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순전한 기독교
C. S. 루이스 / 홍성사 / 2001.6.15
– 20세기 최고의 지성 C.S. 루이스가 쓴 우리 시대 최고의 기독교 변증서
기독교 신앙의 합리성과 도덕성을 명료하면서도 지성적인 필치로 풀어넣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교의 정통적인 가르침이 무엇인지 확연히 다가오는 책이다. 기독교인이라면, 그리고 ‘기독교 교리’가 보편적 수준의 인간에게는 얼마나 불합리한 논리인지 – 자유의지에 대해, 예정설과 이땅의 끝없는 고난에 대해 의문해 본 사람이라면 꼭 한번쯤 읽어야 할 책.
전지전능한 ‘하나님’에 대해 논리적으로 변증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것을 촘촘히 풀어내고 있는 이 C.S 루이스라는 인간에 대해 두 번 놀라게 된다.
○ 목차
1. 옳고 그름, 우주의 의미를 푸는 실마리
인간 본성의 법칙
몇가지 반론
이 법칙의 실재성
이 법칙의 배후에 있는 것
우리의 불안에는 이유가 있다
2.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가?
하나님과 경쟁하는 개념들
하나님의 침공
충격적인 갈림길
완전한 참회
실제적인 결론
3. 그리스도인의 행동
도덕의 세 요소
기본 덕목
사회도덕
도덕과 정신분석
성도덕
그리스도인의 결혼
용서
가장 큰 죄
사랑
소망
믿음(1)
믿음(2)
4. 인격을 넘어서, 또는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첫걸음
만드는 것과 낳는 것
삼위이신 하나님
시간과 시간 너머
좋은 전염
고집센 장난감 병정들
두 가지 부연 설명
가장(假裝)합시다
기독교는 쉬울까, 어려울까?
대가를 계산하기
호감 주는 사람이냐, 새 사람이냐
새 사람
○ 저자소개 : C. S. 루이스 (Clive Staples Lewis, 1898~1963)
1898년 아일랜드 벨파스트 출생으로,1925년부터 1954년까지 옥스퍼드의 모들린 칼리지에서 강의하다가, 1954년 케임브리지의 모들린 칼리지 교수로 부임하여 중세 및 르네상스 문학을 가르쳤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신앙을 버리고 완고한 무신론자가 되었던 루이스는 1929년 회심한 후, 치밀하고도 논리적인 변증과 명료하고 문학적인 문체로 뛰어난 저작들을 남겼다. 1963년 작고했다.
지성적이며 논리적인 신학자로 개신교, 성공회, 로마 가톨릭 등 기독교 교파를 초월한 기독교의 교리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판타지 소설 나니아 연대기로 영국 3대 판타지 소설가로 꼽히는 유명한 작가이다. 그는 확고한 무신론자였다가 로마 가톨릭 신자이자 소설가인 톨킨과 다른 친구들의 영향으로 30세 때인 1929년 성공회 신앙을 받아들여 성공회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서 평생 신앙생활을 하였다.
가까운 친구들 사이에선 “잭 Jack”이라 불린 그의 본명은 클리브 스태플스 루이스 Clive Staples Lewis이다. 1898년 11월 29일 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태어났다. (3년 먼저 태어난 형 워런 Warren은 역사학자였고 그의 평생에 걸친 절친한 친구였다.) 9살 때 어머니 플로라 Flora 여사를 암으로 여읜 루이스는 기숙사가 딸린 학교들 몇 군데를 전전하다가, 커크패트릭 W. T. Kirkpatrick이라는 가정 교사에게로 보내졌는데, 엄격한 이성주의적 무신론자였던 그에게서 엄밀한 논리적 사고 훈련을 받았으며, 본래 성공회 배경을 가졌던 루이스는 이 무렵 확고한 무신론자가 된다.
어린 루이스는 사람을 닮은 동물을 매우 좋아했고, 비트릭 포터 이야기에 빠지기도 했으며, 때로는 자신이 직접 동물 이야기를 상상해서 글로 쓰기도 하였다. 루이스는 형 워니와 함께 동물들이 다스리는 ‘복센 세계’를 창작하기도 했다. 그는 독서를 매우 좋아하였다. 루이스의 아버지 집에는 많은 책들이 있었는데, 루이스가 읽지 않은 책 한권 찾기는 풀밭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 어렵다고 하였다.
루이스가 십대 소년일 때, ‘노던니스 (Northernness)’라는 스칸디나비아 고전 문학의 시나 전설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러한 전설에 대한 관심이 커져서, 루이스는 ‘기쁨 (joy)’이라고까지 표현하였다. 루이스는 자연에 대한 애정도 컸다. 루이스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은 곧 북쪽 (the North) 이야기였고, 북쪽 이야기는 곧 자연의 아름다움이었다. 십대 때 쓴 글은 복센 이야기로부터 멀어졌고, 북유럽 신화나 자연 세상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담은 서사시나 오페라 같은 다른 형식으로 쓰기 시작했다. 루이스는 커크패트릭에게 배우면서 그리스 문학과 신화에 점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논쟁과 추론 능력을 발달시킬 수 있었다.
1916년 옥스포드 대학교의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장학금을 받고, 이듬해 1차 세계대전에 영국군으로 자원입대하였다. 19번째 생일날 프랑스의 섬므 밸리의 최전선에 나가 참호전을 겪었으며, 서머셋 보병 연대 서드 배탈리온에서 장교로 복역하였다. 엉덩이에 영국군 포탄의 파편 조각이 박히는 부상을 입어 요양캠프에서 치료를 받다가 전쟁이 끝나자 다시 옥스퍼드로 돌아와 학업을 계속한다. 루이스는 장교훈련 기간 중 알게 된 패디 Paddy라는 친구가 전사하자, 약속한 대로 그의 어머니 무어 부인 Mrs. Moore을 자신이 평생 보살폈다.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문학과 철학 동아리인 잉클링스의 멤버였던 그는 1923년 옥스퍼드를 세 부문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유니버시티 칼리지 (University College)에서 잠시 철학을 강의했으며, 1925년부터 모들린 대학 (Magdalen College)에서 30여 년간 영어와 문학을 가르친다. 1954년부터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중세와 르네상스 문학 교수로 재직했는데, 이 무렵 『실락원 서문 : A Preface to “Paradise Lost”』 『사랑의 알레고리 : The Allegory of Love』 등 뛰어난 영문학 학술서적들을 여러 권 저술한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접근을 늘 의식하고 있던 루이스는, 1929년 어느 날 밤 마침내 신 앞에 항복하게 된다. 그런데 이 날의 회심은 ‘복음적 신앙’으로의 회심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유신론’으로의 회심이었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931년 어느 가을 밤, 옥스퍼드의 동료 교수이자 가톨릭 신자인 톨킨 J. R. R. Tolkien과 성서와 신화를 주제로 나누었던 긴 대화를 통해 마침내 기독교 신앙의 핵인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믿음에 이르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된 후 루이스는 자신의 소명은 교회 밖 (언저리)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핵심 진리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정 교파에 국한되는 교리가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믿어 온 기독교의 정수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를, 전문 신학 용어가 아닌 현대인의 피부에 와 닿을 수 있는 생생한 언어로 표현해내고자 노력했고, 그러한 분투는 결국 그에게 “회의자를 위한 사도”라는 별명을 안겨준다.
루이스의 삶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루이스보다 열여섯 살 연하였던 조이 (Joy Gresham)이다. 그는 여러 권의 시집과 소설들을 발표한 미국 작가로서, 애초 무신론자이자 마르크스주의자였으나 그의 저술들에서 많은 도움을 받고 기독교로 회심하게 되었다. 시인이며, 재치와 지성미를 갖춘 여인으로,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던 루이스는 58세에 그녀에게 떿국 시민권을 얻게 해주기 위해 조이와 결혼을 한다. 이때 조이는 이미 불치의 골수암에 걸린 상태였음이 뒤늦게 알려지고, 죽음의 신이 연적이 된 상황에서 조이에 대한 루이스의 사랑은 급속히 깊어졌다. 1957년 3월 조이의 병실에서 성공회 (Anglican) 혼인예식에 맞게 결혼식을 올렸으나 4년만에 결국 사별로 끝나고만 이 아름답고 가슴아픈 사랑 이야기는 훗날 연극으로 만들어졌고, 또 그 연극 대본을 기초로 하여 영화 ‘섀도랜드 (Shadowlands)’가 제작된다.
루이스가 아내를 잃은 슬픔을 이기기 위해 일기 형식으로 적었던 글인 『A Grief Observed』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가명으로 출판된다.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했던 같은 날, 루이스는 자택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다.
홍성사가 역간한 루이스의 저작으로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순전한 기독교』, 『고통의 문제』, 『예기치 못한 기쁨』, 『천국과 지옥의 이혼』, 『헤아려 본 슬픔』, 『시편 사색』, 『네 가지 사랑』, 『인간 폐지』,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개인 기도』, 『기적』, 『영광의 무게』, 『루이스가 메리에게』, 『피고석의 하나님』, 『루이스가 나니아의 아이들에게』, 『기독교적 숙고』, 『당신의 벗, 루이스』, 『순례자의 귀향』, 『세상의 마지막 밤』, 『실낙원 서문』, 『오독』, 『침묵의 행성 밖에서』, 『페렐란드라』, 『그 가공할 힘』이 있다.
– 역자 : 장경철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와 장로회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 대학원에서 조직 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며, 일상생활의 깨달음과 감동을 전달하는 것을 큰 즐거움으로 삼고 있다. 스스로를 지식의 유통업자로 부르는 저자는 ‘혼자 알기에 너무 아까운 내용들을 사람들에게 유통하는 것’을 삶의 큰 소명으로 여기고 있다. 저서로는 『장경철 교수의 문화 읽기』, 『책 읽기의 즐거운 혁명』, 『축복을 유통하는 삶』, 『믿는다는 것의 행복』, 『사랑이 가장 아름답다』, 『신학으로의 초대』 외 다수가 있으며, 『하나님 상상하기』, 『기독교 조직 신학 개론』, 『조나단 에드워즈 철학적 신학』 등을 번역하였다.
– 역자 : 이종태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를 졸업하고 장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미국 버클리 GTU(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기독교 영성학으로 철학박사(Ph. D.) 학위를 받았다. 『순전한 기독교』, 『고통의 문제』, 『시편 사색』, 『네 가지 사랑』, 『인간 폐지』(이상 홍성사),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이상 IVP), 『당신은 무엇을 믿는가』(복있는사람) 등 다수의 책을 번역했다.
○ 책 속으로
제가 무신론자였을 때는 ‘인류 대다수는 가장 중요한 문제에 관해 언제나 잘못 생각해 왔다’고 스스로에게 애써 확신시켜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자, 전보다 개방적인 관점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차이를 보이는 부분에서 기독교는 옳고 다른 종교들은 틀렸다고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산수를 할 때 그렇듯이, 맞는 답은 하나이며 나머지는 다 틀린 답입니다. 그러나 틀린 답들 중에도 비교적 정답에 근접한 답이 있는 법입니다.
인류는 가장 먼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다수와 믿지 않는 소수로 크게 나뉠 수 있습니다. 이 기준에서 볼 때 기독교는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 현대의 미개인들, 스토아학파, 플라톤주의자, 힌두교도, 회교도 등과 더불어 다수파에 속하며, 현대 서구 유럽의 유물론자들은 소수파에 속합니다. 이들을 다시 크게 분류해 봅시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하나님을 믿느냐에 따라 한 번 더 나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크게 다른 두 입장이 있지요. 그 중에 하나는 하나님을 선악의 구분 너머에 있는 존재로 보는 입장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어떤 것은 선하다고 하고 어떤 것은 악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입장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적인 관점에 불과합니다. 즉 인간은 현명해질수록 사물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지 않게 되며, 모든 것은 어떤 점에서는 선하고 어떤 점에서는 악하다는 사실과 그 어떤 것도 서로 다를 수 없다는 사실을 더 밝히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우리가 신적 관점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면 이런 구분들은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암이 사람을 죽이므로 악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훌륭한 의사도 암을 죽이므로 악하다고 해야 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은 관점에 달린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또 하나의 생각은, 하나님의 분명히 ‘선한’ 존재 내지는 ‘의로운’ 존재로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가지고 있으며, 사랑을 사랑하고 미움을 미워하며, 우리가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원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앞서의 관점 – 하나님을 선악의 구분 너머의 존재로 보는 관점 – 을 우리는 ‘범신론 (Pantheism)’이라고 부릅니다. 제가 이해하는 대로라면 프로이센 사람인 위대한 철학자 헤겔 (G.W.Friedrich Hegel)과 힌두교도들이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다른 관점을 가진 이들은 유대인과 회교도와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범신론과 그리스도인의 고나점 사이에는 이런 큰 차이 외에 한 가지 차이가 더 있습니다. 대개 범신론자는 인간이 제 몸을 움직이듯이 우주를 움직이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즉 우주 자체를 하나님과 거의 동일시하면서, 우주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하나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우주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의 일부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개념은 전혀 다릅니다. 그들은 사람이 그림을 그리고 작곡을 하듯이 하나님이 우주를 창안하고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화가와 그림은 별개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림이 파괴되어도 화가는 죽지 않습니다. “화가가 그림 속에 자신을 쏟아 부었다”고 말할 수 는 있지만, 그것은 그 그림의 아름다움과 감흥이 모두 화가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뜻에 지나지 않습니다. 화가의 기교는 원래 그의 머리에 있는 것으로서 간혹 “그 손에 있다”고 표현할 수는 있어도 “그 그림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 p 69~72
사실 실재란 대개 여러분이 짐작할 수 없는 어떤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기독교를 믿는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기독교는 여러분이 짐작할 수 없는 종교입니다. 만일 기독교가 우리가 늘 예상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우주를 제시한다면, 저는 기독교를 인간이 만들어 낸 종교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기독교는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부류의 것이 아닙니다. 실재하는 것들이 다 그렇듯이 기독교에도 우리의 예상과 맞지 않는 기묘한 비틀림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미숙한 철학들-지나치게 단순한 답들-은 다 제쳐두기로 합시다. 문제 자체가 단순하지 않고, 따라서 답 또한 단순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문제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 우주에는 분명히 나쁜 것들과 명백히 무의미한 것들이 많이 존재하지만, 동시에 우리 인간들처럼 그것이 나쁘고 무의미하다는 점을 아는 생물도 존재합니다. 이 모든 사실들을 정면으로 다루는 관점은 단 두 가지뿐입니다. 하나는 기독교적 관점으로서, 세상은 원래 좋았는데 나빠졌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야 할 원래 모습의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또 다른 관점은 ‘이원론 (Dualism)’이라는 것입니다. 이원론은 모든 것의 배후에 선과 악이라는 두 개의 동등하며 독립적인 힘이 있으며, 우주는 그 두 힘이 끝없이 싸우는 전쟁터라고 믿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나온 이론 중에서는 이 이원론이 기독교 다음으로 가장 남성적이고 분별력 있는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하나 있습니다.
이원론이 따르면 그 두 힘 내지는 두 영(靈), 또는 두 신- 하나는 선하고 하나는 악한-은 아주 독립적인 존재입니다. 그 두 힘은 모두 영원 전부터 존재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만든 것도 아니고, 하나님으로 자처할 수 있는 권리를 더 가진 것도 아닙니다. 아마 두 힘은 각각 자기가 선하며 상대방이 악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둘 중에 하나는 미움과 잔인성을 좋아하고 다른 하나는 사랑과 자비를 좋아하는데, 두 힘 모두 자기가 선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체 어떤 뜻에서 하나는 ‘선한 힘’이라고 부르고 하나는 ‘악한 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까?
단순히 어쩌다 보니 하나를 다른 것보다 더 좋아하게 되었다는 – 사과주보다 맥주를 더 좋아하듯이-뜻에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든지, 아니면 그 두 힘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상관없이, 두 힘 가운데 하나가 스스로 선하게 여기는 것은 사실상 틀린 생각이고 잘못된 생각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만일 어쩌다 보니 선한 힘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는 뜻에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라면, 선과 악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선이란 ‘어쩌다 보니 그 순간에 더 좋아하게 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더 좋아해야만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선하다’는 것이 단지 별 이유없이 마음이 끌리는 편에 합세하는 것을 뜻한다면, 그 때의 선은 선이라고 불릴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를 ‘선하다’고 부르고 다른 하나를 ‘악하다’고 부르는 데에는, 두 힘 가운데 하나는 실제로 그르며 하나는 실제로 옳다는 뜻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는 순간, 이 두 힘을 제외한 제3의 존재, 즉 두 힘 중에 하나는 거기에 부합되지만 다른 하나는 부합되지 않는 어떤 법칙 내지는 기준, 또는 규칙을 우주에 끌어들이는 셈이 됩니다. 이처럼 그 기준에 따라 두 힘을 판단하게 되는 것을 볼 때, 그 기준 내지 그 기준을 만든 ‘존재’는 그 두 힘보다 더 오래 전부터 있었을 것이고, 더 높은 곳에 있을 것이며, 그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일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를 선하다고 부르고 다른 하나를 악하다고 부르는 것은, 사실상 하나는 진정한 궁극적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그릇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인 것입니다. (…)
그러나 하나님을 시간의 흐름 밖, 그 위에 계신 분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그는 우리가 ‘내일’이라고 부르는 날도 ‘오늘’처럼 보실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모든 날이 ‘지금’입니다. 그는 여러분이 어제한 일을 기억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보고 계십니다. — p.264
○ 출판사 서평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이자 영문학자였던 C. S. 루이스의 저작을 ‘변증’, ‘소설’, ‘고백’, ‘에세이’, ‘산문 및 서간’ 총 다섯 갈래로 나누어 루이스 사상의 전모를 보다 직관적으로 파악하도록 돕습니다.
변증 _ 《순전한 기독교》《고통의 문제》 《기적》《인간 폐지》등
소설 _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천국과 지옥의 이혼》《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순례자의 귀향》《침묵의 행성 밖에서》《페렐란드라》《그 가공할 힘》등
고백 _ 《예기치 못한 기쁨》《헤아려 본 슬픔》
에세이 _ 《세상의 마지막 밤》《영광의 무게》《기독교적 숙고》《피고석의 하나님》《오독》《실낙원 서문》등
산문 및 서간 _ 《시편 사색》《네 가지 사랑》 《개인 기도》《당신의 벗, 루이스》《루이스가 나니아의 아이들에게》등이 있다.
○ 독자의 평 1
순전한 기독교 C.S. 루이스 지음 (서울: 홍성사)
다시금 곱씹어보기 위해 읽게 된 책은 어느새 개정판으로 변화되어 있었다. 처음 읽었던 그 느낌과 지금의 나에게는 어떤 다름으로 다가올까. ‘신앙의 순전함’과 ‘Mere’라는 단어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기독교를 어렵게 생각한다면 복잡다단하지만 간단히 생각한다면 예수님 하나만 남는다고 생각하였던 나에게 어떤 질문을 던져주는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라디오를 통해서 대중을 대상으로 강연했던 내용을 1950년대에 3권의 책으로 출판했던 내용을 묶은 것이며, 대화의 형태에서 글의 형태로 문체의 변화가 이루어진 녀석이다.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다.
1부 옳고 그름, 우주의 의미를 푸는 실마리
2부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가
3부 그리스도인의 행동
4부 인격을 넘어서, 또는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첫걸음
먼저, 1부에서는 인간 본성의 법칙, 도덕률과 자연법을 다루며 2부에서는 종교에 대해서 특별히, 범신론과 이신론을 비교 대상으로 선택하여 이와 다른 기독교를 들여다본다. 3부에서는 도덕의 세 요소(사회적, 개인적, 보편적)를 기준으로 살펴보며 조금 더 나아가서 기독교의 덕목을 일곱 가지로 다룬다(네 가지 기본 덕목: 분별력, 절제, 정의, 꿋꿋함; 세 가지 신학적 덕목: 믿음, 소망, 사랑). 4부에서는 bios와 zoe라는 헬라어를 통해서 생명에 대한 차이를 다루며 삼위일체에 대한 저자만의 비유(예: 양철 장난감 인형, 1차원부터 3차원까지의 이해 등)로 설명을 더한다.
벌써 반세기 이상이 지난 책이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던져주는 함의는 새롭다. 또한, 인간 사회의 발전에 의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는 삶에게 주어지는 질문을 보게 된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발견하는 것은 앞으로 몇 번의 세기가 더 흘러가도 변함없는 방식이지 않을까. 스스로 찾아가서 만나야 하는 것이 아닐까.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일반인들이 바라보기에 그리스도인이라면 달라진 삶의 모습을 보여야 하고 무언가 따라야 할 만한 매력적인 모습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말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가난한 자를 위해 오신 예수님의 모습과 이를 싫어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도 그려낸다. 과연 나는 예수님이 필요한 존재일지 혹은 바리새인과 같은 모습일지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 회개는 장난삼아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100~101p
결국,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은 진심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처럼, 중심과 말이 상이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행위라고까지 해석할 수 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과 지금 우리 옆에 계신 성령님까지 믿는 것이기에 그렇다.
다시금 순전한 기독교를 생각해 본다. 처음 읽게 되었던 그때보다 더 신앙심과 지식이 쌓여졌는지, 아니면 그대로인지 혹은 더 부족한 모습이 되었는지. 그리고 기도하게 된다. “부족한 저를 주님의 손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주님의 가벼운 멍에를 짊어지고 갈 수 있도록 이 책을 읽어보시는 것은 어떠할지 권해 드린다.
○ 독자의 평 2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
기독교에 대해 논리적으로 접근한다.
신이 있는가.
유일신인가 다신교인가.
왜 기독교인가.
기독교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삼위 일체에 대한 해석까지.
개인적으론 매우 인상깊게 읽었고 이과출신 기독교인에겐 필독서가 되는게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근데. 읽을때엔 고개를 끄덕이는데 책을 덮자 기억 나는게 많지 않다.
논리로 지식으로 아는 기독교의 한계인것 같다.
다시 읽어봐야할듯.
그래서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이기도 한듯.
체험과 지식이, 논리와 은혜가 함께할때 더 풍성한 신앙생활이 되리라.
그리고 우리는 교만하지 않아야 한다.
나에겐 이 책에서 가장 크게 다가왔다.
교만은 악중의 악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