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벵갈의 밤
미르치아 엘리아데 / 세계사 / 1990.12.1
바슐라르가 “관능의 신화”라고 극찬한 ‘벵갈의 밤’은 인도에 체류중인 유럽 청년과 인도 상류가문 처녀와의 이국적인 사랑을 그리고 있다.
종교학자 엘리아데가 아닌 소설가 엘리아데를 보여주는 최초의 자전적 소설이자 현대인이 잃어버린 지순하고 영감에 찬 사랑의 참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이색적인 소설로 평가된다.

○ 저자소개 : 미르체아 엘리아데 (Mircea Eliade, 1907 ~ 1986)
미르치아 엘리아데 (Mircea Eliade)는 1907년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에서 태어나 부쿠레슈티대학에서 이탈리아 철학 연구로 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후 인도 캘커타대학에서 3년간 산스크리트와 인도 철학을 공부하였으며, 1933년 부쿠레슈티대학으로 돌아와 요가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부쿠레슈티대학의 교수를 지냈다.
그후 1945년에 파리 소르본대학의 종교학 객원 교수가 되었고, 1956년에 시카고대학의 교수로 부임하여 그곳에서 30년 이상 가르쳤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종교학자인 이 거인은 그의 필생의 대작이자 위대한 학문적 업적으로 꼽히는 『세계종교사상사』를 3권까지 집필한 후인 1986년 4월 22일에 시카고에서 영면하였다.
주요 저서로 『세계종교사상사』(전3권), 『영원회귀의 신화』, 『종교형태론』, 『성과 속』, 『이미지와 상징』, 『요가』, 『샤머니즘』, 『대장장이와 연금술사』, 『종교의 의미』, 『벵갈의 밤』 등이 있다.
– 역자 : 이재룡
1956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브장송 대학교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밀란 쿤데라, 누보로망 이후 신경향 소설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장 에슈노즈와 장 필립 투생 등을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한 것을 비롯해 외젠 이오네스코, 르 클레지오, 미르체아 엘리아데 등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기고 알렸다. 현재 숭실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문학평론가로도 활발히 활동하면서 프랑스 문학을 꾸준히 소개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꿀벌의 언어》 《소설, 때때로 맑음》이 있고, 옮긴 책으로 조엘 에글로프의 《장의사 강그리옹》 《해를 본 사람들》, 장 필립 투생의 《사랑하기》 《도망치기》 《욕조》 《사진기》를 비롯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정체성》 《일 년》 《거대한 고독》 《고야의 유령》 《모더니티의 다섯개 역설》 《코르다의 쿠바, 그리고 체》 《벵갈의 밤》 《장엄 호텔》 《슬픈 흰곰의 노래》 《로즈의 편지》 《가을 기다림》 《외로운 남자》 《길고도 가벼운 사랑》 《이별연습》 《포옹》 《오니샤》 《불확정성의 원리》 등이 있다.

○ 이재룡 <방랑하는 루마니아인>
1945년 9월 16일, 파리에 루마니아 사람 하나가 도착했다. 이틀 후 관공서에 들러 외국인이라면 거쳐야할 복잡한 서류 절차에 시달린 뒤 허름한 호텔로 돌아온 그는 쉽게 잠들지 못한다. 할 줄 아는 일이라곤 읽고, 쓰는 것뿐 인데, 적수공권으로 파리 한복판에 내던져진 그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미처 불어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불어로 글을 쓰는 내 모습을 상상하면 이상한 느낌이 든다. 특히 내가 상대해야 할 독자를 전혀 모른다는 점이 두렵다. 과연 어떤 독자가 내 글을 읽을지. 오로지 독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루마니어어로 쓸 때에는 얼마나 당당 했는가” (1945년 9월 18일) 그보다 먼저 몇 해 전부터 파리에 살고 있던 루마니아 친구가 미리 호텔을 잡아주고 말동무가 되어주니 그나마 기댈 언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10월 4일 그는 또 다른 루마니아 친구와 만난다. 어린 시절을 프랑스에서 보낸 터라 그보다 처지가 나았던 친구를 통해 조국에서는 이제 새로운 세대가 등장해서 “우리 세대는 완전히 끝장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2차대전 동안 히틀러 편에서 유태인 학살을 거들었던 조국은 전후 동부유럽 대다수 나라가 그랬듯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이 되었다. 독일군은 이미 한해 전에 퇴각했지만 파리의 분위기도 뒤숭숭했다. 파시즘과 비시 정권 협력자에 대한 대대적 숙청이 진행되면서 로베르 브라지약은 수많은 문인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그해 2월 6일 총살당한 터였다. 루마니아 출신의 세 사람은 숨을 죽인 채 유난히 춥고 고단한 파리의 1945년 겨울을 견디어야만 했다.
당대에 이해받지 못한 시인이나 소설가를 흔히 속악한 지상에 유배당한 이방인이란 표현을 쓰지만 고향을 잃고, 말을 잃고, 독자를 잃은 이 세 명의 루마니아 작가만큼 더 절박한 상황이 있을 수 있을까?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1977년 12월, 세 사람은 파리의 출판사에서 다시 마주친다. 파리에 도착해서 심지어 막노동까지 감수하려 했던 첫 번째 루마니아 사람은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대학의 종교학 교수가 되어 있었다.
그가 쓴 50여권의 저서가 20개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전 세계 유명대학에서 수여받은 명예박사 칭호만 해도 10개가 넘은 작가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우주와 역사, 영원 회귀>의 저자 미르세아 엘리아데이다. 프랑스에서 다소 여유로운 생활을 누렸던 두 번째 사람은 프랑스 지식인들 사이에서 가장 영예로운 자리로 부러움을 사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 되었고, 살아 있는 작가로는 최초로 플레이아드 전집 작가로 선정된 부조리극의 대명사 으젠 이오네스코이며, 마지막 루마니아인은 20세기 프랑스의 최고 산문가, 자살과 죽음을 칭송하는 허무주의를 촌철살인의 아포리즘로 응축시킨 에밀 시오랑 이었다. 출판사에서 모인 세 사람은 이 만남을 기록하기 위해 근처 광장에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루마니아에서 세기 초에 두 해 터울을 두고 1907년, 1909년, 1911년에 태어났던 엘리아데, 이오네스코, 시오랑은 각기 차례대로 1986년, 1994년, 1995년에 세상을 떴다.

- 머리맡 작가
위에서 언급한 세 작가는 오랫동안 내 머리맡에 두고 틈틈이 읽었을 뿐 아니라 우리말로 옮기는 과욕까지 부렸던 작가이다. 1989년 이오네스코의 <외로운 남자>, 1990년 엘리아데의 <벵갈의 밤>을 번역했고, 1991년 시오랑에 대해서는 <절망의 아포리즘>이란 제목으로 그의 작품과 인터뷰를 발췌 번역하고 해설을 붙인 글을 썼다. 프랑스 문학을 공부한 뒤 번역이나 글을 쓸 기회가 생기자마자 거의 3년 동안 루마니아 작가에 매달렸던 셈이다. 그 중에서 엘리아데의 경우는 정작 그의 사상보다는 작가 소개에 나온 그의 행적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하는 쪽이 맞을 것이다. 본문보다 약력에 눈길이 머문 것은 불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뒤 작가나 신부가 되려고 망설이다가 훌쩍 인도로 떠나 히말라야 산속에 머물렀다는 한 구절 때문이다. 행간에 감춰진 세세한 사연은 거두절미하고 신부와 작가, 그리고 인도란 세 단어는 하루 종일 구들장에서 뒹굴던 게으른 젊은이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또한 그가 평생 추구한 것이 배움 중에서 으뜸, 가르침 중에서 대들보 (宗敎)라는 것도 황홀한 도전이었다. 속절없이 흐르는 삶에서 하나의 절대적 순간,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변하는 근원적 시간을 읽어내는 그의 태도는 모든 것의 근원을 찾는 근본주의자, 순결주의자로 보였던 터라 마음의 거처를 찾지 못해 두리번거리는 많은 젊은이에게 매혹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흔히 학술적 내용에 어울리지 않는 자유분방한 에세이 스타일을 비난한 사람도 있었지만 동서고금의 다양한 분야를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그 박식함에 비한다면 그런 지적은 그야말로 생트집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다. 평생 신화를 연구한 그는 무수한 종교학 연구서와 소설을 발표하면서 스스로 신화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노래는 듣지 않고 가수의 몸짓 하나에 비명을 지르는 소녀처럼 작가, 신부, 인도라는 세 단어가 만들어내는 신화에 열광했을 것이다. <벵갈의 밤>은 엘리아데의 노래가 아니라 그의 몸짓에 불과한 작품이었을 테지만 기꺼이 나의 시간과 땀을 헌사했다. 나중에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에도 나는 미남배우 휴 그랜트에게서 젊은 엘리아데를 보는 것 같았다.
발칸제국 자리한 루마니아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슬라브어나 독어를 쓰는 주변국가와는 달리 불어에 가깝다. 또한 나폴레옹 시절부터 상류층이나 지식인 사이에서 프랑스 문화에 대한 호감은 거의 전통처럼 굳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위의 세 작가 중에서 시오랑은 어린 시절 불어보다는 독일어에 먼저 익숙했던 작가이다. 그래서 30살부터 불어로 쓰기 시작했으니 다른 두 작가에 비해 개종의 고통은 심했을 것이다. “비둘기에게 지리학을 가르치면 목적지를 향해 곧장 날아가는 무의식적 비행은 단번에 불가능해질 것이다. 모국어를 바꾼 작가는 어찌할 바 몰라 당황하는 현학적 비둘기와 같다”라는 말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의 단어 하나 하나는 당황한 비둘기가 짜내는 피의 결정체였다. 인터뷰에서 고백한 바에 따르면 15살에 니체, 쇼펜하우어에 심취해 그의 공책은 독일 철학에 관한 단상과 인용구가 가득했다. 그리고 평생 동안 그가 삶을 견디고 목숨을 지탱했던 것은 자살 덕분이었다고 고백한다. “어린 시절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자살이란 개념과 더불어 살았다. 나중에도, 지금까지도, 비록 그 강도는 같지 않을 테지만 마찬가지이다. 내가 아직도 목숨이 붙어있는 것은 오로지 자살 덕분이며 자살은 나의 후원자이다. 너는 네 인생의 주인이다. 네가 원하면 언제라도 자살할 수 있으니까, 라는 생각 덕분에 나의 광기와 과장을 견딜 수 있었다. 그리고 점차 이런 생각은 마치 기독교인들에게 신처럼 내게 신, 버팀목과 비슷한 것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삶의 고정점을 가지고 있었다” (플리츠 라바다츠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1986)
1984년 2월 월간지와 대담한 뒤 곁에 있던 부인에게 “결국 평소와 다름없이 신에 대해 이야기했다” 말로 장시간의 대화내용을 요약했듯, 그의 사유는 신 주변을 맴돌았다. 정교회 신부의 아들로 태어난 시오랑은 “예수는 침대에서 편히 죽지 못했다고 이천년 동안 인류를 괴롭힌다”, 혹은 “신과 인간 중에서 누가 더 혼자일까?”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신과 고독의 문제는 그의 전작에서 나타나는 주요동기가 된다. 1995년 한 권의 두툼한 단행본으로 나온 그의 전집은 수미일관 단 한 줄기의 희망의 빛도 내비치지 않고 철저한 비관과 허무로 일관된다. 다만 “바하가 없었다면 신은 불완전했을 것이다”, “음악은 소리 나는 시간”이란 아포리즘으로 음악만이 조그만 위안이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독일철학에 심취했던 시오랑은 문득 철학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겪는다. 그것이 자신의 불면과 불행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오로지 철학에만 빠져 우주, 세계, 존재, 인간, 신에 대해 뭔가 깨달았다는 터무니없는 과대망상에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스스로가 신이 되었다는 망상에 빠졌던 것이다. 나중에도 일종의 의리 때문에 철학책을 읽지만 그는 개인적 고백록, 일기, 회상록 등 진솔한 일인칭 글에 매력을 느끼고 “내 작품의 유일한 소재는 내 자신이다”라는 몽테뉴의 말을 되새긴다. “자신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글을 쓰는가? 남에 대해 말하려고. 그건 무익한 짓이다”. “과학에 대한 유일한 반박 : 이 세상을 알만한 가치가 없다”
그의 정신은 말로 정의될 수 없는 어떤 절대점을 지향하고 있는 듯했다. 엘리아데가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넘어서는 순간을 지향했다면 그는 “사상의 구축물 속에서는 내 이마를 기댈만한 어떤 범주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카오스는 얼마나 멋진 베개인가!”란 말에서 엿볼 수 있듯, 엘리아데의 근원적 순간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 시점에 고정되어있다. 그는 참된 앎이란 허상을 깨는 것, 그래서 환멸이 앎의 유일한 형식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얘기했듯 시오랑 전집은 오랫동안 머리맡에 두고 읽은 책이었다. 중간에 독서 흐름이 끊기게 마련인 장편 소설보다는 그가 구사하는 아포리즘이란 형식이 우선 게으른 독서에 적합했다. 아무 데나 펼치고 읽다가 잠들어도 토막글은 나름대로 완성된 사유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 루마니아의 달라이 라마
시오랑은 앎의 유일한 형식은 환멸이라고 했던가. 2002년 발간된 한 권의 책이 오랫동안 친숙했던 머리맡 책에 까만 잉크를 부어버렸다. 알렉상드라 레넬-라바스틴이 지은 <시오랑, 엘리아데, 이오네스코 – 파시즘의 망각>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루마니아 인들의 반쪽의 생애, 아니 전 생애에 걸쳐 밑바닥에 깔려있던 어두운 그늘에 잔인한 빛을 비췄다. 이 책의 저자는 프랑스에 알려지지 않았던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루마니아인 모습을 밝혀낸 것이다. 세 명 중에서 엘리아데가 조숙한 천재로서 가장 먼저 작가로서 문명을 떨쳤다. 그는 이미 14살에 쓴 “나는 어떻게 현자의 돌을 발견 했는가”에서 시작해서 18살부터 21살 사이에 이미 250여개의 기사를 신문에 기고할 만큼 정열적 활동을 했다. 그래서 그의 인도행은 당시 신문, 잡지의 주목을 끌었다.
그 당시 한 잡지는 “1928년 11월 29일, 3시간 반 전부터 <젊은 세대>에 속한 사람들이 구름처럼 플랫폼에 몰려들러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세대의 달라이 라마를 떠나보내며 눈물 섞인 웃음, 포옹이 이어졌고, 마침내 기차가 움직이자 모두 경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의 대장이 떠난다, 라고 비명을 질렀다. 4시 6분, <젊은 세대>는 대장 없이 홀로 남겨졌다”라고 엘리아데가 누렸던 인기를 전하고 있다. 이오네스코와 시오랑은 엘리아데가 연재한 기사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애독할 정도로 젊은 엘리아데에게 깊이 매료된 터였다. 시오랑 표현에 따르면 엘리아데는 “신세대의 우상”이며 “우리의 사상적 지도자”였다. 3년 후 인도에서 귀국한 엘리아데의 유명세는 더욱 치솟았고 1932년부터 부카레스트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전설적 박식으로 무장한 엘리아데는 원고도 없이 강의하며 “모든 개념을 펄펄 살아 전율하게 만들고, 전염성이 높게 하고 신경질적 후광을 자아냈다”고 시오랑은 회상한다.
젊은 세대의 달라이 라마였던 엘리아데가 이오네스코와 시오랑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설파했던 사상은 무엇이었던가. 개념에 생기를 불어넣어 강한 전염성을 가미하며 그의 필력과 언변이 주장했던 것은 “강한 루마니아, 새로 태어나는 루마니아”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당시 유럽 대륙에 흑사병처럼 번진 파시즘을 종교적, 아니 광신적 차원으로 번역한 사상이었다. 스페인의 프랑코, 이태리의 무솔리니, 독일의 히틀러는 루마니아 젊은이들이 따라야할 사상적 지도자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히틀러만큼 내게 공감과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정치인은 없다. 독일에서 총통을 둘러싼 신비감은 충분히 정당한 것이다. 그의 연설 속에는 오로지 예언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격정과 열정이 관통하고 있다. 히틀러의 장점은 온 나라의 비판적 정신을 매료시켰다는 데에 있다. 우리에게도 그런 신비주의자가 필요하다” 이것은 1935년 2월 17일 시오랑의 펜이 쓴 문장이다.
희생을 통해 주기적으로 새롭게 거듭남, 강한 남성적 힘, 순수한 영혼을 강조한 20대 엘리아데의 사상은 영국, 포르투갈, 프랑스를 거쳐 정착한 미국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루마니아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피의 희생을 통해 거듭 나야한다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인종차별, 반유태주의로 이어졌다, 이방인, 이질적 요소를 희생양으로 삼아 피의 거듭남을 성취하는 것은 윤리적 차원의 문제와 무관하며 엘리아데가 종교의 역사에서 확인한 인류 문명의 보편적 진리였던 것이다. <젊은 세대> 운동, 혹은 <강철 부대> 운동이라 불리던 루마니아 극우파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던 1930년대의 미르시아 엘리아데는 종교사학자이자 정치인이었다. 칼 포퍼 식으로 말한다면 정치란 적과 아군을 구별하는 기술이다. 엘리아데의 눈에 루마니아는 양쪽에서 공격받고 있었다. 서쪽에는 나약한 서구 민주주의, 동쪽에는 볼세비키 혁명을 성공한 소련 공산주의가 있었다. 루마니아가 그 위험에서 벗어나는 길은 유태주의에 오염되기 이전의 순수한 기독교 정신을 되찾는 데에 있었다. 1935년 가을 시오랑에게 보낸 편지에서 엘리아데는 유럽이 악마주의에 물들어 최후의 심판의 문턱에 이르렀다고 진단하고 루마니아만은 “세속적 학문, 철학, 사회적 평등으로 타락한 유럽대륙”에 속하지 않기 바란다고 쓰고 있다.
1936년 7월 영국으로 여행을 떠난 엘리아데는 <옥스포드 그룹> 총회에 참석한다. 1920년 이 단체를 창립한 미국 목사 프랭크 부쉬맨은 “공산주의가 상징하는 반그리스도에게 대항하는 방어선을 구축한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인물을 우리에게 내려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로 회의를 인도했다. 엘리아데는 옥스포드 그룹이 주도하는 “기독교적인 혁명”에 열광하며 7월 26일 시오랑에게 쓴 편지에서 미국인 목사를 일컬어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의 지도자, 영적이며 기독교적이며 새로운 인물이며 유럽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 치켜세우고 “심지어 히틀러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증언한다. 그는 단순히 글과 말로 정치적 견해를 표명한 것이 아니라 1937년과 1938년에는 극우 정치집단의 선거를 지원하기 위해 유세단을 따라 전국을 누비기도 한다. “강력한 규율과 복종”, “루마니아의 순수성” “남성적 힘” “정신문화의 창달”이 그의 입에 자주 오른 단어였다.

- 지워진 역사
25살에 쓴 <벵갈의 밤>으로 엘리아데는 종교학자뿐아니라 소설가로 젊은 세대의 우상으로 떠올라 이오네스코는 루마니아의 최고의 소설가라고 감탄한다. 이 소설은 전후 파리로 망명온 뒤 5년 후인 1950년 프랑스어로 번역된다. 1949년 독일어 번역본으로 읽었던 브리스 파랭은 이를 프랑스 독자에게도 소개하라고 강력하게 추천했고, 이듬해 5월에 출간하겠다는 출판사의 약속을 받는다. 그러나 출간은 몇 달 지체되어 9월에 비로서 프랑스 번역본이 빛을 본다. 초조하게 출간을 기다리며 프랑스 독자의 반응을 두려워했던 엘리아데에게는 사실 더 큰 두려움이 있었다. 한국 전쟁 소식을 듣고 공산주의가 도발한 전쟁이 필시 제 3차 세계 대전으로 비화되리란 두려움에 떨었던 것이다. 지진, 대홍수, 역병, 전쟁 등으로 이 세계는 완전한 파괴와 희생을 거쳐 다시 창조된다는 생각,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영원한 반복은 그의 강박관념이나 다름없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해석은 <성과 속> 중에서 <현대 세계 속에서의 성과 속>이란 소제목이 붙은 대목에서도 확인된다. “마르크스는 아시아와 지중해 세계의 종말 신화를 취해서 확장했다. 고통을 통해 세계의 존재론적 변화를 일으키도록 선택된 정의로운 자가 구원자 (“선택된 자”, “세례 받은 자”, “순수한 자”, “메신저”등)의 역할을 하는데 그것이 오늘날에는 플로레타리아이다. 마르크스의 계급 없는 사회, 역사적 갈등의 해소라는 테마는 역사의 시작과 역사의 종말이라는 특징을 지닌 황금시대 신화의 전례를 정확히 따르는 것이다 (…) 마르크스는 역사의 절대적 종말이라는 유태-기독교적 종말론을 자기 식으로 이용한 것이다” 그는 전면적 파괴를 통해 새로운 시대를 개막하는 테마는 원시 종교뿐 아니라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반복된다고 생각했고 한국전쟁을 세계의 종말을 예고하는 신호로 읽었던 것이다.
시오랑도 인간은 본래 우상을 숭배하고 예언자를 기다리는 속성을 타고났으며 또한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는 예언자가 하나쯤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연단 위에서만 숨쉴 수 있는 자를 경계하라. 예언자를 많이 지닌 민족은 불행하다. 이스라엘만큼 예언자가 우글거린 곳이 있었던가. 20세기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을 미리 알았다면 과연 그들은 목숨을 지탱할 용기가 있었을까”라는 그의 말은 시오랑 특유의 허무주의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유태주의에 대한 조롱을 담고 있다. 자신의 정치적 이력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때마다 엘리아데는 전면적으로 부인하거나 회피로 일관했다. 1972년 6월 25일에 쓴 편지에서 “내 기억으로는 정치적 선동이나 이념에 대한 글은 단 한 장도 쓴 적이 없다”라고 전면 부인하는가 하면, 그의 이론에서 정치적 색채를 읽는 학자에게는 항상 자신의 종교학은 정치이념과 무관할 뿐아니라 자신은 정치세계에 무관심하다고 둘러댔다. 백과사전을 능가하는 박식이 저장된 그의 머리에 정작 자신에 대한 기억은 모두 지워진 것이다. 이스라엘 대학으로부터 초청을 받았다가 파시즘 전력이 거론되자 그는 이를 전면 부정하며 증거를 대라고 항변했다.
1930년대 발표된 글이 전쟁을 루마니아에 제대로 보관되지 않았으며 또한 당시 루마니아는 외부세계와는 완전히 단절된 공산왕국임을 잘 알기 때문에 자신만만하게 주장했던 것이다.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유태인의 증언에 대해서는 모두 모두 빨갱이들의 모함이라고 일축한 것이다. 히틀러 파시즘을 피해 미국대학으로 망명한 수많은 유럽 지식인들 틈에 끼어 그들과 똑같은 자세를 취하며 자신을 위장한 것이다. 이 점은 시오랑도 마찬가지였다. 영원, 신, 죽음, 자살과 같은 추상적 주제로 한정시킨 그의 글에는 역사가 소거되어 있었다. 젊은 시절의 순수한 열정이 낳은 과오임을 인정하고 훗날 공산주의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에 반대한 이오네스코와는 대조적인 태도이다.

- 1978년
1978년 카이에 드 레른 (Cahier de l’Herne)는 엘리아데 특집을 펴냈다. 거기에는 22명의 석학이 “현상학과 해석학”, “정신성과 재생”, “추억과 만남”, “환상적 길” 등의 소제목으로 나눠 각 분야에서 엘리아데가 기여한 업적을 기리고 그의 인격에 대한 덕담까지 아끼지 않고 있다. 산발적으로 그의 사상과 파시즘을 연결하고 전력을 의심하는 글을 발표되었지만, 알렉상드라 레넬-라바스틴에 따르자면 이미 시카고 종교학파라는 거대한 학문집단의 수장으로 군림하는 그의 권위, 학계의 동료와 후계자들의 적극적 개입으로 번번이 묵살되었으며 프랑스에서도 조르주 뒤메질, 폴 리쾨르 등과 같은 석학의 비호를 누리며 학자적 영광을 만끽했다. 물론 방대한 그의 사상이나 심오한 학문적 기여가 젊은 시절의 실족을 가리고 남을 정도로 넉넉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오랑, 엘리아데, 이오네스코, 파시즘의 망각>에 따르면 그들의 글과 행동이 젊은 시절 한순간의 실수, 혹은 용기가 부족해서 폭력에 저항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일관된 확신에 따른 것이며 그러한 태도는 훗날 정치색이 은폐되었지만 여전히 그들 사상의 저류에 깔려있다는 것이다. 시오랑과 엘리아데는 과거를 부정하거나 희미한 안개로 가려 미화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예컨대 시오랑은 루마니아 출신이자 유태인이던 파울 첼란이 자신의 책을 독일어로 옮겨주는 호감을 보였다는 사실을 들어 자신이 반유태주의자가 아니며 따라서 유태인 대학살을 거들지 않았다고 강변하는 증거로 내세우기도 한다.
시오랑은 앞서 인용했듯 “나만이 유일한 소재”라며 모든 글을 일인칭으로 썼으며 엘리아데는 출간을 전제로 한 일기를 평생 동안 썼다. 다시 말해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보며 쓰는 형식의 글을 썼으면서도 자신의 어떤 모습을 평생 숨기고 살았다. 1960년 공쿠르 수상자로 떠올랐던 작가가 이차대전 전력이 검토되면서 수상이 취소된 것을 본 뒤부터 시오랑은 어떤 문학상의 후보에 오르는 것을 스스로 거부했다. 세속적 명예를 비웃는 허무주의자의 몸짓 뒤에는 망명객의 두려움이 숨겨있는 것이다. 글머리에서 인용한 글은 모두 1973년에 발간된 엘리아데의 <어떤 일기의 단편들>에서 나온 것이다. 파리에 도착 직후부터 썼던 부분은 모두 출간되었지만 그 이전 루마니아에서 썼던 부분은 사후에야 공개되었다. 이스라엘 대학에 보낸 편지에서 엘리아데는 “진실은 나의 일기와 자서전의 전부가 발간되는 시점, 즉 나의 사후에 밝혀질 것이다. 이런 확신이 나에게 허용된 말년의 인생을 편안하고 차분하게 보내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고 썼지만 자서전과 일기 중에서 1945년 이후만 출간하고 이전 부분은 사후로 미룬 이유가 석연치 않다.
미르세아 엘리아데는 종교학 뿐아니라 20세기 인문학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고 아포리즘이란 독특한 형식을 빌어 지독한 허무주의로 일관한 시오랑 글의 매력도 부정할 수 없다. 한 분야에서 그들이 이룬 업적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런 사실을 미련 없이 삼키기에는 목에 가시가 걸린 듯 개운치 않다. 철학과 음악에는 뛰어난 민족이지만 히틀러를 권좌에 앉혀 인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참사를 초래한 독일국민은 종종 관념의 천재, 현실의 백치란 조롱을 받는다. 이런 평가는 개인의 차원에도 비슷하게 적용될 것이다.
순수와 절대에 대한 열정이 현실세계에서는 대재앙과 연관되었던 예가 비단 방랑하는 루마니아인에게만 한정되진 않았을 것이다. 시의 천재, 현실의 백치, 소설의 귀재, 정치의 변절자 등 한 분야에서 존경할 만한 업적을 이룬 사람이 다른 이유로 실망을 일으키는 경우는 우리 주변에도 드물지 않을 것이다. 다만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에서는 아우슈비츠와 연관된 범죄는 “인류에게 저지른 죄”라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면죄되지 않는다. 그나저나 이 글을 쓰기 위해 <벵갈의 밤>, <외로운 남자>, 그리고 시오랑에 대한 글을 다시 뒤적이는 내 심정도 착잡하다. 누군가의 말처럼 내가 사랑했던 것이 모든 것이 폐허로 보이는 순간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