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설교의 원형과 그 발전 : 케리그마
The Apostolic Preaching Its Developments : The Message of the New Testament
C. H. Dodd (다드), A. M. Hunter (헌터) / 한국기독교문화원 / 1992
[사도들의 설교와 그 발전]
– 초대교회의 증언(설교)
신약성서의 기자들은 설교와 교훈을 분명히 구분짓고 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 바울서신과 묵시록 등에 다 그와 같은 구별이 있는데 대체로 이것은 초대교회의 특징으로 생각할 수 있다.
교훈은 종종 기독교에 관심은 있으나 아직 확신이 없는 그런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리에 맞도록 해설해 주는 일, 곧 변증적인 성격을 띤 것이고 설교 (kerygma)는 교훈의 성격과는 달리 비기독교적인 세계에 공적으로 그리스도교를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의 실제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바울은 부활-주권-심판이라고 하는 일련의 기본적 케리그마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의 ‘케리그마’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실들을 의미심장한 종말론적 정황에서 선포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이 악한 세대’로부터 ‘새세대’에로의 변천을 표시한 것이다. 그러면 ‘게리그마’의 원형이 얼마만큼 바울적인 것이며 또 대체로 어느 정도의 것이 사도들의 증언과 같은 것으로 타당성을 가질 수 있는가?
바울의 ‘케리그마’는 그리스도교 전승의 주류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모든 예언이 성취되었고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 그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 그가 성경에 의해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지시려고 죽었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는 것, 성경에 의해 삼일만에 부활했다는 것, 하나님의 아들로서 높임을 받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고,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셨다는 것, 인류의 심판자와 만민의 구세주로 다시 오실 것이라는 것 등이다. 그러면 사도행전의 사도적 케리그마는 어떠한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베드로의 네 설교 [처음 둘 (2:14-36; 38-39)은 오순절 군중설교 / 세 번째는 앉은뱅이를 고친 후 군중에게 설교 (3:12-26) / 네 번째는 산헤드린에서의 연설 (4:8-12)]를 살피는 것이 중요한데 이 네 설교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근거를 가진 것으로서 그 용어라든가, 말의 순서에 별다른 변화가 거의 없고, 또 어느 것이나 그 내용이 더 나은 것도 없으며, 서로다 보충하며, 또 함께 초기 케리그마의 내용에 대한 함축성있는 견해를 제공하고 있다.이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모든 예언 성취의 여명기가 왔다는 것. 둘째, 여명기가 온 것은 예수의 봉사와 죽음 및 부활을 통하여 된 일이며, 셋째, 부활로 인하여 예수가 새 이스라엘의 메시야적 머리가 되어 하나님 오른편에 올리움을 받았으며, 넷째, 교회에 나타난 성령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낸 표적이며, 다섯째, 메시야 시대는 곧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된다는 것이며, 끝으로, 케리그마는 언제나 회개를 호소하고 죄의 용서와 성령과 ‘구원’의 약속을 받는 일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루살렘 교회가 설정한 ‘케리그마’의 구조는 어떤가? 이는 막 1:14-15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이름하여 “신국의 케리그마”란 것이다.
이 ‘신국의 케리그마’와 앞에서 말한 ‘바울의 케리그마’와 비교해서 보면그 차이점과 일치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먼저 차이점은 바울의 케리그마에는 있는데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케리그마에는 직접 나타나 있지 않은 세가지 점이다.
첫째, 예루살렘 케리그마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종’으로 부른다.
둘째, 예루살렘 케리그마는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이 상관성을 말하고 있다.
셋째,예루살렘 케리그마는 높임 받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있다고 말하지 아니한다.이 세가지 점외에는 다 바울의 케리그마와 같다. 이리하여 바울서신의 케리그마와 사도행전의 케리그마를 대조해보면 사도들의 케리그마의 윤곽이 뚜렷해질 것이다. 전체 케리그마에 재림 사상이 시사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강조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케리그마의 중심무게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와서 구원해 주셨다는 유일회적인 미증유의 사건가운데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 복음서의 증언(설교)
이 장에서는 복음서라고 하는 특수한 기독교의 문학형식이 산출해 낸 바 예수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이라고 하는 과거사에 대한 종말론적 평가를 내리는 장으로서 종말론과의 관련성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초대교회의 케리그마는 하나의 종말론적 정황에서 이룩된 것이었다.
종말의 완성이 예상 외로 지연되어 종말론적 과정의 연속성이 깨어지게 되었을 때 재림 사상에 대한 재조정이 요청되었는데 교회는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다고 선언함으로서 유대교의 전통적 종말론의구조를 깨뜨리고 새로운 종말론의 재건을 시도하였다.그러므로 교회가 재건한 종말론은 주로 유대교의 자료에 의존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문서가 데살로니가후서와 마가복음 13장의 “작은 묵시록”인데 여기에서 초대교회가 재건한 종말론의 성격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종말의 징조로서는 먼저 무서운 신성모독이 앞서야 한다는 구조였다.
복음서중 마태복음은 “실현된 종말론 (the “Realized eschatology”)과 ”미래파 종말론 (the Futurist eschatology”)을 영향을 받았고 이 “미래파”의 경향이 요한 계시록에서 절정에 달하자 복음의 본래적인 요소 곧 그리스도가 이룬 사업에서 하나님은 인류의 구속사업을 완성하셨으므로 신앙생활이란 지금 있는 그 곳에서 현존하신 하나님의 축복을 의식하고 산다는 이러한 요소를 차적인 위치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이것은 사실상 복음서의 내용을 부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종말론이란 복음적 사실의 절대적 가치를 주장하는 한 형태이지 결코 그것이 복음의 본질은 아닌것이다. 결국 절박한 재림 대망 사상은 사라지고 순수한 종말 사상이 발전케 되었는데 이것은 주로 에수의 활동과 죽음 그리고 부활 등의 역사적 사실이 구원에 이르는 최종적이며 절대적인 본질이라고 하고, 이 모든 사건들은 하나의 종말론적 정황에서 나타난 사실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면의 사상 발전은 바울서신과 그밖에 서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성취되었다고 본 것은 궁극적 (종말론적) 구속이었다. 바울은 히브리 및 유대역사의 여러단계를 예리하게 가치 평가하는 역사 철학을 말할 때도 (롬 9-11장)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있어서 역사는 완성됐다고 말하여 그 사건들의 상관성을 시사하고 있다. 그 다음 베드로전서인데 베드로는 예수께서 고난 받고 죽었다는 단순한 그 사실만이 아니라 그의 수난에서 타고난 고난의 성격과 그 방법이 바로 “종말론적” 완성의 일부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히브리서에서도 나타나는데 히브리서의 종말론은 플라톤적 구조의 표현으로 재해석되어 왔으며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종말론적 가치 평가에 새로운 해석을 하게 되었는데 이 해석은 바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론에서 단서가 되어 있다.
종말론적 관련성에서 예수의 생애를 더 철저히 평가하려면 공관복음서 중에서 특히 마가복음서를 예로 들면 마가복음서는 특별히 수난의 복음서라고 할 수 있다. 예수의 사업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한 것으로서 메시아는 나타났고 하나님 나라 역시 그에게 있어서 나타난 것으로서 이는 종말론적 의미를 지닌 것이다. 그 다음 마가는 수난설화를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고난과 패배를 당한 그 반면에는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성취해 논 영원한 영광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터득케 하려 하면서 본래의 케리그마가 가지고 있던 균형을 회복시켰고, 고전 15장에 있는 케리그마의 형식을 따라 그리스도가 어떻게 장사되고 또 성경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셨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와 누가에는 마가에서 강조되어 있지 아니한 케리그마의 한 요소가 강조되어 있는데, 곧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었다”는 점과 예언에 의하여 메시아가 되었다는 점이다.
마태복음에는 두 가지 중요한 두드러진 경향이 있는데, 첫째, 마가설화에 더 많은 예수의 교훈을 첨가시키고 있고 또 예수의 교훈을 아주 조직적으로 배열하고 있다. 둘째, 이러한 강조점의 변화를 “미래파 종말론”의 특정한 사상에 의해 보충하고 있다. 누가복음서의 변화는 더욱 미묘한데, 누가는 사도적 설교의 발전과정을 답습하지 않고 오히려 “역사적 예수”를 세속적인 방법으로 이해하려 하였다. 이로 볼 때 복음서 안의 모든 자료들은 다 케리그마 안에 있는 사실들을 해석한 것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바울과 요한의 증언
이 장에서는 현재사에 대한 종말론적 의미를 특별한 관심사로하여 최초의 케리그마를 고찰하고 있다. 초대교회에 나타난 성령의 교제 안에서의 사랑의 사귐의 교리는 맨 처음 바울서신에서 나타난다. 바울은 새생명은 성령의 나타나심에 의한 것이며 이 새생명이 최종적 “종말론적” 의미에서 참된 이스라엘 백성이요 교회라고 했다. 이 초자연적 메시아의 공동사회사상은 유대교의 예언과 묵시문학에서 발전된 것으로서 이사야의 남은자 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사상은 에스겔, 말라기, 다니엘에서 그 표현을 찾을 수가 있다. 종말론적 사상 배경을 강하게 가진 바울은 교회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의 모임”으로서 마지막 날에 나타난 것이라고 믿었고,또 초자연적 메시아의 공동체 사상을 시사한 모든 예언과 묵시문학 사상은 교회에 있어서 그 완성을 보았다고 생각하였다. 초기 바울의 “미래파 종말론”의 경향은 “그리스도-신비주의”로 바뀌어 졌다.아직도 오지 앟은 영광의 희망은 사상적 배경으로 남아 있지만 그러나 앞으로의 전망은 점점 더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성도들이 “지금 이곳”에서 즐기는 신의 은총의 온갖 풍부함을 생각케 되었다. 종말론의 신비주의화는 세상에서의 의무와 기회를 무시하여 인간적인 사회성과 도덕면을 암담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바울의 교회론을 보면 교회는 예수의 훌륭한 윤리적 교훈 가운데서 발전한 적극적이고도 건설적인 강력한 사회 윤리의 기반임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그러므로 바울 서신은 전체 케리그마의 사활 문제인 “실현된 종말론”의 원리를 맨 처음으로 정덩화시키고 있다. 묵시문학자들이 순 환상적 용어로만 묘사했던 초자연적 생의 질서가 이제는 실제적 체험의 사실로 묘사되고 있다.
복음서 (요한복음)는 케리그마 가운데 있는 조잡한 종말론적 요소를 깨끗이 정돈해 놓았다.영생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현재적 소유임과 동시에 영원한 소유라고 하는 것이며, 예수의 재림의 약속은 교회 생활에 성령이 오면 실현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복음서 가자는 초대교회 안에 있었던 “미래파 종말론”의 한 요소를 “실현된 종말론”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즉 영원한 삶이란 교회 안에 계신 성령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현존하심을 지금 이곳에서 실감하는데 있다고 한다. 복음서의 용어에는 그 당시의 희랍 신비주의 사상과 비슷한 것들이 있지만 요한이 말한 신인식은 크리스챤의 사귐의 한 기능을 말한 것이다. 신인식과 영생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이 즐기는 기쁨이라고 가르쳤다.요한의 사도적 증언에 대한 심각한 재진술은 증언의 원형이 가진 여러 가지 요소를 과거 현재 및 미래를 일관성 있게 묘하사는 일에 성공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던 모든 교회의 희망이 이미 교회에서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현재적 체험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며 타면으로는 이런 현재적 경험이 사건의 기술을 가능케 했고 또 그 사건들의 가장 깊은 의미 즉 성육신의 사건을 포착했다는 것이다.
사도적 증언과 발전상 가운데 나타나는 것은 신약성서에는 케리그마를 해석해 놓은 방대한 다양성이 있다는 것이고, 둘째, 그런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본래적 케레그마의 본질적 요소가 굳게 간직되고 있다는 것이다. 신약성서의 모든 다양성이 다 같이 단 하나의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데서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 종말론과 역사
전체 역사에 의미와 통일성을 주는 원리란 신의 섭리대로 세계가 도덕적 지배를 받아 왔다는 사상을 말한다. 기록된 역사가 신의 목적이 실현되어 가는 영역이기는 하나 예언자적 견지에서 볼 때 이 기록된 역사가 완전히 신의 뜻을 계시해 논 것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역사 전체가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는 길은 야웨의 날을 미리 내다보는 예언자적 통찰력 뿐이다. 예언서나 묵시문학서는 다같이 종말은 신적 사건으로 언제나 “바로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한다.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을 미리 내다보는 것 뿐이며, 예언자들의 역사관찰법은 “역사를 단축시켜서 보는 것”이다. 지금껏 그 누구도 세계의 종말을 경험한 자가 없기 때문에 역사의 종말 묘사는 환상적 형식 이외엔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시간의 질서에 있어 본 적이 없는 그런 것들을 시간으로 계산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현대와 과거 선지자들의 차이점은 옛선지자들이 세계사의 급속한 종말을 예언의 강조점으로 하기보다는 오히려 시간에 예속되지 않고 영원에 속하는 모습으로 임박한 사건을 옷 입는다고 한데 있다.
.여호와의 날의 성격 : 한마디로 주의 날은 역사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예언과 묵시문학에 표현된 주의 날의 성격 : 결론적으로 신약 기자들은 극히 심중하고도 대담하게 그리고 일관성있게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과 죽음과 부활 사실들을 유대교의 종말론적 용어와 사상에 적응시켰다는 그 점이다. 그리스도 재림의 본성은 교회의 영적 의식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성례전에서 볼 수 있다. 이는 겸손히 자신을 낮추시고 오신 주를 기억케 하며 동시에 영광 중에 오시기를 대망케 하며 그러면서도 이 양자가 성례전에서 현재화 하는 것을 실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례전에 있어서 신국이 언제나 역사 속에 들입해 오는 위기를 재조성하는 것이다. 신국은 유토피아 (Utopia)가 아니다. 복음은 “진보”사상을 말하지 앟고 “죽고 다시 사는 것”을 말한다. 역사의 패턴은 진화론에서가 아니고 “위기”에서 나타난다.최소한 역사의 목적에 타당한 신화는 과거의 신적 사건에서 그 자체를 형성하고 그 구체성을 나타낸 그리스도 사건이고, 또 그 사건의 최종문제는 시간을 단절하고 인간을 주의 재림과 최후 심판을 거친 후 영원 안에서 살게 한다는 형식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신약성서의 중심사상]
– 신약성서의 통일성
현대 신약학의 연구 경향이 “구심적”이라는 것을 알고 새로운 방향 전환을 환영하며 출발하는데 이것은 신약성서의 통일성을 찾고자 하는 것이었고 이 유니티는 “하일스 게쉬히테”라는 말로 요약했다. 이 말은 신약과 구약의 공동주제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구약성서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의 목적이 신약성서에서 그 완선을 보았다는 뜻이다. 이 말은 세가지 요소로 이룩되었는데 곧 한 구세주를 중심으로 한 구원의 멧세지, 구원 받는 백성 그리고 구원의 방편등이 그것이었다.
– 분석적 연구법의 위험섬
여기서는 분석적 연구 방법의 실패와 종합적 이해방법의 필요성을 논하였다. 그리고 요사이는 신약성서의 유니티를 더욱 더 평이하게 설명하며 또 전혀 상관성이 없어 보이는 성서의 어떤 사상도 다 통일성의 빛에 비추어 연관성을 밝힌다고 하였다.
– 비판적 종합적 연구법
저자의 비판적 입장을 규명한 후 세가지 주제에 관한 해설을 하였는데 그것은 신약성서의 케리그마 및 설교의 주체가 되는 인격을 문제삼는 기독론과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론과 신약성서의 구원론을 취급했다.
– 케리그마
여기서는 (1)신약성서를 꿰뚫고 있는 사상은 단 하나의 구원의 메시지 곧 케리그마라고 했다.이 메시지를 사도행전의 처음 설교들 가운데서 또 바울서신 가운데 있는 바울 이전의 어떤 성경 구절에서 찾아 보았고 복음서에서는 다소 케리그마를 확대시킨 흔적도 찾을 수 있으며 그리고 베드로전서와 히브리서는 정말 뚜렷한 케리그마의 영향을 나타내고 있음을 보았다.
– 주 예수
케리그마는 “예수가 주다”라고 한 신약성서의 기독론을 의미한다. 이 근본적인 기독론은 온 신약성서에 퍼져 있음으로 우리는 초대교회, 바울, 베드로 및 공관복음서 그리고 요한 등을 더듬어 찾아 보았다. 그런데 이들은 다 한결같이 예수의 인간성을 견지하면서도 그를 하나님의 실재 편에 두는 것이었다. 여기서도 우리는 실제 문제로서 현대 크리스챤의 그리스도에 대한 태도를 검토하였다.
– 예수와 교회
기독론에서 교회론으로 옮겨와서 현대학자들의 연구결과는 예수는 하나님의 새 백성을 이룩하는 것이 그의 최고 사명이었다고 밝혔다. 이어서 다음 네 가지 이야기를 전개시켰다. 1.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 구원의 법도”는 그이 자신에 의해 완성되었고 또 그는 그 법도 아래 신의 백성을 모았다고 하였다. 2.예수의 메시아 사상은 새로운 공동체 창설을 의미했다. 3.메시아는 목자로서 한 양떼를 필요로 했었다. 4.12제자를 불러 모으시고 훈련시켜 파송한데서 하나님의 새 백성 창설의 핵심을 본다고 했다.그리고 성만찬 때에 예수는 그의 제자들과 하나의 새계약을 맺었다는 것을 살폈다.
– 사도와 교회
부활과 오순절의 결과로 생겨난 “적은 무리”가 사도적 교회가 되겠다고 하고 이 처음 크리스챤들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기본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1.그들 자신이 에클레시아 곧 하나님의 친 백성이라고, 2.그들은 예수를 주로 받드는 공통된 충성심에서 연합되어 있다고 확신했다. 3.그들은 성령의 공동체 의식을, 4.선교적 사명의 의식을 가졌다.이런 네가지 확신한 바를 초대교회, 바울서신, 베드로서신, 히브리서 및 요한의 기록들을 통해 살피고 있다.
– 죄와 구원
여기서는 다시 교회론에서 구원론으로 옮겨 왔는데 여기서 인간의 죄악된 모습에 대한 예수나 바울간에 사상적 차이가 없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예수와 바울의 교훈을 대조해서 a)율법관, b)의롭다 함, c)죄악관을 연구 하였는데 결론은 예수께서도 바울 이상으로 “모든 사람이 범죄했으므로 구원이 필요하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 구원
신약성서 기자들의 구원론은 다 근본적인 일치점을 입증하려 했다.1)구원은 본래 하나님의 뜻에서 비롯되었으며, 2)구원은 인간의 죄악성과 상관이 3)그리스도 구원의 사업은 대속적, 대표적, 희생적인 것이었으며, 4)구원의 정신적 목적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두절된 관계를 회복시킴에 있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이 같은 신약성서의 “공통된”구원관과 현대인의 구원에 대한 설교를 비평하고 있다.

○ 목차
1. [사도들의 설교와 그 발전]
2. 초대교회의 증언(설교)
3. 복음서의 증언(설교)
4. 바울과 요한의 증언(설교)
5. [신약성서의 중심사상(케류그마)]
6. 신약성서의 통일성
7. 분석적 연구법의 위험성
8. 비판적 종합적 연구법
9. 케류그마
10. 주 예수
11. 예수와 교회
12. 사도와 교회
13. 죄와 구원
14. 구원
15. 개요 및 추기
○ 저자소개 : 찰스 헤럴드 다드 (Charles Harold Dodd), A. M. 헌터 (A. M. Hunter)

– 저자 : 찰스 헤럴드 다드 (Charles Harold Dodd, 1884 ~ 1973)
찰스 헤럴드 다드 (Charles Harold Dodd, 1884년 4월 7일 ~ 1973년 9월 21일)는 보통 C. H. 다드라고 부른다. 웨일스 출신의 회중교회 목회자이며, 신약학자이며 가장 영향력있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자이다. 그는 실현된 종말론을 주장한 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실현된 종말론이란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언급한 것은 미래 종말 보다는 오히려 현재의 실재성를 의미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는 아돌프 폰 하르나크, 루돌프 오토, 그리고 하이데거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행동에서 이미 (already) 시작되었고 용서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었다고 한다.
실현된 종말론 (Realized eschatology)은 C. H. 다드 (1884-1973)에 의해 널리 알려진 기독교 종말이론이다. 그는 신약 성경의 종말론적 본문들은 미래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사역과 그의 마지막 유산에 관련된다고 한다. 종말론은 따라서 세계의 마지막이 아니라 예수에 의해서 세워진 새로운 탄생이며 제자들에 의해 지속되는 새로운 탄생, 즉 초월적 역사가 아닌 역사적 현상이라고 한다.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주장한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강조한 철저한 종말론의 개념과 대조적인 것이다.
저서로 The Meaning of Paul for Today (1920), The Gospel in the New Testament undated, The Authority of the Bible (1928, 1930),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 (1932) Moffatt Commentary, The Framework of the Gospel Narrative (1932), There and Back Again (1932), The Mind of Paul: A Psychological Approach (1933), The Bible and its Background (1935), The Bible and the Greeks (1935), The Parables of the Kingdom (1935), The Apostolic Preaching and its Developments: Three Lectures with an Eschatology and History (1936), The First Epistle of John and the Fourth Gospel (1937), History and the Gospel (1938), The Bible Today (1946), The Johannine Epistles (1946) Moffatt Commentary, About the Gospels (1950), The Coming of Christ: Four Broadcast Addresses for the Season of Advent (1951), Gospel and Law: The Relation of Faith and Ethics in Early Christianity (1951) Bampton Lectures at Columbia University, According to the Scriptures: The Substructure of New Testament Theology (1952), Christianity and the Reconciliation of the Nations (1952), Man In God’s Design According to the New Testament (1953) with Panagiotis Bratsiotis, R. Bultmann, and Henri Clavier, 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 (1953). Contents, pp. 2-46, back-cover description, New Testament Studies (1953), The Dialogue Form in the Gospels (1954/55), Benefits of His Passion (1956), How to Read the Gospels (1956), Triptych (1958), Historical Tradition in the Fourth Gospel (1963), More New Testament Studies (1968), The Founder of Christianity (1970) 등이 있다.
– 저자 : A. M. 헌터 (A. M. Hunter)
영국의 저명한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인 헌터 박사는 스코틀랜드의 에버딘 대학교 (The University of Aberdeen) 신학부 성서 비평학의 신약학 교수였고, 에버딘 대학교의 킹스 칼리지 (King’s College)의 학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신약 성서 개론」「신약 성서 신학 개론」「비유 해석」「기독교 개론」「신약 성서의 메시지」등이 있다.
– 역자 : 채위

○ 독자의 평
모든 크리스챤들은 주에 한 번씩은 “사도신경”을 외우고 예배를 드린다. 그러나 우리가 이 신조의 구조와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면 우리의 신앙의 삶의 근원적인 힘이 될 수 없을 것이다.그런데 이 책 전반부의 Dodd 박사의 글에서 사도신경의 구조와 내용이 거의 초대교회의 케리그마와 일치되고,또 신약성서의 구조와 내용이 “케리그마”에서 그 “원형”을 이루고있고, 나아가 바울과 요한의 사상에서 발전된 흔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책은 기독교의 본질인 “케리그마”가 무엇인가를 밝혀 주고,성서의 중심사상은 무엇인가를 신약을 중심으로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현대 교회의 가장 큰 이슈인 “에큐메니칼 운동” 즉 교회연합운동에 대한 성서적 근거가 바로 다른데 있지 않고 “케리그마”에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다시한번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케리그마가 종말론에서 그 바른 방향을 설정해 나갔다는 것도 주목해 볼만한 내용이라 생각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종말론 학자들은 “미래적 종말론”에 보다 더 많은 무게를 두고 있으나 Dodd박사는 이 책에서 “실현된 종말론”에 더 무게를 두고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의 그 뜻을 실천해 나가는 “실현된 종말론”적 측면을 케리그마와의 연관성을 중심으로 풀어나가면서 더 강조하는 것을 읽고 신약성서의 종말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다. 사실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이러한 케리그마적 설교가 아닌 디다케적 교훈을 증거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제는 설교의 패턴을 케리그마적으로 방향전환시켜야 겠다는 다짐도 하게된다.
또한 A. M. Hunter의 글에서는 신약성서안에서 온갖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늘 초월해 있는 것은 케리그마로 인한 깊은 통일성 (Unity), 즉 “하일스 게쉬히테” (Heilsgeschichte) 우리말로 번역하면 “구속의 역사” (History of Salvation)을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20세기에서 많이 성행했던 분석적인 성서 연구 방법은 본문을 분리시켜놓는데 그 공헌을 인정할 수 있을 지 모르나 전체를 연구하는 종합적인 이해방법은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Hunter는 또한 다양성만 보는 성서이해는 일방적인 것이고 전적으로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그는 신약성서의 중심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메시아를 보내시어 그의 백성의 구원을 완성시켰다고 한 기록 가운데 있었다. 그리고 모든 신약성서 기자들이 중거해 주는 것은 단 한 분의 구세주, 단 하나의 교회 그리고 단 하나의 구원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Hunter가 밝힌대로 신약성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어 있는 “큰 구원” 곧 “천하 인간에 구원얻을 만한 딴 이름이 없다”고 한 그 진리에 다시한번 겸손히 순종해야겠다는 믿음을 확신하면서 소감을 끝맺고자 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