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상상력에게
에밀리 브론테 / 민음사 / 2020.4.22
에밀리 브론테는 <폭풍의 언덕>이라는 한 권의 걸작으로 국내에서는 소설가로만 알려져 있으나, 영미권 대학 커리큘럼에서는 중요한 시인으로 연구되고 있는 작가다. 요크셔 고원의 좁은 집을 떠나지 않고 독학했지만, 오히려 자연의 경이로움을 빌려 무거운 주제들을 노래했다. 특히 죽음의 경험에서 놀라운 생명력을 불러냄으로써, 우리에게 시적 상상력의 힘을 보여 준다.
에밀리 브론테의 시는 외로운 일상에서 자연으로 뻗어 나가지만, 결국 초월적인 인격의 우주적 광대함으로 확장해 나간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인정하고 끌어안기 위함이다. 시인에게 고독은 가장 현실적인 것이고, 이러한 현실 인식에서 시작할 때만 시는 과장이나 공상으로 치닫지 않는 ‘무한성’에 대한 감각을 표현해 낼 수 있다.
○ 목차
별 Stars
철학자 The Philosopher
회상 Remembrance
죽음의 장면 Death-Scene
노래 Song
희망 Hope
상상력에게 To Imagination
그녀는 어찌나 빛나는지 How Clear She Shines
죽음 Death
누군가에게 Stanzas to?
시 Stanzas
금욕주의자 어르신 The Old Stoic
차갑고 투명하고 파란 아침 하늘 Cold Clear and Blue the Morning Heaven
말해 봐 말해 봐 Tell Me Tell Me
이른 아침 개똥지빠귀 Redbreast Early in the Morning
해는 지고 The Sun Has Set
오래 돌보지 않아 Long Neglect Has Worn Away
휴식의 땅은 멀리 있구나 Lines
잠은 내게 기쁨을 주지 않아 Sleep Brings No Joy to Me
인생에서 떨어지고 떼어져서 Weaned from Life and Torn Away
폭풍우 소리가 How Loud the Storm
어둠이 얼굴마다 Darkness Was Overtraced on Every Face
들판의 하프와 선율 같은 꿈 Harp of Wild and Dream Like Strain
다시는 반짝이지 않을 거야 It Will Not Shine Again
저녁 해는 The Evening Sun
그대 어디 있었는가? Where Were Ye All?
오 나와 함께 가요 Oh Come with Me
오 꿈이여 Oh Dream
어찌나 고요하고, 어찌나 행복한지! How Still, How Happy!
나는 유일한 존재 I Am the Only Being
5월 꽃들은 피어나고 May Flowers are Opening
나는 모르겠어 I Know Not How It Falls on Me
오라 아이여 이곳으로 Come Hither Child
언덕 위 안개는 부드러이 Mild the Mist upon the Hill
밤이었네 It Was Night
바람이 한숨 쉬는 소리를 듣는다 The Wind I Hear
와서 나와 함께 걸으라 Come, Walk with Me
너무 늦었어 It Is Too Late
슬픔에는 슬픔으로 If Grief for Grief
달빛 여름 달빛 Moonlight Summer Moonlight
내 마음에 거짓이 있었다면 Had There Been Falsehood in My Breast
당신이 쉬는 곳 Yes Holy be Thy Resting Place
땅 속에 In the Earth
성의 숲에서 At Castle Wood
수많은 행복의 소리 A Thousnad Sounds Happiness
내 영혼은 비겁하지 않다 No Coward Soul is Mine
하루 종일 애썼네 All Day I’ve Toiled
겨울 홍수 What Winter Floods
집 안에서는 모두가 말없이 고요하다 All Hushed and Still Within the House
그녀는 눈물을 닦고 그들은 미소지었네 She Dried Her Tears and They Did Smile
사랑은 야생 찔레꽃과 같고 Love is Like the Wild Rose Briar
작가 연보
작품에 대하여: 에밀리 브론테(1818-1848)(허현숙)
추천의 글: 바람의 시학(이근화)
○ 저자소개 : 에밀리 브론테 (Emily Jane Brontë, 1818 ~ 1848)
에밀리 제인 브론테 (Emily Jane Brontë, 1818년 7월 30일 요크셔 손턴 ~ 1848년 12월 19일 요크셔 하워스)는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1818년 영국 요크셔주 손턴에서 목사인 패트릭 브론테와 마리아 브랜웰 사이에서 여섯 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중 셋째 딸이 『제인 에어』로 영국 문학사에 길이 남은 작품을 쓴 샬럿 브론테다. 아버지는 목사였지만 문학에 조예가 깊었고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남매들은 10대 초반부터 산문과 시로 습작을 한다.
목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하워스 교구에서 자라났는데, 세 살 때 어머니가 사망하고 청소년기에 세 명의 언니들도 병사했다. 월터 스콧, 바이런, 셸리 등의 작품을 좋아했고, 이야기를 짓고 일기 쓰기를 즐겼다. 에밀리는 1847년 엘리스 벨이라는 남성의 가명으로 『폭풍의 언덕』을 출간한다. 목사의 딸로서 교사 생활을 잠깐 한 것이 전부인 평범해 보이는 그녀가 모든 사람에게 강렬한 충격을 주는 작품을 내놓은 것이다.
1846년 샬럿이 에밀리의 시를 발견하고는 출판사에 시집 출판을 문의하여 세 자매의 가명을 제목으로 한 공동 시집 『커러, 엘리스, 액튼 벨의 시 작품들』을 냈다. 1847년 에밀리의 『폭풍의 언덕』과 앤의 『아그네스 그레이』가, 그리고 샬럿의 『제인 에어』가 출간되었다. 언니 샬럿이 쓴 『제인 에어』가 출간 즉시 큰 인기를 얻으며 성공을 거둔 것과 달리 『폭풍의 언덕』은 출간 당시 작품 내용이 지나치게 야만적이고 잔인하며 비윤리적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에밀리는 마치 자신이 직접 그 폭풍을 맞은 듯, 작품을 출간한 이듬해인 1848년, 폐결핵에 걸려 30세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에밀리는 『폭풍의 언덕』이라는 한 권의 대작으로 국내 소설가로만 알려져 있으나, 영미권 대학의 영문학과에서는 중요한 시인으로서 인정받고 있다. 에밀리는 어릴 때부터 가족의 잇따른 죽음을 경험해야 했지만 상상력을 통해 “죽음에서 아름다운 생명을 불렀”으며, 피아노와 외국어를 독학하면서 좁은 집에 머물렀지만 “성스러운 목소리로, 현실의 세상에 대해 속삭”였다.
– 역자 : 허현숙
건국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영문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영국 노팅엄대학교와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연구했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부터 셰이머스 히니까지 아일랜드 현대 시인들 및 여성 시인들에 관한 논문들을 발표해 왔다. 한국예이츠학회의 회장을 지냈으며, 시집으로 『오래된 책』을 내기도 했고 월트 휘트먼의 『풀잎』, 셰이머스 히니의 『베오울프』, 『예이츠 시선』 등을 번역했다.
○ 출판사 서평
19세기 영국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 같은 시에서
20세기 미국 에이드리언 리치의 지성주의까지
역동적인 여성 시문학사의 계보를 읽는다!
– 시문학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온 여성 시인들의 계보!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에밀리 브론테의 『상상력에게』와 에이드리언 리치의 『공통 언어를 향한 꿈』이 출간되었다. 브론테와 리치는 각각 19세기 영국과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시인들 가운데 한 명이다. 시대와 문화적 환경은 상반되지만, 이들은 모두 시 쓰기를 통해 삶의 의미를 최대한 가치 있게 가꿔 나간 영웅들이다.
브론테는 『폭풍의 언덕』이라는 한 권의 걸작으로 국내에서는 소설가로만 알려져 있으나, 영미권 대학 커리큘럼에서는 중요한 시인으로 연구되고 있는 작가다. 요크셔 고원의 좁은 집을 떠나지 않고 독학했지만, 오히려 자연의 경이로움을 빌려 무거운 주제들을 노래했다. 특히 죽음의 경험에서 놀라운 생명력을 불러냄으로써, 우리에게 시적 상상력의 힘을 보여 주는 작가다.
에이드리언 리치는 20세기 미국 시문학사에서 앤 섹스턴 등과 더불어 여성의 이야기를 대범하게 그린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반전운동과 여성운동 활동가로서, 특히 정치와 예술이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신념 아래 끊임없이 문학적 노력을 거듭한 작가이며 그러한 공로로 ‘미국 시인 아카데미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처럼 삶의 조건은 매우 대조적이지만, 두 시인 모두 각자에게 주어진 현실적 한계를 최대한 문학의 힘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그들 노력의 결실은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도 매우 큰 희망이 될 것이다.
세계시인선은 페르난도 페소아, 찰스 부코스키처럼 시인으로서는 낯선 작가들에게 시인으로서의 문학적 위상을 찾아주는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지속적으로 여성 시인들의 문학적 자리매김을 위해 노력해 오고 있다. 최초의 여성 시인으로 언급되는 사포의 시를 『고대 그리스 서정시』에 희랍어 원전 번역으로 담았고, 전기영화 「조용한 열정」의 주인공이자 19세기 미국 대표 시인 가운데 한 명인 에밀리 디킨슨의 시선집 『고독은 잴 수 없는 것』이 출간되어 있다. 추후로는 실비아 플라스와 더불어 미국 ‘고백시파’로 평가되는 앤 섹스턴, 캐나다 대표 시인이기도 한 마거릿 애트우드 등의 시집이 출간될 예정이다.
– ‘무한성’에 대한 독창적인 감각을 지닌 시인
“에밀리는 자신의 영혼을 지켰다. 세상 앞에 당당했다. 글 쓰는 여자는 용기를 잃지 않는다.” ―장영은(문학연구자)
에밀리 브론테는 19세기 당시 쟁쟁한 문학 서클과 어떤 조우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브론테의 시적 주제는 광대하다. 같은 19세기 바다 건너 미국에서 에밀리 디킨슨이 좁은 집안에서 죽음을 뛰어넘는 영원성에 대해 천 편이 넘는 시를 남긴 것처럼, 브론테도 좁은 마을을 좀처럼 벗어나지 않았지만 자연에 대한 경의를 무한성에 대한 감각으로 확장하는 시적 재능이 매우 뛰어나다. 시인에게 “영광스럽게 눈부신 강력한 바다는/ 무한을 향해 뻗어 있”(「말해 봐 말해 봐」)고, 시인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견딜 용기를 지닌,/ 구속받지 않는 영혼”(「금욕주의자 어르신」)이며,
그러나 생각들은 또한 사라졌네.
현명치도 않고, 성스럽지도 않으며, 진실하지도 않으니.
사슴의 다리가 두려워 빨리 지난다고,
내가 겁 많은 사슴을 멸시하는가?
아니면, 늑대의 모습이 앙상하고 더럽기 때문에
그 끔찍한 울부짖는 소리를 경멸할 것인가?
아니, 아기 토끼가 용감하게 죽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울음소리를 기쁘게 듣겠는가?
아니다! 그의 기억 너머
연민의 마음이 언제나처럼 다정하도록 하라.
말하라, ‘대지여, 저 가슴 위에 가벼이 몸을 눕히라
그리고 온화한 하늘이여, 저 영혼에 휴식을 허용하라!’ ―에밀리 브론테, 「죽음」, 『상상력에게』에서
에밀리 브론테의 시는 외로운 일상에서 자연으로 뻗어 나가지만, 결국 초월적인 인격의 우주적 광대함으로 확장해 나간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인정하고 끌어안기 위함이다. 시인에게 고독은 가장 현실적인 것이고, 이러한 현실 인식에서 시작할 때만 시는 과장이나 공상으로 치닫지 않는 ‘무한성’에 대한 감각을 표현해 낼 수 있다.
세상 폭풍우에 시달리는 지구 안에서 떨지도 않는다
나는 천국의 영광이 빛나는 것을 본다
그래서 믿음은 두려움으로부터 나를 지키며 똑같이 반짝인다
오 내 가슴속 하나님
전지전능하시며 언제나 존재하시는 신성이시여
생명의 주님, 내 안에서 쉬시며
내가 생명을 살아낼 때, 내 안에 힘을 지니시도다
헛되도다,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천 가지의 신조들, 말할 수 없을 만큼 헛되도다,
시든 잡초처럼 값어치도 없고
끝없는 심연 속 정말 하릴없는 거품
내 안의 의심을 깨우려고
네 영원에 그처럼 얼른 붙들려
불멸의 단단한 바위 위에
그처럼 확실하게 닻을 내리니
드넓게 껴안는 사랑으로
네 영혼은 영원의 세월에 생기를 주고
위에 스며들어 사색하며,
변화하고 유지하며, 녹아들어, 창조하고 길들인다
비록 대지와 달이 사라지고
태양과 우주가 그만 존재하며
너 홀로 남겨져도
모든 존재는 네 안에 존재하리
죽음의 여지는 없다
그의 힘이 헛되게 해 버릴 수 있을 원자는 없다
네가 존재이고 숨결이며
너의 현재는 결코 파괴될 수 없으므로 ―에밀리 브론테, 「내 영혼은 비겁하지 않다」, 『상상력에게』에서
– 죽음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경이로운 생명력으로 승화시키는 상상력
“무엇인가를 기억하고 노래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상상을
현실 세계로 잇닿게 하는 힘을 내포하는 것이었다. (……)
난폭한 현실 속에서 다정한 희망으로 존재하는 ‘상상력’은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유지하게 만들어주었던 것이리라.” ―이근화(시인)
“삶은 텅 빈 잠깐의 노고./ 죽음은 전체의 폭군”(「그녀는 어찌나 빛나는지」)에서처럼 죽음, 고독 같은 아프고 우울한 시간들이 지배적인 정서적 바탕이지만, 에밀리 브론테의 힘은 시적 자아의 시각을 넓게 확장하여 이 고통의 시간들을 힘겹게 이겨냈다는 데 있다.
‘자연’이 한 권의 책이라면 그 무자비한 텍스트에서 관대한 사랑을 발견하는 것은 인간 각자의 몫일 것이다. (…) 그녀에게 시란, 홀로 “외로운 방에서 수천 개의 무섭고 어두운 것들을 그려 보”던 중 귓가에 흘러들어온 음악소리(「오라 아이여 이곳으로」)처럼 죽음조차도 파괴할 수 없는 것으로서 인간 안에 존재하는 본원적 숨결에서 터져 나오는 노래이다. “드넓게 껴안는 사랑으로/ 네 영혼은 영원의 세월에 생기를 주고/ 위에 스며들어 사색하며,/ 변화하고 유지하며, 녹아들어, 창조하고 길들인다”(「내 영혼은 비겁하지 않다」)에서, ‘드넓게 껴안는’ 행위가 에밀리 브론테에게 사랑이었다면, 이 사랑은 소극적 정념이 아니라 사색과 창조를 통해 자신을 ‘창조하고 길들이는’ 적극적 행위이다. 200여 년 전에 한 여성이 고독하게 걸어간 이 길 위의 언어와 그녀의 용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멈추지 않는 바람처럼 강력하고도 온화한 힘을 에밀리 브론테의 시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근화(시인), 「바람의 시학」, 『상상력에게』에서
에밀리 브론테가 희망과 생성을 노래할 수 있는 힘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에 대한 간접적인 경험들과 고독에 대한 깊은 숙고에서 나온다. 그렇기에 죽음에 대한 은유들로 시작하여 기쁨을 향해 뻗는 시적 감수성은 아이러니하게도 더 강력한 생명력을 품게 된다.
죽음! 기쁨이라고 분명 믿고
다 고백하고 있을 때 내리쳤던—
다시 내리치라, 영원의 갓 내린 뿌리에서 갈라지는
시간의 시든 가지를!
(……)
슬픔이 지나며, 황금빛 꽃송이를 꺾어 버렸네.
죄는 자만심으로 잎사귀를 떨구었네.
그러나, 그 부모의 친절한 가슴 안에서,
회복하는 생명의 물결은 영원히 흘렀네.
나는 떠나간 기쁨에 서러워하지 않았네
텅 빈 둥지와 침묵의 노래에도.
희망이 그런 것, 슬픔에서 나를 웃어넘기는 것.
‘겨울은 그리 오래 머물지 않을 거야!’라고 속삭이면서. ―에밀리 브론테, 「죽음」, 『상상력에게』에서
에밀리 브론테는 “철학자여, 생각은 충분하오!”(「철학자」)라고 경고하면서, 비록 우리가 좁은 골방에 묶여 있을지라도 ‘상상력’을 통해 무한히 뻗어 나갈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들은 생각했네, 슬픔의 물결이
앞날에 거침없이 흐를 것이라고.
그러나 지금 그들의 아픔은 어디에 있으며
그들의 눈물은 다 어디에 있는가?
자 그들로 하여금 명예의 숨결을 위해 싸우도록 하거나,
기쁨의 그림자를 추구토록 하자. ―에밀리 브론테, 「노래」, 『상상력에게』에서
허현숙 영문학자는 “상상력은 ‘죽음에서 아름다운 생명을 불러, 성스러운 목소리로, 현실의 세상에 대해 속삭이는’ 존재다. 에밀리 브론테가 시를 쓰는 것은, 바로 이 상상력에 기대어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다. 그녀의 시들은 어두운 현실을 버텨내려는 의지의 발현이다.”라고 설명한다.
긴 하루의 근심과, 아픔에서 아픔으로
세상 변하는 것에 지쳤을 때,
길을 잃어 절망에 빠지려 할 때,
그대의 다정한 음성이 나를 다시 부른다.
오, 나의 진실한 친구여,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그대가 그런 어조로 말할 수 있는 한!
(……)
물론 이성은 자연의 슬픈 현실에
종종 불평하기도 하겠지.
그리고 아픈 가슴을 향해 말하기도 하겠지
소중한 꿈들은 늘 분명 헛되어져 버린다고.
그리고 진리는 이제 막 피어난 환상의 꽃들을
무례하게도 짓밟아 버릴 수도 있어.
그러나, 그대는 늘 그곳에 있어,
서성이는 환상을 되가져 오고,
엉망이 되어 버린 봄 너머 새로운 영광을 숨쉬며,
죽음에서 아름다운 생명을 불러,
성스러운 목소리로, 그대의 세상처럼 빛나는,
현실의 세상에 대해 속삭이지.
나는 그대의 유령 같은 축복을 믿지 않으나,
그러나 저녁 고요한 시간,
결코 사그라지지 않는 고마움으로
그대, 인자한 힘을 환영한다네.
인간 근심의 확실한 위무자,
희망이 절망일 때, 더 다정한 희망! ―에밀리 브론테, 「상상력에게」, 『상상력에게』에서
– 1973년 시작하여 가장 긴 생명력을 이어온 문학 시리즈!
“탄광촌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할 때 세계시인선을 읽으면서 상상력을 키웠다.” ―최승호 시인
“세계시인선을 읽으며 어른이 됐고, 시인이 됐다.” ―허연 시인
<민음사 세계시인선>은 1973년 시작하여 반세기 동안 새로운 자극으로 국내 시문학의 바탕을 마련함으로써, 한국 문단과 민음사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문학 총서가 되었다. 1970-1980년대에는 시인들뿐만 아니라 한국 독자들도 모더니즘의 세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때로는 부러움으로, 때로는 경쟁의 대상으로, 때로는 경이에 차서, 우리 독자는 낯선 번역어에도 불구하고 새로움과 언어 실험에 흠뻑 빠져들었다. 이러한 시문학 르네상스에 박차를 가한 것이 바로 세계시인선이다.
민음사는 1966년 창립 이후 한국문학의 힘과 세련된 인문학, 그리고 고전 소설의 깊이를 선보이며 종합출판사로 성장했다. 특히 민음사가 한국 문단에 기여하며 문학 출판사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바로 ‘세계시인선’과 ‘오늘의시인총서’였다. 1973년 12월 이백과 두보의 작품을 실은 『당시선』,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검은 고양이』, 로버트 프로스트의 『불과 얼음』 네 권으로 시작한 세계시인선은 박맹호 회장이 고 김현 선생에게 건넨 제안에서 비롯되었다.
“우리가 보는 외국 시인의 시집이라는 게 대부분 일본판을 중역한 것들이라서 제대로 번역이 된 건지 신뢰가 안 가네. 현이(김현)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이 대부분 프랑스나 독일에 다녀온 이들 아닌가. 원본을 함께 실어 놓고 한글 번역을 옆에 나란히 배치하면 신뢰가 높아지지 않을까. 제대로 번역한 시집을 내 볼 생각이 없는가?”
대부분 번역이 일본어 중역이던 시절, 원문과 함께 제대로 된 원전 번역을 시작함으로써 세계시인선은 우리나라 번역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데 기여하게 되었다. 당시 독자와 언론에서는 이런 찬사가 이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요, 또 책임 있는 출판사의 책임 있는 일이라 이제는 안심하고 세계시인선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세계시인선은 문청들이 “상상력의 벽에 막힐 때마다 세계적 수준의 현대성”을 맛볼 수 있게 해 준 영혼의 양식이었다. 특히 지금 한국의 중견 시인들에게 세계시인선 탐독은 예술가로서 성장하는 밑바탕이었다. 문화는 외부의 접촉을 독창적으로 수용할 때 더욱 발전한다. 그렇게 우리 독자들은 우리시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시성들과 조우했고, 그 속에서 건강하고 독창적인 우리 시인들이 자라났다.
하지만 한국 독서 시장이 그렇게 시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시문학 전통이 깊은 한국인의 DNA에 잠재된 자신감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토대에서 자라난 시문학은 또 한 번의 르네상스를 맞이했다. 국내 출판 역사에서 시집이 몇 권씩 한꺼번에 종합베스트셀러 랭킹에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이례적인 현상이다.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는 세상을 향해 보다 더 인상적인 메시지를 던져야만 하는 현대인에게 생략과 압축의 미로 강렬한 이미지를 발산하면서도 감동과 깊이까지 숨어 있는 시는 점점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 씨앗을 심어 왔던 세계시인선이 지금까지의 독자 호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리뉴얼을 시작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