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성서의 실존론적 이해
루돌프 불트만 / 대한기독교서회 / 1999.9.30
현대에 들어 그리스도교가 점점 더 힘을 잃어가게 된 현상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일부에서는 이에 대한 원인을 그리스도교 교회의 도덕적인 부패와 사회참여 의식의 결여에서 찾고 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여기에는 더 뿌리 깊은 이유가 있는 듯하다. 우리의 시대에는 ‘종교’라는 것 자체가 애초부터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신화적인 이야기로 들려지게 되었다. 기술문명의 발달이 우리의 실질적인 필요를 채워주고 있으며 정신치료가 전문화된 상황 속에서 ‘종교’는 사람들에게 허구로 가득 찬 의미 없는 현상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가 시작된 이후로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이다. 이와 같은 맥락을 도외시한 채 그리스도교가 단순히 외면적으로 바뀐다고 하여서 종교에 대한 비판적인 경향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단순히 도덕적 성숙을 회복하는 것 이상의 요청이 주어져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현대인들의 삶과 사회구조와 학문세계 속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의의를 설명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 신앙이 단순히 이천 년 전에 유효하였던 고대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유의미한 진리를 던져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내어야 한다. 20세기 신학의 논의들은 바로 이러한 고민 속에서 등장하였다. 신학자들은 이 고민의 과정에서 성서를 재해석하고 현대의 철학 사상들과 대결하며 이 시대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지닐 수 있는 의의에 대해 여러 가지 답을 제시하고 있다.
○ 목차
Ⅰ부 ‘신약성서의 선언을 비신화화하는 과제’
Ⅱ부 ‘비신화화의 개요’
○ 저자소개 : 루돌프 볼트만 (Rudolf Bultmann, 1884 ~ 1976)
20세기 신학의 지도적 신학자이며 특히 신약학계의 석학인 R.불트만은 1884년 독일 비펠스테데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튀밍겐, 베를린, 마르부르크 등에서 수학했다.
1912년 신약학 교수 자격을 마르부르크에서 얻고 그곳에서 1921년부터 1951년까지 은퇴할 때까지 신약을 강의했다.
H.궁켈, 율리허, 하르낙 등에 사사하고 특히 W.헤르만에게서 큰 영향을 받고 M.하이데거의 실존 철학을 거쳤으며 고전 문헌 학자인 P.프리들랜더와 교류하여 문헌학에도 상당한 조예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어떤 의미에서 그와 쌍벽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 바르트와는 바르트가 편집인으로 있었던 “변증법적 신학”에 가담하면서 관련을 맺었다.
1921년에 발표된 “공관복음서 전승사”와 1938년의 “요한복음서”로 신약학자로서 주목을 받게 된 그는 신약의 세계상을 현대인들에게 이해시키려는 시도로서 신학계와 철학계의 찬반 양론의 논쟁을 일으켰다.
저서로 ‘예수'(1926), ‘신약성서의 신학'(3권, 1948∼1953), ‘공관복음 전승사’, ‘기독교 초대교회 형성사’ 등이 있다.
– 역자 : 유동식
1922년 황해도 남천 출생, 감리교신학대학, 보스턴대학교 신학석사, 동경대학교 문학박사 ,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수 정년 은퇴, 저서로 [도와 로고스],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 등 다수
○ 요약
‘성서의 실존론적 이해’는 20세기 신학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루돌프 불트만 (Rudolf Bultmann)의 사상을 집약적으로 담고 있는 논문이다. 불트만은 이 논문을 통해 자신의 ‘비신화화 (demythologizing)’이론과 ‘실존론적 성서 해석’의 의미를 개략적으로 소개하며, 이를 바탕으로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현대적인 언어로 풀어내고자 한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죄사함, 부활 등이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신화가 된 오늘날의 상황 속에서, 이러한 신약성서의 증언들을 현대 실존주의 철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그리스도교의 의의를 설명해 내는 것이 불트만 신학이 목표로 하는 바이다.
이 논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Ⅰ부 ‘신약성서의 선언을 비신화화하는 과제’는 우선 신약성서 해석에서 발생하는 문제 상황들을 지적함으로써 ‘비신화화’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에 근거하여 Ⅱ부 ‘비신화화의 개요’에서는 실존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신약성서가 이야기하는 인간 이해를 요약적으로 재해석한다. 특별히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지니는 의의가 강조되고 있다.
Ⅰ부 ‘신약성서의 선언을 비신화화하는 과제’
이 글은 ‘성서의 실존론적 이해’ 가운데 Ⅰ부 ‘신약성서의 선언을 비신화화하는 과제’의 내용을 요약적으로 해설한 뒤 비판적으로 고찰해보고자 한다. 불트만의 이 논문은 분량으로 보았을 때 매우 짧지만 그 속에 불트만 사상의 핵심이 되는 내용들이 매우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따라서 논문 전체를 개괄하며 해설하는 것보다는 세부적으로 각각의 내용을 살펴보는 것이 더 유익할 것이라고 판단이 되었다. 특별히 Ⅰ부에서 제시되는 ‘비신화화’ 이론은 단순히 성서 해석뿐만 아니라 신화 해석을 비롯하여 철학적 해석학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보다 집중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으로 여겨졌다. 이 글에서 다루지 못한 Ⅱ부 ‘비신화화의 개요’의 내용은 후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 신약성서의 신화들은 현대인들에게 무의미한가?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이천년 전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신화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신약성서는 이 우주를 천당, 지상, 지옥으로 구성되어 있는 삼층의 구조로 이해하고 있으며 천사나 마귀 같은 초자연적 존재들의 활동을 이야기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죄를 사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와 성찬으로 예수와 결합되어 구원에 참여한다는 주장 역시 자연과학적인 진술이 아니라 신화적인 언어로 이야기된다. 신약성서가 전제하고 있는 이러한 신화적 세계관은 현대인들이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수용하는 데 있어 장애가 된다. 과학기술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더 이상 이러한 세계관을 공유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과학기술 문명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신약성서에 기록된 세계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하기는 무리이다. 삼층 우주론이나 초자연적인 세력들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받아들여질 수가 없다. 불트만은 이러한 현대적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것을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교는 신약성서로부터 신화적 세계관을 벗겨내고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정한 복음의 본질을 현대적인 언어로 재서술할 필요가 있다. 신약성서가 진술하는 신화적인 외피를 해석하여 복음의 본질을 발견하고, 이것을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내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비신화화’ 혹은 ‘탈신화화’라고 불리는 작업이다.
“이것은 모두 신화론적인 언어이며 각 주제의 기원은 당시 유대적 묵시 문학의 신화론과 영지주의 (Gnosticism)의 구원 신화 안에서 쉽사리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한, ‘케리그마’ (kerygma, 복음의 내용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신 인간 구원의 행위에 대한 설교)는 현대인에게 믿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이러한 신화적 세계관이 낡은 세대에 속한 옛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날 복음을 전할 때에 신자들에게 복음의 메시지와 더불어 그 복음의 배경이 되고 있는 신화적 세계관까지도 믿고 받아들일 것을 기대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 직면하고 있다. 만일 기대할 수 없는 것이라면, 신약성서는 신화적 배경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어떤 독립된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만일 그러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면 신학은 마땅히 ‘케리그마’를 그 신화적 윤곽으로부터 벗겨내는 것 즉 ‘비신화화’ (demythologizing)하는 것을 그 과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대인들에게 신약성서의 세계관을 더 이상 제시할 수 없는 이유로 불트만은 두 가지를 든다. 첫째로 신약성서가 전제하는 세계관은 그리스도교만의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유대교 묵시 문학과 영지주의를 비롯한 다른 여러 신화 속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것들이다. 이것은 이미 신약성서가 당시 근동의 여러 종교들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그들과 공통된 신화적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신화적 세계관은 배척하면서 성서의 세계관만은 참되다고 받아들이는 이중적인 잣대를 지닐 수가 없다.
둘째로 세계관이라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선택에 의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중요하다. 과학기술이 발달된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는 과학기술에 의존한 세계관이 이미 주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 개인에게 자신의 세계관을 포기하고 신약성서의 세계관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것은 개인으로 하여금 자기 분열증적인 생활을 하라고 요구하는 모습밖에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우리가 우리의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마땅히 부정해야 할 세계상을 우리의 신앙과 종교 생활에 있어서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 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일상을 살아갈 때는 과학적 세계관에 근거를 두면서 신앙생활에서는 신화적 세계관을 수용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취할 수가 없다. 이러한 모순에도 불구하고 신화적 세계관을 현대에 강요한다면,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교 신앙을 한 인간의 조작이라는 수준으로 저하시키는 일” 처럼 여겨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그리스도교에 있어 필요한 일은 신약성서의 신화적 세계관을 벗겨내고 그 속에서 진리를 찾아내는 작업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약성서가 진리를 담고 있는 책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 진리란 결코 문자적인 진리, 곧 신약성서에 쓰인 모든 문자적인 내용들이 참이라는 의미에서의 진리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난 신화적인 언어 뒤편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해 선포되고 있는 진정한 복음의 의미를 읽어내는 일이다. 불트만은 성서의 진리가 문자적인 차원에서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문자 뒤편에서 성서의 참된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지(人智)와 자연계의 지배가 과학과 기술을 통하여 이와 같은 정도로 발전된 오늘날, 아무도 신약성서의 세계관을 진지하게 보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뿐더러 사실 아무도 고수하고 있지 않다. 예를 들면 사도신경이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는 3층 구조의 우주를 우리가 믿지 않는 오늘날, 사도신경에서 지옥에 ‘내려갔다’든가 하늘에 ‘올라갔다’든가 하는 말에 우리는 어떠한 의미를 결부시킬 수 있을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을 읽는 데 유일한 정직한 길은 신화론적 윤곽을 그 안에 들어 있는 진리 – 그 안에 진리가 들어 있다고 가정하고 – 로부터 벗겨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학이 취급해야 할 문제이다. 스스로 사고할 수 잇는 나이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하늘 위에 살고 계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체로 재래적인 의미의 하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발 밑 땅 속에 들어 있는 신화적 지옥이란 또한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인자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재림한다든가 신자는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만난다든가 하는 것을 대망할 수는 없다 (데살로니가전서 4:15 이하).”
– 신약성서 해석에서의 문제: 자연과학과 현대인의 자기 이해
불트만은 더 이상 현대세계 속에 신약성서의 세계관이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여러 가지 예들을 통해 설명한다. 자연법칙에 대한 이해가 발달한 오늘날에는 별들이 단순한 천체에 불과할 뿐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마찬가지로 질병 역시도 인과관계를 통해 설명될 수 있으며, 악마적인 존재가 일으킨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재림도 마찬가지로 신약성서가 기대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연과학의 발전은 성서의 신화적인 내용들을 믿을 수 없게 하였다.
설령 성서의 내용들을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해 보고자 하는 시도가 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이것들은 도리어 성서가 말하는 ‘기적’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단순한 인과적이고 법칙적인 결과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게 된다. 가령 누군가는 예수의 치유활동이 신화가 아니라 플라시보 효과를 통해 일어난 실제 사건이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주장은 예수의 신성을 뒷받침해 주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그의 기적을 평범한 현상들 중 하나로 만들어버린다. 불트만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리고 기적의 역사성을 신경착란이라든가 최면술의 영향이라든가 하는 것으로써 변호하려는 것은 오히려 기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 불과하다. 만일 우리가 아직도 알지 못할 신비롭고 기이한 것에 귀인시킬 수밖에 없는 어떤 육체적 또는 심리학적 현상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 원인을 과학적으로 해명하도록 노력할 것뿐이다. 지금은 심령학 (occultism)까지도 과학의 하나로서 자임(自任)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서를 믿지 못하게 하는 더 중요한 도전은 자연과학이 아니라 현대인의 자기 이해에서부터 제기된다. 불트만은 당시 철학에서 퍼져 있던 ‘자연주의’와 ‘관념론’의 인간 이해를 신약성서의 인간 이해와 비교한다. 자연주의와 관념론은 서로 상반되는 인간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둘 중 어느 쪽도 신약성서의 인간 이해와는 맞지 않는다. 따라서 현대인이 이 둘 중 하나의 관점을 취하고 있다면 그가 신약성서를 납득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자연주의와 관념론 모두 인간을 하나의 통일적 존재로 이해한다. 자연주의는 인간을 순수하게 물질적이고 자연적인 법칙에 근거하여 활동하는 존재로 주장하지만, 반대로 관념론은 인간의 본질이 물질과는 다른 순수한 정신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 이해들 속에 초자연적인 힘이나 영 (靈)의 개념이 개입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먼저 자연주의자라면 오직 물질세계와 자연법칙의 존재만을 인정하므로 당연히 초자연적 대상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 또한 관념론은 인간의 정신이 근본적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때문에 이것이 다른 종류의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인도된다는 식의 주장은 거부한다. 따라서 이러한 입장들을 취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성령’이나 ‘성례전’과 같은 교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된다. 성령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활동한다는 이야기나, 성례전에서의 빵이 영적인 힘을 가진다는 교리 모두가 믿기 어렵다.
아울러 인간의 범죄로 인해 죽음이 세상 속에 들어왔다는 것 역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이다. 자연주의자에게는 죽음이란 순전히 자연적 과정일 뿐이다. 그들에게 죽음은 순전히 자연적 법칙의 과정으로 물질계 차원에서 설명이 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관념론 역시 죄에 대한 형벌로 죽음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죄는 개인의 인격적 책임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것이 모든 인간에게 유전된다는 식의 교리는 비이성적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대속과 부활이라는 교리 역시 이해될 수가 없다. 신적 존재가 인간이 되고 죽임을 당함으로서 죄를 대속해야 하며, 또 그가 부활한 뒤에 우리는 성례전을 통해 그의 힘에 참여한다는 주장은 너무나도 많은 신화적인 생각들을 전제하고 있다. 애초부터 생물학적 죽음이 ‘죄’의 문제와 결부되고 있다는 점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 뿐더러, 신적 존재의 죽음과 부활이 도대체 우리 자신과 어떻게 관련을 맺을 수 있는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또한 영원 전부터 존재하였다는 그리스도가 어차피 다시 부활할 것을 알고서도 죽었다면, 그 죽음이라는 것이 무슨 진정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인지도 막연하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인간이 하늘로 옮겨져 빛나는 옷과 영원한 몸을 얻는다는 것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모든 것들을 당연시하고 받아들이기에는 현대인의 사고방식이 성서와 너무나도 다르다.
Ⅱ부 ‘비신화화의 개요’ 비신화화의 필요성: 신화의 본질과 신약성서 자체로부터의 요청
신약성서에서 신화적인 부분들은 삭제하고 비신화적인 나머지 부분만 남겨 두는 방법으로는 그리스도교 복음의 진리를 구해내었다고 할 수가 없다. 신약성서의 각 내용들은 결국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기 때문에 단순히 취사선택적으로 일부를 뽑아내어 믿는 방식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신화적인 부분을 삭제한다고 할 때 어떠한 기준을 가지고 신화와 비신화를 구분해야 하는지도 그리 분명하지 않은 문제이다. 불트만은 이러한 점 때문에 우리가 “결국 신화적 세계관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든가 또는 전적으로 이를 배제하든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이야기한다.
불트만은 취사선택적인 성서이해에 반대하여 ‘비신화화’의 방법을 내놓는다. 비신화화는 성서에 있는 신화 전반을 벗겨낸다. 그러나 단순히 이것을 허구적으로 취급하여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신화들을 오늘날에 맞도록 새롭게 해석해 내는 작업이다. 이를 통해 불트만은 신화적 언어 뒤편에 있는 진정한 복음의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다. 그는 이러한 과제가 정당하다는 사실을 신화 일반의 본질과 신약성서 자체로부터 설명하고 있다.
불트만은 우선 신화 자체가 지닌 본질에서부터 비신화화의 필요성을 이야기한다. 신화란 근대 과학이 추구하는 것과 같은 이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을 제시하는 일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신화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표현이다. 신화에서 사용되는 여러 구체적인 사물들은 인간의 자기 이해와 세계 이해를 나타내기 위한 도구일 뿐 그 자체가 사실성을 담고 있지는 않다. 가령 신이 초월적인 존재라는 이해는 신화 속에서 공간적인 거리감으로 표현될 수가 있다. 신화가 “신은 하늘에 계시다.”라고 우리에게 전한다면, 이것은 신이 정말 대기권 어딘가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신이 인간의 능력과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 존재라는 이해를 표현하는 것이다. 불트만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신화의 본의도는 객관적인 세계상을 제시하는 데 있지 않고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에 있어서의 인간의 자기 이해를 표현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신화는 우주론적으로서가 아니라 마땅히 인간학적으로, 또는 보다 나은 말로 실존론적으로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신화는 인간이 그의 세계와 그의 활동과 고난의 근거 또는 제한으로써 경험한다고 생각하는 힘 또는 세력들에 대하여 말한다. 신화는 이러한 힘들을 묘사함에 있어서 촉감할 수 있는 사물과 힘, 즉 가시적인 이 세상의 말로써 하며 또한 느낌, 동기, 가능성 등 인간 생활의 말로써 묘사한다. 예를 들면 신화는 세계의 알 (卵)이라든가 세계의 나무라든가 하는 것으로써 세계의 기원을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태고의 신들의 투쟁이라는 것에 의하여 현 세계의 생태와 질서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신화는 저 세상을 이 세상적인 것으로, 신을 인간적인 것으로써 말한다.”
이러한 본성상 신화는 그 자체 속에 비신화화의 필요성을 가진다. 중요한 것은 신화에서 겉으로 드러난 내용이 아니다. 그 내용이 어떠한 자기 이해를 표현하고 있는가이다. 철학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존재 방식을 ‘실존(existence)’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따라서 신화가 인간의 자기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면, 우리 역시 신화를 자기 이해에 대한 관심 속에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불트만의 성서해석은 ‘실존론적 해석’이라 불린다. 물론 대개의 경우 불트만은 이 단어를 단순히 ‘자기 자신’ 혹은 ‘인간’과 거의 유사한 차원에서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고로 신약성서 신화론의 중요성은 그 구상적 표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실존의 이해에 있다. 참 문제는 이 실존 이해의 진부(眞否) 여하에 있다. 신앙은 이 진리성을 요구한다. 그리고 신앙은 신약성서 신화론의 구상적 표현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된다.”
신화의 본질뿐만 아니라 신약성서 자체 역시도 비신화화의 필요성을 그 안에 품고 있다. 신약성서는 수많은 모순적인 내용을 이야기한다. 이 모순들로 인해 해석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성서는 그 자체만으로 일관성 있게 읽혀지지 않으며 우리는 이 모순되는 내용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약성서 자체가 이러한 비판을 초래하고 있다. 즉 그 신화론 속에 조잡한 면이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기사는 실제로 모순된 채 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떤 때는 희생으로 되고, 어떤 때는 우주적 사건으로 되어 있다. 어떤 때는 그의 인격이 ‘메시아’로 해석되고 어떤 때는 제2의 ‘아담’으로 해석되고 있다. 비천하게 된 선재적 아들 (빌립보서 2:6 이하)이라는 사상과 그의 메시아성을 증명하기 위한 기적 기사들과는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다. ‘창조’의 교리와 ‘이 세상의 지배자’ (고린도전서 2:6 이하)라든가 ‘이 세상의 신’ (고린도후서 4:4), 또는 ‘이 세상의 원리’ (stoikeia tou kosmou, 갈라디아서 4:3) 등의 개념과는 모순된다. 또한 율법은 하나님이 주셨다는 신앙과 이것은 천사로부터 왔다 (갈라디아서 3:19 이하) 이론과는 모순된다.”
– 비신화화 이전의 해석들에 대한 비판적 관점
불트만은 자신의 비신화화 이론을 정통주의나 자유주의 신학에서의 성서해석과 비교하며 설명한다. 이미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신화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그 이전부터도 있었다. 하지만 정통주의 신학은 신화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기에 현대인들의 사고에 부합하지 못한 한계를 지녔으며, 자유주의 신학은 신화를 완전히 허구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제거하는 데 치중한 나머지 그 속에 있는 케리그마를 제대로 발견해내지 못하였다.
“그러면 신약성서의 신화론은 어떻게 재해석될 것인가? 신학자들이 이 문제를 취급한 것은 지금이 처음이 아니다. 실로 지금까지 우리가 말한 모든 것은 이미 30, 40년 전에 그와 같은 문제가 논의되었지만, 오늘날 재차 같은 것이 논의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시 신학의 한 파탄 표지라 하겠다. 즉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잘못된 방향으로 연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화론 뿐만 아니라 케리그마 그 자체까지도 제거해 버렸었다. 과연 그들이 옳았던가? 과거 20년간은 비판에서 떠나서 단순히 무비판적으로 케리그마를 받아들이는 데로 돌아가자는 운동의 무대였다. 그러므로 신학과 교회에 대한 위험은 이러한 신약성서 신화론의 무비판적 재현이 복음의 메시지를 현대인에게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는 전세대의 비판적 연구를 간단히 치워버릴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을 건설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정통주의와 자유주의 신학 사이의 옛 투쟁은 재차 반복되어야 할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경우는 성서의 신화들을 매우 일반론적인 교훈들로 해석하고자 하였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신화들이 진리를 담지하고 있다면, 그 진리란 보편적이고 언제나 적용될 수 있는 종교와 도덕의 가장 일반적인 원칙들이어야 했다. 가령 불트만은 이러한 경향을 대표적인 자유주의 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아돌프 폰 하르낙 (Adolf von Harnack)의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하르낙은 ‘하늘나라’라는 신약성서의 개념에서 신화적인 특수한 요소들을 완전히 제거한 채 가장 기본적인 종교와 도덕의 의미만을 남겨둔다. 가령 하늘나라라는 개념에서는 ‘일상생활의 소산이 아닌 위로부터의 선물’, ‘신과의 내적 결합’, ‘인간의 모든 것이 의존하는 것’이라는 기본적인 뼈대가 되는 의미만이 주목받는다. 그리고 이러한 뼈대는 그리스도교가 아니더라도 다른 종교나 도덕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보편적인 내용들이다.
그러나 불트만은 신약성서가 그리스도 예수라는 인물을 통해 매우 특수한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신약성서는 어느 종교나 도덕에도 모두 적용될 수 있는 원칙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하나님이 어떠한 결정적으로 중요한 행위를 하셨다는 것이 신약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간과한 채 신약성서의 신화를 단지 신화라는 이유만으로 제거하여 보편적인 원칙들로 이를 대체하는 것은 텍스트 해석에 있어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 이러한 일은 성서가 선포하는 바, 곧 케리그마의 핵심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 된다.
“이것은 불행히도 케리그마 자체의 핵심적인 내용이 제거당한 것을 의미하고 있다. 즉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결정적 행위의 선포가 아니다. … 그러나 신약성서는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역사하신 한 사건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는 첫째로 교사로서 전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분명히 결정적으로 중요한 교훈을 가지고 있으며, 또 이 교훈으로 말미암아 항상 존경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격이 그의 교훈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그의 인격이야 말로 신약성서를 구원의 결정적인 사건으로서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예수의 인격을 신화론적인 용어로써 보도하고 있다. 그러면 이것이 신화론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케리그마 전체를 제거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이다.”
다음으로 불트만은 종교사학파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살펴본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교훈에 관심을 두었던 하르낙의 경우와 달리, 종교사학파들은 실제적인 종교생활에 주목한다. 신약성서의 신화적인 내용들과 교리들은 모두 2차적인 것들이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통해 표현된 종교생활, 그리고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결합의 체험이라는 것이다. 신화들은 바로 이 체험들을 반영하고 있다.
– 종교사학파의 대표적인 인물들 에른스트 트뢸치 (Ernst Troeltsch), 헤르만 궁켈 (Hermann Gunkel)
종교사학파는 이러한 종교적 생활과 체험을 통해 이 세상의 염려로부터 초월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세상과 구별되어 예배를 드리는 행위가 종교사학파 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들은 종교생활의 최고 실현을 이와 같은 예배 행위에서 찾았으며, 신약성서 역시 이러한 생활을 이상적으로 그린다고 생각했다. 하르낙과 같은 인물들이 그리스도교를 순전히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차원으로 이해하여 종교생활이라는 부분을 간과한 것과 비교해 보았을 때 종교사학파는 진일보 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이전 자유주의 신학은 보편적 교훈과 도덕적 이상만을 신약성서로부터 읽어내려 하였던 나머지 교회를 통해 신자들이 함께 모여 예배행위를 하는 등의 순전한 종교 활동들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트만은 종교사학파 역시 신약성서의 신화들을 해석하는 일에 충분하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우선 그는 종교사학파가 신약성서의 초월 개념을 신비주의적으로 보았던 것에 반대하며, 이 초월을 ‘종말론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점을 간략히 지적한다. 하지만 이보다도 더 근본적인 문제는 종교사학파 역시 이전 자유주의 신학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결정적인 행위에 관하여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신약성서가 중요하게 기록하는 예수의 인격과 그를 통한 구원의 사건이 지니는 결정적인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종교사학파 역시 적절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그보다 만약 종교사학파가 옳다면 케리그마는 다시 한 번 진정한 의미의 케리그마의 뜻을 잃는다. 여기서도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같이 구원의 사건으로서 선포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결정적 행위에 관하여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에서 신화론적 용어로 서술된 이 구원의 사건과 그리스도의 인격이 과연 신화론에 불과한 것이냐 하는 것은 아직도 우리들에게 문제로서 남아 있다. 과연 케리그마는 신화론을 별개로 하고 해석될 수 있는 것일까? 또한 케리그마로서의 진리를 상실함이 없이 신화론적 용어로써 사고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하여 케리그마의 진리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일까?”
– 성서의 삼층 우주론
이전 자유주의 신학과 종교사학파의 한계를 지적하며 불트만은 자신의 비신화화 이론을 제시한다. 우리가 성서의 신화들을 해석하여 발견해 내어야 하는 것은 그 속에 들어 있는 자기 이해, 곧 인간의 실존에 대한 이해이다.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신화의 본질 자체와 신약성서 자체에 의해 이러한 비신화화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불트만은 신약성서의 신화에 대한 해석을 통해 발견한 인간 실존 이해가 오늘날 비신화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인간의 실존을 이해하는 데 있어 유효하다는 사실을 보이고자 한다.
“우리들의 과제는 같은 노선에서 신약성서의 이원론적 신화론을 실존론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세계를 지배하고 인류를 속박하고 있는 악마적 힘에 대한 기사를 읽을 때 이러한 표현 속에 놓여 잇는 인간 실존의 이해는 과연 오늘날 비신화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인간 실존을 이해할 수 있는 파악 방책을 주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후 제시되는 내용들은 지금까지 소개한 실존론적 해석을 구체적인 신약성서의 내용들에 적용하여 그 속에 담긴 인간 실존에 대한 이해를 밝혀내는 작업이다. 불트만은 특별히 현대의 실존철학에서 나타나는 인간 이해가 신약성서 속에도 담겨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신약성서가 실존철학과는 구별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사건을 주장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는 이 사건을 신약성서에서 제거해 버릴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비신화화하고자 한다.
– 비신화화에 대한 비판적 평가
신화는 자연세계를 과학적으로 해명하고자 하는 데 그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삶이 지닌 진실을 상징적인 언어로 표현하고자 한다. 불트만은 이러한 신화의 특성을 정확하게 파악하였고, 신약성서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도 이를 중요한 기준점으로 삼았다. 따라서 ‘비신화화’라는 불트만의 작업은, 겉보기에 그 말의 어감으로 인해 마치 신화를 파괴해 버리는 것 같은 오해를 살 수 있으나, 사실은 신화의 본질을 제대로 집어내자는 데 그 취지가 있다. 신화를 신화로서 받아들이고 이것을 오늘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재해석해 내자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불트만의 비신화화는 두 가지 국면을 지닌다. 이 이론은 신화가 오늘날 더 이상 문자 그대로 수용될 수 없는 이야기라는 점을 지적한다. 불트만은 신약성서의 내용들이 “현대인에게는 비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전혀 무의미한 것이다.” 라고 비판하는 데 있어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비신화화는 이렇듯 신약성서를 신화로 규정하고 무너뜨림으로서 동시에 신약성서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다. 신화가 신화로서 이해될 수 있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진실을 말해주게 된다. 우리는 그 속에 담긴 인간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가령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 대한 이솝 우화를 자연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두 동물이 언어를 사용하여 대화할 수 있는가?’라는 매우 얼토당토않은 질문에 발목이 잡힌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함축하고 있는 상징으로 읽혀진다면, 이야기는 우리에게 삶의 진실을 전해줄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신약성서의 신화들 역시 신화로서 이해될 때에야 그 참된 의미에 주목할 수 있게 된다.
비신화화가 지닌 양면적인 의의로 인해 불트만 사상이 이전 신학에 대해 거둔 성과 역시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우선 불트만은 정통주의 신학이 성서의 내용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자 하였다는 점에 반대하면서 신약성서를 용기 있게 ‘신화’라고 이야기하였다. 이로써 그는 신약성서를 문자적인 사실대로 자연과학에 근거하여 읽으려는 시도들을 비판할 수 있었다. 정통주의의 해석은 신약성서의 신화적 양식을 정당하게 고려하지 못한 것으로서, 오히려 신약성서가 말하는 진정한 의미를 가려버릴 위험이 있다. 하지만 불트만은 정통주의를 비판하는 동시에 신약성서에 대한 기존의 하르낙 계통의 도덕주의적인 해석과 종교사학파의 신비체험 중심적인 해석 역시 비판한다. 이들은 성서의 권위를 허물어뜨리고 상대화하는 데에만 주목하여 신약성서의 신화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결정적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철학사적 맥락에서 보면 불트만의 비신화화와 실존론적 해석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이론적 근거를 두고 있다. 하이데거는 이 책을 통해 현존재의 자기 이해가 다른 모든 존재들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어 근거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를 바탕으로 불트만은 신약성서 신화들의 의미 연관관계 중심에 현존재로서 우리 자신의 자기 이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만 하이데거가 자신의 철학을 ‘존재론’으로 주장한 반면 불트만은 이를 ‘실존주의’로서 이해한다는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그의 하이데거 독해가 정확한 것이라고 보기는 무리이다. 불트만이 논문의 Ⅱ부에서 신약성서를 실존론적으로 해석하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부분들은 사실 하이데거 본래의 철학과는 거리가 있다.
불트만의 신학에 있어 관건이 되는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결정적 사건’으로서 십자가와 부활을 어떻게 비신화화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신약성서의 증언들이 정당하게 고려된다면, 이 이야기는 단순한 실존주의 철학적인 교훈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며 유일무이한 구원의 사건으로 설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물론 이 내용은 Ⅱ부에서 다루어진다. 그러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불트만이 이 과제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특별히 불트만이 비신화화의 범위와 한계를 명확히 설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내가 보기에 바로 이 점에서 비신화화의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만일 비신화화를 극단까지 밀고 간다면 결국 현대물리학이 인정하는 대상들 이외에는 모든 것이 실존주의적인 인간 이해라고만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순수한 철학적 교훈으로 만들어 버려야 할뿐더러, 신 역시도 철학적인 의미만을 지닌 상징적인 존재로 취급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의지하며 자기 삶을 맡길 수 있는 신, 곧 인간을 고난 속에서 건져주며 언제나 사랑으로 보살피는 신의 존재는 결국 허구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신앙’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둔갑시키는 셈이나 다름없어 진다.
아울러 ‘신화’와 ‘비신화’의 기준이 과연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역시 비판이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신화라고 규정하는 것들이 사실 도리어 비신화적인 진실에 더 가까울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성례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할 수 있다는 바울의 교의는 단순히 신화일 뿐인가? 고대인들은 단지 인간 실존에 대한 통찰들을 신화적인 상징으로 옮겨 적어놓았을 뿐, 신화 자체는 아무런 진실도 지니지 않는가? 그렇지 않은 듯하다. 지혜문학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고대인들 역시 그들의 인간 이해를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언어로 옮길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었다. 즉, 그들은 단순히 체계화된 글을 쓰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거나 철학적인 탐구가 아직 발전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생각을 신화적인 상징으로 옮겨야만 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진실을 표현하기 위해서 우리가 보기에 ‘신화’처럼 보이는 양식을 적극적으로 선택했다. 이러한 점은 그 신화들이 실질적인 그들의 경험에 다른 어떠한 종류의 철학적 설명들보다도 더 가깝다는 점을 시사한다.
따라서 우리가 ‘신화’로 규정하는 것들이 오히려 비신화적인 진실을 가리키고 있을 수가 있다. 철학적인 해석을 통해 그 신화들을 비신화화하여 풀어내는 일이 어쩌면 신화 자체가 나타내는 진실을 가리는 작업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쉽지 않은 문제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신화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해석해야 하지만, 그 신화는 고대인들이 적극적으로 해석하기를 거부하며 그대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였던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여기서도 역시 비신화화의 한계와 범위를 보다 분명하게 설정하는 일이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비신화화는 어디까지 이루어져야 하며, 어떠한 선에서는 멈추어 서서 신화를 그대로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불트만 자신은 이 내용을 논문에서 다루고 있지는 않으며, 아직 나로서는 그가 다른 논문에서 이와 유사한 논의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내용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비신화화 이론의 성패 여부는 그것이 어디에서 멈추어야 하는지를 아는 데 달려 있는 듯하다. 신학적으로는 바로 여기에서 그리스도교가 실제성을 지닌 신앙으로 남을 수 있는지, 아니면 철학적 의미 속에 용해될 것인지가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신화 해석에서는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신화를 정당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아니면 그것을 엉뚱하게 분해시키고 있는지가 결정될 것이다.
○ 불트만의 실존론적 신학 _ 조성노
서론
불트만 (R. Bultmannn)은 마부르그의 자유주의 신학자 헤르만 (리츨학파의 대표적인 신학자)의 제자이다. 불트만은 바르트에 이어서, 그리고 본 훼퍼의 영향력이 나타나기 전까지 유럽 신학계의 판도를 지배한 사람이었다. 바르트의 관심이 하나님의 전적인 타자성에 집중된 데 반해 불트만의 관심은 계시의 운반체인 성서에 집중된다. 그래서 그는 성서의 메시지를 어떻게 현대인들에게 전달하고 또 의미를 갖게 할 것인가? 하는 성서해석의 방법을 연구하는데 온 정열을 다 바쳤다. 불트만은 성서 기자들이 당대사람들에게 계시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했던 사고 패턴은 오늘날의 현대인들에게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따라서 성서가 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이해 가능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계시의 핵심적 메시지와 그 메시지를 처음 수용했던 고대인들의 사고 패턴을 분리하는 작업을 해야 하고 다음은 고대인들의 사고 구조에서 놓여난 그 계시의 메시지에다 다시 현대인들의 사고 패턴을 옷 입힌 다음 이 시대 인간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신앙이 발생될 수 있는 만남이란 언제나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그 말씀을 듣고 예! 하고 응답하는 인간 사이의 만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들음이라는 것은 신앙 이전에 우선 의미 있는 접촉이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불트만은 신과 인간의 진실된 만남을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현존재 분석을 시도한다. 이를테면 오늘날의 인간은 무엇이며 자신 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현대인은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어떤 상황 속에 처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불트만은 이런 물음들에 답하기 위한 수단으로 실존철학, 특히 마르틴 하이덱거를 택한다.
불트만이 굳이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인 하이덱거를 선택한 이유는 그의 실존철학이 인간의 현 존재성을 가장 정직하고 명확하게 분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향해 던지는 물음에 대해서도 가장 타당한 답변을 제시해주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이덱거의 무신론적 입장이 자기가 참여하고 있는 변증법적 신학의 신이해에도 오히려 부합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변증법적 신학에 의하면 신이란 인간에 의해서는 결단코 인식될 수 없고 오직 신의 자기 계시에 의해서만 인식이 가능하다고 한다. 따라서 불트만에게는 철학적 견지에서는 결코 신에 관해 말 할 수 없고 신을 발견할 수도 없다는 하이덱거의 무신론이 오히려 진실 한 인간 고백으로 들렸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불트만은 하이덱거 의 현존재 해석학을 인간에 관한 가장 적절한 인식 수단으로 평가하여 그의 신학적 인간 이해의 틀속에 적극 수용한다. 일단 하이덱 거의 도움으로 현존재 분석의 과제를 달성하고 난 불트만은 또 하 나 중요한 문제인 하나님 말씀에로 주의를 옮긴다. 성서의 하나님은 제1세기 인간들이 살고 있던 문화적 틀 내에서 그 리고 그들이 처해 있던 고유한 상황 내에서 말씀하셨다. 따라서 오 늘 우리는 제 1세기의 상황과 제 1세기의 세계관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달 수단인 성서와 하나님의 본래적 메시지를 분리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불트만은 바로 이 하나님 말씀의 내용과 그 말씀의 표현 수단의 분리 과정 을 비신화화 (Entmythologisierung)라고 부른다. 이렇게 현존재 분석과 하나님 말씀에 대한 비신화화 작업이 이룩된 후 비로소 불트만은 하나님의 말씀의 재해석이다. 따라서 불트만신학의 구도는 세가지 측면, 즉 현존재 분석과 비신화화, 그리고 말씀의 재해석등으로 정리될 수 있다.
1. 현존재 분석
불트만이 절대 의존하고 있는 하이덱거 (1927년 “존재와 시간”에 나타난 현존재 분석을 의미함)에 의하면 현대인이 직면한 삶의 가장 기본적인 가능성은 본래적 실존과 비본래적 실존이다. 본래적 실존이란 인간이 자신과 자신의 모든 잠재력을 주체적으로 발전시키는 길을 선택하는 삶을 말한다. 그리고 비본래적 실존이란 인간이 자 신을 이 세계(사물)와 집합적인 대중에게 내 맡겨 그것들에 의해 자신이 형성되고 영향받게 하려는 삶을 가리킨다. 하이덱거는 현대인의 대부분이 후자의 길, 곧 자신의 개별적 인격성의 책임을 포기하는 비본래적 삶을 사는 것으로 풀이하였다. 이유는 그것이 훨씬 살기가 쉽기 때문이다. 비인격화된 대중의 일원이 되어 그런 삶의 방식에 만족하고 그런 가치관에 안주하여 사는 일이란 결코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런 삶에 비해 자결의 길, 본래적 실존의 길을 선택하기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본래적 실존이란 인간이 자신의 삶을 형성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가능성들을 선택하는데 대한 완전한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인간은 누구도 이 두 유형의 실존 가운데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선택하지 않으려는 결정도 역시 비본래적인 실존에 자신을 내 맡기는 것이 된다. 이리하여 결국 인간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주체 적으로 형성해 나갈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과 사물들에 의해 형성되어 가도록 내 던져 버릴 것인지에 대해 선택해야 하는 존재 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번에 결판나는 선택은 아니다. 오히려 삶은 두 가지 실존 가운데서 끊임없이 선택해야 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모든 현재는 자유로운 결단의 순간이다. 그리고 이같은 지속 적인 선택의 필요성이 삶의 주요한 성격인 불안을 조장한다. 불트만은 역사내의 존재로서의 인간의 주요 특징을 불안이라 생각하였다. 인간은 과거와 미래 사이의 영원한 긴장 가운데서 실존한 다. 매순간마다 인간은 세계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개별적 인 인격을 상실하거나 아니면 모든 안전을 버리고 미래의 자신을 던져 본래적 존재를 성취하거나 해야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자신의 실존에 대해 느끼는 불안을 달래기 위해 비본래적인 실존을 선택하게 되면 그것은 결국 자신을 세계에 내어 줌으로써 보다 확 실하게 사물의 지배 아래로 떨어질 뿐이다. 그리고 주체성을 상실 해 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사물이 그의 주인이 된다. 따라서 인간은 참다운 자아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되게 된다. 다른 한편 자신에게 열려져 있는 두 가지 선택의 길 가운데서 본래적 실존의 길을 선택했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며 그는 어떻게 자신의 삶의 길을 실현해 가는가.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야 할 것 은 마르틴 하이덱거의 경우는 일단 인간이 본래적 실존의 길을 선택하고 나면 스스로 본래적 삶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고 보는 반면에 볼트만은 변증법적 신학자 답게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스스로는 본래적인 실존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본다. 어째든 볼트만은 본래적 실존의 성취는 오로지 하나님의 도움만으로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면 본래적 실존을 위한 선택이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것은 곧 자유를 위한 결단을 의미한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그러한데 첫째는, 이 세상으로 부터 즉 사물에 대한 예속상태로 부터 그리고 집합체의 비인격적 구조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따라서 그것은 이제부터는 자신의 삶에 대한 완전한 책임을 스스로 지겠다 는 결단이다. 둘째, 본래적 실존을 위한 선택은 결국 미래를 위한 결단이기 때문에 과거가 인간에게 가져다준 온갖 예속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결단을 의미한다. 그것은 과거의 실패와 죄책,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종속되어 참다운 자아로부터 소외된 상태를 모두 내어버리는 선택이다. 그것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책임에 전념하겠다는 결단이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회개를 촉 구한 것도 바로 인간에게 열려있는 새 가능성에 대한 선언이후 동시에 그 가능성에 대한 자신을 개방할 때에만 비로소 참 인간으로 서의 구원이 있음을 계시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인간에 게 열린 새로운 가능성이다. 인간은 도래하는 것에 비해서만 참 자기로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이 볼트만이 이해한 성서 특유의 인간관이다.
그래서 나를 얽어매고 있는 낡은 사슬을 끊고 새 세계로의 탈출을 종용하는 말이 바로 예수의 회개하라는 외침이고 그것이 곧 본래적 실존을 위한 결단의 촉구라는 것이다. 2. 성서의 비신화화 현대인들의 성서이해에 대한 불트만이 가지는 주요 관심은 신약의 표상 세계와 현대인의 표상세계의 깊은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에 집중된다. 불트만에 의하면 현대인들의 세계상은 자연과학과 기술에 의해 이해되는 합리적이고도 차안적인데 비해 성서는 모두가 신화적 세계상에 기초하고 있다. 성서는 이 세 계를 삼중구조로 이해한다. 위는 하늘, 아래는 지옥, 중간은 신과 사탄의 싸움터로서의 이 세상이다. 불트만은 이렇게 말한다 “신약성서의 세계상은 신화적인 세계상이다. 심지어는 신약성서 선포의 본래적 내용을 이루는 구속 사건의 설명도 바로 이 신화적 세계상 에 일치한다”. 그러니까 신약성서는 그 내용의 핵심적인 구속사건 조차도 신화론적 표상으로 진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약에 나타나 는 그리스도상을 보자. 우선 그는 선재 했던 신적인 존재이다. 그러다가 땅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기적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십 자가에서 모든 죄의 대가를 위해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된지 사흘만 에 다시 살아나시고 본래의 하늘로 되돌아 가셨다가 이제, 죽은 자 의 부활과 심판을 통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기 위해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게 된다.
불트만에 의하면 이러한 그리스도상은 신화론적 진술로서 영지주의적 구속신화와 유대교적 묵시문학의 영향 을 받아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론 뿐만 아니라 종말론도 마찬가지이다. 즉, 종말이 시간적인 우주적인 대 몰락의 드라마로 표상 된다. 이를테면 천상의 세력과 악마세력간의 최후의 투쟁이 일어나고 그후에 우주적 종말의 심판자가 천사를 거느리고 나타나 서 죽은 자들을 다살려 내어 어떤 이들은 구원하고 어떤 이들은 저 주로 심판한다는 것이다. 불트만에 의하면 미래의 이런 사건이 실재로 일어날 것이라고 소박하게 기대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것이다. 그는 성서의 신화론적 종말은 예수의 재림이 신약의 기대처럼 곧 도래하지 않았고 세계 역사는 계속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되어 갈 것이라는 단순한 사 실을 통해 이미 근본적으로 낡은 것이 되고 말았다. 불트만은 예수 의 부활도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신화적 사건이라고 한다. 오늘 우 리로서는 신화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세계에 살았고 신화적 경험에 일치되게 예수를 해석했던 제자들의 부활절 신앙에 대해서만 알 뿐 이 라고 한다. 이러한 신화적 세계상은 역사적이며, 자연과학적인 세계상 속에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결코 이해될 수 없는 황당한 얘기다.
불트만은 전기와 라디오를 이용하고 아플 때 현대의학에 의존하면 서 동시에 신약에 나타난 악마와 영들의 세계를 믿는다는 것은 불 가능하다 하며 그리스도교의 선포가 현대인들에게 신화적 세계상 을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뿐만아니라 의미도 없다고 했다. 성서의 신학적 세계상은 그 자체가 특별히 기독교적인 것일 수 없는 단순히 지나간 시대의 세계상일 뿐이다. 이렇게 현대인의 세계상과 자기 이해가 신약의 신화론적 표상세계와 마찰을 일으킨다면 신약의 증언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불트만에 의하면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신약성서의 복음을 이상주의적 윤리(리츨, 하르낙)나 신비적으로 채색된 종교적 정서, 혹은 감정(쉴라이마허)으로 환원시켰다. 그러나 신약은 인간의 종교성이나 윤리성에 대해 말하는 책이 아니라 신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세상을 구원하셨다는 구속 사건에 관해 말한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은 결정적 구속사건인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하나의 종교적이고도 윤리적인 모범이나 선생으로만 이해함으로써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켰다고 불트만은 비난한다. 여기서 불트만은 복음이 현대인들에게 이해되게 하기 위해서는 현 대적 사고 방식으로 신약의 신화론적 표상을 비판하고 비신화화하는 방법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한다. 불트만에 의하면 신화의 본 래적 의도는 객관적인 세계상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그의 세계속에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표현하고자 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성서의 신화는 우주론적이 아닌 인간학적으로 실존론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트만의 입장에 반하여, 칼 야스퍼스나 폴 틸리히 등은 초월에 관한 한 실제로 암호나 상징으로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고 보아 불트만의 비신화화 작업을 반대한다. 신화의 의미를 밝히는 실존론적 해석이 결국은 신화가 지니는 비이성적 깊이를 대상화함으로써 마침내 신화가 지니는 깊이의 차원을 파괴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도 성서의 신화적 표상을 직접적이고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거부했다는 점에서 불트만과 일치한다. 불트만에 있어 서의 신약성서의 사신은 비신화화되어야한다. 현대인의 사유는 이 미 신약성서를 지배하고 있는 신화적 사유란 의식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었고 더우기 믿을 필요도 없었다. 그것이 곧 그들의 이성 적 사유, 과학적 사유를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로서는 이 세계와 삶의 온갖 수수께끼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신화론적인 방법 이 최선의 해석학적 도구였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코페르니쿠스적 세계관으로부터 비롯된 자연과학적인 사유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성서의 신화적 표상을 그대로 받아들인 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 하며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의 결과는 정신 분열증일 뿐이다. 그렇다면 비신화화의 가정은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가? 불트만에 따르면 신화의 제거를 통해서는 비신화화가 불가능하다. 만약 비신화화가 성서의 신화적 표상 일체를 거부하는 것이라면 결 코 새로운 것일 수 없다. 신화 제거의 작업은 이미 19세기의 급진 적인 성서학자들에 의해서도 상당한 수준까지 시도되었기 때문이 다. 그럼에도 그들이 실패한 것은 신화를 해석하려 하지 않고 제거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불트만은 자신이 쓰고 있는 비신화화 (Entmythologisierung)란 용어 자체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칫 이 개념이 신화를 제거한다는 뜻으 로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간 불트만이 말하는 비신화화론 의 과제는 신화의 제거가 아니라 신화의 실존론적 의미를 밝혀내는 해석학적 작업이다. 따라서 불트만의 비신화화론은 신약의 신화론 적 진술을 비판한다는 부정적인 의도보다는 오히려 그 진술들 속에 있는 실존이해를 해명한다는 긍정적인 외도를 가지고 있다. 신화는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해석되고 설명되고 이해되어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불트만은 자신의 비신화화론을 성서에 대한 실존적 해석이 라고 한다. 그러면 성서의 신화적 진술은 어떻게 재해석되어야 하 는가? 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신화속의 하나님의 메시지인 케리그마는 무엇인가?
2. 말씀의 재해석 성서는 묻지 않으면 침묵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성서를 향해 올 바로 질문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약성서가 대답 하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불트만이 이 해한 신약성서의 관심은 전적으로 인간 실존에 대한 문제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트만의 신학을 신존론적 신학이라고 규정한다.
1) 구속 사건에 대한 실존론적 해석
불트만에 있어서 구속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집중된다. 성서의 십자가와 부활기사에는 역사적인 것과 신화론적인 것이 뒤 엉켜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를 역사로 보고 어디까지를 역사적인 것으로 수용할 것인가? 우선 불트만에 의하면 십자가는 분명 역사적 사건으로 용납되어야 한다. 비록 신화적으로 채색되기 는 했어도 심지어는 십자가 사건의 날짜까지도 확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십자가 사건의 진정한 의미는 그것이 내포한 실존적 의미성을 밝히는데 있다. 즉 그것을 자 신의 실존문제와 관계 지을 때만이 분명해진다. 따라서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지나간 역사적 사건의 신화론적 표상을 믿는 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이 세계에 대해서는 등을 돌리고 이 세계와 자신에 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에게 의존하기 위해 비본래적 실존에로 이끌 뿐인 자신에 대한 의 존성을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그것은 이 세계에 대해 그 리고 자신에 대해 죽는 것,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십자가의 구속 사건을 실존론적으로 체험한 사람은 이제 새로운 삶에로 들어선다. 죄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비본래적인 실존에 대해서는 죽고 본래적 실존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부활 의 실존적 의미이다. 따라서 불트만에게 일어서의 부활은 십자가와 실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부활은 한갓 신화인가? 일단은 그렇다. 예수의 부활은 신화적 사건이다. 그러나 더 정확한 표현은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부활은 전혀 그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부활을 취급하는 신약성서 역시도 부활의 역사적 성격보다는 오히려 실존적 종말 사건으로서의 의의에 관심을 집중한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성서를 통해 알고 있는 것도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부활이 아니라 십자가의 의미성을 신화적으로 해석하는 제자들의 부활 신앙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독자적인 사 건이 아니라 십자가의 구속의미의 표현이다. 부활은 십자가가 구속 사건으로 선포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역사속에서 가 아니라 말씀(제자들의 케리그마)속에서 부활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부활의 신앙이란 부활 케리그마에 대한 신앙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결코 형이상학적으로 사변할 수 있는 기적이 아니라 선포되는 말씀에 대한 이해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선포속에서 부활했으며 그리스도인의 신앙속에서 지금도 부활한다. 따라서 부활은 지나간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현재에 일어나는 실존론적 이해 의 사건이다. 일찍이 십자가에 달렸던 예수는 오늘도 말씀의 선포 속에서 여전히 우리를 만나고 있다. 바로 이 케리그마에 현재하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부활신앙의 의의이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 이 주는 범인류적인 의미는 역사적인 한 인물이었던 예수를 통해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서 입체적이고도 구체적인 구속의 메시지를 선포하셨다는데 있다. 그 하나님의 케리그마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결단을 통해 비본래적 실존을 십자가에 못 박고 다시 본래적 실존으로 부활하라는 것이다.
2) 종말에 대한 실존론적 해석
불트만에 의하면 비본래적 삶을 영위하던 사람이 본래적 삶으로 전 향하려면 구속함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지점에서 신약성서는 전혀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때에 하나님이 개입하신다고 한다. 그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 즉 십자가 사건인데 어 쨌든 인간은 반드시 구속사건으로서의 십자가 사건을 믿을 때 비로 소 본래적 실존의 성취가 가능해 진다. 그런데 그 본래적 실존의 선택이란 곧 이 세계가 그에게 부과한 비본래성으로 부터의 자유를 의미하기 때문에 실존적 종말을 뜻한다. 그는 이제 세상과 세상적인 삶으로부터의 결별을 통해 종말론적 실존이 된다. 그러므로 본 래적 실존이란 곧 종말론적 실존을 말하며 종말론적 실존이란 비본 래적 실존의 종국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개인의 신앙안에서 이미 사건이 되는 실존적인 세상종말을 의미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그는 종말론을 부정하는 즉 시간적이고도 역사적인 종말을 거 부하는 현대신학사 가운데 대표적인 한 사람이 된다. 이상에서 살 펴 본 것처럼 불트만은 그의 독특한 실존론적 해석학을 통해 신약성서를 모조리 비신화함으로써 성서 본래의 케리그마를 이 시대에 도 여전히 타당한 보편적 진리로 회복시켰다고 확신한다.
결론
그럼 결론적으로 흔히 지적되는 불트만 신학의 문제점을 살펴보자.
첫째는 불트만의 역사 감각에 대한 문제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 는 역사적 종교,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기초한 일면 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믿음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불트만 은 예수에 대해 알 수 있는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매우 비관적으로 생각한다. 물론 그도 역사와 케리그마 사이 그리고 예수의 삶과 삶 의 의미에 대한 교회의 설교사이에 어떤 연속성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그이상을 넘어서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불트만에게 있어서의 역사는 언제나 신화속에 숨겨져서 회 복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불트만의 관심은 대부분 그리스도 사건이 지금 여기에서 개인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에 매어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말하면 역사적 예수 탐구의 노력은 부질없는 것이고 무익한 것이다. 이러한 불트만의 역사적 회의주의가 그 동 안 가장 심각한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2000년 교회사는 교회가 복음서의 내용을 엄연한 역사적 사건들로 받아들여 왔음을 증언하 고 있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로서의 예수의 삶은 그리스도교의 중심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교회가 장구한 세월을 통해 믿어온 것을 그렇게 가볍게 제쳐놓을 수는 없다는게 불트만에 반대하는 교회의 입장이다.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첫째로 만약 그리스도교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지 못할 경우 결국 붕괴되고 말 것이라고 한다. 아무런 역사적 연관도 없는 신화론적 표상이 우리 그리스도 인으로 하여금 전 실존을 바쳐서 자기 삶을 결단할 수 있게 하는 생의 기반이 될 수 있는가?
둘째는 불트만은 성서를 오로지 실존적으로만 의미 있게 해석하려 고 한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내용이 인간의 실존적 물음에 대해서 만 의도된 것인가 하는데는 의문의 여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신약성서는 미래에 있을 우주적 종말에 대해 다양하게 언급을 하고 있다. 사도바울도 세계의 종말과 그 종말에 수반될 여러 징조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복음서에도 최후적 심판의 표상이 많이 나온다. 따라서 성서적 종말론은 오히려 역사적이고도 우주적인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트만의 종말 이해는 지나치게 개인적이며 실 존적이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종말이란 한 개인의 비본래적 실존으로 부터의 전향, 즉 세계의존적인 삶의 종국 을 의미한다. 따라서 불트만 신학의 비역사적 측면에 대한 비판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집요하게 시도되어 왔다. 주목할만한 몇 차례의 시도를 살펴보면 우선 오스카 쿨만의 도전인 데 그는 1946년에 출판된 “그리스도와 시간”이라는 저작에서 예수 의 역사는 비신화화론을 위해 제거되어야 할 요소가 아니라, 초대 교회 선포의 중심을 결정하는 객관적 기초라고 밝히면서 불트만에 대해 강력한 반발을 보였다. 다음은 불트만학파의 저명한 학자인 에른스트 케제만이 1952년 게팅겐 대학에서 행한 “독일 신약학의 문제들”이라는 강연을 꼽을 수 있다. 케제만은 이 강연에서 부활절 이후에 신앙되고 전파된 그리스도는 이른바 역사적 예수와의 연속 성속에 있다. 그리고 이 원칙이 없이는 신앙과 선포도 아무런 의미 를 갖지 못한다며 불트만의 케리그마 신학에 반기를 들었다.
바로 케제만의 이 강연을 계기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재발견하고자 하는 후기 불트만학파의 시대가 시작된다. (케제만, 보른캄, 에른스트 폭스, 에빌링, 콘첼만, 막센, 로빈슨, 브라운 등). 그러나 이들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한다. 그 다음이 소위 판넨베르그의 도전이다. 판넨베르그는 1959년에 “구속사건과 역사”라는 강연을 통해 역사를 신학의 중심 개념으로 부각시켰다. “역사는 그리스도 신학의 포괄적인 지평이다. 모든 신학적 질문들과 대답들은 역사의 테두리 내에서만 의미를 가진다”라고 선언함으로써 불트만의 비역사적 신학을 극복하려 했다. 그러나 판넨베르그도 불트만을 극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끝으로 1965년 “희망의 신학”으로 등단한 몰트만을 들 수 있다. 그는 희망의 신학을 통해 불트만의 비역사적인 실존론적 종말론을 구 체적인 역사적 종말론, 미래적 종말론, 희망의 종말론을 활성화시 킨다. 따라서 1960년대 이후의 현대 신학의 흐름은 역사와 희망의 종말론으로 활성화시킨다. 따라서 1960년대 이후의 현대 신학의 흐름은 역사와 희망의 신학으로 전환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는데, 그 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트만의 영향력도 만만치 않다. 그것은 아직까지도 불트만의 이론체계를 극복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_ 조성노 박사 (현대신학연구소장)
○ 독자의 평 1
불트만이 쓴 논문 중 “성서의 실존론적 이해”와 “해석학의 과제”를 번역해 엮은 책. 앞의 것은 유동식 교수가, 뒤의 것은 허혁 교수가 번역을 했다.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 문제에 대해서는 비교적 고민을 덜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해석학의 영역에 있기에 역사적 예수의 측면의 접근은 별로였겠지. [역사적 예수]의 측면보다는 불트만이 말하는 해석학적 측면이 나에게는 좀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불트만의 도발적인 문제제기는 상당히 자극적이다. 불트만은 과학적 세계관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기독교의 복음과 성경의 신화적이야기는 [사실]로 수용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불트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등과 라디오를 사용하며 또 현대 내과와 외과의 의술을 이용하면서 그와 동시에 신약성서의 악귀와 잡령의 세계를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혹 우리 자신은 그와 같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와 같이 믿기를 바란다는 것은 현대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의 신앙을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된다.” (13p-14p)
나는 이러한 문제제기가 이론적으로, 철학적으로, 이성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한국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불트만이 말한 이 [불가능한 일]을 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불트만이 [삶]을 너무 깔끔하고 명쾌한 것으로 본 건 아닐까? 인간 존재의 복잡성을 다소 쉽게 해결하려고 한 건 아닐까?
어찌됐든 불트만은 기독교의 다양한 교리에 대해서 재해석, 곧 비신화화가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신화 그 자체를 사실로 받아들이라고 선포하기 보다는, 신화의 의미와 메시지를 해석해서 선포해야 한다는 거다. 이 지점이 불트만이 주장한 가장 유명한 내용이다. “아기 씻긴 물 버리려다가 아기까지 버렸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불트만이 주는 인싸이트가 타당해보이긴 했다.
특히 내가 동의하는 부분은 불트만의 신앙 이해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전향이며, 스스로 만든 모든 안정성의 포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자기 자신을 위한 생활에 있어서 안착하려는 모든 노력의 포기와, 자신에 대한 신뢰의 단념, 그리고 홀로 하나님에게만 신뢰하려는 결심을 의미한다.”
“신앙의 결단은 결코 한 번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상태에 처하여 부단히 결단되어야 한다.”
“신앙은 언제나 ‘이미'(already)와 ‘아직도'(not yet)와의 사이를 거니는것이며 항상 목적지를 향하여 달리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33p)
나는 불트만이 주장하는 이 원리가 삶의 많은 영역에 있어서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삶 속에서 우리는 항상 새로운 사건을 직면하기 때문이다. 거시적으로 볼 때는 “해 아래에 새 것이 없다.” 하지만 미시적으로 보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늘 모든 것을 처음 경험해야만 한다.
다른 한편, [부활] 에 대해 불트만은 도발적으로 말한다.
[부활] 자체가 신앙의 대상이기 때문에, 부활이 신앙의 이유, 신앙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불트만은 십자가와 부활을 연결해서 이해해야만 하며, 그것은 예수를 따를 것인지 안할 것인지에 대한 실존적인 결단을 촉구하는 메시지로서 읽어야 한다고 본다.
부분적으로는 공감이 되긴 하는데, 의아한 것은 불트만의 논리를 따르면 결단에 영향을 미치는 은총, 신비로운 섭리 등을 말하기가 어려워지는 게 아닌가 싶고.
조금 유치한 측면에서보면 “예수를 따르라” “싫어요” “그럼 말고” 차원의 대화로 진행되어버리게 쉬운 게 아닐까?
결론적으로 불트만은 케리그마, 곧 십자가와 부활의 설교, 말씀, 메시지를 통해 믿음의 결단이 이뤄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뭐 쉬운 말로, “말씀”을 통해 생겨나는 믿음이 중요하다. 가 될 것이다.
이 결론 자체는 동의하는데, 앞서 심도있게 논의했던 게 너무 쉽게 마무리되는 듯한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내용의 설교가 전파되어야 하나?
52주 성경의 다른 내용은 말고 십자가와 부활만 설교하면 되는 건가?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한 결단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하는 선택들인데 그 측면들은?
뭐 짧은 논문에서 이런 것을 다 논의할 수는 없겠지.
어찌됐든 사유를 풍성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좋은 읽기 자료.
○ 독자의 평 2
– 신화적 세계상과 신화적 구원 사건
신약성서의 세계상은 신화적이다. 세계는 3층 건물 같다. 윗층은 천당, 하층은 지옥이다. 중앙의 땅도 자연적인 생활이 이루어지는 장소라가보다 초자연적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 그리고 마귀들이 활동한다. 이 세력들은 인간이 생각하고 뜻하고 행동하는 데 간섭한다. 따라서 기적은 일상이다. 인간은 자기 생활을 좌우 못한다. 역사는 법칙의 궤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 힘에 좌우된다. 종말은 가까운 장래에 오며 파국의 형태를 띠게 된다. 사람은 영원한 천국에 이르든가, 영원한 지옥에 떨어진다. 신약성서는 구원 사건을 제시할 때 신화적 세계상을 전제한다. 이것은 모두 신화론적 언어이며 그 기원은 당시 유대적 묵시 문학의 신화론과 영지주의 구원 신화 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에 ‘케류그마’는 현대인에게 믿을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오늘날 복음의 메시지와 함께 그 신화적 세계관까지 받아들일 것을 기대할 것인가의 물음에 직면한다. 이에 ‘케류그마’를 신화적 윤곽으로부터 벗겨내는 ‘비신화화’가 과제로 된다.
기독교의 설교가 현대인에게 이 신화적 세계상을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불가능한 일이다. 어리석은 까닭은 이러한 신화적 세계관은 기독교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과학 발달 전 새대의 우주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무도 자기의 결의에 의해 세계상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역사적 위치에 의해 결정론적으로 주어져 있다. 신화의 신화론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며, 신앙의 한 조항으로 받아들이기를 강요한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한 인간의 조작이라는 수준으로 저하시키는 일이다. 이러한 강요는 결국 이상한 자기 분열증과 불성실성의 결과를 자아내는 지성의 희생을 동반한다. 그것은 곧 일상 생활에서 부정되는 세계상을 신앙생활에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나이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하늘 위에 살고 계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현대 내과와 외과의 의술을 이용하며 그와 동시에 신약성서의 악귀와 잡령의 세계를 믿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자연과학이 신약성서의 신화론이 직면해야할 유일한 도전 대상은 아니다. 더 심각한 도전은 현대인의 자기 이해에 의해 제기된다.
○ 독자의 평 3
– 신약성서의 실존론적 해석
신약성서 메시지를 파악함에 있어서 불트만은 역사주의의 방법에 따라 과거에 일어난 예수의 사건을 분석, 재구성하여 예수의 사건이 인간과 세계의 운명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는가 보다 오히려 인간의 실존이해에 있으며, 이것을 파악하는 것이 신약성서 해석의 목적으로 보았다(Glauben und Verstehen I, 159).
불트만에 의하면 신약성서는 인간의 두 가지 실존 방식을 알고 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미래를 지향하며 본래의 자기를 얻으려고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얻고자 하는가에 따라 두 가지 실존 방식이 나누어진다.
1. 불신앙적이며 구원받지 못한 실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구원받지 못한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 자기가 지배할 수 있는 것, 이 세상에 속한 것을 수단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은 이로써 자기의 삶과 생명에 대한 보장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삶과 본래성을 상실한다.
불안과 절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는 더욱 더 자기 자신과 자기의 소유에 집착한다. 그는 자기의 본래성을 자기의 힘으로 얻고자 하며 이로 인하여 참된 미래에 대하여 자기를 폐쇄시켜 버린다. 바로 이것을 가리켜 성서는 죄라고 말한다. 불트만에 의하면 죄란 자기의 미래와 본래성을 자신의 힘으로 얻고자 하는 인간의 “교만”, 즉 자기를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이 죄이다.
2. 하나님을 신앙하는 실존, 구원받은 실존
하나님을 믿는 사람, 구원받은 사람은 인간의 모든 자기 보장을 포기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살아간다. 하나님에게 자기를 철저히 맡기며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시기를 기다리는 이 헌신을 통하여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이러한 자유로운 삶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가능하다. 이 때 그의 참된 미래가 열리며 인간은 자기의 본래성에 도달한다. 이렇게 실존하는 것을 가리켜 불트만은 “종말론적으로 실존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 사람은 이 세계 안에 살지만 이 세계를 벗어난 사람 (Entweltlichter)으로서 살아간다.
불신앙의 실존에서 신앙의 실존으로 넘어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 의하면 이 길은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하여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이다. 이 은혜를 받아들일 때 불신앙의 실존은 신앙의 실존으로 변화한다.
불트만에 의하면 철학과 신학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일치점을 가지는 동시에 구분된다. 양자는 인간의 “참 본질” 곧 그의 본래성을 문제삼는 점에 있어서 일치점을 가진다.
그럼 이 실존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 철학은 인간의 타락에 대하여, 인간은 참 자기를 잃어 버렸으며 참된 길을 잃어 버렸다. 그러나 철학은 인간의 비본래적 상황을 철저히 절망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기의 자연적 본래성에 이르기 위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단지 인간적 사색과 결단을 필요로 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반하여 신약성서에 의하면 비록 인간이 자기의 현재 상황과 본래성을 안다 할지라도 자신의 힘으로 이 본래성을 얻을 수 없다. 인간은 그 자신을 해방할 수 없다. 이 해방은 오직 밖으로부터 일어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사랑만이 인간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하여 믿음과 사랑안에 있는 새로운 삶으로 인도할 수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건이며, 바로 여기에 신약성서와 철학, 기독교 신앙과 “자연적” 존재이해의 차이가 있다.
불트만에 의하면 구원의 사건은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말한다. 즉, 옛 세대에 대하여 종지부를 찍고 새 세대를 시작케 하는 종말론적 사건인 십자가 사건은 과거의 역사적, 신화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 나에 대하여 현재적 사건이다. 십자가를 믿는다함은 지난간 역사적 사건의 신화론적 표상을 믿는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불트만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에 불가분리적으로 연결되며 부활은 “십자가의 의미의 표현” (der Ausdruck der Bedeutsamkeit des Kreuzes)에 불과하다.
여기서 부활은 십자가의 사건에 흡수되어 버리며 그 자신의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는 문제점이 나타난다. 예수의 죽음을 한 인간의 죽음으로 인식하지 않고 구원의 사건으로 인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불트만의 답변 : “그리스도, 십자가에 달려 죽었고 부활하신 그 분은 선포의 말씀 속에서만 우리를 만난다. 말씀이 울려 퍼질때 십자가와 부활은 현재가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나에게 지금 여기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믿는다는 것을 뜻한다 (Kerygma und Mythos I , 28 f). 여기서 불트만은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믿음과 선포속으로 부활했다고 비판받을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고 있다.
“Kerygma”는 “보냄받은 자의 부름”, “메시지”, “선포”, “증언”, “설교”를 뜻한다. 신약성서에 있어서 그것은 나에 대한 하나님의 인격적 말씀(Anrede) 곧 불신앙의 실존이냐 아니면 신앙의 실존이냐를 지금 여기에서 결단케 하는 말씀을 뜻한다. 볼트만에 있어서 설교가 곧 구원의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의 선택과 계약,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들이 볼트만에 있어서는 “지금”이라고 하는 한 점에, 다시 말하여 말씀이 선포되는 이 “순간” (Augenblick)에 집중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계시의 사건이 현재화되는 설교 혹은 선포는 우리의 눈을 열어서 새로운 “자기이해”(Selbstverstaendnis)를 부여한다.
선포는 우리에게 과거의 일들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이해 내지 자기이해를 열어주며 이를 통하여 그의 타당성을 증명한다.
한 마디로 말하여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ueber Gott), 내 자신의 실존과 관계없는 하나의 객관적 대상인 것처럼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에 관하여”(von Gott), 내 자신의 실존과 관계된 분으로서의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신학은 오직 인간과 그의 실존에 관하여 말하므로써 만이 하나님과 그의 행위에 관하여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불트만은 신학 (theology)를 인간학 (anthropology)로 폐기한다는 비판을 받지만, 인간의 자기이해, 인간의 실존과 관계없는 하나님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주장한다.
불트만에 의하면 신앙은 말씀의 선포 곧 케뤼그마에 의존한다. 선포되는 말씀이 신앙의 유일한 근거이다. 케뤼그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우리를 만나며 새로운 자기이해를 요구한다. 이 요구에 복종하지 않고 그것의 신빙성 내지 옳고 그름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불신앙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불트만은 역사의 예수 혹은 실사의 예수 (historical Jesus)에 대한 질문은 거부한다. 신앙은 실사의 예수와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케뤼그마와 관계하며, 케뤼그마가 증명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는다는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신앙은 참 신앙으로 증명된다.
복음서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예수는 실사의 예수 혹은 역사의 예수가 아니라 초대 공동체가 신앙하였고 선포한 “신앙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예수의 실사 혹은 역사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서가 선포하는 신앙의 그리스도에 대한 결단이다.
– 불트만 신학의 문제점
1. 불트만은 성서의 메시지를 인간의 실존, 인간의 자기이해로 위축시킨다. 하이댁거의 실존철학으로 말미암아 불트만은 신약성서 메시지의 내용까지 인간 실존의 문제에 제한시키는 오류를 범한다. 그러나 성서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역사의 종말에 올 “새 하늘과 새 땅”을 포괄하는 세계사의 지평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오늘의 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의 존재를 계시하는 동시에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와 평화 속에서 함께 사는 “하나님 나라”, 역사의 미래가 앞당겨 일어나는 사건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불트만은 세계의 “미래에 대한 보편사적 질문을 실존에 대한 질문으로 대치시키며 이리하여 의로운 세계에 대한 신정론의 문제 (Theodizeefrage)를 자기 자신과 일치하는 실존에 대한 동일성의 문제 (Identitaetsfrage)로 대치시킨다.”
2. 불트만에 있어서 “역사”는 현재의 “순간”속으로 폐기된다. 인간이 믿음 속에서 자기의 생명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받는 이 “순간”속에 역사의 의미와 목적이 있다. 바로 이 순간이 “역사의 종말”이다. 이로써 종말론이 가진 세계사적 지평은 개인의 실존이해로 위축되어버린다. 개인의 신앙적 실존이해의 결단을 내리는 사건 곧 완전히 개인적인 일로 되어 버린다(Privatisierung): 피조물의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는 “실존주의적 방구석 장난 (Kammerspiel)”이 되어버린다 (R. Bohren, Ev. Theol. 1962, 83).
3. 불트만에게 있어서 인간의 실존은 모든 사회적, 세계적 관계로부터 추상된 내적 자아를 말한다. 하나님의 창조한 세계, 인간이 그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현실의 물질적 세계에 대하여 볼트만의 신학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몰트만 : “세계에 대한, 역사에 대한, 사회에 대한 관계를 통하여 결정되어 있지 않는 인간의 자기이해란 것이 도대체 생각될 수 있는가? (Th. der Hoffnung, 57).
하나님은 인간의 자아에 대하여 말씀할뿐 아니라 세계를 위하여, 세계에 대하여 행동하며, 세계 속에는 인간 실존뿐 아니라 사회와 국가들과 자연의 세계가 존재하지만, 이 모든 것이 불트만의 신학에 있어서는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아무 의미도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에 대하여 Carl Friedrich von Weizsaecker: 불트만의 신학에 있어서 인간의 실존과 자연이 괴리되어 있다. 인간 실존을 신앙의 영역으로, 자연의 세계를 자연과학의 영역으로 나누는 것은 두 분야에 대하여 너무도 좁은 영역을 할애하는 것이다(Zum Weltbild der Physik, 1963, 263). 따라서 불트만이 말하는 신약성서 신화의 실존론적 해석도 개인의 사적(private) 실존과만 관계되어 있으며 현실의 세계와 그의 미래에 대하여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4. 역사의 예수에 관한 문제: 불트만에 의하면 예수에 관한 신약성서의 자료들 혹은 전승들은 초대 공동체의 신앙과 삶과 선포에 의하여 형성되어 있다. 그것은 실사적 자료가 아니라 신앙의 증언들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실사의 예수를 그의 근거로 삼을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예수가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성 (Dass)과 초대 교회의 선포 곧 말씀을 그의 근거로 가질 뿐이다.
따라서 “실사의 예수” (historical Jesus)와 “케뤼그마의 그리스도” (kerygatic Christ)의 관련성이 불트만에게서는 부인되고 후자는 실사적 근거를 상실한 비역사적 관념 (idea), 무역사적 진리가 될 수 있다. 케뤼그마의 그리스도는 그의 실사적 정체성 (identity)을 상실한, 인간의 주관적 환상 (phantasy)이 될 수 있다. 이를 가리켜 바르트는 “가현설의 무서운 냄새”라고 말한다. 이를 가리켜 “케뤼그마의 탈역사화” (Enthistorisierung des Kerygmas), “가현설의 무서운 냄새”: (바르트)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의 예수”와 “케뤼그마의 그리스도”의 분리는 불트만의 신학이 “방법론적 이원론”으로서 한 편으로 그리스도의 사건을 역사적-비판적으로 연구하여 예수의 오심과 그 존재의 사실성(Faktiitaet)외에는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는다. 다른한편 선포되는 그리스도의 사건을 철저히 종말론적 사건으로, 즉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일으키는 종말론적 사건으로 파악한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활동하였다는 것은 오직 신앙 가운데에서만 인정할 수 있는 “파라독스”이다. 그러나 불트만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 활동은 아무 것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이 파라독스는 “내용이 없는, 공허한 파라독스”이다. 이 공허한 파라독스가 어떻게 신앙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신약성서가 말하는 신앙의 개념을 설명할때 불트만은 철저히 결단과 복종의 면을 강조한다. 그러나 불트만에 있어서 이 결단과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역사의 예수의 부르심이 아니라 인간의 본래성을 말하는 하이덱거 철학의 부르심으로 들린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