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문화의 신학
폴 틸리히 / IVP / 2018.12.3
- 종교와 문화 사이의 숙명적 간극을 이어 줄 우리 시대의 역작!
“틸리히는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위대한 신학자다.” _ 칼 바르트
“이 책의 출판은 신학계의 일대 사건이다!” _ 알버트 아우틀러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관한 고민은 기독교와 신학의 역사만큼 오래되었고 근본적이다. 폴 틸리히는 종교와 문화가 무엇인지 살피고 그것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 논하며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밝힌다. 특히 틸리히는 유럽과 미국, 두 번의 세계대전 이전과 이후, 신학과 철학의 두 세계에 속한 사람으로서 교회와 세상, 종교와 문화를 다루면서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희생하지 않는 중재적 태도를 보여 준다. 신학과 신앙의 관점에서 이 관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문화의 관점에서 종교에 대해 어떤 관계를 설정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중요한 관점을 제공할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제목이 주는 첫인상을 넘어서, 문화 혹은 세상에 대한 신학적 이해 혹은 해명뿐 아니라 그 이상의 주제들을 다룬다. 종교철학, 공간과 시간, 종교적 언어, 실존철학, 도덕, 미국과 러시아로 대표되는 서방과 동방의 기독교와 문화, 유럽과 미국의 지성과 종교, 마르틴 부버에 이르기까지 살피며, 폴 틸리히의 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20여 년에 걸쳐 쓴 글들을 모은 이 책은 왜 틸리히가 “경계선 위의 신학자”, “지성인들을 위한 사도”로 불렸는지 입증할 것이다.
○ 목차
머리말
감사의 말
1부 기본적 고찰들
- 인간 정신 생활의 한 차원인 종교
- 종교철학의 두 유형
- 시간과 공간의 투쟁
- 종교적 문화분석의 여러 측면들
2부 구체적 적용
- 종교언어의 본성
- 개신교와 예술 양식
- 실존철학: 그 역사적 의미
- 실존주의와 정신분석학의 신학적 의의
- 과학과 신학: 아인슈타인과의 토론
- 도덕주의들과 도덕: 신율적 윤리학
- 교육의 신학
3부 문화적 비교
- 지성적 지역주의의 극복: 유럽과 미국
- 두 사회에서의 종교: 미국과 러시아
- 마르틴 부버에 대한 평가: 개신교 사상과 유대교 사상
4부 결론
- 기독교 메시지의 소통: 목회자와 교사를 향한 질문
해설(정재현)
저자 연보
○ 저자소개 : 폴 틸리히 (Paul Johannes Tillich, 1886 ~ 1965)
폴 틸리히 (Paul Johannes Tillich, 1886년 8월 20일 ~ 1965년 10월 22일)는 독일의 신학자이자 루터교 목사이다.
폴 틸리히는 1886년 8월 20일 독일에서 출생해 베를린, 할레, 브레슬라우대학 등에서 수학했다.
1911년에 신학전문직학위를 취득해 대학에서 가르칠 자격을 얻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4년간 군목으로 참전하면서 ‘터전의 흔들림’으로 표현될 만한 사상적 변화를 겪었다.
1924년에 필립대학의 부교수, 1929년에는 프랑크푸르트대학의 정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독일에서 학자로서의 그의 삶은 나치의 등장으로 인해 끝났다.
나치는 그가 유대인 학생들을 도운 것을 문제 삼아 그의 교수직을 박탈했다.
위기에 처한 틸리히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친 것은 미국의 유니온신학교였다.
이미 40대 중반에 접어든 틸리히는 낯선 땅에서 영어를 익히면서 강의를 했다.
어설픈 영어와 독일식의 딱딱한 악센트 때문에 듣기가 쉽지 않았음에도 학생들은 그의 강의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의 강의에는 그에게 주어진 ’20세기 최대의 신학자’라는 칭호에 걸맞는 내용이 있었던 것이다.
유니온신학교에서 퇴임한 후 그는 1955년부터 1962년까지 하버드대학의 특별교수로 초빙되어 신학부 박사과정학생들을 위한 세미나를 인도하며 집필 활동을 했다.
하버드대학에서 은퇴한 후에는 다시 시카고대학으로 초빙되어 강의를 했다.
틸리히는 1965년 10월 11일 시카고 대학 신학부가 주관한 강연회에서 마지막 강의를 마친 후 심장에 고통을 느껴 입원했고, 10월 22일 아내와 함께 짧은 독일어 시를 낭송한 후 자리에 누워 숨을 거뒀다.
신학뿐 아니라 철학과 문학과 역사에 정통했던 그가 남긴 저서로는 ‘조직신학 1, 2, 3권’ (Systematic Theology), ‘그리스도교 사상사’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존재의 용기’ (The Courage to Be), ‘믿음의 역동성’ (Dynamics of Faith) 등 다수가 있다.
– 폴 요하네스 틸리히 (Paul Johannes Tillich)
.독일의 신학자이자 루터교 목사
.출생: 1886년 8월 20일, Province of Brandenburg
.사망: 1965년 10월 22일, 미국 일리노이 시카고
.영향을 준 인물: 쇠렌 키르케고르, 마르틴 하이데거,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마르틴 부버 등
.영향 받은 인물: 코넬 웨스트, 로버트 벨라, 리처드 니부어, 도날드 A. 크로스비, 칼 E. 피터스 등
.배우자: Hannah Werner-Gottschow (1924~1965년)
.저서: 주저 ‘조직신학 1, 2, 3권’ (Systematic Theology) 외 ‘그리스도교 사상사’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존재의 용기’ (The Courage to Be), ‘믿음의 역동성’ (Dynamics of Faith) 등
20세기 전반기의 독일 교회에는 칼 바르트와 쌍벽을 이루는 또 한 명의 대 신학자다.
바르트와 같은 해인 1886년에 태어난 폴 틸리히는 여러 가지 점에서 바르트와 대조되는 신학자이다.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그 온전한 계시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였다면, 틸리히는 이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의 구체적인 상황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탐구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바르트처럼 하나님의 계시에서부터 신학을 시작하지 않고, 그 시대의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에 귀 기울인 다음, 거기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신학을 전개하였다.
즉, 바르트가 하나님 중심, 계시 중심적인 신학을 전개했다면, 틸리히는 인간 상황에서부터 출발하는 인간 중심 혹은 경험 중심적인 신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바르트와 같은 신학의 강점은 기독교 신앙의 절대성과 궁극성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지만, 인간 현실에 부적합해질 약점을 가지고 있다.
반면 틸리히와 같은 변증 신학은 기독교 복음의 상황적 적실성 (contextual relevance)을 가질 수는 있으나 자칫 복음을 왜곡시킬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틸리히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언어로는 현대인들에게 복음을 의미 있게 소개할 길이 없다고 보았기에 부적합의 위험보다는 왜곡의 위험을 무릅쓰는 길을 택했으며, 그 가운데 교회사를 통틀어 가장 탁월하고 창조적인 신학의 하나를 남기게 되었다.
– 역자 : 남성민
연세대학교 신학과와 동대학원(조직신학, Ph.D.), 고려신학대학원(M.Div.)에서 공부했다. 현재 대구 시온성교회 대학청년부 담당목사로 섬기고 있다. 논문으로 「폴 틸리히의 구원론 연구」(박사학위 논문)가, 옮긴 책으로 『루터전집 47』(공역, 컨콜디아사 출간 예정)이 있다.
○ 책 속으로
종교가 인간 정신의 한 측면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특수한 관점에서 인간 정신을 살피면 그것 자체가 자신을 종교적인 것으로 우리에게 드러낸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관점은 무엇인가? 인간 정신 생활의 깊이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관점이다. 종교는 인간 정신 생활에 있는 특수한 기능이 아니라, 모든 정신적 기능에 있는 깊이의 차원이다. – 1장 “인간 정신 생활의 한 차원인 종교” 중에서
신앙은 우발적 요소를 포함하며 위기를 필요로 한다. 신앙은 한정되지 않은 것의 존재론적 확실성을 모든 한정적이고 구체적인 것의 불확실성과 결합한다. 이 사실은 물론 신앙이 더 높은 혹은 더 낮은 개연성이 있는 어떤 것에 관한 믿음이라는 뜻이 아니다. 신앙의 위기는 신앙이 신, 인간, 세계에 관한 주장을, 즉 지금은 완전히 증명되지 않았지만 미래에 증명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들에 관한 주장을 수용한다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위기가 기초해 있는 사실은, 무조건적 요소가 궁극적 관심의 문제가 되려면 그 무조건적 요소가 구체적으로 나타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 신앙의 위기는 실존적 위기로서 우리 삶의 의미와 완성이 위협당하는 위기이지, 조만간 반박될지도 모르는 이론적 판단의 문제가 아니다. – 2장 “종교철학의 두 유형” 중에서
이교주의 (paganism)란 특수한 공간을 궁극적 가치와 위엄으로 고양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교주의에는 어떤 신이 있고 그 신은 한 장소에 귀속되어 있는데, 그 장소는 다른 장소들과 대등한 동시에 대립해 있다. 그러므로 이교주의는 필연적으로 다신론적이다. … 역사 속 공간과 시간의 투쟁에서 전환점은 예언자의 선포이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그리고 자연에 맞서 탄생하는 것에 상응하게, 예언자주의 (prophetism)가 이교주의로부터 그리고 이교주의와 맞서 탄생했다. … 시간의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그분이 최종 목표를 향해 역사 속에서 행동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역사에는 방향이 있으며 역사 속에서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 새로운 어떤 것이 창조된다. – 3장 “시간과 공간의 투쟁” 중에서
궁극적 관심으로서의 종교는 문화의 의미를 제공하는 실체이고 문화는 종교의 기본적 관심이 자신을 표현하는 형식들의 총체이다. 간략히 말하자면, 종교는 문화의 실체이고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 그런 고찰은 종교와 문화라는 이원론의 확립을 분명하게 방지한다. 모든 종교적 행위는 제도화된 종교뿐 아니라 영혼의 가장 친밀한 움직임에서도 문화적으로 형식화된다. – 4장 “종교적 문화분석의 여러 측면들” 중에서
상징은 기호와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유사하다. 그것은 바로 상징과 기호가 둘 다 자신들을 넘어서는 다른 것을 지시한다는 것이다. 전형적 기호는, 예를 들어 거리의 붉은 신호등은 그것 자체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차가 반드시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지시한다. 그리고 모든 상징은 그것 자체를 넘어서 그것이 의미하는 실재를 지시한다.… 상징과 기호를 구분하는 근본적 차이는 기호가 자신이 지시하는 것의 실재와 힘에 어떤 식으로도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징은 비록 자신이 상징하는 것과 동일하지는 않더라도, 그것의 의미와 힘에 참여한다. – 5장 “종교언어의 본성” 중에서
피카소 (Picasso)의 “게르니카” (Guernica)는 위대한 개신교 회화이다. 물론 이 진술을 한정하는 말은 그것이 개신교적 대답이 아니라 개신교적 질문의 급진화로서, 그것을 우리가 피카소의 걸작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 개신교 원리 (Protestant Principle)는 (개신교회의 설교와 교육에 언제나 영향을 끼치지는 않지만) 하나님과 인간의 무한한 거리를 강조한다. 이 원리는 인간의 유한성, 인간이 죽음에 종속됨을 강조하지만, 무엇보다도 인간이 자신의 참된 존재로부터 소외되어 있음과 인간이 마성적 힘?자기 파괴적 힘?에 속박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 만약 우리가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우리 시대의 인간이 처한 곤경에 관한 예술적 표현의 본보기(아마도 가장 탁월한 본보기)로 간주한다면, 그 부정적-개신교적 (negative-Protestant) 특징이 명확해진다. 죄책, 불안, 절망의 세계 속에 있는 인간의 질문은 엄청난 위력을 동반하며 우리 앞에 놓여 있다. – 6장 “개신교와 예술 양식” 중에서
실존철학의 근본적 추동력과 기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19세기의 종교적 상황에서, 특히 독일에서 일어난 일을 배경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1830년 이후로 나타났던 모든 집단은 공통의 문제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그 공통의 문제는 계몽주의, 사회 혁명,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충격으로 종교 전통이 붕괴됨으로써 발생한 문제였다. 먼저는 교육받은 계급들 사이에서, 다음으로는 증가하는 산업노동자 대중 안에서, 종교는 그 “비매개성”을 상실했다. 즉 종교는 인간의 삶에 의심할 수 없는 의미의 방향성과 적절성을 제공할 수 없게 되었다. … 그들은 인간의 비매개적 경험을, 즉 “주관성”을 지향했다. 그것은 “객관성”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경험으로, 객관성과 주관성은 모두 이 경험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들은 인간이 자신의 현실적 삶에서 경험하는 실재를, 내면성 (Innerlichkeit) 혹은 내향적 경험을 지향했다. 그들은 존재의 창조적 영역을 발견하고자 했으며, 그 영역은 객관성과 주관성의 구별보다 선행하거나 넘어서는 것이었다.
만약 삶의 이 수준에 대한 경험이 “신비적”이라면, 실존철학은 삶의 의미가 교회적 용어에서뿐 아니라 실증주의적 용어에서도 상실된 이후에 “신비적” 용어로 그 의미를 되찾으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만약 우리가 “신비적”이라는 단어를 실존철학에 사용하려면 그 단어를 재정의해야 한다. 이 맥락에서 그 단어는 초월적 절대자와의 신비적 연합을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개인에 의한 것이든 집단에 의한 것이든 삶의 깊이와 연합을 지향하는 신앙의 모험을 의미한다. – 7장 “실존철학: 그 역사적 의미” 중에서
실존주의자는 질문을 제기하고 인간의 상황을 분석하며, 그런 다음에 그 질문과 인간의 상황에 대해서 신학자가 대답을 제시할 수 있다. 그 대답은 질문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주어진 것이며, 인간의 상황 자체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신학은 실존주의와 정신분석학으로부터 엄청난 선물을 받았다. 그 선물은 50년 전에 혹은 심지어 30년 전에는 꿈도 꿀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선물을 갖고 있다. 실존주의자와 분석가는 자신들이 신학에 이 큰 선물을 주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없다. 하지만 신학자는 그 사실을 알아야 한다. – 8장 “실존주의와 정신분석학의 신학적 의의” 중에서
아인슈타인의 세 번째 논증이 도전하는 것은 스스로는 선하고 의로우면서도 도덕적, 물리적 악을 창조하는 전능한 신의 개념이다. 이 비판이 전제하는 전능의 개념은 물리적 인과율을 따라서 전능과 전행위 (omni-activity)를 동일시하고 있다. 하지만 오래된 그리고 항상 강조된 신학적 가르침은 신이 모든 존재자의 특수한 본성에 따라 그 존재자들 안에서, 즉 인간의 합리적 본성에 따라 인간 안에서, 동물과 식물의 유기적 본성에 따라 동물과 식물 안에서, 돌의 비유기적 본성에 따라 돌 안에서 행동한다고 한다. 전능이라는 상징이 표현하는 종교적 경험은 실재의 어떠한 구조도 그리고 자연과 역사에서 일어난 어떠한 사건도 의미와 존재의 무한하고 소진되지 않는 근거를 가진 공동체로부터 우리를 제거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 9장 “과학과 신학: 아인슈타인과의 토론” 중에서
사랑은 도덕주의들과 도덕의 문제에 대한 대답이다. 사랑은 도덕주의와 도덕의 네 가지 만남에 내포된 질문들에 대답한다.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사랑보다 높은 원리로서 사랑을 한정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사랑보다 높은 것은 없다. 그리고 사랑은 자신을 한정한다. 사랑은 모든 구체적 상황에 개입하고 분리된 것의 재연합을 위해 유일무이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 사랑은 정의를 포함한다. 정의 없는 사랑은 척추 없는 몸이다. 사랑의 정의가 포함하는 것은 이 관계 안에 있는 어느 쪽도 자신을 소멸시키도록 요청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 관계에 들어가는 자기는 그 독립성 가운데 보존된다. 사랑은 타자에 대한 그리고 자신에 대한 정의를 포함한다. 사랑은 도덕주의들과 도덕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다. – 10장 “도덕주의들과 도덕: 신율적 윤리학” 중에서
상징의 상실 없이 문자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종교교육의 큰 임무이다. 그것은 인문주의적 요소를 교회학교에 가져오면서 학생이 성숙하고 비판적이고 여전히 신앙에 의해 결정되는 인격으로서 교회와 결속 가운데 있게 한다. 만약 교회학교가 인문주의적 원리를 교회학교의 생활에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강하다면, 교회학교는 현재의 문화적 상황에서 자신의 제한된 장소를 유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종교적 관심이 증가하는 우리 시대에 점차 중요해질 수 있다. – 11장 “교육의 신학” 중에서
수많은 교단의 교회들이 있다는 사실은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개신교적 표현이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모든 사람에게 실존적 방식으로 보여 준다. 그것은 종교개혁 이래로 그리고 그에 앞서 다른 교회사적 발전의 계통이 있음을 지시한다. 동시에 개신교적 지역주의는 다음의 사실로 폐기되는데, 예를 들어 성공회 교회는 기본적으로 개신교 신학을 가지고 있음에도 교회의 생활방식에 많은 가톨릭적 요소를 보전하고 있다. 내 신학의 주요 문제 중 하나?즉 개신교적 원리와 가톨릭적 실체?는 이 경험에서 제기되었다. – 12장 “지성적 지역주의의 극복: 유럽과 미국” 중에서
복음을 거부할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혹은 복음이 적절하게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복음에 대한 진정한 결단을 할 수 없었던 사람을 만나게 되었을 때 겪게 되는 고통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조금 덜 고통스러운 다른 경험은, 복음이 결코 의심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결단할 필요조차 없이 복음을 수용했던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복음은 그에게 습관, 관습, 사회적 접촉의 문제로 다가왔다. 이것은 결코 복음일 수 없다.
진정한 복음의 소통은 복음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명확하게 결단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을 소통하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실존에 참여하는 것이어서, 그들의 거부는 부분적으로 복음이 그들에게 뿌리내리기 시작하는 순간에 복음을 버림, 내던짐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들을 이 지점으로 데려갈 수 있으며, 이것이 복음을 소통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이다. – 15장 “기독교 메시지의 소통: 목회자와 교사를 향한 질문” 중에서
우리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은 생색이 아닌 사람들의 관심을 공유하며 그 관심에 참여하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기독교적 대답을 제시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과 동일하지 않은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리고 세 번째로, 우리는 이 사람들과 이들의 생각을 이용해서 우리 집단 안에 있으면서 안전한 탑 속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일깨울 수 있다. 우리는 그들 안에 있는 요소들을 그들이 깨닫게 할 수 있는데, 보통 그 요소들은 모든 대답에 대한 가정된 지식에 의해 덮여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 단계를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참여해야 하지만 동일해서는 안 되고, 이 이중적 태도를 활용해 모든 대답을 알고 있다고 가정하면서 자신의 실존적 갈등은 깨닫지 못하는 자들의 안주를 걷어 내야 한다. – 15장 “기독교 메시지의 소통: 목회자와 교사를 향한 질문” 중에서
20세기는 문화의 세기가 되었다.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문화상대주의의 부상이 지난 세기부터 핵심 의제들 중 하나였다는 것도 그 좋은 증거다. 그런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논의들이 여러 방면에서 전개되는 상황에서, 문화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의 한 시도가 철학적 신학자 폴 틸리히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다. 『문화의 신학』은 종교와 문화 양자 사이의 거리가 더욱 멀어져 가는 듯 보이는 우리 시대에 더 절실하게 요청되는 심오한 통찰이다. – “해설” 중에서
○ 출판사 서평
- 종교와 문화, 그 화해와 공존을 위해 평생에 걸쳐 빚어낸 값진 성찰!
“폴 틸리히는 우리 세대의 가장 창조적인 종교사상가로 널리 인정받는다. 『문화의 신학』은 매우 근원적인 사상가로서 그의 명성을 높여 줄 것이다.” – 라인홀드 니버
“틸리히의 가장 독창적인 작품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신학과 문화는 실제로 서로 교류하고, 틸리히의 유럽적 배경과 미국적 맥락은 실제로 융합한다. 이 책의 출판은 신학계의 일대 사건이다!” – 알버트 아우틀러
- 교회와 세상, 종교와 문화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 책은 폴 틸리히의 학문적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20여 년에 걸쳐 쓴 15편의 글을 담고 있으며, 그 범위는 문화의 신학적 이해로 시작해 신학과 다른 학문들의 상호작용, 그리고 그에 따른 기독교 신앙의 더 깊은 차원에 대한 이해에 이른다.
1부 “기본적 고찰들”은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인간 정신 생활의 한 차원인 종교”는 종교가 선택적 요소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에 필연적 요소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2장 “종교철학의 두 유형”은 신에 접근하는 두 방식으로 존재론적 유형과 우주론적 방법을 구분하며 그 둘이 역사적으로 대립 관계로 전개된 것과 달리 서로 보완하면서 종교와 문화의 분리를 극복하게 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3장 “시간과 공간의 투쟁”은 이 책에서 처음 출간된 글로, 인간 존재를 규정하는 시간과 공간이 종교적으로는 공간에 묶이는 이교적 신 이해와 공간을 초월해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된 성경적 하나님 이해의 대립과 전환이 예언자로부터 시작되어 신약성경에서 완성되는 것을 보여 준다. 여기서 유대교는 시간의 하나님 이해를 통해 주변 민족과 구별되었지만 율법을 통해 공간적으로 고착되려 할 때 변질이 일어날 수 있음을, 그리고 기독교도 민족 교회와 동일시할 때 같은 위험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고하는 역사적 모범이다.
4장 “종교적 문화분석의 여러 측면들”은 종교를 실존적으로 이해하여 인간의 궁극적 관심으로 파악함으로써, 교회가 자신에게 관심을 쏟을 때 빠지는 실질적 우상숭배를 경고하고, 종교가 성스러운 영역과 세속적 영역의 차이에 구속되지 않게 한다. 또한 종교와 문화가 서로 단절된 실재가 아니라 종교가 문화의 실체이며 문화가 종교의 형식이 되게 한다. 이로써 교회가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가 드러난다.
- 문화의 신학, 그 구체적 적용
2부 “구체적 적용”은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5장 “종교언어의 본성”은 상징과 기호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밝히고, 상징이 종교언어에서 하는 기능을 드러낸다.
6장 “개신교와 예술 양식”은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위대한 개신교 회화라는 대범한 주장으로 시작하면서 개신교 원리를 정의하고, 20세기에 새로운 방식의 기독교 예술이 모색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7장 “실존철학: 그 역사적 의미”는 실존철학의 역사를 다루면서 어떻게 19세기에 실존철학적 관심이 철학자들의 범주를 넘어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쳐 20세기에 일어난 변화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는지 보여 준다.
8장 “실존주의와 정신분석학의 신학적 의의”는 신학과 다른 학문들의 소통이 불가피하며 실제로 신학이 실존주의와 정신분석학 때문에 큰 유익을 얻었음을 상기시킨다.
9장 “과학과 신학: 아인슈타인과의 토론”은 과학과 신학의 상호 오해를 다루면서 과학에 대한 신학의 접근이 그랬듯 신학적 이해에 대한 과학의 왜곡도 해명이 가능하며 문제제기 자체로 신학이 치명상을 입은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한다.
10장 “도덕주의자들과 도덕: 신율적 윤리학”은 도덕주의가 도덕적 명령의 왜곡이라는 것과, 사랑이 정의를 포함하는 것으로 그 왜곡에 대한 해답이라는 것을 제시한다.
11장 “교육의 신학”은 종교개혁 시기까지 이어진 중세의 유도 교육 전통이 근대에 실용적 기술 교육에 의해 대체된 상황을 밝히고, 교회학교를 통한 신앙 교육이 유도 교육을 인문주의적 교육의 이상과 융합해 학생이 현대의 이성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교회와 결속력을 유지하게 하고자 한다.
- 사이에서: 유럽과 미국, 서방과 동방, 부버에게 배우는 기독교, 그리고 기독교 메시지의 소통
3부 “문화적 비교”는 총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2장 “지성적 지역주의의 극복: 유럽과 미국”은 이 책에서 폴 틸리히의 자전적 진술이 가장 두드러지는데, 독일에서 신학과 철학 교육을 받으면서 독일 신학사 및 철학사를 신학사 및 철학사 자체와 동일시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과, 히틀러의 등장이 그 역사의 귀결이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말한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으로 망명해 접한 미국 신학의 실용적 혹은 사회윤리적 특징과 미국 교회에 있는 다양한 교단과 세계적 지평을 장점으로 꼽으면서, 앞으로 미국이 다른 방식의 지역주의에 갇히지 않아야 함을 경고한다.
13장 “두 사회에서의 종교: 미국과 러시아”는 미국과 러시아 사회를 통해 서방 기독교와 동방 기독교의 차이를 드러내고, 그 차이가 마르크스주의에 의한 영향 면에서 어떻게 다르게 나타났는지 밝히며, 동방의 정신적 실체를 서방의 인격적?사회적 형식 안으로 가져가는 창조적 종합이 가능할지 묻는다.
14장 “마르틴 부버에 대한 평가: 개신교 사상과 유대교 사상”은 마르틴 부버가 예언자적 종교를 실존적으로 해석한 것과 예언자적 종교에서 신비주의를 재발견한 것, 그리고 예언자적 종교와 문화 사이의 관계를 이해한 것이 개신교 신학에 주는 함의를 진술한다.
4부 “결론”
15장 “기독교 메시지의 소통: 목회자와 교사를 향한 질문”을 담고 있는데, 이 결론적 글은 기독교 복음을 접하는 이들이 복음에 대한 오해 없이 책임 있게 반응하도록 돕는 소통의 문제를 다룬다. 그러면서 각 시대에 그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기독교 메시지를 소통하는 방식이 있었으며, 우리는 우리 시대의 사상들을 통해 우리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기독교 메시지를 소통해야 하는 의무가 있음을 역설한다. 이것은 기독교 복음을 오늘날 적실성 있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기회가 된다.
-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의 오해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독교
독자가 이 책에서 읽는 것은 단지 과거나 현재에 있는 문제들이나 사실들에 불과하지 않다. 우리는 폴 틸리히가 자신의 시대와 문화를 읽는 태도를 접한다. 여기에서 만남은 언제나 다름을 인식하고 같음을 지향하는데, 다름은 적대적 관계의 이유가 되지 못하고 같음은 무차별성의 수준으로 전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틸리히가 이런 태도를 성경과 신학의 역사를 통해 근거 있는 것으로 제시한다는 점이다. 진리의 추구가 늘 배제와 소외를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이해와 수용으로 상대와 우리 자신 안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라는 점은 갈등의 아이콘이 되어가는 한국 교회와 젊은 기독지성에게 희망을 주는 도전이 될 것이다.
이 책의 해설에서 정재현 교수가 지적하는 것처럼, 폴 틸리히가 보여 주는 신학 유형은 “교회의 신학”에 국한되지 않고 현대인들에게 다가가는 신학이다. 기독교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는 것이 당연하며, 그런 면에서 칼 바르트의 대척점에 있었던 폴 틸리히를 기억하는 것은 한국 교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려는 교리적 각성의 노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땅히 있어야 할 다른 쪽 날개를 통해 온전한 노력을 보여 주기 때문에 바람직하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고전 9:22)이 필요하다면, 이 책은 그런 노력을 여실히 보여 줄 것이다.
- 21세기를 위한 20세기의 중대한 혜안을 만나다!
20세기는 신학적으로 폴 틸리히와 칼 바르트가 양분한 세기였다는 평가가 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교리에 관한 관심과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상대적으로 칼 바르트의 신학이 더 지속적으로 관심을 받는 반면에, 폴 틸리히의 신학은 과거의 지나간 유행처럼 여기는 경향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의 사람들에게는 전통적 교리 신학이 여전히 설득력 있겠지만, (특히 한국 사회의) 많은 사람에게 교회의 행태가 설득력을 잃는 바로 지금이 틸리히를 읽고 세상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숙고해야 할 때다. 틸리히의 신학은 기독교 신학이 여전히 현대 사회에 대해 할 말이 있다는 것과, 세상이 추구하는 것이 그 세부사항들에서 지적할 수 있는 오류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으로 긍정되고 더 큰 그림의 일부라는 사실을 보여 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21세기가 시작될 때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처럼 생각했던 흥분을 가라앉히고, 20세기 중반의 논의를 통해 과거로 되돌아가 그때 시작된 오래된 미래를 살피는 계기를 얻는다.
- ‘IVP 모던 클래식스’ 시리즈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기독교 고전!IVP 모던 클래식스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까지 출판된 기독교 저작 가운데 자문 위원회의 엄정한 선정 작업을 거쳐 출간되는 기획물이다. 문화, 사회, 정치, 경제, 윤리, 공동체, 세계관, 영성, 신학 등 현대 교회가 직면한 광범위한 주제와 이슈를 다루는 본 시리즈는 전문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지향하며, 국내외 전문가의 해설 및 추천 도서를 통해 성경적 지혜와 적용 가능한 지식을 한국 교회에 제공하고자 한다. 급변하는 21세기의 흐름 가운데 IVP 모던 클래식스와 함께하는 느리고 진지한 독서를 통해 오히려 가장 먼저 진리에 가닿을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 추천평
폴 틸리히는 우리 세대의 가장 창조적인 종교사상가로 널리 인정받는다. 틸리히의 『문화의 신학』은 매우 근원적인 사상가로서 그의 명성을 높여 줄 것이다. 그가 전통적 초자연주의와 전통적 자연주의의 결함을 다루든지, 예술과 정신분석학과 정치학과 교육에 대한 종교의 관계를 다루든지 말이다. 모든 주제를 고찰하면서 학식의 폭과 깊이, 그리고 판단의 지혜를 보여 준다. – 라인홀드 니버
틸리히의 가장 독창적인 작품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신학과 문화는 실제로 서로 교류하고, 틸리히의 유럽적 배경과 미국적 맥락은 실제로 융합한다. 이 책의 출판은 신학계의 일대 사건이다! – 알버트 아우틀러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