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서양미술사
에른스트 H. 곰브리치 / 예경 / 2003.7.10
-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 보는 것과 아는 것 사이의 징검다리 / 서양미술의 윤곽을 잡아주는 입문서이자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최고의 인문학 서적 / 선사시대부터 현대 미술까지, 방대한 서양미술사를 700페이지, 컬러 도판 413개로 완성
세계에서 가장 잘 팔리는 미술서, 19개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적으로 800만부 이상 판매된 책, 선물하기 좋은 책, 선물 받은 사람들이 실제로 읽는 책, 당신의 삶을 바꿀 책,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최고의 인문학 서적…. 책의 긴 역사만큼이나 많은 이들이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읽고 다양한 찬사를 쏟아냈다. 그 모든 말들이 이 책을 관통하는 결정적인 말이지만, 그중에서도 하나만 고르라면 ‘서양미술사 개론의 필독서’라는 말을 고를 것이다. 진리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 진리를 표현하는 말은 보편적이고 평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서양미술을 알기 위해 반드시 거치는 책이다. 미술이라는 분야에 처음 입문하여 약간의 이론적 훈련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최적이기 때문이다. 선사시대 동굴벽화부터 실험적인 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모든 주제를 다루고 있고, 미술사를 통틀어 위대하고 뛰어난 작품들을 각 페이지마다 시대와 양식, 작품명, 작가명과 함께 알기 쉽게 정리하여, 서양미술의 질서 체계를 파악하도록 돕는다. 그 방대한 역사를 한권에 담아 오랫동안 읽히는 것, 오로지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만이 가능한 일이다.
‘미술 (Art)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서양미술사》 서문의 첫 문장이다. 책을 펴면 도판이 눈에 먼저 들어오지만, 글을 읽다 보면 사람이 느껴진다. 미술가가 왜 그렸는지, 그리기 위해 어떤 고민을 했는지, 그림 속 대상과 미술가의 관계 등을 읽고 생각하다 보면 다시 그림이 보인다. 평이한 말로 풀어간 사람 이야기가 결국 미술 이야기, 미술의 역사가 곧 사람의 역사가 되었다. 이 흐름을 따라 가다 보면 책을, 미술을, 예술을, 삶을 놓을 수가 없다. 앞으로의 역사에서도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가 늘 곁에 있을 것임을 믿는 이유이다.
“미술의 모든 역사는 기술적인 숙련에 관한 진보의 이야기가 아니라, 변화하는 생각과 요구에 대한 것이다.” – E. H. 곰브리치
○ 목차
서문
서론
- 미술과 미술가들에 관하여
1 신비에 싸인 기원
- 선사 및 원시 부족들: 고대 아메리카
2 영원을 위한 미술
-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크레타
3 위대한 각성
-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5세기까지: 그리스
4 아름다움의 세계
-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그리스와 그리스의 세계
5 세계의 정복자들
- 기원후 1세기부터 4세기까지: 로마, 불교, 유태교 및 기독교 미술
6 기로에 선 미술
- 5세기에서 13세기까지: 로마와 비잔티움
7 동방의 미술
- 2세기에서 13세기까지: 이슬람과 중국
8 혼돈기의 서양 미술
- 6세기부터 11세기까지: 유럽
9 전투적인 교회
- 12세기
10 교회의 승리
- 13세기
11 귀족과 시민
- 14세기
12 현실성의 정복
- 15세기 초
13 전통과 혁신 I
- 15세기 후반: 이탈리아
14 전통과 혁신 Ⅱ
- 15세기: 북유럽
15 조화의 달성
- 16세기 초: 토스카나와 로마
16 빛과 색채
- 16세기 초: 베네치아와 북부 이탈리아
17 새로운 지식의 확산
- 16세기 초: 독일과 네덜란드
18 미술의 위기
- 16세기 후반: 유럽
19 발전하는 시각 세계
- 17세기 전반기: 가톨릭 교회권의 유럽
20 자연의 거울
- 17세기: 네덜란드
21 권력과 영광의 예술 I
-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이탈리아
22 권력과 영광의 예술 Ⅱ
-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23 이성의 시대
- 18세기: 영국과 프랑스
24 전통의 단절
- 18세기 말 19세기 초: 영국, 미국 및 프랑스
25 끝없는 변혁
- 19세기
26 새로운 규범을 찾아서
- 19세기 후반
27 실험적 미술
- 20세기 전반기
28 끝이 없는 이야기
- 모더니즘의 승리
- 또 다른 추세 변화
- 변모하는 과거
참고문헌에 대하여
연표
지도
소장처에 따른 도판 목록
색인
○ 저자소개 : 에른스트 H. 곰브리치 (Ernst Hans Josef Gombrich)
곰브리치는 190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1933년 미술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1935년 나치가 장악하고 있던 빈을 떠나 런던에 정착하였다.
1936년 런던대학의 바르부르크 연구소에서 연구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59년부터 1976년 퇴직하기까지 연구소장직을 역임하였다.
이 기간동안 런던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영국내의 여러 저명한 대학의 객원교수로도 활동하였다.
그의 베스트셀러 『서양미술사』는 45년 전에 초판이 출간되어 현재에는 16판까지 발행되었고 전세계의 미술학도들에게 변함없이 지식과 기쁨을 제공하고 있다.
저서로는 『Art and Illusion : A Study in the Psychology of Pictorial Representation(1960)』, 『The Sense of Oder : A Study in the Psychology of Decorative Art(1979)』 외 다수가 있다.
– 역자: 백승길
1957년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The Korea Times사 기자를 거쳐 1961년-93년까지 유네스코 한위 출판부장, 문화, 홍보부장, 기획 실장 그리고 국제 박물관 협회 (ICOM) 한위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 역자: 이종숭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홍익대 대학원에서 미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1962년 동아일보 미술평론 부문에 당선된 바 있으며 현재 미술평론가로 활동중이다. 「역사적 아방가르드와 상상력의 개념」외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 책 속으로
전문용어나 얄팍한 감상의 나열이 많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평생동안 미술책은 모두 그럴것이라고 백안시하는 악습이 되고있다…나는 이러한 함정을 피하기 위해 지나치게 평범하고 비전문적으로 보일지도 모르는 위험부담을 안고서라도 평이한 말을 사용하려고 성심껏 노력했다. … 서문에서
상상력이 대단히 풍부하고 타협을 모르는 젊은 화가인 카라바조는 늙고 가난한 노동자이며 단순한 세리였던 마태오가 갑자기 앉아서 책을 쓰게 되었을 때의 광경을 생각해내느라 고심했다. 그리하여 그는 대머리에 먼지 묻은 맨발로 커다란 책을 어색하게 거머쥐고, 익숙하지 않은 글을 쓴다는 긴장감 때문에 걱정스럽게 이마를 찌푸리고 있는 <성 마태오>를 그렸다. 그의 옆에는 방금 천상에서 내려와 마치 선생님이 어린아이에게 하듯이 노동자의 손을 공손하게 잡아 이끌고 있는 젊고 아름다운 천사를 그렸다.
카라바조가 제단 위에 걸게 되어 있는 이 그림을 성당에 납품하자 사람들은 이 작품이 성인에 대한 존경심이 결여되어 있다고 분개했다. 그 그림이 수락되지 않아 카라바조는 그림을 다시 그려야만 했다. 이번에는 그도 모험을 하지 않았다. 그는 천사와 성인이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에 관한 인습적인 관념을 엄격하게 준수했다. — p.31
원시 미술. 우리의 것과 다른 것은 그들의 기술의 수준이 아니라 그들의 착상인 것이다. 미술의 모든 역사는 기술적인 숙련에 관한 진보의 이야기가 아니라 변화하는 생각과 요구들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44쪽
번개의 힘을 상징하는 신성한 뱀의 몸뚱아리를 가지고 비의 신의 형상을 만들어 낸 것은 확실히 타당한 일이다. 만약 우리들이 이 이상한 우상을 만들어낸 정신 상태 속으로 들어가 본다면 초기의 문명에서 형상을 만든다는 것이 마술과 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들 문자의 최초의 형태에도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고대 멕시코 미술에서 이 신성한 뱀은 방울뱀의 그림일 뿐만 아니라 번개를 나타내는 기호로, 뇌우를 기념하거나 불러오는 기호로 발전할 수도 있다. 우리가 미술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림과 문자는 매우 밀접한 혈연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53쪽
마술의 힘으로 왕의 영혼이 그 형상 안에, 그리고 그 형상을 통해서 영원히 살아가게 도와주도록 했다. 실제로 조각가를 나타내는 이집트 말 중의 하나는 ‘계속 살아 있도록 하는 자’였다. … 그들에게 가장 중요시되었던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완저함이었다. 모든 것을 가능한 한 아주 분명하게, 그리고 영원히 보존하는 것이 미술가의 과업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부터 어떤 우연한 각도에서 보이는 대로의 자연의 모습을 그리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림에 들어가야 할 모든 것이 극명하게 나타나도록 보장해 주는 엄격한 규칙에 따라서 그렸다. —58쪽
이집트 미술의 가장 위대한 점 가운데 하나는 모든 조각, 회화, 그리고 건축의 형식들이 마치 한 가지 법칙에 따라 배치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우리는 인간의 모든 창조물들이 반드시 따라야만 되는 것으로 보이는 그러한 규칙을 양식이라고 부른다. 이집트 미술을 지배하는 규칙들은 개개의 작품에 균형과 엄숙한 조화라는 효과를 주고 있다. —65쪽
헬레니즘 미술은 이와 같이 거칠고 격렬한 작품을 선호했으며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를 원했고 또 확실히 보는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 헬레니즘 시대에 와서는 미술이 오래 전부터 유지해왔던 주술적, 종교적 연관성을 거이 상실했던 것 같다. 미술가들은 그들의 기술 자체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모든 움직임, 표정, 긴장 등을 담고 있는 그러한 극적인 싸움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표현해 내느냐 하는 문제는 한 미술가의 솜씨를 시험하는 가장 적합한 과제였다. … 부자들이 미술 작품들을 수집하고, 원작품을 손에 넣을 수 없으면 그 유명한 작품을 복제하게 하고, 그들이 손에 넣을 수 있는 작품에 대해서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이며 또 이러한 분위기에서였다. 저술가들은 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미술가들의 생애를 글로 썼다…-108쪽
회화에 포함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폼페이의 벽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물화나 동물의 그림들, 심지어는 풍경화도 있다. 이것이 아마도 헬레니즘 시대의 가장 위대한 혁신이었을 것이다. 페이디아스나 프락시텔레스 시대의 그리스 미술에서는 인간이 미술가들의 주된 관심의 대상이었다. —113쪽
그리스 건축으로부터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을 따다가 그것을 자신들의 필요에 맞게 응용하는 것이 로마인들의 특징이었다. 그들이 주로 원했던 것 중의 하나는 실물을 꼭 닮은 초상이었다. 초기 종교에서 한 역할을 했다. 당시 장례 행렬에는 선조의 밀랍 초상을 들고 가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 이는 우리가 고대 이집트에서 본 바와 같이 실제 인물을 닮은 것이 영혼을 보존시켜 준다는 믿음과 연결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그리스인들처럼 이상화하지 않음…-121쪽
미술의 성격을 변화시켰다. 미술의 주된 목적이 이제는 조화나 아름다움, 또는 극적인 표현에 있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대단히 현실적인 사람들로 공상적인 것에 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 명확성과 단순성의 개념이 충실한 모방이라는 개념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 요는 이 시대의 미술가들은 헬레니즘 시대의 단순한 묘기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효과를 이룩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122쪽
311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고… 일단 교회가 국가의 최대 세력이 되자 미술과의 모든 관계는 재검토되어져야만 했다.
바실리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커다란 실물과 같은 조각상은 반대했지만 회화에 대해서는 생각을 달리했다. 6세기 말의 대교황 그레고리우스는 이 방침을 택했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 책이 해주는 역할을, 그림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다’라고 했다.
이처럼 막강한 권위를 가진 사람이 회화를 옹호하고 나섰다는 사실은 미술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133쪽
이 그림이 우리에게 다소 원시적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이 화가가 단순함을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가 명확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모든 사물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명확성을 중시했던 이집트의 관념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화가들이 이 새로운 시도에 사용한 형식들은 원시 미술의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그리스의 회화에서 한층 더 발전된 것이었다. 중세의 기독교 미술은 원시적인 방법과 세련된 방법이 기묘하게 혼합된 것이다. —134쪽
새로운 중세 양식의 출현을 보게 된다. 이집트인들은 대체로 그들이 존재한다고 ‘알았던’ 것들을 그렸고,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본’ 것을 그린 반면, 중세의 미술가들은 그들이 ‘느낀’ 것을 그림 속에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던 것이다. —164쪽
1066년이라는 연대. 영국에 상륙한 노르만인들이 노르망디 및 그 이외의 지방에서 그들 세대 중에 형태를 갖추었던 발전된 건축 양식을 들여왔다. 수도원과 교회당을 건립해서 그 힘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노르만 양식으로, 유럽 대륙에서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 양식은 노르만 침략 이후 백 년 이상이나 번창하였다. … 암흑시대라고는 해도 최초의 교회로 사용된 바실리카의 기억과 로마인들이 그들의 건축에 사용한 양식이 완전히 잊혀진 것은 아니었다. … 로마네스크 건축. 대체로 육중한 각주가 받쳐주는 둥근 아치들. 내부와 외부의 전체적인 인상은 중후한 힘이다. 장식도 거의 없고 창문도 몇 개밖에 없었으며 중세의 성채를 연상시키는 견고하고 잇달은 벽과 탑뿐이었다. ‘전투적인 교회’라는 관념, 즉 이 지상에서 최후의 심판날 승리의 여명이 밝을 때까지 암흑의 세력과 싸우는 것이 교회의 의무라는 관념을 표현하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171쪽
우리는 12세기가 십자군의 세기라는 것을 기억한다. 자연히 12세기는 이전보다 비잔틴 미술과의 접촉이 많아져서 그 시대의 많은 미술가들은 동방 교회의 장엄하고 성스러운 성상들을 모방하고 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사실상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성기 외에는 유럽 예술이 이런 종류의 동방 미술의 이념에 접근했던 시대는 없었다.
이 시기의 회화는 사실 그림을 통해 글을 쓰는 형식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보다 단순화된 표현 방법으로의 복귀는 중세의 미술가들에게 보다 복잡한 형식의 구성을 실험하는 새로운 자유를 주었다. 이러한 방법들이 없었더라면 교회의 가르침은 결코 가시적인 형상으로 번안될 수 없었을 것이다. —180쪽
서유럽의 미술은 언제나 새로운 해결책과 새로운 이념을 찾아 한시도 쉬지 않았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12세기를 넘기지 못하였다. 궁륭 천장을 만들어 새롭고 장엄한 방식으로 조각상을 배치하는 데 성공하자마자 또 다른 이념이 노르만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구식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는 프랑스 북부에서 시작되었다. 바로 고딕 양식의 원리였다. 육중한 도롤 벽을 쌓을 필요가 없어지고 그 대신 큰 창문을 낼 수 있었다. 첨형 아치. 공중 부벽. —185쪽
육중하고 엄격한 과거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들은 ‘전투적인 교회’라는 인상을 주었을 테지만… 새로운 고딕 성당들은 육중하고 세속적이고 단조로운 것은 모두 다 제거되었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돌더미의 무게를 잊게 되며 건물 전체가 신기루처럼 눈 앞에 떠오르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 그들은 다시 한 번 자연을 모사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형상을 실감나게 보이게 하기 위해 자연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 그리스 미술과 고딕 미술사이에는 대단히 큰 차이가 있었다.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미술가들은 아름다운 육체의 이미지를 어떻게 형상화하느냐에 관심을 기울인 반면 고딕 미술가들에게는 이 모든 방법과 기교가 하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으며 그 목적은 성경의 이야기를 한층 더 감동적으로, 신빙성 있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188쪽
고딕 조각의 실물과 같은 조각상들을 회화에 대입할 수가 있었다. 이처럼 천재적인 이탈리아 미술은 피렌체의 화가 조토 디 본도네. 조토는 평평한 평면에서 깊이감을 느끼게 하는 기술을 재발견한 것이다. 회화의 개념 전체를 변경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림으로 기록하는 수법을 쓰지 않고 그 대신에 성경의 이야기가 바로 눈 앞에서 전개되는 것과 같은 환영을 창조해 낼 수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회화는 기록된 문자의 대용품 이상의 것이었다. 우리는 마치 무대 위에서 행해지고 있는 실제 사건을 보고 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조토의 명성은 널리 세상에 퍼져서 그의 생애에 흥미를 가졌으며, 이것 역시 상당히 새로운 현상이었다. 조토의 시대 이후 처음에는 이탈리아에서, 뒤이어 다른 나라에서도 미술사란 위대한 미술가들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 201쪽
북유럽의 반 에이크는 관찰을 통해 얻은 세부들을 점차 더해가고, 또한 가장 사소한 음영에 이르기까지 사물의 세세한 면을 그대로 모사함으로써 국제 양삭의 형식들을 변화시켰다. 반면 우첼로는 그가 사랑하는 원근법에 의해서 그림 속의 인물들이 입체감있고 사실적으로 보이게 하는 실감나는 무대를 구축하려고 노력했다. 우첼로는 엄격한 원근법적 묘사로 인한 거친 윤곽선을 부드럽게 해주는 명암과 공기의 효과를 구사하는 방법을 아직 배우자 못했다. — p.255
미술이란 과학과 전혀 다른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미술가의 수단이나 그의 기술적인 방법은 발전할 수 있으나… 어떤 한 방향으로의 새로운 발견은 다른 방향에서의 새로운 어려움을 낳는다. 중세 화가들은 정확한 소묘의 규칙은 알지 못했으나 바로 이러한 결함이 그들로 완벽한 구성을 창출하기 위해 좋아하는 방식대로 화면 전체에 인물을 배치할 수 있도록 허용했던 것이다. … 현실 세계를 거울과 같이 반영하는 그림을 그리는 새로운 관념이 채택되자마자 인물들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전처럼 용이하지 않았다. — 260쪽
15세기: 북유럽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차이점을 가장 분명하게 보이는 것은 건축이었다. 이탈리아 이외의 나라에서 고딕 양식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한 세기나 뒤의 일이었다. 15세기 내내 고딕 양식을 계속 발전시켜 갔다. 15세기에는 복잡한 트레이서리와 환상적인 장식에 대한 취향이 더욱 강해졌다.
고딕 양식의 마지막 단계.
프랑스의 플랑부아양 양식
영국의 수직 양식.
이탈리아 미술에 비해서 이상적인 조화와 아름다움을 성취하는 데 관심을 적게 가졌던 북유럽 미술은 일상 생활을 매력적으로 묘사하는 표현법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사물의 질감과 표면에 관심. 고딕 미술의 주요 개념들을 새로운 사실적인 양식으로 번안. —269쪽
15세기 중엽 목판화 기법, 동판화 기법 발명. 목판술과 동판술은 순식간에 전 유럽에 전파되었다. 판화는 유럽의 예술가들에게 서로 다른 유파들의 미술 개념을 배울 수 있게 해준 또 하나의 새로운 수단이 되었다. 마치 인쇄술의 발명이 사상의 교환을 재촉하여 종교 개혁이 일어났듯이 그림의 인쇄는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승리를 보장해 주었다. 그것은 북유럽의 중세 미술에 종지부를 찍게 만든 여러 원동력 중의 하나였다. —281쪽
16세기 초: 토스카나와 로마.
자연의 신비 탐색, 우주 법칙 밝혀 내면서, 미술가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다. 이전에는 군주가 미술가에게 호의를 베풀었다면, 이제 그 역할이 바뀌었다. 마침내 미술가가 자유인이 된 것이다. —288쪽
라파엘로는 그림이 불안정하거나 균형을 잃지 않게 하면서 화면 전체에 끊임없는 움직임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인물들을 배치하는 이러한 탁월한 솜씨, 구도를 만드는 최고 극치에 달한 그의 숙련된 솜씨.
미켈란젤로가 인체의 묘사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인정되듯이, 라파엘로는 이전 세대의 화가들이 이룩하려고 그처럼 노력했던 것, 즉 자유롭게 움직이는 인물들을 완벽하고 조화롭게 구성해 낸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경탄해 마지 않는 또 하나의 특징은 인물들의 완전한 아름다움.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떻게 도식화된 형태에서 천천히 자연과 비슷하게 되어가면서 생겨나게 되었는지 기억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과정이 반전되었다. 미술가들은 고전 시대의 조각을 보고 자신의 머릿속에 형성된 아름다움의 이념에 따라 자연을 수정시키려고 노력했다. 모델을 이상화한 것이다. 하지만 라파엘로는 생명력과 성실성을 잃지 않고도 이상화시켜 냈다. —319쪽
16세기 초: 베네치아와 북부 이탈리아.
베네치아는 동방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어서 르네상스 양식을 다른 이탈리아 도시보다 더디게 받아들였다.
빛 속에 둘러싸인 해변의 분위기가 다른 곳보다 더 민감하게 색채를 사용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 인물과 형태들을 하나의 통일된 구성으로 결합시키는 데 색채를 주된 수단으로 생각한 화가는 매우 드물었다. 베네치아는 색채를 그림 위에 덧붙이는 부가적인 장식으로 여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 중부 이탈리아의 고전기 화가들이 완전한 화면 구성과 균형잡힌 구도로써 그들의 그림 속에 새롭고 완전한 조화를 이룩했다고 한다면, 베네치아의 화가들이 색채와 빛을 그처럼 행복하게 사용하여 화면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한 조반니가 보여 준 모범을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325쪽
조르조네의 폭풍.
분명히 화면 전체에 스며 있는 비초가 공기에 의해 하나의 전체로 융합되어 있다. 풍경이 이제 단순한 배경으로만 보이지 않으며, 그 나름대로 진정한 주제가 되고 있다. …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거의 원근법의 창안과 맞먹는 새로운 영역을 향한 하나의 발돋움이었다. 이제부터 회화는 소묘에 채색을 더한 것 이상의 의미가 되었다. … 티치아노. 물감을 다루는 뛰어난 솜씨는 미켈란젤로의 소묘 솜씨에 필적했다. 그 솜씨로 하여금 전통적인 구도의 규칙을 무시하게 했으며 파괴한 듯이 보이는 통일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색채에 의지하게 만들었다. 구도의 오래된 규칙들을 과감히 뒤엎은 대담성. 이 예기치 않은 구도는 전체적인 조화를 깨트림 없이 오히려 그림을 생기 있고 활기차게 만들어 주었다. 이는 빛과 공기와 색채로 장면을 통일시켰기에 가능하였다. —329쪽
북부 이탈리아의 소읍인 파르마에서도 후대 사람들에 의해 16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가장 과감한 혁신가로 평가되었던 한 화가가 외롭게 생활하고 있었다. 일명 코레조. 코레조는 색과 빛을 사용하여 형태에 균형을 주고, 보는 사람의 시선을 일정한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발견을 티치아노보다 더 잘 활용하였다. —337쪽
16세기 초: 독일과 네덜란드
이탈리아 거장들의 위업인 과학적 원근법, 해부학, 고전 시대의 건축 형식에 관한 지식을 접한 북유럽인들은 충격을 받게 됨.
뒤러는 환상적이며 환영적인 세계를 그리는 거장이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끊기 있게, 충실하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관조하고 자연을 모사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 그뤼네발트. 그는 이탈리아 미술의 위대한 발견들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가 생각하는 미술의 이념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한도 내에서만 그것들을 활용했다. 그에게 있어서 미술은 아름다움의 숨겨진 법칙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목적, 중세의 모든 종교 미술의 목적인 그림으로 설교를 제공해주고 교회가 가르친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 그는 르네상스 이래로 발전되어 온 근대 미술의 법칙들을 거부하고 인물들의 중요성에 따라 그 크기를 변화시켰던 중세와 원시 시대의 원칙들로 의도적으로 되돌아 간 것이 분명하다. … 이 시기의 위대한 네덜란드 미술가는 새로운 양식을 따르는 미술가가 아니라 그뤼네발트처럼 남유럽에서 밀려오는 새로운 물결에 휩쓸리기를 거부한 이들 가운데 찾아볼 수 있을 —341쪽
16세기 후반: 유럽
1520년경 이탈리아 도시들의 모든 미술 애호가들은 회화가 완성의 극에 달했다는 사실에 의견의 일치를 본 것 같다. … 그 당시의 젊은 미술가들이 미켈란젤로의 ㅈ가품의 유행에 휩싸여 단순히 그의 수법만을 모방했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보는 후대의 비평가들은 이 시기를 가리켜 매너리즘이라고 불렀다. 사실 많은 미술가들은 미술이 마침내 정지해 버린 것인지, 또는 그 이전 시대의 거장들을 능가하는 것이 정말로 불가능한 것인지, 인체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그들을 능가할 수 없다 하더라도 다른 방면에서도 과연 그러할 것인지 등에 대해 의심해 보았다. … 즉 거장들의 작품은 완벽하다. 그러나 완벽한 것이 영원히 흥미로운 것은 아니다. 일단 거기에 익숙해지면 그러한 작품은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인가 놀랍고, 기발하고, 전에는 들어보지도 못한 그런 것을 추구하려고 한다. 괴상하고, 기교에 치우친 쓸데없이 복잡한 실험. 흥미있고 비범한 것을 만들려는 당대의 불안정하고 열광적인 노력들.
파르미자니노. 완벽한 조화에 관한 고전적 해결 방식만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361쪽
16세기 후반 베네치아 출신의 틴토레토. 그도 역시 티치아노가 베네치아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던, 형태와 색채에 있어서의 단순한 아름다움에 진력이 나 있었다. … 그의 그림들은 감동적이라기보다는 쾌감을 주는 경향이 더 많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는 이 성경의 이야기들을 아주 다른 방식으로 보여 주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그린 사건의 긴장감과 극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하고자 결심했음이 분명하다.
<성 마르코의 유해 발견>,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빛과 어둠, 원경과 근경 및 조화가 결여된 몸짓과 동작. 그는 엄청난 기적의 인상을 창조하기 위해 조르조네와 티치아노가 이룬 원숙한 색채의 아름다움까지 희생해야만 했다. <용과 싸우는 성 게오르기우스>에서도 음산한 빛과 불안정한 색조가 어떻게 긴장괌가 흥분감을 고무시키는지를 보여 준다. … 틴토레토와 같은 사람은 사물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고자 했으며 또 과거의 전설과 신화를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을 탐구하고자 했다. 세심한 마무리 손질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368쪽
엘 그레코. 크레타 섬 출신으로 베네치아로 왔다가 스페인으로 감. 격정적이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 성경을 새롭고 감동적인 방법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충동. 자연적인 형태와 색채를 대담하게 무시하고, 감동적이고 극적인 환상을 창조하는 데 있어서 엘 그레코가 틴토레토를 능가하게 만든 이유. —373쪽
북유럽에서는 이탈리아나 스페인의 미술가들이 겪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회화가 계속 존속할 수 있는 없느냐는 심각한 문제. 종교 개혁에 의해서 초래되었다. 많은 신교 교도들은 교회 안에 서인들의 그림과 조각상을 두는 것을 반대하고 그것을 구교의 우상 숭배로 간주했다. 신교 지역에 사는 화가들은 그들의 가장 큰 수입원, 즉 제단화를 그리는 일을 잃게 되었다.
… 독일의 한스 홀바인. 초상화. —374쪽
유럽의 신교 국가 중에서 종교 개혁이 불러일으킨 위기를 무사히 넘긴 유일한 나라는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회화가 번창했으며 미술가들은 그들이 처해 있는 곤겨에서 빠져나갈 길을 발견했다. 초상화에만 매달리지 않고 신교 교회들이 반대하지 않을 주제를 찾아 그러한 모든 유형을 전문화하였다. … 전문화는 사실 이 나라의 미술가들에게는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예술의 위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지옥과 악마의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렸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북유럽 화가들이 주제를 어떤 종목 또는 부분으로 한정해서 의도적으로 개발한 그림, 특히 일상 생활의 장면들을 묘사한 그림들을 뒤에 가서 소위 ‘풍속화’라고 부르게 되었다.
16세기 최대의 풍속화가는 브뢰헬. 농민들의 생활 장면. —380쪽
17세기 전반: 가톨릭 교회권의 유럽
르네상스를 뒤이은 양식을 보통 바로크라고 부른다. 이전의 양식들은 각각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식별하기 용이하였으나 바로크의 경우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 바로크라는 말은 터무니없다든가 기괴하다는 의미로, 그리스와 로마 인들이 채택한 방법 이외의 다른 식으로 고전 건축의 형식을 차용하거나 채택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사용하던 단어였다. … 유럽 전역에 걸친 종교 개혁에 대항해서 싸우려는 드높은 기대를 걸고 설립된 예수회 교단의 교회. —387쪽
… 매너리즘의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 회화가 그 이전 시대의 거장들의 양식보다 더 풍부한 가능성을 지닌 양식으로 발전하게 된 과정은 여러 모로 바로크 건축의 발달사와 비슷하다. 틴토레토아 엘 그레코의 작품들 속에 새로운 이념이 성장했음을 보았다. 빛과 색의 강조라든가, 단순한 균형을 무시하고 보다 복잡한 구도를 선호한다든가 하는 것이다. 17세기 회화는 미술이 매우 위험한 상투적인 방식에 빠졌으며 거기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사람들은 미술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즐겨했다. 미술가들 사이의 다양한 동향이나 운동에 관해 토론하고… 그러한 논쟁 자체는 미술의 세계에서 처음 있는 현상이었다. 16세기에는 회화가 조각보다 나은 예술이냐, 또는 구도가 색채보다 더 중요하냐 아니면 그 반대인가 하는 식의 문제로 논쟁을 벌였다(예컨대 피렌체 사람들은 구도를, 베네치아 사람들은 색채를 높이 평가했다). —390쪽
안니발레 카라치와 카라바조라는 정 반대의 수법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두 화가.
둘 다 매너리즘에 진력이 났던 것 같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대단히 달랐다. 카라치는 베네치아 파였으며, 라파엘로의 작품에 매료되었다. 그는 매너리즘 화가들이 의도적으로 거부했던 라파엘로의 단순성과 아름다움을 다시 회복시키고자 했다. … 그림 자체는 초기 르네상스 화가의 그림처럼 구도가 단순하고 조화롭다. 하지만 구세주 몸 위에 아른거리는 빛의 묘사 방식이라든가 감정에 호소하는 표현 방식은 르네상스 양식과는 아주 다른, 말하자면 바로크적이다. —390쪽
카라바조에게는 추한 것을 두려워하는 것(카라치의 방식)이 경멸할 만한 약점으로 보였다. 그가 원하는 것은 진실, 즉 그가 본 그대로의 진실이었다. 그는 고전적인 규범을 좋아하지 않았고, 또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신통치 않게 생각했다. 그는 인습을 타파하고 미술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는 쏟아지는 비난을 받은 최초의 화가들 중 한명이었으며, 또한 그의 예술관이 비평가들에게 하나의 문구로 집약되었던 최초의 화가이기도 했다. 그들은 그를 ‘자연주의자’라고 불렀다. <의심하는 토마>
카라바조의 자연주의, 다시 말하면 우리가 그것을 추하다고 생각하든 아름답다고 생각하든 간에 자연을 충실하게 모사하려는 그의 의도는 아마도 아름다움에 중점을 두는 카라치의 태도보다 더 돈독한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것 같다. —392쪽
자연의 숭고한 아름다움에 처음으로 사람들의 눈을 뜨게 만든 화가는 바로 클로드 로랭이었고… 루벤스, 안토니 반 다이크, 벨라스케스… 자연을 새로운 눈으로 보고 관찰하며 색채와 빛의 새로운 조화를 끊임없이 발견하고 그것을 누리는 것이 화가의 기본적인 과제가 되었다. —397쪽
자연을 새로운 눈으로 보고 관찰하며 색채와 빛의 새로운 조화를 끊임없이 발견하고 그것을 누리는 것이 화가의 기본적인 과제가 되었다. — p.411
17세기: 네덜란드
네덜란드의 북쪽 지방 사람들은 그들을 지배하는 스페인의 가톨릭 군주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 부유한 상업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신교를 믿었던 것이다. 이들의 태도는 경건하고 근면 절약하며 대부분 남쪽 지역의 호사스러운 허식을 싫어하는 사람들이었다. .. 17세기 네덜란드 시민들은 유럽의 가톨릭 국가들을 휩쓴 바로크 양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건축에 있어서조차도 이들은 수수하고 절제된 양식을 선호했다.
신생 네덜란드에서 최초로 출현한 거장 프란스 할스. 그의 초상화들은 화가가 주문한 사람을 어떤 특정한 순간에 ‘포착해서’ 그의 화폭에 영원히 고정시켰다는 인상을 준다. … 바로크 시대의 다른 거장들과 마찬가지로 할스도 규칙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서도 훌륭하게 균형감을 이룩해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 네덜란드 화가들은 중세나 르네상스의 대가들과 달리 먼저 그림을 그려놓고 나서 구매자를 찾아나서야 했다. … 화상에게 의뢰할 수밖에 없었다. 화가들 사이의 경쟁도 치열했다. —413쪽
베르사유가 바로크 양식인 것은 그 장식적인 세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거대한 규모 때문이다. 건축가들은 이 건물의 거대한 덩어리를 좌우 날개 부분으로 나누어 배치하고 각 익부에는 고상하고 장엄한 외관을 부여하는 데 주력했다. — p.447
어떤 시대든 그 사회는 예술과 취향에 관한 한 그 나름의 특이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물론 지금의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과거의 지식인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이런 생각들을 검토하는 것이 흥미있는 것은 우리가 바로 이런 방법으로 우리들 자신을 반성하면서 배울 수 있다는 데 있다. — p.465
있어서의 그의 지위는 안정되어 있었다. 이러한 안정감이 19세기에 이르러 무너지게 되었다. 먼저 ‘전통의 단절‘은 화가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주었다. 이제 소재가 풍경화인지 과거의 극적인 장면인지, 주제의 경우도 밀턴의 작품인지 아니면고전 문학인지, 또 방식에 있어서도 다비드 식의 고전주의인지 환상적인 낭만주의인지 하는 모든 결정이 화가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듯 화가의 선택권이 확대되면 확대될수록 화가 자신의 취향과 대중 취향 간의 간극은 점차 벌어져갔다. 보통 그림을 사려는 사람은 어떤 것을 살지 미리 염두에 두고 다른 데서 이미 보았던 것과 비슷한 것을 사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과거에는 이러한 요구가 쉽게 충족되었다. 왜냐하면 화가에 따라 그림의 수준이 천차만별이긴 했지만 동시대의 그림은 여러 가지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단일한 전통이 사라졌기 때문에 미술가와 후원자 간에 종종 마찰이 빚어졌다. 후원자의 취향은 한쪽으로 고정되어 있는 반면 미술가는 거기에 만족하지 못했다. 따라서 생활에 쪼들려 어쩔 수 없이 후원자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 그들은 ‘양보‘하고 있다고 느끼면서 자존심에 손상을 입었고 위신도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내부의 목소리만을 따라 자신의 예술관에 어긋나는 제안을 일체 거부한다면 굶어죽을 처지에 빠지게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19세기 미술가들은 관례를 따르고 대중의 요구에 부합하는 부류와 스스로 선택한 고립을 자랑스러워하는 부류로 크게 나뉘어 이 둘 사이의 골은 점점 깊어져 갔다. 게다가 이러한 상황은 산업 혁명과 장인 기술의 쇠퇴, 전통성이 결여된 새로운 중산 계급의 등장, ‘예술‘을 빙자한 값싸고 조잡한 상품 생산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어 일반 대중의 취향 수준을 하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술가와 대중 사이의 불신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상대적인 것이었다. 성공한 사업가들이 보기에 미술가들은 대수롭지 않은 작품에 대해 터무니 없는 가격을 요구하는 사기꾼에 지나지 않았고 반면에 미술가들은 거만한 ‘부르주아에게 충격을 주어‘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을 재미로 여겼다. 미술가들은 스스로를 별개의 인종으로 여기기 시작하여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벨벳이나 골덴 옷을 입었으며 챙 넓은 모자에 헐렁한 타이를 매고 다녔다. 그리고는 소위 ‘고상한‘ 관습들에 대해 경멸을 퍼부었다. 물론 이러한 상태를 건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거의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비록 미술가들의 길에 함정들이 널려 있긴 했지만 변화된 상황이 이를 메꾸어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 p.501
○ 출판사 서평
이 책은 지금까지 출간된 미술에 관한 가장 유명한 책 중의 하나로서 1950년 영국에서 초판이 간행된 이래 전세계에서 서양미술사 개론의 필독서로 자리잡고 있다.
선사시대 동굴벽화부터 오늘날의 실험적 예술에 이르기까지 모든 주제를 다룬 입문서이며, 이 책을 통하여 세계 전역에 걸친 모든 세대의 독자들은 저자가 해박한 지식과 지혜뿐만 아니라 예술 작품에 대한 깊은 사랑을 겸비한 위대한 대가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미술사를 통틀어 위대하고 뛰어난 작품들을 각 페이지들마다 시대와 양식, 작품명이나 작가들 이름에 따라 알기 쉽게 정리하고 동시에 서양미술의 지적인 질서 체계를 정립하여 보여준다.
이로써 독자들은 미술의 역사가 과거와의 연관 속에서 미래를 암시하는 각 작품들로 끊임없이 구성되고 변화하는 전통의 역사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 피라미드 시대를 이어주는 생생한 연결 고리임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은 아직 낯설지만 매혹적으로 보이는 미술이라는 분야에 처음 입문하여 약간의 이론적 훈련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쓰여졌다.
그러므로 이 책은 이제 막 미술이라는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신참자에게 세부적인 것에 휘말려 혼돈됨이 없이 서양미술의 윤곽을 볼 수 있도록 안내한다.
까다롭고 복잡한 인명과 각 시대의 양식들은 알기 쉽게 정리되어 있어 나중에 좀 더 전문적인 책을 탐독하는 데에도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곰브리치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전문 용어나 얄팍한 감상의 나열이, 많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평생동안 미술책은 모두 비슷할 것이라는 식의 편견을 심어주는 악습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함정을 피하기 위해 그는 지나치게 평범하고 비전문적으로 보일 수 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평이한 말을 사용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난해한 사상들이라 해서 무조건 피하지는 않았으며, 단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학술적인 용어의 남용을 경계하고자 했음을 밝히고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