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바울종교의 기원
J. G. 메이첸 / 도서출판 베다니 / 1996.9.30
본서의 의도는 어떤 특별한 관점하에서 기독교의 기원문제를 취급하려는 것이다. 그 문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제인 동시에 실제적으로도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이 (기독교의 기원문제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되는 이유는, 기독교가 중세와 근세에서 차지해 온 비중이 막중했을 뿐 아니라, 아무리 냉정하고 피상적으로 연구해 보더라도 기독교운동의 초기에는 어떤 독특한 특징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기원문제는 또한 실제적으로도 중요한 문제이다. 좋든 나쁘든, 기독교경험은 보통 기독교 운동의 기원에 관한 하나의 특정한 관념과 연관되어 왔었는데, 그 관념이 포기되어졌을 때, 그 경험도 없어졌다.
기독교는 그 기원과 그 창설자에 관한 어느 특정한 개념에 의존한다는 사상은 오늘날 맹렬한 공격의 표적이 되고 있다. 이 생각은 사실 널리 펴져 있지만 결코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독교의 기원에 관한 문제는 도리어 기독교의 진리문제라고 불리워져야 하며 이 문제는 그들에게 생활상의 가장 중요한 실제적 문제이다.
최근에는 기독교 기원에 관한 논의를 사도바울에다 기초를 두는 것이 하나의 관습처럼 되고 있다. 확실히 바울의 증언은 기독교의 기원문제에 중요하게 관련되어 있다. 바울은 예수와 동시대의 사람이었다. 이와같이 기독교 기원의 문제는 바울의 증언을 출입구로 삼아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문제에 접근하는 유일한 길은 아니다. 또 다른 하나의 길은 예수의 인격을 그리고 있는 복음서가 제공해 준다. 더욱이 복음서의 예수는 어떤 고귀한 사상을 주창하는 자로서 묘사되어 있다. 그는 그 자신을, 하늘의 구름을 타고와서 세상을 심판하는 자로서 예정되었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기독교기원에 관한 근본적인 증거는 이중적이다. 즉 복음서의 예수와 바울의 종교가 해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 목차
제1장 서론
제2장 개종이전
제3장 이방인의 자유의 승리
제4장 바울과 예수
제5장 유대적 환경
제6장 헬레니즘 시대의 종교
제7장 이교종교의 속죄관과 바울의 속죄관
제8장 예수의 주 되심
○ 저자소개 : J. G. 메이첸
1881년 7월 28일 미국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서 태어났다. 장로교 출신인 어머니의 지도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배우며 정통 장로교 신앙 안에서 성장했다. 존스홉킨스 대학과 프린스턴 신학교를 거쳐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 괴팅겐 대학에서 공부했다. 당시 유명한 신학자였던 빌헬름 헤르만의 자유주의 신학에 영향을 받아 신학적 정체성에 혼동을 겪었지만, 결국 프린스턴의 정통 신학으로 되돌아왔다. 메이첸은 1906년부터 23년간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약학을 가르치며 여러 신약학 관련 저술을 남겼으나, 무엇보다 당시 교계에 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경고의 목소리를 발하는 데 힘을 쏟았다. 1929년 프린스턴 신학교가 기존의 전통에서 이탈하자 교수직을 사임하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했으며, 1936년 자유주의적 인사들에 의해 주도되던 미국북장로교회(PCUSA)를 떠나 정통장로교회(OPC)를 설립했다. 그러던 중 설교를 위해 미국 노스다코타에 갔다가 폐렴을 얻어, 1937년 1월 1일 5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기독교와 자유주의』(1923)를 출간하면서, 미국장로교회의 ‘신학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 정통 기독교를 수호하려던 그의 노력이 ‘편협한 근본주의’로 오해되거나 폄하되어 왔지만, 그는 “고백적 장로교인”이자 미국장로교 신학의 정통적인 계승자였다.
저서로는 『바울 종교의 기원』(1921), 『신약 헬라어』(1923), 『기독교와 자유주의』(1923) 『믿음이란 무엇인가』(1925),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1930), 『기독교와 현대신앙』 (1936), 『기독교 인간관』(1937) 등이 있다.
– 역자 : 김남식
○ 사도 바울에 대한 J. G. Machen과 김세윤의 이해 연구: ‘바울 종교의 기원’과 ‘바울 복음의 기원’을 중심으로 _ 고경태 (Kyungtae Ko)
본 논문은 메이천의 ‘바울 종교의 기원’과 김세윤의 ‘바울복음의 기원’을 비교하는 것이다. 전자는 1921년에 메이천의 첫 저작이고, 후자는 1981년에 김세윤의 박사논문이다. 두 신학자는 공통적으로 바울 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갖는다. 김세윤의 박사논문을 지도했던 브루스는 두 작품이 서로 각자의 시대에 큰 공로로 한 것으로 서평을 섰다. 이 논문에서는 브루스의 평가를 거부한다. 그것은 두 신학자의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메이천은 바울신학으로 기독교의 기원을 연구하는 것이고, 김세윤은 발트 신학에서 없는 바울 복음의 기원을 보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바울의 회심 전의 상태에 대한 이해에서 두 신학자가 다르다. 메이천은 자유주의에 대항해서 바울을 팔레스타인 유대인으로 바리새인으로 주장했다. 김세윤은 큄멜과 케제만을 따라서 샴마이 학파로 묵시문학의 신학자로 제시했다. 메이천은 바울이 다소에서 출생하였지만 팔레스타인 유대인으로 강경한 바리새인으로 주장했다. 그리고 예수 이전과 당대의 유대교와 유대묵시 문학과 연관성을 거부했다. 김세윤은 바울이 관용적인 힐렐 학파가 아니라 강경한 샴마이 학파이며, 묵시문학의 신학자로 연관성을 제시했다. 그들은 회심 전이해에서, 유대교와 연관성에 거부와 승인을 각각 다르게 주장하였다. 둘째,다메섹 경험에 대한 평가이다. 메이천은 천상의 예수로 인한 독특한 중생 사건이고, 김세윤 계시와 소명의 사건이다. 셋째, 회심직후 바울이 갖은 아라비아광야 3년과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일치이다. 메이천은 바울이 3년 동안 거주했던 아라비아 광야 생활을 정확한 기간을 2년으로 추측했다. 그리고 광야에서 묵상을 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김세윤은 광야에서 복음 전도 활동을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메이천은 베드로와 바울이 동일한 믿음과 예수를 아는지식이 있었다고 꾸준히 주장했다. 넷째,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에 대해서, 메이천은 종교의 대상으로 믿었고, 김세윤은 바른 계시 전달자로 깨달았다. 메이천은 바울이 예수를 천상의 구속주로 믿음의 대상으로 순종했다. 김세윤은 바울이 예수를 의의 교사로 참된 교사로 따랐다. 메이천은 종교와 신학은 동일하다고 주장했기에, 그의 바울신학은 바울의종교이다. 메이천은 바울이 천상의 구속주를 믿고 경배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세윤은 바울이 예수가 참이라는 것과 마지막 시대(파루시아)에 다시 올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울이 예수를 계시자로 이해하였고, 마지막시대에 최종적 구원을 이룰 것을 기대했다. 바울신학에서, 메이천은 종교와 신학이고, 김세윤에게는 신학뿐이다. 그러므로 메이천의『바울 종교의 기원』과김세윤의『바울 복음의 기원』은 전혀 다른 신학이다. 또한 브루스가 두 신학자에 대한 연관성의 평가는 틀렸다. _ 고경태 (Kyungtae Ko), 개혁신학회 개혁논총 26권, 2013
○ 독자의 평 1
이 책은 쉽지는 않았다. 메이천 박사는 어려운 내용의 글을 참 쉽게 쓰는 미덕을 지녔다고 느껴왔으나, 이 책은 상당히 전문적인 깊이를 요구하는 신학적 논증들을 다루고 있어서 힘들게 다 읽을수 있었다. 기독신앙에 대적하는 현대 불신자들의 난잡한 비평에 대한,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저자의 변증에 대해 경의를 느낀다.
이미 우리 시대에 필요한 모든 기독교 변증이 메이천 박사의 헌신을 통해서 20세기 초반에 대부분 다 정리되고 완성되어졌다. 문제는 이 시대가 더 이상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조차도 찾아보기 힘든 시대가 된 것 같다. 그가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헌신적으로 싸웠는지, 그의 삶이 우리에게 어떤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 이해하는 사람도 거의 드물런지 모른다. 한 마디로 이 시대의 기독교는 그가 싸워야만 했던 문제와 그 이유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무관심과 냉소의 시대가 된 것이다. 나는 그것이 우리 시대의 기독교를 서글프게 만드는 근본원인인 것 같다.
기독교 변증학에서 어떤 논제들이 어떤 식으로 다루어지는지에 관한 한, 이 책에서 아주 잘 배울 수 있었다. 나는 오늘날에도 메이천 박사가 이 분야에서 최고의 스승이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현대신학자들에 의해서 바울의 기독교 신학은 ‘뭔가 왜곡된 것’으로 취급당해졌고, 역사적 예수의 삶과 그의 본래 의도와는 상당히 단절된 것이라 하여 매도당하고 배격당해 왔다.
메이천 박사는 그러한 비평들에 대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자료 검증을 통하여 바울 신학의 진실성을 변증해 나간다. 바울 신학과 초대 예루살렘 사도들과의 관계, 서신서와 복음서와의 긴밀한 일치성, 바울 신학과 동시대 유대교 및 이교종교와의 관계 등에 관한 논증이 빈틈없이 전개되어 나간다. 기독교 신학의 가장 정교하고 세련된 공격자들에 대한 빈틈없는 방어가 어떻게 이루어져 나가는지, 관심있는 독자들은 주목하여 지켜볼 만하다. 다만 아쉬운 점은,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고 여기저기에 오자와 잘못된 문장들이 눈에 띄어 읽기가 더욱 힘들었다는 점이다.
○ 독자의 평 2 : 2장 요약
제2장 개종 이전 (p.58-92)
- 다소의 바울
2장에서는 바울 생애의 개요를 다루려는데, 바울의 사상과 체험의 기원을 밝힐 단서를 찾기 위해서 고찰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논의하려는 문제는 세계와 바울과의 접촉의 성격, 유대적이고도 이교적인 특징, 특히 예수와 예수의 최초 제자들과의 바울의 접촉 성격 등을 규정하고 있는 바울 생애의 사건들만을 문제 삼을 것이다.
바울은 길리기아의 수도 다소에서 태어났다. 다소는 중요 도시였다. 그 도시의 상업성은 안디옥이나 고린도보다 못하였지만 상당한 것이었다. 또한 다소는 지적생활의 중심으로서도 유명하였는데, 대학도시여서 스토아 철학자 아테노도루스와 그 외 다른 위인의 이름을 자랑할 수 있었다.
다소에서 바울 집안의 사회적 지위는 아버지가 로마 시민권을 소유하였다. 로마시민권은 1세기에는 높이 평가되었던 특권으로 대다수의 민중은 시민권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바울의 로마시민권은 사도행전의 기술로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헬라 대학 도시에서의 탄생과 로마 시민권은 바울을 동시대의 광범위한 이방 세계와 일찍부터 연결시키는 두 가지 사실이 되었다.
또 다른 사실은 그가 어릴 때부터 이방인 세계에서 엄격히 분리되어 줄곧 유대인이었던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사도행전 뿐 아니라 바울서신, 고린도후서11:22에서 바울은 히브리인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빌립보서3:5에서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구절에 나타나는 히브리인이라는 단어는 단지 이스라엘의 자손이라든지 유대 종교의 일반적 귀의자를 지적하는데 한정 될 수 없다. 유대인 사회 내부에서 헬라인이 히브리인과 구별되었으니, 즉 헬라파는 헬라어를 말하는 흩어진 유대인이고, 히브리파는 아람어를 말하는 팔레스틴의 유대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빌립보서3:5에서 자기가 아람어를 말하는 유대인이고, 또한 아람어를 말하는 유대인의 자손이라는 것을 명백히 선언하고 있다. 아람어는 바울이 소년 시절에 가장 일상적인 용어였으며, 또 팔레스틴의 전통이 보존되어있는 것이었다. 바울은 다소에서 태어났지만, 그 가정 전통의 본질적 특성에 있어서는 팔레스틴 유대인이었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바울이 율법을 바리새인으로서 가르친 자로서 표현된다는 사실이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1:14절에서 그는 유대의 종교에 있어서는 그 당시 동시대의 많은 다른 사람을 능가하여 조상의 전승에 더욱 광적으로 열심이었다고 말할 때, 조상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해석이 되어지든 간에, 바울의 소년기 가정에서 배양된 바리새적 전통에 관한 언급을 발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바울 자신이 그는 언어적으로 보나 영적으로 보나 헬라 유대인이라기 보다 팔레스틴 유대인이었으며, 율법에 관한한 바리새인이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은 젊을 때 예루살렘에 가서 거기서 유명한 랍비 가말리엘에게 가르침을 받고, 마침내는 그의 회심 직전까지 예루살렘 교회를 핍박하였다(행22:7, 7:58, 8:1, 15:1).
자유주의자들(몸젠, 뷰셑, 하이트뮬러, 로이지)은 바울의 예루살렘 초기 거주설을 부인한다. 이러한 부정은 그들의 바울적 그리스도론의 기원을 설명에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예수를 인간의 속죄를 위해 지상에 온 초자연적인 인물로 여겼으며, 신적 그리스도에 대하여 명확하게 종교적 태도를 취하였다.
바울이 어떻게 해서 불과 몇 년 전에 죽은 한사람에 대해서 그러한 개념을 형성할 수 있었을까? 바울과 예수는 동시대의 인물인데, 바울에게는 예수의 인간적 특성이 완전히 제거되어 신적 속죄주로 간주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래서 자유주의자들은 일종의 지리적 장애물을 설정함으로서 바울적 그리스도론의 형성을 더욱 이해하기 쉽도록 만들었다. 바울도 대개의 경우처럼, 팔레스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바울 자신처럼 예수를 한 번도 만난일이 없는 사람들과 교제하고 살았기 때문에, 참 예수를 알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지나친 것처럼 보이고, 불합리한 것처럼 보이는 갈릴리 선생의 속성에 대해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 회심 이전의 바울
예루살렘에 거주한 바울.
바울의 예루살렘 거주론은 사도행전에 의해서 강력히 입증된다. 바울이 스데반을 돌로 칠 때에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이 신빙성을 말해주는 모든 징표의 구체적인 형태로 사도행전에서 이야기되고 있다.
바울 누이의 자식이 예루살렘에 있었다는 사실(행23:16-22)은 그 친족 관계가 바울의 그 도시에서의 거주생활에 편의를 제공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마지막으로 바울의 회심 사건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다메섹으로 가는 바울의 여행중으로 잡고 있는데, 갈라디아서와 사도행전의 설명이 이를 확증시켜주고 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울의 예루살렘 거주론을 입증하고 있다.
명백한 증거는 갈라디아서1:22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바울은 회심 후 3년이 지나 시리아와 길리기아를 출발하던 무렵에 그리스도 안에 함께 한 모든 유대 교회에 안면이 없었다고 말하였다. 자유주의자들은 만일 바울이 그 지방의 교회를 적극적으로 박해하는 일에 참여하였더라면 어떻게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겠느냐? 라고 논쟁한다.
그러나 바울이 유대교회에 대한 지식이 단순히 소문정도의 지식이었다면, 지방교회의 교인들이 박해자 바울에 대한 기억은 희미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갈 1:22에 나오는 유대라는 말이 예루살렘 모두를 포함하지는 않는다. 유대란 수도 외부의 지방이란 뜻이다(막 3:7-8).
그래서, 바울의 초기(회심 이전) 예루살렘 거주론은 사도행전에 의해 강력히 입증되고 있고, 바울이 그의 지난날의 바리새적 이력에 대해 이야기한 모든 것과 완전히 조화를 이룬다.
바울의 예루살렘에서의 교육은 어린 시절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청년기 초기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다. 바울이 헬라어를 능숙하게 사용한 것이 예루살렘 거주론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1세기의 팔레스틴은 2개 국어를 사용하는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을 늘 명심해야 한다. 예루살렘에도 헬라어를 말하는 일반 유대인들이 살던 것을 사도행전 첫 부분에서 확인 할수 있다. 게다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공부를 시작하고서도 다소와의 관계가 없어졌다고 할 수 없다. 두 도시사이의 거리는 꽤 멀었지만 당시의 여행은 안전했고 용이했다. 예루살렘에서 교육을 받았던 시기를 지나서는 다소에서 오랫동안 거주했을 것이다.
바울은 십자가 이전에 예수를 본 적이 있는가?
바울은 십자가 수난 이전의 예수를 본 적이 있었던가?
이것은 사도행전이나 바울서신에 나타난 실제적 증언에 근거하여 말할 수 있다. 하나의 성경 구절이 그와 같은 증언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린도후서 5:16절에 바울은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를 육체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더 이상 이같이 알지 아니 하노라”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를 육으로 알았었지만, 그러나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그를 그렇게 알지 않는다” 그래서 육으로 아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바울의 체험에 있어서 현실적 사실로 간주되고 있다. 그것은 바울도 그리스도와 동시대 사람들이 갈릴리나 예루살렘 등지에서 그리스도를 알았던 것과 같은 식으로 그리스도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와 같은 식으로 아는 지식의 양식은 그것 자체가 전혀 영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바울은 말한다.
수난 이전에 바울이 예수와 어떠한 면식 관계를 가졌나 하는 것을 명확하게 암시하지는 않는다. 바울이 예수를 수난 이전에 보았다고 추정할 만한 어떤 명백한 증거도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하다. 비록 바울이 예수를 팔레스틴에서 결코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할지라도, 그가 예수에 관해 듣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예수의 전도는 갈릴리에서나 예루살렘에서나 상당한 소동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회심전의 바울이 교회를 박해할 그 당시에, 예수의 생과 죽음에 관해 대략이나마 알지 못했을 리가 없다. 바울이 회심 이전이라고는 하지만, 그가 예수의 지상 생활을 전적으로 몰랐다고 규정짓는 것은 기가 막히는 역사 감각이 결여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가 바울을 불렀을 때, 그는 율법에 매우 열중하여 있을 때였다. 복음이 인간적인 중개 없이 바울에게 임했다. 바울은 고백하기를 자신이 회심하기 이전에 어떠한 인간적 중개도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적극적인 박해자였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바울은 아무 것도 모르고 박해했다(딤전 1:13)고 명백히 말하고 있다. 그가 교회를 박해 할 때,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어떤 간섭도 없이 한창 교회를 박해하고 있을 때 주가 그에게 나타나서 복음을 주었다고 말한다. 바울은 매우 절대적인 태도를 일시에 극복할 수 있었던 바로 그 나타냄의 증거력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바울의 자기 증언이다. 그것은 회심을 심리적 과정의 결과로 보려는 모든 시도들 위에 일격을 가하는 것이 된다.
현대의 학자들은 인격의 비밀에 관해 몇 마디의 일반적인 관찰평으로 회심의 심리학적 문제를 처리하려 하고 있으며, 또 그것에 대해 만족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 실정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직접적 개입이 거부되어온 이상, 다메섹 체험에는 어떤 심리적 준비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그 준비는 영혼의 밑바닥에 깊이 잠재하여 어떠한 심리적 분석으로도 완전히 밝혀낼 수 없는 그런 것들이라고들 한다.
홀스텐에 의하면, 그 분석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찰을 중심으로 한다. 바울의 입장에서 십자가는 수치스런 것이었고, 메시야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모독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부활이 십자가 장벽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바리새적 교육에 의해 부활 가능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홀스텐에 의하면 바울의 심리는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대리 수난의 범주에 적용시킴으로서 십자가의 장애를 이미 제거하였고, 문제는 부활 사실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확신이 다메섹 체험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제껏 불안정한 바울의 마음의 상태가 끝났다는 것이다.
바울적 복음의 요소는 그것 모두가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즉시로 그것들이 본래부터 있어야 할 장소에 아주 자리를 잡게 되었다.
- 다메섹 도상
회심을 설명하는 또 하나의 것은 로마서 7장과 바울이 율법 아래에서 체험했다고 생각 되어지는 불만족감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바울은 바리새인으로 율법이 모든 노력으로 복종하였으나 만족을 얻지 못하고 죄의식의 가책을 받았다. 이 죄의식으로 더 열심히 제자들을 박해하였다. 허나 바울의 비참함이 ‘예수 제자들이 옳다면?’이라는 의혹들을 그의 마음 가운데 끊임없이 일게 하였다. 그래서 그 율법이 그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었다. 그는 이미 환상을 볼 준비가 다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바울의 의식에 영향을 끼친 것은 제자들의 품성이었다. 그들은 박해받으면서도 기쁨과 사랑의 정열이 솟고 신앙의 강건함을 유지했던 것이다.
그런데 베이슐락은 홀스텐에 반대하여 지적하면서 바울이 부활에 대한 증거 앞에 속수무책이었다는 지적은 바르지 못하다고 했다. 바리새인의 부활은 오직 종말에만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부활은 결코 자명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죄의식이 바울로 구주를 영접하도록 했다는데 회심 전 바울이 진실로 죄의 회오 아래 있었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이 제자들의 용감성에 호감을 느꼈다는 설은 지극히 수용하기가 곤란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새로운 해석과 새로운 태도로 변하게 했을까?
바울이 경험한 다메섹 체험은 무엇이었나?
그것이 만약 환각이었다면 바울이 삶을 그렇게 엄청나게 바꿀 리가 없다.
한 번의 만남이 인상이 전혀 딴 판으로 변화시키는데 충분한 경우가 적지 않다. 인격과 인격의 접촉이란 보통의 상황 속에서 행해져도 아주 신비스런 일이다.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 한 인물이 나타난다.
때때로 그 사건은 부활의 사실에 대해서 신앙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단순한 표적으로서, 즉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으로서 인식되어왔다. 확실히 그것은 표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표적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인격과 인격의 접촉이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것은 환상도 아니요, 단순한 표적도 아닌 진실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 사건이 진실로 예수를 만난 사건이라면, 그리고 하나님의 영의 힘으로 바울의 마음이 새로워졌다면, 바울은 예수의 얼굴을 보는 순간 또한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미움이 사랑으로 변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은 구주의 인간적 현현으로 바울의 생애를 전환시키려할 때, 아무가치 없는 도구를 결코 사용하시지 않았다. 바울은 인간에게서 받았던 어떠한 가르침에 의해서도 회심하지 않았다. 그는 보통 크리스챤들이 회심하는 방법으로 회심하지 않았다. 즉, 진리의 가르침이나, 예수의 추종자들의 삶속에 내포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해서 회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보통의 경우에는 예수가 제정하신 방법을 통해서 하지만, 바울의 경우에는 예수 자신이 가시적 현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회심의 직접성에 기초하여 바울은 그의 전 생애를 기꺼이 헌신하였다. 또한 그것에 기초하여 그는 그의 사도적 권위를 세웠다.
○ 독자의 평 3 : 4~6장 요약
제4장 바울과 예수 (117-169/번역본 150-218)
‘바울과 예수’, ‘예수와 바울’에서 메이첸은 ‘바울과 예수’로 제시했다. 이것은 바울을 통해서 예수를 증거하는 논증방식을 취하기 때문이다.’바울 종교의 기원’은 바울의 종교(믿음)에서 ‘예수’를 논증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확증하였다. 예수는 기독교의 기원이며, 사도들과 바울은 변함없이 초기부터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예수의 가르침과 대치되지도 않는다.
[바울 종교의 기원: 예수, 예수의 참된 제자: 바울]
바울 종교의 기원은 예수이다. 바울은 종교적 철학자 (a religious philosopher)가 아니라 예수의 증인 (a witness of Jesus)이었다. 바울이 예수의 참된 제자로서, 그의 권위와 모든 가르침을 소유했다. 바울은 서신에서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여겼고, 모든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행했음’과 ‘그리스도께서 계속해서 행하심’이 근본이었다 (Christ had done and what Christ was continuing to do, 참고 갈 2:20). 바울이 고백한 “그리스도”는 자기가 알고 있었던 “나사렛 예수”였다. 바울의 변화는 “역사적 인물”에 국한되었던 “부활한 주”이다. 부활한 주의 인격이 ‘그리스도’이다. 바울은 최고의 칭호인 주(主)를 십자가의 예수에게 적용하며, ‘영광의 주(主)’로 찬양했다. 영광의 주께서 종의 생활로 팔레스타인에서 살았지만 언제나 천지만물에게 경배를 받을 합당한 주이시다(고전 2:8, 빌 2:10-11).
[그노시스, 케노시스와 비교할 수 없는 바울 종교의 기원]
바울서신에서는 그노시스 (영지주의, gnosticism)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영지주의는 역사적 예수와 신적인 주로서 그리스도를 분리하는 것이다. 몰간 (W. Morgan)은 인간 예수의 신성의 발전을 주장하는 양자론적 그리스도론(adoptionist Christology)의 주장을 일각했다. 메이첸은 바울이 예수를 세계 창조의 실행자 (the instrument in the creation of the world)로 이해했다고 하였다. 또한 바울에게 케노시스 (kenosis, 자기비움, 자기허기)와 연관된 흔적은 전혀 없다. 케노시스에서는 지상의 예수가 높은 본성을 포기하여 천상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으로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바울 서신에서 찾아볼 수 없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주와 통치자 (Lord and Master)로 간주한 것이 명확하다. 이 그리스도는 바울이 알았던 이단자 나사렛 예수였다. 그 나사렛 예수가 바울 종교의 기원이다. 영지주의와 케노시스의 종교의 기원은 알 수 없다. 그들의 기원은 나사렛 예수가 아니거나, 나사렛 예수에 국한하거나, 나사렛 예수의 인간의 변이에 대한 것이다. 바울의 종교는 나사렛 예수와 부활한 주와 영원한 동일하게 여기는 영지주의와 케노시스와 전혀 다르다.
[바울과 원시 사도의 관계: 바우어와 메이첸]
당대에 예루살렘에서 박해자에서 개종한 바울에 대한 평가는 무엇이었는가? 예수 이해에 반대적인 견해였는가? 예수의 참 제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인정했는가? 이 두 관계 이해는 기독교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가치가 있다.
바우어(Baur)는 이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여 신학적 기여를 했다. 그런데 그는 두 관계를 갈등적 관계로 제시했다. 바울과 베드로가 깊은 차이를 갖고 있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갈등했다는 것이다. 메이첸은 바우어의 제시에서 원리적으로 교회의 근원이 둘이 됨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고대 카톨릭 교회는 바울과 베드로의 한 기초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바우어의 새로운 신학적 문제 제기는 탁월했다. 이는 기독교 역사를 구성할 때에 역사적 예수에서 사도적 기독교로 진행하는 것에서, 사도적 기독교에서 고대 카톨릭 교회까지 진행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바우어는 고대 교회가 바울적 기독교와 베드로적 기독교의 갈등에서 점진적인 타협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바우어의 견해는 리츌(Ritschl)의 비판으로 무너졌고, 라이트푸드(Lightfoot), 쟌(Zahn), 하느락(Harnack)에 의해서 거부되었다.
리츌은 바우어가 유대적 기독교의 중요성을 과장되게 부각시킨 것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바우어가 제시한 신약성경의 저술연대보다 더 후기로 제시했다. 결국 리츌은 바우어의 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 머물렀다. 결국 리츌도 교회의 존재와 일치에 대해서 설명하지 못한 것이다. 사도들의 일치가 없었다면 교회는 절대로 현재까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바우어는 바울과 베드로의 싸움(갈등)이란 가설 위에 바울 서신을 해석하였고, 신약성경 전체 해석의 원리였다. 바우어는 요한계시록을 세배대의 아들 요한으로 제시했는데, 이것은 그의 제자들도 인정하지 않았다. 메이첸은 3장에서 고린도교회가 바울과 베드로의 갈등 관계가 아님을 밝혔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사도들의 갈등의 흔적이 없고, 갈라디아서 2장에는 있다. 그러나 바울과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바울의 계시대로 합의를 이루었다. 즉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바울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다. 이것은 사도들의 완전한 일치로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거부됨이 선언된 것이다. 바우어도 갈라디아서 2장의 일치된 모습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바울을 이 일치된 사실에서 안디옥에서 외식하는 베드로를 책망한 것이지, 바우어의 주장대로 서로의 갈등의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의 결의가 더욱 확고한 일치를 보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에서는 바울 복음의 독립성이 강조되고,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초대 사도들의 복음의 일치가 강조된다. 바우어는 사도들과 바울의 갈등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 바이스(Weiss)는 불가능한 해석으로 거부했다. 바울서신과 사도행전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바우어는 갈라디아서와 고린도 전후서의 모든 자료를 무시하고 자기 주장에 맞추어 재구성시켰다. 성경의 모든 자료들을 사용하여 평가한다면 바울과 초대교회의 사도들의 갈등은 사라질 것이다.
릿츌(Ritschl)은 바우어의 의견에 반대하고, 바울과 초대 사도들의 갈등이 아니라, 모든 사도들과 극단적인 유대주의와 투쟁으로 제시했다. 극단적인 유대주의 가르침은 초대교회의 일치된 거부로 영향력을 잃었다. 2세기에 등장한 다양한 유대적 사상에 기초한 기독교 이단 (에비온주의, Ebionistes)들은 사도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이단의 근원은 유대주의자들이다.
교회 역사에서 유대주의자들이 이탈된 것은 베드로 사도의 작동이 아니었다. 유대주의의 영 (spiritual ancestors)이 사도적 기독교 (apostolic Christianity)와 일치하지 않고, 남몰래 들어온 가짜(가라지)였기 때문이다. 바울에게 항의한 사람들은 초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유대적인 가르침을 계속하기 위한 교회의 훼방자인 것이다.
바울은 십자가 이후의 제자 (disciple)였지만 예수의 초기 제자들과 일치했는데, 유대에 있던 유대주의자들과는 일치되지 않았다. 또한 베드로 사도는 율법주의를 지지하지도 않았다. 유대주의자들의 원리는 베드로 사도가 아닌 유대교에 있었다.
그러나 초대 교회 신자들은 개종 이전에 했던 유대인의 규례를 준수했다. 성전제사도 꾸준히 성실히 준수했다. 외형적으로는 경건한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에서는 율법 준수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구주 예수만을 의지했다. 율법주의적 유대주의가 주장하는 것과 달랐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과 유대인들은 동일하게 하나님 나라의 세움을 대망했다. 십자가 이후로 교회 신자들은 슬픔에 잠겼다가 구원에 이르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동일한 생활 원리에 있었다. 다만 외형은 서로가 다르지 않았다.
유대인들 중에 바리새인은 메시아의 강림을 고대하여 예수의 가르침을 고대했지만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특권을 계속갖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메시아였지만, 유대인에게 전유된 메시아는 아니었다.
초대 사도들도 유대적 관습을 고수하지 않았다. 베드로 사도는 안디옥에서 사역을 하였고, 요한 사도는 에베소에서 사역을 했다. 초대 사도들도 이방인 지역에서 이방인을 전도하는 사역을 수행했었다. 그럼에도 사도들은 율법을 준수했는데, 이방인들에게는 강요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역의 모습은 바울의 원리와 충돌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바우어의 주장은 잘못되었다.
[바울의 기독론: 천상적 그리스도]
이방인의 자유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과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가르침은 초대 사도들에게 전혀 비판받지 않았다. 기독교인의 자유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서는 전혀 없었다.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의 가르침대로 예수와 어떤 인격의 차이를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가르침에 대해서 저항은 전혀 없었다. 골로새서는 예수의 탁월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골로새서에서 예수의 탁월성은 격하시키려는 사람은 이단이었다. 바울의 천상적 그리스도에 대해서 거부하고 역사적 예수를 주장한 부류는 초기 사도들이 아니라, 기독교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영지주의자들 (Gnostics)이었다. 바울은 영지주의와 전혀 관계가 없고 팔레스타인 기독교의 사도들과 완전한 일치 (perfect harmony)를 이루었다.
[바울 기독론의 변화?]
바울의 기록론 사상은 변화되었는가? 이러한 흔적으로 고린도후서 5:16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육체로 알았다가 더 높은 신성으로 변화되었다는 주장이다. 바울은 두 개의 기독론 사상을 소유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두 가지를 설명한 것이다. 고린도후서 5:16이 자신의 초기 개념이라는 언급은 전혀 없다. 고린도후서 11:4에서 바울은 반대자들이 “다른 예수”를 전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는 천상적 예수와 구별된 다른 예수이다. 고린도후서 11:4절은 난제 (crux interpretum)이다. 성경에서는 예수의 인격의 다른 견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울은 복음의 내용을 변경할 필요를 알지 못했다. 바울의 종교에서 근본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신적 속죄자로서 그리스도 (Christ as divine Redeemer)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 이 개념을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서는 변호한 흔적이 없다.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인격은 천상적인 그리스도이다.
[다른 예수]
바울은 고린도후서 11:4-6에서 고린도 교회가 “다른 예수”를 용납함에 대해서 책망하였다. 바울의 가르침에는 다른 예수도, 다른 성령도, 다른 복음도 없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가르침을 부족하게 생각하고 새로운 지식의 첨가를 추구했다. 바울은 이런 고린도 교회에 “나를 참고 견디라”고 권면했다. 대명사가 ‘나를’이다. 바울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 가르쳤던 것을 지키라는 표현이다.
[사본상의 문제]
이 본문은 사본상의 문제가 있다. 사본에서 현재 동사와 미완료 동사로 나누어져있기 때문이다. 의심할 것이 없이 미완료형태가 읽기에 어렵다. 본문비평의 원칙은 문장에서 두 단어의 선택에서, 해석이 어려운 단어를 채택하는 것이다. 미완료형으로 읽는 다면 한 상황에서 다른 상황으로 전환되는 느낌이 들게 된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의 내용에서 다른 복음의 내용으로 전환되고 있다고 느낀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1:19-20에서 고린도 교우들에게 “나를”참고 견디라고 권면하였다. 이는 그들이 바울의 반대자들의 가르침을 잘 참고 견디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반대자들은 자신이 바울보다 더 자세한 지식을 갖았다고 주장했고, 고린도 교우들은 잘 용납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주장한 “다른 예수”는 자신들의 과도한 주장 속에만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바울이 말한 “다른 예수”도 제안하지 못했다. 그러나 바울은 완전한 예수를 전했다.
바울이 갖은 천상적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는 초기 사도들이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논쟁은 없었고 바울은 이 교리를 침묵할 수 없었다. 복음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위해서 침묵을 지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갈라디아서에서 유대주의 가르침에 대한 저주, 안디옥에서 베드로를 꾸짖음 등에서 담대함을 볼 수 있다. 바울이 말하는 천상적인 그리스도는 당대에 함께 살았던 나사렛 예수이다. 그들은 예수의 인간생활이 비천한 단계인 것으로 보았다.
바울은 예수를 모든 존재의 왕좌에 앉은 거룩한 구세주로 여기는 사람들과 교제를 하였다. 바울이 갖은 천상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당시 초기 사도들에게 대한 개혁된 사상은 아니었다. 바울이 예수의 생애에 대한 필요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 사도들의 도움이 필요했는가? 바울은 틀림없이 예수의 생애와 죽음에 대한 정보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제자들을 박해하였다. 박해자인 그가 다메섹의 도상에서 개종하였고, 3년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아무도 만나주지 않았다. 개종 후 예루살렘에서 야고보와 베드로가 바울을 만나는 것을 꺼려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바나바]
사도행전 4장에 등장한 바나바는 구브로에서 태어났고,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지체로 재산 전체를 헌신했다. 바나바의 행동은 교회에 특별한 호의를 보여주었다. 바나바가 예수와 어떤 교분이 있었는지는 성경에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십자가 이전에 예수와 접촉했었을 것이다.
[마가 요한]
1차 선교 여행에 동반한 마가 요한은 골로새서 4:10, 빌레몬서 24절에 바울의 믿을만한 조력자로 등장한다.
마가 요한은 확실한 예루살렘 교회의 지체였다. 그의 어머니의 집은 예루살렘 교회 모임의 중요한 장소였다. 사도행전 12장의 말씀은 벨하우젠 조차도 역사적인 높은 가치를 평가했다.
히에라폴리스 (Hierapolis)의 주교였던 파피아스 (Papias)에 의하면 마가와 베드로의 사제관계로 제시했다. 베드로전서 5:13에서 확인된다. 마가 요한은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뿐 아니라 바울과 예수의 가장 친한 친구 사이로서 어떤 연결점을 갖고 있다.
바울과 예루살렘 지도자들과 화합은 바울서신과 사도행전에서 등장한다. 예수의 공생애에 대한 바울의 지식은 예루살렘 교회에 보존되어 있었다. 바울이 예수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지 않은 채 교회와 접촉을 가졌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실라]
실라는 3차 선교여행에 동반했다. 실라도 예루살렘 교회의 지체였다. 실라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사도 명령을 가지고 간 두 사람 중 한 사람으로 말한다(행 15:27). 바울 사역의 동역자인 바나바, 마가, 실라는 모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다. 실라를 통해서도 바울과 예루살렘의 긴밀한 관계에 대한 증거가 된다. 바울의 선교사역에서 언제든지 예루살렘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로마서 16장 7절에서 안드로니고 (Andronicus)와 유니아 (Junias)는 바울보다 먼저 신자였다. 바울은 사도들에게 긴밀하게 인정된 안드로니고와 유니아가 바울과 함께 사역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은 바울은 예수에 대한 모든 것을 동등하게 소유했을 것이다.
[바울의 복음(1): 예루살렘의 복음과 동일함]
(1)바울은 자신이 나사렛 예수의 제자로 생각했다. (2) 또한 예수의 친구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3) 바울은 예수의 생애에 관한 풍부한 자료를 갖고 있었다. 즉 바울은 예수의 참 제자였다 (Paul was a true disciple of the real Jesus).
바울은 예수에 관한 역사적 진술에 (historical information about Jesus)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 이러한 무관심은 서신에서 예수의 말씀에 대해서 극히 드물게 나타난다. 바울은 예수의 지상 생애에 대해서 알고 있었지만 진술하지 않았고 단순히 접촉에만 관심을 두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육체를 따라서 섬기지 않았고(고후 5:16) 모든 사람도 그렇게 하도록 사역했다.
회심 이전에 바울은 진정한 애국적 민족주의였고, 신비적 경건주의가 없었다. 그러한 바울이 회심했다. 바울은 유대 땅에 살았던 나사렛 예수에 대해서 거의 모든 정보를 알고 있었다(고전 15:1-11). 그러한 전승은 바울에게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오직 계시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의 복음을 이해할 때에 고린도전서와 갈라디아서를 비교해야 한다. 일방적으로 갈라디아서만을 고집할 때에 바울의 복음 사역은 단지 “부활”을 전하는 것이 된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자신의 복음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초하고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또한 바울이 자신의 복음을 마치 예루살렘과 상관없이 자기 계시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5장과 비교할 때에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전승을 잘 알고 있었으며(1-11), 부활장이 예루살렘 교회의 가르침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의 복음(2): 그리스도에게 직접 받았음]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복음을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았다고 하였다. 바울은 다메섹 근처(도상)에서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갖게 되었다. 신성을 모독하는 참람한 지식으로 증오하던 것에서 예수의 계시로 말미암아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현시대에 예수에 대한 자료가 제한되어 있지만, 당시에 예수에 대한 자료는 너무 많았다. 오늘날과 같은 고고학 자료나 특수자료가 당시 바울에게는 일상생활이었다. 그러한 바울이 자신이 받은 복음이 사람에게서 나지 않고, 그리스도로 직접 받았다. 다메섹 도상에서 신적 개입 (divine interposition)을 확신할 수 있다. 즉 바울이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사역자에 대한 소명은 다메섹의 도상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울이 서신에서 제시하는 예수 생애에 관한 전통]
바울은 예수의 생애에 대한 전통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증언하지 않았으며, 매우 적게 직접 인용했다. 고린도전서 7:10의 이혼에 대해서 “주의 명령”으로 권면했다. 이 명령은 부활하신 주의 명령이 아닌, 십자가 이전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이다. 먼저 이러한 진술로 보아 바울은 부활의 주께서 직접 계시한 것과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 구별하는 습관을 보여준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15에서 “주의 말씀”은 지상의 사역에서 주신 예수의 계시이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1:23절 이하에서 주의 만찬의 제정에 관한 보고이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역시 주께 받은 것이다”에서 ‘주께 받았다, I received~’라는 표현이 직접인가? 아니면 구전인가?에 분별이 요구된다. 전자를 주장하는 부류는 초자연주의적 입장에 지지를 받았다. 그들은 부활한 주님이 바울에게 과거의 모든 사건들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알려주었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이 견해는 자연주의에서 초자연주의로 이끌어, 바울을 신비주의자이며 몽상가로서 예수에 과한 역사적 가르침과 분리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메이첸은 일반적으로 알 수 있는 지식에 대해서 하늘에서 직접 계시의 필요성이 없음으로 거부했다.
자연주의자들은 바울 의식에서 일어난 환상들로 평가했다. 보고를 통한 지식이었다면 그것을 언급했을 것인데, 주께 받은 것이라고 하니 환상을 통해서 습득된 지식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이 선험적으로 (a priori) 받았다는 자연주의의 견해는 배격되어야 한다. 바울이 주께, ‘~로부터’ 라는 단어는 단어 뒤에 있는 (I received from the Lord) 단어 (Lord)를 나타내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 즉 직접적 근원이 아닌 궁극적 근원을 (not the immediate but the ultimate source) 나타낼 때도 사용된다. 고린도전서 15:3에서 “받았다”는 목격자에 의한 보도를 뜻한다.
[바울이 알고 있는 예수]
이러한 바울서신의 내용을 볼 때 바울은 예수의 생애에 대해서 자세한 지식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흔히 바울이 예수에 대해서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하는데, 바울은 예수 생애의 사소한 것까지 언급했고 알고 있었다.
바울이 알고 있는 예수는, 유대인, 다윗의 자손, 모세의 율법 아래 있었으며, 형제들이 있었고(야고보), 유대인들에게 전도사역을 하였고, 십자가에서 죽었고, 부활함 등이다. 고린도전서 15:4을 보면 바울은 예수의 매장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십자가에 대해서 생생하고 자세하게 선포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생애를 따뜻한 성품에 동의되는 어떠한 설명이 없다.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그리스도의 공평함이 성육신과 십자가에서 보여주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신자의 믿음, 감사의 근원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죽음에 근거했다. 바울은 서신서에서 성육신과 속죄의 죽음 예수의 지상 사역까지 일관되게 감동을 받았다.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온유함”은 지상 사역에서 나타난 예수의 모습이다. 선재하신 그리스도의 영광, 예수의 고난의 삶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바울은 예수의 지상의 전 생애를 본받으려 했다. 그리스도를 본받음(살전 1:6, 고전 11:1)은 바울의 삶과 설교에서 등장하는데, 이것은 복음서의 예수의 모습이다. 바울서신에서 예수의 설교와 모범이 거의 없다고 비판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바울서신에서 바울이 예수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지식과 따뜻한 예수의 인격에 대해서 증거했다. 바울은 예수의 지상 사역에 대해서 상당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
바이스(Weiss)는 예수가 믿음을 요구하는 사역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바울의 사역지에서 예수를 속죄사역을 한 구원자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누구인가? 바울이 제시하는 속죄주로서 예수는, 몇 해 전에 죄인으로 죽임을 당한 유대인이었다는 것이다. 예수는 참 의인이었는가? 등 다양한 질문이 발생된다. 비록 서신서에서 예수의 언행에 대한 설명이 적다할지라도, 바울이 설명할 때 예수의 언행이 중요한 부분으로 등장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예수의 참제자였다 (Paul was a true disciple of Jesus). 바울은 동시대에 또한 그렇게 인정을 받았다. 그는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을 사용했다. 그렇다면 바울이 추종한 사람이 참 예수인가 (real Jesus)?
[예수: 지상 생애의 초자연적 인격과 부활하신 천상의 그리스도]
바울이 믿는 예수를 추구할 때에 문제점은 예수에 관한 근원된 문서가 4복음서이다. 그 복음서들을 확신할 수 있는가? 복음서를 확신한다면 바울이 예수의 참제자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의 생활의 실체와 총화는 신적인 주님 (divine Lord)이였고, 복음서에서 전체에서 예수는 신적 주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단순한 선지자가 아니며, 영감받은 의의 교사도 아니며, 하나님의 계시자나 해석자도 아니다. 이러한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천상의 구속주로서 이 땅에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초자연적 인격이다 (a supernature person; a heavenly Redeemer come to earth for the salvation of men). 예수의 초자연적 인격은 복음서 모두에서 제시한다. 요한복음의 신적인 그리스도와 마가복음의 인간적 그리스도를 대비시키는 것은 이미 지나간 헛된 소리이다. 지금은 정도의 차이 (differ only in degree)일뿐 동일하게 초자연적 인격, 천상적 구속주로서 예수를 제시한다. 이것은 바울이 제시하는 예수도 초자연적 인격이며 구속주로서 복음서와 완전히 일치한다.
현대 비평학에서 인정하는 것처럼 마가복음을 초기의 것이라고 인정하고 따른다면, 막 10:45에서는 예수는 구속주이다. 복음서에서도 예수의 생애의 사소한 것보다 예수의 죽음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것은 바울과 복음서가 동일하게 예수의 죽음이 죄를 속량하는 사역 (a ransom from sin)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복음서의 예수와 바울 서신의 그리스도가 동일한 현상에서 복음서가 바울을 의존하는 것으로 가설을 세우기도 했다. 그래서 참된 예수를 말하기 위해서 바울적 요소와 복음서를 분리시키는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예수의 지위를 신적인 위치까지 올릴 때에는 꼭 바울적 그리스도와 유사성을 피할 수 없다. 이 때에 어려운 점은 바울과 복음서가 모두 동일하게 예수를 믿음의 모범뿐만 아니라 믿음의 대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주의는 자연적인 것을 주장하려고 (the historian, the modern naturalistic theory) 성경의 초자연적인 제시를 제거하려고 했다. 그래서 갈릴리 선지자의 진정한 형상으로 초자연적인 것으로 각색한 것을 제거하고 소박하게 재구성하려고 하였다.
현대 자연주의적 이론에서는 바울이 제시하는 복음과 복음서의 예수는 동일하지 않았다. 복음서에서는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이 분리되기 어렵기 때문에, 그들은 초자연적인 요소를 제거하였다. 이는 복음서 전체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어떤 과격한 사상가는 (radical spirits) 초자연성을 인정하면서 예수의 현실성을 거부하였다 (radicalism). 그러나 복음서의 예수는 만들어진 초상이나 신화의 산물이 아닌, 지극히 역사적 상황에 부리를 박고 있다. 자유주의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예수는 역사에서 분리된 “자유 예수 (liberal Jesus)”로 그들의 창작물에 불과하다.
설령 이러한 분리가 성공되었다고 한다면, 역사적 예수로서 근대 자유주의의 인간 예수는 기형 (monstrosity)의 모습이 될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예수의 메시아 의식 (Messianic consciousness)에 있다. 자유주의에서는 예수에서 메시아 의식을 제거하고 겸손한 의의 교사의 인격을 부과하여, 예수의 믿음으로 하나님 안에서 믿음을 요구했다. 그런데 그 인간 예수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땅을 심판하는 인자로 생각하고 있다. 정말 순수한 인간 예수가 그러한 생각을 했다면 정상적인 정신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초월적인 메시아 사상을 자기에게 적용할 수 있는가? 브레데(Wrede)는 예수가 자기를 메시아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the messianic secret). 이것은 뷰셋(Bousset)도 동일한 방향이다. 그러나 예수의 의식에서 메시아적 요소는 복음서에서 너무나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즉 성경을 각색하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 신학 이론이다. 또한 예수에게 전혀 없는 메시아 의식을 어떻게 제자들이 십자가에서 죽은 선생을 메시아라고 인식할 수 있었는가를 입증할 수 없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메시아라고 하셨기 때문에 메시아라고 선포한 것이다.
최근 비평에서는 예수의 의식에서 메시아 의식을 전혀 부정하지 못한 이론이 있다. 슈바이처(A. Schweizter)와 철저한 종말론 (consistent eschatology)을 따르는 무리들이다. 예수가 미래에 실현될 하나님 나라를 기대했다는 것으로 메시아 의식을 인정하지만 한 부분을 과장시킨 복음서의 예수와 다른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피한 완화된 견해 (a policy of palliation)에서는 예수의 메시아 의식을 인정하지만, 예수 생애의 후기에서 일어난 것으로 제시했다. 그런데 이 주장에서는 예수를 다윗의 후손이 아닌 다니엘의 인자로 간주한다. 또한 예수에게 본질적으로 부여된 인격이 아니라 하나님과 밀접한 의식에서 발생된 것이다. 이러한 완화적인 방법이 복음서 전체의 예수의 모습을 해결할 수 없다. 순수하고 거룩한 의의 교사가 후세에 세상의 심판자로 격상되는 신적 인자로서의 변화를 차이가 너무나 큰 것이다. 하이트뮬러(Heitmuller)는 예수를 신비스럽게 (uncanny) 격상하면서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예수는 자신이 메시아이고 하늘에서 구름타고 올 자로 생각했다. 전형적인 겸손이라면 이러한 상상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자연주의자들의 다른 해결 모색으로 예수를 메시아 의식의 과대망상증으로 제안했다. 예수가 정신이상자인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는 사랑하는 예수가 되지 않는다.
모든 자유주의 예수 재구성의 두 가지 난점은 첫째 복음서에서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을 분리하는 것과 둘째 분리가 성취할지라도 남은 예수의 초상이 기형적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견해대로 심리학적으로 기형인 예수를 인정하자면, 그 인간 예수를 어떻게 신약성경의 초자연적 예수 (supernature Jesus)와 연결시킬 수가 있겠는가? 예수를 초자연적인 인격으로 된 것은 최초에 발생했다. 즉 바울이 회심할 당시에 이미 예수를 하늘의 그리스도 (heavenly Christ)로 믿고 있었다. 바울의 개종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약 3-4년 후의 일이다. 바울이 만난 천상의 그리스도는 예루살렘 교회가 믿고 있던 “다른 예수, other Jesus”와 전혀 분쟁이 없는 일치된 것이었다. 예루살렘 교회도 바울과 동일하게, 예수를 의의 교사가 아닌 천상적 구속주 (heavenly Redeemer)로 제시하였다.
자유주의에서 부활은 예수의 인격의 존엄에 대한 인상의 각인으로 설명되었다. 그러나 복음서의 초자연적 예수가 죽음에서 제자들이 스스로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병리적인 현상으로 평가된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이 기적의 예수를 경험하지 않았다면 부활 신앙은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즉 예수의 기적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에게서 부활 신앙은 발생하지 않는다. 양자 초자연적인 예수와 부활한 그리스도의 현현을 취하지 않고서는 신약성경 전체를 구성할 수 없다.
자유주의에서 구현하는 예수 (liberal Jesus)에서 세 가지 곤란한 점은, 첫째 복음서에서 예수의 초상을 손상시킨 기적의 모습이 있다는 것, 둘째 역사적 예수로 재구성했을 때 인격의 도덕적 모순이 발생한다는 것, 셋째 12제자들이 순전한 인간 예수와 전혀 갈등이 없이 바울 서신과 신약전체의 신적 그리스도께 자리를 양보한 점 등이다. 이러한 모든 난점들을 극복했다할지라도, 예수와 바울의 일치는 비평주의의 모든 주장을 일축시킨다.
[예수와 바울의 일치]
첫째, 예수와 바울은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 동일한 견해를 갖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용어는 바울 서신에서 많이 나오지 않는다. 바울에게서 왕국 (Kingdom)은 정치적이거나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1세기 유대교에서 왕국은 지극히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떻게 왕국 개념에서 정치적인 것이 분리되었는가? 예수나 바울에게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윤리적인 (ethical) 의미였고, 현재적이었고 미래적이었다. 예수의 천국 개념을 종말론으로 간주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했다. 예수와 바울에게 천국은 초월적이었고 윤리적인 것 (transcendent and ethical)이었다. 바울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주어지는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단순한 말이 아닌 전체에서 예수와 동일한 것이다. 예수는 복음, 왕국의 오고 있음 (the coming of the Kingdom)을 선포했다.
둘째, 바울은 예수와 동일하게 하나님의 아버지됨의 교리 (doctrine of the fatherhood of God)를 갖고 있다. 예수가 확립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김은 기독교 문서 외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구약성경에서도 아버지가 아닌 민족의 하나님이었고, 헬라와 그리스에서도 국가종교의 신이었다. 구약성경에서는 메시아에 대한 준비를 시켰고, 유대 문학이나 랍비 문학에서 드물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보는 견해가 있었다. 그런데 예수는 제자들에게 아버지라고 부름이 새시대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아버지됨은 예수의 독특한 개념이며, 바울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서신서의 초두에 정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이 아버지되심은 논증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자명한 것으로 영혼의 깊음에서 올라오는 것이다.
자유주의에서 아버지되심은 무한한 사랑으로 평가하였지만, 성경에서도 아버지께서 만민에게 동등하게 햇빛을 주시지만 악인과 선인의 동일한 아버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아버지라는 고백은 하나님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나타낸다.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었지만, 죄의 문제는 해결되어야 한다. 예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계시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속죄 사역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러 오신 것이다.
셋째, 바울은 은혜의 교리 (a doctrine of grace)의 제시는 예수와 동일하다. 자유주의에서도 예수가 은혜의 교리를 인정했다.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은혜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성질의 것이다. 바울은 은혜의 교리를 가르쳤지만, 그의 복음을 들은 그리스도인들은 심판대 앞에 설 것이라 생각했다. 예수와 바울에서 제시되는 심판대에서 선 그리스도는 동일하다.
넷째, 바울의 윤리적 교훈은 예수의 윤리적 교훈과 놀랍게 흡사하다. 율법의 완성을 사랑이라는 개념, 위대한 원칙에서 동일하다. 예수와 바울의 동일성, 연속성은 유대 교사들과 건너기 힘든 심연이 있다. 바리새인었던 바울이 어떻게 비연속성에서 동일성으로 바뀌었는가? 바울과 나사렛 예수의 무리들과 친밀했던 것이다.
[바울과 예수의 관계: 죄사함 받은 사도이며, 죄사함을 주신 구속주]
바울이 예수의 사도로 인정한 사실이며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에서 바울은 일치된다. 예수의 영향력으로 바울이 사도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이 예수를 모방하지 않았다는 브레데(Wrede)의 견해는 정당하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의 말씀에 대해서 기재하지 않음에서 예수에 관한 지식이 없었다라고 단정할 수 없다. 바울은 예수가 자신을 구속주라는 것이 중요했다. 즉 바울의 종교는 구속의 종교였다. 예수는 교사가 아니라 구속주였다. 인간들에게 바른 삶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속량하여 인간에게 새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이다. 바울 종교의 핵심은 속죄 사상이며, 속죄를 이루신 구속주가 예수이다. 브레데는 바울을 구속주로 인정했지만, 바울을 예수의 추종자가 아니라 새종교의 창립자로 생각했다. 그래서 바울의 신학이 아닌 나사렛 예수에서 종교를 찾으려 했다. 브레데의 견해는 단순한 신학적 사변 (theological speculation)에 불과하다.
예수는 인간의 죄를 위해서 구속 사역을 위해서 하늘에서 오신 신적 구속주이며, 바울은 예수의 참된 추종자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버지됨에 대한 계시자라면 바울은 예수의 참 제자일 수 없다. 팔레스타인의 의의 교사였던 예수에서는 천상적 구속주를 대체할 수 없다. 예수와 바울의 관계에서는 어떤 전향적인 해석보다, 오직 영광의 주의 구속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제5장 유대적 환경 (p.173-207/번역본 p.220-264)
메이첸은 당대에서 진행되던 바울신학과 바울이 추구했던 신학이 전적으로 다름을 논증하였다. 현대 바울신학에서 예수를 ‘의의 교사’, ‘하나님의 계시자’로 제시하였지만, 바울은 예수를 ‘구속주 (the divine Redeemer)’로서 ‘구속의 종교’로 전적인 차이가 있다 (the religion of Paul was a religion of redemption).
바울이 추구한 예수는 당시 팔레스타인에 실재했던 그 예수이다 (the Jesus who actually lived in Palestine). 바울은 유대교 신자에서 나사렛 예수를 신봉하는 종교로 개종했다.
[브레데(Wrede)와 브뤽크너(Brückner): The Idea of redemption]
두 사람은 바울의 종교를 구속 개념으로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구속주의 인격 자체가 아닌 어떤 곳에서 유추된 구속주의 인격에서 이끌어 냈다. 즉 바울이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 메시아 사상에서 천상의 그리스도 개념 (conception of the heavenly Christ)을 유추해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 서신 자체에서는 바울의 개념의 근원을 밝히기 어렵다. 만약 역사적 예수를 근거해 바울 종교가 나왔다면 혁신적인 개념에 대해서 설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두 사람의 견해에 의하면 바울의 그리스도는 개종 전이 후에도 변함없이 예수는 유대 묵시 문학의 그리스도이다 (the Christ of the Jewish apocalypses).
[바울 당시의 유대 환경 연구]
메이첸은 유대적 환경을 3가지 주제에서 제시한다. (1) 유대교의 분파, (2) 율법, (3) 메시야이다.
[유대교 분파에서 바울은 엄격한 유대인]
바울 시대의 유대교는 팔레스타인 유대교와 디아스포라 유대교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의 언어는 아람어였고, 후자는 헬라어였다. 디아스포라 유대교에서 헬라어를 사용했지만 자유주의적인 유대교로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1세기의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에 전념하는 통일된 민족이었다. 어째든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이 디아스포라 자유주의 유대교 (a liberal Judaism)로부터 발현되었다는 것은 중대한 오류이다. 바울이 비록 다소(Tarsus)에서 출생하였지만 팔레스타인 유대인으로 자유주의 유대인은 아니었다.
유대인으로 대중적으로 알려진 철학자인 몬테피오레 (Claude Montefiore, 1858-1938)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유대인들보다 더 엄격하다고 했다. 몬테피오레는 1세기 팔레스타인 유대교는 B.C 500년 경의 랍비적인 율법과 하나님의 죄사함의 확신을 연합시킨 포용적인 자세라고 하였다. 메이첸은 이러한 몬테피오레의 증거로 제4 에스라(4 Ezra)에 근거한 것으로 제시했다. 이러한 일련의 제시는 예수의 말씀에서도 팔레스타인 유대교가 포용적인 자세로 발견된다. 몬테피오레의 제시는 비판을 받을 수 있지만, 팔레스타인 유대교에 대해서는 타당성이 있다. 또한 유대적 자유주의는 현대의 기독교적 자유주의와 동일하게 모든 것을 포용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바울은 개종 전과 후로도 자유주의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바울의 복음은 온화한 율법관이 아닌 준엄한 율법관이다. 또한 율법으로 하나님의 자기도취(complacency)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공의의 충족이다 (satisfaction of divine justice).
[요세푸스의 분류: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센파]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는 신약성경에 등장한다.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엣센파는 금욕적이며 동물제물을 거부하고 세속과 분리하여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라이프풑(Lightfoot)는 골로새서에서 엣센파의 영향이 있다고 평가했지만, 메이첸은 의심했다. 즉 바울이 엣세파의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바리새파(Pharisees)는 율법에 열심을 갖은 정통 유대교(orthodox Judaism)를 대표한다. 그들은 대중적이지는 않았지만, 교육을 주관하는 등 공동체 전반에서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다. 성전이 파괴되고 바리새파의 율법 해석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바울은 자유주의적 유대인이 아니라 바리새파였다.
[율법과 메시아 대망]
발덴스페르거(Baldensperger)는 유대교의 두 개의 중심축으로 ‘율법’과 ‘메시아 대망’을 제시했다 (Baldensperger, Die Messianisch-apokalyptischen Hoffnungen des Judentums, 3 te Aufl., 1903, 88-89). 포로시대 이후 유대교에서는 율법에 열심했다. 이러한 열심에서 다양한 구전이 형성되어 규칙화가 되었다. 메이첸은 이러한 유대교의 열심에서 열매가 없다고 평가했다. 왜 율법에 열심인 유대인이 예수에 대해서 반대자가 되었는가? 도덕 영역에서도 나사렛 예수는 탁월한 가치가 있고 율법사나 위선에 배척될 필요가 없었다. 바울 시대의 바리새파는 공로 종교 (religion of merit)로 은혜의 종교 (religion of grace)와 전적으로 구별된다. 메이첸은 바리새적인 율법주의가 복음의 준비 과정으로 가능성을 제시했다. 바울은 율법이 유대인에게 죄의식을 주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schoolmaster)로 말하였다. 율법의 본질적인 성격이 몽학선생이었는지 실제 유익하였는지는 의문이다. 그런데 바울 시대에 유대교는 심각한 죄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난점이 있다. 바리새파 유대주의의 율법은 지키지 못할 상태로 어렵지 않았다. 바리새파의 형식주의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깨끗케하려는 자비와 공의와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낮은 율법적 종교 (low view of law)에 불과했다. 높은 율법관 (high view of law)은 죄의식을 주어 은혜를 구하는 자가 되게 할 것이다 (a man a seeker after grace).
신약 시대의 유대교에서는 4 에스라서에서 (Fourth Book of Ezra) 보면 죄의식의 흔적이 있다. 이와 비교되는 제2 바룩서 (Baruch)에서는 약간 다른 입장이다. 제2 바룩서에서는 인간의 악에 대해서 낙관적이며 자기 만족적이다. 악의 문제에 대해서 바울은 동시대의 유대교에서 찾지 않고 구약성경에서 찾았다. 바울주의는 구약성경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비로소 자신의 죄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발덴스페르거에 의거한다면, 유대교의 다른 관점이 메시아 대망 (Messianic hope)이다. 메시아 대망은 구약성경에 근거하였다. 비평주의 (critical view)에 의하면 독특한 개인적인 메시아의 교리가 이스라엘 역사 후기에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메시아는 다윗 가문의 혈통에서 나온 왕을 기대했다. 이상적인 지상적 왕에 대한 기대는 제1에녹서 (1 Enoch)에서 인자 (Son of Man)가 천상적인 존재를 기대하는 것 (expectation of a heavenly being)으로 변했다. 그레스만 (Gressmann)은 각 개인에게 초월적인 구주에 대한 개념이 태초에서부터 있었다고 하였다. 그레스만은 이사야 53장을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 (the suffering servant of Jehovah)- 개인적으로 해석했다. 초자연주의적 구약 성경관 (the supernaturalistic view of the Old Testament)에서는 개인적인 구주를 인정함에 동일하지만 객관적 확실성인 것이다.
1세기 유대교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원수의 압제에서 구원하는 왕에 대한 소망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이러한 모습은 신약 성경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메시아 소망에 대해서는 외경에 나타나지 않으며 다른 문헌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미래에 도래하는 시대에 대해서 개인적인 메시아의 등장은 없다. 혹 예수가 자신을 메시아로 주장하지 않았다할지라도 사도들에게는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있었음이 확실하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거짓 메시아이기 때문에 죽음을 당했다. 예수를 반대하는 사람이나 예수의 제자들 모두가 “유대인의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요세푸스(Josephus)에게도 메시아 사상이 나타나 있다. 유대인으로 로마의 사가인 요세푸스에게 메시아 사상은 반역적인 위험이 있기에, 그는 메시아를 황제인 베스파시안으로 설명했다.
1세기의 유대교에서 메시아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온 ‘지상적 왕’이거나 ‘천상에 존재하고 있는 존재’의 개념이었다. 두 개념에서 당시 통상적인 개념은 전자였고, 후자는 묵시 문학에서 기원한 난해한 가르침이었다 (esoteric doctrine).
부뤽크너(Brückner)는 일반 주장과 다르게 1세기 유대교에 메시아 교리의 존재에 대해서 부정하였다. 그는 메시아가 초자연적 인물로서 초인 (超人, supernature man)이라는 것이다. 초인은 전쟁의 무기의 능력이 아닌 입의 숨결이 무기로 지상 왕국을 건립한다 (supernature power). 메이첸은 부뤽크너 (Brückner)의 유대인이 갖은 초자연적 속성의 메시아 견해에 일면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부뤽크너 (Brückner)의 메시야관은 인간의 본질로서 지상 왕국을 다스리는 존재이다. 성경에서 세례 요한은 이적을 행하지 않았음에도 메시아로 추정되었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또 다른 메시아관은 순교자 저스틴의 트리포와의 대화 (Justin Martyr’s Dialogue with Trypho)에서 나타난다. Dialogue with Trypho는 2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예수를 단순한 인간 (mere man) 메시아로 주장하는 유대인 트리포에 대해서 논박하는 내용이다.
1세기의 유대인들은 ‘지상적인 왕’과 ‘천상적인 인자’의 메시아 관에서 어떻게 전자로 정착되었는지에 이해가 가능하다. 초월적인 메시아관은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개념이 아니라 묵시 공동체들의 지엽적인 견해였다. 즉 초월적인 인자 교리가 보편적으로 인지되지 않았었다.
우리는 1세기에 유대인들이 묵시 문학에서 나타난 초월적 메시아관만을 소유했다는 것에 대해서 부뤽크너의 견해로 반대할 수 있다. 초월적 메시아관은 묵시문학에 분명히 등장하지만 보편적인 견해가 되지 않은 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로마의 지배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대망했기 때문이다.
[묵시문학에서 나타난 초월적 메시아 개념]
초월적 메시아 개념은 에녹서의 상사 (the Similitudes of 1 Enoch), 제4 에스라서 (4 Ezra), 제2 바룩서 (2 Baruch)에서도 나타난다.
상사편(相似篇)에서 메시아는 천상적 존재로 세상의 종말에 나타나서 심판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선택된 유일자이며 나에게 선택된 유일자 (the Elect one, Mine Elect one)로 그 인자, 혹은 인자 (the Son of Man or Son of Man)로 불렸다 (Similitudes 48:10, 52:4).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 레이크(Lake)와 잭슨(Jackson)은 다윗의 혈통으로 메시아 사상을 강조하면서 부정했다. 메이첸은 두 사람의 의견을 반박하고 에녹1서에서 “인자”는 메시아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제시했다.
상사편(相似篇)에서 등장하는 “인자”는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사용한 “인자”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어떤 신학자는 “인자”는 절대로 메시아적 칭호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인자는 단순히 아람의 관용적 표현으로 ‘사람 (the man)’이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 방법으로 복음서의 인자도 ‘단순한 인간 (the man)’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포기되었다. 첫째, 복음서의 인자가 평범한 인간을 의미하는 것에 대해서 확실성을 갖지 않았다. 가장 일반적인 칭호가 될 수도 있고 가장 특수한 의미의 칭호도 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상사편(相似篇)에서 존재한다. 인자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다니엘 7:13이고, 제1에녹 46:1,2이다. 다니엘 7:13절과 연관된 인자는 보통 사람이 아닌, 하나님 (the Ancient of Days)과 함께 있었고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내려왔었다.
상사편(相似篇)에서 등장하는 “인자”는 선택된 유일자 (the Elect one)로서 고귀한 속성으로 채색되어 있다. 인자는 창조 전부터 존재하였고 (Similitudes 48:3,6), 최후에 하나님의 보좌에 영광 중에 좌정하여 (Similitudes 51:3), 인간 뿐만 아니라 타락한 천사까지 심판할 것이다 (Similitudes 55:4). 구원받은 의인들은 인자와 함께 영원히 함께 먹으며 생활할 것이다 (Similitudes 62:13,14).
상사편(相似篇) 전체에서 제시되는 메시아의 모습은 초자연적으로 땅과 전혀 관련이 없는 천상적 인물이다. 의인들이 사는 영광스런 땅에 거주하는 인자 사상과 이스라엘은 특권 의식이 사라지지 않았다. “택자”를 압제하는 이방인의 통치자들은 “왕 혹은 권력자”들이다. 또한 인자는 이스라엘에서 단순하게 용납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심판은 개인 생활의 비밀에 대한 것으로 이해하는 바탕이었기 때문이다.
제 4에스라 7:26~31에서는 메시아의 통치가 엄격하게 일시적인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메시아는 400년간 생활을 향유하고 전 인류와 함께 죽는다. 4 에스라는 혼합적인 모습을 갖고 있는데, 지상에서 죽는 메시아의 모습으로 새시대와 관계가 없다. 4 에스라에서 메시아는 죄의 문제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12족장의 유언 (Testaments of the Twelve Patriarchs)에서 나타난 메시아의 천상적 성격은 부뤽크너 (Brückner)의 주장이 그름을 보여준다. 레위 지파와 관계가 된 메시아와 다윗 계열의 왕의 사상이다. 묵시문학에서 메시아는 지상적인 성격을 갖고 있어 윤리적 성격이 강조된다. 그러나 강한 유대적이고 바리새적인 특징은 배제되지 않는다.
바울 시대의 메시아는 초월적, 개인적, 보편주의적이었다. 메시아 왕국의 무대는 단순히 예루살렘으로 국한하지 않았다. 왕국의 시작은 천상이지만 지상에서 출현되었다. 이러한 최종적인 복은 부활에 의해서 가능한 것으로 제시했다.
제2바룩서 (Baruch)에서는 인간의 부활 상태와 현재 상태에 대해서 인상깊게 주장했다. 즉 의인은 그들의 옛 몸에서 변형되어 부활할 것으로 제시했다. 결론적으로 메시아 왕국의 도래는 우주적 의미의 사건으로 간주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 그리고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종속되어 공유되는 복이다.
[바울의 메시야 개념과 묵시문학의 개념: 다윗의 후손과 천상적 인자]
후기 유대교의 종말론의 사상은 구약성경에 근거하고 있다. 첫째 후기에 나타난 메시아의 초월성은 구약성경에 근거한다. 이사야 9장, 11장, 이사야 65:17, 다니엘 7:13등이다. 천상적 메시아는 구약성경에서 반복한다. 둘째 개인주의도 구약성경에 근거한다. 부활의 교리와 함께 개인주의 대망은 다니엘에서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묵시문학의 보편주의는 대선지서에서 나타난다. 선지서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의 보편성과 이스라엘의 복에 참여하는 것을 나타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개종 전에 초자연적이고 천상적인 메시아를 믿고 있었다면 그는 구약성경에 불충실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개종 전에 메시아 개념은 서신서의 기독론의 원천이었을까? 브레데(Wrede)와 부뤽크너(Brückner)는 그렇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은 고상한 바울 기독론 (the lofty Christology of Paul)의 원천이 초월적 메시아관인 인간 예수에서 나왔다면 설명이 불가능하고, 나사렛 선지자에게 있던 느슨한 개념은 기독교 이전의 메시아 개념을 가설 (hypothesis)로 제시했다. 이 가설에 대해서 메이첸은 재고(再考)한다.
먼저 바울이 개종하기 전에 묵시 문학의 메시아 개념을 갖고 있었는가? 발덴스페르거 (Baldensperger)의 이해를 따른다면 율법에 종속된 (a substitute for the Law) 랍비적인 관심을 갖았던 바울에게서 메시아 교리는 (the Messianic dogma) 지배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발덴스페르거의 제시는 개종 이전의 바울은 메시아 사상가가 아니라 율법에 열심인 범주였다. 신약성경의 전체를 보면 당시에 메시아 사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바리새인 바울은 정통 신앙에 대해서 거부할 수 없기에, 개종 이전에도 분명히 개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묵시 문학의 천상적 인자로 초월적 메시아였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에녹서의 상사편에서 나오는 특별한 칭호는 바울에게 분명히 없다. 묵시 문학 (Son of Man, Elect one, Righteous one)에서는 말하는 것을 바울은 반복하지 않는다 (the Pauline terminology). 또한 에녹1서에서는 “메시아”라는 말이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바울적 칭호인 “주”라는 용어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연유에서 묵시문학과 바울의 연결은 절대로 아님을 확신하였다. 바울이 사용한 메시아 개념은 초자연적인 묵시문학과 다른 정치적인 것이다. 메시아 개념이 초자연적 속성이 있는 것이지만 다윗 후손의 왕의 개념(솔로몬 시편(72편 제왕시)의 메시아)을 따른다면 바울에게 메시아의 선재 사상은 없다. 바울의 사상은 에녹1서의 인자와 전혀 다르다.
[바울의 기독론: 창조 중보자, 인격개념]
개종 이전의 바울이 묵시 문학의 메시아와 같은 천상적인 선재한 메시아를 믿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메이첸은 브레데와 브룩크너가 묵시문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단정한 것이 너무 지나친 것으로 평가했다.
만약 개종 이전에 바울이 묵시문학적 메시아를 추종했다할지라도 바울의 기독론의 기원으로 설명할 수 없다. 묵시문학에서 등장하는 메시아와 바울서신에 등장하는 그리스도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첫째, 묵시 문학에는 메시아의 창조 사역에 관한 교리가 없다. 반면 고린도전서 8장 6절과 골로새서 1장 16절에는 창조 사역이 있다. 묵시문학에서 메시아는 선재하는 존재이지만 창조에서 역할은 없다. 이 차이는 사소한 차이가 아니다.
브레데와 브룩크너는 메시아 선재 사상에서 묵시문학과 연결시켰다. 그러나 바울의 메시아 선재사상과 전혀 다른 것은 창조 사역에서 있다.
둘째, 묵시 문학에서 선재한 메시아의 인격과 바울 서신의 메시아의 인격에서 원만한 연결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묵시문학에서 메시아는 하늘에 감춰진 신비로운 계시로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또한 메시아와 인격적인 관계에 대한 기록은 없다. 반면 바울 서신의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인간이 사랑할 수 있는 인격 (person)이다. 바울에게 메시아는 인격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개념은 브레데에게 없다. 브레데가 이러한 개념은 갖고 있었다면 천상적 인자이 개념에서는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의 메시아 개념은 예수가 창조주와 심판자에서 분리되었다. 메시아에서 인격 개념을 갖으려면 묵시문학이 아닌 바울서신에서 찾아야 한다.
메시아의 온화한 인격을 두 사람은 십자가 처형에서 찾으려 한다. 두 사람은 역사적 예수가 지상에서 죽었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그러나 바울은 메시아의 죽음이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죄를 위한 고난의 죽음으로 해석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속죄 행위였다. 바울과 그의 제자들은 십자가의 구속제사와 친밀한 인격관계 (the warm, personal relationship)를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예수의 죽음이 메시아의 대리적 죽음 (a vicarious death of the Messiah)으로 해석했는가? 메이첸은 이 답을 예수께서 바울에게 말해준 특별한 특징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브레데의 가설에서는 이 견해는 배제하였다. 브레데는 대리적 죽음의 개념이 바울 개종 이전부터 있었다고 주장했다. 메이첸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은 기독교 이전 후기 유대교 문서 중에서 대리적 죽음에 대한 가르침의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4 에스라에서 메시아의 죽음이 있지만, 타인에게 은택을 주는 죽음은 아니다. 단지 새로운 세계를 오게 하기 위한 죽음일 뿐이다. 순교자 저스틴의 트리포와의 대화에서 유대인 드리포는 메시아의 고난에 대해서 제시하지만, 대리적 고난에 대해서는 표현하지 않았다. 메이첸은 쉬러 (Schürer)의 가설인 1세기까지 없었던 메시아의 대리적 고난 사상이 3세기에서 유대인들에게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에 대해서 타당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1세기 인물인 바울의 상황에는 적합하지 않다.
4 마키비서 6:28, 29에서 의인의 피가 백성에게 씻음이 된다는 기록이 있다. 죽음을 당한 마사다의 엘르아잘 (Eleazar den Yail)를 위한 기도에서 속죄제물이 됨을 기도하고 있다. 그러나 의인의 대리 수난의 개념이 바울 시대에 일반적 교리라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의심할 것도 없이 이사야 53장의 감화와 적용은 없다. 대리적 수난의 형틀인 십자가가는 유대인들에게 거치는 돌일 뿐이었다.
그래서 바울이 가진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친밀한 인격관계는 유대 환경에서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묵시문학과 나사렛 예수와 연결된 사상의 연계성은 가질 수 있지만, 묵시문학과 살아계신 영광의 그리스도와는 연결시킬 수 없다.
바울의 기독론과 묵시문학의 메시아의 세 번째 차이는 신성교리이다. 바울의 신성개념은 중심이지만(로마서 9:5), 묵시문학의 표현에서는 찾을 수 없다. 바울서신에서 “주”라는 용어는 “하나님”과 동일한 명칭이다.
또한 바울 서신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서두에서 규칙적으로 등장하는 반면에 묵시문학 (제1에녹서)에서 메시아의 표현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한 문장에 연합된 표현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동일한 존재라는 것이다. 1 에녹서에서 메시아가 기름부음 받은 자로 다윗의 후손으로 지상왕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동일한 위치는 아니다. 바울의 서신에서는 은혜와 평강이 양자로부터 동일하게 오는데, 1에녹서에서는 전혀 적합하지 않다. 또한 1에녹서에서 등장하는 Son of Man, Elect one, Righteous one는 바울 서신에서 찾을 수 없다.
바울이 섬기는 그리스도는 묵시문학이 제시하는 메시아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바울이 개종 이전에 묵시문학의 메시아를 믿었다할지라도, 서신서의 그리스도와 연결성은 전혀 없다. 바울이 개종함으로 바뀐 것은 메시아와 예수를 동일하게 여긴 것이다. 그 메시아가 하나님 보좌까지 올려진 예수라는 것이다.
[지혜 기독론]
즉 묵시문학의 메시야 교리로는 바울 기독론에 충분하지 않다. 이러한 견해는 한스 윈디쉬(Hans Windisch)도 인정했다. 그래서 윈디쉬는 묵시문학에서 부족한 메시아 개념을 유대교의 “지혜”의 교리에 호소하여 보충하려 했다. 윈디쉬는 메시아의 묵시적 교리가 바울의 기독론의 기원을 설명할 있다고 인정했다.
잠언 8장에서 “지혜”는 고귀한 말로 찬양되며, 천지창조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지혜는 대담하게 시적으로 의인화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과 구별되는 실제적인 인격으로 인정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후대 알렉산드리아의 “솔로몬의 지혜”에서 의인화가 현실적 인물이 관련되어 보일정도로 발전되었다. 지혜가 하나님과 다른 어떤 종류의 인물로서 간주되는 것이다. 윈디쉬는 이 견해를 바울이 취하여 그리스도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다고 주장했다.
윈디쉬의 주장은 바울의 기독론의 두 요소를 보충하는 것으로 제시했다. 첫째, 바울 서신에 있는 그리스도의 창조 활동에 대한 근거가 된다. 유대교에서 지혜가 창조자의 보조 혹은 손발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바울과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에서 지혜가 솔로몬의 지혜에서 현자에게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현자는 지혜의 대변자가 된다.
그런데 언제부터 메시아와 지혜가 동일화가 되었는가? 바울이 완성시킨 것인가?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에서 있었는가? 바울이 완성했다면 바울의 기독론에 발전이 없는데, 나사렛 예수와 지혜의 신적 인물이 동일화되었는가? 메이첸은 윈디쉬가 좋은 제안을 하여 자연주의 개념을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두 사람의 견해를 더욱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제시했다.
제6장 헬레니즘 시대의 종교 (p.211-251/번역본 p.266-319)
메이첸은 5장 “유대적 환경”에서 바울의 종교는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의 메시아에 대한 가르침에서 나오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메이첸은 바울의 종교의 기원이 역사적 예수 (historical Jesus)에서 불가능하자, 다른 대안으로 이교 세계에서 근원을 찾는 방법에 대해서 탐구를 시작한다. 바울 종교의 기원에 대해서 헬레니즘의 이교사상에서 찾는 가설이 있기 때문이다.
브뤽크너 (M. Brückner)는 바울의 기독론이 유대적 메시아 개념 (메시아의 겸손에 대한 에피소드)을 인정하면서도, 이교적 영향을 받았다는 가설에 대해서도 거부하지 않았다. 브뤽크너가 바울의 종교를 이교에 근원을 두는 것은 종교사학파 (school of comparative religion, Religionsgeschichtliche Schule)와 동일하다. 바울 종교의 기원을 역사적 예수(묵시문학)와 이교에서 찾으려는 종교사학파의 견해는 만장일치가 되어 합의가 될 수 없는 근본자료로 갖고 있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로마의 토착종교: 헬라에 기원한 다신교]
바울 시대는 로마 제국에 의해 정치가 통일된 시민 세계였지만, 토속종교는 큰 의미가 없었다. 로마의 정신은 헬라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헬라의 영역의 종교의 신들은 로마의 신들과 대치되었다 (예, Zues – Jupiter, Aphrodite – Venus).
호머 (Homer) 시대 이전에 헬라 종교는 발전했었다. 호머의 시로 본다면 헬라의 종교는 전적으로 발달된 다신교였다. 호머의 시는 귀족 사회의 작품이며 사회 질서가 잘 정립된 상태로 추측된다. 호머의 작품에서는 당시의 종교의 근본이 잘 표현되어 있다.
호머의 시로 단정하자면, 헬라인의 종교는 철저한 다신교였고, 신들은 인간적인 남녀로 인간보다 힘이 있지만 정의롭지는 못했다. 이러한 헬라 종교에는 예술에 대한 자극이 숨어 있었다. 의인화 (Anthropomorphism)는 시인, 조각가들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숭배를 받아야 될 신들은 도덕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만족스럽지 못했다. 헬라의 신들이 정열과 상상력을 제공했지만 탁월한 도덕은 제공하지 못했다. 신들의 도덕성은 일반세계보다 못했다.
[디오니소스 숭배]
당시의 종교는 헬라나 로마도 동일하게 국가적인 형태였다. 당시 종교는 신비적인 요소가 없었고, 신들은 인간과 닮았었다. 또한 신들과 접촉은 거의 없었지만 소수의 영웅들에게는 가능했다. 이러한 헬라 종교에서는 신들과 신비적인 접촉이 강조되지 않았다. 신과 접촉을 주장하는 종교는 밀의종교 (mystical religion)이였다. 헬라 종교에서 밀의적이고 열광적인 성격은 디오니소스 (Dionysus) 숭배와 관련되었다.
첫째, 디오니소스 숭배에서는 신과 직접적 교제가 있었다. 음악과 춤을 통해서 신적흥기 (divine frenzy)를 일으켜 신과 접촉하려고 시도했다. 둘째, 디오니소스 숭배에서는 사후의 생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호머에서는 사후의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는 단순하게 그림자로 표현하였지만, 디오니소스에서는 적극적인 믿음의 자세이다. 셋째, 디오니소스 숭배는 종교를 국가에서 분리하여 개인적인 인간을 만들려 한다. 메이첸은 열광주의가 발생하려는 반드시 개인주의가 되어야 하여 국가 종교에 걸맞지 않다고 했다. 또한 신들린 경험자들은 자신을 일반 시민들과 구별하는 성향이 있었다.
[오르페우스 종파와 피타고라스 종파]
헬라 공동체에서 신화적 음악가이고 점성술사였던 오르페우스와 관련된 오르페우스 종파가 있었다. 이 종파는 기원전 6세기에 발생된 것으로 추측되며 디오니소스와 관계가 유지되었다. 혹 디오니소스 종파에서 재형성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들은 사후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고 (보상과 형벌), 전생, 윤회에 대한 개념이 있었다. 이 오르페우스 종파는 피타고라스 (Pythagoras)를 스승으로 둔 공동체와도 긴밀한 관계를 두었다. 오르페우스와 피타고라스는 헬라 국가와 별개로 올림푸스의 신들을 숭배하여 힘을 부여받는 것과는 관계가 없었다.
[에레우시스 밀의종교]
에레우시스 밀의종교 (the mysteries of Eleusis)는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23Km의 거리에 있는 도시 에레우시스에서 행해진 데메테르 (Demeter) 숭배에서 유래한 것이다. 기원전 7세기 경에 에레우시스가 아테네에 의해서 정복될 때에 데메테르 의식이 소멸된 것이 아니라 정복자에 의해서 더욱 발전했다. 이 종교의 특징은 종교적 의식의 비밀 (mystery-cult)이다. 이 밀의종교는 고대시대가 끝나는 10세기 동안 헬라에서 꾸준히 활동하였다.
이 밀의는 세 단계로 구성되었다. 아테네 근교의 아그레 (Agrae)에서 “소밀의 (lesser mysteries)”, 다음 해 가을에 에레우시스에서 “대밀의 (great mysteries)”로 다음 일 년 후에 “신비적 환상 (mystic vision)”으로 되었다.
데메테르 종교는 농경의 풍성을 기원하는 것으로 숭배대상은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이다. 밀의에서는 불사의 보증도 제공되었다. 에레시우스의 밀의는 헬라에서 유일한 밀의종교는 아니었다. 사모드라게 섬에서 카베이리 (Kabeiri on the island of Samothrace) 밀의종교가 있었다. 에레우시스의 밀의종교는 체계적인 교리를 갖지는 않았다. 그들의 종교는 지성이 아닌 감성과 상상에 의해 이루어졌다.
헬라의 종교는 도시 국가 생활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 의인적 다신교로서 신적으로 직접적인 접촉과 개인적인 특별한 복을 수여받기 위한 것이었다.
[헬라 종교의 쇠퇴]
헬라 종교는 최소한 세 가지 결정적인 이유로 쇠퇴하였다. 첫째, 철학이 신에 대한 믿음을 파괴하였다. 헬라 종교의 기반에서 헬라 철학이 강하면서 논리적이고 비판적으로 원리를 탐구하면서 신화가 거부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헬라 종교가 국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국가의 멸망으로 중대한 변화를 갖게 되었다. 셋째 동방의 많은 종교의 등장이 강력한 영향이었다. 올림프스가 무너질 때에 그들은 다른 정신과 마음을 받을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헬레니즘의 특징과 붕괴]
알렉산더에 의해서 형성된 문화가 헬레니즘 시대이다. 헬레니즘 시대는 첫째, 세계 시민주의 (cosmopolitanism)이다. 알렉산더에 의해서 인종적 장벽이 무너지고 언어 (Koine)가 통일되었다. 로마 제국에 의해서 정치제도가 통일되었다. 도시 국가에서는 통일된 정치가 아닌 개인주의가 용납되었지만, 로마제국에서는 황제숭배가 이루어졌다.
황제숭배를 기독교에서는 거부하여 정치적인 반역의 위치가 되었다.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의 일종으로 보았다. 당시의 유대교는 로마에서 공인된 종교 (religio licita)의 위치를 확보했었다. 황제숭배의 선전 (religious propaganda)은 종교의 신들을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교활동에 장벽은 되지 않았다. 다른 종교들은 로마제국의 황제숭배를 배타적으로 보지 않았다. 하나의 신을 더 받는다는 것이 본래의 신을 버린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헬레니즘의 시대는 탁월한 혼합종교 (syncretismpar excellence) 시대였다. 모든 민족 신들은 위대한 신성 (great divinity)으로 융합하여 “아풀레이우스의 변모 (Metamorphose of Apuleius)”할 수 있었다. “변모”에서는 모든 여신들의 총합으로 애굽의 여신인 이시스 (Isis)로 융합시켰다. 여신들은 모든 신들을 포용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헬라인들의 황금시대에는 인간이 최종 목표로서 인간의 능력을 즐겁게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헬라인의 영광스러운 업적은 애석하게 실패했다. 아네테는 마케도니아에 의해서 정복되어 몰락되었다. 헬라의 멸망에 대해서 머레이 (Gilbert Murray, Four Stages of Greek Religion, 1912)는 “신경쇠약, a failure of nerve”라고 표현했다. 즉 국가의 몰락과 함께 종교적 영역에서 속죄의 갈망 형태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성 외부로의 도움을 통한 구원에 대한 욕구가 발생했다. 즉 인간성에 대한 재고가 일어난 것이다. 헬라의 멸망으로 헬라의 휴머니즘의 변화가 발생했다. 언제나 풍족하고 기쁨의 휴머니즘을 대신해서 신의 은혜를 기대하는 휴머니즘이다. 모든 일의 기초를 인간에 기초하지 않고 신에게 기초한 것이다. 이러한 “신경쇠약”이 역사철학자로 높이 평가된다할지라도 헬라의 속죄사상은 헬라종교에 채워지지 않았다. 그들은 새로운 신을 탐구하였지, 기독교적인 속죄나 구원에 대해서 염두하지 않았다. 즉 종교사학파적인 개념을 도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철학이 고대 신들을 몰락시켰는가? 메이첸은 부정했다. 철학이 우주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이데아의 높은 세계를 추구하며 에로스에서 탈출하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또한 에피크로스 학파나 스토아 학파는 존재론이나 인식론에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 윤리학에 관심이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1세기와 20세기가 유사하다. 이론에 대한 불신, 신학에 대한 멸시, 사회적 실천적 문제에 대한 독점적 관심은 헬레니즘과 현대가 동일하다. 이러한 현상에서는 지식이 퇴보했다.
[헬레니즘에 융합되는 동방종교]
헬레니즘의 몰락에 동방의 여러 종교들이 침투하여 혼합되었다. 기원전 1세기 무렵에 철학자 포시도니오스 (Posidonius)는 동방의 밀의종교를 스토아 철학에 도입시켰다. 이것은 후기에 신플라톤주의로 발견되며, 철학과 허풍 (charlatanism)이 혼합되어 정점에 이르렀다.
헬레니즘 시대에 스토아 학파는 인류 형제애를 위해 대원리를 제시했다. 즉 세계시민주의(세계동포주의, 사해동포주의, cosmopolitanism)와 개인주의 (individualism)이다. 노예를 소유물 (chattels)이 아닌 사람으로 취급하는 인도주의에서 인간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이론이 등장했다. 스토아 학파는 이론을 세우고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기독교는 어느 정도를 성취했다. 바울에게 나타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없이 스토아 저자의 사상과 유사하다. 그러나 바울은 스토아 학파의 인도주의적 관점이 아닌 그리스도와 구원관계에서만 만인이 형제가 됨으로 양자는 서로 다르다.
[동방 밀의 종교의 진군]
바울이 전도하는 지역에는 이미 동방의 밀의종교들이 자리잡고 있었고, 다신교의 사상이 남아 있었다. 동방의 미신과 밀의종교의 범람으로 세계화가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의 사역으로 로마에서 기독교가 동방의 밀의종교를 꺾고 대안종교로 부상하였다. 밀의종교는 일반인들이 다른 종교와 아무런 갈등이 없는 강점이 있었다.
[최고의 밀의 종교 키베레 (Cybele)]
밀의 종교의 최고는 프리기아의 키베레 (여신으로 신들의 위대한 어머니) 종교이다.
로마의 종교에서 행해지는 아티스 (Attis) 키벨레의 남편의 대축제의 절차: 3월 15일에 예비 축제, 3월 22일에 덴드로포리 (Dendrophori)가 키베레 신전에 소나무 (아티스)를 나무를 운반한다. 나무를 베는 것은 신의 죽음을 의미한다. 3월 24일에 죽은 아티스를 애도함의 절정으로 자해를 하면서 애도한다. 3월 25일 야간에 신의 부활과 현현이 이루어진다. 이날은 힐라리아 (Hilaria)로 환희의 날로 신의 부활을 축하했다. 3월 26일은 안식일이고, 27은 성상과 성체의 장엄한 수세식이 거행되었다. 키베레와 아티스의 관계는 밀의였지만 제의는 공개적이었다. 이 제의는 로마 전에 동방에서 이미 거행되고 있었다.
타우로볼리움 (Taurobolium)은 황소의 피로 죄를 사함받는 상징적 의식으로 4세게 정도에 정착된 의식이다. 2세기 이전에는 어떤 타우로볼리움의 자료가 없다. 즉 타우로볼리움의 죄사함의 방식에서 기독교가 영향을 받지 않았다.
[애굽의 이시스와 오시리스]
이시스와 오시리스 (Isis and Osiris)의 숭배는 헬라보다 훨씬 고대에 애굽에서 시행했었다. 오시리스는 죽은 자를 통치하는 통치자였다. 기원전 300년경 애굽이 프톨로메 왕국이 건국되면서 세라피스 (Serapis)로 전환되었다. 즉 애굽적 요소와 헬라적 요소가 융합되어 정치와 교묘하게 연결된 종교로 면모했다. 이시스와 세라피스는 명확한 신학 체계나 고매한 윤리가 아닌 거대한 의식으로 효과를 거두었다. 이 종교는 미트라 (Mithras)와 융화되어 기독교의 최강의 적수가 되었다.
애굽의 오시리스는 페니키아의 아도니스 (Adonis)와 유사하다.
아티스, 오시리스, 아도니스는 여신의 상대의 남신으로 죽음과 재생이 되는 점에서 유사하다. 브뤽크너와 많은 현대 학자들은 이러한 구도가 기독교의 부활 개념의 근원으로 표현했다. 아티스는 부활은 없고 기쁨만 있고, 오시리스에게도 부활은 없고 죽은자를 지배하고, 아도니스는 신의 죽음과 중생의 찬미에 관한 최상의 설명이다. 통설에 의하면 세 신은 식물의 신들로 해마다 싹이 돋아는 생명력의 원리로 복과 농업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다양한 밀의 종교는 소아시아와 애굽에서 발흥한 것이었다. 시리아의 종교는 바알 (Baals)이다. 바알과 상대인 여신이 있었지만 명확하지 않다. 시리아의 종교는 부도덕했지만 페르시아의 천상 존재 (heavenly bodies)를 숭배와 태양 유일신교의 형태 사상을 도입하면서 향상되었다. 이 개념은 제국에서 기독교가 승리하기 전까지 가장 유력한 종교였다.
페르시아의 밀의종교 (Persian mystery)는 어떤 종교보다 우수했지만, 바울에 의해서 몰락하였기에 바울의 종교 연구에는 중요하지 않다. 미트라교는 명확한 윤리성, 선과악의 투쟁 교리 등으로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미트라교는 이시스교와 함께 기독교의 최강의 대항자가 되었다.
바울 시대의 종교의 특징은 제사의 허용 문제가 아닌 무한한 융합이었다. 종교와 종교를 넘어, 철학과 종교까지 융합되었다. 그런데 난점은 보도자료의 연대가 늦다는 점이다. 동방 밀의종교에 바울의 기원을 제시하려면 바울 시대보다 훨씬 이후의 자료에 호소해야 한다. 300-400이 지난 자료에 근거해서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겠는가? 현대종교사학파에서 이교에서 영향을 받은 기독교라고 할 때 이렇게 답을 낼 수 밖에 없다. 첫째, 기독교 이후의 이교적 답습이 어느 경우에도 기독교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다. 둘째 기독교와 일반종교가 너무나 유사할 때에 유사성을 인정하면 안된다. 셋째, 이교적 관습은 기독교 관습에 의존하지 않지만, 기독교는 반드시 이교적 관습에 의존한다.는 규정을 세워야 한다. 그래서 비록 자료의 연대는 기독교 보다 후대의 작품이지만, 그 사상은 꼭 기독교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틀림없이 세운다.
메이첸은 기독교가 유대교와 동일하게 배타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기에, 이교적인 가르침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거부했다고 제시했다. 기독교의 회심에는 이전의 믿음을 열정적으로 폐지하는 것을 갖고 있다. 바울의 개종은 이러한 개종이다. 또한 문헌상의 후대의 저작으로 역사적 전 단계로 설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타우로보리움이 한 예로, 4 세기에 형성된 종교의식에서 기독교의 피의 죄사함의 방식의 근원으로 제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기독교 이전의 밀의 종교]
기독교 이전에 헬라에 있었던 밀의 종교로 기독교를 재구성할 수 있는가? 그러나 고대 저작들의 연대기는 매우 불확실하다. 종교사학파에서 주장하는 어떤 문서도 기독교 이전에 쓰여졌다고 확언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헤르마스 문헌]
최근에(1930년대) 헤르마스 트리스메기스투스 (Hermes Trismegistus)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이 문서는 14세기까지 논문을 포함하고 있다. 이 문서가 기원후 300년경에 완성되었다는 의견은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없다. 그 중에 있는 포이맨드레스 (Poimandres)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크놀 (K. Kroll)은 헤르메스 문헌을 연구하는 사람으로 포이맨드레스 (Poimandres)가 가장 후기 작품으로 놓고 2세기 후반 이전의 것으로 간주했다. 더우기 지엘린스키 (Zielinski) 포이맨드레스가 헤르메스 문헌에서 가장 최초의 것이라고 보았다. 레이첸스타인 (Reitzenstein)은 헤르마스 목자 (Shepherd of Hermes)가 포이맨드레스 (Poimandres)를 원형으로 의존을 입증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인정을 받지 못했다.
헤르메스 문헌에 있는 여러 관념의 기원에 대한 견해가 분분하다. J. 크놀, W, 크놀, 레이첸스타인과 여러 학자들은 헤르메스 문헌의 기원을 기독교로 보는 경향을 강력히 거부했다. 반면 하인리치 (Heinrici)는 통설에 반대했고, 이에 빈디쉬 (Windisch)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빈디쉬는 기독교가 동방 종교로 영향을 받은 중간형태로 제시했다. 헤르메스 문헌에 대한 하인리치의 논제는 “(1) 헤르메스 문헌은 신약 시대 이후이다. (2) 저자는 유대인의 영향을 받았다. (3) 헤르메스 문헌의 가장 마지막 부분에서는 분명히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이다.
메이첸은 헤르메스 문헌을 통해서 기독교 기원을 밝히려는 시도에 대해서 문헌의 연대기를 근거로 거부하였다. 오히려 헤르메스 문헌에는 다양한 기독교적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다.
[포이맨드레스 (Poimandres)와 바울의 복음]
혹자들은 바울의 신비로운 영적 분위기를 포이맨드레스 (Poimandres)에서 찾으려 했었다. 비록 포이맨드레스 (Poimandres)와 바울이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어떤 체험에 의해 변화하는 모습이 있다할지라도, 메이첸은 포이맨드레스 (Poimandres)를 환상적인 사변으로, 바울의 역사적 복음으로 날카롭게 대조시켰다. 헤르메스에서 최종목적은 ‘신화되는 것’이지만 바울에게서는 ‘인격적 관계’ 뿐이다. 바울이 신비적 기독교 (the Christ-mysticism)이지만 결코 범신론적 신비는 아니다. 초자연적이지만 생활을 변화시킨 어떤 영향력이 아니며, 신격화의 변화가 아닌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이다.
메이첸은 헤르메스 트리스메기투스 (Hermas Trismegistus)와 오라큘라 칼다이카 (Oracula Chaldaica)을 비교했다. 이 문헌의 저작시기를 W. 크놀은 기원후 200년경으로 추측했다. 크놀은 여기에서 기독교적 영향은 없고 주변에는 유대교의 영향이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기원후 200년의 문헌을 근거로 바울의 종교 기원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헬라의 Magical Papyri]
매직 파피루스 (Magical Papyri)를 중요한 자료로 생각하는 학자는 데이트리치 (Dietrich)와 레이첸스타인 (Reitzenstein)이다. 이집트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문서 가운데 주술의 관련된 문서에 관심을 보인 것이다. 이러한 주문으로 구성한 자료가 Magical Papyri이다. 데이트리치 (Dietrich)와 레이첸스타인 (Reitzenstein)는 파피루스에서 미트라 (Mithrsa) 종교의 제식문과 유사성을 제안했다. 동방의 밀의종교와 이집트의 종교가 융합하는 좋은 문서이기는 하지만, 파리루스 사본은 기원후 4세기 초에 쓰여진 것이다. 그래서 헤르메스의 문헌처럼 바울의 복음과는 다르다. 파피루스에서는 신성합일사상을 유지하고 있다.
[영지주의 (Gnosticism)]
기독교 이전의 이교에서 기독교와 관계된 분파는 영지주의이다. 영지주의는 기독교 신앙을 왜곡하는 이단 (heresy)이다. 메이첸은 2세기의 영지주의에서 오히려 기독교에 영향을 받았다고 제시했다.
영지주의는 신약성경에서도 발견되었지만 자료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영지주의는 기독교 이전에도 존재하였기에 기독교 근원으로 밝혀진다면 훨씬 덜 위험할 것이다. 그래서 문서를 재현하려고 노력했지만 기독교 이전의 문서를 재구성하지 못했다. 현존하는 영지주의 문헌은 기원후 2세기 말과 3세기 초엽의 것이다. 메이첸은 이러한 문헌과 바울 신학을 비교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하였다.
[필로]
기독교 이전의 또 다른 연결점으로 바울 이전 사람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Philo)를 제안했다. 그러나 필로와 바울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아무런 성과가 발생하지 않았다. 바울이 필로를 의존하고 있다는 입증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