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북학의 : 시대를 아파한 조선 선비의 청국기행
박제가 / 서해문집 / 2003.3.10
‘북학의’를 저술한 박제가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중상학파의 한 사람으로서 과거나 정치적 야심보다는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가 좀더 잘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의 백성들이 더 풍요롭게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한 선비이다.
처음 사은사 체제공을 따라 청국에 간 박제가는 청국의 정치. 경제. 문화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청국의 백성들이 조선의 백성들보다 부유하게 산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였다. 하다 못해 호미 같은 작은 농기구에조차도 말이다. 그리고 오직 자신의 이익에만 눈이 멀어 서책만 잡고 있는 또는 양반이란 권위 의식에 사로잡혀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조선의 소위 지식층을 깨우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북학의 내.외편이, 그리고 그러한 뜻을 좀더 현실화시키기 위한 한 방법으로 임금님께 상소를 오린 진북학의가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북학의’는 수레, 배, 축목, 축성, 가옥, 시장, 복식, 화폐, 통역, 문방구, 군사무기, 교량, 벽돌, 그릇, 농사 기구와 농사 방법, 누에치기, 하천의 이용, 수차 등에 이르기까지 실제 우리 생활과 관련된 것뿐만 아니라, 농업, 상업, 무역, 과거 제도에 대한 개혁의 방법을 상세하고 광범위하게 덧붙이고 있다.
박제가가 제시한 이러한 방안들의 발전, 개혁 내용이 현재와 동떨어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새로운 사고의 전환이나 방향성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어 줄 것이다.
○ 목차
1. 서문
2. 내편
3. 외편
4. 진북학의
○ 저자소개 : 박제가 (朴齊家, 1750 ~ 1805)
박제가 (朴齊家, 1750년 11월 5일 ~ 1805년 7월 6일)는 조선 후기 실학자로 연암 박지원과 함께 18세기 북학파의 거장이다. 본관은 밀양, 자는 차수 (次修) · 재선 (在先) · 수기 (修其), 호는 초정 (楚亭) · 정유 · 위항도인 (葦杭道人)이다.
1778년 사은사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북학의』를 저술했다. 정조의 서얼허통 (庶孼許通) 정책에 따라 이덕무 · 유득공 · 서이수 등과 함께 규장각 검서관이 되었다. 박제가는 키가 작고 다부진 체격이었으며, 수염이 많았다. 농담을 잘하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직선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후배이자 검서관 동료인 성해응 (成海應)은 박제가 사후에 박제가의 성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초정은 뛰어난 재능을 자부하여 남의 뒤를 좇아 움직이려 하지 않고 자기 천성이 가는대로 스스로 터득했다. 말을 꺼내면 바람이 일어 그 예리한 칼날을 거의 맞설 수 없었다. 그를 힐난하는 자가 나타나면 기어코 꺾으려 애썼다. 그런 탓에 쌓인 비방이 크고도 요란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끝내 덮어 버릴 수 없다.” 박제가의 오만하고 직선적인 성격과 강한 자부심, 호승심 (好勝心)을 지적했는데 그를 용납하지 않는 적을 많이 만들어 낸 요인을 성격과 자부심 탓으로 돌리고 있다. 충분히 수긍할 만한 지적이다. 게다가 박제가는 서자였다. 내로라하는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서자인 처지에 이런 성격과 능력과 태도를 지녔으니, 그는 주변에 숱한 적을 만들면서 문예와 학문에 종사한 것이다. 『북학의』에 표출된 선명하고 선이 굵은 주장은 그런 성격과 태도에도 잘 부합한다.
저서로는 『정유집』, 『북학의』, 『정유시고』, 『명농초고 : 明農草稿 』 등이 있다.
– 역자 : 박정주
인천에서 태어나 경기고, 서강대 사학과를 거쳐 한림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우리 고전에 매료되어 고전의 번역 작업을 진행 중이다. 현재 동산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 책 속으로
우리 나라 붓은 붓털 안팎이 가지런해서 한번 닳아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중국 것은 안쪽 털이 점점 오그라들면서 겉쪽 털이 나와서 오래 쓸수록 끝이 더욱 날카로워진다. 우리나라의 먹은 일 년만 지나도 벌써 광택이 사라지고 그 다음해에는 아교가 굳어서 갈리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것은 오래될수록 값지다. 소동파가 말하기를, “사람이 먹을 가는 것이 아니라 먹이 사람을 간다고 해야 옳다.” 라고 하였다.
우리 나라 서적은 거문고의 작은 줄 같은 색끈으로 엮였다. 그런데 그것이 항상 끊어지는 이유는 너무 바짝 당겨서 늘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 책은 상가닥으로 엮어서 여유가 있다. 나는 갖고 있는 중국 책이 심하게 해어지지 않는 한 구태여 다시 엮지 않는다. 그래봐야 힘만 들고 오히려 책을 망쳐 놓기 때문이다. — p. 124~125
○ 출판사 서평
조선 후기 대두된 실학사상을 ‘북학 (北學)’이라고 일컫기도 하는 것은 ‘북학의’를 저술한 박제가의 영향이 크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중상학파의 한 사람인 박제가는 체제공을 따라 청국 (淸國)에 갔다가 청국의 정치, 경제, 문화에 큰 충격을 받고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
서해문집의 우리 고전 시리즈 ‘오래된책방’의 첫 번째 책으로 나오게 된 ‘북학의’는 국사편찬위원회가 간행한 ‘정유집'(1974)과 한국학문헌연구소에서 간행한 ‘농서’ (農書, 1981)를 보완, 편집해 번역하였다. 좀 더 많은 이들이 우리 고전을 읽었으면 하는 의도에 맞게 쉬운 말로 명료하게 번역된 것이 특징이다. 우리 고전에 대한 선입견을 떨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내용에 걸맞는 도판들을 수록하였으며, 어려운 단어들은 역주를 달아 내용의 이해에 도움이 되도록 배려하였다.
○ 북학의 (北學議) 개관
북학의 (北學議)는 조선 정조 때 북학파인 박제가가 쓴 책이다. 정조 2년 (1778년) 이덕무 등과 함께 사은사 채제공을 따라 청의 수도 북경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 개설
《북학의》는 서명응과 박지원(朴趾源), 그리고 저자인 박제가 자신이 쓴 서문과 함께 내(內)ㆍ외(外) 2편으로 나뉜다. 그의 스승인 박지원이 쓴 서문에 따르면 박제가는 연경 (燕京, 북경)에서 농사, 누에치기, 가축 기르기, 성곽 축조, 집 짓기, 배와 수레 제작부터 기와, 인장, 붓, 자를 제작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눈여겨보고 마음으로 따져보면서, 눈으로 알 수 없으면 꼭 물어보고 마음으로 따져서 이상한 것은 반드시 배웠다고 한다. 저자는 서문에서 “저들의 풍속 가운데 본국에서 시행하여 일상생활을 편리하게 할 만한 것은 눈에 띄는 대로 글로 기록했고, 그것을 시행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 그렇지 않음으로서 생기는 폐단을 첨부해 하나의 학설을 만들었다. 그리고 《맹자 (孟子)》에 나오는 진량의 말을 인용해 책의 이름을 지었다”고 말하며, “이용과 후생은 한 가지라도 갖춰지지 못하면 위로는 정덕을 해치는 폐단을 낳는다”, “지금 백성들의 생활이 날이 갈 수록 곤궁해지고 국가 재정은 날이 갈수록 고갈되는데 사대부는 팔짱 낀 채 보기만 하면서 구제하지도 않는가?”라며, 백성을 위해 사대부들이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설 것을 강조한다.
– 내용
내편은 거(車)· 선(船)· 성(城)· 벽(○)· 와(瓦)· 옹(甕)· 단(簞)· 궁실(宮室)· 창호(窓戶)· 계체(階○)· 도로(道 路)· 교량(橋梁)· 축목(畜牧)· 우(牛)· 마(馬)· 여(驢)· 안(鞍)· 조(槽)· 시정(市井)· 상고(商賈)· 은(銀)· 전(錢)· 철(鐵)· 재목(材木)· 여복(女服)· 장희(場戱)· 한어(漢語)· 역(譯)· 약(藥)· 장(醬)· 인(印)· 전(氈)· 당보(塘報)· 지(紙)· 궁(弓)· 총시(銃矢)· 척(尺)· 문방지구(文房之具)· 고동서화(古董書·) 등 39항목으로,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기구와 시설에 대한 개혁론을 제시ㆍ설명했다.
외편에는 전(田)· 분(糞)· 상과(桑菓)· 농잠총론(農蠶總論)· 과거론(科擧論)· 북학변(北學辨)· 관론(官論)· 녹제 (祿制)· 재부론(財賦論)· 통강남절강상박의(通江南浙江商舶議)· 병론(兵論)· 장론(葬論)· 존주론(尊周論)· 오행골진지의(五行汨陳之義)· 번지허행(樊遲許行)· 기천영명본어역농(祈天永命本於力農)· 재부론 (財賦論) 등 17항목의 논설을 수록하여 농업 기술의 개량과 국내 상업 진흥, 대외 무역의 이점을 설파하고 있다.
북학을 가리켜 저자는 ‘생활과 백성에 직결된 학문’이라 주장하면서, 가난한 백성을 구제할 방안으로 상업 발달에 따른 유통 경제를 활성화 시켜줄 수 있는 교통수단인 ‘수레’의 사용과 규격화된 크기의 ‘벽돌’ 이용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고, 실제로 저자 자신이 직접 벽돌 만드는 기술을 연구해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저자는 성리학에서 강조하던 농본억말 (農本抑末)과 같은 상업 억제정책을 반대하며 적극적인 상업 장려와 그 바탕이 되는 생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특히 “경제란 우물 같은 것으로 계속 써주지 않으면 말라버린다.”, “쓸 줄 모르면 만들 줄도 모르고, 만들 줄을 모르면 민생은 나날이 곤궁해질 것이다.”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전통시대의 미덕이었던 검약이나 소비 억제보다는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적극적인 소비 활동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적극적인 소비를 통해 생산을 증대시키자는 그의 사상은 근대 경제학 이론과도 흡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더욱이 청과 통상하여 국력을 기른 뒤 여러 나라와도 통상할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이는 당시 북학파들의 주된 의론이기도 했다.
– 평가
박제가가 살던 당시까지 조선 사회는 외국 문화에 대해서는 굳게 문을 걸어잠그고 있었고, 지식인들은 성리학 일변도의 학문 풍조 속에서 공리공론만 일삼으며 자아도취에 빠져 정작 백성들의 현실은 외면하고 있었다. 박제가는 북경 사행을 통해 당시 조선 백성들의 빈곤을 해결할 수 있는 대책을 정리해서 이 책을 지었다. ‘북학의’에 논술된 국내상업 및 외국무역의 장려, 수입금지, 수출장려, 은의 해외 유출 금지, 물가의 평준화, 대량생산, 제품 규격의 규제, 전국적 시장 확대, 농공상업에 대한 국가적 후원의 강화 등에 대한 견해는 근대 유럽의 중상주의 경제 사상과 경향이 비슷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북학의’의 서문을 지은 서명응은 “이 책이 채택되어 현실에서 쓰일 수 있을지 없을지는 정녕 알 수 없겠지만, 우리 조정에서 모범이 될 책을 편찬할 때에 저 솔개나 개미가 미래를 예견하는 구실을 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며 이 책에 대한 기대를 드러냈고, 저자의 스승이었던 박지원도 서문을 통해 저자의 적극적인 북학 정신을 높이 평가한다.
‘북학의’는 이후 ‘북학’이라는 학문이 조선에서 하나의 시대 사상으로서 자리잡는 기반이 되었다. 박제가 말고도 박지원, 홍대용, 이덕무 등 ‘북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자 그룹들은 계속해서 나타났다. 그들은 청 사행에서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폐쇄적인 사회의 문을 열어 이용후생을 통한 백성들의 생활 안정과 부국을 외쳤다. 건축 자재로서 벽돌을 사용할 것과 교통 수단으로서 수레와 배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자는 것, 비활동적이었던 한복을 개량하고 대외 무역을 확대하자는 이들의 사상 배경에는 당시 사농공상으로 서열화되어 있던 직업의 귀천을 최대한 배제하면서 상공업을 진흥시키자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한편으로 박제가는 지나치게 중국 문명을 찬양한 나머지,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가장 선구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균형 감각을 규지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네 차례에 걸친 중국 사행 이후 박제가는 중국에 대한 선망이 지나쳐 그만 조선에 대한 완전한 부정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우리 나라의 자기는 너무 거칠다” (자, 瓷편), “우리 나라는 1천 호가 사는 마을에서도 반듯해서 살 만한 집이 한 채도 없다” (궁실, 宮室편), “우리 나라의 의술은 정말 믿을 수 없다” (약, 藥편) 등, ‘북학의’ 곳곳에는 중국 문화에 대한 칭찬과 함께 우리 것에 대한 불만이 가득 나열되어 있는데, 조선에 대해 거의 일방적이기까지 한 비하는 중국의 선진문화를 수용하지 못하면 ‘보잘것없는’ 조선은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논리로까지 비약된다. 더욱이 “본래 사용하는 우리 말을 버리고 중국어를 써야만 ‘오랑캐’라 불리는 신세를 면할 수 있다”고까지 외치는 대목에서는 ‘북학의 선구자’로서뿐 아니라 ‘극단적인 중국 신봉자’라는 이미지를 덧씌우기에 충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번역 및 간행본
‘북학의’는 원래의 사본 외에도 여러 전사본 (傳寫本)이 있으며, 1947년 금융조합연합회에서 진소본 (進疏本)을 번역 간행하고, 1961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한국사료총서’ (韓國史料叢書) 제12로 ‘정유집 (貞蕤集)ㆍ부 (附) 북학의 (北學議)’를 간행하였다. 북한에서도 영인본 및 번역본이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학의」(다락원문고명저다이제스트 6), 1985년, 김용덕 역, 다락원.
「북학의」(을유문고 51), 1989년, 을유문화사.
「북학의」, 1991년, 홍희유 역, 여강출판사 – 북한에서 국역된 것이다.
「박제가」 (북학의, 실학사상독본, 1992년, 이익성 역, 한길사.
「북학의」, 1994년, 이익성 역, 을유문화사.
「북학의」, 2003년, 안대회 역, 돌베개
「북학의」 (부제: 시대를 아파한 조선 선비의 청국 기행, 오래된 책방01), 2003년, 박정주 역, 서해문집.
「북학의」 (범우문고 145), 2004, 김승일 역, 범우사.
「박제가의 북학의」, 2007, 김교빈(교수) 저, 삼성출판사.
「만화로 읽는 동양철학」 16(북학의), 2008, 드림아이 저, 태동출판사.
「만화 박제가 북학의」, 2009, 곽은우 저, 주니어김영사.
「북학의」, 2010, 두산동아편집부.
「북학의」, 2011, 이익성 역, 을유문화사.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