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비극의 탄생 / 바그너의 경우 / 니체 대 바그너
프리드리히 니체 / 청하 / 1982.12.1
쇼펜하우어의 의지철학을 계승하는 ‘생의 철학’ 의 기수이며,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지칭되는 프리드리히 니체. 현재까지도 그의 유고들이 발굴되고 있으며 이 유고들은 니체연구 학자들에 의해 현재 독일에서 니체전집으로 출간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나올 예정이다.
이 책은 니체의 대표적인 저서로, 예술이란 조형예술의 원리인 아폴론적 요소와 음악예술의 원리인 디오니소스적 원리가 조화를 이루어 발전하는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 목차
– 비극의 탄생
편집자 해설
자기 비판의 시도
음악정신으로 부터의 비극의 탄생
비극의 탄생
– 바그너의 경우
편집자 해설
저자 서문
바그너의 경우
첫번째 추록
두번째 추록
후기
– 니체 대 바그너
저자 서문
내가 경탄하는 곳
내가 반대하는 곳
위험한 바그너
미래 없는 음악
우리 대척자
바그너가 소속하는 곳
순결한 사도로서의 바그너
내가 어떻게 바그너로부터 벗어났는가
심리학자는 말한다
후기

○ 저자소개 : 프리드리히 니체
독일의 사상가이자 철학자이자 시인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20세기를 연 문제적인 철학자이다. 1844년 독일 레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니체의 조상은 폴란드 계라고 알려져 있다. 5세 때 목사인 아버지를 사별하고 어머니와 누이동생과 함께 할머니의 집에서 자랐다. 14세에 슐포르타 기숙학교에서 엄격한 고전 교육을 받고 1864년 본 대학에 진학하여 신학과 고전 문헌학을 공부했다. 1865년 스승인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겨갔으며, 그곳에서 바그너를 알게 되어 그의 음악에 심취하였다. 이 두 대학에서 신학과 고전문헌학을 공부했다. 25세의 젊은 나이로 스위스 바젤 대학의 고전문헌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심취함으로써 철학적 사유에 입문했다. 28세 때 최초의 저작『비극의 탄생』을 펴냈으며 이 저작에서 니체는 아폴론적인 가치와 디오니소스적인 가치의 구분을 통해 유럽 문명 전반을 꿰뚫는 통찰을 제시한다. 1873년부터 1876년까지는 독일과 독일민족, 유럽 문화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가하며, 위대한 창조자인 ‘천재’를 새로운 인간형으로 제시한 『반시대적 고찰』을 집필했다. 1879년 건강이 악화되면서 재직중이던 바젤 대학을 퇴직하고, 이후 주로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요양지에 머물며 저술 활동에만 전념했다. 1888년 말부터 정신이상 증세를 보인 니체는 이후 병마에 시달리다 1900년 8월 25일 바이마르에서 생을 마감했다. 니체의 정신병을 두고 원인이 분분하지만 젊었을 적 얻었던 매독이 발전되어 정신분열로 이어졌다는 설이 강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현재까지도 그의 유고들이 발굴되고 있으며 이 유고들은 니체연구 학자들에 의해 현재 독일에서 니체전집으로 출간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나올 예정이다. 니체가 사망한 해인 1900년은 특별한 상징을 지닌다. 19세기를 마감했다는 의미가 될 수도, 20세기를 새롭게 연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마 후자일 것이다. 실제로 니체는 ‘사후, 나는 신화가 될 것이다’는 예언을 했는데, 이 말이 사실이 되었다. 헤르만 헤세, 앙드레 지드, 프란츠 카프카 등 니체를 선망하는 일련의 작가들이 니체의 사상을 문학으로 형상화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초라고 여겨지는 카프카가 니체를 엄청나게 존경했다는 사실과 카프카의 작품 세계는 결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매듭이다. 또한 하이데거와 야스퍼스 등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니체를 실존철학의 시원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프랑스의 포스트 구조주의자들, 그러니까 푸코와 들뢰즈 그리고 데리다 역시 니체를 위대한 사상가로 평하며 저마다 계승 의식을 발현했다. 한편, 한국에서도 니체에 대한 열광은 대단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신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라는 박상륭 작가의 소설이 출간되기도 했다. 한국에서 니체 전문가로 꼽히는 사람으로는 고병권이 있다. 마지막으로 파시즘에 의한 니체 사상의 오용이 있다. ‘권력’, ‘힘’, ‘미학’, ‘귀족주의’ 등 니체가 중시한 가치를 파시즘이 차용함으로써 모순적이게도 니체의 사상은 파시즘과 나치즘에 의해 선전된 바 있다. 저서로는『니체 최후의 고백』,『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인간적인 것, 너무나도 인간적인 것』,『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선악의 피안』,『도덕의 계보』,『이 사람을 보라』,『권력에의 의지』등이 있다. 니체의 작품 세계에서 대표작인『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위치는 각별하다. 이 작품은 그의 집필 활동의 정점에 씌여진 것으로, 그의 활동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시켜주는 고리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잠언 형식의 아포리즘이 니체 저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책은 아포리즘의 절정이다. 반대로 영미철학이 자주 구사하는 식의 논지 전개를 니체도 시도한 적이 있는데, 대표적인 저서가 『도덕의 계보』이다. 그의 사상적 특징은 한 마디로 요약하기가 불가능하다. 특히 니체 이후, 니체 계승자라고 자처한 학자들이 제각각의 니체를 창조함으로써 니체 사상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시도되었다. 하이데거는 니체를 적극적 니힐리스트로 규정하였고, 푸코는 권력-지식 담론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이처럼 전반적으로 니체는 고정된 가치에 회의적이었고, 특히 기독교적 덕목을 혐오하였다. 니체 사후 1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니체에 대한 숭배는 끊이지 않는다. 푸코는 ‘앞으로는 들뢰즈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말을 남겼지만, 여전히 21세기는 니체의 시대가 될 것이다.

○ 책 속으로
디오니소스의 열성적인 숭배자는 주로 여성들이었고 이들은 마이나데스라고 불렸다. 마이나데스는 ‘광란하는 여자들’이라는 뜻이다. 표범 등 짐승의 가죽을 걸친 그녀들은 나뭇가지로 만든 관을 쓰고, 한 손에는 뱀이나 포도송이를, 또 다른 한 손에는 디오니소스 숭배의 표지인 지팡이를 든 채 노래하고 춤추면서 산과 들을 뛰어다녔다. 디오니소스 신에 의해서 접신이 되었을 때 이 여자들은 시끄럽게 떠들어대면서 산기슭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었고, 괴력을 발휘하여 나무를 뿌리채 뽑는가 하면, 야수를 갈갈이 찢어 피가 뚝뚝 흐르는 날고기를 먹었다고 한다. 디오니소스는 이 여자들을 거느리고 리디아, 프리기아, 그밖의 동방 여러나라에서 자신을 포교했다.
일반적으로 그녀들은 디오니소스 숭배의 본고장인 트라키아나 프리기아에서 디오니소스 제의가 있을 때 열광적으로 난무하던 여신도들의 신화적 반영이 아닌가 보고 있다. 사람들은 이 제의가 행해지는 동안 자신 속에서 신을 느끼면서 일상의 습관이나 금기에서 벗어나 자연과의 합일을 맛보았다. — <비극의 탄생>
… 왜냐하면 변증론의 본질 속에는, 하나의 겨론이 나올 때마다 요란스레 환호를 올리며, 차가운 명석성과 의식 속에서만 숨을 쉴 수 있는, 저 낙천주의적 요소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낙천주의적 요소는 일단 비극 속에 침투해 들어가면 비극의 디오니소스적 영역을 점차 잠식하여 이것을 필연적으로 자살해 버리게끔 만든다. — p.96
… 왜냐하면 변증론의 본질 속에는, 하나의 겨론이 나올 때마다 요란스레 환호를 올리며, 차가운 명석성과 의식 속에서만 숨을 쉴 수 있는, 저 낙천주의적 요소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낙천주의적 요소는 일단 비극 속에 침투해 들어가면 비극의 디오니소스적 영역을 점차 잠식하여 이것을 필연적으로 자살해 버리게끔 만든다. — p.96
“나는 조금 홀가분해졌다. […] 바그너에게서 등을 돌린 것은 내게는 하나의 운명이었으며 ; 이후에 무언가를 다시 기꺼워하게 된 것은 하나의 승리였다. 어느 누구도 나보다 더 위험하게 바그너적인 짓거리와 하나가 되어 있지는 않았으리라. 어느 누구도 나보다 더 강력하게 그것에 저항하지는 않았으리라. 어느 누구도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나보다 더 기뻐하지는 않았으리라. […] 내가 도덕주의자라면, 어떤 명칭을 부여하게 될지 알겠는가! 아마도 자기극복이라는 명칭일 것이다.” —『바그너의 경우』, 1888년
○ 본서의 개론
– 비극의 탄생
‘비극의 탄생’ (독: Die Geburt der Tragödie aus dem Geiste der Musik)은 니체가 1872년에 출판한 책으로 바그너에게 헌정한 저서이다.
니체는 고대 문헌학자로서의 연구를 통하여 그리스 비극의 정신이야말로 진실한 문화창조의 원천임을 알았다. 이 책은 그리스 해석을 전개하면서 그리스 비극의 정신을 현대에서 부흥시킨 것이 바그너의 음악임을 논하여 친구 바그너의 신예술운동을 지원하려고 한 것이다.
니체에 의하면 개체적 생은 죽음과 파괴를 면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이에 집착하려는 자에게는 생은 고뇌와 비극성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된다. 이러한 사실을 예감한 그리스인들은 광명과 예술의 신인 아폴론에 의해 상징되는 몽환적 (夢幻的)인 미 (美)의 세계를 구상하고, 이에 의해 생의 암흑을 잊어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순간적인 위안을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파괴함으로써 모든 것을 새로이 창조하는 자연의 근원적인 생산력을 상징하는 풍요와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가 주재하는 운명적 필연의 흐름에 개아 (個我)의 생을 몰락시켜 가는 비극적인 도취의 체험이야말로 보다 근원적인 생의 체험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스 비극은 아폴론적 몽환의 이데아계와 디오니소스적 도취의 충동계 (衝動界)의 긴장된 일체관계 (一體關係)에 있어서 생을 표현하려고 한 것으로써, 지적 합리성에 의거하여 형태를 갖추어 보려고 하는 천박한 인생 파악보다 훨씬 심원한 예지의 결정인 것이다. 독창적인 그리스 해석을 전개한 이 책은 실증적 과학성을 중시하는 당시의 문헌학계로부터는 완전히 무시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그러나 니체는 이러한 ‘비극’을 인내하여 독창적인 사상가로 탄생한다.
이듬해 출판한 《반시대적 고찰》은 이러한 예외자의 입장에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의 군사적 승리를 독일문화의 승리로 착각한 19세기 말 독일 사상계의 속물성을 날카롭게 비판한 경세 (警世)의 서이다.
– 바그너의 경우 (The Case Of Wagner)
1865년에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글들을 알게 되었고, 그는 1866년 프리드리히 알베르트 랑게의 책, ‘유물론의 역사와 그 현재적 의미에 대한 비판’ (Geschichte des Materialismus und Kritik seiner Bedeutung in der Gegenwart)을 읽었다. 그는 두 사람의 저서 모두와 자극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의 저서는 니체가 그의 지평을, 철학을 넘어서는 영역까지 확장하도록 격려했으며, 그의 학업을 지속하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바그너와의 만남과 결별’ 그 결과 니체는 장기간의 병가를 받고 그의 관심을 다시 그의 학업에 둘 수 있었고, 1868년 10월 라이프치히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라이프치히 대학 시절에 우연히 책방에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접하였고 이에 깊이 감동하였다. 고전문학자 에르빈 로데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 학업을 끝낸 후 그 다음 해에 바그너와 처음으로 만났다. 니체는 이미 1868년부터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와 만나기 시작했었는데, 그의 부인과 그에게 매우 감탄하곤 했다. 또한 바젤에 있을 당시 바그너는 니체와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었으며,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에 초대하기도 했다. 이후 바그너의 뛰어난 제자의 한사람으로도 인정받았지만, 바그너가 점차 기독교화되고 ‘파르지팔’ (Parsifal)에서처럼 기독교적인 도덕주의 모티브를 많이 이용하고, 국수주의와 반유대주의에 빠지자 그와 결별했다.
– 니체 대 바그너
니체 대 바그너(Nietzsche contra Wagner)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작품이다. 이전에 쓴 글들을 모아 1889년에 출판하였다.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에 대해 썼던 글들을 모아 니체와 바그너의 관계를 설명하는 에세이집이 완성되었다. 니체의 아이돌이자 친구였던 바그너와 왜 절교하게 되었는지 알수 있으며, 바그너의 여러가지 결정들을 비판한다. 바그너의 음악은 동경하지만, 그의 종교적 편견에 대해서는 큰 실망을 하고 있다.
특히 “내가 혐오하는 모든 것을 향해 바그너는 한 발짝씩 내려가고 있다. 반유대주의까지도.”라는 문장은 니체가 반유대주의자라는 소문이 거짓말임을 보여준다.

○ 바그너와 니체
“나는 조금 홀가분해졌다. […] 바그너에게서 등을 돌린 것은 내게는 하나의 운명이었으며 ; 이후에 무언가를 다시 기꺼워하게 된 것은 하나의 승리였다. 어느 누구도 나보다 더 위험하게 바그너적인 짓거리와 하나가 되어 있지는 않았으리라. 어느 누구도 나보다 더 강력하게 그것에 저항하지는 않았으리라. 어느 누구도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나보다 더 기뻐하지는 않았으리라. […] 내가 도덕주의자라면, 어떤 명칭을 부여하게 될지 알겠는가! 아마도 자기극복이라는 명칭일 것이다.” —『바그너의 경우』, 1888년
바그너는 니체에 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미첬다. 니체와 바그너의 만남에서 바그너가 니체의 영향을 받아 만든 작품은 없지만 니체는 그의 사상을 형성해가는 데에 바그너의 영향을 지대하게 많이 받았다. 이러한 영향은 니체의 작품에 고스란히 등장하며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바그너는 니체 사상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니체와 바그너가 교류하면서 가졌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그리스 문화와 고대 비극이다. 그리스 비극에 대한 니체의 관심은 바그너의 음악극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된다. 바그너는 그의 음악극에 독일과 북유럽의 신화를 소재로 사용했다. 음악과 비극에 대한 니체와 바그너의 공통적인 해석과 관심은 둘을 연결시켜주는 가장 강력한 매개체였다. 니체가 고전학 교수에 오를 정도로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바그너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였을 것이며 니체는 음악의 대가와 함께 한다는 것 자체가 기쁨이었을 것이다.
니체와 바그너의 이러한 교류를 통해 탄생한 니체의 작품이 ‘음악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Die Geburt der Tragödie aus dem Geiste der Musik, 1872)’이다. 이 작품의 예비적 성격을 갖는 작품으로는 ‘그리스적 음악극(Das griechische Musikdrama, 1870)’, ‘소크라테스와 비극(Sokrates und die Tragödie, 1870)’ 두 개의 강연문과 ‘비극적 사유의 탄생(Die Geburt des tragischen Gehanken, 1870)’ 등이 있다. 그리스 비극과 음악에 대한 니체와 바그너의 관심사가 일치하지 않았다면 둘의 관계가 성립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바그너는 고대적인 것, 정통 그리스적인 요소를 지닌 극작품을 원했다. 즉 이상적 상황으로서의 신화성이 필요했던 것인데, 바그너에게 그것은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의 비극이었다. 바그너는 아이스킬로스를 음악정신으로부터의 탄생이라고 명명하고 에우리피데스를 데카당스라고 정의내린다. 바그너의 이러한 해석은 음악적인 근원이 절정을 이루는 아이스킬로스에서 비극이 탄생하고, 음악적인 요소가 퇴화하는 에우리피데스에서 종말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고 있다. 니체는 바그너와 의견을 같이 하며 에우리피데스의 소크라테스적 경향이 바로 비극의 본질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라고 본다.
니체는 근대인이 예술을 수용하는 감성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그에 대한 해답으로 바그너의 음악을 내세운다. 근대의 예술은 사람들을 더욱 둔감하게 하고 탐욕스럽게 되도록 할 뿐이라는 것이다. 니체는 근대 예술의 부적절한 감성이 사람들을 끊임없이 잘못된 길로 이끌고 사람들은 의지조차 갖지 못한 부적절한 감성의 노예로 전락한다고 보았다. 또한 바그너의 영향으로 인해 니체는 전통 형이상학적 철학 풍토에 반기를 들게 된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은 ‘반시대적 고찰’과 아울러 삶의 부정을 긍정으로 돌리는 계기를 구성한다.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통하여 전통적인 현상과 물자체의 이원적인 대립을 해소시키며 한층 더 나아가서 근본적인 요소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봄으로써 니체 철학에서 후기에 절정을 이루는 초인개념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다. 특히 소크라테스적 요소를 가장 비가치적인 것으로 설명함으로써 니체는 현대문명이 품고 있는 이성 중심의 일차원적인 사고의 병폐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결국 니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비극의 본질, 곧 디오니소스적인 내용과 아폴론적인 형식의 조화를 통해서만 삶의 가치가 긍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니체가 바그너를 가까이서 알게 된 것은 1868년 가을이었다. 나이로 보아 니체에게 그는 아버지뻘이었는데, 아침 라이프치히에 살고 있던 자신의 여동생 오틸리에 브로크하우스를 방문하고 있었다. 리츨 교수 부인을 통해 그 여동생을 알게 된 니체는 어렵지 않게 바그너를 만날 수 있었다. 숙명적인 만남이었다. 고전 문헌학을 전공한 니체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 작품과 그 세계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여기서 생의 무한한 환희와 긍정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 비극은 말 그대로 강인한 족속만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예술로서, 그 정수리에 아이스킬로스가 바로 바그너였다. 바그너 또한 열렬한 쇼펜하우어 추종자였다. 공통의 대부를 갖고 있었던 셈이다. 바그너는 니체의 새로운 우상이 되었다. 니체는 바그너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 바그너는 바그너대로 니체의 재능을 높이 평가함으로써 화답했다. 청년 니체에게 바그너는 숭배의 대상이었다. 반면 바그너는 니체의 능력을 알아차렸고, 그것을 자신의 어떤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그너에게 헌정된 니체의 첫 번째 저작 『비극의 탄생』은 이 시기에 쓴 것이다. 그것은 바그너와의 대화에서 출발한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저작이기도 했다. 이 책과 함께 보낸 편지에 니체는 “이 책의 모든 내용에서 당신이 제게 주신 모든 것에 대해 오로지 감사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라고 썼다. 바그너는 기뻐했다. 1872년 니체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확하게 말한다면 당신은 내 아내를 제외하고는 내 삶이 내게 허락한 유일한 소득입니다”라고 쓴다.
그러나 이들 사이의 관계도 순탄치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관계는 애증 관계로 바뀌었고 걷잡을 수 없는 파행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러다가 10년을 가지 못하고 1876년 이후 서로 앙숙이 되면서 결국 파국을 맞고 말았다. 열광이 컸던 만큼 환멸도 컸다. 그러면 왜 이들은 서로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는가? 니체는 그가 말년에 낸 『바그너의 경우』에서 그 전말을 자세하게 밝혔다. 바그너가 퇴화의 화신으로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즉 작품 「파르지필」에서 볼 수 있듯이 새로운 아이스킬로스, 바그너가 찬연했던 고대 그리스 문화에 등을 돌리고 그리스도교 신에 귀의하면서 새삼 신의 어린양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니체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배신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바그너는 프랑스 사람들과 유대인을 증오했다. 그에게는 독일 밖에 없었다. 프랑스 등 라틴 문화를 높게 평가하는 한편 독일 문화의 추진성을 꼬집고 반유대주의를 경멸하고 있던 니체는 이를 유치한 민족주의로 받아들였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바그너는 바그너대로 니체를 용서할 수 없었다. 니체도 변한 것이다. 그는 반계몽철학자 쇼펜하우어에게서 벗어나 계몽철학자 볼테르에게 기울어 있었고, 세계 시민주의적 안목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쇼펜하우어의 충직한 사도이자 국수주의자 바그너가 발끈했다. 지극히 사적인 알력까지 끼어들었다. 전기 작가들에 의하면, 니체의 주치의가 환자에 대한 비밀을 엄수해야 한다는 본연의 의무를 버리고 니체로서의 수치스런 성적인 문제를 바그너에게 귀띔했고, 바그너가 나서서 니체에게 나름대로 충고를 했던 것이 그에게 심한 모멸감을 주었다는 것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