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백년 동안의 고독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 문학사상사 / 2001.8.31
–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마술적 리얼리즘의 극치를 보여 주며 일단 한 번 잡기 시작하면 끝까지 손을 놓을 수 없게 하는 소설
창세기의 역사와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융합하여 인류 최후의 비극적 서사시를 빚어내고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알려면 딱딱한 역사책 대신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읽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 작품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사회적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소설의 이야기는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그의 사촌 여동생 우르슬라와의 근친상간적 결혼생활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남미의 처녀림 속에 마콘도라는 새로운 마을을 건설하는데, 이 원시적인 마을은 물질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번화한 도시로 발전했다가 무지개처럼 하루아침에 지상에서 사라져버린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부엔디아 가문과 등장인물 개인의 고독은 결국 빠져나갈 수 없는 돌고 도는 역사로 인한 고독이다. 이미 예언된 것처럼 마지막에 돼지 꼬리가 달린 아이가 태어나면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이같은 마술적 이야기는 유년기에 할머니로부터 들어온 전설이나 신화를 토대로 날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붓 가는 대로 기록한 것으로, 어디까지가 실제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환상인지를 구별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같은 환상적인 이야기들이 실제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더욱 극적으로 드러내 보임으로써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마르케스만의 영역을 인정받게 하였다.
한편, 저자 마르케스는 ‘백년 동안의 고독’을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작품 전체에 흐르는 미세하고 집약적인 묘사는 이러한 오랜 노력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뉴욕 타임즈로부터 ‘책이 생긴 이래 모든 인류가 읽어야 할 첫 번째 문학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으며 수많은 교육기관의 추천도서의 반열에 오른 이 책은 현재까지도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 줄거리
라틴아메리카의 복합적인 인종, 문화, 역사적 전통과 현실을 배경으로 한 소설. 흔히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고 말하는 라틴아메리카의 특수한 사회구조를 신화적 구성을 통해 환상적 이미지로 그려내고 있다.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서양 문학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서유럽과 미국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리고 19세기에서 20세기로의 전환을 기점으로 그들은 그 주도권을 이어받을만한 후대 작가에 대한 갈증을 토로하며’소설의 죽음’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잠시 숨을 죽이는 듯했던 소설의 부활은 엉뚱한 곳에서 진행되는데. 그곳은 바로 한 동안 서구 열강의 식민지를 거치며 역사적, 언어적, 문화적 혼란을 겪던 라틴 아메리카다. 그리고 그 부활의 중심에 있는 작가가 바로 콜롬비아 태생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Gabriel Garcia Marquez)다. 아르헨티나의 보르헤스 (Jorge Luis Borges)와 더불어 쇠락해가는 서구 소설계에 새로운 소설적 상상력을 제공한 그는 결국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8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데, 바로 그 수상의 대상이 된 작품이 1967년에 집필된 이 ‘백년동안의 고독’ 이다.
흔히 이 작품을 들어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수사를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환상적 장치들, 이를테면, 비처럼 하늘에서 밤새 쏟아지는 꽃비, 몇 번을 죽고도 살아 나타나는 집시노인, 집시들이 가지고 온 날아다니는 양탄자, 부모의 말을 듣지않아 뱀이 되어버린 사내, 마콘도 마을 사람들 모두가 앓게되는 전염병 불면증과 기억상실, 흙과 석회만 먹는 소녀, 어느날 하늘로 올라 사라지는 미녀, 나보코프가 다닐 때마다 그를 따라다니는 나비떼, 개미떼에게 끌려가는 돼지꼬리가 달린 아이 등 다양한 초현실주의적 현상이 작품속에 끊임없이 나열되며 쓴웃음을 자아내게 함에도 불구, 부엔디아 (‘좋은 날’이라는 뜻) 가문과 그들의 선조가 개척한 마콘도 마을의 백여년에 걸친 역사는 당시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을 생동감있고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마콘도 마을과 부엔디가 가문을 중심으로한 주민들은 서구 열강의 침략 하 라틴 아메리카와 오랜 식민지 생활로 고통받아온 민중을 대표한다고도 볼 수 있다. 가족 중 누구는 그들의 침탈에 전통적인 권위로 맞서기도하고, 누군가는 현실과 타협 막대한 이윤을 추구하기도 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반란을 일으켜 무력을 행사하기도 하지만, 그 어느것도 이 작품에서 특별하거나 영원한 가치를 부여받지 못한다. 전통을 중시하던 권위주의자는 정신병자가 되어 가족들에 의해 나무에 묶인 채 노년을 보내다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고, 수완을 통해 막대한 돈을 번 이는 결국 사치와 방탕을 거친 후 모든 것을 잃고 돌연히 비참하게 살해당하고, 반란을 일으킨 자는 전쟁마다 패배를 거듭해가며 민중의 영웅이 되지만 노년에는 방에 틀어박혀 금세공에만 열중하는, 일종의 ‘삶 속의 죽음’을 택한다. 애초에 그가 반란을 꽤한 이유도 자신의 어린 아내의 갑작스런 돌연사로 야기된 충격이라는 전혀 관련없는 이유가 적지않게 작용했다.
어쩌면 이것이 격변기를 살아가는 무지한 민중의 진솔한 모습이다. 일제강점기에서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수 많은 대다수의 우리 민중이 보여주었던 그 모습과 이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삶은 본질 측면에서 그다지 다르지 않다.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흥분도 하며, 분노하고, 슬퍼하고, 답답해 절규하지만, 결국 그것이 그저 세상이고 삶이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였던 그 본질 말이다. 이 작품은 라틴 아메리카 특유의 낙천성과 신비주의로 그 본질을 감싸 독특한 향기를 풍기고 있음에도 우리가 그 이질감을 손쉽게 넘어 진한 감동을 맛볼 수 있는 이유는 그 너머에 존재하는 ‘본질’이 이 세상 어디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진 ‘진짜’이기 때문이다.
그 ‘진짜’를 품었기에 생길수 있는 부담스런 무게감을 마르케스는 신비주의적 서술을 통해 무난하게 극복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이야기를 풀어가는 서술적 기교 측면에서도 상당한 완성도를 보여준다. 죽었거나 사라져 존재하지 않는 이들과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의 공존의 방법론에 대한 묘사와 몽환적으로 묘사되어 작품 속으로 자연스레 녹아든 라틴 아메리카의 홀로코스트 장면 등이 매우 인상적인데, 이런 전혀 다른 갈래의 다양한 이야기를 한 작품안에 품어낼 수 있었던 건, 그들 개개의 이야기를 전혀 이물감이 느껴지지 않도록 신비주의로 포장해내고 한 줄로 정교하게 이어붙일 수 있었던 마르케스 특유의 남다른 글쓰기 기술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무엇이든 순간일 수 밖에 없는 삶의 요소들을 하나씩 꺼내어 환상적인 채색을 통해 순간의 화려함을 강조해가는 기법 역시 누구라도 빠져들 수 밖에 없게 아주 매력적이다.
이 작품에서 빼놓지 않고 언급해야 할 부분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미묘한 반전이다. 부엔디아 가문의 자기 이름을 가진 마지막 후손인 아우렐리아노가 과거 100년 전 멜키아데스에 의해 쓰여진 산스크리트어의 양피지를 해독해 마지막까지 읽어나가는 것으로 끝나는 결말은, 장장 일곱 세대에 걸친 이 집안의 역사가 실제로 작품 속에서 전개된 것인지, 아니면 단지 아우렐리아노가 양피지의 기록을 읽어나간 것일 뿐인지 매우 모호하게 서술된다. 이러한 모호한 메타픽션 (Metafiction)적 서술은 이 작품의 전반에 흐르는 신비주의와 특별한 주인공 없이 엄청나게 많은 인물의 삶을 비교적 담담하고 건조하게 조명해간 다양한 실험적 시도에 멋진 정당성을 부여한다. 또한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억압과 저항, 주연과 조연이라는 이분법적 도그마 (Dogma)가 철저히 해체되었다는 측면에서, 이 작품은 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의 성격도 매우 강하다.
이 작품 속에서 모든 것은 소멸하며, 순환하고 변해간다. 그 어떤 것도 완성되는 법이 없이, 다만 다른 일의 과정이며 계기가 될 뿐이다. 큰 그림으로 보면 이것이 이 작품의 토대를 이루는 기본적인 세계관이다. 그것이 라틴 아메리카의 특유의 세계관이요 우주론을 차용한 것일 뿐일지라도, 이질적 문화 속에서 살아온 우리 독자들에게 마르케스가 작품 속에서 보여주는 세상은 약간 지만 또한 무척 매력적임에 틀림없다. 아무리 그 이면에 덧없는 생과 허구적 삶의 그림자만 드리워져있다는 그 ‘본질’을 우리가 이미 충분하게 알고있다 할 지라도.

○ 저자소개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Gabriel Garcia Marquez, 별명 : Gabo)
현실과 환상, 역사와 설화, 객관과 주관이 황당할 정도로 뒤섞여 있지만 이러한 혼돈 속에서도 현실을 보다 날카롭고 깊이있게 드러내는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대중적 인기, 상업적 성공을 함께 거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콜롬비아의 카리브해 연안에 있는 아라카타카란 작은 도시에서 태어난 마르케스는 12남매 중 장남이었으며, 태어난 후 8년 간을 외조모부의 집에서 살았다. 1946년에 마르케스는 보고타 근처의 시파키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콜롬비아 국립대학에서 잠깐 동안 법학을 공부했다. 그 후 1950~1965년까지 콜롬비아, 프랑스, 베네수엘라, 미국, 멕시코 등지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보고타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기자로 유럽에 체재하였다. 그 후 멕시코에서 창작활동을 하였고, 쿠바혁명이 성공한 후, 쿠바로 가서 국영 통신사의 로마 · 파리 · 카라카스 · 아바나 · 뉴욕 특파원을 지내면서 작품을 썼다.
1955년, 카리브해에서 10일 간 표류한 콜롬비아인 선원의 고통스런 체험에 대해 기사를 쓰며 그가 콜롬비아 해군을 비판했기 때문에 신문사는 문을 닫게 되었고, 그는 파리에서의 외국 통신원직을 그만두어야 했다. 쿠바 혁명이 끝난 후 그는 쿠바 통신사인 ‘프렌사라티나’에 들어가 보고타, 뉴욕, 멕시코시티에서 일하는 한편, 광고 회사에도 다니고 영화 대본도 썼다.
마르케스가 결정적으로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서였다고 한다. 그 소설을 읽고 마르케스는 이런 일들도 현실 속에서 벌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하는 데, 그보다는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런 이야기라면 자신이 훨씬 더 많이 알고 있고 잘 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는 법학 공부를 때려치우고 본격적인 작가 수업을 시작한다.
당시 그가 좋아했던 작가들은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플로베르, 스탕달, 발자크와 같은 리얼리즘 작가들이었다. 마르케스의 청년시절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백년동안의 고독’에서 ‘카탈란의 현자’로 묘사되기도 했던 학자 라몬 비녜스였다. 이 문학적 스승이 주재하는 소모임에서 그는 현대적인 작가들을 알게 된다. 그들은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존 스타인 벡, 테어도어 드라이저, 윌리엄 포크너와 같은 영미작가들이었다.
마르케스의 주제와 본질적 기교는 그의 성장 배경과 삶의 과정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마르케스는 기괴한 것을 단순하고 명확한 사실주의와 결합시키는 자신의 서술 방식과 지역 신화 및 전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모두 외할머니 덕분으로 돌린다. 한편 외할아버지는 1890년대 콜롬비아에서 벌어진 내전에 참가했던 인물로서 외손자인 마르케스가 위대한 등장 인물을 창조하는 데 영감을 주었다.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며 또한 그를 콜롬비아의 세르반테스 (Cervantes)라고 일컫게 한 ‘백년 동안의 고독’은 마콘도 (Macondo)라는 가공의 땅을 무대로 하여 부엔디아 일족의 역사를 그린 작품이다. 폭력으로 점철된 20세기 전반기의 콜롬비아의 정치적 환경 속에서 살아온 마르케스는 금세기 최대의 걸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작품에서 중남미의 정치적·사회적 현실에 대한 풍자를 신화적인 수법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현대의 중남미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혈육들의 모습을 이 작품의 등장인물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1981년에는 ‘신고된 사망자 연대기’가 라틴아메리카에서만 200만 부 이상 팔렸으며, 1982년 라틴아메리카 현대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된 이 ‘백년 동안의 고독’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1995년 ‘사랑과 또 다른 악마들에 관하여’의 불어판을 파리에서 출간하였다. 1999년 림프암 진단을 받았고, 2014년 4월 17일 향년 87세로 타계했다.
이외의 작품으로는 중·단편소설 「낙엽 : La hojarasca」(1955),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았다 : El coronel no tiene quien le escriba」(1961), 「마마 그란데의 장례식 : Los funerales de la Mam Grande」(1962), 「암흑의 시대 : La mala hora」(1962) 등과 장편소설 『백년 동안의 고독 : Cien a os de soledad』(1967), 『예고된 죽음 이야기 : Cr nica de una muerte anunciada』(1981) 등 다수가 있다.
– 역자 : 안정효 (AHN, JUNG-HYO, 安正孝)
1941년 12월 2일 서울에서 태어나 중동고등학교와 서강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코리아 헤럴드》, 《코리아 타임스》, 《주간여성》에서 기자로 일하다가 한국 브리태니커 회사 편집부장을 지냈다. 1975년 가브리엘 가르샤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으로 번역을 시작하여 150권가량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1977년 장편 수필 『한 마리의 소시민』을 《수필문학》에 발표했고, 1982년 존 업다이크의 『토끼는 부자다(Rabbit Is Rich)』로 제1회 한국 번역문학상을 받았으며, 1985년 《실천문학》에 『전쟁과 도시』(『하얀 전쟁』으로 개제)를 발표하여 등단했다. 장편 소설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 『가을바다 사람들』, 『은마는 오지 않는다』, 단편집 『학포 장터의 두 거지』, 『동생의 연구』, 중편집 『미늘』 등을 발표했다.
1989년 영문판 『하얀 전쟁(White Badge)』을 뉴욕(Soho Press)에서 출간하여 《뉴욕 타임스》 추천 도서(Books of the Times)로 선정되었고, 이듬해 『은마는 오지 않는다(Silver Stallion)』 역시 《뉴욕 타임스》 추천 도서로 선정되었다. 1992년 『악부전(惡父傳)』으로 김유정 문학상을 수상했고, 같은 해에 『은마는 오지 않는다』를 『돌아온 장군(Generalens genkomst)』이라는 제목으로 덴마크에서 출간했고, 1993년에는 일본어판 『하얀 전쟁(ホワイト·バツ ジ)』을, 2002년에는 『은마는 오지 않는다(Der silberne Hengst)』와 『착각(Illusion: Drei Erzablungen)』을 독일에서 펴냈다.
이 이외에도 창작교실 『글쓰기 만보』와 『자서전을 씁시다』를 비롯하여 번역 지침서 『번역의 공격과 수비』를 선보였고, 『고전시대 명배우 45』, 『반항시대 명배우 50』, 『낭만시대 명배우 55』 같은 영화 관련 책을 펴냈으며, 2017년에 『3인칭 자서전/세월의 설거지』를 출간했다.

○ 책 속으로
말없이 조용한 나날을 보내며, 집안에 넘쳐 흐르는 새로운 생명력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고,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노년기를 훌륭하게 보내는 비결이란 고독과 영광스러운 조약의 체결뿐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그는 아침 다섯시에 얕은 잠에서 깨어나,
부엌으로 가서는 언제나 변함없는 씁쓰레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하루종일 작업실에 들어앉아서 일을 하고,
오후 네시가 되면 의자를 끌고 테라스로 나가서는,
불타오르듯 강렬한 장미숲과 한낮의 밝은 태양과 끓는 주전자처럼 씩씩 소리를 내며 고집스레 우울을 짓씹는 아미란타는 의식하지도 않고,
어둠이 내리도록 그 자리에 앉아서 모기들의 성화에 못이겨 쫓겨 들어갈 때까지 줄곧 앉아 있었다. — p.227
한 순간의 화해란 평생동안의 우정보다 훨씬 값진 것— p.315
‘이럴 줄 모르셨나요?’ 그가 태연히 중얼거렸다.
‘세월은 흐르게 마련입니다’
‘그렇기야 하지’ 우르슬라가 대꾸를 했다. ‘하지만 별로 흐르지도 않아’
이 말을 했을 때 우르슬라는 자기가 옛날 죽음의 골방에서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 했던 대답을 그대로 되풀이 했음을 깨닫고는, 지금 자기가 말했듯이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원을 그리며 빙빙 돌고 있다는 생각에 몸을 떨었다.— p.370
인생의 가을이 무르익는 과정에서 가난은 사랑의 노예라는 젊었을 적의 생각을 다시 새롭게 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지난날의 광폭한 탕진생활과, 으리으리 했던 부유함과, 걷잡을 수 없었던 음탕한 삶이 결국은 역겨움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고, 고독을 나눌 수 있는 천국을 찾기 위해서 그들이 인생을 그토록 많이 낭비했어야만 했다는 사실을 슬퍼했다. 여러 해 동안의 삭막한 생활끝에 미친듯이 사랑에 빠진 그들은 침대에서뿐만 아니라 식탁에 마주 앉아 있는 순간에도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기적을 터득하고, 그들의 행복은 자꾸만 자라서 그들이 다 낡아빠진 두 늙은이가 되었을때도 어린아이들처럼 꽃피어났으며 강아지들처럼 정겹게 같이 놀았다. — p.374~5
순간적으로 자기의 영혼이 그토록 엄청나게 무서운 과거를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자기 자신의 향수와 남들의 향수가 찔러대는 필사적인 창 끝에 상처를 입은 그는 말라죽은 장미숲을 얽은 거미줄을 끈질김과, 독보리풀의 참을성과, 찬란한 2월 새벽 하늘의 인내심을 우러러보았다. 그리고 그는 갓난아이를 보았다. — p
그러나 끈질긴 운명에 쫓기던 비지따시옹은 이 비참한 질병이 자기를 어디까지라도 쫓아다닐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그대로 눌러 있기로 했다. 세상의 끝까지 도망을 온 지금이니, 다른 곳으로 더 달아날 수도 없었다. 비지따시옹이 왜 그렇게 놀라고 겁에 질렸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잠이 적어지면 더 좋지 뭘 그래.’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나가 유쾌하게 말했다. ‘깨어있는 시간이 많으면 인생이 그만큼 더 길어질 테니까.’ 그러나 비지따시옹은 불면의 고통이 잠을 못 이루거나 육체적으로 피로가 오기 때문이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력을 자꾸 상실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잠을 못 자고 깨어서 여러 가지 공상에 잠기다 보면 어릴적 추억을 뒤적일 시간이 줄어서, 과거가 자꾸만 사라진다는 얘기였다. 그러면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을 잊게 되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알아보지 못하게 되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도 잊게 되어서 결국은 과거를 망각한 백치상태가 된다고 했다. 숨이 넘어갈 듯이 마구 웃어젖히던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는 그것을 원주민들이 상상해낸 여러 가지 미신적인 병의 하나라고 넘겨버렸다.— p.56
몇 주일이 지나서, 비지따시옹의 공포가 많이 가신 어느날 밤에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나는 어쩐 일인지 잠이 오지 않아서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우르슬라도 잠이 깨어서는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푸르덴치오 아귈라 생각을 또 하고 있었어.’ 그가 대답했다. 그들은 잠시 동안 잠을 자기 못했지만, 이튿날 아침에는 개운한 기분으로 일어나서 그 일을 곧 잊고 말았다. 이튿날 점심때 그 얘기를 듣고 아우렐리아노는 좀 놀란 표정으로, 자기도 우르슬라에게 생일선물로 줄 브로치를 만드느라고 실험실에서 꼬박 밤을 새웠지만, 조금도 피곤한 줄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다 셋째날 그들은 더욱 놀라고 말았으니, 밤이 되어도 아무도 졸리운 사람이 없었으며, 벌써 50시간째 아무도 잠을 자지 않고 있었다.
‘아이들도 모두 깨어 있어요.’ 원주민 여자는 숙명적인 사태가 다시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면서 말했다. ‘이 질병은 한번 집안에 발을 들여놓으면 아무도 내쫓을 수가 없어요.’ — p.56~7
그들은 정말로 불면증이라는 병에 걸려 있었다. 어머니에게서 약초의 영원한 효과에 대해 어려서부터 배워 알고 있던 우르슬리는 투구꽃으로 술을 담가서 돌아가며 먹었지만, 그래도 아무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일어나서 돌아다니며 꿈을 꾸었다. 그렇게 흔미한 환각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그들은 선 채로 꿈을 꾸었을 뿐 아니라, 남들이 꾸는 꿈도 잘 볼 수가 있었다. 자기의 꿈에 보이는 사람들도 실물처럼 나타나고 남의 꿈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나타났기 때문에 집안에는 사람들이 와글와글했다. 구석의 흔들의자에 앉아서 레베카는 흰 셔츠에 황금단추를 달고 자기와 똑같이 생긴 남자가 꽃다발을 가져다주는 꿈을 꾸었다. 그 남자와 함께 손이 가냘픈 여자가 따라와서는 장미를 한 송이 뽑아 레베카의 머리에 꽂아주었다. 우르슬라는 레베카의 꿈에 나타난 사람들을 보고 그들이 레베카의 부모라고 믿었는데, 그들을 아무리 자세히 뜯어보아도 전에 어디서 본 기억이 전혀 없어 생소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집에서 만든 동물과자는 시내에서 잘 팔려나갔다. 아이들이나 어른 가릴 것 없이 모두들 달콤하고 푸른 불면증 수탉과, 앙증맞은 핑크빛 불면증 붕어와 보드랍고 노란 불면증 망아지를 마구 먹어댔고, 그러다 보니 월요일 새벽에는 온 동네사람들이 모두 잠들지 못하고 깨어 있었다. — p.57
처음에는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할 일은 엄청나게 많은데 시간이 없어서 고민하던 마콘도 사람들은 오히려 잠이 안 와서 잘된 일이라고들 생각했다. 그들은 잠을 안 자고 어찌나 열심히 일을 했는지, 새벽 세시가 되면 할 일이 없어서 팔짱을 끼고 시계의 왈츠소리만 듣고 앉아 있게 되었다. 피곤해서가 아니라 꿈을 꾸고 싶어 잠을 자려는 사람들이 피곤해지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 부렸다. 그들은 함께 모여앉아서 끝이 없는 지루한 얘기들을 주고받으며, 똑 같은 농담을 몇 시간씩 되풀이하고, 거세시킨 수탉 얘기를 자꾸만 계속했다. 얘기가 끝나면 얘기하던 사람이 그 얘기를 또 듣겠느냐고 묻고, 그러면 둘러앉은 사람들은 그 얘기를 또 해달라고 하고, 그러면 같은 얘기를 또 하고… 혹시 누가 그 얘기를 듣기 싫다 하더라 그는 그 얘기를 되풀이했고, 얘기를 또 해주랴고 물었을 때 아무 대꾸가 없어도 또 그 얘기를 되풀이했고, 그 얘기가 자꾸만 계속되는 동안에는 아무도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밤이 새도록 똑 같은 얘기는 끝없이 되풀이 되었다. — p.57~8
불면증이라는 병이 마을에 들어온 것을 알게 된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는 마을의 가장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불면증이 어떤 병인지를 설명했다. 사람들은 이 병이 늪지대의 다른 마을로 전염이 되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려고 오랫동안 의논을 했다. 그들은 아랍사람들에게 야자열매를 주고 얻은 염소의 목에 매달았던 종들을 모두 떼어내어서 마을 어귀에 갖다두고, 불면증에 걸리지 않은 타향 사람이 억지로 마을로 들어오려고 할 때는 반드시 그 종을 울리면서 다니게 했다. 그래서 마콘도 거리에서 종을 울리며 타향 사람이 지나가면 병든 마을 사람들은 병에 아직 안 걸린 사람을 가려낼 수 있었다. 종을 울리며 다니는 사람들은 마을에서 아무것도 먹거나 마실 수가 없었으니, 그것은 불면증이라는 병이 음식을 통해서 입으로 전염이 되기 때문이었다. 마콘도의 모든 먹을 것과 마실 것은 불면증으로 오염되어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병이 마콘도를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병에 대한 그들의 모든 대책은 효과적으로 시행이 되어서 얼마 안 있다가 사람들은 다시 규칙적인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으며, 잠을 자야 한다는 쓸데없는 걱정 따위는 잊게 되었다. — p.58
몇 달 동안 잠을 못 자서 상실하게 된 기억력을 되찾고, 기억력을 유지하는 비결을 알아낸 사람은 아우렐리아노였다. 그는 그 비결을 아주 우연히 알아냈다. 맨 처음에 불면증에 걸린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던 그는 곧 불면증 전문가가 되었으며, 그의 은세공 기술도 거의 완벽에 가깝도록 발전했다. 어느 날 그는 쇠붙이를 두드려 광택을 내는 작은 모탕을 찾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자기가 찾던 물건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건 모탕이야.’ 아버지가 일러주었다. 아우렐리아노는 그 말을 종이쪽지에 써서 모탕 위에다 달아놓았다. 그렇게 적어놓으면 앞으로 그 말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모탕이라는 말이 워낙 어려운 단어였기 때문에 잘 잊을 수도 없다고 생각한 그는, 이 사건이 그의 기억상실증의 시초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며칠 사이에 그는 실험실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의 이름을 그가 계속해서 잊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이름이 생각나지 않을 때 도움이 되라고 그 모든 것들의 이름을 종이쪽지에 써서 사방에 붙여놓았다. — p.58~9
아버지가 놀란 표정으로 어릴 적에 가장 감명깊었던 어떤 사건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걱정스런 어조로 얘기했을 때, 아우렐리아노는 기억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가 어떻게 했는지를 얘기해 주었고, 그 얘기를 들은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는 곧 그 방법을 실천에 옮겨 집안 여기저기에 쪽지를 붙이며 돌아다녔고, 심지어는 밖으로 나가 마을에 온통 종이쪽지를 달아 두었다. 그는 먹을 듬뿍 찍은 붓으로 온갖 이름을 다 표시해 두었다. ‘책상•의자•시계•문•침대•냄비…’ 그는 동물 우리로 가서 식물과 짐승의 이름도 표시했다. ‘소•염소•돼지•암탉•바나나•카사아•바칼라듐…’ 이렇게 조금씩조금씩 기억을 상실해가면 어느날엔가 사람들은 모든 사물의 이름을 위에 써붙인 글자를 읽고서 알기는 하겠지만, 결국 그 물건들의 쓰임새는 몽땅 잊게 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보다 효과적인 방법을 생각해냈다. 마콘도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기억상실증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방법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그가 소의 목에 걸어놓은 다음과 같은 간판이었다. ‘이것은 암소입니다. 암소는 아침마다 짜주면 젖을 냅니다. 그리고 소의 젖을 끓인 다음에 커피와 섞어서 먹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손아귀에서 빠져나가서 도망치려는 현실을 바둥거리면서 붙잡으려 했고, 그들의 기억을 지탱시켜야 할 단어들이 하나씩 둘씩 그들의 머리에서 사라져, 결국 그들은 글의 가치를 잊게 되었다.— p.59
˝자네는 너무나 군사정권을 미워하고, 그들과 너무 오랫동안 싸움을 하고, 그리고 그들에 대한 생각을 너무 깊이 해왔기 때문에 결국 자네도 그들 못지않게 나쁜 사람이 되고 말았어. 그토록 비참한 타락을 겪으면서까지 추구할 만큼 고귀한 이상은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지.˝ — p.179
˝그럼 이렇게 말씀드려요.˝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사람은 꼭 죽어야 할 때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을 수 있을 때에 죽는다고 말입니다.˝ — p.271
그래서 우르슬라는 자기가 정말로 죽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아 하느님.’ 우르슬라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탄을 했다.’죽는다는 것이 결국 이런 것이구나.’…장미에서는 갑자기 거위 발 냄새가 났고, 콩깍지가 져서 땅에 떨어지면 콩알들은 규칙적인 별 무늬를 그렸으며, 어느 날 밤에는 광채를 뿜는 오렌지 들이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갔다.-380쪽
˝아버지는 지금 무척 슬퍼하고 계시단다.˝ 우르슬라가 대답했다. ˝아버지는 네가 곧 죽을 거라고 생각해서 슬퍼하시는 거란다.˝
수천번이나 되풀이해서 발표되고 정부가 온갖 통신수단을 동원하고 마음대로 조작해서 전국 각지에 퍼뜨려 결국은 사실이라고 받아들여진 공식발표에 따르면, 마콘도에서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만족한 노무자들은 모두 가족을 찾아 돌아갔고, 바나나 회사는 비가 끝날 때까지 모든 작업을 중단하겠다고 했다. — p.344
– 말없이 조용한 나날을 보내며, 집안에 넘쳐흐르는 새로운 생명력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고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노년기를 훌륭하게 보내는 비결이란 고독과 영광스러운 조약을 여러 해가 지난 다음에 임종의 자리에서 아우렐리아노 세군도는 첫 아들을 보려고 침실로 들어갔던 7월의 어느 비오는 날 오후를 회상하였다. 비록 그 아이가 힘없이 울기만 하고, 부엔디아 집안의 특성을 하나도 타고 나지 못했어도 그는 아이의 이름을 짓는 데 별 힘이 들지 않았다.
‘이 아이는 호세 아르카디오라고 부릅시다.’그는 말했다.
작년에 그와 결혼한 아름다운 여인인 페르난다 델 까르삐오는 그러자고 했다. 그러나 우르슬라만큼은 막연한 회의를 숨기지 못했다. 집안의 역사를 돌이켜보건대 똑같은 이름들이 자꾸만 되풀이되어 쓰이다 보니 우르슬라는 어떤 단정적인 결론들을 얻게 되었다. 아우렐리아노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들은 머리는 좀 좋은 편이면서도 성격만은 내성적이었고, 호세 아르카디오라는 이름을 받은 아이들은 충동적이며 모험심을 타고나서 어떤 비극적인 면모를 지녔다. 그 차이점을 얼핏 가려낼 수 없는 경우라고는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와 아울렐리아노 세군도뿐이었다. — p.207
순간적으로 자기의 영혼이 그토록 엄청나게 무서운 과거를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자기 자신의 향수와 남들의 향수가 찔러대는 필사적인 창 끝에 상처를 입은 그는 말라죽은 장미숲을 얽은 거미줄을 끈질김과, 독보리풀의 참을성과, 찬란한 2월 새벽 하늘의 인내심을 우러러보았다. 그리고 그는 갓난아이를 보았다.
온 세상에서 다 모여든 듯 바글바글한 개미떼가 정원의 돌길을 따라서, 바짝 쿨기가 빠지고 껍질만 자루처럼 붕싯하게 부푼 아기를 끌고 그들의 굴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 기막힌 장면을 보는 순간, 그는 공포에 질려 몸이 굳어지는 대신, 멜뀌아데스의 마지막 비밀을 깨달아 그 양피지 원고에서 인간의 시간과 공간의 질서를 가리키는 글귀를 터득하게 되었다. ‘역사의 시포는 나무와 연결되어 있고, 종말은 개미들에게 먹히울지니라.’ — p.
멜키아데스가 큰소리로 외치곤 했다. 이글이글 타오른느 어느 날 정오, 집시들은 그 거대한 돋보기를 가지고 놀라운 광경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길 한가운데에 마른 풀잎들ㅇ르 쌓아놓고서 태양 광선을 모아 불을 붙였다. 그 자석 건이 실패로 돌아간 것 때문에 아직 마음을 달래지 못하고 있던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는 그 발명품을 전쟁 무기로 사용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멜키아데스는 다시금 그의 생각을 고치려고 애쓴다.
그러나 결국 멜키아데스는 그 돋보기를 그에게 내주고 자석들과 식민지 시대 금화 세닢을 받고 말았다. 우르술라는 속이 상해 울었다. 그 돈은 그녀 아버지가 궁핍하게 살면서 평생에 걸쳐 모은 것으로, 좋은 기회가 오면 투자하기 위해 침대 밑에 숨겨두었던 궤짝에 든 금화들 가운데 일부였던 것이다. — p.

○ 출판사 서평
인간 고독의 잔학성! 집단을 떠난 개인 고독의 현상학적 조감도! 묘사의 강렬함에서 오는 시적 진실의 획득으로 끝까지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이 소설에는 중남미 대륙에 얽힌 백년 동안의 생(生)과 투쟁의 역사가 있다. 현대 라틴 아메리카 문학을 대변하는 가장 대표적인 작가로 높이 평가 받고 있는 마르케스의 이 작품은, 서구의 작가들이 2차 세계대전 이후 문학의 죽음을 선포하였던 것이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았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으로, 작가 마르케스는 그동안 사망 상태에 놓여 있던 소설을 다시 살려낸 언어의 마술사라 할 수 있다. 소설의 죽음과 관련하여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는 이렇게 말한다. `소설의 종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서구 작가들, 특히 프랑스인들의 기우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동유럽이나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나 다름없다. 책꽂이에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꽂아 놓고 어떻게 소설의 죽음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 추천평
우선 ‘백년 동안의 고독’은 역사적 의미가 아주 강하게 부각되어 있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콜롬비아의 과거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콜롬비아의 역사는 곧 식민지 종주국들의 지배와 억압으로 점철된 비극적인 역사나 크게 다름없었다. 라티 아메리카 대부분의 나라들이 그러하였듯이 콜롬비아 또한 오랫동안 스페인의 지배와 통치 아래에서 패배와 좌절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6세기 중업부터 콜롬비아는 뉴그라나다라는 스페인 식미지 가운데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고, 19세기 초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스페인의 억압에서 해방되어 독립 국가로 발돋움하였다.
마콘도를 처음 건설한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는 본디 콜롬비아 내륙 지방에서 담배를 경작하던 부지런한 본토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스페인계 상인 가문의 우르슬라 이구아란을 만나 결혼함으로써 처음으로 외지인과 관계를 맺는다.
이 작품에는 우르슬라 말고도 ‘카탈로니아의 현인’이라고 불리는 스페인 사람이 한 명 등장한다. 내란중 마콘도에 들어온 그는 이 마을이 폐허가 되기 직전까지 서점을 경영하면서 이 마을에서 산다. 책더미 속에 묻혀 세 상자에 달하는 많은 양의 원고를 집필하는 그는 콜롬비아에 대한 스페인의 정신적 지배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비록 잠시나마 콜롬비아는 스페인 말고도 영국의 지배를 받기도 한다. 영국의 지배는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경을 통하여 나타난다. 우르슬라 가족이 리로아차로 피신하여 온 것도 바로 드레이크경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정치적인 차원에서도 ‘백년 동안의 고독’은 콜롬비아가 직면하고 있는 구체적인 사회적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도입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마콘도 마을은 목가적인 낙원과 같은 평화스러운 마을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자본주의가 들어오면서부터 평화스럽기 그지없던 이 마을은 점차 폭력과 타락에 시달린 채 멸망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 작품에서 서구 자본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언던 시기에 시작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콜롬비아에 진출한 미국의 바나나 회사의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마콘도에 바나나 농장을 건설한 미국 회사들은 원주민 노동자를 고용하여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 그러나 낮은 임금과 열악한 작업 환경 등으로 착취당하던 노동자들은 마침내 극한적인 파업을 단행하였고, 미국 회사 편을 드는 정부는 파업에 맞서 노동자들을 대량으로 학살하기에 이르렀다.
적어도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 소설은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 수탈 행위를 폭로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고발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고 보면 부엔디아 가문의 몰락과 쇠퇴는 단순히 외부의 힘 탓만으로 돌릴 수 없다. 왜냐하면 부엔디아 가문의 내부안에 이미 몰락과 쇠퇴의 씨앗이 뿌려져 있기 때문이다.
마콘도 마을에서 ‘가장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로 존경을 받으며 근면하게 일하던 호세 아르카디아는, 집시가 전하여 준 문명의 도구에 크게 고무된 나머지 거의 미치광이에 가까운 사람이 된다. 그는 족장으로서의 모든 일상적 의무와 책임을 포기한 채 오직 무익한 연구에만 몰두한다. 심지어 그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과학적 실험을 하기도 한다.
한편 서른두 차례나 반정부 봉기에 참여하여 그때마다 패배하는 그의 아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웅적 혁명가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릿광대’나 ‘단순한 모험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추상적 이념을 위하여 많은 생명을 희생시키기를 주저하지 않는 그야말로 비인간적인 인물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이 소설의 저자는 ‘그는 손으로 만져 볼 수도 없는 이념들을 가지고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젊은이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폭력뿐’이라고 가르치면서 자유파의 승리를 위하여 정부군과 싸울 것을 독려한다. 20년에 걸치 내란이 끝난 다음 그는 사회와의 모든 교통을 차단한 채 골방에 들어앉아 황금 붕어 장식을 만들며 이른바 ‘삶 속의 죽음’을 영위한다. 이러한 현상은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의 형인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를 비롯하여 부엔디아 가문의 다른 후손들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좋은 나날’ 또는 ‘좋은 시대’라는 뜻을 지니는 ‘부엔디아’라는 스페인 이름은 이 작품에서 반어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근친 상간으로 상징되는 도덕적 타락은 부엔디아 가문의 몰락을 재촉하는 견인차 구실을 한다. 그들은 근친 상간을 수없이 되풀이 한다. 유전학적 관점에서 볼 때에 동종 교배가 열등한 자손을 낳듯이 부엔디아 가문의 사람들 또한 근친 상간이라는 동종 교배를 통하여 점점 우생학적으로 열등한 자손을 낳는다.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 으르러, 이모와 조카 사이인 아우렐리아노와 아마란타 우르슬라가 관계를 맺어 마침내 돼지 꼬리가 달린 자손을 낳기에 이른다. 이렇게 기형아를 낳음으로써, 5대에 걸친 부엔디아 가문은 선조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치욕적인 종말을 고하는 것이다.
그들이 자폐적인 순환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을 제외한 나머지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이 한결같이 자기에 고유한 이름다운 이름 없이 오직 선조의 이름 가운데에서 오직 일부만을 되풀이하여 물려받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뒷받침된다.
20세기 초엽까지만 하더라도 서양 문학은 서유럽과 미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경제적 발전과 정치적 패권에 힘입어 제1세계 국가에 속한 작가들이 세계 문단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20세기 중엽에 들어오면서부터 사태는 전혀 달라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서유럽이나 미국 작가들 대신에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이 세계 문단에서 주도권을 행사하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주변부에 머무른 채 기껏해야 ‘타자(他仔)’의 위치밖에는 차지하지 못하던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이 서서히 세계 문학의 중심부로 이행하였다. 말하자면 세계 문학은 이제 라틴 아메리카에서 문자 그대로 ‘붐’을 맞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문학사가들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나타난 이러한 문예 부흥 현상을 두고 ‘붐’ 문학 또는 ‘붐’ 소설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라틴 아메리카에서 주로 활약한 ‘붐’소설가들로서는 콜롬비아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파라과이의 아우구스토 로아 바스토스, 페루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쿠바의 기예르모 카브레라 인판테, 멕시코의 카를로스 후엔테스, 칠레의 호세 도노소 등이 유명하다. 다양한 국적, 다양한 문학관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한결같이 라틴 아메리카 문학을 세계 문학의 굳건한 반열에 올려놓은 데에 크게 이바지한 작가들이다.
이러한 ‘붐’ 소설가 가운데에서도 가장 주목받아 온 작가가 바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다. ‘백년 동안의 고독'(1967)으로 1982년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고, 그후 ‘족장의 가을'(1975)을 발표하여 작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굳혔다. 그리고 ‘예견된 죽음의 연대기'(1981)를 발표하여 작가로서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과시하고 있다. 이제 마르케스는 현대 라틴 아메리카 문학을 대변하는 가장 대표적인 작가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백년 동안의 고독’을 논의할 때마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꼬리표가 마치 그림자처럼 늘 따라다닌다. 좁게는 리얼리즘의 한 유형, 넓게는 세계 인식의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마술적 리얼리즘은 문자 그대로 현실과 환상, 사실과 허구가 초현실주의적 수법으로 교묘하게 결합되어 있는 형태를 말한다.
집시들이 마콘도 마을에 가져온 ‘끓고 있는 얼음’처럼, 일종의 모순 어법에 해당하는 마술적 리얼리즘은 역사적 · 문학적으로 큰 혼란을 겪어 온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이 창안해 낸 독특한 문학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이러한 장치나 세계 인식을 통하여 그들 특유의 경험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 작품에서 마술적 리얼리즘은 여러 행태를 통하여 나타난다. 예를 들어 작중 인물들 가운데에는 죽은 사람들이 다시 나타난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활약하는가 하면, 어떤 사내아이는 부모의 말을 듣지 않다가 뱀이 되어 버린다. 부엔디아 집안의 한 선조는 돼지 꼬리를 달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레베카라는 인물은 흙과 벽에서 긁은 석회를 먹고 산다. 한 작품 인물이 항해 도중 바다에서 바다용을 잡았는데, 그 뱃속에는 십자군 병정의 투구와 허리띠 그리고 무기가 발견되기도 한다. 난로에 얹어 둔 우유가 끓지 않아 주전자 뚜껑을 열어 보았더니 그 안에는 구더기가 득실거린다. 그런가 하면 어떤 작중 인물들은 담요나 양탄자를 타고 하늘 높이 날아가 이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
한 비평가는 마르케스 문학의 특성을 ‘초월적 지방주의’라는 용어로 요약한 바 있다. 마르케스의 작품은 좁게는 콜롬비아, 넓게는 라틴 아메리카라는 특정한 지방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서도 지방성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문학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점에서 마르케스는 그가 지대한 영향을 받은 윌리엄 포크너와 아주 비슷하다. 포크너의 작품 또한 미국 남부 지방이라는 구체적 공간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포크너가 다루는 문제는 좀더 보편 타당성 있는 삶의 문제, 그의 표현을 빌린다면 ‘서로 갈등하는 인간 마음의 여러 문제’를 설득력 있게 형상화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설은 이제 죽음을 맞이하였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리고 있다. 신의 죽음을 선포한 프리드리히 니체처럼 서유럽과 미국의 몇몇 작가들은 문학의 죽음을 선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마르케스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은 제1세계의 작가들이 이미 죽었다고 선포한 소설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소설 장르는 죽음을 맞이하기는 커녕 오히려 불사조처럼 잿더미를 헤치고 되살아났다는 사실을 그들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소설의 죽음과 관련하여 체코슬로바키아의 작가 밀란 쿤데라는 이렇게 말한다. “소설의 종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서구 작가들, 특히 프랑스인들의 기우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동유럽이나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에게 이러한 말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나 다름없다. 책꽂이에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꽂아 놓고 어떻게 소설의 죽음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마르케스는 바로 그동안 사망 상태에 놓여 있던 소설을 다시 살려낸 언어의 마술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