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스탕달의 이탈리아 미술 편력
스탕달 / 이마고 / 2002.4.25
– 스탕달이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과 자신의 예술론에 대해 쓴 독특한 예술 입문서
이 책은 그가 ‘자신만의 예술 입문서’를 써 보겠다는 목표로 떠난 이탈리아 기행에서 접한 미켈란젤로, 다빈치, 고대의 거장들의 작품에 대한 자유분방한 사고의 궤적이다. 멋진 예술 작품을 보고 잠시 정신착란 상태에 빠지는 심리 현상을 ‘스탕달 신드롬’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스탕달은 예술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남달랐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판단하는 기준은 철저히 감정 중심, 관찰자 중심이었기에, 다빈치, 미켈란젤로, 조토 등 르네상스의 거장에 대한 해석도 정형화된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스탕달의 처녀작으로서 이 책은 고대 그리스 미술의 이상미를 모범으로 하는 당대 주류 미학에 대한 반기, 아름다움과 예술작품에 대한 자유분방한 사고와 글쓰기로 1817년 출간 당시부터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20세기 중반까지도 많은 전문가들이 판단을 보류한 채 주변적인 언급에 그쳤다.
그러나 자유분방한 문장 속에 녹아 있는 ‘미적 현대성’ ‘근대적 이상미’에 대한 시각과, 이탈리아 회화사에 대한 해석 속에 담겨 있는 자기 성찰과 분석은 이 책을 스탕달 문학의 시원이자 매우 독창적인 예술 입문서로서 재평가 받게 했다.
자신만의 시각으로 예술 작품을 보길 원하는 독자, 배경 지식이나 사회적 통념에 묶이지 않고 자유롭게 예술 작품을 평가하길 원하는 독자들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입문서이다. 책 말미의 ’50시간 미술 감상 학습법’도 신선하다.

○ 목차
‘스탕달의 이탈리아 미술 편력’을 펴내며
옮긴이의 글 | 프랑스 문학의 거장 스탕달이 쓴 독특한 예술 입문서
서문 | 위대한 예술을 꽃피운 이탈리아의 풍요로운 세기
제1부 | 르네상스의 화가들
르네상스의 기반을 닦은 예술가들
회화의 완성, 조토에서 다 빈치까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삶과 예술
미켈란젤로의 삶과 예술
제2부 | 스탕달의 예술론
고대 예술의 탄생에 대하여
고대의 이상적 아름다움에 대하여
근대의 이상적 아름다움에 대하여
에필로그 | 50시간 미술 감상 학습법
스탕달 연보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조각가,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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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소개 : 스탕달 (Stendhal, 1783 ~ 1842)
본명은 마리 앙리 벨 (Marie Henri Beyle). 프랑스의 그르노블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곱 살 때 어머니를 잃고 인문주의자이자 계몽주의자인 외할아버지에게서 교양과 계몽사상의 가르침을 받았다. 혁명정부가 설립한 그르노블 중앙학교에 다니면서 미술의 세계에 눈을 떴고, 후에 나폴레옹 박물관에서 세계의 걸작들과 함께 지내면서 미술에 대한 지식과 심미안을 심화시켰다. 파리의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1800년 육군에 들어가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군을 따라 밀라노에 입성했던 그는 1811년에 다시 이탈리아로 향했다. 찬란한 예술을 꽃피웠던 나라를 제대로 보고 느끼고 알기 위해서였다. 이때부터 《스탕달의 이탈리아 미술 편력 Histoire de la peinture en Italie》을 쓰기 시작했으나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때 원고를 잃어버리게 되고, 1814년 이탈리아에서 이 원고를 다시 쓰기 시작해 1817년에 출간했다. 1821년 그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 마틸드와 헤어지고 프랑스 정부의 스파이 혐의를 받는 등 실의에 빠진 채 파리로 돌아와 《연애론 De l’amour》 (1822년)을 출간하면서 본격적인 문필활동을 시작했다. 《라신과 셰익스피어 Racine et Shakespeare》(1823 ~ 1825년)로 낭만주의 운동의 대변자가 되었고, 1827년 최초의 소설 《아르망스 Armance》를 발표했다. 그리고 1830년에는 실재의 재판사건에서 힌트를 얻은 불후의 명작 장편 《적과 흑 Le Rouge et le Noir》을 출간했다. 1831년 로마 근교의 치비타베키아 (Civitavecchia)의 영사가 된 후 죽을 때까지 그 직위에 있으면서 《에고티즘의 회상 Souvenirs d’ gotisme》 (사후 1892년 출판), 미완의 장편 《뤼시앙 뢰방 Lucien Leuwen》 (사후 1894년 출판) 등을 집필했고, 1839년에는 제2의 걸작 장편소설로 손꼽히는 《파르므의 수도원 La Chartreuse de Parme》을 출간했다. 관절염과 신경성 뇌졸중에 시달리다가 1842년 요양을 위해 돌아온 파리에서 59세의 나이로 거리에 쓰러져 세상을 떠났으며, 발자크와 함께 19세기 프랑스 문학의 2대 거장으로 평가된다.

○ 책 속으로
피렌체파의 특징을 알고 싶다면 피렌체에 도착하는 즉시 산로렌초 광장으로 달려가보라. 그리고 산로렌초 성당을 마주하고 서서 오른쪽에 있는 부조를 자세히 뜯어보라. 여행자가 볼로냐를 둘러본 후에야 피렌체를 찾는다면, 위대한 화가들을 줄지어 배출했지만 피렌체에게는 악몽 같은 여행 일정이 될 것이다. 구이도 레니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서 살비아티, 치골리, 폰토르모 등의 얼굴에 어찌 감동할 수 있겠는가? 피렌체파의 명예를 지키려 안간힘을 다했던 바사리에게 속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의 영웅들이 멋진 그림을 그리고 강렬하고 두드러진 색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색에서는 어떤 조화나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가 없다. 베르테르가 그들의 그림을 보았다면 아마도 “나는 사람의 손을 찾고 있었는데 기껏 잡은 손이 나무로 만든 것이로구나.”라고 한탄했을 것이다. 물론 특출하게 뛰어난 두세 명의 천재는 이러한 한탄에서 당연히 제외되어야 한다.—pp. 144~145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갖는다. 미술 평론가들이 냉정한 지성으로 설명한 방법대로 그림을 읽을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내면의 감성대로 그림을 감상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이런 의문에서 피카소의 <기타와 바이올린>과 <테이블 위의 기타>를 꼼꼼이 뜯어보자. 두 작품을 처음 대하는 사람은 그림의 위아래를 구분하기가 힘들다. 그래도 평론가들은 능수능란하게 두 작품에서 피카소의 정신세계를 읽어내고 설명한다. 그런데 그 그림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평론가들에게 위와 아래를 구분해보라 한다면 몇 명이나 그것을 정확히 구분해낼 수 있을까? 내 생각에는 모든 평론가가 정확히 지적해내지는 못할 것 같다. 그리고 기호학적 분석에 따르면 그림의 위아래가 뒤집혔을 때는 그 해석도 당연히 달라지게 마련이다. 물론 이것은 평론의 무용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예술품을 감상할 때는 냉정한 지성을 앞세운 평론보다 관찰자의 감성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스탕달도 똑같은 결론에서 출발했다. “누군가가 위대한 대가의 그림을 찬양할 때마다 나는 ‘내가 그 그림을 길에서 우연히 보게 되더라도 역시나 그 그림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을까?’라고 반문해보았다!”라고 스탕달은 말한다. 그러면 아무런 편견 없이 위대한 대가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그림을 올바르게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pp. 25~26 옮긴이의 글
베네치아파는 자연에 대한 주의깊은 관찰, 그리고 우리 눈길을 자연스럽게 사로잡는 그림들을 거의 기계적으로 모방함으로써 태어난 화파인 듯하다.
그러나 피렌체파의 두번째 빛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는 왜 그렇게 그려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연구한 결과를 그림으로 표현해냈다. 그들의 그림은 후손들에게 일종의 계율이 되었다. 그들의 후계자들은 자연에 대한 정확한 관찰보다 스승이 남긴 계율을 더 소중히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것은 사실적 현상을 정확하게 관찰하는 데 있다.”는 레오나르도의 생각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었다.
이처럼 레오나르도의 계율에 담긴 뜻을 제대로 이해해서 자연을 정확히 관찰하려 하지 않고 계율 자체에 얽매인 까닭에 후세의 화가들은 레오나르도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현시킬 수 없었다. 그 결과로 바사리와 그 도당은 대가의 결함을 과장되게 떠벌리면서 몹쓸 짓을 저질렀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교훈을 배우게 된다. 뛰어난 인물의 재능에 대해 피상적으로 아는 것보다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깊이 아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달리 말한다면, 요즘 세상에서는 깊은 지식보다 끈질긴 인내심이 더 필요하다. —p. 148
다른 사람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보다는 차라리 세상의 어떤 것도 보지 않는 편이 더 낫다. 눈에 보이는 그림은 사라질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평생 아카데미에 충성하는 불쌍한 앵무새가 되어 살롱에서 지독한 권태와 씨름해야 할 것이다. 가령 예술에 관련된 모든 책에서 이구동성으로 말하기 때문에 미켈란젤로가 위대한 데생 화가였다고 믿어버리는 고약한 습관에 물들어버린다면,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자기 생각을 논리적으로 설명해볼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며 그 결과 새로운 생각을 해내는 창의성마저 상실하게 될 것이다—p. 535

○ 출판사 서평
1) 당대의 미술 평단을 지배했던 바사리의 관점에 반기를 든 스탕달
스탕달이 이 책을 쓰던 때인 19세기 초에도 ‘이탈리아 미술가 열전’을 쓴 바사리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이 여전히 그 시대를 주도하고 있었다. 바사리는 고대 그리스ㆍ로마 미술을 기준으로 발전과 퇴보의 개념에서 미를 평가했으며 그 미의 완벽한 기준은 자연의 모방이었다. 그러나 스탕달은 이러한 바사리의 생각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바사리가 살던 15세기의 이상적 아름다움이 19세기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보면 스탕달이 바사리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가령, “우리 시대의 뛰어난 화가들이 역사를 읽는다면 바사리 이후 산티 디 티토(Santi di Tito)까지의 후예들이 정해놓은 화가의 위치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고대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까닭에 미켈란젤로를 최고라 생각했다.”거나 “실제로 ‘다윗’이 완성되고 나자 당대의 조각은 물론이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까지도 그 명성을 잃어갔다 … 그처럼 아름다운 윤곽의 다리 선을 본 적이 없었다.”라는 바사리의 ‘다윗’에 대한 평가에 대해 스탕달은 “내 생각에 ‘다윗’은 아주 평범한 작품일 뿐이다. 특히 다리는 답답해 보일 정도이다.”라고 딱 잘라 말한다.
이러한 주장 때문에도 이 책은 당시의 평론가들에게 환영받을 수가 없었다. 스탕달에게 잘못이 있었다면 그가 너무 앞서갔다는 것이었다. 그 후 19세기 중반이 되어 스탕달이 말했던 근대의 이상적 아름다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미적 현대성’의 시작이었다. 보편적인 영원한 아름다움과 동시에 당대의 순간적인, 혹은 변화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서사시적 아름다움은 고대의 이상적인 신화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넥타이, 구두, 옷, 심지어 표정이나 몸짓 등등에 이르기까지 도처에 들어 있다. 그것을 놓친다면 우리는 화석화된 한쪽만의 아름다움만을 보게 될 뿐인 것이다.
이러한 스탕달의 선구적인 시각에 힘입어 이후 보들레르로 이어지는 새로운 미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2) 스탕달 최초의 저작이다
1811년 28세의 스탕달은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다. 그르노블 중앙학교와 나폴레옹 박물관에서 미술에 대한 지식과 심미안을 쌓은 그는 예술의 르네상스를 일구어낸 이탈리아에서 직접 위대한 화가들의 작품을 제대로 읽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와 미술관을 돌아보면서 입문서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바사리, 란치 등의 이탈리아 미술 관련 책들을 읽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마침내는 자신이 직접 예술 입문서를 쓰기로 하고 실행에 옮겼다. 1811년 12월 14일부터 원고를 쓰기 시작해서 첫 원고가 완성된 1812년에 스탕달은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대에 전령직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그는 틈나는 대로 원고를 수정할 생각으로 그 소중한 원고를 가지고 러시아 원정에 참가했다. 그러나 나폴레옹군은 처참하게 패배했고 서둘러 후퇴하는 와중에 그는 그 원고가 들어 있는 가방을 카자크족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에게는 원고가 쓰인 12권의 노트 중 마지막 권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나폴레옹군의 패배가 그에게 안겨준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원고의 손실에 따른 절망에도 불구하고 다시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이때 틈틈이’하이든, 모차르트, 메타스타시오전(傳)'(1815년 출간)을 썼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스탕달의 이탈리아 미술 편력'(1817년 출간)은 출간은 비록 이 책보다 2년 늦게 되었지만 스탕달이 쓴 최초의 작품인 것이다.
3) 스탕달 글쓰기의 모든 것이 이 책에서 시작되었다
스탕달 문학의 중요한 경향인 에고티즘(egotism)이 스탕달 최초의 저작인 이 책 ‘스탕달의 이탈리아 미술 편력’에서 이미 싹트고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은 스탕달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책으로 꼽힌다. 에고티즘은 자기 성찰과 분석을 중요시하는 문학적 경향으로 스탕달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탕달이 이 책에서 목표로 한 것은 단순한 이탈리아 회화사의 정리가 아닌 미술에 대한 스탕달 자신의 성찰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미술 평론가들이 말한 것을 그대로 정리해서 옮기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가감없이 그대로 드러낸다.
…………
“누군가가 위대한 대가의 그림을 찬양할 때마다 나는 ‘내가 그 그림을 길에서 우연히 보게 되더라도 역시나 그 그림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을까?’라고 반문해보았다.”
스탕달은 이러한 의문에서 이 책 ‘스탕달의 이탈리아 미술 편력’을 쓰게 되었다. 회화의 궁극적인 목표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생각한 스탕달은 관찰자의 느낌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이 책에서 이렇게 보아야 한다, 저렇게 보아야 한다, 라고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자신의 눈에 비친 대로 미술작품을 보면서 느낀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한다. 그래서 미켈란젤로의 ‘다윗’ 상을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평가했던 바사리의 견해에 반기를 들고 “내 생각에 ‘다윗’은 아주 평범한 작품일 뿐이다. 특히 다리는 답답해 보일 정도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고, 피렌체파 회화의 창시자로 추앙받던 조토의 그림이 어색하다고도 감히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스탕달은 이 책에서 단순히 미술작품만을 보지 않고 그 작품이 창작된 당시의 정치상황에 주목한다. 이것은 스탕달 고유의 접근법으로, 특히 이 책의 서문은 사회구조와 예술의 발달 사이의 밀접한 관계에 대한 그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 영향을 끼친 단테의 ‘신곡’을 이야기하며 미술작품과 문학의 세계를 결부시키고, 더 나아가 자신이 살고 있는 프랑스의 예술과 정치상황과도 비교 분석한다.
그는 항상 과거의 미술작품을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과거에서 현재를 읽어내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예술에 대해서 그들에게 낯선 방식으로 말한다고 투덜댈 것이다. 그럼 나는 내 생각을 그대로 말할 뿐이며 내 시대를 살았던 대로 말할 뿐이라고 대답해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전통적 글쓰기 규범에서 벗어난 스탕달의 이 책은 평론가들이 공격하기에 안성맞춤이었지만, 스탕달은 시공간을 초월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마음껏 써내려갔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