌려 파멸하는 개인을 묘사함으로써 끝나는 데 비해, 러시아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개인으로 하여금 세계에서 그리고 같은 인간들의 사회에서 이탈하도록 하려는 악령과의 투쟁을 묘사한다.-172-173쪽
도스또예프스끼와 똘스또이의 작품에 비할 때 19세기 후반의 모든 서구문학은 지치고 정체된 것처럼 보인다. <안나 까레니나>와 <까라마조프 형제>는 유럽 자연주의의 정상을 이룬다. 이들은 커다란 초개인적 질서에 대한 프랑스와 영국 소설의 감각을 조금도 잃어버림이 없이 저들의 심리학적 업적을 집대성하고 능가하는 것이다. 사회소설은 발자끄에서, 교양소설은 플로베르에서, 삐까레스끄 소설은 디킨즈에서 각기 그 완성을 보듯이 심리소설은 도스또예쁘스끼와 똘스또이에 이르러 그 완전한 성숙기에 들어간다. 이 두 소설가는 한편으로는 루쏘, 리처드슨 및 괴테의 감상소설에서, 다른 한편으로 마리보, 꽁스땅 및 스땅달의 분석소설에서 시작된 발전단계의 최종단계를 대표하는 것이다. -174-175쪽
그의 예술에는 발자끄에게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다치고 모욕당한 사람들’에 대한 깊은 공감과 연대감이 있으며, 비록 그의 소설에서 가난한 사람들에 관한 많은 것이 단순히 문학적 관습이나 낭만주의의 상투형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그의 작품에는 일종의 빈곤의 존엄성 같은 것이 있다. 적어도 도스또예프스끼는 정말 빈곤에 관해 쓸 줄 아는 몇 안되는 작가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그는 조루즈 쌍드나 외젠느 쒸처럼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에서 쓰거나 디킨즈처럼 과거의 빈곤에 대한 막연한 기억 때문에 쓰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 거의 평생을 궁핍 속에서 보내며 이따금씩 문자 그대로 굶어본 사람으로서 쓰고 있기 때문ㄴ이다. (중략) 그는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나 농민들과 아무런 긴밀한 접점이 없다. 그가 정말 친근감을 느끼는 것은 지적 프롤레타리아트뿐이다. 그는 자신을 일컬어, 언제나 계약 마감에 쫓기면서 일하고 평생동안 선금을 안 받고 작품을 팔아본 적이 없으며 흔히는 한 장(章)의 첫머리가 이미 인쇄소에 가 있는데 그 끝을 어떻게 맺을지를 아직 모르고 있는 ‘문학 프롤레카리아’요 ‘우편역마’라고 했다.-178-179쪽
똘스또이의 예술과 사상을 불모성과 무기력의 운명으로부터 지켜주는 것은 그의 타협할 줄 모르는 합리주의 정신이다. 신체적, 정신적, 사실들에 대한 그의 날카롭고 냉철한 눈과 그 자신이나 남들에게 거짓말하는 것에 대한 그의 혐오가 똘스또이의 종교적 태도에서 모든 신비주의와 독단주의를 제거해주며 그의 기독교적 윤리가 영향력이 큰 정치적 요인으로 발전되도록 한다. 러시아정교에 대한 도스또예프스끼의 열성이나 슬라브파 공통의 친교회적 경향 모두 그에게는 낯선 것이다. 그가 신앙에 도달한 것은 합리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이며 의식적인 방법을 통해서였다. 그의 이른바 개종이라는 것은 아무런 직접적인 종교적 체험 없이 일어난 완전히 이성적인 과정이다.-194쪽
인상주의를 가장 단순하게 정식화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지속과 존속에 대한 순간의 우위, 모든 현상은 어쩌다가 잃시적으로 그렇게 놓여 있을 뿐이라는 느낌, 두 번 다시 발디딜 수 없는 시간의 강물 위로 사라져가는 하나의 물결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상주의적 방법은 모든 예술적 수단과 기교를 동원하여 무엇보다 이러한 헤라끌레이또스적 세계관을 표현하려고 하며, 현실이란 존재가 아니라 생성이요, 결정된 상태가 아니라 움직이는 과정임을 강조하려 한다. -202쪽
심미주의는 인상주의 시대에 와서 발전의 절정에 달한다. 그 특징적 성격들, 즉 인생에 대한 수동적이요 관조적인 태도, 체험의 덧없음과 불확실성 및 쾌락주의적인 감각주의는 이제 예술 일반의 평가기준이 된다. (중략) 이것은 인생이 예술의 형태를 취할 때 더 아름답게 보이고 더 화해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최후의 위대한 인상주의자요 심미적 쾌락주의자인 프루스트가 생각했던 것처럼 기억과 환상과 심미적 체험 속에서만 인생이 비로소 뜻깊은 현실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우리의 체험을 가장 강렬하게 실감하는 것은 현실 가운데서 인간이나 사물들과 마주칠 때가 아니라 – 이러한 ‘시간’과 실감은 늘 ‘잃어버리고’ 마니까 – 우리가 ‘시간을 되찾을’ 때, 이미 우리 삶의 행위자가 아니고 관찰자일 때, 예술작품을 창조하거나 감상할 때, 즉 우리가 기억을 할 때라는 것이다.-219쪽
1880년대에는 사람들이 당대의 심미적 쾌락주의를 ‘데까당스’라고 즐겨 불렀다. 섬세한 향락자 데제쌩뜨는 동시에 버릇없는 ‘데까당’의 원형이다. 그러나 데까당스의 개념은 심미주의의 개념에 반드시 포함되어 있지는 않은 특징들, 그러니까 무엇보다도 문화의 몰락과 위기라는 느낌, 즉 흥망성쇠라는 한 생명과정의 종말에 서 있으며 한 문명의 해체에 직면해 있다는 의식을 포함한다.-224쪽
그러나 보들레르도 체호프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랭보 같은 인간에게 삶이 어떠한 지옥으로 전개될지 전혀 예감하지 못했다. (중략) 랭보, 그는 어떠한 인간이었는가 – 신경쇠약자, 하릴없는 건달패, 갈 데까지 심성이 비뚤어진 위험인물,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던 어학선생, 길거리의 장사꾼, 써커스단의 인부, 부두노동자, 농장의 날품팔이, 선원, 네덜란드 군대의 지원병, 기사, 탐험가, 잡상인 따위로 지내다가 아프리카 어디에서 전염병에 걸려 마르쎄유의 어느 구호병원에서 한쪽 다리를 절단할 수밖에 없었으며 마침내 37세의 나이로 극심한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간 사나이, 17세에 불멸의 시를 쓰고 19세엔 시작을 완전히 걷어치운 다음 죽을 때까지 문학 얘기를 두 번 다시 입에 올리지 않은 천재, 자기의 가장 귀중한 보물을 팽개치고 일찍이 그 보물을 가졌었다는 것조차 완전히 잊고 완전히 부정했던, 남들과 자기 자신에 대한 범죄자, (중략) 이것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허무주의요 극단적인 자기부정이 아닌가? 그리고 이것이 바로 점잖고 예의바르고 까다로운 플로베르와 그의 교양있고 예술을 이해하는 세련된 친구들이 뿌린 씨의 열매인 것이다-232쪽
1890년 이후 ‘데까당스’라는 말은 암시적인 느낌을 잃어버리고 ‘상징주의’가 주도적 예술경향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다. (중략) 인상주의와 상징주의를 구별하는 것은 때로 매우 어렵다. (중략) 시각적, 음향적 효과를 노린다는 점에서, 다른 감각재료들을 혼합, 결합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여러 예술형태들 사이의 상호작용, 특히 말라르메가 시의 본령을 음악에서 탈환하는 겋ㅅ으로 이해한 점에서 상징주의는 ‘인상주의적’이다. 그러나 비합리주의적, 정신주의적 입장이라는 점에서 상징주의는 또한 자연주의적, 유물론적 인상주의에 댛한 날카로운 반동을 뜻한다. 인상주의에서는 감각적 경험이 다른 무엇으로 환원될 수 없는 최종적인 것임에 반하여, 상징주의에서는 일체의 경험적 현실은 단지 관념세계의 비유일 뿐인 것이다.
한편, 상징주의는 낭만주의에서, 즉 시의 핵심으로서의 메타포의 발견에서 시작하여 인상주의의 풍성한 형상들로 인도한 발전과정의 총결산을 대변한다.(중략) 상징주의는 과거의 시 전체에 대한 반동으로 간주될 수 있는데, 그것은 이전에는 알려진 적도 없고 강조된 일도 없는 어떤 것, 즉 ‘순수시’를 발견하는 것이다.-233-234쪽
프루스트에 이르면 시간은 이미 분해와 파괴의 원리가 아니요, 그 속에서 이념과 이상이 가치를 잃고 삶과 정신이 실체를 상실하는 요소가 아니고, 오히려 우리는 시간이라는 형식을 통해 우리의 정신적 존재, 생명 없는 물체와 기계작용에 반대되는 우리 삶의 본질을 포착하고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우리 본연의 삶에 이르는 데 그치지 않고 시간을 통해서 비로소 그렇게 된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 삶의 개개의 순간의 총화일 뿐 아니라 이러한 순간들이 모든 새로운 순간을 통해 획득하는 모든 새로운 국면들의 귀결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나간 시간, ‘잃어버린’ 시간은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지나가버림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생활에 내용을 부여한다. 그러므로 베르그쏭 철학을 정당화시켜준 것이 프루스트의 소설이라 할 수 있다. 프루스트 소설에 와서 비로소 베르그쏭의 시간관이 그 진가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과거의 귀결점으로서의 현재의 국면에서 처음으로 실감있는 삶과 약동하는 움직임과 색채, 관념적 투명성과 정신적 내용을 획득한다. 프루스트의 말대로 진정한 낙원이란 잃어버린 낙원이기 때문이다.-269쪽
현대예술은 인상파의 부드러운 화음과 아름다운 색조를 거부하는, 근본적으로 ‘보기 싫은’ 예술이다. 회화에서는 ‘회화적’ 가치를 부인하고, 시에서는 정서의 조화와 아름답고 일관성있게 구성된 이미지를 배격하며, 음악에서는 멜로디와 음조를 파괴한다. 현대예술은 모든 즐겁고 기분 좋은 것, 모든 순전히 장식적이고 쾌락적인 요소를 한사코 기피하는 것이다. (중략) 때로는 순수한 구조를 강조하고 때로는 어떤 형이상학적 정열의 황홀경을 내세우지만 어떻게든 인상주의 시대의 자기만족적인 심미주의에서 벗어나려 한다. 인상주의도 현대의 심미주의 문화가 처한 위기를 인식하고 있었지만 이 문화의 그로떼쓰끄한 면, 허위에 찬 면을 처음으로 강조한 것은 인상파 이후의 예술이다. 모든 감각적, 쾌락주의적 감정에 대한 투쟁이 여기서 연유하며, 삐까소, 카프카, 조이스 등의 작품에서 암담하고 우울하고 고통에 찬 면도 여기서 온다. 종래 예술의 감각주의에 대한 혐오, 그리고 그 가상적 세계를 해체하려는 욕망이 절대적이어서 기존 예술의 기호체계를 단호히 거부한다.-290쪽
모든 예술은 혼돈과의 유희요 혼돈에 대한 싸움이다. 예술은 언제나 혼돈을 향해 점점 더 위태롭게 다가가서 더욱더 넓은 정신의 영토를 그로부터 건져오는 작업이다. 예술사에 어떤 진보가 있다면 그것은 혼돈으로부터 탈환해온 이러한 영토의 끊임없는 확대를 말하는 것일 게다. 영화는 시간의 분석을 통해 이러한 발전을 또 한걸음 밀고 나갔다. 전에는 음악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었던 경험을 시각적으로 나타낼 수 있게끔 해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가능성, 아직 비어 있는 이 새로운 형식을 참다운 삶으로 가득 채워줄 예술가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다.-309쪽
우리의 과제는 다수 대중의 현재 시야에 맞게 예술을 제약할 것이 아니라 대중의 시야를 될 수 있는 한 넓히는 일이다. 참된 예술이해의 길은 교육을 통한 길이다. 소수에 의한 항구적 예술독점을 방지하는 방법은 예술의 폭력적인 단순화가 아니라 예술적 판단능력을 기르고 훈련하는 데 있다. 문화정책의 모든 영역에서 그렇듯이 예술의 세계에서도 발전을 자의적으로 중단하는 것은 항상 해결해야 할 문제의 회피가 되고 만다는 데에 가장 큰 난점이 있다. 즉 문제가 생기지 않는 상태를 조성함으로써 겨과적으로 해결책을 발견하는 일을 연기하는 것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원시적이면서 동시에 가치있는 예술을 만들어내는 길은 없다. 오늘날 참되고 진취적이고 창조적인 예술은 복잡한 예술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예술을 누구나 똑같은 정도로 즐기고 이해할 도리는 없지만 좀더 폭넓은 대중의 참여가 확대되고 심화될 수는 있다. 문화적 독점을 해소하는 전제조건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전제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해 싸우는 수밖에 없다.-324-325쪽
말라르메는 첫 단어, 첫 줄이 어디로 어떻게 전개되어갈지 정확하게 모른 채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는 거의 자동적으로 얽혀드는 단어와 시행들의 결정화로서, 서로 꼬리를 물고 나오면서 상호 변용시키는 환상과 연상의 결합으로 형성되었다. ‘순수시’의 시학은 이러한 창작방법의 원리를 또 수용방법의 이론으로 바꾸어놓고, 시작품 전체를(…) 반드시 알지 못하더라도 시적 체험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규정한다. (…) 한 편의 시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그 시의 합리적 의미를 파악할 필요가 없거나 혹은 적어도 그것으로는 불충분하며, 나아가서 시작품 자체가 민요의 경우에서 보듯이 어떤 명백한 ‘의미’를 가질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 그것은 심미주의의 가장 순수한 비타협적 형태를 대변하며 일상적 실천적 합리적 현실에서 완전히 독립된 시적 세계가, 자기 자신의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자율적 자족적인 심미적 소우주가 온전히 가능하다는 기본적인 이념을 나타내고 있다.-237-239쪽
시에 접근하는 특징적인 정신적 태도가 합리적 오성이 아니라는 발견으로부터 말라르메는 모든 위대한 시의 근본적인 특징이란 파악될 수도 측정될 수도 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생략적 표현방식의 예술적인 이득은 명백하다. 연상의 연쇄에서 어떤 고리를 생략하는 것은 효과가 느리게 진행될 때 잃어버리기 쉬운 속도와 긴장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 그의 시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관념의 압축과 이미지의 비약에 힘입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가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결코 언제나 예술적 관념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의적이고 유희적인 언어의 취급방식과 결부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오직 난해성 그 자체를 추구하는 이러한 야심은 대중으로부터 고립되려는, 그리고 가능한 한 작은 동호인의 집단에 자기를 제한하려는 시인의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정치적 문제에 대한 외관상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상징주의자들은 본질적으로 반동적이며, (…) 문학에서의 극우파였다. 물론 개개 시인들의 정치적 신념이 다르고 시의 난해성이란 현대문화가 피할 수 없는, 오래 전부터 준비된 발저느이 결과임을 우리가 잘 알고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의 시가 어렵다는 사실은 부분적으로 말라르메의 시가 어려운 것과 같은 이유에서 역시 비교(秘敎)적이고 비민주적인 느낌을 주며 광범한 대중으로부터 고의적으로 자기를 은폐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예술의 전역사는 표현의 기술적 수단의 계속적인 혁신과 개선의 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술의 원활한 정상적 발전은 이들 수단의 남김없는 활용과 지배의 과정으로, 능력과 의도, 표현매체와 표현내용의 조화된 일치로 정의할 수 있다. 산업혁명 이래 이러한 정상적 발전이 중단되고 기술적 진보가 지적 성과를 누르고 우위에 서게 된 것은 좀더 복잡하고 좀더 다양한 기계가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원인이 있다기보다, 경제적 번영에 자극된 기술적 발전의 빠른 템포를 인간의 정신이 따라잡지 못하게 되었던 현상에 원인이 있다. -145-146쪽
그러나 디킨즈의 시대에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문예작품에 흥미를 가진 두 그룹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 시대와 우리 시대의 유일한 차이는, 당시의 유행문학이 아직 디킨즈 같은 작가의 작품들을 포함하고 두 종류의 문학을 다 같이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음에 반하여, 오늘날에는 훌륭한 문학이 근본적으로 비대중적이요, 인기있는 문학이란 식자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것이라는 데에 있다.-159쪽
○ 출판사 서평
헝가리 태생으로 20세기를 빛낸 지성, 아르놀트 하우저가 선사시대부터 오늘날 대중영화의 시대까지, 인간과 사회와 예술의 관계를 역동적으로 풀어낸다. 예술이 시대와 사회관계 속에 빚어진 산물이라는 ‘예술사회학’의 관점을 선구적으로 펼친 이 책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1951년 영문판으로 첫선을 보인 이래 지금까지 20여개 언어로 번역되며 ‘새로운 예술사’로서 전세계 지식인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았다.
- 유럽의 변방에서 떠올라 한국 지성계의 아이콘이 되다
헝가리 유대계 출신으로 독일어를 제1언어로 삼아 글을 쓴 저자 아르놀트 하우저(1892-1978)는 생애 대부분을 이국에서 보낸 디아스포라 지식인이다. 부다페스트에서 공부하던 20대 초반, 그는 죄르지 루카치, 카를 만하임, 벨라 발라스 등과 어울리며 헝가리 혁명정부 문화기관에서 잠시 일하기도 했다. 그러다 반(反)혁명이 일어나자 고국을 떠나 이딸리아로, 베를린으로, 다시 나치를 피해 빈으로 옮겨 다녔다. 같이 예술사를 공부하던 아내가 빈의 대학에 들어가고, 남편 하우저는 영화사에 취직해 생계를 꾸렸다.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접수하며 빈에 더 머물 수 없게 되자 친구 만하임의 권유로 런던에 건너갔다. 그리고 ‘예술사회학’에 묶일 만한 글을 수집해달라는 청탁을 받아 작업에 착수했다. 평일에는 저녁 6까지 영화사에서 일한 뒤 밤늦은 시간을 쪼개 작업하며, 휴일에는 대영박물관 도서실에 틀어박혀 타자기를 두드리는 생활을 10년간 이어갔다. 예술사회학 선집은 끝내 미완으로 남았지만, 그 지난한 여정은 하우저 자신의 언어로 내놓은 책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로 결실을 맺는다. 도서실에 눌러앉은 그를 미술평론가이자 출판인이던 허버트 리드가 눈여겨보고 출간 제안을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1951년 영어판(Social History of Art)이 세상에 나왔고, 그 성공에 힘입어 하우저 본래의 언어로 독일어판(Sozialgeschichte der Kunst und Literatur)이 1953년 뮌헨에서 출간되었다.
한국에 소개된 것은 10여년이 지난 1966년, 계간 『창작과비평』이 창간된 그해 가을호 잡지를 통해서였다. 잡지를 만들고 책을 공동 번역한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그다지 신속한 소개랄 수는 없지만, 당시 사정으로는 결코 느린 편도 아니었다”고 술회한다(개정1판 서문). 반응은 뜨거웠다. 읽을거리가 귀하던 시절, 맑스주의 유물사관이 녹아 있지만 아슬아슬하게 검열의 문턱을 통과할 수 있었고, 선사시대부터 20세기까지 꿰뚫는 압도적인 지식으로 교양의 빈틈을 메우기에도 적절했다. 1974년 창비신서 1번으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현대편’이 출간된 것은 이례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신서 목록에는 황석영의 『객지』(3번),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4번), 『신동엽 전집』(10번) 등 국내 지식인의 굵직한 저작이 자리하고 있는데, 번역서를, 그것도 목록의 맨 앞에 놓은 사실은 이 책이 한국 독자들 사이에서 어떤 위상을 갖고 있었는지 말해준다. 서구 학계의 중심과 거리를 둔 동구권 좌파지식인의 책이 4·19와 5·16, 군부독재를 겪은 한국에서 ‘실천지성’ ‘참여지식인’의 필독서 역할을 한 것이다. 1977년 7월 「노예수첩」이라는 시가 국가기관을 모독한 혐의로 필화사건에 휘말렸을 때, 변호인 측에서는 문학이 현실과 맺는 관계를 해명하고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의 한 대목을 근거로 제시하기도 했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1981년 ‘근세편 하’(창비신서 29번)를 끝으로 15년 만에 완역되었고, 1999년 한번 개정을 거치며 대학가의 필수교양서로 자리를 굳혔다. 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세상과 자기 자신의 관계 정립을 고민하던 많은 이들이 이 책에서 힌트를 구했으며, 이제 이 책은 반세기의 역사를 품은 20세기 고전 반열에 올랐다.
- 예술과 사회를 읽는 세가지 키워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흔히 맑스주의 관점에서 쓰인 선구적인 예술사, 혹은 예술사회학의 시초로 불린다. 하우저는 예술을 신비의 영역에 몰아넣는 대신, 그것을 전문가의 ‘일’로, 또 사회적으로 생산되고 소비되는 경제활동의 일환으로 적극 해명하려고 했다. 이때 예술과 사회의 관계를 탐사하는 데 요긴한 세가지 키워드를 꼽을 수 있다.
첫번째는 예술형식이다. 고대인의 동굴벽화, 영웅들의 서사시, 귀족여성의 연애소설, 중세 패널화, 셰익스피어 대중연극, 시민계급의 공개연주회, 네덜란드 실내화, 계몽시대 시민극, 멜로드라마, 오늘날 대중영화에 이르기까지 문학·미술·음악·연극·영화 장르에서 우리가 아는 예술형식이 어떻게 등장했으며 어떤 식으로 분화·전개해갔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개개의 사회가 그 사회의 요구에 최적화된 예술형식을 고안해내고야 마는 과정을 추적하는 것도 흥미롭다.
두번째는 예술가다. 선사시대의 마술사, 중세의 장인, 르네상스와 낭만주의의 천재, 19세기 보헤미안 등 시대와 함께 변모해온 예술가상은 ‘예술가의 정신적 실존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위험에 처하기 마련’이라는 저자의 통찰에 근거를 대주며, 사회적 요구와 예외적 욕망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온 예술 주체의 갈등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일례로 17세기 네덜란드의 시민문화는 궁정에 속박돼 있던 예술가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허락했지만, 렘브란트라는 비상한 화가가 부르주아의 고전 취향에서 벗어나는 순간 가차없이 그를 시장에서 버렸다. <야간순찰>에서 말년의 자화상에 이르는 렘브란트 작품들은 부르주아 고객을 만족시키기를 포기한 듯한 그의 실험을 보여준다.
세번째는 수요자 혹은 관객이다. 흔히 예술사에서 걸작(예술작품)과 천재(예술가)에 가리기 쉬운 수요자의 비중을 거의 대등한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이 이 책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다. 작품을 주문하고 향유하며 예술 생산에 개입하는 것이 한때 귀족이나 성직자 같은 특권계층의 전유물이었다면, 근대 이후 그 저변은 시민계급으로, 20세기 이후 대중으로 점차 확산되었다. 영화를 통해 새로운 대중의 탄생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하우저는, 진정한 ‘예술 민주화’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다수 대중의 현재 시야에 맞춰 예술을 제약하기보다 대중의 시야 자체를 될 수 있는 한 넓히도록 해야 함을 역설한다.
하우저가 예술과 사회를 오가며 수천·수만년의 인류역사를 탐사하는 과정은 ‘예술은 사회적 산물’이라는 말로 단순화할 수 없는 복잡하고 까다로운 “미로”에 가깝다(『쥐트도이체 차이퉁』). 그렇기에 누구도 엄두를 내기 힘든, 여전히 “도전적인”(이주헌 『한국일보』 2007.4.25) 작업인 것이다.
- 고전이란 여전히 우리에게 도전적임을 일깨워주는 책,『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미술사가 유홍준, 미술평론가 이주헌, 음악평론가 이강숙, 시인 황지우, 소설가 성석제, 사회학자 노명우, 물리학자 정재승, 영화감독 이창동, 김지운… 한국의 많은 독자들이 신뢰하는 문화·예술계 인사들이다. 활동영역은 서로 다르지만 하나 접점이 있다. 모두 삶의 어느 한때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읽었다는 것이다. 유홍준은 “내게 엄청난 감동과 충격을 주었고, 평생 바라보는 나의 미술사 연구의 북극성이 되었다”고 고백하며(『한겨레』 2013.11.28), 노명우는 “예술에 대한 사회학적 질문 혹은 예술사회학적 질문의 모범을 제시해주는 책”이라고 말한다(『한겨레』 2014.5.14). 이창동은 ‘인생의 책’ 50권 중 한권으로 꼽기도 했다(『헤럴드경제』 2015.9.18).
고전의 가치는 다음 세대가 부여한다. 어느 시대에나 많이 읽히는 책은 있지만 후대에도 그러리라는 법은 없다. 어떤 책이 여전히 읽혀야 한다면 새로운 세대를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인간의 지적 야심이 얼마나 넓으면서 깊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정보를 저장할 기기도, 검색할 데이터베이스도 구축되지 않았던 시절, 한 사람이 문헌을 뒤지고 메모해가며 10여년간 축적한 방대한 지식과 그 지식을 일관된 관점으로 체계화하고 의미 부여한 통찰력은 여전히 우리가 좌표로 삼을 ‘북극성’이 되어준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