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미국인의 역사 1•2
폴 존슨 / 살림 / 2016.4.30
- 역사학의 거장 폴 존슨이 선보이는 새롭고 거대한 미국의 역사!
오늘날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경제적ㆍ정치적ㆍ군사적으로 세계 초강대국일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인류가 이룩해온 모든 발전의 정점에서 여전히 실험과 도전을 계속하고 있는 최선두주자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미국과 미국인은 어쩌면 인류의 미래를 가늠할 척도이자 이정표일지 모른다.
『미국인의 역사』는 인간이 일구어낸 진보의 최첨단, 현대성의 총화로서 미국을 이해하고 재구성해낸 책이다. 제목에서 잘 드러나듯이 미국“인”의 역사를 표방한다. 따라서 16세기 말 영국령 식민지부터 20세기 말까지 400년 미국인의 역사를 살피되, 각 시대를 대표하는 주제와 인물을 중심에 놓고 관련 사실과 사건을 유기적으로 서술하는 방식을 취했다.
저자의 논조는 대체로 긍정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몹시 비판적이다. 저자는 대개 인물의 양면성을 살피면서 총체적으로 역사적 의미와 결부시켜낸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그동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미국사에 관한 통념을 끊임없이 깨뜨린다. 이 독특함이야말로 미국의 과거를 새롭게 보게 하고 역사를 바라보는 눈을 크게 확장시켜준다.
저자 폴 존슨은 미국을 “미국인 자신들과 인류 모두에게 커다란 교훈을 간직한 나라”라고 칭했다. 저자의 말처럼 그들이 꿈과 열망을 실현해온 방식과 과정은 우리를 새로운 성찰과 각성으로 이끌 것이고, 그들이 거둔 실패와 성공은 반면교사의 지혜를 줄 것이다. 특히 과거부터 우리나라가 미국과 맺어온 밀접한 관계를 고려할 때 이 심도 깊은 미국인의 초상은 더욱 큰 시사점을 던진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미국인의 역사”를 눈여겨보아야 할 이유이다.
○ 목차
- 1권
머리말
제1장 언덕 위의 도시 : 식민지 시대 1580~1750년
콜럼버스의 탐험 |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침입 | 월터 롤리의 식민 사업 | 월터 롤리의 탐험대 | 로어노크 식민지의 실패 | 신의 부름을 받은 영국민 | 제임스타운 건설 | 정착촌과 흑인 노예 | 메이플라워 호 | 초대 총독 존 윈스럽 | 약속의 땅 | 옥수수와 담배 | 뉴잉글랜드의 신권정치 | 자유와 종교 | 대의제와 권위주의 | 로저 윌리엄스의 도피 | 로드아일랜드의 탄생 | 여성운동의 선구자, 앤 허친슨 | 하버드 대학교 설립 | 캘버트 일가와 메릴랜드 | 신앙의 자유 | 초기 식민지 구조 | 필라델피아의 발전 | 청교도의 정치 이론 | 환영받은 직인들 | 영국 정치 환경의 영향 | 노예제도의 발단 | 만성적인 화폐 부족 | 피쿼트 전쟁 | 베이컨 반란과 필립 왕 전쟁 | 세일럼 마녀재판의 광풍 | 불운한 지식인 코튼 매더 | 최초의 프런티어 | 오글소프의 식민지 실험 | 인구 급증과 경제 발전 | 영국을 앞지른 번영 | 번성하는 식민지 도시 | 컨트리 하우스의 유행 | 총독의 역할 | 식민지 의회와 헌법 | 대각성운동 | 독립혁명에 끼친 영향
제2장 자유의 헌법이 굳게 지켜지기를 : 혁명기 1750~1815년
대농장주 조지 워싱턴 | 7년전쟁 | 눈과 설탕의 교환 | 무능한 영국 정부 | 인디언 정책의 실패 | 영국 장교를 꿈꾼 워싱턴 | 인지세 거부 | 벤저민 프랭클린의 역할 | 폭동의 확산 | 보스턴 차 사건 | 제퍼슨의 비범함 | 노르만의 멍에 | 대륙회의 | 총사령관 워싱턴 | 토머스 페인의 비상식적인 『상식』 | 독립선언 | 매사추세츠 헌법 | 연합규약 | 지구전을 택한 워싱턴 | 프랭클린 사절단 | 종전을 둘러싼 외교전 | 미국혁명의 영향 | 분열된 국민 | 여성들의 독립전쟁 | 워싱턴의 낙향 | 사회계층의 변화 | 해밀턴의 헌법 구상 | 매디슨의 역할 | 헌법제정회의 | 세 가지 타협안 | 토론과 비준 과정 | 「권리장전」 | 상원과 하원 | 시민권과 참정권 | 중우정치의 위협 | 종교의 역할과 헌법 | 헌법 수정 조항 제1조 | 해밀턴과 연방정부 | 정치 라이벌 제퍼슨과 해밀턴 | 워싱턴의 용인술 | 당파의 출현 | 미국의 눈부신 발전 | 초대 대통령의 마지막 충고 |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 | 애덤스가 내린 최고의 선택 | 자본주의의 추진과 존 마셜의 활약 | 애덤스의 재출마와 문제들 | 제퍼슨의 두 얼굴 | 소통의 편지들 | 루이지애나 매입 | 통상 금지 조치 | 평화와 전쟁의 갈림길 | 1812년 미영전쟁 | 풀턴의 신무기 | 워싱턴 함락 | 구원의 신 앤드루 잭슨 | 인디언들의 저항 | 뉴올리언스 전투 | 겐트 조약
제3장 언제나 평범하게 행복하기를 : 민주주의 시대 1815~1850년
높은 출생률과 이민 홍수 | 최초의 경제 위기 | 값싼 토지의 매력 | 개발과 자유 시장 | 제2차 대각성운동 | 신흥 종교 | 가톨릭과 유대교 | 노예제도를 부추긴 조면기 | 남부와 노예제도 | 노예옹호론자 존 칼훈 | 미주리를 둘러싼 갈등 | 헨리 클레이의 역할 | 먼로 선언 | 잭슨 민주주의의 출현 | 1824년 대통령 선거 | 민주당 창당 | 선거의 귀재 밴 뷰런 | 잭슨 정권의 탄생 | 페기 이턴 스캔들 | 키친 캐비닛의 탄생 | 잭슨주의의 정체 | 체로키 공화국의 종말 | 잭슨의 은행 혐오증 | 경제공황의 시작 | 기계에 의한 농업혁명 | 공업화의 진전 | 교통과 통신의 발달 | 명백한 운명 | 텍사스 독립 | 포크 대통령의 야심 | 멕시코 전쟁 | 캘리포니아의 매력 | 골드러시 | 새로운 유토피아 | 토크빌의 미국 시찰 | 학교 개혁 | “대타협”에서 드레드 스콧 판결까지 | 테일러와 필모어 | 웹스터의 영어 사전 | 미국 문학의 탄생 | 에머슨과 초월주의 | 롱펠로와 포 | 호손과 휘트먼 | 미국 문학의 성숙
제4장 거의 선택된 민족에게 : 남북전쟁 1850~1870년
남부를 지원한 피어스 정권 | 캔자스-네브래스카 법 | 뷰캐넌과 남북의 갈등 | 링컨의 등장 | 노예제도와 링컨 | 더글러스와 링컨의 토론 대결 | 1860년 대통령 선거 | 제퍼슨 데이비스의 노예 인식 | 남부의 메피스토펠레스 | 남부의 탈퇴 선언 | 남북전쟁 전야 | 남부의 열세 | 남부 지도층의 분열 | 남북으로 갈라선 성직자들 | 노예해방 선언 | 북군의 무능한 최고 사령관 | 잭슨과 모스비 | 게티즈버그 전투 | 그랜트 장군 | 링컨의 재선 | 문학에 비친 내전의 참상 | 서부의 발전 | 내전의 승리와 비극 | 흑인 문제의 대두 | 급진적인 남부 재건 | 대통령 탄핵 | 재건 정부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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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권
제5장 군중과 황금 십자가 : 산업 시대 1870~1912년
대량 이민 | 소 떼와 가시철조망 | 인디언의 슬픈 운명 | 프런티어의 총잡이들 | 서부 개척 시대 | 대륙 철도망의 건설 | 악덕 자본가들의 전성시대 | 그랜트 대통령의 고전 | 크레디트모빌리어 회사 사건 | 무능력한 대통령들 | 철강왕 카네기 | 모건과 월 가 | 모건의 공적 | 노동조합과 파업 | 시키고의 급성장 | 마천루의 도시 뉴욕 | 이민자들이 꿈꾼 뉴욕 | 에디슨과 티퍼니 |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 | 새로운 화풍의 풍경화 | 컨트리 하우스의 유행 | 대량생산과 대량판매 | 클리블랜드와 매킨리 | 사회주의 계열 정당의 명멸 | 록펠러와 반독점법 | T형 포드 자동차의 등장 | 포퓰리즘과 제국주의 | 미국-에스파냐 전쟁 |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시대 | 루스벨트의 국가 개혁 작업 | 태프트 정권의 등장
제6장 최초의 국제 국가 : 인종의 도가니 시대 1912~1929년
학자 출신 정치가 윌슨 | 상아탑을 떠나 정계로 | 탕평 내각의 승리 | 커지는 정부 역할 | 재무장관 매카두의 금융 개혁 | 제1차 세계대전 | 미국의 참전 | 평화 원칙 14개 조항 | 베르사유 조약 논란 | 국제연맹 가입 좌절 | 하딩의 “정상” 정치 | 여성참정권 요구 | 남녀 차별 철폐 투쟁 | 흑인 폭동의 악순환 | 할렘의 등장 | 미국인을 만드는 인종 도가니 | 이민 제한 | 미국 중산층의 문화 | 콜라의 탄생 | 금주법 시대 | 범죄 조직의 창궐 | “환락의 도시” 샌프란시스코 | 허스트의 대저택 | 캘리포니아 드림 | 값싼 전기의 기적 | 영화 도시 할리우드 | 건축가 라이트 | 할리우드 영화에 분 정화 바람 | 천재 사업가 월트 디즈니 | 재즈의 탄생 | 포스터와 수자의 음악 | 블루스의 탄생 | 재즈에 대한 편견 | 흑인 대중문화의 만개 | 하딩과 오하이오 갱들 | 하딩을 둘러싼 역사 왜곡 | 법치를 앞세운 쿨리지 | 쿨리지의 작은 정부 예찬 | 1920년대의 짧은 번영 | 쿨리지의 역사관 | 소비 붐
제7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뿐 : 강대국 시대 1929~1960년
보호관세와 통화팽창 정책 | 호황의 덫 | 검은 화요일 | 대공황의 장기화 | 후버 대통령의 재평가 | 위대한 공학자의 정책 실패 | 후버의 담요 | “보너스 원정대” 사건 |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네 가지 능력 | 루스벨트 경기 | 뉴딜 신화의 조연들 | 테네시강유역 개발공사 | 루스벨트의 복수극 | 루스벨트에 대한 엇갈린 평가 | 뉴딜 정책의 역사적 교훈 | 사법부 개편 파동 | 고립주의와 국제주의 | 일본의 부상 | 중립법의 농간 | 진주만 공격 | 전시 경제력의 승리 | 정보전의 승리와 핵무기 개발 | 위대한 장군들 | 스탈린의 야욕 | 트루먼의 정치 경력 | 핵무기 사용과 일본의 총력전 | 일본의 항복 | 스탈린의 야심 | 처칠의 “철의 장막” 연설 | 트루먼 독트린 | 유럽 부흥 계획과 베를린 봉쇄 | 트루먼의 재선 성공 | 나토 창설 | 이스라엘 탄생과 대외 원조 | 한국전쟁 | 맥아더 해임 |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대 | 군대를 걱정한 아이크 | 매카시즘 | 대중사회학자와 성공학 강사들 | 킨지 성 보고서의 충격
제8장 어떤 희생이든 치르고 어떤 짐이든 짊어진다 : 문제 유발과 문제 해결의 시대 1960~1997년
여론 형성과 언론의 역할 | 조작된 케네디 신화 | 케네디의 부정 선거운동 | 사교계의 미인 영부인 재키 | 아폴로 계획의 허상 | 피그스 만 침공 실패 | 쿠바 미사일 위기 | 케네디 암살 사건 | 존슨의 수상한 스캔들 | “위대한 사회” 구상 | 베트남 전쟁과 도미노 이론 | 수렁에 빠진 베트남 전쟁 | 매스컴이 조장한 반전 무드 | 비대한 미디어 권력 | 닉슨과 키신저 | 흑인 민권운동 | 학원 소요 사태 | 닉슨의 언론 전쟁 | 워터게이트 사건의 발단 | 닉슨 탄핵 공방 | 사임으로 명예를 택한 닉슨 | 베트남 전쟁이 남긴 교훈 | 카터의 인권 외교 | 냉전 시대 | 미국 경제의 쇠퇴 | 각광받는 선벨트 | 영화배우 출신 대통령 | 레이건의 농담 본능 | 레이거노믹스의 성과 | 군사력 확장 계획 | “악의 제국” 소비에트연방 붕괴 | 걸프 전쟁 | 부시의 부족한 리더십 | 사법 조사 받은 힐러리 | 클린턴의 스캔들 파문 | 다채로운 민주국가 | 라스베이거스와 미니 도시 출현 | 미국 화가 앤드루 와이어스 | 신분 장벽과 빈부 격차 | 법률가 만능의 나라 | 인종 갈등의 후유증 | 인종할당제도의 도입 | 정치 역풍의 대가 | 낙태 논쟁 | 범죄 증가의 심각성 | 종교의 약화 | 복지제도의 실패 | 미래를 개척하는 여성들 | 마무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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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소개 : 폴 존슨
저자 폴 존슨 Paul Johnson은 영국의 석학, 비판적 저널리스트, 역사학의 거장. 1928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태어나 스토니허스트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 모들린 칼리지를 졸업했다. 1950년대에 저널리스트로서 처음 명성을 얻은 뒤 「레알리테」 부편집장과 「뉴 스테이츠먼」 편집장을 역임했다. 정통적이면서도 비판적인 입장에서 「더 스펙테이터」 「데일리 메일」 「데일리 텔레그래프」 「뉴욕 타임스」 「월스트리트 저널」 「내셔널 리뷰」 등에 정규 칼럼과 기사를 기고해왔다. 그 밖에 워싱턴 D.C.에 있는 공공 정책 미국기업연구소에서 커뮤니케이션 부분 초빙교수로 일했으며, 마거릿 대처 수상과 토니 블레어 수상의 고문을 맡기도 했다. 2006년에는 미국 대통령이 수여하는 ‘자유의 메달’(저널리즘 부문)을 받았다. 학생, 기업가, 정치인을 대상으로 지속적인 강의 활동을 함으로써 대중과도 활발하게 소통하고 있다.
저술가로서 역사, 인문, 예술, 문화를 넘나들며 50여 권의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뉴욕 타임스」 ‘올해의 책’과 「내셔널 리뷰」 ‘20세기 100권의 책’에 선정된 『모던 타임스』를 비롯하여 박식함과 예리한 통찰이 돋보이는 저술로 독자를 매료시켰다. 이 책 『미국인의 역사』 외에 주요 저서로 『근대의 탄생』 『유대인의 역사』 『기독교의 역사』 『지식인의 두 얼굴』 『창조자들』 『폴 존슨의 예수 평전』 『위대하거나 사기꾼이거나』 『르네상스』 등이 있다.
- 역자 : 명병훈
역자 명병훈은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했다. 「중앙일보」 「경향신문」 등에서 일했다. 현재 인문학을 기반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지식과 열정을 불어넣는 출판 기획자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 폴 존슨의 『근대의 탄생』이 있다.
○ 책 속으로
- 1권
1620년 12월 11일, 훗날 매사추세츠가 되는 뉴플리머스에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온 최초의 개척민이 상륙했다. 앞선 개척민은 젠틀맨 출신의 모험가,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사람, 계약하인 등이었는데, 이들은 신대륙에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출세하겠다는 공통된 욕구로 단결했었다. 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들은 공평과 자유라는 경험에 바탕을 둔 영국의 뿌리 깊은 전통에 따라, 관습법을 공정하게 적용하고, 공통의 이익을 위해 분별 있는 통치를 시행하며, 공동사회 전체의 요구에 따라 법을 제정하고자 했다. 이처럼 그들과 그 자손은 미국의 주요 전통 가운데 한 가지 요소를 형성했다. 공적인 면과 사적인 면 모두에서 실용적이고 절도 있고 창조적인, 어떤 경우에나 유효한 그런 요소를.
메이플라워 호의 남자-와 여자-들은 전혀 달랐다. 그들이 아메리카에 온 것은 돈벌이나 심지어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둘 다를 신의 은총으로 감사히 받아들였지만 그보다는 우선 지상에 신의 나라를 창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광신자, 이상주의자, 유토피아 추구자, 성직자였으며, 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아니 어쩌면 과격하다고 해야 할-사람들은 열광적이고 타협을 모르며 독선에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또한 매우 정력적이고 끈질기며 용감했다. 그들과 그 자손은 미국의 주요 전통 가운데 또 한 가지 요소를 형성했다. 역시 창조적이지만, 관념적이고 이지적이며, 쉽게 발끈하고 고집스러우며, 때로는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갈 만큼 지독히 비타협적인 요소를. 앞으로 살펴보면서 익히 알게 되겠지만, 이 두 가지 전통은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고, 그리고 서로 충돌했다. 어떤 때는 건설적으로 때로 엄청난 창조력을 발휘했으나 어떤 때는 사화와 국가에 위기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_65~66쪽
하지만 새로운 지리적 일체감 이상으로 중요한 사실은 의식의 변화였다. 한참 뒤 일이지만, 미국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혁명은 전쟁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부터 일어났다. 혁명은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에 있었다. 자신들의 의무와 은혜에 대해 종교적인 감정이 변화하고 있었다.” 계몽운동에 의해 촉발된 미국인 엘리트의 합리주의와 대중 사이에서 싹튼 대각성의 정신이 하나가 되어, 혁명이라는 정치적 목적으로 향하는 여론의 목소리가 커질 수 있었다. 혁명은 마침내 찾아올 종말의 사건과 동일시되었다. 어느 쪽 힘도 다른 한쪽이 없었으면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종교적 배경 없이는 혁명은 일어날 수 없었다.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의 본질적인 차이는 미국혁명이 발단에서 종교적 사건이었던 데 비해 프랑스 혁명은 반종교적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그 사실이 미국혁명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형성하고, 그에 따라 생겨난 독립국가의 성격을 결정했다. _192~193쪽
독립선언은 몇 세대에 걸친 최고의 휘그 사상을 힘차고 훌륭하고 간결하게 요약했다.
무엇보다 그 첫 부분이 충격적이었다. 머리말 두 문단은 더 이상 손댈 여지가 없다고 여겨졌다. 첫 문단에서 우선 비통한 어조로 영국과의 연합을 해소하는 슬픔을 언급하고, 그 이유를 들면서 “인류의 신념에 대한 엄중한 고려”가 요청된다고 말했다. 두 번째 문단은 앞 문단에 이어 전체 핵심을 이루었다-“우리는 이 자명한 진리를 받아들인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창조주로부터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를 주장할, 남에게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이 권리를 지키기 위해 정부는 거기에 속한 사람들의 동의를 통해 구성되어야 하며, 이러한 모든 목적에 정부가 부합하지 않을 때 정부의 형태를 바꾸거나 폐지하고, 또 이 원칙에 입각해 시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새로운 정부를 만들 권리가 시민에게 있다.” 이 문장에 이어지는 내용은 어떤 독자라도-조지 3세조차-읽지 않을 수 없었다. _249~250쪽
대개의 “해방전쟁” 사례가 언제나 그렇듯이 미국 독립전쟁 역시 마찬가지로 참혹한 내전이었다. 오늘날 연구에 따르면 그 당시 미국인은 세 부류로 나뉘었다고 추정한다. 애국주의자가 3분의 1, 국왕 지지자가 3분의 1, 나머지는 관망주의자로서 상황에 따라 어느 한쪽에 가담했다. 하지만 전쟁에 적극 관여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국민의 절반을 훨씬 넘게 차지했다고 간주된다. 전투적인 세력 또한 거의 둘(애국주의자와 국왕 지지자)로 갈라졌다. 국왕 지지자는 그 성격상 지도자가 없었으며 해방주의자를 몰아세우는 과격성도 없었다. 영국의 지도력을 기대했지만 성과는 별로 없어서 국왕 지지자는 최대의 피해자가 되었다. 현실적으로 모든 것-직업, 집, 토지, 저축, 때로는 자신의 목숨마저-을 잃었다. 영원히 혈연을 끊은 가족도 있었는데 프랭클린 가의 비극이 대표적인 예였다. _274쪽
앞서 살펴보았듯이 미국은 우선 종교적인 목적으로 건국되었고, 신앙 대각성운동이 초창기의 원동력이었다. 미국인은 이전 지배자인 영국인에 비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필그림 파더스는 진정으로 영국인이 부도덕하고 신앙심을 잃었기 때문에 미국으로 건너와 “언덕 위의 도시”를 세웠다. 그 후손은 다시 독립과 자유를 선택했는데, 그것은 종속된 상태 자체가 도덕과 신앙에 어긋나며 신의 섭리를 거스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독립선언서」는 서명한 사람들에게는 세속적인 동시에 종교적인 문서였으며, 혁명전쟁이 신의 섭리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에 전혀 의심을 품지 않았다. 미국인은 신의 보살핌 아래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뒀고, 신의 은총으로 정부 형태를 만들었다. 이것은 17세기에 이주민들이 자신들 곁에서 신이 지켜보고 있음을 느끼면서 계약서, 헌장, 규약, 증서 등을 작성한 것과 같았다.
그렇다면 이런 미국 역사의 초기 문서와 달리 합중국 헌법에는 종교에 관한 합의나 체계 형성 과정이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 헌법에서 유일하게 종교를 언급한 부분은 제6조 3항이었다. “어떤 공직이든 그 자격으로서” “종교상의 심사”를 해서는 안 된다는 부분이 전부였고, 신과 관련이 있는 것은 마지막에 있는 날짜 “그리스도 기원 1787년”뿐이었다. 심지어 끔찍이 반종교적인 영국에서조차 국교가 있어서 국왕은 종교 의식 절차에 따라 대관식을 거행했고, 의회는 날마다 기도와 함께 개회했다. 미국 헌법이 처음으로 실질적으로 종교를 언급한 부분은 수정 조항 제1조로서 국교를 거부하고 연방의회에 “국교의 수립을 규정하고 신앙의 자유로운 행위를 금지하는 법률”의 제정을 금지했다. 이 수수께끼를 어떻게 설명할까? _325쪽
이주민이 몰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첫째는 뱃삯이 점점 싸졌다는 것이고, 둘째는 때때로 기근으로 발전한 식량 부족을 들 수 있다. 1816년의 기상 악화, 1825~1826년, 1826~1827년, 1829~1830년의 혹독한 겨울, 특히 마지막으로 든 해 겨울의 기록적인 한파는 사람들을 굶주림에 빠뜨렸다. 토머스 맬서스가 주장한 인구가 파국으로 이끈다는 이론이 매우 왜곡된 형태로 서민층에 침투해, 사람들은 대재난이 일어나기 전에 가족을 데리고 유럽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게다가 무거운 세금 문제도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 말기에 유럽 대륙 전체가 세 부담으로 신음했다. 영국에서는 1816년 의회의 반란으로 소득세가 폐지되고, 1820년대에는 관세도 서서히 경감되었다. 하지만 유럽 대륙의 상황은 변하지 않았고, 국가는 가난한 농민이나 상인에게 재정 부담을 지웠다. 국내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관세 장벽을 설치해 국경을 넘는 거의 모든 물품에 세금을 부과했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이에 비하면 미국은 마치 천국과 같았다. 군대는 프로이센의 50분의 1 규모였고, 국민 1인당 국가에 내는 비용은 영국의 10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그 영국 국세 규모조차 유럽 기준에서 본다면 비교적 작은 편에 속했다. 미국에는 주립 교회 등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구세마저 없었다. 또한 구빈세를 징수하지도 않았다-처음부터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 말 8필을 소유한 농가가 내는 세금은 1년에 고작 12달러로 유럽 사람들에게는 믿기지 않는 금액이었다. 미국에서는 임금이 높았을 뿐 아니라 그 수입을 오롯이 가족을 위해 쓸 수 있었다. 혜택을 받은 점은 이 밖에도 여럿 있었다. 징병제가 없었고, 정치 경찰과 검열이 존재하지 않았다. 법에 따라 계층을 구별하지도 않았다. 고용주 대부분은 종업원과 함께 식사했다. (노예를 제외하고) 누구도 “주인님” 따위의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자리 잡은 이주민이 모국에 보낸 편지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낭독되어 대서양 횡단선의 승객을 모집하는 데 훌륭한 선전이 되었다. 재미있게도 대통령이 의회에서 행한 연두 연설조차 검열관이 금지 조치를 내리기까지는 유럽의 많은 신문에 게재되어 이민 모집에 일역을 담담했다. 「더블린 모닝포스트」지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우리는 이 기사를 직접 자신의 생활과 관계가 있는 듯이 읽는다.”
하지만 가장 큰 매력은 값싼 토지였다. 유럽에서 온 이주민은 특히 호주나 아르헨티나에서 원주민의 예전 사냥터에 속한 토지를 값싸게 양도받을 수 있었는데, 그 점에서 가장 흡인력이 있는 곳은 바로 미국이었다. 미국 정부는 성가심을 무릅쓰고 가난한 사람들이 토지를 확보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했다. 합중국 역사를 통해 이 시기의 토지 구입 제도만큼 자선적인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기본인 된 정책은 1796년 토지 가격을 1에이커당 2달러로 규정한 조례였는데, 총액의 절반을 지불하고 나머지 대금은 1년 뒤에 갚으면 되었다. 1800년 법령에 따라 오하이오 주의 신시내티, 치리코시, 매리에타, 스투벤빌 등 프런티어 최전선에 연방 토지사무소가 설치되었다. 구입의 최저 단위는 640에이커에서 320에이커로 낮아졌고, 구입자는 선금으로 25퍼센트를 처음에 지불하고 잔금은 그 뒤 4년 안에 갚으면 되었다. 따라서 많은 농장-유럽의 기준에서 보면 터무니없이 넓은 농장-을 불과 160달러 정도의 현금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452~454쪽
이전의 내각은 합중국 전반에 걸친 이익을 대표하도록 구성되었고, 그 멤버들은 지배계급의 단면이었다(물론 미국에 그런 계급이 존재하는 한)-즉 그들은 젠틀맨으로 구성되었다. 이에 대해 키친 캐비닛은 언론인과 같이 여태껏 권력하고는 아무런 인연이 없던 사람들을 권력 행사 그룹에 끌어들였다. 켄들은 워싱턴 사교계를 런던이나 파리를 흉내 낸다며 경멸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늦은 만찬”은 “영국의 우스꽝스러운 풍습”이며, 위스키 대신에 샴페인을 마시는 것은 “주제넘은 행위”에 불과하고, 노출이 심한 드레스는 “역겨웠다.”
켄들 같은 인물이 미국을 통치하는 데 일조를 한다는 생각만으로 애덤스 등은 등골이 오싹했다. 하지만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잭슨은 대중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하여 이제는 대중이 여물통에 코를 내미는 형국이었다. 잭슨은 한두 가지 예외는 있었으나 남북전쟁 시대까지 계속된 새로운 정치 왕조를 구축했을 뿐 아니라 권력 구조를 영구히 변화시켰다. 키친 캐비닛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전하여 오늘날과 같은 백악관의 거대관료제와 관련 기관이 생겨났다. 이것은 4년마다 치러지는 대통령과 유권자의 개인적인 계약에 의해 조성된 대통령의 권력 강화 산물이었다. 켄들과 같은 인물이 이런 새로운 방식의 상징이 된 것은 나름대로 타당했다. 그리고 잭슨이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계약에 서명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한다면, 신문은 그 계약을 작성하는 수단으로서 일조를 한 셈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통치만 잘된다면 그게 정식 내각이건 키친 캐비닛이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잭슨 시대에는 확실히 사정이 좋았다. 경제가 확대되고 붐을 이루었다. 그 결과 간접세와 토지 매각 수입이 급증해 연방정부의 얼마 안 되는 경비는 어렵지 않게 지출될 수 있었다. 국채도 감소하여 1835년과 1836년에는 채무액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이것은 근대 국가가 된 이래 그 전이나 앞으로나 예외가 없었다. 이 검소하고 간소하며, 허식도, 대국과 같은 가식도 없는 대중 정부는 의심할 나위 없이 유권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_539~540쪽
그 이듬해 봄이 되자 전 세계로부터 수천 명의 사람들이 캘리포니아로 몰려들었다. 1830년대에 이미 금광 열풍으로 들끓었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캘리포니아로 온 사람들도 있었다. 메인 주 커틀러 주민들은 직접 배를 만들어 돛을 달고 혼 곶을 돌아 샌프란시스코 만에 도착했다. 파나마 지협을 거쳐 온 사람도 있었는데, 대부분은 오리건 트레일과 캘리포니아 트레일을 따라 로키 산맥을 넘어 왔다. 초기의 “49년도 사람들”은 철망-그들이 “패닝”(접시로 이는 방법-옮긴이)이나 “플래서”(상자로 거르는 방법)라고 부른 사금 채취법-을 사용해 자갈과 흙을 걸러 금을 채취했다. 또는 “사금을 이는 긴 홈통”이나 세광 홈을 사용해 흐르는 물에서 금을 걸러내기도 했다. 이는 매우 간단한 작업으로 다음과 같은 속요도 생겨났다. “아아 / 캘리포니아 / 나의 땅 / 나 새크라멘토를 향해 떠나네 / 무릎에 세숫대야 올려놓고.”
하지만 지표면의 채굴이 끝나자 수직갱을 설치하고 분쇄기를 이용해 석영에 박힌 금을 채취해야만 했다. 이렇게 되자 자본과 조직이 필요했다. 실망한 49년도 사람들 대부분은 빈털터리가 된 채 실망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그 수는 한 해에 3만 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에는 황금 이외에 다양한 기회가 널렸기 때문에 그대로 정착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인디언을 제외하고 금광 발견 이전부터 이곳에 살던 사람의 숫자는 1만 4,000명이 채 안 되었다. 하지만 1852년에는 25만 명이 넘었다. 샌프란시스코에는 도박꾼, 금융업자, 매춘부와 억센 여성, 배우와 통신원, 정치 신인과 사업가 등이 모여들어 인구 2만 5,000명이 들끓는 번창한 도시로 변했다. 최선에서든 최악에서든 모두가 자기 이익만을 위해 싸우는 무한경쟁 사회였다. _ 601~602쪽
이처럼 스스로 자문자답을 되풀이하면서 링컨은 미국의 종교 체험이 형성해낸 국가적이고 공화적이며 민주적인 도덕관-아마 특정 교회에 몸담은 이보다 더 완전하고 정확한 도덕관-을 몸소 보여주는 존재가 되었다. 그는 워싱턴 대통령이 의회에서 퇴임 연설을 할 때와 똑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과 전쟁 중에 그가 보여준 행동들을 돌이켜 생각해보면-그 당시에 이미-국가 이념과 매우 정확하게 일치하는 듯이 보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윈스럽 총독이나 최초의 정착민들과는 달리 링컨은 미국이라는 공화국이 “선택받은 국가”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말은 이 나라가 “언제나 정의롭다”라는 것을 암시했는데, 남북전쟁이 일어난 것 자체가 미국에도 잘못이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하지만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정의를 실천하려는 의지 역시 있었다. 링컨은 미국인은 “거의 선택된 민족”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따라서 남북전쟁은 신의 계획의 일부로서 피 흘리는 쓰라린 고통으로 사람들을 시험하는 커다란 시련이지만, 그 뒤부터는 자선과 재탄생의 길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_740쪽
- 2권
남북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이미 미국이라는 나라와 그 국민은 20세기 말에 흔히 나타나는 특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거대함과 풍요, 끝없는 변화, 다색 다민족, 물질주의와 이상주의의 심화, 혁신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 자부심, 독점욕, 장광설, 요란스러움, 탐구심, 넘치는 정의감, 선행, 부의 추구 등을 꿈꾸며 동시에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노력했다. 성숙한 공화국의 온갖 장점과 단점 또한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에 사는 사람들이나 미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근대 세계에서나 보일 법한 선망과 감탄, 충격이 교차하는 반응을 보였다. 금과 은이 풍부하게 매장된 새로운 광맥을 캐내려고 농민과 기계공, 사무원과 교사까지 일확천금의 부푼 꿈을 안고 서부로 몰려가는 모습을 헨리 소로는 “크리슈나 신상을 실은 수레 아래에 무릎 꿇은 힌두교도들의 황홀 상태를 방불케 한다”라고 못마땅하게 묘사했다.
영국과 인도 두 나라 문화의 새로운 천재로서 이 세상에 혜성처럼 나타난 러디어드 키플링에게 뉴욕은 “비참한 미개 상태와 무모한 방종이 낳은 무기력한 산물”이었으며, 그 거리는 “잔지바르 해변과 같거나 줄루 족 마을 진입로와 비슷”했다. 하지만 위대한 시인 월터 휘트먼은 뉴욕을 한없이 사랑하여 “돛대로 둘러싸인 맨해튼만큼 멋지고 당당한 곳이 있을까?”라면서, “우뚝 솟아라, 맨해튼의 드높은 돛대여! 우뚝 솟아라, 브루클린의 아름다운 언덕이여!”라고 소리 높여 읊었다. 괴팍스러운 보스턴의 교양인 헨리 제임스 역시 이 거대한 도시에 압도되어 “열정의 선율 …… 불굴의 힘-매우 사치스러운 도시가 내뿜는 힘의 매력”에 갈채를 보냈다. 또한 “그 산만하고 쓸모없고 시끄럽기만 한 폭발음, 그 거대하고 용감하고 오만한” 것을 거의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사랑했다. 새로운 고층 건물들이 “레이스 뜨개질용 베개에 꽂힌 바늘처럼” 빽빽하게 들어섰다고 말했다. _14~15쪽
이처럼 평범하기 짝이 없는 정치가 되풀이되는 상황에서 미국은 숭배하고 귀 기울이며 추종할 지도자를 다른 분야에서 찾고자 했는데, 그런 인물을 경제계에서 발견한 것은 당연했다. 미국은 모험가들과 설교가들에 의해 세워졌고, 젠틀맨 출신 정치가들에 의해 공화제 국가로 변모했지만, 국가를 만들고 국민을 살찌운 것은 사업가들이었다. 국민이 사업가를 존경하면 안 될 이유가 있을까? 1870년대, 1880년대, 그리고 1890년대 미국인들은 스스로가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의 국민이라는 강한 자부심을 느꼈고 인류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높은 생활수준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한 부가 창출되는 과정에서 과학기술과 사회 기반 시설이 발전해가는 모습을 그들은 어디에서든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이 활기차고 약동하고 풍요로운 체계를 지휘하는 주인공들이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경쟁심을 북돋아주어야 했던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 시대의 전형적인 영웅은 앤드루 카네기(1835~1919)였다. 카네기는 나름대로 유능한 경제정치 사상가로서 훌륭한 자서전을 썼으며 아울러 1889년 6월 「노스 아메리칸 리뷰」지에 「부의 복음(The Gospel of Wealth)」이라는 중요한 글을 기고했다. 카네기가 태어난 곳은 미국이 아니라 스코틀랜드였다. 칼뱅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마찬가지로 세가 컸던 스코틀랜드의 전통적인 불가지론을 신봉했다. 어느 정도 스코틀랜드인 기질이 남아 있어서 실내를 스코틀랜드의 타탄 격자무늬 벽지로 바르고 만년에는 하일랜드에 있는 스키보 성을 구입했다. 하지만 미국이라는 나라의 본질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그것은 부자가 될 자유, 그리고 그 부를 나눠줄 의무였다. 카네기의 삶은 이 두 가지 목적을 완벽하게 수행해냈다. _ 75~76쪽
대부분 돈 한 푼 없이 두려움에 떨며 건너온 몇 백만 명에 달하는 이주민들을 자신감 넘치는 시민, 부의 창출자, 사회문화 자산으로 탈바꿈시킨 뉴욕을 비롯한 미국의 능력은, 공화국이 확대해나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힘이었다. 이 나라는 거의 3세기에 걸쳐 국민을 향해 바로 그와 동일한 것을 줄곧 요구해왔다. 신세계 문화가 더 복잡해질수록, 재능-진정한 천재-의 흥미진진한 조합이 더욱더 실현 가능해졌다. 유럽에서는 거의 생각할 수조차 없는 특징적인 사례는, 토머스 앨바 에디슨 (1847 ~ 1931)과 루이스 컴퍼트 티퍼니 (1848 ~ 1933)가 협력하여 1885년 뉴욕에 최첨단 기술과 예술적 혁신이 훌륭하게 결합된 라이시엄 극장을 창조한 일이었다. 에디슨은 여러 가지 점에서 미국인의 전형이라고 할 인물이었다. 아마 당시 미국이 재능 있는 사람에게 부여했던 모든 자유를 누구보다 다양하게 활용했을 것이다. 긴 생애 동안 발명을 하면서 숱한 결실을 이뤄내는 과정에서 규제나 제한, 금지로 좌절을 맛본 적이 전혀 없었다. _121~122쪽
급진 민주주의 세력이 정부 역할을 제한하는 데 치중했다(이 같은 현상은 미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영국도 같았다). 제퍼
슨 시절, 나아가 잭슨 시절에도 크고 고압적인 정부는 반동 세력, 왕들과 황제들과 연방주의자, 그리고 훗날에는 월 가와 연대를 맺었다. 또한 무거운 세금, 특히 개인 소득세 같은 것은 힘겹게 일하는 노동자들의 지갑에서 돈을 훔쳐서 국가를 장악한 엘리트들에게 넘기는 음모였으며, 중앙은행은 금융 재벌들에게 특권을 부여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정부가 권력을 갖는다는 것은 그것을 민중의 손에서 빼앗아 탐욕에 가득 찬 반 민주적인 엘리트 계층에게 넘겨준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견해는 남북전쟁 뒤에도 잠시 남아 있었는데, 공화당의 연방정부가 거대한 권력을 장악하고 각 주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다음 몇 십 년 동안 대기업과 법인이 급격하게 성장한 까닭에 그러한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 점차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대부분의 민주당원들 사이에서, 강력한 연방정부는 광범위한 중재 능력을 발판으로 지나치게 비대해진 법인들로부터 일반 서민들을 지키는 수호자라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했다. 민간 부문 (잠재적인 악으로 감시와 통제가 필요)과 대립하는 존재로서 공공 부문 (선으로 확장이 필요)의 존재가 공상적 사회개혁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국가 세입을 늘릴 필요성이 있었다. 그러므로 개인 소득세는 특히 그것이 세입 증대와 소득 재분배 기능을 가진 누진과세라면 매우 바람직스러운 제도였다. 20세기 말 현재 국가라는 존재는, 좋게 말하면 필요악으로서 필요한 어떤 일을 추진하기 위한 유일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대적할 존재가 없는 압제자로 간주되고 있다. 여기서 사회에 지적인 분위기가 감돌던 1913년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 당시 국가라는 존재는 미국은 물론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빛나는 갑옷을 몸에 걸친 기사라고 여겨졌다. 가난한 사람이나 약한 사람, 괴롭힘을 받는 사람을 구해주러 왔으며, 탐욕스러운 부유층이 개인 이익을 챙기기 위해 저지르는 행위를 객관적으로, 자비롭게 처리하는 존재가 국가였다. _211~212쪽
미합중국은 하나의 가혹한 기계로서 민족, 종교, 정치, 사회, 문화에서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수많은 인간들이 그 안에서 한데 뒤섞였으며, 그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의해 탈바꿈하여 마침내는 미국인이라는-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존재가 출현한다는 생각은 공화국 탄생 때부터 생겨났다. 아니 그보다 더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로드아일랜드는 로저 윌리엄이 그곳에 식민지를 세울 때부터 이미 인종의 도가니를 실제로 가동시킨 좋은 예였다.
멜팅 포트 (melting pot), 즉 도가니라는 말은 미국에 귀화해 뉴욕에 정착한 프랑스 태생의 수필가 M. G. 장 드 크레브쾨르가 1782년에 처음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할아버지가 영국인, 할머니가 네덜란드인이고, 아버지는 프랑스 여성과 결혼했고, 그 사이에서 난 4명의 자식들이 각각 다른 나라 여성과 결혼한 그런 일가도 드물지 않다. 미국인이라는 것은 그때까지 가졌던 편견이나 습관을 모두 털어버리고 현재 직면하고 있는 새로운 생활양식에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이다. … 여기서 여러 나라 출신의 개개인이 녹아서 하나의 새로운 인종이 태어난다.” 미국을 방문한 사람들 가운데는 “미국의 경험”이라는 인종의 야금학이 얼마나 잘 작동할지 의문을 품는 경우도 있었다. 찰스 디킨스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미국 중서부의 열차 안에서 무언가를 오해한 그가 “보시다시피, 저는 외지에서 온 이방인입니다”라고 차장에게 사과하자, 차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선생님, 우리 미국에서는 모두 이방인이랍니다.” _258~259쪽
경기 침체는 유용한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매서워야 하지만 경제가 자동으로 조절해가므로 기간이 길 필요는 없다. 정부, 경제계, 그리고 일반 대중에게 요구되는 것은 인내심이 전부이다. 1920년의 경기 침체는 하딩의 정부 부문 축소에 힘입어 1년도 안 되어 자동 조절을 끝마쳤다. 1929년의 불황이 그것보다 더 길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쿨리지가 말했듯이 미국 경제는 기본적으로 건전했기 때문이었다. 4주 동안이나 계속되던 주가 폭락이 멈춘 11월 13일, 최고치 451을 기록하던 주가지수는 224로 떨어졌다. 여기에는 잘못된 점이 없었다. 1년 동안 급등하던 1928년 12월에도 주가지수는 겨우 245에 불과했으므로, 이 폭락은 단지 투기 요소를 제거하고 배당금 대비 적정 가치에서 건전한 주식만 남겨놓았을 뿐이었다. 이 경기 후퇴 역시 스스로 조절되는 기능에 맡겨놓았더라면 과거의 사례와 비교해볼 때 1930년 말에는 조절을 끝냈을 것이며, 그 결과 신뢰가 회복되어 세계적인 불경기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장은 천천히 그리고 가차 없이 하강을 계속했고 경제적 현실을 더 이상 반영하지 않았다-시장은 진정한 기능을 상실했다. 대신에 파멸로 가는 원동력이 되어 모든 미국 국민, 나아가 세계 사람들을 지옥으로 밀어 넣었다. 1932년 7월 8일자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주식시장의 혼란이 끝날 무렵 산업주의 주가는 224달러에서 58달러로 폭락했다. 유에스스틸의 주가는 1929년 시장이 붕괴되기 전 262달러에 매매되었으나 이제는 겨우 22달러에 불과했다. 세계에서 경영 상태가 가장 좋다던 제너럴모터스의 주가도 73달러에서 8달러로 급락했다. 이쯤 되자 미국의 앞날을 바라보는 눈이 크게 바뀌고 한없이 악화되리라는 전망만 난무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ㆍ 왜 정상적으로 경기가 회복되지 않았을까 _369~370쪽
또다시 스탈린이 머뭇거리는 미국 전략가들에게 구원의 손을 뻗었다. 봉쇄 경계선이 어디를 통과할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졌으나 1950년 1월 12일 국무장관이 된 딘 애치슨은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대단히 어리석은 연설을 했다. 애치슨은 중국은 지금은 공산주의국가이지만, 독립 노선을 걷는 유고슬라비아의 공산당 지도자 티토 원수처럼 이 나라의 지도자 마오쩌둥은 반드시 스탈린과 곧 갈등을 일으킬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이 점을 명확하게 밝혀두지만-이 점은 그 뒤 역사에 의해 정당성을 얻었다-그는 타이완과 인도차이나뿐 아니라 한국이 미군의 방위선에서 제외된다고 말했다. 이 연설을 스탈린이 읽고 그의 주의를 끌었음이 틀림없었다.
스탈린은 티토를 처리할 때 저지른 실수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애치슨은 몰랐지만 그 당시 마오쩌둥에게 화해의 움직임을 보냈다. 애치슨이 중국과 소련이 관계를 단절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고 언급한 것은 스탈린으로 하여금 그 위험성을 상기시켰고, 한국이 미국의 국가 이익에서 제외된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은 그 해결책을 암시했다. 한반도에서 제한적인 대리전쟁이 일어난다면, 중국은 진정한 이익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달을 것이라고 스탈린은 판단했다. 만약 이것이 실제 스탈린이 생각했던 것이라면 그의 생각은 옳았다. 한국전쟁은 중국과 소련이 관계를 끊는 것을 10년이나 연기시켰다. 하지만 그 한편으로는 전쟁을 가져다줬다. 스탈린은 1950년 봄 북한의 공산주의 지도자 김일성이 11월에 38선을 넘어 제한된 남침을 감행하도록 허락했던 것 같다. 38선을 경계선으로 한반도는 북쪽의 공산 진영과 남쪽의 민주 진영으로 분단되었고 남쪽에는 500명의 미군이 고문으로 배치되었다. 하지만 김일성은 신중했을 뿐 아니라 남이 시키는 일이나 하고 있을 인물이 아니었다. 스탈린의 귀띔을 전면 침략을 허가한 것으로 받아들여 6월 25일 남침을 개시했다. _509~510쪽
여기서 이야기는 미국의 중대한 구조 변화로 옮겨간다. 미국은 초창기부터 줄곧 평등한 사회를 유지해왔는데, 남자들은 (그리고 실제로 여자들도) 신분의 차이에는, 예를 들어 그것이 존재하더라도,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누구나 어떤 상대방이든, 심지어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악수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워싱턴은 그 권리를 거부하고 머리 숙여 인사로 대신한 유일한 대통령이다). 하지만 이 평등 정신은 어떤 몇 가지 이유-경험, 학식, 지위, 부, 관직, 인품 등-에 의해 “보스”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경의를 나타냄으로써 균형을 이뤘다. 평등주의와 경의의 조화는 미국이 가진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였으며, 또한 가장 큰 장점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 변화가 생겼다.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보스”라는 말은 과거 속으로 사라졌으며 더 이상 통용되는 일반적인 용어가 아니었다. 경의 그 자체가 권위를 적대시하는 새로운 풍조에 굴복했다. 오랫동안 확립된 계층제도에 도전하고, 반항 또는 무시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이런 풍조가 어디서나 번져나가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낸 곳은 언론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한마디로 말해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을 가리킨다)의 세계였다. 텔레비전은 여론 형성뿐이 아니라 방송국 자체 내의 의사결정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텔레비전으로 유명해진 스타가 늘어남에 따라 화면에 등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원래 직무상의 지위는 낮지만 대중의 인기를 얻어 유명세를 타면서 귀중한 상품이 되었고, 곧 직급이 높은 상사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고 결국에는 (사람에 따라서) 방송국 소유주와 어깨를 견줄 만큼의 높은 수입을 올리게 되었다. 마침내 경영진도, 더군다나 주주도 아닌 텔레비전 뉴스 프로그램 진행자가 해설의 논조나 견해의 요지를 결정하기 시작했다.
변화의 조짐은 일찍이 CBS TV 방송국의 사회 문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시 잇 나우 (See It Now)”의 사회자 에드워드 R. 머로가 미국 여론 형성의 선구자로 등장하는 과정에서 엿볼 수 있다. 1954년 3월 9일에 방송된 매카시의 인터뷰는 이 상원의원의 파멸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프로그램에 관한 모든 것은 머로 자신과 프로듀서가 직접 기획했으며 CBS TV 방송국의 경영진이나 임원, 소유주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텔레비전 방송국의 의견 형성 권한은 소유주나 경영진에서 프로그램 제작자와 사회자로 서서히 하지만 점차적으로 거의 완전하게 넘어갔다. 1950년대에 들어서기까지 그 예를 찾을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이 현실은 1960년대 말에는 명백한 사실이 되었다.
또한 텔레비전의 뒤를 따라 신문 매체의 세계, 특히 동부 지역의 주요 일간지나 잡지에 똑같은 변화가 일어났으며, 약간의 예외는 있었으나 정치에 대한 발언권이 소유주나 대주주에게서 편집자와 기자에게로 옮겨갔다. 허스트나 매코믹 (「시카고 트리뷴」지), 퓰리처, 헨리 루스 (타임라이프 사) 등 예전에는 간행물의 정치적 방향성을 매우 상세한 부분까지 결정했던 소유주들이 퇴장했고 대신에 실제로 실무를 담당하는 언론인들이 그 권한을 넘겨받았다. 이 언론인들은 매우 진보적인 견해를 보이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정치뿐 아니라 문화면에서 상당히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실제로 미국을 전통적인 속박에서 해방시키는 데 이보다 더 큰 역할을 한 것은 없을 것이다. _544~545쪽
○ 출판사 서평
*내용 소개
- “인류 최대의 모험”, 미국인의 역사
역사학의 거장 폴 존슨이 선보이는 새롭고 거대한 미국의 역사. “미국의 창조는 인류 최대의 모험이다”로 시작하는 이 책 『미국인의 역사』에서 폴 존슨은, 16세기 말 영국령 식민지부터 20세기 말 현재까지 400년 미국인의 역사를 신선하고 매력적인 통찰로 재해석해낸다. 미약하기 그지없던 시작과, 독립과 국민 정체성 확립을 위한 힘겨운 싸움, 남북전쟁과 노예제도와 서부 개척을 둘러싸고 빚어진 “불가피한 죄악”과 거기서 벗어나기 위한 영웅적인 노력과 희생을 거쳐, 폭발적인 경제 성장과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우뚝 서는 전 과정이 기왕에 볼 수 없었던 색다른 시각과 사실들로 우리 앞에 펼쳐진다.
오늘날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미국은 경제적ㆍ정치적ㆍ군사적으로 세계 초강대국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인류가 이룩해온 모든 발전의 정점에서 여전히 실험과 도전을 계속하고 있는 최선두주자이기도 하다. 이는 『모던 타임스』 『근대의 탄생』 『유대인의 역사』 『기독교의 역사』 등 여러 역사학의 명저들을 써온 저자가 유독 한 나라의 역사서로 “미국인의 역사”를 집필한, 또는 집필해야만 했던 이유와 맞닿아 있다. 저자 스스로 밝혔듯이 이미 1950년대에 미국에 대한 관심이 싹터 기존 저서들의 자료를 갱신하고 수정하고 바로잡고 확장하고 새롭게 다듬는 과정을 거쳐 이 책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한마디로 『미국인의 역사』는 폴 존슨의 지적 여정의 총 집약이자 인간이 일구어낸 진보의 최첨단, 현대성의 총화로서 미국을 이해하고 재구성해낸 결과물인 셈이다.
- 인류의 미래를 가늠할 척도이자 이정표
그런 점에서 미국과 미국인은 어쩌면 인류의 미래를 가늠할 척도이자 이정표일지 모른다. 폴 존슨이 “미국인의 역사”를 “인류 최대의 모험”이라고 일컬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인 자신들과 인류 모두에게 이처럼 커다란 교훈을 간직한 나라의 역사는 없다. …… 이 교훈에서 배우고 그것을 기초 삼아 미래를 건설할 수만 있다면, 이제 막을 열기 시작한 새로운 시대에 인류 전체가 혜택을 볼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미국인의 역사로부터 수많은 교훈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그 점은 명확해 보인다. 갖은 질곡과 시행착오로 점철된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돌아볼 때,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맺어온 미국과의 밀접한 관계를 고려할 때 우리에게 이 심도 깊은 미국인의 초상은 더욱 큰 시사점을 던진다. 그들이 꿈과 열망을 실현해온 방식과 과정은 우리를 새로운 성찰과 각성으로 이끌 것이고, 그들이 거둔 실패와 성공은 반면교사의 지혜를 줄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미래에 위한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데 큰 밑거름이 되어줄 것이다.
『미국인의 역사』는 “인류 최대의 모험”을 다룬다는 취지에 걸맞게 단순한 사실의 나열로 이루어진 연대기적ㆍ평면적 개설을 뛰어넘는다. 대신에 각 시대를 대표하는 주제와 인물을 중심에 놓고 관련 사실과 사건을 과감히 취사선택하여 유기적으로 서술해나간다. 더불어 각 사안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뚜렷하게 드러낸다. “이 책은 미국이 겪은 과거의 모든 면, 모든 시대에 관해 새롭고 때로는 매서운 의견을 담았다. 아울러 나는 일부 역사학자처럼 내 견해를 감출 의도가 없다. 독자 여러분은 있는 그대로 보고 수긍하거나 거부할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의 논조는 대체로 긍정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몹시 비판적이다. 심지어 신랄하고 도발적이어서 상식의 허를 찌르는 평가를 내릴 때는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그동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미국사에 관한 통념을 끊임없이 깨뜨려준다. 이 독특함이야말로 미국의 과거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하고 역사를 바라보는 눈을 크게 확장시켜준다.
- 미국의 역사에 던지는 3가지 근본 질문
책 첫머리에서 폴 존슨은 미국의 역사에 대해 3가지 근본 질문을 제기한다. 첫째, 미국은 건국 당시 저지른 “불가피한 죄”를 정의롭고 공평한 사회 건설로 속죄했는가ㆍ 둘째, 사사로운 이익 추구의 욕구와 야망을 공동체적 이상과 이타주의로 통합해냈는가ㆍ 셋째, 인류의 본보기가 될 공화국을 만들겠다는 대담한 계획을 달성했는가ㆍ 이상의 3가지 질문은 “자유와 평등과 정의에 기초한 민주 공화국의 완성”이라는 목표로 수렴된다. 이것은 크게 보면 인류 전체가 지금껏 한결같이 추구해온 목표와 일치한다. 미국인은 이 원대하고 오래된 인간의 바람을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가장 극단까지 실험하고 가장 가까이 다가간 장본인이다. “오늘날의 미국은 비할 데 없는 인간의 위대한 업적이다”라는 저자의 찬탄은 괜한 과장이 아니다.
미국인의 역사에서 오래도록 이어진 문제, 또는 면면히 이어진 전통은 사실 식민지 건설 초기부터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15세기 말 몇 차례의 실패 이후 16세기 초 최초로 수립된 버지니아 식민지는 두 방향으로 확연히 나뉘었다. 한쪽은 자유 사회로 나아가는 대의제를 택했고, 한쪽은 남부 특유의 제도로 나아가는 노예제를 선호했다. 이 둘을 하나로 묶어 실용성에 기초한 세속주의 전통이라고 한다면, 여기에 16세기 초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온 청교도 “필그림 파더스”에 의한 강력한 종교적 이상주의 전통이 더해졌다. 이러한 세속주의와 신권주의,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는 서로 충돌하며 수많은 모순을 빚어냈지만 때로는 타협하고 때로는 하나로 수렴되면서 발전의 강력한 원동력으로 또한 작용했다.
18세기에 이르면 청교도주의는 쇠퇴하고 세속적 현세주의가 미국을 지배하게 된다. 애초에 “언덕 위의 도시” 즉 “신의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청교도의 이상이 “민주 공화국” 건설이라는 원대한 목표로 전환하는 이 시점을 미국 역사의 커다란 분기점이었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18세기 중반 미국은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반세기 만에 무려 500퍼센트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높은 임금, 값싼 토지, 낮은 세금, 이 3가지 요소는 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번영을 미국에 가져다주었다. 매입과 전쟁으로 국토는 서쪽으로 끝없이 넓어지고 그 땅을 도로와 운하와 철도가 뒤덮었다. 그리하여 19세기 말에 이미 미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인류사에 유례가 없는 생활수준을 누리며 살게 되었다.
-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공화국
경제발전과 더불어 법과 제도 역시 날로 성숙해갔다. 비록 전쟁이라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했지만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공화국 건설을 향한 미국인의 의지는 확고했다. 식민지 시절부터 본국인 영국의 영향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채 자치를 시행했던 미국은, 개인주의와 실용주의에 기초한 완전한 독립과 국가 통합을 마침내 이루어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의회와 함께 헌법이 미국 식민지를 독특한 존재로 만들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미국이 영국보다 ‘근대적’이었으며, 분명히 혁신적이었다고 볼 수 있었다.” 정치와 법 제도에서 영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헌법 제정, 대의제 실현, 연방 수립 과정은 가장 선진적인 도전이 낳은 성과였다.
시민권과 참정권을 통한 자유와 평등, 정의의 실현이 이에 동반되었다. 일반인도 최상품을 추구하고 누릴 권리가 있다는 인식이 정치에 대한 전면 참가로 이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10년 전에 “시민”이란 말이 널리 쓰였다. 또 집단으로서 시민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퍼블릭”이라는 신조어가 유행할 조짐을 보였다. 기본적으로 미국은 “일반 남녀가 자신들 손으로 자신들을 위해 창조한 나라”였다. 백인 남성에게만 주어진 참정권, 노예제도의 존속과 흑인, 여성, 그리고 훗날 이민자에 대한 차별이라는 한계는 있었다. 이는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헌법 정신에 어긋났다. 예컨대 초기 식민지에는 흑인 노예가 거의 없었기에 평등한 시민권 보장과 노예제도는 전혀 모순을 빚지 않았다. 그러나 대농장 경제가 도입되자 노예(제도) 문제는 현실적 이해관계와 직결되어 결국 내전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사람인 토머스 제퍼슨은 노예제를 부도덕한 제도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은 평생 노예를 거느리고 사고팔며 늘렸다. 특이하게 벤저민 프랭클린은 미국의 비영국계화, 비백인화를 우려하여 노예제도를 반대했다.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의 대통령이었던 제퍼슨 데이비스는 노예제도의 확장은 노예를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노예를 행복하게 해준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처럼 노예제와 흑인 문제는 남북의 현실적 이해관계로 인한 갈등, 그리고 강력한 중앙집권 연방주의와 각 주의 권리를 주장하는 주권(州權)옹호주의의 첨예한 대립 구도 등과 얽히고설켜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초창기 미국 민주주의의 발전은, 천 년토록 그 땅에 살아왔지만 참정권을 전혀 누리지 못하던 유럽인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19세기 한 이민자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여태껏 어떠한 국가도 누린 적 없는 최대 다수의 인간다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확실하다”라고 증언했다.
- “명백한 운명”과 “미국화”
폴 존슨은 미국인의 가장 보편적인 특성으로 “변화” (신분 상승) 또는 “이동” (개척)을 든다. “같은 자리에 오랜 동안 머무는 사람은 적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위 계층으로 상승했고,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지리적으로 이동했다.” 변화를 추구하는 정신은 미국 경제와 사회를 급격하게 발전시킨 한 원인이었다. 개척의 물결은 머나먼 변경 지대를 거의 순식간에 경제성장의 거점으로 탄생시켰다. 멈추지 않고 이동함으로써 정주지 사회가 무너졌고, 사회계층과 “존경심”이 사라지면서 평등 관념이 퍼져나갔다.
미국이 북아메리카 전체를 지배할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이른바 “명백한 운명”의 정신이 이를 뒷받침했다. 초기 개척민은 영국인이 유대인을 대신해 신의 사명을 실현할 운명을 부여받은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신화 즉 “선민사상”을 고스란히 미국으로 가져갔다. 이는 미국에서 “명백한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실제로 구현되었다. “이 배경에는 국가주의 내지는 이데올로기 문제와 함께 종교적인 동기도 작용했다. 미국이 서부를 개척하여 문명화하고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민주주의와 공화국이 바라는 것인 동시에 신의 뜻이었다”라고 저자는 말한다. 미국이 세계를 이끄는 최고의 국가임을 뜻하는 “미국 예외주의” (프랑스 사상가 토크빌의 용어)와도 일맥상통하는 이것은 장차 팍스아메리카나로 이어지는 미국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이와 더불어 대량 이민의 홍수가 미국 땅으로 쉼 없이 밀어닥쳤다. 미국이 “약속의 땅” “파라다이스”로 여겨진 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높은 임금, 낮은 세금, 무엇보다 값싼 토지가 넘쳐났다. 거기에다 전례 없는 자유와 평등의 땅이었다. 미국은 거대한 “인종의 도가니”가 되었다. “미합중국은 하나의 가혹한 기계로서 민족, 종교, 정치, 사회, 문화에서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수많은 인간들이 그 안에서 한데 뒤섞였으며, 그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의해 탈바꿈하여 마침내는 미국인이라는-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존재가 출현한다는 생각은 공화국 탄생 때부터 생겨났다”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리하여 미국은 최초의 “국제 국가”가 되었다. 저자는 20세기 초 “대중의 라디오(그 뒤를 이어 유성영화) 청취는 이민 사회의 미국화를 가져왔고 의복, 언어, 태도에서 계급의 차이를 없애버렸다”라고 흥미로운 논평을 내린다.
- 신랄한 평가와 다채로운 시선
이 책은 제목에서 잘 드러나듯이 미국“인”의 역사를 표방한다. 그런 만큼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무수한 유명, 무명의 인물들이 등장해 미국이라는 거대한 무대를 완성해간다. 여성운동의 선구자 격인 앤 허친슨, 조면기를 발명해 노예제도에 존속과 번영을 가져다준 동시에 “아메리칸 시스템”을 도입해 초기 산업혁명에 원동력을 제공한 일라이 휘트니, 미국이라는 나라의 본질이 부자가 될 자유 그리고 그 부를 나눠줄 의무에 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실천한 철강왕 카네기, 갱스터 랩으로 미국 사회의 하강 이동 현상 (“대중화”)의 전형을 보여준 래퍼 겸 배우 투팍 샤커 등이 바로 그런 이들이었다.
이런 인물들에 대한 저자의 시선은 꼭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저자는 대개 인물의 양면성을 살피면서 총체적으로 역사적 의미와 결부시켜낸다. 예컨대 조지 워싱턴은 애초 영국군 장교로 입신출세하고자 했으나 그것이 좌절당하자 독립이라는 막중한 과업의 선봉에 서게 된다. 역대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우리의 통념과 상반되는 경우가 특히 많다. 일례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유명한 “뉴딜” 신화는 본질적으로 전임 대통령 후버의 것을 물려받은 것으로 경제 정책이랄 것이 없으며, 나아가 두 정권 모두 불필요한 개입 정책으로 자연스럽게 경기 회복이 이뤄지는 것을 막은 것으로 재평가한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신랄하기 그지없다. 그는 아버지 조지프 P. 케네디가 마피아와 결탁하여 돈으로 만들어낸 대통령이라고 단언한다. 이는 당시 미국을 지배한 미디어 정치의 성과물이기도 한데, 워터게이트 사건의 당사자인 닉슨 대통령은 오히려 비대한 미디어 권력에 희생당한 피해자라고 저자는 말한다. 탄핵 정국에서 닉슨은 “명예로운 사임”을 택했고 “마침내는 제퍼슨 이후 가장 존경받는 정계 원로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이 책에서 폴 존슨은 미국의 모든 측면을 다루면서 미국인의 역사를 새롭게 해석해내고자 했다. 이는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의 표현대로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 이들을 위한 강력한 해독제”일 수 있다. 저자는 책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말한다. “미합중국이라는 배가 다가올 21세기와 새로운 3,000년이라는 미지의 바다를 향해 나아갈 때, 인류는 그 항해를 호기심과 놀라움, 때로는 불안한 눈길로 지켜볼 것이다. 미국이라는 공화국의 위대한 시험은 여전히 전 세계가 주목하는 대상이다. 그것은 여전히 인류에게 으뜸가는 가장 큰 희망이다.”
○ 추천사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 폴 존슨의 『미국인의 역사』는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나라만큼이나 장대하다. 이 책의 주인공은 바로 사람들, 열정과 전망과 용기와 확신으로 위대한 나라를 건설한 남성들과 여성들, 유명인들과 무명인들이다. 이 책은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 이들을 위한 강력한 해독제다.
포브스 매거진 : 이 대담한 책은 참으로 위대한 업적이다.
뉴욕 타임스 북 리뷰 : 시선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주장들과 대단히 흥미로운 특별한 정보들. … 이 책은 400년 미국의 역사를 이해하고, 그것이 미국인과 온 인류에게 주는 “놀라운 교훈”을 발견하고자 하는 거장과의 만남이라는 드문 기회를 제공한다.
뉴스위크 : 거장다운 탐구. 흥미진진하고, 지적이며, 한편으로는 신랄하고 한편으로는 애정 넘친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 신선하고, 잘 읽히고, 도발적인 탐구서. 폴 존슨은 대단히 소신 있고 … 매우 지혜롭다.
아메리칸 스펙테이터 : 오늘날의 일치된 통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 어마어마한 열정, 풍부한 상상력, 넓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거의 언제나 정곡을 찌른다.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먼트 : 폴 존슨의 강렬하면서도 불손한 이야기는 오늘날의 그 어떤 이론가, 지식인입네 하는 비평가와 교수보다 역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쳐준다.
내셔널 리뷰 : 생생하고 기념비적인 저서. … 역사가 여전히 문학작품과 같을 수 있음을 입증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