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문학이란 무엇인가
장 폴 사르트르 / 문예출판사 / 2017.9.15
실존주의의 대표 작가이자 사상가인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사르트르가 자신의 작가적 경험과 문학적 통찰력을 바탕으로 쓴 문학 개론서이자 실존주의적 문학원론으로 사르트르의 사상과 문학에 대한 확고한 신념 그리고 치밀한 논리로 써 내려갔다.
문학이 안고 있는 문제, 작품을 쓰는 행위가 뜻하는 것, 작가가 작품을 쓰는 이유, 작가는 누구를 위하여 작품을 쓰는가 등 문학에 대해 품을 수 있는 질문에 대하여 철저하게 탐구하고 있어 문학과 다른 예술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알 수 있으며, 문학에 대한 확실한 개념을 가질 수 있다.

–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사르트르가 저술한 문학 개론서
실존주의의 대표 작가이자 사상가인 사르트르가 자신의 작가적 경험과 문학적 통찰력을 바탕으로 쓴 문학 개론서이자 실존주의적 문학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
사르트르의 사상과 문학에 대한 확고한 신념 그리고 치밀한 논리로 써 내려간 이 책은 문학이 안고 있는 문제, 작품을 쓰는 행위가 뜻하는 것, 작가가 작품을 쓰는 이유, 작가는 누구를 위하여 작품을 쓰는가 등 문학에 대해 품을 수 있는 질문에 대하여 철저하게 탐구하고 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하여 문학과 다른 예술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알 수 있으며, 문학에 대한 확실한 개념을 가질 수 있다.
○ 목차
무엇이 문제인가
1. 작품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2. 어째서 쓰는가
3.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역자의 말

○ 저자소개 : 장 폴 사르트르 (Jean Paul Sartre)
1905∼1980. 파리 출생으로 두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외조부 슬하에서 자랐다. 메를로 퐁티, 무니에, 아롱 등과 함께 파리의 명문 에콜 노르말 슈페리어에 다녔으며, 특히 젊어서 극적인 생애를 마친 폴 니장과의 교우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평생의 연인 시몬 드 보부아르와도 그 시절에 만났다. 전형적인 수재 코스를 밟아 졸업하고, 병역을 마친 그는 항구 도시 루아브르에서 고등학교 철학 교사로 일하다가 1933년 베를린으로 1년 간 유학, 후설과 하이데거를 연구하였다.
사르트르는 1938년에『구토』를 출간하여 세상의 주목을 끌며 신진 작가로서의 기반을 확보하였고, 수많은 독창적인 문예평론을 발표하였다. 『존재와 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변증법적 이성비판』 등을 발표하고 『레탕모데른』지를 발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2차 대전 전후 시대의 사조를 대표하는 위대한 사상가로 평가받았다.
그는 많은 희곡을 발표하여 호평받기도 했는데, 『파리떼』, 『출구 없음』, 『더럽혀진 손』, 『악마와 신』, 『알토나의 유페자들』 등은 그 사상의 근원적인 문제성을 내포하는 동시에 그때마다 작가의 사상을 현상화한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964년, 『말』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수상을 거부한 일화로 유명하다. 1980년 4월 15일 작고할때까지 끊임없이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 역자 : 김붕구
서울대학교 불문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불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불어불문학회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에 『불문학사』, 『불문학산고』, 『프랑스 문학사』가 있고 옮긴 책으로는 데카르트의 『방법론 서설』,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스탕달의 『적과 흑』,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 카뮈의 『반항인』, 말로의 『인간 조건』, 『왕도의 길』 등이 있다.
○ 출판사 서평
이 책은 사르트르의 Qu’est -ce que la litterature?의 번역서로 문학의 본질에 대하여 놀라운 통찰력으로 더없이 명료하고 경쾌하게 진술한 사르트르의 명저이다.
○ 독자의 평
1.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산문이라는 것은 결국, 어떤 예술적 행위 보다 의미를 담을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즉, 작가의 질문이 명확히 반영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을 위한 글쓰기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답이 글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추후에 변명의 여지 없는 글을 써야 한다고 샤르트르는 말한다. 후대에 가서 어떻게 평가 받을지에 연연하지 말고, 자신의 의도와 의미를 제대로 담아서 글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글은 작가의 의도가 뚜렷이 반영되는 것이고, 이러한 의도의 반영은 곧 참여를 의미한다. ‘앙가주망’을 말하고 있다. 어쨌든 작가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자신의 의도를 글을 통해 반영 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글에 대한 책임 또한 피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샤르트르의 생각에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명제가 비판적 견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참여를 위한 글쓰기가 아닌, 그저 예술을 위한 예술.
둘 다 필요하다. 모든 예술에 의도가 담겨 있고, 의미를 찾기 위해 애쓴다면 솔직히 정답을 발견할 수 있는 관람객이나,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 자체를 보고 느끼고자 한다면, 관람객이나 독자는 보다 많은 상상력을 동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상상력을 무의미 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 상상력의 즐거움이 때로는 참여적인 열정 보다 인간을 창조적으로 만들고 휴식 시킬 수 있다는 차원에서 다른 의미의 긍정성을 가질 수 있다. 결국, 샤르트르의 글쓰기는 무한한 글쓰기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글쓰기는 없지만, 참여문학만이 전체라고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샤트르트르는 고집을 피우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2. 무엇을 위한 글쓰기인가?
답은 간단하다. 자유를 위한 것이다. 샤르트르의 자유는 결여이다. 결여가 있기에 욕망이 있고, 이 욕망을 달성하기 위한 자유가 있는 것이다. 작가는 작가의 시각으로 세계를 밝힌다. 이 역시 자신에게 결여되어 있는 혹은 세상에 결여되어 있는 것의 인식을 통해 그 결여분을 채우기 위한 자유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의지에 대한 작가의 의도를 독자는 제대로, 혹은 미숙하게 읽어간다. 샤르트르는 독자를 구분하지 않았지만, (후에 할 수도 있겠다.)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어쨌든 자유를 구현하기위해서 작가는 참여하게 된다. 자동적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다. 본인의 자유를 위해서든, 혹은 세계의 자유를 위해서든 그는 세계와 인간과 연결되어 버린다. 참여와 자유는 왠지 다른 개념 같다. 그러나 샤르트르에게 있어서 자유는 결여이고 참여는 그 결여를 인정하고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차원에서 거의 같은 것이다. 자유가 있기에 참여가 가능하다고 인식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참여하는 순간 선택도 자유인데, 그렇게 보면 이 둘은 같은 것이 된다. 이렇게 볼 때 샤르트르의 글쓰기는 작가와 독자의 자유를 위한 연대라고 할 수 도 있다. 둘 다 결여된 것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자유롭게 연대할 수는 있다. 왜냐하면 둘 다 결여된 것을 알기 때문이다.
3. 누구를 위해 쓰는가?
과연 누구를 위한 글인가? 억압자, 혹은 피억압자, 아니면 본인을 위해서. 샤르트르는 말한다. 그랬다고. 그러나 지금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작가는 자유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작품 속에 투영하는 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유로운 글쓰기를 읽는 독자는 누구여야 하는가? 그 독자도 자유로운 자여야 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힘들다. 단지, 샤르트르의 실존주의 속의 인간에게는 가능하다. 모든 것을 초월한 인간, 인간은 자유를 향유한다. 하지만, 실제로 인간은 자유롭지 못하다. 종교로부터, 자신의 지위로부터, 국가로부터, 언어로부터 등. 샤르트르는 꿈꾸는 자이다. 물론, 현실의 문학의 경향을 비판하고 이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을 마련하고자 노력했던 그의 취지를 무시하고 싶진 않다. 단지, 그의 철학의 한계로부터 그는 작가가 선정되고, 독자가 선정된다. 그 스스로 자유를 속박하고 있다. 그의 생각을 부정하고 새롭게 정립 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그가 말한 자유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실존주의는 탈근대주의와 비슷하기도 하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