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미완의 시대 : 에릭 홉스봄 자서전
에릭 홉스봄 / 민음사 / 2007.1.5
세계적인 석학 에릭 홉스봄의 자서전. 그가 직접 온몸으로 체험한 “가장 별스러운 시대” 혹은 “흥미로운 20세기”에 대하여 자서전이라는 형태를 빌려 기존의 저서에서 꺼내지 못한 생각과 특별한 경험들을 들려준다. 균형 있게 시대의 흐름을 잡아내는 역사가 홉스봄의 감각이 돋보이는 책.
모두 스물세 장으로 구성돼 있다. ‘프롤로그’에서 16장까지는 홉스봄 개인사가 정치와 맞물려 전개되고, 17장과 18장에서는 역사가로서의 홉스봄을 만날 수 있다. 19장부터 22장까지는 홉스봄과 특별한 인연을 맺었던 나라와 도시들 이야기다.

○ 목차
머리말: 가장 별스럽고 끔찍한 한 세기
- 프롤로그
- 빈과 유대인 소년
- 힘들었던 시절
- 베를린: 바이마르의 종식
- 베를린: 갈색과 빨간색
- 섬나라에서
- 케임브리지
- 반파시즘과 반전 투쟁
- 공산주의자가 되다
- 전쟁
- 냉전
- 스탈린과 그후
- 40대에 맞는 전환기
- 웨일스의 크니흐트 기슭
- 1960년대
- 정치 관람자
- 역사가들 속에서
- 지구촌에서
- 마르세예즈
- 프랑코에서 베를루스코니까지
- 제3세계
- 루스벨트에서 부시까지
- 에필로그
옮긴이의 말: 20세기는 흡스봄의 한 세기였다

○ 저자소개 : 에릭 홉스봄 (Eric John Ernest Hobsbawm)
영국의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1917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유태계인 영국인 아버지와 오스트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오스트리아를 거쳐 베를린에서 잠시 살았으나 히틀러가 집권하자 영국 런던으로 이주했다. 학창시절부터 이미 마르크스주의자임을 자임했던 그는 공산당원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케임브리지의 킹스 칼리지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뒤 1982년 정년퇴임 때까지 런던 대학 버크벡 칼리지에서 강의와 연구에 헌신했다.
영국 학술원과 미국학술원 특별회원이자 뉴욕 신사회조사연구원 교수, 버크벡칼리지 명예교수로 재직한바 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이면서도 경직된 이념에서 탈피하여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균형 잡힌 시각을 견지하여 자유자의자들이 가장 많이 읽는 마르크주의 저술가로 꼽히고 있다. 그는 정치·경제 분야는 물론 사회·문화·예술 등 현실 삶을 구성하는 제 양상을 총체적으로 다루면서, 시기적으로는 17세기에서 20세기까지를 아우르고, 지역적으로도 제3세계를 포괄하는 방대한 영역에 관심을 나타냈다. 또한 재즈를 저항과 민중의 예술로 보고 재즈 비평가로도 활동했다.
주요 저서로는 역사 3부작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를 비롯해서 『극단의 시대』, 『산업과 제국』, 『노동하는 사람들』, 『원초적 반란자들』, 『역사론』 등이 있다.
– 역자 : 이희재
서울대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독문학과 대학원을 수료했다. 영국 런던대학 SOAS (아시아아프리카대학)에서 영한 번역을 가르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칙센트미하이의 몰입과 진로』, 『소유의 종말』,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 『마음의 진화』, 『그린 마일』, 『마티스』, 『문명의 충돌』,『비트의 도시』 등이 있고, 지은 책으로는 『번역의 탄생』, 『번역전쟁』, 『국가부도 경제학』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던 해에 태어난 노쇠하고 회의적인 역사가의 눈에도 그것은 대량 학살, 훌륭하지만 신뢰할 수 없는 기술, 할리우드 영화를 방불케 하는 현실 속에서 신의 세력과 사탄의 세력이 온 세계에서 죽기 살기로 싸우는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선언 등 20세기의 가장 고약한 요소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삼류문사들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불행하게도 잘도 찾아서 내뱉으면서 서양 세계는 언론을 타는 사람들의 게거품에 휩쓸렸다. – 에필로그 중에서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던 해에 태어난 노쇠하고 회의적인 역사가의 눈에도 그것은 대량 학살, 훌륭하지만 신뢰할 수 없는 기술, 할리우드 영화를 방불케 하는 현실 속에서 신의 세력과 사탄의 세력이 온 세계에서 죽기 살기로 싸우는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선언 등 20세기의 가장 고약한 요소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삼류문사들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불행하게도 잘도 찾아서 내뱉으면서 서양 세계는 언론을 타는 사람들의 게거품에 휩쓸렸다. – 에필로그 중에서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사람으로 스스로를 생각하는 것이다. 내 경우로 말할 것 같으면 그것은 한 세기의 4분의 3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쌓인 지질학적 퇴적물을 벗겨내 그 속에 묻혀 있던 낯선 사람을 드러내거나 찾아내서 다시 뜯어맞추는 것을 뜻한다. – 103쪽
자전거야말로 구텐베르크 이후로 마르크스가 말한 인간의 가능성을 온전히 구현한 최대의 발명품, 그것도 단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발명품인지도 모른다. – 153쪽
여기서 공과 사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문제였다.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것과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었다. – 217쪽
1980년대 말, 그러니까 체제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동독의 한 극작가는 <원탁의 기사들>이라는 희곡을 썼다. 우리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기사 랜슬롯은 묻는다. ‘세상 사람들은 성배와 원탁에 대해 더 이상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 우리의 정의와 우리의 꿈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 나는 아직도 성배를 믿는 걸까, 하고 그는 자문한다. ‘모르겠다’ 랜슬롯은 말한다. ‘그런 물음에는 답을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하기도 그렇고 아니라고 하기도 그렇고…’ 아니, 우리는 성배를 영영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성배가 아니라 성배를 찾아 나서는 것이라는 아서 왕의 말은 옳지 않은가? ‘성배를 포기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다.’ 어디 포기하는 것이 우리 뿐이겠는가? 자유와 정의라는 이상 없이, 자유와 정의를 위해 생명을 바친 사람들 없이 인류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20세기에 실제로 그렇게 살다가 간 사람들을 기억조차 하지 않고 인류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 254쪽
소련이 점령한 중유럽에서 살았거나 그곳 현실을 직접 체험한 적이 있는 사람에게는 공산주의자로 남는다는 것은 전쟁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던 시절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우위에 있다는 신념과 확신도 그대로 있었고 공산주의 이념이 이 세상을 바꾸어놓으리라는 믿음도 여전했지만 우리의 희망, 아니 적어도 나의 희망은 발터 벤야민이 말한 파국이 기다리는 것을 알면서도 진보의 폭풍에 휘말려 날개를 접을 수 없는 ‘역사의 천사’처럼 불가피한 비극 의식과 맞닿아 있었다. 역설이라면 역설이었지만 예전의 신념을 그래도 쉽게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많은 사람의 경우에는 어렵사리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은 냉전 시대에 서방 어디에서나 기승을 떨치던 반공주의였다. – 298쪽
작은 위기가 잇따라 닥치다가 소련 군대의 헝가리 재점령이라는 끔찍한 사태로 절정에 이르렀고 다시 몇 달 동안 뜨거웠지만 결말은 뻔했던 논쟁을 거치면서 지칠 대로 지친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패배로 곤두박질친 그 악몽 같은 해의 분위기도, 기억도 이제 와서는 아련하기만 하다. 영국 극작가 아널드 웨스커가 쓴 <보리 닭고기 수프>는 공산주의 신념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유대인 노동자 집안의 이야기인데 이 희곡을 보면 ‘이념을 잃어버리는 아픔과 이념에 매달리는 아픔’이 얼마나 큰지를 실감할 수 있다. – 337쪽
1956년의 나라는 사람을 자서전 집필가의 눈이 아니라 역사가의 눈으로 되돌아 보았을 때 물론 당을 떠날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은 분명히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당에 남은 이유는 두 가지로 설명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잉글랜드에서 영국 젊은이로 공산주의에 입문한 것이 아니라 바이마르 공화국이 무너져갈 때 중유럽에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내가 공산당에 들어갔을 때만 하더라도 공산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그저 파시즘하고만 싸운다는 뜻이 아니었다. 세계 혁명을 위해 싸운다는 뜻이었다. … 하지만 정서적으로는 1932년 베를린에서 10대 소년으로 공산주의자가 되었기 때문에 제아무리 소련을 비판하고 회의한다 하더라도 세계 혁명과 그 거점이 10월 혁명에 대한 희망과 마치 탯줄처럼 단단히 이어져 있던 세대에 들어갔다. 성장한 곳의 풍토와 혁명 운동에 투신한 시기가 남들하고 달랐기 때문에 나는 홀가분하게 공산당을 박차고 나올 수가 없었다. … 역사가가 아니라 자서전을 쓰는 사람으로 돌아와서 말한다면 개인적 감정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그것은 자존심이었다. … 그래서 나는 남았다. – 357쪽
역사가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혁명은 혁명에서 쏟아져 나오는 무수히 많은 말을 통해 그 성격을 알 수 있는 법이다. 그것은 입으로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문자가 있는 사회에서는 글을 아는 남녀가 써내는 수많은 글로 나타난다. 이런 기준으로 따졌을 때 1968년 5월 혁명은 학생 혁명에 가까웠으나, 당시 파리 길거리에 나붙었던 벽보를 보았던 사람은 누구나 느꼈겠지만 거기에 적힌 문구로 보자면 혁명치고는 좀 묘한 혁명이었다. – 410쪽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한 사회주의냐 야만주의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사회주의에서 등을 돌린 것을 세계는 다시금 후회할 것이다. -459쪽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아직도 이렇게 속삭이는 작은 유령이 있다. ‘우리가 사는 이런 세상에서 마음 편히 지내서는 안 되지.’ 젊었을 때 내가 그 글을 열심히 읽었던 사람도 비슷한 말을 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 508쪽
생지옥은 미래형이 아닙니다. 그것이 존재한다면 이미 여기 있습니다. 같이 살아 있는 데서 만들어지는 우리의 일상생활이 지옥입니다. 그것을 견디는 길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길을 사람들은 쉽다고 생각합니다. 지옥을 받아들이고 지옥의 일부가 되는 것이지요. 지옥이 거기 있다는 생각이 더 이상 들지 않을 때까지요. 두 번째 길은 위험한데 늘 깨어 있어야 하고 배워야 합니다. 지옥의 한복판에서 지옥이 아닌 것을 찾고 알아보고 그것이 이어질 수 있도록 숨통을 터주는 것입니다.(이탈로 칼비노 재인용) – 584쪽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 672쪽
중유럽 사람들 속에서 나는 잉글랜드 사람이었고, 영국에서는 유럽에서 온 이민자였으며, 어디를 가도 유대인이었고 특히 이스라엘에서도 다른 곳에서 유대인이 받았을 법한 왕따를 당했다. … 심지어 나는 내가 접해본 나라들 안에서 정치적으로 소수파에 머물러 있던 공산주의자들 안에서도 상당히 오랫동안 별종 취급을 받았다. 개인으로서는 이것 때문에 살아가기가 고달팠지만 역사가에게 그것은 각별한 자산이었다. – 668쪽

○ 출판사 서평
- 왕따 유대인 + 별종 학자 & 코스모폴리탄 히스토리언
『미완의 시대』는 20세기를 이해하는 데 구십 평생을 바쳐온 홉스봄의 특별한 기록이다. 베를린 학창 시절에 히틀러의 태동을 지켜본 지식인이요 귀족 자녀들이 우글거리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유일한 촌놈이었던 홉스봄은 트라팔가 광장에서 버트런드 러셀과 함께 핵무기 확산 반대 시위를 벌였고, 아바나에서 체 게바라를 위해 통역을 해주었고, 부다페스트에서 소련의 스파이와 크리스마스 저녁을 함께 보냈고, 런던에서는 가짜 이름으로 재즈 비평가 노릇을 했다. 이집트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영국 국적을 가진 코스모폴리탄이지만 유럽 대륙에서는 잉글랜드인이요 영국에서는 유럽 이민자요, 어디에서나 유대인이었지만 이스라엘에서도 왕따를 당했다. 게다가 최고의 마르크스 학자였지만 그의 저서는 소련에서 판금되었고 유럽의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별종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홉스봄은 “개인으로서는 이것 때문에 살아가기가 고달팠지만 역사가에게 그것은 각별한 자산이었다.”(23장 「에필로그」) 라고 고백한다.
“홉스봄 자신을 향한 솔직한 질문들을 담은 독특한 정치 비망록” _《가디언》
- 우리 시대 대표 역사학자가 들려주는 가장 흥미로운 20세기
이 책은 모두 스물세 장이다. 프롤로그에서 16장까지는 홉스봄 개인사가 정치와 맞물려 전개되고, 17장과 18장에서는 역사가로서의 홉스봄을 만날 수 있다. 19장부터 22장까지는 홉스봄과 특별한 인연을 맺었던 나라와 도시들 이야기다. 영국과 미국은 물론이고 스페인, 이탈리아, 쿠바 등 여러 나라의 정치와 문화 얘기를 들려주는데, 특히 프랑스에 대한 홉스봄의 애착은 남다르다. 사춘기 시절 루브르에서 마네의 「올랭피아」의 대담한 시선에 압도당하여 옴짝달싹 못하던 기억부터 시작하여 1936년 프랑스 역사상 최초 사회주의 정권이었던 인민전선의 총선 승리가 불러온 거리의 환희, 브로델과 아날학파 역사가들에 대한 추억, 그리고 결론은 “이재에 밝았던 벤저민 프랭클린의 언어가 세계를 정복하면서 교양 있는 볼테르의 언어가 패배한 데서 프랑스인이 느끼는 상실감이 얼마나 큰지 나는 공감한다.”라는 안타까운 결론으로 맺는다.
“역사가들의 삶은 대체로 지루하지만 홉스봄은 완벽한 예외다.” _ 닐 퍼거슨(『제국』의 저자)
- 가장 별스럽고 끔찍한 시대 or 미완의 시대
이 책의 원제는 “Interesting Times”다. 이것의 기원은 중국인데 실은 저주의 뜻이 담긴 문장에서 비롯된 아이러니컬한 표현으로, 영어책 제목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지만 한국말로는 그 뉘앙스를 충분히 전달하기가 힘들다. 양차 세계대전과 물질만능주의는 20세기를 가장 “별스럽고 끔찍한 시대”로 만들었고, 홉스봄은 자신이 몸담고 살아온 이 시대를 그저 호기심과 흥미의 대상으로 관찰만 한 것이 아니라 더 좋게 다듬어 나갈 수 있는 실천의 대상으로 여기고 현실 속으로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외쳤다. “홉스봄에게 역사와 시대는 인간이 참여하여 만들어 나가야 할 미완의 것이었다.”(「옮긴이의 말」) 『미완의 시대』에서는 이런 홉스봄의 열망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저자는 「에필로그」를 이렇게 마무리한다. “그렇지만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의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 재즈와 정치… 개인의 경험을 통해 그려낸 아주 특별한 20세기
재즈에 심취했던 홉스봄은 《뉴 스테이츠먼》에서 가짜 이름으로 재즈 비평가 노릇을 했고, 마할리아 잭슨이나 베니 굿먼과의 만남을 잊을 수 없는 영광으로 생각한다. “나는 교수로 살아오면서 20세기 말의 양대 문화 중심 도시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거기서 가르쳤다는 행운을 누렸다. 런던에서는 대영박물관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연구실이 있었고, 뉴욕에서는 맨해튼에서 제일가는 재즈 클럽 브래들리스가 있는 그리니치빌리지에서 살았다.” 재즈에 대한 홉스봄의 사랑은 이렇게 시작된다. “첫사랑을 느낄 만한 열여섯 아니면 열일곱 살 무렵에 나는 이렇게 음악의 계시를 받았다. 내 경우에는 재즈가 첫사랑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외모가 워낙 자신이 없다 보니 나는 보나마나 인기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그래서 의도적으로 육체적 관능과 성욕을 억눌렀다. 지적 유희와 말에 온통 점령당한 나의 삶에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절대적 감성을 심어준 것은 바로 재즈였다.”(6장 「섬나라에서」) 하지만 당시 재즈는 미국을 아는 통로였고, 당연히 인권 운동으로도 이어졌다. “미국에서 민권 운동이 격화되고 유색인이 영국으로 한꺼번에 밀려들어오면서 인종주의는 좌파 진영에서 시급한 대책을 요구하는 화두로 떠올랐다. 1958년 이른바 노팅힐 인종 폭동이 벌어지고 나서 나는 영국에서 벌어진 초창기 반인종주의 운동의 하나인 ‘인종 화합을 위한 스타 운동’에 재즈를 통해 관여했다.”(13장 「40대에 맞는 전환기」) 지금도 홉스봄은 웨일스에 별장을 두고 헤이온와이의 문학 축제와 브리콘 재즈 페스티벌 사이에서 문화 인텔리겐차 노릇을 톡톡히 하며 살아가고 있다.
- 베를린에서 히틀러의 부상을 지켜본 유대인, 공산주의자가 되다
홉스봄은 1936년 케임브리지 시절 공산당에 가입하여 1991년 해체되기 얼마 전까지 남아 있었던 “후회하지 않는 공산주의자”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을 때 베를린의 평범한 학생이었던 홉스봄은 자신이 역사의 전환기에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치 바깥에 있기란 불가능했다.” 몇 달간의 이 베를린 생활 때문에 홉스봄은 평생의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독일에서 홉스봄과 같은 청년에게 좌파 말고는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자유주의는 이미 실패했고, 홉스봄 자신도 만약 유대인이 아니었다면 분위기상 자신도 나치 민족주의자가 되었을 거라고 회상한다. 그때는 누구나 세상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던 시대였다. 2차 세계대전은 5000만 명의 희생을 초래했지만, 그것은 히틀러를 물리치는 대가였다. 소련 공산 정권의 학살을 축소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과거에도 새로운 시대의 탄생은 늘 희생을 동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렇게 수백만의 생명이 희생된다 해도 마르크스 유토피아는 그만 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당시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그 믿음이야말로 바로 히틀러에 대항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였다. 홉스봄은 자신이 공산주의에 빨려든 이유를 이렇게 나열한다. 피억압자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된 “집단 황홀경”과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완벽하고 총체적인 지적 체계가 주는 미학적 매력, 새로운 예루살렘을 염원하던 시인 블레이크와 비슷한 약간의 소망, 속물근성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지적 혐오감이다.(5장 「베를린:갈색과 빨간색」) 특히 집단 황홀경은 종교적인 경험 이상이라고 소개한다. 프랑스 좌파의 거국적 시위였던 1936년 레퓌블리크 광장 동쪽에서 벌어진 바스티유 함락 기념일의 기억을 홉스봄은 이렇게 기록한다. “몸을 파는 거리의 여자들까지도 몰려나와서 누구보다도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다.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몸에 판단에 모든 것을 맡기는 보기 드문 경험을 그날 했다. 나는 그저 느끼고 겪었다. 그날 밤 우리는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파리의 밤하늘을 수놓은 불꽃놀이를 구경했다. 한바탕 잔치가 끝나고 나서 나는 길모퉁이에서마다 벌어지던 춤판에 끼어들어서 춤도 추고 술도 마시면서 마치 구름 위에 두둥실 뜬 것처럼 파리 시내를 느릿느릿 걸었다. 하숙집으로 돌아오니 먼동이 트고 있었다.”(19장 「마르세예즈」)

- 20세기 대표 역사학자의 현실 비판
홉스봄이 요즘은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현 노동당 정부가 너무 시장 논리 일변도로 기운다고 비판하지만, 실은 블레어가 정권 창출보다는 당내 기득권에 집착하는 강경 좌파 세력을 누르고 노동당 당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홉스봄의 도움이 컸다. 홉스봄은 1960-1970년대에 노동당이 정권을 잡았을 때도 무조건 파업을 주도한 강경 좌파의 노선이 지속되는 한 영국 노동 운동의 미래는 암울하다고 지적하면서 집권 노동당 정부가 단순히 불만족스러운 차원을 넘어서서 마치 보수당보다도 더 나쁘기라도 한 것처럼 몰아대는 비타협적 노조 지도부를 비판했다. 홉스봄의 우려는 현실화되어 그 뒤 노동당은 18년 동안 보수당에 정권을 내준다. 산업 노동자가 갈수록 줄어드는 현실을 무시하고 “겁쟁이는 물러서고 배신자는 비웃어라, 우리는 남아서 붉은 깃발을 휘날릴 테니.” 식의 막무가내 노선에 누구보다도 왼쪽에 서 있었던 원로 공산주의자가 일침을 가하자 노동당 강경파는 타격을 받았고 토니 블레어를 중심으로 한 노동당 내 개혁 소장파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마침내 당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유대인에 대한 홉스봄의 입장 또한 남다르다. 그는 호전적인 이스라엘 민족이 작은 땅덩어리 안에 모여 살기보다는 흩어져 사는 것이 오히려 인류를 위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선택받았거나 특별한 민족이라는 주장이 조금이라도 정당하다면 그것은 과거나 현재 또는 미래에 자의에 의해서건 타의에 의해서건 그 부족이 모여 살았던 게토나 집단 거주 구역 안에서 이루어진 업적 때문이 아니라 유대인이 게토를 떠나도록 허락받았거나 스스로 떠나는 쪽을 선택한 이후로 주로 두 세기 동안 드넓은 세계에서 그들이 인류를 위해 이룩한 괄목할 만한 업적 덕분이라고 생각한다.”(2장 「빈과 유대인 소년」) 홉스봄의 자서전은 의미심장하게도 2001년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지는 시점에서 끝난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의심 많은 역사가”가 필요할 때라고 결론 맺는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던 해에 태어난 노쇠하고 회의적인 역사가의 눈에도 그것은 대량 학살, 훌륭하지만 신뢰할 수 없는 기술, 할리우드 영화를 방불케 하는 현실 속에서 신의 세력과 사탄의 세력이 온 세계에서 죽기 살기로 싸우는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선언 등 20세기의 가장 고약한 요소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삼류문사들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불행하게도 잘도 찾아서 내뱉으면서 서양 세계는 언론을 타는 사람들의 게거품에 휩쓸렸다.”(「에필로그」)
- 정치적 우파 독자도 신중히 읽어야 할 몇 안 되는 좌파 역사가 _ 스튜어트 홀(오픈 대학교 사회학)
홉스봄에게 역사란 세계를 변화시키는 메커니즘을 발견하는 것이다. 홉스봄에게 마르크스주의는 역사를 해석하는 도구였지만, 홉스봄이 공산당의 노선을 따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홉스봄은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해인 1917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폴란드계 영국인 유대인 아버지와 오스트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당시 적국의 국민으로 만난 부모님은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어느 쪽 나라에서도 살지 못하고 중립국인 스위스에 머물러야 했던 것이다. 홉스봄은 빈과 베를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대공황 통에 고아가 되어 친척 집에 얹혀살다가 열세 살에 혼자 영국으로 건너간다. “지지리도 안 풀리는 집안”에서 자랐지만, 어릴 적부터 똘똘했던 홉스봄이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 킹스칼리지에서는 “모르는 것이 없는 신입생이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렇게 세간의 이목을 받던 홉스봄이 선택한 것은 역사학이었고 페이비어니즘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공산당원”이었기에 모교의 강단에 서지 못하고 1947년 런더 대학교 버베크칼리지 사회경제사 교수를 거쳐, 1982년 이후로는 스탠퍼드, MIT, 코넬, 그리고 뉴스쿨 대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경제학자 로버트 하일브로이너는 홉스봄을 두고 “역사에 대해 이토록 명쾌한 설명으로 미래를 조망할 수 있도록 해주는” 학자도 없을 것이라고 평했다. 홉스봄 자신은 “전문가들이 득세하는 세계에서 주류에 반대하는 길을 걸었고, 독일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 여러 언어에 능한 코스모폴리탄이었으며, 못 배운 노동자들에게 정치적, 학문적 관심을 쏟아 부었던 지식인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런 홉스봄에게 《르 몽드》는 “페르낭 브로델에 버금가는 깊이를 보이는 석학”이라고 격찬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