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성과 속
미르치아 엘리아데 / 한길사 / 1998.5.20

엘리아데는 성과 속의 잣대를 이용하여 시간과 공간, 우주와 자연, 인간의 삶 자체를 꿰뚫어봄으로써 종교적 인간과 비종교적 인간이 실상 동일한 실재 앞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 목차
1. 서론
2. 성스러운 공간과 세계의 정화
3. 성스러운 시간과 신화
4. 자연의 신성과 우주적 종교
5. 인간의 실존과 성화된 생명
6. 연대기적 고찰
7. 엘리아데 연보
8. 참고문헌
9. 찾아보기

○ 저자소개 : 미르체아 엘리아데 (Mircea Eliade, 1907 ~ 1986)
미르치아 엘리아데 (Mircea Eliade)는 1907년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에서 태어나 부쿠레슈티대학에서 이탈리아 철학 연구로 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후 인도 캘커타대학에서 3년간 산스크리트와 인도 철학을 공부하였으며, 1933년 부쿠레슈티대학으로 돌아와 요가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부쿠레슈티대학의 교수를 지냈다.
그후 1945년에 파리 소르본대학의 종교학 객원 교수가 되었고, 1956년에 시카고대학의 교수로 부임하여 그곳에서 30년 이상 가르쳤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종교학자인 이 거인은 그의 필생의 대작이자 위대한 학문적 업적으로 꼽히는 『세계종교사상사』를 3권까지 집필한 후인 1986년 4월 22일에 시카고에서 영면하였다.
주요 저서로 『세계종교사상사』(전3권), 『영원회귀의 신화』, 『종교형태론』, 『성과 속』, 『이미지와 상징』, 『요가』, 『샤머니즘』, 『대장장이와 연금술사』, 『종교의 의미』, 『벵갈의 밤』 등이 있다.
– 역자 : 이은봉
·서울대학교 문리대 및 동 대학원 종교학과 졸업,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 철학박사,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대학 학장, 한국 종교학회 회장 역임, 덕성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 역임
저서로는 <한국 고대 종교사상>, <종교세계의 초대>, <종교와 상징>, <여러 종교에서 본 죽음>, <단군신화 연구>(편저)<나만 홀로 우둔하고 멍청하도다> 등이 있다.
역서로는 <종교 형태론>, <신화와 전설>, <근대 중국 종교의 동향>, <도와 인간 심리>, <과학·신념·사회>, <성과 속>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001. 성과 속은 무엇인가• M. 엘리아데의『성과 속』
21 성과 속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는 sacred와 profane이다. 그런데 성(sacred)은 sacrum을 어원으로 해서 나온 말인데, 이 말은 로마 시대에 신이나 신의 힘에 속해 있는 것을 뜻하였다. 그러나 신의 이름이 반드시 뚜렷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가령 비밀 의례 같은 데서 막연하지만 강력하게 그 힘을 느끼는 것에서 성의 실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한편 속(profane)의 어원은 profanum인데, 그것은 ‘성전 경내 앞’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나온 말로 경내(fanum)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는 관례와 어원상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초기부터 속이라는 말은 장소를 나타내는 말과 관련되어 있었고, 성(sacrum)이라는 말도 일종의 종교적 행위를 하는 장소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으므로 sacrum과 profanum은 둘 다 특별한 의미의 장소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원시인들에게는 일찍부터 공간이 항상 균질적인 것이 아니라 접근하기 어려운 성스러운 공간이 따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9 그러나 여기서 오해를 하면 안되는 사실이 있다. ‘이 세계가 본래부터 성현이었다’고 하는 말을 ‘이 세계 그 자체가 성이다’라는 말과는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후자의 말로 받아들인다면 범신론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범성적인 입장과 범신적인 입장은 구분해야 한다. 엘리아데는 이 세계는 성이 드러나는 그 무엇이지 이 세계 자체가 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엘리아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세계에 있는 자연물 자체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연물을 통해 현현하는 성을 숭배한다는 것이다.
44 우리는 엘리아데의 성과 속의 이론에서 성(혹은 신이라 부를 수도 있으리라)과 세계와 인간이 함께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성 혹은 신이라는 것은 우리의 감각을 초월해 있는 존재요, 한편 그 성에 참여하고 있는 인간의 마음은 어쩌면 인식하는 나의 가장 내밀한 비밀 가운데 숨어 있는 나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인식하는 나는 그 성에 참여하고 있는 것과 동시에 그 성의 무한함을 모두 드러낼 수 없는 한계도 지니고 있다. 성을 인식하는 것은 인식의 주체가 자신의 뿌리에 있는 성에서 그 성을 길어올린 정도에 한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인식하는 나는 감각을 초월해 있는 성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는 알 수 없고 세계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성의 육화된 모습인 세계를 통해 성을 알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인식하는 주체인 인간에게는 세계도 또한 무한한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세계의 여러 국면을 통해 표현된 성의 현현(그것이 나무를 통해서 현현되었든 혹은 돌을 통해서 현현되었든)은 인식하는 주체가 성을 외화한 것에 불과하고, 동시에 이미 세계의 모습으로 육화되어 있는 성을 발견한 것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성과 이신 주체인 인간 및 세계는 서로 뗄 수 없는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원시적인 전통적 인간들도 그 표현이 소박하긴 하나 여러 국면의 성의 현현을 통해서 자신이 완벽한 인간 실존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고, 그런 측면에서 현대의 인간에 못지 않은 진지성을 가지고 있으며,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실존의 더 깊은 측면에 간여하고 있는 것이다.
002. 서론
48 우리는 성스러운 것의 현상을 그 다양한 복잡성 안에서 해명하려고 하며, 단순히 비합리적인 측면에서만 국한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의 관심은 단지 종교가 지닌 비합리적인 요소와 합리적인 요소의 관계가 아니라 성스러운 것 그 전체이다. 성스러운 것의 정의는 우선 속된 것과 대조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은 성과 속의 대조를 설명하고 정의하고자 하는 데 있다.
48 인간이 성스러움을 아는 것은 그것이 속된 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서 스스로를 현현하고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성스러운 것의 현현을 여기서는 성현(聖顯, hierophany, 그리스어 hieros = 신성한, phainomai = 나타나다의 합성어)이라는 말로 불러 본다. 이 말은 성현 이외의 어떤 것을 내포하지 않기 때문에 적절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어원적인 내용 가운데 있는 말, 즉 어떤 성스러운 것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을 표현하고 있지 않다. 종교의 역사는 ― 가장 원시적인 것에서부터 고도로 발달한 것에 이르기까지 ― 많은 성현, 즉 성스러운 여러 실재의 현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가장 원시적인 성현(예컨대 돌이나 나무와 같은 일상적 대상 속에 성스러운 것이 나타나는 것)에 높은 수준의 성현(그리스도교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이 수육되는 것)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연속성이 흐르고 있다. 어떤 경우에나 우리는 동일한 신비스러운 사건에 직면한다. 즉 전혀 다른, 이 세상 것이 아닌 하나의 실재, 하지만 이 자연적인 ‘속된’ 세계에서 불가결한 요소를 이루는 여러 사물 가운데 나타나는 사건에 직면하게 된다.
근대 서양인은 성스러운 것의 여러 현현 양식에 직면하여 어떤 불안을 느낀다. 즉 어떤 인간에게는 성스러운 것이, 예컨대 돌이나 나무 가운데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곧 그것이 돌 자체의 숭배, 혹은 수목 그 자체의 숭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스러운 돌, 성스러운 나무는 돌이나 나무로서 숭배되는 것이 아니고 ― 그것을 숭배하는 것은 그것이 성현이기 때문이며 돌이나 나무가 아니라 성스러운 것, 전혀 다른 어떤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53 우리의 일차적인 관심은 종교 체험의 특수한 차원을 제시하고, 그것이 세계에 대한 세속적인 체험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차이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53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랑 생활을 하는 수렵민과 정주 생활을 하는 농경민 사이에는 그러한 차이보다도 한없이 중요한 하나의 유사성이 존재한다. 즉 양자는 성화된 우주에서 생활하며, 양자는 동물계와 식물계에서도 똑같이 현현하는 하나의 우주적 신성성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존재 상황을 성스러운 것을 잃어버린 우주에서 살고 있는 근대 사회의 인간들의 존재 상황과 비교해 보면 곧바로 이들을 분리시키는 모든 요소를 깨닫게 될 것이다. 동시에 여러 다른 문화에 속하는 종교적 사실을 비교하는 것의 타당성도 분명해질 것이다. 즉 이 모든 사실은 동일한 행동 유형, 즉 종교적 인간의 행동 유형에 기본을 두고 있는 것이다.
003. 성스러운 공간과 세계의 정화
56 종교적 인간에게 이 성스러운 공간의 발견 ― 즉 계시 ― 이 어느 정도의 실존적 가치를 지니는지는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선 앞으로의 방향성이 없으면 어떤 일도 시작할 수 없고 어떤 일도 행할 수 없다. 즉 방향성이 있다는 것은 하나의 고정점을 획득하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종교적 인간은 항상 ‘세계의 중심’에 거주처를 정하려고 노력한다. 세계 안에서 살고자 한다면 세계를 창조해야만 한다 ― 속된 공간의 균질성과 상대성의 혼돈 가운데서는 어떤 세계도 탄생할 수 없는 것이다. 고정점(중심)을 발견하고 투사하는 것은 세계 창조에 대응한다. 우리는 다시 성스러운 공간의 구성과 그 의례적 방향성이 갖는 우주 창조적 의미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몇몇 사례를 들고자 한다.

59 초기 문화 단계에서는 이 초월의 가능성이 다양한 출구의 형태로 표현되었다. 여기 성역 안에서 신들과 교류할 수 있다면 거기에는 신들이 지상으로 강림하고 또 인간이 상징적으로 천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통로로서 천상계로 올라갈 수 있는 문이 있어야 한다. 많은 종교에서 이와 같은 것이 있음을 곧 보게 될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사원은 위를 향한 출구가 되고 신들의 세계와의 교류를 보증한다.
66 그들은 서로 관련되어 하나의 체계를 형성하는데, 그것을 전통 사회의 ‘세계 체계’라고 부를 수 있다. 즉 ①성스러운 장소는 공간의 균질성의 단절을 가져온다. ②이 단절은 (천상에서 지상으로, 지상에서 하계로) 하나의 우주 영역에서 다른 우주 영역으로 이행할 수 있게 하는 출구로 상징된다. ③천상과의 교류는 기둥(우주의 기둥 universalis columna), 사다리(야곱의 사다리), 산, 나무, 넝쿨 등 여러 형상으로 상징되는데, 그것은 모두 우주축과 관계한다. ④이 우주축의 주위에 ‘세계'(=우리의 세계)가 놓여 있다. 따라서 이 축은 ‘중앙에’, 즉 ‘대지의 배꼽’에 있으며 그것은 세계의 중심이다.
75 용은 바다의 괴물, 태초의 뱀의 모범적 형상이며, 우주적인 물, 어둠, 밤, 죽음 등과 같은 상징, 간단히 말해서 무형태적인 잠재자, 아직 ‘형태’를 획득하지 못한 모든 것을 상징한다. 코스모스가 출현하기 위해서는 신들이 용을 정복하여 갈기갈기 토막내지 않으면 안된다. 바다의 괴물 티아마트(Tiamat)의 육체로부터 마르두크(Marduk)는 세계를 만들어 냈다. 야훼는 태초의 괴물 라합(Rahab)을 정복한 후에 우주를 창조하였다. 그러나 뒤에서 보게 되는 바와 같이 용에 대한 이 신의 승리는 매년 상징적으로 반복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세계는 해마다 새롭게 창조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도시가 침략자를 물리치고 승리를 얻는 것도 어둠, 죽음, 카오스에 대한 신의 승리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82 만약 사원이 세계의 모상을 구성한다면 이것은 세계가 신들의 작품으로서 성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원의 우주론적인 구조는 하나의 새로운 종교적 평가의 여지를 허용한다. 신들의 집으로서, 다른 모든 것 위에 있는 성스러운 장소로서 사원은 항상 세계를 재성화한다. 왜냐하면 사원은 세계를 대표하고 동시에 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끝까지 분석해 보면, 세계가 모든 부분에서 재성화하는 것은 사원의 힘에 의해서이다. 세계가 아무리 부정하게 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끊임없이 성전의 신성성에 의하여 정화된다.
85 성스러운 것이 공간 가운데 현현하는 곳에 실재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세계가 출현한다. 그러나 성스러운 것의 출현은 하나의 속된 공간의 무형태적인 유동성에 고정점을 투사하고, 카오스 속에 하나의 중심을 투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지평의 돌파를 가져오고, 그에 따라 우주적 지평 사이 (지상과 천상 사이)의 교류를 수립하고, 하나의 존재 양식에서 다른 존재 양식으로의 존재론적인 이행을 가능하게 한다.
004. 성스러운 시간과 신화
89 이 두 종류의 시간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는 우리에게 즉각적으로 다가온다. 성스러운 시간은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가역적이다. 좀더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원초적인 신화적 시간을 나타낸다. 종교적인 축제나 전례의 시간은 모두 신화적 과거인 ‘태초에’ 생겨난 성스러운 사건의 재현을 의미한다. 종교적으로 축제에 참여하는 것은 일상적인 시간 지속에서 탈출하여 그 축제에서 재현하는 신화적인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시간은 무한히 회복될 수 있고 반복 가능하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지나가는’ 것이 아니고, 또 결코 불가역적인 지속을 나타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90 비종교적인 인간과 관련하여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것은 그도 역시 어떤 종류의 시간의 비연속성과 이질성을 체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도 노동하는 비교적 단조로운 시간이 있는 한편 오락과 위안의 시간, 즉 ‘축제의 시간’이 있다. 그는 또한 여러 시간 리듬 안에 살고 있으면서도 농도를 달리하는 시간을 알고 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 사랑에 빠져 있을 때, 애인을 기다릴 때나 혹은 만날 때, 그는 분명히 일하거나 피곤에 지쳐 있을 때 체험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 리듬을 체험한다.
94 고대 문화의 종교적 인가에게 있어서 세계는 매년 갱신된다. 다른 말로 하면, 세계는 새로운 해가 될 때마다 원초의 신성성을 회복한다. 즉 창조주의 손에서 나왔을 때의 신성성을 갖는 것이다. 이 상징은 성전의 건축 기술적 구조에서 명료하게 표현되었다. 사원은 가장 뛰어난 성소이자 세계의 모상이므로 우주 전체를 성화하고 동시에 우주의 생명을 성화한다. 이 우주적 생명은 원형 궤도의 형태로 상상되고 해(year)와 동일시되었다. 해는 닫혀진 원이었다. 그것은 처음과 끝을 가지고 있지만 새로운 해의 형태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신년이 올 때마다 하나의 ‘새로운’, ‘순수한’, ‘신성한’ ― 아직 소모되지 않았기 때문에 ― 시간이 존재하게 되었다.
111 종교적 인간이 목표로 하는 모델은 처음부터 초인간적 지평, 신화에 의해 계시된 지평에 두고 있다. 인간은 다만 신화의 가르침에 순응함으로써, 즉 신들을 모방함으로써만 진정한 인간이 된다.
118 고대 및 고대 동방의 여러 종교와 인도 및 그리스에서 형성된 영원 회귀의 신화적•철학적 개념에 대하여 근본적 혁신을 가져온 것은 유대교이다. 유대교에서 시간은 처음과 끝을 가지고 있다. 순환하는 시간이란 관념은 폐기되었다. 야훼도 이제 (다른 종교의 신들과 같이) 우주적 시간 안에서 현현하지 않고 불가역적인 역사적 시간 가운데서 현현한다.
119 그리스도교는 역사적 시간의 평가에서 이보다 더 전진한다. 신이 육화되어, 즉 역사적으로 제약된 인간 실존을 받아들인 이래 역사는 성화될 가능성을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복음서가 환기시킨 그때는 특정한 역사적 시간, 즉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이 된 시대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성화되었다. 현대의 그리스도교가 의례적 시간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가 살았고, 수난받고, 부활한 그때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신화적 시간이 아니고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를 다스렸을 때의 시간이다. 또한 그리스도교에게 성스러운 달력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동일한 사건을 무한히 재현한다.
120 헤겔은 유대-그리스도교적 이념을 이어받아 그것을 총체로서의 우주적 역사에 적용하고 있다. 즉 세계 정신은 부단히 역사적 사건 가운데서 현현하고 오로지 역사적 사건에서만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역사는 그 전체가 신현이 된다.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세계 정신이 그렇게 하기를 욕구하기 때문에 그것이 행한 그대로 일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하여 20세기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 역사 철학에의 길을 열어놓았다.
005. 자연의 신성과 우주적 종교
121 종교적 인간에게 자연은 결코 단순히 ‘자연’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종교적 의미로 충만해 있다. 이 사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주는 신의 창조물이고, 세계는 신들의 손으로 완성된 것이어서 성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를 들면, 신의 현존에 의해서 정화된 장소나 사물에 머무르는 경우와 같이 직접 신들과 교류하는 신성성만의 것은 아니다. 신들은 그보다 더 많은 것을 행했다. 그들은 세계와 우주의 현상의 구조 그 자체 안에서 다양한 성의 양태를 현현한다.
127 이러한 원시 종교들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하늘의 최고 존재자는 종교적 통용성을 상실해 버린다. 즉 인간이 숭배하는 대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신화에서도 차츰차츰 인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결국에는 감추어진 신(deus otiosus)이 되어버린다. 그래도 인간은 그를 잊지 않고 다른 신들과 여신, 선조들과 혼령들에 대한 염원이 모두 공허하게 끝났을 때 마지막 간청의 대상으로 그를 부른다.
006. 인간의 실존과 성화된 생명
153 종교사의 궁극적인 목표는 종교적 인간의 행동과 정신 세계를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일이다. 그것은 반드시 용이한 일은 아니다. 근대 세계에서 삶의 형태와 세계관으로서의 종교는 그리스도교가 대표하고 있다. 서양의 지식인들은 상당히 노력을 지불해야만 고전적 고대의 종교적 비전이나 특정한 위대한 동양 종교들 ― 예컨대 힌두교나 유교 ―에 가까워 질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종교적 지평을 넓히려는 이 같은 노력은 비록 칭찬받을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도달하는 범위는 그렇게 넓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리스, 인도, 중국은 그 방대한 성전이 지닌 복합적이고 고도로 발달한 종교의 영역을 벗어나서 서구의 지식인을 데려갈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164 현대의 주거지가 그 우주론적 가치를 상실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신체도 종교적 혹은 정신적 의미를 잃어버렸다. 이것을 요약하면, 현대의 비종교적 인간에게 우주는 불투명하고 둔하고 말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주는 어떤 메시지도 전해 주지 않으며, 어떤 암호도 갖고 있지 않다. 자연의 신성함이라는 의식은 오늘날 유럽의 경우 주로 농경 주민들 사이에 남아 있다. 왜냐하면 그들 사이에는 아직도 우주적 제의로 체득한 그리스도교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164 우주적 제의, 자연의 그리스도론적인 드라마에 참여하는 신비에 대하여는 현대 도시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종교 체험은 더 이상 우주를 향해 열려 있지 않다. 결국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적 체험이 되어버렸으니, 즉 구원은 인간과 그의 신에 관한 문제가 되었다. 기껏해야 인간은 신에게뿐만 아니라 역사에 대해서도 책임을 느끼고 있음을 인정할 뿐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인간 – 신 – 역사의 관계망 속에는 우주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 이렇게 되면 심지어 진정한 그리스도교라도 더 이상 세계를 신의 창조물이라고 느끼지 않을 것 같아 보인다.
166 위를 향한 출구는 하늘과의 교류, 초월을 향한 욕구를 나타내고 있다. 문지방은 안과 밖의 경계선을 구체화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의 지대에서 다른 지대로의 이행의 가능성을 구현하고 있다. 그러나 위험한 통과의 관념을 나타내며, 이 때문에 가입 및 장례 의례와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특히 다리와 좁은 문의 형상이다. 가입식, 죽음, 신비적인 엑스터시, 절대적 인식, 유대-그리스도교에서의 ‘신앙’,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존재 양식에서 다른 존재 양식으로의 이행에 해당하며, 참된 존재론적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169 ‘통과 의례’가 종교적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관찰되어 왔다. 물론 두드러진 통과 의례는 하나의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어린이 혹은 소년 시대에서 청년으로) 이행하는 사춘기의 가입식이다. 그러나 탄생, 결혼, 죽음의 때에도 역시 통과 의례가 존재하며, 이들도 각각 언제나 가입식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도 모두 존재론적 및 사회적 상태의 기본적인 변화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아기는 태어났을 때에는 물리적 생존을 가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그는 아직 가족에게도 공동체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분만 직후의 의례를 수행해야 신생하는 비로소 참된 ‘산 사람’의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 의례를 통해 비로소 아기는 산 사람의 공동체에 편입되는 것이다.
183 근대의 비종교적 인간은 새로운 실존적 상황을 상정한다. 즉 그는 그 자신을 오로지 역사의 주체 및 동인으로만 간주하며, 초월적인 것을 모두 거부한다. 달리 말하면, 그는 다양한 역사적 상황에서 인식되는 인간의 상태 이외에는 어떤 종류의 인간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만든다. 그리고 오로지 자기 자신과 세계를 탈신성화시키는 것은 그가 자유를 획득하는 데 최대의 장애물이다. 그는 완전히 신비성을 잃어버릴 때에만 그 자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최후의 신이 살해되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189 즉 근대 사회의 비종교적 인간은 아직도 그의 무의식의 활동으로부터 영양분과 원조를 받고 있지만 세계에 대한 본래의 종교적 체험과 비전을 보여주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의식은 그에게 그 자신의 삶의 어려움에 대한 해결을 제공하며, 이런 방식으로 종교의 역할을 수행한다. 왜냐하면 하나의 실존을 가치의 창조자로 만들기 전에 종교는 그 완전성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비종교적이라고 주장하는 근대인들에게 있어 종교와 신화는 그들의 무의식의 어둠 속에 ‘은폐’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이러한 인간이 내면의 깊이 안에 생의 종교적 비전을 회복할 가능성을 감추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혹은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종교성은 인간의 새로운 ‘타락’에 해당한다는 것, 달리 말하면 종교적 인간은 의식된 종교 체험, 따라서 종교를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능력을 상실하였지만 그의 가장 깊은 존재 밑바닥에는 아직도 그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최초의 ‘타락’ 이후에 그의 선조인 원초적 인간이 세계 안에서 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인식력을 가지고 있다는 표현과도 같다. 최초의 ‘타락’ 이후 종교적 감각은 ‘분열된 의식’의 차원으로까지 내려와 버렸다. 두번째 타락 이후 그것은 더욱 내려와, 무의식의 심연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지금 그것은 ‘망각되고’ 말핬다.
종교학자의 고찰은 여기에서 끝난다. 이제부터는 철학자, 심리학자, 신학자들에게 고유한 문제의 영역이 시작된다.
007. 연대기적 고찰
191 상이한 종교들에 공통된 요소를 분석하고 그것들의 발전법칙을 해명하며, 특히 종교의 기원과 최초의 형태를 탐구하고 규정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종교학은 독립된 학과로서는 극히 새로운 학문이다. 그것은 19세기부터 시작되어 언어학과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
203 오늘날의 종교학자는 두 개의 서로 배치되는, 그러나 상호 보완적인 방법론적 지향으로 나누어진다. 한 그룹은 주로 종교 현상의 특수 구조에 주안점을 두는 데 비하여, 또 한 그룹은 무엇보다도 그들 현상의 역사적 연관에 관심을 갖는다. 전자는 종교의 본질을 이해하려 하며, 후자는 종교의 역사를 해명하고 서술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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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종교적 인간이란 가능한 한 세계의 중심에 가까이 살고자 하는 염원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자신의 나라가 대지의 중앙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그는 자신들의 도시가 우주의 배꼽을 구성한다는 것, 더욱이 신전이나 궁전이 진정한 세계의 중심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자기 자신의 집이 중심에 존재하고 세계의 모상이 되기를 원한다. (중략) 전통 사회의 인간은 위로 열려져 있는 공간, 즉 상징적으로 지평의 단절이 보증된, 따라서 다른 세계, 초월적 세계와의 접촉이 의례를 통해 가능한 공간에서만 살 수 있는 것이다.
고대 문화의 종교적 인간에게 있어서 세계는 매년 갱신된다. 다른 말로 하면, 세계는 새로운 해가 될 때마다 원초의 신성성을 회복한다. 즉 창조주의 손에서 나왔을 때의 신성성을 갖는 것이다. 이 상징은 성전의 건축 기술적 구조에서 명료하게 표현되었다. 사원은 가장 뛰어난 성소이자 세계의 모상이므로 우주 전체를 성화하고 동시에 우주의 생명을 성화한다. 이 우주적 생명은 원형 궤도의 형태로 상상되고 해 (year)와 동일시되었다. 해는 닫혀진 원이었다. 그것은 처음과 끝을 갖고 있지만 새로운 해의 형태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신년이 올 때마다 하나의 ‘새로운’, ‘순수한’, ‘신성한’ – 아직 소모되지 않았기 때문에 – 시간이 존재하게 되었다.
우리에게 종교적 인간이란 가능한 한 세계의 중심에 가까이 살고자 하는 염원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자신의 나라가 대지의 중앙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그는 자신들의 도시가 우주의 배꼽을 구성한다는 것, 더욱이 신전이나 궁전이 진정한 세계의 중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자기 자신의 집이 중심에 존재하고 세계의 모상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사실상 뒤에서 살펴보게 되겠지만 집이란 세계의 중심에 있고 소우주적 차원에서 우주를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전통 사회의 인간은 위로 열려져 있는 공간, 즉 상징적으로 지평의 단절이 보증된, 따라서 다른 세계, 초월적 세계와의 접촉이 의례를 통해 가능한 공간에서만 살 수 있는 것이다. (중략) 인간은 항상 중심에 살고자 하는 욕구를 느낀다. 간단히 말해서 그가 친밀함을 느끼는 공간,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공간이 어떤 차원에 속하든지 간에 종교적 인간은 항상 전체적이고 조직된 세계 속에, 즉 코스모스 안에서 살기를 바란다. 우주는 그 중심으로부터 생겨난다. 즉 우주는 그 배꼽인 중심점에서부터 확장되어 나간다.-71쪽
‘우리의 세계’는 코스모스이기 때문에 밖으로부터의 어떤 공격이든 카오스로 변화시킬 위험성을 안고 있다. ‘우리의 세계’는 신들의 모범적인 작업인 우주 창조를 모방하여 세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세계를 공격하는 적은 신들의 적, 악마, 특히 악마의 두목, 태초에 신들에게 정복당했던 원초적인 용(龍)과 동일시되었다. ‘우리의 세계’에 대한 공격은 신들의 작업인 코스모스에 저항하여 그것을 무(無)로 돌려버리려는 신화적인 용의 복수 행위에 해당했다. ‘우리의’ 적은 카오스 세력에 속한다. 어떤 도시의 파괴는 카오스로의 전락을 의미한다. 침입자에 대한 승리는 용(즉 카오스)에 대한 신들의 모범적 승리를 재현하는 것이다.-74쪽
종교적인 인간은 두 종류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그중에서 더 중요한 성스러운 시간은 순환적, 가역적, 회복 가능한 시간이라는 역설적인 면으로 나타나고 의례를 통하여 주기적으로 회귀하는 일종의 신화적인 영원의 현존을 나타낸다. 시간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종교적 인간과 비종교적 인간을 구분하기에 충분하다. 종교적 인간은 근대적인 용어로 역사적 현재에만 사는 것을 거부하고, 어떤 점에서는 영원성과 동일시될 수 있는 성스러운 시간을 다시 획득하려고 노력한다고 할 수 있다.-90쪽
신이나 문화 영웅은 이제껏 속된 행위를 계시해 본 적이 없다. 신이나 선조들이 행한 것, 따라서 신화가 그들의 창조 행위에 대하여 말한 모든 것은 성스러움의 영역에 속하고, 그러므로 존재에 참여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인간이 자기 자신의 발의에 따라 행하는 것, 어떤 신화적 모델이 없이 행하는 것은 모두 속된 영역에 속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헛되고 허망한 행위이며, 궁극적으로는 비현실적 행위이다. 인간은 종교적이 되면 될수록 그들의 태도와 행동을 인도할 모범적 모델을 더욱 많이 가지게 된다. 말을 바꾸면, 인간은 종교적으로 되면 될수록 실재에 더 많이 들어가게 되고, 비모범적이고 ‘주관적’이어서 결국 그릇된 행동 속에서 길을 잃어버릴 위험이 훨씬 줄어들게 된다.
이것이 여기서 특별히 강조할 필요가 있는 신화의 측면이다. 신화는 절대적인 성스러움을 계시한다. 그것은 신들의 창조 행위를 말하고 신들의 작업의 신성성을 계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신화란 성스러운 것이 세계 속으로 다양하게, 때때로 극적으로 침투되는 것을 묘사하는 것이다.-108쪽
천공 구조를 갖는 최고 존재자는 그 신앙 숭배로부터 점차 사라져 가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인간으로부터 벗어나 하늘로 올라가서 멀리 있는 감추어진 신(dei otiosi)이 된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신은 마치 창조라는 거대한 일에 그 힘을 전부 사용해 버린 것과 같이 우주와 생명과 인간을 창조해 버려서 일종의 권태를 느낀 것이라고 이야기되고 있다. 그들은 하늘로 은퇴하고, 창업을 완성하기 위해 그 아들 혹은 조물주를 지상에 남겨둔다. 차차 그의 지위는 신화적 선조, 모신, 풍요신 등과 같은 다른 신격들로 대체되었다. (중략)최고 존재자가 그 본래의 지위를 지키고 있는 것은 유목 민족뿐이다. 그것은 일신교적 경향을 갖는 종교(아후라-마즈다) 혹은 명확한 일신교(야훼, 알라)에서 특수한 지위를 갖는다. (중략) 대다수 아프리카 종족들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위대한 천신, 지고존재자, 전능한 창조주는 부족의 종교 생활에서 사소한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 그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고, 혹은 너무 선하기 때문에 일부러 숭배할 필요가 없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난이 닥칠 때에는 마지막 원천으로서 그의 도움을 요청한다.-125쪽
성스러운 지식, 일반적으로 지혜는 가입식의 성과로 해석된다. 그리고 고대 인도에서나 그리스에서도 분만의 상징이 의식의 각성과 결부되어 나타난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조산원에 비유한 것은 옳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사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의식으로 태어나는 것을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새로운 인간’을 분만시켰던 것이다. 불교의 전통 가운데서도 동일한 상징이 발견된다. 비구는 가문의 이름을 버리고 ‘붓다의 아들'(sakya-putto)이 되는데, 그것은 그가 ‘성인의 한 사람으로(ariya) 태어났기’ 때문이다.-179-180쪽
비유적 해석 방법을 발전시킴으로써 고대 말기 전체에 깊은 영향을 미친 것은 스토아 학파였다. 이 방법이 신화적 유산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재평가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스토아 학파에 따르면, 신화는 사물의 본성에 관한 철학적 견해나 윤리적 원리를 계시해 준다. 신들의 수많은 이름들은 하나의 단일한 신격이 여러 개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며, 모든 종교는 단지 용어만 다양할 뿐 동일한 기본적 진리를 나타낸다. 스토아 학파의 비유적론적 방법은 모든 고대의 전통 혹은 전통을 하나의 보편적인 언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는 일을 가능케 하였다. 이 방법은 널리 받아들여졌고, 후대에도 자주 사용되었다.-195쪽

○ 출판사 서평
– 종교학에 관한 기본 안내서, 마르치아 엘리아데 ‘성과 속’ (한길사)
이 책은 성과 속이라는 대립된 개념을 가지고 종교를 새로운 지평에서 이해하고 있다. 성과 속이라는 두 개의 대칭적인 잣대를 들이대보면 원시인과 현대인이 ‘종교적 인간’으로서 동일한 지평에 서 있음을 볼 수 있다. 엘리아데의 종교사와 종교현상에 관한 해박한 지식, 독창성 등이 없었다면 이런 저작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성과 속의 잣대를 이용하여 시간과 공간, 우주와 자연, 인간의 삶 자체를 꿰뚫어봄으로써 종교적 인간과 비종교적 인간이 실상 동일한 실재 앞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자신이 비종교적 인간이라고 여기는 사람일지라도 감추어진 형태로 남아 있는 현대의 신화나 의례에 의해 여전히 성스러움의 기억을 무의식 가운데 감추고 있음을 그는 실증하고 있다.
이 책은 종교학의 기본 안내서이지만 관점은 철학적 인간학이나 현상학, 심리학을 포괄하고 있으며 잠재적인 인간 실존의 여러 차원을 동시에 조명해주고 있다. 종교사와 종교현상에 대한 전세계적인 자료들이 백과서전적이라 할 만큼 풍부하게 나열되어 있지만 그런 자료들이 현학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명료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원시 종교적인 자료와 현대의 자료들이 동일한 문맥 속에 동원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순을 느끼지 않는 것은 이 문학적이라 할 만큼 간결하면서도 호소력 있게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 책은 고대인이든 현대인이든 자신이 종교적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며 인간 실존의 본원을 회복하게 한다. 이것이 현대인들이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 본문 들여다보기
신성성은 세계의 구조 안에서 어떻게 계시되는가
종교적 인간에게 자연은 결코 단순한 ‘자연’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종교적 의미로 충만해 있다. 이 사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주는 신의 창조물이고, 세계는 신들의 손으로 완성된 것이어서 성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를 들면, 신의 현존에 의해서 정화된 장소나 사물에 머무르는 경우와 같이 직접 신들과 교류하는 신성성만의 것은 아니다. 신들은 그보다 더 많은 것을 행했다. 그들은 세계와 우주적 현상의 구조 그 자체 안에서 다양한 성의 양태를 현현한다.
종교적 인간의 입장에서 관찰한다면, 세계는 성스러운 것, 따라서 존재의 다양한 양태를 발견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세계는 실존하고, 실제로 거기에 있고, 그리고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세계는 카오스가 아니라 코스모스이다. 따라서 세계는 신들의 작품인 피조물로 자신을 드러낸다. 이 신의 작품은 항상 어떤 종류의 투명성을 지니고 있는데, 즉 스스로 성스러운 것의 여러 양상을 계시한다. 하늘은 직접적으로 ‘자연스럽게’ 무한한 거리, 신의 초월성을 계시한다. 대지도 마찬가지로 투명한데, 즉 그것은 우주적인 어머니이자 양육자로서 자신을 나타낸다. 여러 가지 우주의 리듬은 질서, 조화, 항상성, 풍요성을 명백히 드러낸다. 우주는 전체로서 실재적이고 살아 있고, 또한 성스러움을 지닌 유기체이다. 즉, 그것은 존재와 신성성의 여러 양태를 계시한다. 존재 현현과 성현이 서로 만나는 것이다.
이 장에서 우리는 종교적 인간에게 세계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좀더 엄밀하게 표현하자면, 신성성은 세계의 구조 안에서 어떻게 계시되는가를 이해하고자 힘쓸 것이다. 종교적 인간에게 초자연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 자연은 항상 특히 그것을 초월하는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스러운 돌이 존경받는 이유는 그것이 신성하기 때문이지 돌 그 자체 때문이 아니다. 돌의 진정한 본질을 계시하는 것은 돌의 존재 양식 안에 나타난 신성성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 19세기적인 의미의 자연 숭배나 자연 종교를 논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종교적 인간은 세계의 자연적인 면을 통해서 ‘초자연’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창공은 단지 고개 들어 그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벌써 종교적인 체험을 불러일으킨다. 하늘은 그 자신을 무한한 것, 초월적인 것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인간과 그 환경에 의하여 표상된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전적으로 다른’ 뛰어난 것이다. 그 초월성은 인간이 그 무한한 높이를 단순히 인식함으로써 계시된다. ‘지고자’의 개념이 저절로 신성의 속성이 된다.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높은 지역, 별이 빛나는 영역은 초월자, 절대적인 실재, 영원성의 중대성을 획득한다. 거기에는 신들이 거주하고 있고, 특권을 가진 소수의 사람만이 상승 의례를 통하여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 어떤 종교의 관념에서는 거기는 죽은 자의 영이 올라가는 곳이다. ‘지고자’는 인간 그 자체로서는 도달할 수 없다. 그것은 초인간적인 위력과 존재에 속해 있다. 성전의 계단과 의례의 사다리를 올라서 하늘에 이르는 자는 인간이기를 멈추게 된다. 즉 어쨌든 그는 신적인 조건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논리적·합리적인 작용에 의해 도달되는 것이 아니다. 높음, 초지상적인 것, 무한함의 초월적 범주는 이성과 영혼을 모두 갖춘 전인(全人)에게 계시된다. 인간측에서 볼 때 그것은 총체적인 자각이다. 즉 하늘을 보면서 그는 신성의 측량 불가능성과 우주 안에서의 자신의 상태를 발견한다. 왜냐하면 하늘은 그 존재 양식에 의해서 이미 초월성, 힘, 영원성을 계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은 높고, 무한하고, 영원하고, 힘이 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존재한다.
앞에서 신들이 세계의 구조 자체 안에서 다양한 성의 양태를 계시하고 있다고 언급한 것은 바로 이러한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신들의 모범적 작품인 우주는 하늘의 단순한 현존 그 자체만으로 벌써 신적 초월성의 종교적 감정이 일깨워지도록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은 절대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많은 원시 민족은 그들의 최고신을 높음, 창공, 기상 현상 혹은 단순히 하늘의 거주자, 하늘의 주인이란 이름으로 불렀다.
(…) 여기에는 자연 숭배의 문제가 전혀 없다. 천신은 하늘과 동일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주의 창조자로서의 천신은 하늘도 창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천신은 창조자, 전능자, 주, 우두머리, 아버지 등으로 불린다. 천신은 하나의 인격이지 천문학상의 현현이 아니다. _『성과 속』 제3장 「자연의 신성과 우주적 종교」
– 민속종교의 성과 속에 대한 문제를 파고들다
성은 영속적 혹은 일시적 특성으로서 어떤 사물, 인간, 공간, 시간 등에 두루 퍼져 있다. 어떤 신비적인 사건이 계기가 되어 성이 되면, 그 순간부터 하나의 변질을 겪고 사람들한테 두려움과 숭배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 성을 접촉하는 것은 위험시되기도 한다. 또한 그 성은 외부로 퍼져나가 마치 물과 같이 번지고 전기와 같이 방출되는 성격을 지닌다. 그에 비해 속은 부정적 성격으로 확인되는데, 빈약한 생명력이나 허무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처럼 민속 종교에서도 성과 속을 구분하고 속의 허무를 극복하고 성으로 되돌아가고자 하였다.
민속 종교인들이 구원으로서 갈망한 것은 성인데, 그 성에 대한 감정은 두려움과 동시에 신뢰감과 같은 양극 감정이었다. 가령 민속 종교인들은 성소(聖所)를 한두 개씩 가지고 있게 마련인데 그곳은 도피의 장소로 사용됨은 물론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 성소는 이 지상의 속된 곳과 달리 생명력이 솟아나는 장소였다. 즉 성은 숭고한 유혹임과 동시에 자칫하면 큰 화를 자초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터부 현상에서 성을 유지하기 위한 소극적 방법을 찾아볼 수 있다. 폴리네시아어로 터부의 반대말은 노아 (noa)라고 하는데, 노아는 ‘자유로운’이란 뜻이 있다고 한다. 노아 상태에서는 세계 질서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함으로써 아마도 대지가 작물을 소출하지 않을지도 모르며, 일월성신이 운행의 법칙에 따르지 않을지도 모르고, 병과 죽음이 나라를 황폐하게 할지도 모른다. 터부는 세계에 관한 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어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믿어진다. 터부는 우주를 규율과 안정성 가운데서 지배하는 성스러운 법이 있음을 암암리에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스러운 질서와 속된 것의 혼동을 막으려고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인 것에서 이 사실을 더욱 확증할 수 있다. 사회 질서가 자연 질서를 계속하여 반영한다는 생각은 민속 종교들의 믿음이다. 즉 자연 질서의 올바른 운행이 사회 질서 유지에 바탕이 된다는 것인데, 일월성신과 사계절의 운행이 도수 (度數)에 맞게 운행되는 것은 사회 질서의 올바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반대로 도덕의 타락 등 사회 질서의 문란은 자연 질서의 불균형을 가져온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를 결합시켜 한쪽을 혼란시키는 것은 다른 쪽을 해롭게 하는 것이다. 어떤 종족은 왕을 죽이는 죄는 자연에 대한 반역 행위이고 우주의 움직임을 손상시킨다고 믿었다. 에스키모인들은 겨울 동물의 가죽을 여름 동물의 가죽에 닿지 않도록 한다고 한다. 어떤 종족은 남성의 노동 장비를 여성의 것과 동일한 장소에 놓지 않고, 각각 수확한 농산물도 같은 창고에 두지 않는다. 성과 속의 혼동을 방지하려는 태도에서 나온 사고방식인 것이다.
민속 종교들은 기쁨이나 행복을 포기하고 금욕 생활을 하였다. 현실의 행복이나 부 (富)를 포기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질서에서 힘을 획득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불가능하고 금지되어 있는 피안은 차안을 포기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최초의 생산물을 바치는 행위도 민속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경우 모든 것을 얻기 위하여 일부분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믿음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줄루족은 처음 수확한 농작물을 왕이나 사제가 시식하였는데 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이 심은 나무의 과실을 처음 3년까지는 불순한 것으로 여기고 4년째의 것을 하느님에게 바쳤다고 한다. 결혼을 앞둔 젊은 처녀는 큰 강이나 혹은 신에게 상징적으로 자신의 처녀성을 바쳤으며, 새로 집을 짓거나 이사를 한 경우에도 공물을 바치고 사제가 그 집을 정화하며 춤을 추기도 하였다.
이상의 경우들은 성과 속의 경험 중 극히 일부분의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성은 순결하고 좋은 것이고 속은 더럽고 나쁜 것이라는 관념은 뿌리 깊은 것이고, 더럽고 좋지 않은 곳에서 순결하고 깨끗한 곳으로 옮겨가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더러운 것을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옮겨가고자 하는 일정한 사회적 틀도 가지고 있었다.
원시적인 의미에서 ‘정화한다’는 동사는 ‘치유한다’는 것과 ‘환각에서 깨어난다’는 것을 동시에 의미한다. 순수함이 성 (聖)으로까지 승화되는 경우에는 보편적으로 건강과 풍요한 생명력을 갖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순수와 불순은 서로 상반되는 특징을 지닌다. 한쪽이 고귀하면 다른 쪽은 열등하고 한쪽이 숭배, 사랑, 감사의 성격을 띠면 다른 쪽은 혐오, 공포, 위협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한쪽은 적극적인 힘, 건강, 사회적인 우월, 전쟁에서의 용기, 노동에서의 큰 힘을 말한다면, 다른 쪽은 죽음과 파괴적인 힘, 병과 재해, 전염병, 범죄 등을 일으킨다. 생명의 힘과 죽음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전자는 대낮의 빛과 건조를 나타내고 후자는 어둠과 습기를 나타낸다. 동방과 정오는 태양을 상승시키고 열을 증대시키는 증가의 덕을 나타내고, 북방과 일몰은 천체의 생명력을 하강시키고 붕괴의 힘이 거주하는 곳이다. 오른손은 왕이 왕홀 (王笏)을 잡는 곳, 권위의 서약, 성실을 나타내고, 왼손은 기만을 나타내며 세상에 사멸을 가져온 이브도 아담의 왼쪽 갈비뼈로 만들어졌다.
순수와 불순, 성과 속은 이처럼 분명하지만 한편 그것은 영원불변하는 것이 아니고 불순이 순수로, 속이 성으로 변할 수도 있다. 마치 복상 (服喪) 기간이 끝나면 성별 (聖別) 의식을 거쳐 더러움으로부터 깨끗해져 새로운 힘을 획득하는 것과 같다. 산욕기의 여성은 더러움을 방지하기 위해 격리되지만 그녀의 입술에 닿으면 귀중한 힘을 얻는다고 하여 매일 아침 암소를 데려와 입맞춤을 하는 종족도 있다. 고대 로마에서는 월경 피를 과일 나무의 해충을 방지하기 위해 과수원에 뿌렸다고 한다. 이상의 예들은 불순이 힘을 획득한 것으로 순수와 불순은 가역적임을 나타낸다. _ 이은봉 (덕성여대 명예교수·철학)
마르치아 엘리아데 (Mircea Eliade)는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태어나 미국 시카고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종교학을 중심으로 문학, 철학 등 다방면에 걸쳐 관심을 가진 학자였다. 대학생이 되어 로마에 머물면서 『이탈리아 철학, 마르실리오 피치노로부터 조르다노 부르노까지』(Italian Philosophy, from Marsillo Ficino to Giordano Bruno)를 쓸 무렵 다스굽타 교수를 만나 그의 생애는 큰 전기를 맞게 된다. 서양의 고전적 전통을 이어받은 엘리아데는 다스굽타 교수에게 산스크리트어를 배우며 인도의 사상과 상상력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다. 1936년에 쓴 박사학위 논문 「요가: 인도신비주의 기원」은 파리와 부쿠레슈티에서 동시 출간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후 연금술과 우파니샤드, 불교를 통한 상징해석에 남다른 특색을 보이기 시작하며, 『잘목시스: 종교학 연구리뷰』(Zalmoxis: A Review of Religious Studies)를 출간하기도 한다.
1949년에는 그의 종교연구를 집대성한 『종교형태론』의 출간을 계기로 그의 학문적인 무대가 미국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1956년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한 「이니시에이션의 유행」 강의는 1958년에 『이니시에이션의 의례와 상징』(Rites and Symbols of Initiation), 『탄생과 재생의 신비』(The Mysteries of Birth and Rebirth)라 묶어 출간했다. 1982년에 『종교관념의 역사』(A History of Religious Ideas) 2권을 출간하고 그 보완작업을 하던 중 1986년에 사망했으며 『종교대백과사전』(Encyclopedia of Religions)은 1987년 그가 죽은 다음해에 출간되었다.

○ 엘리아데의 『성과 속』 : 우주적 종교와 비종교의 종교성
종교학자 엘리아데 (Mircea Eliade, 1907-1986)는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에서 태어났다. 그는 20대 초반에 인도에 가서 산스크리트를 공부하고 요가 수행을 하기도 했으며, 결국 요가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40년 이후에는 영국과 포르투갈의 루마니아 공사관에서 일하기도 했으며, 1945년 이후에 프랑스 파리에 정착하면서 본격적으로 학문적 저술 활동에 매진하게 되었다.
1956년에 미국 시카고로 건너가기 전까지 엘리아데의 중요한 학문적 저작은 대부분 파리 시절에 집필된 것들이다. 30대 후반에서 40대 후반에 이르는 이 시절에 엘리아데는 『종교형태론』, 『영원회귀의 신화』, 『샤머니즘』, 『이미지와 상징』, 『요가』, 『대장장이와 연금술사』에 이르기까지 일관성과 포괄성을 겸비한 일련의 저술 작업을 수행했다. 초기의 이러한 엄청난 성과에 비하면 미국에 건너간 이후에 그가 보여준 학문적 내용은 오히려 왜소해 보인다고도 말할 수 있다. 미국적인 학문이 엘리아데의 창조력을 감퇴시켰다고 볼 수도 있다.
여기에서 살펴볼 『성과 속』은 1957년에 독일에서 출간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이력을 갖는 책이다. 이 책이 출간된 배경은 이렇다. 1955년에 로마에서 열린 국제종교학회에서 엘리아데는 당시에 『로볼트 독일 백과사전』시리즈를 편집하고 있던 ‘엔리코 그라씨’를 만났다. 그리고 엘리아데는 1956년 1월까지 160페이지 분량의 『성과 속』을 쓰도록 요청받았다.
그러므로 『성과 속』은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엘리아데가 독일 출판사를 통해 그의 파리 시절 학문을 요약 정리한 소책자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성과 속』은 주로 『종교형태론』, 『영원회귀의 신화』, 『이미지와 상징』의 세 권이 결합되어 응축된 책에 가깝다. 그러나 이 책이 기존 저술의 단순 요약본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을 통해서 엘리아데는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 힘들었던 다소 난해한 자신의 중심 사상을 매우 자상하게 풀어 설명하고 있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성 (the sacred)과 속 (the profane)은 “세계 안에서의 두 가지 존재 방식”이다. 그리고 성은 속의 정반대이다. 성은 종교적인 인간의 삶의 방식이고, 속은 비종교적인 인간의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곧장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과연 성스럽게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여기에 대한 엘리아데의 답변은 ‘성스러운 공간’과 ‘성스러운 시간’을 설명하는 이 책의 맨 처음 두 장에 제시되어 있다.
비종교적인 인간에게 공간은 그저 아득히 펼쳐져 있는 균질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인 인간은 ‘공간의 단절’을 경험한다. 종교적인 인간은 위 (하늘)와 아래 (지하)를 향해 열려 있는 공간, 즉 저 너머의 세계로 이행하는 통로가 되는 성스러운 장소를 창조한다. 바로 이 장소가 ‘세계의 중심’이 다. 중심을 통해 인간은 다른 세계와 ‘소통’할 뿐만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 흡수한 성스러운 힘을 다른 모든 장소에 ‘전달’할 수도 있다. 중심이 잡혔을 때 세계는 비로소 ‘인간적인 세계’로 변형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과 만나는 신전이나 사원만이 중심인 것은 아니다. 내가 사는 국가, 도시, 집, 심지어는 인간의 신체조차도 다른 세계로의 출구 역할을 하기만 한다면 중심이 될 수 있다. 새로운 중심을 창조한다는 것은 ‘나의 세계’를 새로이 창조한다는 것이므로, 중심의 창조는 항상 신의 세계창조를 모방하며 이루어진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종교적인 인간은 축제나 의례에 의해 ‘시간의 단절’을 경험한다. 축제나 의례는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모범적인 행위를 인간이 모방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신을 모방함으로써 인간은 신과 동시대인이 되어 신화적 시간을 경험하게 될 뿐만 아니라, 마치 신이 태초에 시간을 창조했던 것처럼 자신을 위해 ‘새로운 시간’을 창조하게 된다. 녹슬고 낡은 시간을 새로이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축제와 의례에 의해 주기적으로 ‘성스러운 시간’으로의 탈출을 감행하여, 태초의 성스러운 힘의 샘물을 현재의 시간 속으로 길어 올리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신의 모방’ (imitatio dei)을 통해 어느 공간이든 어느 시간이든 성스러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역으로 말한다면, 의식적인 모방이든 무의식적인 모방이든 간에, ‘신화의 성스러움’과 연관되기만 한다면 시간과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모든 활동은 성스러운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신을 향해 열리는 순간 공간의 모든 사물은 ‘중심’이 되고 시간의 모든 순간은 ‘축제’가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제3장에서 엘리아데는 ‘우주적 종교’ (cosmic religion)를 이야기한다. 종교적인 인간은 우주를 신의 창조물로 여기기 때문에, 당연히 자연은 신성의 온갖 징후를 머금고 있다. 그러므로 ‘우주적 종교’는 자연이라는 상징을 해독하여 성스러움을 읽어내는 종교를 가리킨다.
원래 높고, 무한하고, 영원하고, 강력했던 ‘하늘의 신’은 우주를 창조한 후에 나머지 잔무를 ‘폭풍의 신’, ‘땅의 여신’, ‘식물의 신’에게 이양하고 뒤로 후퇴한다. 이렇게 신의 권력이 이동하는 현상은 주로 인간이 농경을 발견하게 되면서부터이다. 농경을 통해 인간은 우주창조의 ‘성스러움’보다는 농작물을 자라게 하는 구체적인 ‘자연현상’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농경을 통해서 폭풍, 땅, 식물의 성스러움을 새로이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엘리아데는 농경이 자연계의 성스러움을 재해석, 재발견하는 종교적인 행위였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세계의 비종교적인 인간은 하늘, 물, 식물, 태양, 달, 땅 등에 깃들인 우주적 성스러움을 더 이상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 우주가 더 이상 인간에게 말을 걸지 않는 것이다. 비종교적인 인간은 인간이 신적인 모델 없이 홀로 모든 것을 창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탈성화 (脫聖化)된 ‘비극적인 실존’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제4장에서 엘리아데는 ‘비종교인의 종교성’에 대해서 탐구한다. 엘리아데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심지어 가장 탈성화된 근대사회라 할지라도, 순수한 상태에서의 비종교적인 인간은 비교적 드문 현상이다. ‘비종교인’의 대다수는 비록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종교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엘리아데는 몇 가지 예를 든다. 근대인은 영화라는 ‘꿈의 공장’을 통해 여전히 신과 괴물의 투쟁 이야기를 다른 형태로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근대인은 독서를 통해 여전히 ‘현재의 시간으로부터 도피’를 행하고 있다. 그리고 정신분석도 환자가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자신의 과거와 싸워 이기고 귀환하는 입문식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근대인의 무의식은 꿈, 공상, 환영의 형태로 여전히 종교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바로 ‘비종교인의 종교성’을 은연중에 드러낸다는 것이다.
엘리아데에게 종교는 ‘신을 잃어버린 인간이 신을 찾도록 도와주는 지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엘리아데가 보기에 비종교적인 근대인은 그 지도마저 잃어버린 셈이다. 신을 두 번 잃어버린 것이다. 실제로 엘리아데는 근대의 어떤 현상 안에라도 숨어 있을 ‘종교적인 구조’를 재발견하기 위해 자기만의 해석학을 전개했던 학자였다. 그는 ‘비종교의 종교성’을 밝힘으로써 비종교조차도 ‘종교적 상징’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것이다. _ 서평 : 이창익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세종대 강사)

○ 독자의 평 1
여러분은 피라미드를 보고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권력 아니면 무상
세계 많은 나라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건축물과 무덤, 이것은 권력의 상징이나 권력에서 발전한 신성으로 이런 경우가 많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스핑크스 등으로 과거 왕들의 무덤, 그 속의 유물들은 신화된 인간의 무덤이고, 동시에 신이고자 했던 그들의 열망을 볼 수 있다. 그들은 황제에서 신의 아들, 아니 신이 되었다. 신은 절대권력과 동일시되는 개념이 된 것이다. 아니 신은 그 절대권력이란 개념도 넘어선 개념일 것이다. 이런 개념들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인간의 많은 문화적 유산은 절대적 권력과 종교에 의지해 현대로 이어지고 있다. 인간이 이룬 많은 것들이 사라져 버렸지만, 인간의 마음과 문화 속에서 그 절대적 권력은 살아 남아있는 것 같다.
우리들은 유신론자와 무신론자, 종교인과 비종교인 등으로 크게 구분한다. 종교적인 인간들과 그렇지 못한 인간들, 무신론자라고 해도, 그것이 하나의 믿음의 형태로 굳어져 버리면, 종교나 큰 차이가 없을 것 같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많은 터부를 경험한다. 왜 이런 금기가 생긴 것 일까? 흔히 정과 부정의 개념이 많이 통용되고 있다. 흔히 성스러운 것에서 정이, 속된 것에서 부정이 나온 것 같다. 금기와 장려, 우리는 삶을 살면서 많은 금기를 경험한다. 나고, 살아가고, 죽음으로 이러는 과정에서 우리 생활 속에 집의 대문, 방문턱, 관혼상제 등 인간의 많은 의례와 삶 속에서 금기는 존재한다. 나름대로 과학적인 이유를 가진 금기와 장려이지만, 종교 등으로 포장한다.
과학의 세기인 21세기, 과학은 진행형이다. 새로운 발견하고 알아가고 있다. 사실을 말하면 현상에 대한 해석과 풀이라고 해야 하나. 이제 인간은 미약하나마 생명의 신비와 우주의 신비를 풀어가는 과정에 돌입했다. 작은 나노의 세계와 거대한 은하의 세계로 눈을 돌리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점집이니, 무당이니 하는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의 지식체계가 과거에는 많은 부분이 종교에 의지하여 발전해 왔기에, 이 종교들의 영향에서 일순간 벗어날 수는 없을 것 같다. 인간은 모르는 존재이다. 우리 앞에 수 많은 의문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것을 다 풀 수도, 다 알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알고자 하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시작과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은 나누게 된 시기가 언제였을까? 집단적인 생활이 시작된 시기, 집단수렵과 농경으로 새로운 체계가 형성되고, 그 정당성이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생긴 개념이 아닐까. 역시 성스러운 것은 종교와 관련이. 종교에서 나타나는 성스러운 분노(두려운 힘)가 우리를 공포와 두려움에 경외로 나타나는 것 같다. 성스러운 것은 두려운 감정, 신비, 장엄함 등 인간의 모름에서 출발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자연의 이해는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많이 벌어지기에 우리는 무언가를 두려워하며, 의지하며 살아가기에 더 성스러움은 발전해 나온 것 같다. 거기에다 성스러움의 현현으로 사물은 전혀 다른 것으로 변화된다. 그러기에 더 성스러움을 숭배한지도 모르겠다.
– 성스러운 공간과 세계의 정화와 인간
인간을 종교적 인간(성스러운 인간)과 세속적인 인간으로 나눈다. 종교적 인간은 공간 내부의 단절과 균열을 경험한다. 이것은 공간의 비균질성,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에 더 큰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여 절대적 실제를 계시한다. 성스러운 공간의 경험은 고정점, 방향성, 진정한 의미에서 삶을 획득한다. 속된 경험은 공간이 균질적이고 중성적이며 참된 방향성 불가능, 공간의 균질성과 상대성을 나타낸다.
보통 교회는 성스러움과 속됨의 구분 나눔의 표상이고, 천상의 예루살렘을 모방한 것이다.속세에 있는 성스러운 곳, 집의 문지방과 문 역시 공간의 연속성의 단절이며 징표이다. 성스러운 것은 세계를 창조하는 것으로 십자가를 세우는 것은 땅을 정화,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아그니(불의 신)에게 바치는 불의 제단은 신의 세계와 교류로 소우주적 규모로 천지창조의 재현하는 것으로, 정화와 미지의 영역에 대한 우주화이다. 인간은 신들의 작품인 우주를 인간의 척도로 재현하고 모방하고 있다.
세계의 중심으로 나타나는 우주산, 성스러운 산과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세계 축으로 신전으로 표현된다. 인간의 세계의 중심에 가까이 살고자 하는 염원은 마을의 성전이나 예배소(우주적 상징)으로 구현된다. 즉 우리의 세계가 코스모스화된다. 집과 주거의 성화를 통해 공간을 코스모스화한다. 주거는 자신을 위해 건설한 우주이다. 새로운 시작, 새로운 삶이 낙성식 등으로 구현된다. 종교적인 건축은 원시적인 주거 구조 안에 현존하는 우주론적 상징을 넘겨받아 발전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원은 세계의 모방, 초월적인 모델의 지상에서의 재현이며 세계의 재성화이다.
– 성스러운 시간과 신화의 의미
기원의 시간, 우주창조의 시간(성스러운 시간의 원형)이 우리의 시작을 의미하기에 더 알고 싶어하는 것 같다. 시간은 성스러운 시간, 축제의 시간과 속된 시간, 일상적인 시간으로 구분한다. 종교적 인간은 의례의 도움을 받아 별 위험 없이 일상적 시간 지속에서 성스러운 시간으로 여행한다. 성스러운 시간은 무한히 회복할 수 있고 반복 가능하다. 축제에 참여는 성스러운 시간이 최초의 출현과 맞닥뜨리는 것이고, 성소에서의 예배는 속된 시간 지속의 단절이다. 축제는 신화적(종교적)사건의 기념제, 그 사건을 제현, 세계창조의 의미로 제의상의 작업이며 신의 모방이다. 축제에 참여하는 자는 신화적 사건과 동시대인이 되고, 영원한 현재로 생명의 성스러운 차원이 회복되며, 신의 창조물로서 인간 존재의 신성성을 체험한다.
“인간은 위로 열려 있는 장소, 즉 신들의 세계와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을 가지려고 한다. 세계의 중심에 가까이 살려고 하는 것은, 가능한 한 신들과 가까이 살려고 하는 것 같다.” 우리는 신들에게 가까이 접근하려는 인간의 욕망으로 신들과 동시대인이 되는 것이다. 태초에 일어난 신화적인 옛날, 기원의 시간에 대한 인간의 존재론적 강박관념, 성스러운 것에 대한 갈망인 동시에 존재에 대한 향수를 느낀다. 신화는 시간의 시초, 최초에 일어난 원초적인 사건으로서 성스러운 역사를 이야기(신비를 계시하는 것)하는 창조의 보고이다. 성스러운 것이야말로 실재중의 실재로 어떤 신화적 모델이 없이 행하는 것은 모두 속된 영역에 속한다.
성스러운 것이 모든 현실적 실존의 중추적 원인으로 신화는 모든 의례 및 인간의 본질적 활동에 대한 모범적인 모델을 확립하는 것이다. 세속적인 인간은 자신이 오직 인간의 역사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생각한다.
– 자연의 신성과 종교 그리고 인간의 실존
자연은 종교적 의미로 충만되고, 세계는 코스모스이다. 하늘의 신성성은 천상의 신들, 무한 초월한 것, 절대적이며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높은 지역, 아득하게 먼 것, 감추어진 신, 종교체험으로 상징된다. 그러나 농경으로 여러 신은 구체적이고 두드러진 힘의 상징으로 변모하였다. 보통 물은 존재 가능성의 원천, 죄를 씻어냄 정화와 재생을 세례는 대홍수의 반복, 인간과 신과 유사성을 회복하는 과정을 상징한다.
세계는 신들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현존한다. 신이 창조한 인간 역시 자신을 소우주로 인식한다. ‘나는 하늘이요, 그대는 땅이다’. 우주적 자연에너지와 정신의 통합은 신비적인 의례로 인간이 미리 운명 지어진 모범적 상황 속에 의식적으로 순응함으로써 스스로를 우주화한다. 그러나 비종교적 인간은 죽음을 탈신성화, 고정된 거주지는 어떤 실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므로 이의 파괴는 절대적 자유선택 한 것이다. 우주는 불투명하고 둔하고 말 못하는 존재로 우주적 가치 상실하게 된다.
인간의 일상생활 수확, 달력, 가입식, 결혼식, 장례식 등에서 상징적인 의미는 인간에게 각인되고, 그에 따라 의례에 따른다. 결혼은 모두 긴장과 위험을 내포하며 따라서 위기를 촉진시키기 때문에 통과의례에 의하여 수행되고, 죽음 역시 의례가 필요로 한다. “죽은 자는 그 자신의 사후의 운명을 경정하는 일정한 시련을 감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죽은 자의 공동체에 의해 승인되고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출생의 상징과 죽음의 상징이 나란히 나타나고, 죽음을 통과의례로 변형하여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 근대사회와 신성
“비종교적인 인간은 탄생, 결혼, 죽음은 오로지 개인과 그 가족에게만 관련된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또 모든 통과는 그 의례적 성격을 상실해 버렸다.” 로 변하고 있다. 하나의 진보는 종교적 인간의 상황과 그 정신적 우주를 이해하는 것이다. 비종교적 인간은 탈신성화의 산물이며, 세속적인 인간은 인간 실존의 탈신성화 과정의 결과이다. 그러나 근대인이라고 해도 위장된 신화와 타락한 의례를 많이 가지고 있기에, 인간적 조건과 공존을 완전히 폐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속적인 인간은 종교적 인간의 후예이며, 그는 자신의 역사를 지워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창조가 축적과 변용 그리고 모방이지만, 인간은 나아가고 있다.
– 이 책이 주는 의미
그렇게 두껍지 않은 책에 여러 종교의 예를 자세하게 다룰 수는 없지만, 그 의미를 잘 보여준다. 종교학이라는 학문에서 종교는 주로 그 기능적인 정의 “한 집단의 사람들이 인간 삶의 궁극적인 문제들과 싸우는 수단이 되는 믿음과 관습체계- J. M. 잉그”,
종교의 시작과 왜 종교가 생겼을까? 지배를 위한 수단, 지배자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이중적 구조(성과 속)를 형성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종교현상의 특수구조로 종교의 본질 이해, 그들 현상의 역사적 연관으로 종교 역사 해명과 서설한다. 낯선 신앙은 기존 종교관행과 비교, 전통적 종교에 대한 철학적 비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종교사의 목표는 종교적 인간의 행동과 정신세계를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일이다. “우리가 어떤 낯선 정신세계를 이해하고자 할 때에는 그 내부에, 바로 그 중심에 몸을 던지고, 거기서부터 그것이 갖고 있는 모든 가치를 향해 들어가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한 사회를 ‘야만적’이라고 판별함에 있어 우리는 가장 야만적인 행위, 가장 그릇된 행위에 있어서조차 초인간적, 신적인 모델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방법론도 잘 안내해준다.
종교로 본 고대인, 종교는 항상 옳은 방향으로만 가지는 않는다. 고대인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자료가 많이 부족하고, 이미 사라져 버렸다. 과거는 종교의 그늘 아래에 살아왔었다. 인간은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인가? 우리는 항상 현재로만 살고 있으나, 과거라는 그 기억의 저장고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과거의 산물이기에, 은연중 문화나 풍속에 지배를 받고 있다. 하지만, 원시인의 종교성과의 연결은 다소 무리같이 보이다. 그 당시 종교라고 할만한 믿음과 지능이 있었는지.
우리나라 문화에서 태어남과 백일잔치, 돌잔치, 각종 시험과 입시, 축하와 애도 등 대학교, 군대에 신입생이나 신참을 환영하는 모임, 집단이데올로기와 개인에서 그 성스러움과 속됨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러나 현재 세계는 점점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세계화의 영향으로 민속 등은 사라져 가고, 물질적인 문명과 거대 종교의 우산아래 머물러 살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의 의문의 동물이다. 이 수많은 의문들은 다 해결할 수 없다. 그러기에 항상 진행형이다. 종교는 인간의 부족한 마음을 채워주리, 그러나 지배하는 종교는 사라지고 사랑의 종교로 변할 것을 희망한다.
엘리아테는 <요가>를 통해서 처음 만났다. 한창 인도에 관심이 많은 때, 그 알고 싶음의 욕구로 여러 책을 읽어보았지만, 참고할만한 책은 적었다. 그러다 발견한 보물 같은 책, 요가의 다양한 면 잘 보여주었다. 그 때문인지 그의 저작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다른 책들, 문화와 종교에서의 상징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잘 정리하여 종교학이나 민속학의 중요한 문헌인 것 같다. 성과 속 같은 책들을 통해 오늘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우리 자신과 종교와 민속이라는 것의 의미를 한번 더 생각해보게 해준다.

○ 독자의 평 2
무게 있는 주제인 ‘종교’에 대한 책 두 권을 읽으면서 가지게 된 생각은 인간에게 있어서 거의 인류의 역사와 같은 크기의 시간을 종교와 같이 하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오래된 숙제를 접하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너무도 당연한 귀결일지 모르겠으나, “아직도…” 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는 것 같다.
엘리아데의 ‘성과 속’은 우선 저자의 종교에 대한 지식의 넓이와 깊이에 대한 경외감을 느낄 수 있었다. ‘종교적 인간’에게 있어서의 공간과 시간의 의미, 동양학의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저자는 ‘세계의 중심’이라는 성스러운 공간은 인간에게 고정점을 부여하고, 그리하여 혼돈된 균질성 가운데서 방향성을 획득하며 ‘세계를 발견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삶을 획득하게 된다고 하며, 반면에 속된 공간은 고정점이 없고 따라서 그 어떤 방향성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종교적 인간이란 가능한 한 세계의 중심에 가까이 살고자 하는 염원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미개척지를 개간할 때나 ‘다른’ 인간이 살고 있는 영역을 점령할 때나 의례적인 점령은 항상 우주 창조를 반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모습은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개척 당시까지 이어져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지역에 정주하는 것은 그 지역을 정화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며, 따라서 어떤 지역에 정착하고 주거를 건립한다는 것은 항상 전체 공동체와 개인 양자에게 중대한 결정을 요구한다. 이는 일찌감치 농경문화를 통해 한반도에 정착하게 된 우리 선조의 토속신앙의 모습―예를 들면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같은 장승이나 솟대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으로 그래서인지 친숙함을 느낄 수 있었다.
종교적 인간에게는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 역시 균질적이거나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한편에는 성스러운 시간, 축제의 시간의 기간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속된 시간, 즉 종교적인 의미가 없는 행위가 자리 잡고 있는 일상적인 시간 지속이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세계 어느 곳에서나―특히 원시성이 살아있는 곳은 특별히―축제의 모습을 우린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종교적 인간은 성스러운 시간의 최초의 출현과 맞닥뜨리는 것이다. 또한 고대 문화의 종교적 인간에게 있어서 세계는 매년 갱신된다. 즉 세계는 새로운 해가 될 때마다 원초의 신성성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현재에도 우리는 새로운 해가 옴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마치 고해성사를 통해 정화된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에게 친숙한 의미 하나가 더 있다. 인간은 그 자신이 창조한 집이나 우주 속에 거주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자기 신체 속에 거주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는 우리 몸을 우주에 비유하는 한의학을 통해 우리는 자주 들어왔던 내용이지만, 서구에서는 생소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이 거주하는 지역, 사원, 집, 신체 이들은 모두 코스모스들이다. 저자는 비종교적인 현대인들이 그의 신체, 집, 우주에 부여하고 있는 가치를 잃어버렸으며, 이들에게 우주는 불투명하고 둔하고 말 못하는 존재로 전락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비종교적 인간 대부분은 비록 스스로 의식하지는 못하더라도 여전히 종교적으로 행동하고 있음을 또한 저자는 언급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들 대다수는 종교적 행동, 신학과 신화로부터 해방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엘리아데가 종교를 철학적으로 넓은 범위에서 접근했다고 한다면, 리처드 도킨스의 경우 철저한 과학자로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의 종교를 매우 비판적인 시각에서 들여다보고 있다. 또한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은 엘리아데의 ‘성과 속’에서의 ‘종교’와는 좀 다른 관점을 취하고 있다. 즉 세이건의 표현한 바와 같이 “신이라는 말이 우주를 지배하는 물리법칙들을 의미한다면, 그런 의미의 신은 분명히 존재한다.”와 같은 코스모스의 의미를 포함한 포괄적인 의미의 종교를 엘리아데는 사용한 반면, 도킨스는 인격신을 가진 종교―특히 자신에게 익숙한 기독교―만을 한정해서 사용한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그의 주장은 매우 명쾌하다.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신―또는 종교―의 이름으로 수많은 죄악이 저질러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윈주의의 충실한 후계자인 저자는 ‘자연선택’의 개념을 이용하여 기독교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자연선택은 모든 변이, 가장 사소한 변이까지 찾아내기 위해 매일 매시간 세계를 샅샅이 훑는다.”, “나쁜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은 보존하고 추가하며, 언제 어디에서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없이 눈에 띄지 않게 유기적 존재의 개선에 힘쓴다.”와 같은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자연선택은 시간과 에너지를 생존과 번식에 투자하는 냉혹한 실용주의라 말하고 있다.
종교의 폭력성은 군사적 정복을 통하여 신앙을 전파한다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통해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개척에 선교사가 빠지지 않았음을 우린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또한 더 나아가 이들 종교의 배타성을 지적하고 있다. 달리 얘기하면 저자가 표현한 바와 같이 종교는 분열을 조장하는 힘이며, 이 점이 종교에 가해지는 주된 비난 중의 하나다. 같은 신―정확히 같은 신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을 믿으며 오랜 기간 피를 부른 아일랜드의 경우를 들추지 않더라도 말이다. 필자는 이 배타성이야말로 우리가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할 가장 중요한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왜 꼭 나의 신이어야만 하는가? 만약 신이 있다면―불가피하게 가정을 쓴다―인류가 ‘함께’ 하는 모습을 바라지 않을까?
저자는 종교의 폐해에 대한 수많은 사례를 들면서 특히 아이들 교육에 대한 것을 강하게 주장한다. 즉 부모의 종교에 의해 아이들은 이미 꼬리표가 붙게 되고 이로 인해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안 해도 될 고민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모는 아이들의 종교 문제에 있어서 어느 정도 성장한 이후에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남아 있는 것 같다. 즉 종교는 일상생활과 직결된 환경이다. 따라서 부모가 교회에 갈 때 아이들은 PC방에 가 있어야 하는가와 같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과학을 통해 복잡한 종교의 영역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까? 저자는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문제투성이의 종교를 지성을 대표하는 과학을 통해 가능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중차대한 문제를 우리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적인 시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신의 존재를 인간의 이성―또는 지성―으로 볼 수 있느냐의 문제에 대해 우리는 좀 더 많은 생각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연장선상에서 성서의 문제도 같이 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자신의 틀 속에서 외부세계를 보고 있고 그것이 다 인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과학, 이 둘 사이는 과연 물과 기름일까? 지난 6월 열린토론에 임하면서 보게 된 영화 ‘콘택트’가 떠오른다. 주인공인 과학자 앨리 애로위의 신의 존재를 증명해보라는 말에 파머 조스 신부는 “아버지를 사랑했었나요? 증명 해봐요.”라고 답한다. 이들의 첫 만남은 이러했지만, 영화의 종반부에는 예전에 파머 조스 신부에게 신을 부정하기 위해 인용했던 오컴의 면도날―확실치 않은 두 가지 명제의 경우 가장 단순한 사실이 진리일 가능성이 더 크다―을 우연히 공청위원이 역으로 인용하면서 아무 근거도 증거도 없는 이 사건의 경우 자기 최면에 걸린 앨리의 거짓된 경험담으로 몰리고, 또한 이 모든 상황이 예전에 파머 조스 신부가 신의 존재에 대해 주장할 때 “입증할 수는 없지만 진실”이라고 하자 “명백한 증거만이 진실이다”라고 주장했었던 그녀의 말과 대비되는 장면을 통해 그 어떤 가능성을 보고 싶다. 종교의 인정과 인격신의 인정은 별개로 하더라도…
○ 독자의 평 3
[1부] 성스러운 공간과 세계의 정화
– 성스러움은 공간의 균질성을 파괴하고 하나의 고정점을 제시해 준다.
– 사람이 주거를 선택한다는 것은 세계의 창조를 시도하는 것. 거주하는 것은 신들의 모범적인 창조인 우주 창조를 모방함으로써 자신을 위해 건설한 우주
– 성스러운 공간의 계시는 인간에게 고정점을 부여하고, 그리하여 혼돈된 균질성 가운데서 방향성을 획득하며 ‘세계를 발견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삶을 획득하게 한다.
-> 속된 공간 중에도 비균질성을 상기하는 공간이 있다. 첫사랑의 장소, 고향, 젊은 시절 처음 방문한 외국 도시가 그것이다. 그곳은 그 사람의 개인적 우주의 ‘성지’이다.
– 미개척지를 개간할 때나 ‘다른 인간’이 살고 있는 영역을 점령하여 차지할 때나 의례적인 점령은 항상 우주 창조를 반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고대 사회에서는 ‘우리의 세계’가 아닌 것은 결코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 ‘낡은 것은 사라지고, 보라, 새로운 것이 나타났다.’
1) 성스러운 장소는 공간의 균질성의 단절을 가져온다.
2) 이 단절은 하나의 우주 영역에서 다른 우주 영역으로 이행할 수 있게 하는 출구로 상징된다.
3) 천상과의 교류는 기둥, 사다리, 산, 나무, 넝쿨 등 여러 형상으로 상징되는데, 그것은 모두 우주 축과 관계한다.
4) 이 우주축의 주의에 ‘세계’가 놓여있다.
따라서, 이 축은 ‘중앙에’, 즉 ‘대지의 배꼽’에 있으며 그것은 세계의 중심이다.
[2부] 성스러운 시간과 신화
– 성스러운 시간은 순환적, 가역적, 회복 가능한 시간이라는 역설적인 면으로 나타나고 의례를 통하여 주기적으로 회귀하는 일종의 신화적인 영원의 현존을 나타낸다.
– 기원의 시간으로의 회귀를 통한 재생
1) 우주 창조를 해마다 반복함으로써 시간은 재생한다. 즉 시간은 세계가 처음 등장한 최초의 때와 일치하기 때문에 성스러운 시간으로 새롭게 시작한다.
2) 인간은 세계의 종말과 재창조에 의례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최초의 때에 있게 되었다. 그는 새롭게 태어나 그 탄생의 순간과 마찬가지로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생명력의 저장고와 함께 다시 생존을 시작하는 것이다.
– 신화의 이야기는 건축의 여러 단계를 위한 모범, 성교에 대한 터부 등의 모범을 제공해 준다.
– 고대 및 고대 동방의 여러 종교에서 형성된 ‘영원 회귀’
-> 그리스도교는 신이 육화되어, 즉 역사적으로 제약된 인간 실존을 받아들인 이래 역사는 성화될 가능성을 획득하였다. 이는 역사 자체가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현존의 새로운 차원이 된다는 것을 드러낸다. 역사는 마치 신화적 관점이나 원시 및 고대 종교의 여러 관점에서 그런 것과 같이 다시 한 번 성스러운 역사가 된다.
[3부] 자연의 신성과 우주적 종교
– 세계는 카오스가 아니라 코스모스이다. 따라서 세계는 신들의 작품인 피조물로 자신을 드러낸다. 이 신의 작품은 항상 어떤 종류의 투명성을 지니고 있는데, 즉 스스로 성스러운 것의 여러 양상을 계시한다.
-> 종교적 인간에게 초자연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있고, 자연은 항상 그것을 초월하는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있다.
– 성스러운 돌이 존경받는 이유: 돌 그 자체 X, 돌의 존재 양식 안에 나타난 신성성 O
– 천공의 구조를 갖는 최고신, 최고 존재자는 신앙 숭배로부터 점차 사라져 간다. 이런 신은 마치 창조라는 거대한 일에 그 힘을 전부 사용해 버린 것과 같이 우주와 생명과 인간을 창조해서 일종의 권태를 느낀 것으로 이야기된다.
– 물: 가능성의 우주적인 총체
1) 부상(浮上)은 우주 창조의 형성 행위를 재현하고, 수몰은 형태의 해체를 의미한다.
2) 물은 분해하고 형태를 파괴하고 ‘죄를 씻어냄’과 동시에 정화하고 재생한다. 물의 운명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 양식을 초월할 수 없고, 어떤 형태도 취할 수 없기 때문에 창조에 선행해서 그것을 흡수한다. 물은 항상 가능적, 배아적, 잠재적 상태를 넘어설 수 없다. 형태가 있는 모든 것은 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킴으로써 물 위에 자신을 드러낸다
– 성스러운 나무, 성스러운 식물은 구체적인 식물 종에는 나타나지 않는 하나의 구조를 계시한다. 어떤 식물에 주목하여 재배하는 것은 그 종교적 가치 때문이다. 몇몇 저술가에 따르면 오늘날 재배되고 있는 모든 식물은 원래 성스러운 식물로 간주되었다고 한다.
– 달
1) 달의 여러 위상들을 통해서 인간은 우주 가운데서 자신의 존재 양식과 그들 사후의 존속, 재생에 대한 희망을 알았다.
2) 죽음이란 끝이 아니라 거기에는 항상 새로운 탄생이 뒤따른다는 사실
<-> 해: 불변, 자율성과 힘, 왕권, 지혜의 종교 가치가 나타난다.
[4부] 인간의 실존과 성화된 생명
– 인간은 신의 창조물 가운데 한 부분을 이룬다. 인간은 우주 가운데서 인식하는 신성성을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발견한다. 그 결과 그의 생명은 우주적 생명과 일치하게 된다. 신의 작품으로써 우주는 인간 존재의 모범적인 현상이 된다.
– 등가적인 여러 형상들, ‘우주, 집, 인간의 신체’는 각각 다른 세계로의 이행을 가능케 하는 위를 향한 출구를 갖고 있거나 가질 능력이 있다.
– 인간이 정착한 모든 고정된 주거지는 철학적으로 보면 어떤 실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 지붕의 파괴라는 이미지는 인간이 모든 상황을 폐기하고 세계 안에 거주하려고 하는 대신에 절대적 자유를 선택하는 것인데, 인도의 사상에서 그것은 모든 제약된 세계의 절멸을 함축하고 있다.
– 통과 의례
1) 사람은 ‘자연적’ 인간을 넘어서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을 폐기시킬 때에 비로소 완전한 인간이 된다. 왜냐하면 가입식의 본질은 무엇보다도 역설적이고 초자연적인, 죽음과 부활 혹은 재생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2) 시련과 상징적인 죽음 및 부활을 동반하는 가입식 의례는 신들, 문화 영웅들, 혹은 신화적 선조들이 창조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초인간적인 기원을 가지며, 신가입자는 그것을 수행함으로써 초인간적이고 신적인 행위를 모방하게 한다.
– 여성의 비밀결사는 언제나 출생과 출산력의 신비와 관련되어 있다. 분만의 신비, 자기가 생명의 지평에서의 창조자라는 여성의 발견은 남성적 세계의 언어로는 번역할 수 없는 종교적 체험을 형성한다.
– 종교적 인간은 그가 처해 있는 역사적 맥락이 어떠하든지 간에 항상 이 세계를 초월하면서도 이 세계 안에서 자신을 현현하는, 그럼으로써 이 세계를 성화하고 또 그것을 실재적으로 만드는 성스러운 것, 절대적 실재가 있다고 항상 믿는다.
– 생존은 가입식에 기초를 두고 있다. 즉 인간의 생존은 그것이 완성되는 정도만큼, 그 자체가 하나의 가입식을 이룬다. 삶 자체도 하나의 통과의례인 것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