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살로메 : 1893년 초판본 오리지널 디자인
오스카 와일드 저 / 오브리 비어즐리 그림 / 소와다리 / 2018.4.19
- 오스카 와일드가 창조한 가장 퇴폐적인 이야기
『살로메』는 유대의 왕 헤롯이 아내 헤로디아의 농간으로 세례자 요한을 참수한 사건 (마가복음 6장 17절~28절)을 오스카 와일드가 극화한 것으로, 프랑스어로 된 1막 희곡이다. 성경에 따르면 헤롯 왕이 동생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결혼하자 세례자 요한은 이를 유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라 비난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헤로디아는 요한을 잡아 가두고 죽이려 했지만 신의 선지자로 추앙받는 요한을 두려워한 헤롯의 반대로 죽이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헤롯의 생일이 되어 연회가 벌어졌을 때 헤로디아가 어린 딸 살로메를 불러 귀빈들 앞에서 춤을 추게 하여 그들을 기쁘게 하였고, 헤롯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상으로 주겠다는 맹세를 했다. 헤로디아의 지시를 받은 살로메는 요한의 목을 요구했고 여러 사람 앞에서 맹세를 어길 수 없었던 헤롯은 결국 요한을 참수하고 말았다.
성경 속에서 살로메는 어머니의 지시를 받고 요한의 목을 요구하는 수동적인 인물이지만,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 속에서는 요한에게 반하여 그의 입술을 차지하기 위해 스스로의 의지로 헤롯 왕을 유혹하는 팜파탈로 묘사되고 있다.
○ 저자소개 : 저 : 오스카 와일드 (Oscar Wilde)
1854년 영국 지배하의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의사이자 학자였던 윌리엄 와일드와 시인이었던 제인 와일드의 아들로 출생했다.
1874년 옥스퍼드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한 후, 존 러스킨과 월터 페이터의 영향을 받아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기치 아래 그리스 고전문학에 심취하여 ‘유미주의’ 운동의 새로운 리더가 되었다.
옥스퍼드 대학교 재학 중 이탈리아 라벤나를 여행하며 지은 시 「라벤나」로 뉴디게이트상을 수상하면서 작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어로 하는 탐미주의를 주창했다. 그는 독특한 옷차림과 말솜씨로도 유명했는데 당시 오스카 와일드의 이러한 행태를 조롱하는 희극 [인내]가 발표되어 미국에까지 전해졌다.
그는 이때부터 영국 글램 록의 원조가 되었다. 유미주의의 상징으로 새로운 멋으로써 유행시킨 공작 깃털, 해바라기 장식, 장발, 화려한 벨벳 바지 등을 착용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꿈꾼 서구의 젊은이들을 열광시켰고 자신을 모방하게 만들었다. 오스카 와일드의 유미주의는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1888년에 동화집 『행복한 왕자』를 출판하여 동화 형식의 낭만적 알레고리를 다루는 재능을 보여주었다.
1891년에는 장편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발표하면서 영국 최고 작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동성애적이고 퇴폐적인 내용으로 도덕적이지 않다는 평단의 악평을 받고 수정하여 출간하게 된다. 미모의 청년 도리언이 쾌락의 나날을 보내다 악덕의 한계점에 이르러 파멸한다는 이야기였다. 비평가들은 그 부도덕성을 비난했지만 와일드는 예술의 초도덕적 성격을 강조했다.
와일드가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장르는 풍속 희극으로, 대표작 『진지함의 중요성』(1895)에서는 빅토리아 시대의 위선을 가차 없이 폭로했다.
1891년 출간한 동화집 『석류나무 집』에 실린 단편 「별아이」가 있다.
그리고 시인이었던 알프레드 더글라스와 애정 어린 만남을 지속하다가 더글라스의 부친인 퀸즈베리 후작의 소송으로 작품의 도덕성까지 문제시되고 동성애자라는 혐의로 기소되어 2년간 중노동형을 선고 받았다.
1895년 동성애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2년 동안 레딩 감옥에 수감되고 국적을 박탈당하면서 작가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가 죽은 지 98년이 지난 1998년에야 영국 국적이 회복되고,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 ‘오스카 와일드와의 대화’라는 제명의 동상이 세워졌다.
– 그림: 오브리 비어즐리
1872년 영국 태생의 삽화가이다.
일본 목판화의 영향을 받아 가는 선과 흑백의 대비가 강렬한 삽화 영역을 확립했으며 장식적 요소가 풍부한 아르누보 양식의 삽화와 포스터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98년 폐결핵으로 별세했다.
– 역자: 이한이
출판기획자 및 번역가이다.
국외의 교양 도서들을 국내에 번역 소개하는 한편, 대중이 보다 쉽고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는 책들을 기획, 집필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아주 작은 습관의 힘』, 『울트라러닝, , 세계 0.1%가 지식을 얻는 비밀』, 『부자의 언어』, 『NEW』, 『디지털 시대 위기의 아이들』, 『몰입, 생각의 재발견』, 『내가 처음 뇌를 열었을 때』 등이 있고, 쓴 책으로는 『문학사를 움직인 100인』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헤롯
술을 따르라! 이리 오너라, 살로메야. 나와 포도주를 마시자꾸나. 향긋한 포도주가 예 있노라. 카이사르께서 친히 하사하신 포도주니라. 작고 붉은 네 입술을 살짝 담그렴, 나머지는 내가 비우리라.
살로메
소녀 목마르지 않사옵니다, 폐하.
헤롯
과일을 내오라! 이리 오너라, 살로메야. 나와 과일을 먹자꾸나. 과일에 난 네 작은 잇자국을 정말로 보고 싶구나. 앙증맞은 네 이빨로 한입 깨물렴, 나머지는 내가 먹겠노라.
살로메
소녀 배고프지 않사옵니다, 폐하. — 본문 중에서
○ 독자의 평
오브리 비어즐리(Aubrey Vincent Beardsley, 1872~1898)는 19세기 말 영국에서 활동한 일러스트레이터다. 가느다랗고 장식적인 선 표현, 검은색과 흰색의 극적인 대비, 과감한 패턴 표현, 노골적인 성적 묘사로 활동 당시에도 수많은 반향과 잡음을 함께 일으켰던 비어즐리는 안타깝게도 25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지만, 여전히 수많은 팬을 거느린 작가다. 단명한 그가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펼친 시기는 채 10년이 되지 않았지만, 그가 그려낸 삽화들은 아직도 어둡고 불가사의한 정서 속으로 보는 이들을 이끈다. 이제는 낡은 인쇄물로 남은 이 그림들은 세월이 더해갈수록 오히려 생생하게 빛난다. 특히 그의 그림 속 여성들은 아름답지만 괴기스럽거나 사악한 면모를 드러내기도 하는 독특한 매력을 가졌다.
비어즐리의 활동 시기는 빅토리아 시대 말기로, 화려하게 타오른 산업 혁명의 빛이 아직은 꺼지지 않았으나 세기말의 혼란이 가득한 영국이었다. 여왕의 건재로 엄격하고 보수적인 분위기가 여전히 지배적이었지만, 사회는 한번 넘쳐 흐르기 시작한 제방처럼 빠르고 격렬한 변화의 흐름을 멈추지 않았다. 상품들은 계속해서 시장으로 쏟아졌으며, 계급 간 격차는 극에 달하고 제국주의의 영광에는 조용히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신문 만평란에는 여왕과 귀족 계급의 위선을 조롱하는 풍자가 넘쳐났다. 이들 풍자 화가들이 위선을 조롱하고 폭로하기 위해서 즐겨 그리는 테마는 단연 성적 방종이었다. 엄격한 도덕주의자인 척하고 있지만, 뒤에서는 금지된 즐거움을 누리는 귀족들, 허영이 가득한 부르주아지들의 타락한 모습들 곁에는 창부로 묘사되는 여성들의 육체가 동원되었다. 사진 기술 발전의 부산물인 세속적 포르노그래피가 광범위하게 퍼졌고, 대영제국의 여왕 또한 그의 여성성으로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빈곤한 여성들은 거리로 내몰렸고 유흥가의 환락은 런던 밤거리의 가스등보다 훨씬 밝게 불타올랐다. 이 시기는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가 그 유명한 동성애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프랑스로 쫓겨난 때이기도 했다. 극단적인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과도기였다.
비어즐리는 이러한 당시의 혼란을 반영하기라도 한 듯 흑과 백, 허공과 극단적인 디테일 사이를 오가는 그림들을 그렸다. 오스카 와일드가 1893년 영국에서 출간한 책 <살로메(Salome)>의 삽화는 비어즐리의 대표 작품이다. <살로메>의 원전은 <신약성서> 마태복음 14장의 짧은 내용에서 비롯되었지만, 세례 요한의 극적인 죽음(소반에 담긴 잘린 목의 이미지)과 연회, 젊은 여성, 유혹적인 춤 같은 강렬한 이미지는 많은 미술가가 그림으로 그려낸 것이기도 했다. 오스카 와일드는 이 살로메의 이야기에 살을 붙여 한 편의 비극으로 만들어냈다. 여기서 세례 요한은 젊고 아름다운 남성으로 살로메의 구애를 거절하여 살해당하고, 살로메 또한 죽음을 맞는다.
<살로메>는 두 작가의 협업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텍스트와 그림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같은 흐름을 가지고, 그림은 텍스트만큼이나 나름의 완결성을 갖도록 제작되었다. 특히 여성 못지않게 아름다운 남성인 요한을 완전히 압도할 정도로 강렬한 모습을 가진 살로메는, 차라리 현실적인 성별이 뒤바뀌었다 싶을 정도로 성별 간의 권력 구도가 역전된 텍스트 속에서 적극적인 구애자이자 사랑의 광기에 휩싸인 악인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려진다. 흑백의 대비는 때로 선악의 대비로, 공간적 분할로, 빛과 그림자의 역할로 활용되며 화면을 장악하고, 장식적인 형태들이 과감하게 사용되었다. 당시 유럽의 자포니즘(Japonism) 유행에 따라 일본 목판화의 영향을 받았고, 또 작가가 대영 박물관에서 탐구한 그리스 도기화의 영향을 받아 길쭉하게 늘어진 평면적인 형태들과, 악마나 요정 같은 국적 불명의 이국적인 도상을 곳곳에 활용했다. 살로메의 옷과 화려한 궁정을 장식하는 공작새의 깃털 또한 극도로 패턴화되어 무늬처럼 퍼져 있다. 이 가운데 우리의 눈을 또한 사로잡는 것은 물론 살로메의 얼굴이다. 강인한 턱과 풍성하고 검은 머리, 선 굵은 외모와 사나운 표정을 가진 여성의 강렬한 모습은, 분명 유구하게 이상화되어 왔던 매혹적 유혹자로서의 재현과는 사뭇 다르게 보인다.
비어즐리가 라파엘전파(Pre-Raphaelites,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일어난,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화가인 라파엘로 이전 양식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복고주의와 과학적 눈으로 현실을 재현하려는 사실주의를 동시에 지향한 그룹이자 사조)에 깊숙이 관여했던 영국 화가 번-존스(Edward Coley Burne-Jones, 1833~1898)에게 영향을 받았음은 알려진 사실이다. 라파엘전파의 화가들은 당시 신고전주의 화풍의 로열아카데미에 반기를 들었는데, 대신 이들은 문학과 음악 등 여타 문예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고 특히 고딕 스타일과 중세의 모티프에 심취했다. 역시 라파엘전파에 관여했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는 다방면에서 활약하며 직접 출판사를 차리고 자신이 쓴 문학 작품과 사회 운동적 성격의 산문 등을 출판하기도 했다. 라파엘전파 화가들은 모리스의 책에 종종 삽화로 협업했고 번-존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1893년 출판한 책 <아서 왕의 죽음 Le Morte D’Arthur>(Thomas Malory)에 실린 비어즐리 삽화는 번-존스의 삽화처럼 중세 필사본에서 볼 수 있는 양식을 그대로 가져왔다. 비어즐리의 그림 속에 뒤섞인 많은 요소 중에서도, 실제 사물에서 차용한 듯한 평면적인 패턴의 활용과 풍부한 세부 묘사, 인물의 소묘에서 라파엘전파의 영향이 잘 드러난다.
라파엘전파 화가인 번-존스, 모리스와 로세티(Gabriel Charles Dante Rossetti, 1828~1882)의 그림에서 특히 자주 등장하는 여성 모델들은 풍만하고 골격이 두드러지거나 이국적인 정조를 풍긴다. 그것은 제인 모리스(Jane Morris, 1839~1924, 화가이자 뛰어난 수예가로 라파엘전파의 일원이자 모리스와 로세티의 실제 연인이기도 했다)나 마리아 잠바코(Maria Zambaco, 1843~1914) 등 실제 모델이 되었던 여성들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결과였다. 이들은 중세 시대의 복장이나 이국적인 차림새를 하고 그림에 등장하는데, 그 모습은 빅토리아 시대의 이상적인 미인형이었던 장미 꽃잎 같은 분홍빛 뺨, 수줍어하는 태도, 금실 같은 머리카락, 가녀린 체구 등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들 화가는 그들의 기치였던 사실주의에 따라, 중세 이야기와 신화, 성경 등의 복고적 모티프 속에 여성의 현실적 묘사를 불어넣었다. 그러나 이들이 어디까지나 이런 강렬한 여성의 이미지마저 도구적으로 사용했다는 혐의를 벗을 수는 없다. 미술사의 유구한 역사에서처럼 강력한 이미지의 현실 여성들 또한, 성녀 혹은 창녀의 이분법 속에서 조금 다른 화풍으로 소비되었던 것이다.
비어즐리가 그린 여성들의 골상이나 이국적인 이미지가 고딕적 삽화의 수동적 여성상과 라파엘전파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본다면, 그의 그림 속 씩씩하고 호전적인 도전적 여성상을 마냥 찬미하기는 어려워진다. 그래서 <살로메>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이미지를 중성적이라거나 젠더 이분법에 갇히지 않은 모습이라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여성혐오가 팽배했던 당대의 분위기 속에서 사납고 악마적으로 그려진 여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도 적절치 않아 보인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비어즐리의 그림을, 거친 눈초리의 이 세기말적 팜므파탈을 볼 때는 분명 어떤 종류의 쾌감을 느낀다. 그것은 단지 좋은, 잘 만들어진, 개성적인 이미지를 보며 얻는 느낌과도 조금 다르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비어즐리와 동시대 화가이자 그가 영향을 받은 또 다른 작가, 앙리 툴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 1864~1901)의 물랭루즈 포스터를 볼 때 느끼는 감상과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로트렉 또한 대상화된 여성들을 그렸지만, 동시대 인상주의자들이 묘사한 무희들과 그의 무희 중 누가 더 생동감 넘치며 근대 도시 문화의 들끓는 분위기를 담아냈는지에 대한 답에 이견은 없을 것이다. 비어즐리가 사생에 집중하지도, 사실주의에 경도되지도 않았음에도 로트렉만큼이나 당대 런던의 혼란을 생생하게 잡아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것도 당시로써는 가장 진보적인 매체인 인쇄물에 담았다. 도회적 세련미가 넘치는 결과물들은 여전히 사진보다도 생생하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