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복낙원
존 밀턴 / 문학동네 / 2010.5.17
– 예수의 확고한 순종으로 되찾은, ‘실낙원’ 그 이후의 이야기
인간의 원죄를 주제로 한 종교 서사시로서 영국 르네상스시대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명작 『실낙원』의 후속편으로 전 4편 2,070행으로 구성된 간결한 서사시이다. 『실낙원』이 에덴에서 쫓겨남으로써 불행한 결말로 끝나는 비극이라면, 『복낙원』은 예수가 사탄을 물리침으로써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 희극이다.
유혹하는 사탄과 이를 물리치는 예수의 격렬한 논쟁을 통해, 메시아의 등장과 낙원의 회복을 알리는 지적 서사로 이루어진 이 작품을 통해 밀턴은 결국 구원의 길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렸음을 시사하고 있다. 굳건한 신앙인이자 불굴의 혁명가였던 밀턴의 삶과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걸작으로 꼽힌다.
○ 목차
제1편
제2편
제3편
제4편
주(註)
해설 사탄의 유혹과 낙원의 회복
존 밀턴 연보
○ 저자소개 : 존 밀턴 (John Milton, 1608 ~ 1674)
1608년 영국 런던에서 부유한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17세기 영문학을 대표하는 청교도 작가이자 위대한 서사시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과 예술 분야에 재능을 보였다.
17세 때 케임브리지 대학 크라이스트 칼리지에 입학해 24세 때 문학석사로 졸업할 때까지 최초의 걸작 「그리스도 탄생하신 날 아침에」(1629)를 비롯한 여러 편의 소네트를 썼다. 그 후 청교도혁명 발발 전까지는 밀턴 생애에서 가장 평화로운 시기로, 독서와 여행을 통해 시인으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밀턴은 1638~39년에 1년 3개월 동안 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하다가, 혁명이 일어나자 곧장 귀국했다. 1640년부터 논쟁과 정쟁의 소용돌이에 몸을 던져 청교도혁명과 공화정을 옹호하는 다수의 팸플릿을 썼으며, 크롬웰의 라틴어 비서관(오늘날의 외무부장관)으로 복무했다. 이 시기에 발표한 『아레오파기티카』(Areopagitica, 1644)는 언론자유 사상의 경전으로 불린다. 1652년 그는 녹내장으로 추정되는 질병으로 인해 두 눈의 시력을 잃게 된다.
1660년 왕정복고가 되자 투옥되기도 했지만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내부적 망명자 신세가 된 만년의 밀턴은 『실낙원』, 『복낙원』, 『투사 삼손』 등 3대 걸작 서사시를 집필했다. 『실낙원』은 호메로스나 베르길리우스의 작품에 견줄만한 대작으로 극찬을 받았다. 1674년 타계했다.
– 역자 : 조신권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학교 객원교수,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총신대학교 초빙교수를 지냈으며, 한국밀턴학회와 한국기독교 어문학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지냈다. 현재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다. 지은 책으로 『존 밀턴의 문학과 사상』 『정신사적으로 본 영미문학 : 중세편』 『재미있고 신나는 성경 이야기』 『성경의 문학적 탐구』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존 던 시집 『사랑학 강의』와 T. S. 엘리엇 시집 『황무지, 그 밖의 시들』, 올더스 헉슬리 평론집 『밤의 음악』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내 일찍이 한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상실된 행복의 동산을 노래했으나, 이젠 모든 유혹을 통해 충분히 시련 받은, 한 인간의 확고한 순종에 의해 온 인류에게 회복된 낙원을 노래하리라. — 「제1편 1~5행: 작품의 도입부」 중에서
그는 꿈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말이 끝났을 때 우리의 구주가 눈을 들어 보니, 아주 넓은 그늘 밑 널찍한 장소에 호화로운 식탁이 궁전 식으로 차려져 있다. 쌓아 올린 접시들, 최상등의 냄새 좋은 고기류, 사냥에서 잡은, 반죽을 입혔거나 쇠꼬챙이에 꽂아 구운, 또는 용연향에 쪄낸 짐승과 새고기,
(……)
아, 이런 진미에 비하면 하와를 꾄 저 야생의 사과는 얼마나 소박했던가! 호화로운 식기대,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는 술 옆에, 가니메데스나 힐라스보다도 더 화색이 좋은, 화려하게 차려 입은 날씬한 젊은이들이 질서정연하게 서 있다.
좀 떨어져 나무 밑에는 디아나를 모시는 요정들과 아말테이아의 뿔에서 난 꽃과 과실을 든 나이아스들,
(……)
선녀들보다도 더 아름다워 보이는 헤스페리데스의 여인들이 때로는 춤을 추기도 하고 때로는 서 있기도 했다.
(……)
그 영화는 이러했다.
이윽고 유혹자는 성심성의껏 그 유혹에의 초대를 다시 시작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어찌 앉아서 식사하는 것을 저어하는가? 이것은 금단의 열매도 아니고 또 순결한 이 식품에 손대는 것을 금하는 금령도 없도다. 이것을 맛본다고 해서 악의 지식이 싹트는 것 아니고, 오히려 상쾌한 회유의 기쁨으로 해서 생명은 보존되고 생명의 적, 굶주림은 파멸하리라. 이 모든 것들은 그대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대를 자기들의 주로 인정하고자 온 그대의 신하들, 대기와 숲과 샘의 영들이니라. 하느님의 아들 그대 무엇을 저어하는가? 어서 앉아 드시라.”
이에 예수는 온화하게 이렇게 대답한다.
“(……)
나도 그대와 같이 빨리 마음대로 이 광야에 곧 식탁을 차리도록 명령하고 화려하게 성장을 한 봉사의 천사들을 불러내어 내 잔을 시중들게 할 수도 있도다.
그런데 어째서 그대는 이 별식을 쓸데없이, 받을 자도 없는데, 강요하는가, 그대는 나의 굶주림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나는 그대의 호화로운 성찬을 멸시하고, 그대의 그럴싸한 선물을 선물이 아니라 사기로 간주하도다.” — 「제2편 339~392행: 굶주린 예수 앞에 성찬을 차려놓고 음식을 들기를 권하는 사탄과 이를 물리치는 예수」 중에서
“서 있어보려거든 서 있어보시라. 바로 서려면 기술이 필요하도다. 나 그대를 그대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와 가장 높이 놓았으니, 최고는 최선이오, 부자관계를 입증하시라. 못 서겠거든 뛰어내리시라, 하나님의 아들이면 다치지 말고. 기록되기를 ‘그분은 그대를 위하여, 천사를 명하여 저들의 손으로 그대를 받들지니, 그대 혹시라도 발이 돌에 부딪힐까 함이로다’ 하였도다.” 예수님의 답변은 이러하였다. “또한 기록되기를, ‘주님이신 너희 하나님을 떠보지 말라.’ ” — 「제4편 551~560행: 성전 탑 꼭대기에 예수를 올려놓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여 떨어져보라고 유혹하는 사탄과 이를 물리치는 예수」 중에서
○ 줄거리
제1편
예수가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을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소리가 내린다. 이를 목격한 사탄은 위기감을 느끼고 중천에서 회의를 열어 부하 천사들에게 이 비보를 전한다. 그리고 황야에서 방랑하던 예수 앞에 나타나 돌을 가리키며 ‘이 돌로 떡덩이가 되게 해보라’며 시험한다. 예수는 사탄의 정체를 폭로하고 그를 물리친다.
제2편
요단강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예수를 그의 미래의 제자들과 마리아가 찾는다. 사탄은 다시 예수 앞에 나타나 음식으로 그를 유혹하지만 예수가 끄덕도 하지 않자 부와 재물로써 다시 예수를 유혹한다. 하지만 역시 예수는 조리 있는 반박으로 사탄을 물리친다.
제3편
사탄은 다시 예수 앞에 나타나 이번에는 피정복자인 유대 민족의 해방이라는 구실을 들어 승리의 영광과 제국의 권력으로 예수를 유혹한다. 예수가 동요하지 않자 예수를 높은 곳으로 데려가 영광스런 제국과 강력한 무력을 보여주나, 이번에도 예수는 초연히 유혹을 물리친다.
제4편
다시 사탄은 로마 제국의 영화를 보여주며 세상 최고의 권력으로 유혹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속세의 권력으로는 예수를 움직이지 못함을 안 사탄은 이번에는 예술과 학문의 세계로 들어가 그 지적 욕구와 명성으로 예수를 유혹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예수는 일갈하여 유혹을 물리친다.
폭풍의 밤이 지나고, 다시 예수 앞에 나타난 사탄은 예수를 공중 높이, 성전의 꼭대기 첨탑으로 끌고 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여기서 뛰어내려보라’고 한다. 예수가 ‘하나님을 떠보지 말라’고 하니, 사탄은 경악하여 떨어진다.
이로써 유혹의 시간은 지나고 예수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며 집으로 돌아간다.
○ 출판사 서평
-『실낙원』에서 약속된 예언의 성취, 『복낙원』
『복낙원』은 『실낙원』이 출간된 지 4년 후인 1671년에 『투사 삼손』과 함께 묶여 출판되었지만, 밀턴이 언제부터 쓰기 시작해서 언제 완성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실낙원』을 읽은 독자가 밀턴에게 편지를 보내어 ‘낙원의 회복에 대해서도 써달라’고 했다는 확실치 않은 일화가 전해 내려올 뿐이다.
『투사 삼손』은 극시이므로, 밀턴의 작품 중 엄밀히 말해 순수한 서사시는 『실낙원』과 『복낙원』밖에 없다. 이 두 작품은 내용적으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데, 『실낙원』 제1편 4~5행 “(…) 에덴까지 잃게 되었으나, 이윽고 한 위대한 분이 우리를 회복시켜 복된 자리를 도로 얻게 하셨으니”에서 ‘한 위대한 분’이 ‘복된 자리’를 되찾는 이야기가 바로 『복낙원』의 내용이다. 다시 말해, 『복낙원』은 『실낙원』에서 약속된 예언의 실현 또는 성취라고 볼 수 있다. 『복낙원』을 『실낙원』의 속편으로 보는 이유가 여기 있다.
『복낙원』이 『실낙원』의 속편이라 하지만, 이 둘은 아주 다른 시다. 『실낙원』이 에덴에서 쫓겨남으로써 불행한 결말로 끝나는 비극이라면, 『복낙원』은 예수가 사탄을 물리침으로써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 희극이다. 또한 『실낙원』이 감정을 고양시키는 장중하고 화려한 시라면, 『복낙원』은 조용하고 어조가 낮으며 웅장하고 화려하다기보다는 지적인 논쟁으로 이루어진 이성적인 시이다.
『복낙원』은 전 4편 2,070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실낙원』처럼 무운시로 씌어졌다. 『복낙원』의 주제는 책의 첫머리에 나와 있다. “내 일찍이 한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상실된 행복의 동산을 노래했으나, 이젠 모든 유혹을 통해 충분히 시련 받은, 한 인간의 확고한 순종에 의해 온 인류에게 회복된 낙원을 노래하리라.”(제1편 1~5행) 『실낙원』에서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낙원을 잃은 이야기를 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낙원을 찾게 된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이다.
『복낙원』에서 낙원의 회복은 십자가의 부활이라고 하는 신학적 명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황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는 것으로 성취된다. 따라서 이 시는 예수가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는 하나님의 증거가 주어지는 장면부터, 40일간 황야를 헤매던 예수가 거듭되는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고 자신의 소명을 완전히 인식하고 황야를 떠나는 장면까지로 이루어져 있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예수를 찾으려는 (미래의) 제자들이나 마리아에 대한 언급이 두서너 곳 나오지만, 시의 대부분은 유혹하려는 사탄과 거부하는 예수의 논쟁이 주를 이루고 있다. 성경에서 「누가복음」 4장 1~13절의 이야기가 바로 이 시의 줄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황야에서 40일을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명상에 잠겨 방랑하던 예수에게 사탄이 나타나, 처음에는 음식으로, 그다음에는 부와 명예와 영광과 제국의 권력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학문과 예술의 지적 욕구와 명성으로 예수를 유혹하지만, 예수는 일일이 조리 있게 논박을 하며 사탄의 유혹을 물리친다. 이처럼 시 전편을 통하여 예수와 사탄의 논쟁적이고 지적인 대화가 오고 간다.
일견 성경의 구절을 그대로 따른 듯한 단순한 내용처럼 보이지만, 『복낙원』을 읽는 한 가지 독법(讀法)은 이 시를 ‘예수의 자아발견’ 이야기로 읽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사탄은 복음서에서처럼 타자(他者)가 아니라 예수의 또 하나의 내면이라 할 수 있다. 외부의 유혹이 아니라 내부의 유혹을 스스로 계속 거부해가는 과정에서 진정한 메시아로 거듭나게 되는 예수의 이야기인 것이다.
예수는 황야로 오기 전까지는 메시아로서의 자신의 사명을 완전히 인식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40일을 황야에서 헤매면서 육체적 욕망과 세상의 영화를 소유하고 싶은 유혹에 굴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예수는 유혹을 이겨냈고, 이제 그는 메시아로서의 소명을 확실히 인식하고 승리를 확신하며 황야를 떠난다.
밀턴은 이처럼 그리스도를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서술하고 있다. 성자(聖子)가 아닌,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 예수는 자유의지로 악을 이기고 선을 행했고, 결국 낙원의 회복은 바로 여기에 있음을, 즉 올바른 이성(자유의지)의 행사에 있음을 밀턴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낙원』에서도 밀턴은 아담과 하와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했다. 신은 인간의 선택에 관여할 수 없으며, 단지 인간이 선택할 바를 미리 알아서 행할 뿐이라는 것을 하나님 자신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사에 따른 복종을 원하지, 필연의 인형(人形)이 강제로 바치는 복종은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실낙원』 제3편 99~119행). 이런 점에서 밀턴은 단순한 청교도가 아니라 기독교적 인문주의자라고 평가 받는다.
○ 추천평
존 밀턴은 예술에서 위대하기 전에 인생에서 위대했다. – 프랭크 A. 패터슨
시어와 운율에서 밀턴은 영국의 모든 위대한 문필가들 가운데서도 최상급의 예술가이다. – 매슈 아널드
사실상 밀턴 뒤에는 고전 서사시가 있었지만, 그것만이 다는 아니었다. 그가 이룩한 것은 전례 없는 무엇이었다. – A. J. A. 월덕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