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바울
존 드레인 / 두란노 / 2011.4.1
기독교의 신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바울은 중대한 인물이다. 그의 저서는 신약의 방대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데, 그는 선교여행을 통하여 복음을 유대인 공동체를 넘어서서 전세계로 가지고 갔다. 그는 자신의 인생여정에서 자신이 행한 일들에 대한 생생하고도 면밀한 기록을 남겨두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그의 서신서 각각에는 광범위한 해석이 가해지고 있다. 사진들과 지도, 그리고 도표들은 일세기를 실감나게 떠올리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보다 학구적인 주제들에 대한 글들은 전문적인 지식을 만족시킬 것이다. 역사적인 구체성과 신약의 원문에 충실을 기하고 흥미진진한 진술들과 현행 학설을 염두에 둔 이 책은 개개인의 독자들 그리고 학교나 대학, 어디에서나 유익하며 자극을 주게 될 것이다.
○ 목차
제1장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제2장 핍박자 바울
제3장 바울과 율법주의자들과의 대결
제4장 선교사 바울
제5장 목회자 바울
제6장 바울의 로마 기착
제7장 옥중의 바울
제8장 그리스도 안이 있는 한 사람
○ 저자소개 : 존 드레인 (John Drane)
성서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 애버딘 대학교에서 하워드 마셜 교수에게 수한한 뒤, 맨체스터 대학교에서 목음주의 신학자 프레드릭 브루스 교수의 지도하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세계 초대 복음주의 신학교인 풀러 신학교에서 신약한 교수로 재직 중이며, 대표적인 초교파 단체인 ‘스코틀랜드 선교위원회’에서 의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의 사상과 관습을 통해 영지주의를 연구해왔으며, 이러한 학문적 성과는 현대인에게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무엇인지, 성경에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하는지에 관해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했다. 다양한 고고학적 사료를 엄밀하게 분석하고 대중적인 글쓰기로 소통하는 그의 저서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학계와 교계에서 널리 격찬을 받았다.
대표 저서로는 『바울』, 『구약신앙』, 『예수와 4복음서』 등이 있다.
– 역자: 이중수
영국 Capernway 신학교, London Bible College 졸업
○ 책 속으로
현대의 설교자들이 청중들에게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라고 권면할 때에는 대개 예수가 하신 일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실로 복음서에는 그리스도의 인애, 돌봄, 선행에 관한 끝없는 실례들이 적혀 있다. 그런데 바울은 크리스찬들에게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강권한 적이 없다는 것은 퍽 특이하다. 바울이 크리스찬들에게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라고 했을 때는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셨을때 원래 가지셨던 모든 것들을 다 포기했다는 뜻에서 한 말이었다. 그러니까 진정 크리스찬이 되려면 자기를 모두 포기하고 완전히 그리스도의 것이 될 각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믿음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요청에 응답했을 때 배운 교훈이었다. 바울서신들에는 이 가르침이 금실처럼 면면이 엮어져 있다. — p 112
○ 독자의 평
본서는 바울 서신서를 언급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바울의 성장배경과 바울에게 영향을 줬을 만한 사상들이나 배경들을 언급해주면서 바울 서신서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책의 전체적인 순서는 바울의 성장배경 및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다루는 것으로 시작하여 회심하기 전의 핍박자로서의 바울, 회심 후 선교사로서의 바울을 그려주고 있다. 바울이 평생을 바쳐 기독교의 진리를 세우기 위한 노력을 볼 수 있는데 저자는 바울 당시의 기독교를 무너뜨리려는 가장 큰 요소로 유대주의와 영지주의를 꼽고 있다. 본서를 읽다보면 저자는 바울을 성경의 한 인물로서, 혹은 학문 분야의 하나로서 다룬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본서의 마지막을 읽게 되면 꼭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본서는 신약성경에서 개별 저자로서는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1/3정도의 분량을 기록한 사도 바울과 그의 저서에 대한 John W. Drane교수의 저서이다.
John W. Drane교수는 맨체스터 대학에서 바울을 연구하였고 일반 학교에서 종교교육학을 가르쳤었다. 최근 몇 년간 미국의 Fuller신학교에서도 계절학기에 신약학 강사로 가르쳤으며, 현재는 스코틀랜드의 스털링 대학교(Stirling University)에서 종교학 강사로 있다.
드레인 교수의 저서로는 「예수와 4복음서」, 「구약 이야기」, 「초대교회의 생활」, 「구약 신앙」, 「바울」등이 있는데 그 중, 「예수와 4복음서」와 「바울」은 방대한 분량이 아니면서도 최근의 신학적 이슈들을 포함하여 많은 논의들을 하고 있기에 내용면에서는 방대하다 할 수 있다. 그만큼 드레인 교수의 1C 당시에 대한 배경지식은 뛰어나다.「예수와 4복음서」에서는 보수적인 입장에서 보기에는 약간 무리한 면이 있기는 하다. 그의 접근법이 성경 텍스트만을 두고 보는 것이 아니라 배경지식과 역사적인 사실들을 근거로 하여 텍스트를 해석하고 있기에 성경해석에 있어 약간 진보적인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뒤에서도 언급하겠지만 드레인 교수와 같은 접근법은 성경을 더 생동감 있게 보며 이해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특히 본서에서는 저자 문제와 독자 문제를 해결하는데, 또한 각 서신서들을 기록 하게 된 배경을 풀어내는데 있어 그가 가지고 있는 방대한 지식을 동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내용 요약
제1장.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길리기아의 다소(Tarsus) 에서 출생했다. 다소는 대학도시이며 행정과 상업의 중심지였음. 헬라문화의 지배하에 있는 도시였다.
바울도 헬라문학을 인용했다. 에피메니데스 (Epimenides), 아라투스 (Aratus) 시인들을 인용함.
이후 예루살렘으로 유학감.
바울은 가말리엘에서 배움. 가말리엘은 힐렐 (Hillel)의 손자였음. 힐렐은 샴마이 (Shammai)보다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형태의 유대주의를 가르침.
샴마이는 이방인을 배척했으나, 힐렐은 이방인들을 환영하고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전도하였음.
*바울의 마음에 영향을 끼쳤던 3종류의 사상가
1)유대교, 2)헬라철학, 3)신비종교
1) 유대교
바울은 자신을 바리새인과 가깝게 여김. 바리새인의 라이벌은 사두개인이었음.
바울은 충실한 바리새인이었기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들을 위해 성취해주신 귀한 사역의 중요성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2) 스토아철학
불트만은 1910년에, 바울의 논리전개가 스토아학파의 스타일과 비슷하다고 지적하였다.
수사적 질의법과 단편적인 지론을 씀. 그리고 문제제기를 위해 가상적인 적수를 설정하며 운동경기, 건축, 및 일상생활에서 예화를 끌어오는 형식. 그러나 스토아철학에서의 신은 추상적인 인간의 이성이고, 그렇게 추상적이기에 불투명하다.
스토아철학에서의 구원은 자족이다. 그리고 스토아철학에서 미래란, 소망이 없는 절망이다. 그들은 잇달아 일어나는 세계사의 한 주기 안에서 다시 태어나거나 윤회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가 멸망하면 또 거대한 주기가 휩쓸려 반복되는 운명을 말한다.
바울이 스토아철학의 문구나 단어를 차용하였더라도 그것은 새로운 의미를 덧입혀 원용한 것이었지, 스토아철학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메시지는 너무나 멀다.
3) 신비종교
바울당시 가장 유력했던 신비종교는 미드라교 (Mithraism)이었음. 미드라스 신이 충성된 자들을 구해주고 천국에 가도록 도와준다고 믿었다.
신비종교나 기독교나 둘다 동방에서 로마로 왔고, ‘구원’을 말하며, 입교의식과 聖食(성찬)이 있었다. 그들은 구주신을 主(Lord)라고 불렀다.
바울은 이러한 신비종교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거다. 그리고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바울이 때때로 신비종교의 언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을리도 없다. 물론 무의식적으로 쓰기도 했을 것이다.
바울은 당시 세계 3대 사상인 유대, 헬라, 신비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바울이 단지 자신의 문화적 배경이 배출한 자연적인 산물인 것은 아니다. 바울은 자신을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제2장 핍박자 바울
1. 유대인들의 꿈
메시야가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고대 다윗 왕가의 한 왕으로 드라마틱하게 왕림할 것이고,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로마인들을 몰아낼 것이다.
2. 그러니 예수가 왔을때 유대인들은 다 실망할수 밖에 없었다.
예수는 왕궁출신은 커녕 존재도 없는 곳에서 태어났고, 군대도 없었으며, 종종 물리적인 폭력을 경멸했다.
스가랴의 예언 성취로 성전에 들어갔을때는 로마인들에 대한 승리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소네서 수모와 죽임을 당하려 들어간 것이었다.
3.바울은 스데반 살해사건이후 다메섹으로 가려 하다.
예수를 따르는 광신도들이 집결해 있는 곳은 다메섹이라는 도시였음.
다메섹은 Nabatean 왕국내의 독립도시였음. 아레다4세(Aretas IV)가 명목상 나바티안왕국의 통치자였지만, 다메섹을 직접 통치하진 않았음 그래서 이 지역은 종교난민들이 몰려드는 곳이었음.
로마인들은 이전에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에게 로마제국의 타지방에 있는 유대인들을 송환시켜 올 권리를 부여했었고 바울을 그것을 이용해서 다메섹의 크리스챤을 색출하려 했다.
4. 다메섹 회심이후 다메섹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나 ‘여러날’ 묵고 다메섹 근처 지역인 ‘아라비아’로 가서 3년간 머물렀다. 이후 다시 예루살렘에 가서 베드로와 15일간 지냄. 이후 예루살렘에서 바울신변이 위험해지자 가이사랴로 바울을 보내고 바울은 다시 다소로 귀향함.
바울은 길리기아(Cilicia)와 수리아(Syria)에서 11년간 지냄.
5.바울과 바나바가 수리아의 로마속령인 안디옥교회에서 1년간 동역하고 있을때 선지자 아가보가 말한 예언을 전해들음
아가보 曰 대흉년이 들어서 예루살렘 교인들이 영향을 받을 것이다.. 안디옥교회는 동료들을 돕기로 결정하고 모금을 한뒤 구호금은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전달하도록 함.
– 안디옥은 로마제국의 제3도시로서 높은 문화도시였음. 셀루시드인들(Seleucids)과 로마인들은 웅장한 성전과 기념비들을 여러곳에 세웠음.
6.바울과 바나바의 예루살렘 방문
AD43년에 방문하다.. 이때는 헤롯 아그립바1세 에 의해 AD42년부터 시작된 크리스찬 박해가 예루살렘에서 계속되던 시기였음.
7.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도 바울의 이방인 사역을 기독교 메시지의 타당한 확장이라고 기꺼이 인정해 줄 의사가 있었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크리스챤이 되려면 우선 할례를 받음으로써 먼저 유대인부터 되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에 젖어 있었다.
바울은 유대인들과 논쟁하게 된다.
제3장. 바울과 율법주의자들과의 대결 : 1차 선교여행
1. 안디옥-> 구브로(Cyprus) 섬
키프로스 섬의 Paphos에서 로마총독 Sergius Paulus에게 복음을 전함. 이때부터 히브리식 이름인 사울을 로마식 이름인 바울로 사용함.
2. 키프로스 -> 비시디아의 안디옥 -> 갈라디아의 루가오니아 지역
회당에서 바울이 한 설교로 유명한 곳. 비시디아 안디옥이다.
현지명으로는 얄바츠, 영어로는 Pisidia Antiokheia 다. 로마시대에는 안디옥이란 이름이 많아서 앞에다 지명을 붙였다. 그래서 비시디아 안디옥이다. 얄바츠는 조그만 시골 촌락 같은 작은 도시다. 이곳은 성지순례객들만 찾을 뿐 일반 관광객들은 거의 오지 않는다. 발굴이 제대로 안되어 부서진 돌무더기만 남아 있지만 넓은 지역에 흩어진 유적으로 보아 당시에는 상당히 큰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 신전과 원형극장, 아고라, 유대인 회당, 바울기념교회등의 유적들이 있다. 구글지도에는 Antiokheia Kazası Açık Hava Müzesi 라고 되어 있다.
3. 돌아올때는 키프로스빼고 나머지 왔던 루트 그대로 돌아감.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4.바울과 바나바가 수리아(시리아)의 안디옥으로 돌아온뒤,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도착한 대표단들이 불만을 터트림
갈라디아서 2:11~ 14
11.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유대인들은 이방인 크리스찬이라도 할례를 비롯한 유대규약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고 새롭게 믿은 이들 크리스챤들은 혼란. 그 율법이 구원에 필요하다 하더라도 도저히 지킬 수 없음을 알았음. 유대인들은 이렇게 소요를 일으키고 있었음. 소식을 들은 바울은 편지를 쓰기로 결정한다.
5.갈라디아서
쓰여진 연대 :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공의회(the Apostolic Council)에 참석키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하기 직전인 AD48년경에 쓰여짐.
(36년에 회심하고 다메섹에 잠깐 머뭄 -> 3년간 아라비아, 내지는 다메섹에서 사역함. -> 첫번째 예루살렘 방문 -> 다소에 머물다. -> 바나바가 안디옥의 이방인 기독교운동에 합세 -> 바울도 안디옥에서 바나바와 합류 -> 50년. 즉 바울 개종14년후 예루살렘을 재방문. 흉년구제를 위한 모금을 가지고)
– 누가 갈라디아 인인가?
현재 터키의 앙카라(Ankara) 지역에 ‘갈라디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았던 쎌트족들이다.
그런데 바울은 제2차, 3차 선교여행때까지는 갈라디아인들을 방문한 적이 없었음. 그러니 AD48년 같은 이른 시기에 갈라디아인들에게 편지를 쓸수 없음.
– 갈라디아(Galatia) 지방
갈라디아는 현재 터키지방의 동남북지역으로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지역을 가리킨다. 복쪽을 북갈라디아, 남쪽을 남갈라디아 지방이라고 부르는데 북갈라디아(Galatia)는 현재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Ankara)가 있는 이교적 지방을 말하고, 남갈라디아는 바울이 1차 선교 여행 중에 복음을 전했던 루가오니아와 비시디아 지방, 비시디아의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같은 도시가 있는 남부 지역(행13:14-14:26)을 말한다.
북부 갈라디아는 로마에 편입되기 전에 소아시아의 중북부 지역에 거주하던 ‘갈릭’(Gallic)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교지역이라고 해서 갈라디아인들의 지방이라고 지칭했다고 한다. 그 북부지역을 기원전 25년경에 로마제국이 정복하고 소아시아의 남부지방인 비시디아 지방 전체와 루가오니아 지방, 브르기아 지방의 일부분을 여기에 편입시켜서 그 지방 전체를 ‘갈라디아’주라고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1세기에 바울이 복음을 전할 당시에도 로마제국의 행정적인 의미로 남갈라디아와 북갈라디아 모두를 가리켜 갈라디아 지방이라고 했던 것이다.
신약성경 갈라디아서는 일부학자들이 사도행전16:6절의 2차 선교여행과 18장23절의 3차 선교여행에 언급된 갈라디아 지명과 갈라디아서 3장1절의 ‘갈라디아 사람들’이라는 것을 근거로 북갈라디아 지방의 교회에 보낸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북갈라디아를 말하는지, 바울이 1차 선교를 했던 남부지방을 가리키는지에 대하여서는 성경에 명확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확실한 선교의 근거가 있는 바울이 1차 선교 여행 중에 복음을 전했던 루가오니아와 비시디아 지방 그리고 비시디아의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같은 도시가 있는 남부갈라디아 지방(행13:14-14:26)의 교회에 보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서신은 주로 도시이름을 주로 사용하지만 갈라디아서는 지방이름을 사용하였고, 갈라디아지방의 여러 교회(갈1:2)라고 사용하고 있다.
갈라디아서는 1차 선교여행지에 보내진 것으로 갈라디아서는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먼저 쓰여진 데살로니가서와 더불어 신약성경 중에 이른 시기(40년대 후반 또는 50년대 초반)에 쓴 서신이기도 하다.
바울이 전도할 때 주로 회당에서 전도를 했기 때문에 처음 교회가 세워질 때는 유대인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그리스도인들보다 더 많았었다. 갈라디아 교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초기교회에 율법주의와 복음사이에 다소 혼란스러웠었다. 그래서 사도행전 15장에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이방선교를 위한 새로운 규정이 만들어 지기도 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써서 보낼 때도 갈라디아지방의 교회에 유대율법주의 교사들이 사도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고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행하여야 구원을 받는 다고 잘못된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심각하게 왜곡시켜서 갈라디아지방의 교회에 혼란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이를 바로 잡고자 몹시 화가 나서 급하게 써서 보낸 서신이 갈라디아서이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서신중에서 유일하게 칭찬이나 감사가 결여된 서신으로 처음부터 대단한 책망이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이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고, 이는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도 인정한 것임을 강조하고(갈1:1-2:21),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에게 구원 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약속의 말씀대로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믿음으로 되는 것임을 일깨워 주었다.
특히 갈라디아 지방 중에 루스드라성에서 사도 바울이 1차 선교 여행 중에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의 선동으로 돌에 맞아 거의 죽었다가 살아난 곳이기도 하며, 복음을 왜곡시킨 사건으로 바울을 진노케 했던 지방이다.
바울은 상이한 견해를 가진자들을 포용하기 위해 강경노선을 지양하고 거듭 양보를 하였다.
제4장 선교사 바울 : 2차 선교여행
1.바울, 실라(Silas), 루스드라에서 동참한 디모데, 드로아에서 동행한 누가
2.바울의 유럽진출
1) 드로아(고대의 트로이(Troy)로 가다)
2) 이후 네압볼리(Neapolis)로 가다(그리스의 카발라(Kavalla)항구)
바울일행은 네아폴리스(네압볼리)에서 그 지역의 중심도시인 빌립보로 가다.
네아폴리스에서 빌립보로 가기 위해 이용했던 도로는 에그나티안路(Egnatian way)였다.
이 도로는 군사와 상업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3.빌립보라는 로마식민지 도시, 마게도냐다.
이곳은 로마군의 퇴역군인들이 많은 도시임.
루디아를 만나고 그녀는 개종한다.
점치는 여종에게 머무는 귀신을 쫓아냄. 그 주인이 돈벌 곳이 사라지자 바울을 고소, 잡혀가서 바울과 실라는 태형맞은뒤 감옥에 갇힘.
밤중에 감옥문 열리고 바울과 실라는 도망가지 않고 간수는 그리스도를 영접함. 이후 바울은 자신이 시민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법적으로 태형과 고통을 당한 것에 대해 당국에 항의함. 이후 빌립보를 떠남.
누가가 빌립보에 남아 교인들을 돌봄.
4. 이후 데살로니가와 베뢰아로 감
실라와 디모데는 현지에 남고 바울은 아덴으로 감.
5.아덴
아덴은 고대세계의 학문의 중심지였음.
아테네여신의 신전인 파르테논신전이 있는 곳임.
이곳에서 젊은 로마인들은 철학연구나 동양의 신비연구를 찾았고 토론을 즐겼음.
바울은 이곳 아레오파고스에서 강론함. 강론하는 방식은 유대인들이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는 구약에서 시작하여 그 약속들이 어떻게 예수의 생애와 죽음 및 부활에서 성취되었는지를 말했으나, 여기 이 생판 낯선 곳에서는 그들의 논법을 빌어옴. 즉 하나님을 우주안에 있는 실재처럼 정하고 헬라적인 신관에서 출발함.
하나님을 찾으려는 우리인간의 탐구는 바로 그리스의 시인들- Epimenides 나 Aratus를 인용하여 하나님이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있지 않다’고 말함.
바울은 아덴에서 본 우상숭배를 BC6세기 세노파네스(Xenopahnes) 당시부터 철학적인 헬라사상에서 사용된 논법을 빌어 ‘일종의 무지’라고 단정하였음.
우상숭배를 단죄한뒤, 이제 참된 유일신을 믿어라고 전함. 여기까지는 그리스 청중들이 동정적으로 경청함.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킴으로서 확실한 증거를 주셨다고 하자 청중들은 바울을 비웃었고 화까지 내기도 함. 그들은 영혼불멸의 플라톤교리에 익숙했는데 바울이 말하는 것은 육신의 부활을 믿는 유대사상인 것이다. 이런 신앙은 지적인 헬라인들에게는 말도 안되는 가르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결신자가 나왔음.
6. 고린도
고린도로 감. 고린도에서는 18개월(1년 6개월)을 머무름. (1년 6개월 머물자고 목표로 잡고 머문것은 아니었을 것임)
먼저 유대인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이 방해하자, 회당 바로 옆에 있는 디도유스도라는 새 신자의 집에서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 이후 고린도 주민 다수가 크리스챤이 되었고 그 중에는 회당장인 그리스보도 있었음.
바울이 고린도에 머무를때 새로 부임한 로마 총독은 세네카(Seneca)의 형제인 갈리오 였음.
데살로니가의 소식을 실라와 디모데가 가지고 옴. 잘 감당하고 있기도 했도 몇가지 문제가 있기도 해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편지를 씀. 그것이 데살로니가전서임.
7.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 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고 그 말씀을, 충만한 삶을 누리게 되는 수단으로 인정하였다.
그런데 역시 데살로니가 인들에게도 몇가지 결핍이 있었다. 그들은 원래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도덕생활에 대한 문제에 걸리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5:13) 라고 함.
또한 죽으면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 바울은 예수의 재림을 믿고, 그렇다고 예수의 재림때문에 현재에 태만할려고 해선 안된다고 하였다. 크리스찬은 이 세상을 준비성 있게 살아야 한다.
이후 한번더 데살로니가에 편지를 쓴다. 데살로니가 후서.
어떤 크리스찬은 종교적인 은자가 되어 자기 의무를 회피하는데, 바울은 이러한 태도를 가진 데살로니가 교인을 꾸짖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응분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교훈한다.
제5장 목회자 바울(3차선교여행)
1. 고린도에서 18개월간 머물다 에베소-> 팔레스틴의 가이사랴->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돌아간뒤 -> 3차선교여행을 떠남.
이 3차여행은 에베소와 고린도를 거점으로 한 목회사역의 성격이 크다.
2.에베소: 아시아의 로마령 수도
– 길이 모두 대리석으로 깔린 호화로운 도시임. 목욕탕, 도서관, 극장, 시장등이 다 있음.
– 바울은 이 도시에서 3년간 머물다. 바울이 장기체류한것으로 보아 이곳은 바울 일생의 사역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 아르테미스 신전(Artemis ; 아데미; 혹은 Diana)이 있는 곳임 . 워낙 이교의 번창지였음
– 에베소에서 전도에 크게 성공함 그 여파로 에베소의 2대 종교산업이 망할 지경에 이르렀음. 마술서적이 불타고, 아데미신전 미니어쳐 기념품 판매가 저조해지고. 그래서 데메드리오를 비롯한 사람들이 크리스챤들에게 불만을 품고 도시에서 폭동을 일으키기도 함.
– 에베소에 머물때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로마서를 쓰다.. 이 글들은 신학적 책자가 아니라 바울의 초기 서신들처럼 고대의 일반서신 양식에 맞추어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생겨난 글들이다.
3. 고린도
고린도교회는 퇴폐성향의 문제가 있었고 바울은 그것을 염려하였고 편지에 내용을 썼다.
고린도교회안에는 분열된 4개의 당이 있었다.
1)바울 당: 자유주의자들이다. 복음에 응신한 후에는 자기 좋을대로 살아도 된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메시지가 크리스챤으로 하여금 도덕적 의무를 해제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더 깊이 요구한다고 강조했다.
2)게바 당: 율법주의자들이다. 크리스챤이란 유대율법을 의식과 도덕면에서 모두 엄수해야 한다고 믿었다.
3)아볼로당: 아볼로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으로서 헬라철학적 배경하에 구약을 해석하는 자였다.
4)그리스도당: 이들은 특정 인물을 따르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자들로서, 주로 신비주의 계열이었다.
이 와중에 2세기에 ‘그노시즘’이라는 이단운동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은 , 모든 크리스챤들과 동등하고 자유로운 새 교제를 창조한다. 그래서 이러한 분열을 극복하는 방법은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함을 바울은 말한다.
4. 고린도서의 주제
1) 결혼
고린도교회의 상태가 절박했고 바울은 그것을 깊이 잘 알고 있었기에 단순히 결혼절차나 논할 처지가 아니었다.
다만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한 말들은 급박한 상황에 처한 크리스챤들을 대상으로 과감한 조치를 내리기 위한 발언들로 보아야 한다.
2) 자유
그리스도안에서의 자유란 부도덕하게 살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길 자유이다.
3) 민법
크리스챤들끼리 다퉈서 이교법정까지 쫌 가지마라고 쫌!
4)고기 (고전8:1~ 11)
고린도 도시에서는 정육점이 없었음. 그래서 고기를 살려면 이교신전에서 제물로 바친 이후 유통되는 것을 사야했음.
그런데 교인들 중에는 그런 고기를 구입하는 행위조차도 이방신들의 경배에 동참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음.
5) 교회에서 여성들에 대해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것이 분명 그리스도안에서 인종이나 계급 및 성별의 차등이 없는것이라고 가르쳤고, 고린도교회의 여자 성도들은 그 말로 고무됨!
당시에는 정숙하고 존경받는 여인들은 머리를 가리지 않고 공중앞에 나서지 않는 것이 통상적인 사회적 관습이었는데, 교회의 여인들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앞에 나가고 그랬던 거임. 이는 교회가 전도하려는 그 비기독교사회인 고린도 정서와 맞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여자들에게 당시의 사회풍습을 따라 머리를 가리라고 제안한 것이다.
6) 예배때 동시에 여러 사람이 나서고 있음
이러면 예배가 방해됨. 그래서 은사는 유효하고 소중하지만 전교회를 질서있는 운영하는 방향으로 행사하도록 권면함
7)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바울이 여자들에게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한 것은 고린도 내부의 특수사황에 적용되는 조언이다.
2세기의 영지주의 이단에서는 여자들이 눈에 띄게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기에, 신약시대이후에는 교회가 여자들의 공적 사역을 정식으로 물리치게 되는 이유중 하나가 된다.
그리고 바울은 특정 그룹 여성들을 타겟으로 말했다. 특히 미혼녀 말고 기혼녀들 일부에게 교훈한다.
5. 로마서
1) 로마는 제국의 전도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전략지임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신앙을 피력하는 종합적인 진술을 담은 편지를 로마의 교회에 보냄으로써 방문준비를 진행시킴. 이 서신이 바로 로마서임.
2)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더이상 죄의 종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종이다.
(왜 하필 종이라는 모티브를 썼는가? ‘실천’을 종용하기 위해서이다. 죄에서 풀려나면 자유인데 이 자유는 방종이 되기 쉽다. 자유에 지쳐버릴수 있기에, 하나님안에서 할 일을 하는 그런 모티브로 하기 위해 당시 사람들이 알기 좋은 ‘종’이라는 단어를 쓴듯.
3) 윤리
크리스챤의 윤리 도덕은 인위적인 규칙이나 외부에서 부여된 준칙들이 아닌 신자들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으로 세워줘야 한다고 바울은 역설함.
제6장 바울의 로마 기착
1. 3차선교여행을 마치고 일단 로마로 가고 다시 스페인으로 갈 계획을 세움
그런데 그전에 예루살렘을 먼저 방문하여야 했다.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위한 모금(헌금)을 가지고 말이다.
그런데 막상 예루살렘에 도착하니 핍작자 바울에 대한 소문이 안 좋음. 유대인들에게 있어 바울은 배신자였다.
2. 바울이 성전을 더렵혔다고 누가 거짓충동하였음.
당시 로마당국이 유대인들에게 자치적으로 심문하고 벌할수 있는 몇가지 범죄행위를 정해두었는데 그중 하나가 성전오염 행위임. 그래서 성전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보자마자 법정판결도 없이 바로 현장에서 죽이려듬. 그때 로마의 군대장관이 이를 저지함. 로마의 천부장이 바울을 채찍질하려 하자, 바울은 난 로마시민이라 하니 유대의 최고공회인 산헤드린이 소집됨. 그런데 여기서도 바울은 난 바리새인이고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다! 고 딱 던지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사이에 격론이 일어나 공회는 대소동으로 끝나고 맘.
3.로마당국은 바울을 팔레스틴 해안의 로마의 행정본부인 가이사랴로 송치시켜서 2년간 감옥살이 시킴.
여기서 벨릭스에게 심문을 받음. 무죄였음을 확신한 벨릭스는 그래도 바울이 혹시나 뇌물을 줄까 싶어서, 그리고 풀어주면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킬까 해서 소송처리를 연기함
4.새로 부임한 보르기오 베스도 총독 이후 바울은 로마로 가서 로마황제 앞에서의 판결을 호소하는 항소권을 행사하기로 하다.
5. 죄수선을 타고 가이사랴에서 로마로 가다.
바울은 누가와 아리스다고와 함께 죄수선을 타고 간다.
남부 이태리에 있는 보디올(Puteoli)에 기항함.
바울은 2년간 계속 죄수로 머물렀음. 그런데 바울은 자비로 빌린 집에서, 자신이 비용을 대어주어야 했던 로마 수위병들과 함께 살 수 있는 허락을 받았음.
바울은 로마의 수도에 오기를 계획했었지만 어떤 행태로 그 일이 실현될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가택연금에 처해 있으면서도 바울은 이방인들을 상대로 복음전파를 하게 되었다.
제7장 獄中의 바울
1. 옥중서신
골로새서, 빌립보서, 에베소서, 그리고 골로새에 살았던 빌레몬에게 보낸 개인편지. 빌레몬서
2. 골로새서 (Colossians)
골로새는 라오디게아 근처의 루크스라는 넓고 비옥한 계곡에 위치해있음 터키영토임.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에베소 전도중에 회심한 에바브라가 세운 교회임.
이곳에는 ‘골로새 이단’이 있었음. 그들은 완전하고 영적인 구원은 바울의 가르침처럼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얻어지는 게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靈智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함. 그런 신비로운 지식은 할례, 음식가림, 유대축제와 안식일 준수 등을 지킬때 얻어진다고 주장하였다. 골로새 이단들은 금욕주의자들이었다. 바울은 그러한 금욕주의적 도구들이 별 가치가 없다고 논평해버린다.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골2:17)일뿐 이라고 했다.
3. 에베소서
에베소서는 여러곳의 회중들에게 보낸 회람서신임.
에베소에서 감옥에 갇히기도 하다.
에베소에서 3년간 사역함
4.빌립보서
빌립보서에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본 Christ Hymn은 바울이 크리스쳔 행위의 모델로 예수의 행위를 들어 말한 것이다.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인애, 돌봄, 선행에 관한 많은 실례가 있는데도 바울이 크리스챤들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강권한 적이 없다는 것은 퍽 특이하다.
.. 그리고 이 빌립보서에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실례를 들어서 말하고자 하는바는 진정한 크리스챤이라면 자기를 모두 포기하고 완전히 그리스도의 것이 될 각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핵심이라고 생각한 것일 것이다.
5.바울의 기도문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6.목회서신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바울이 쓴게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19세기의 F.C.Bauer: 목회서신들은 2세기의 글이다. 당시 바울이 교회에서 별로 환영받지 못할때, 바울을 재해석하려던 자들이 만들어낸 거다
-> 근데 바울을 옹호하는 자들이 너무 세세하고 사소한 역사적 사실까지 날조할리는 없어서 이 주장은 아닌듯하다.
날조는 날조이되, 바울 자신의 글귀들이 약간포함되어 있는게 목회서신이다. P.N.Harrison 박사 등이 주장
-> 굳이 그 글귀들만 1백년이 넘게 보존되어 1백년이후의 모방필자가 써먹을수 있는지 의문이다.
교회조직이 바울의 초기저작들보다 훨씬 발전된 형태가 보인다. 이런 복잡한 체계는 2세기 교회의 조직을 반영하는거 아님?
-> 아니다. 목회서신에 나오는 교회의 직제는 이미 사도행전이나 바울 초기서신에서 언급된 것들이다.
목회서신에는 2세기 유사 영지주의의 영향이 남아 있다?
-> 이제는 학계에서는 그런 영향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바울서신은 원래 교회생활이 성령의 인도 혹은 카리스마틱하게 영위되었는데 목회서신에서는 그런 가르침이 없고 교회가 조직화된 인상을 준다.
-> 아니다. 바울은 원래 신령한 은사인 카리스마타(Charismata)에 대해 말할때도 교회안에서는 질서와 직분이 있어야 함을 일러주었다.
목회서신은 문장스타일과 어휘가 바울서신과 다르다.
1) 목회서신에서는 바울서신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단어가 약 175개 나오는데 이런 단어들은 2세기 크리스챤 필자들의 글에서 특징적인 단어들이다.
2) 목회서신에서는 ‘그리고’와 ‘그러나’ 같은 접속사들의 배열스타일이 바울서신과 다르다.
3) 바울이 즐겨쓰던 분사와 전치사가 112개나 빠져 있다.
-> 그러나 문장스타일과 어휘사용은 다루는 주제에 흔히 영향을 받는다
-> 목회서신은 이러한 문장분석을 하기에는 너무 짧아서 공정한 판정자료로서는 미흡하다.
-> 목회서신과 바울서신에서 언어적 차이는 있으나, 이는 집필주제가 달랐기 때문이거나, 바울이 노령이라서거나, 혹은 비서가 바뀌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헬라어로 고쳐쓰면서 스타일과 어휘가 달라졌을수도 있다.
제8장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
바울의 신학은 철학적인 체계가 아니다. 자신의 크리스챤경험을 통해 구성된 체험적 신앙이었다 .
반대와 논쟁에 부딪치면서 각 서신들이 나왔다. 碰倒.
바울신학의 핵심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생명과 부활과 화합과 평안이 가능하다.
바울 자신은 자신이 목표로 했던 인물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고, 또한 계속적인 자아반성을 한다고 해서 죄의식이 결코 해소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자기를 위해 하신 일을 통해 죄로부터 구속되었고 삶에 새로운 목표가 세워져 인생은 살 가치가 있다는 적극적인 가치관이 성립되었다.
바울은 불굴의 확신을 소유하고서도 넓은 마음을 가졌던 자였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에 대하여 위대하다고 생각한 적이 전무했다.
유능하고 모범적인 개척 선교사로서 성공을 하고, 신약의 2/3에 해당하는 분량을 집필한데에 바울의 위대성이 있지 않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으로서 조명해볼때 비로소 그의 위대성이 드러난다.
그는 자신을 가장 철저하고 혁신적인 방법으로 부인한 자이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빌립보서 3:8)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